해설 엿보기
물구라는 나무(여우난골)
김수상
경북 의성에서 태어나 2013년 《시와표현》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사랑의 뼈들』, 『편향의 곧은 나무』, 『다친 새는 어디로 갔나』가 있으며 박영근작품상을 수상했다.
김수상金秀相의 시들에서는 시인이 고스란히 배어 나온다. 시인의 삶의 형편과 내밀한 감정들이 그의 시편들에 편편히 새겨져 있다. 그의 시들을 따라 읽어가다 보면 그와 오랫동안 동행한듯한 느낌이 든다. 40대 후반에 등단하여 십 년이 넘는 기간동안, 이번 시집을 포함하여 모두 네 권의 시집 240여 편의 시들을 창작하였으니 적잖은 작품인데, 그 시편들에서 시인의 삶의 편린과 촘촘하게 빛나는 정념들을 마주하게 되니 마치 한 영혼의 자서전을 읽은 듯 하다. 김수상에게 시는 슬픔을 견디고 삶을 살아내게 하는 힘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삶의 쓰나미들이 덮쳐오고 격한 정념을 치를 때면 그는 조촐한 공간에서 울분과 자괴와 환멸의 감정들을 복기하며 이들을 시의 언어로써 안쳤을 것이다.
십 년도 더 지났는데 자꾸 생각나다/형편이 어려워질 때마다 수정동 고관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밥벌이 때문에 가기 싫어도 할 수 없이 내려간 부산/매트리스 하나 겨우 들어가는 여인숙을 개조한 달셋방/나 같은 사내들이 혼자 사는 곳/맞은편 초량의 산복도로엔 벚꽃이 한창이었다/두고 온 어린아이들 생각에/물에 맨 밥을 말아 먹어도 목이 막혔다/상조회사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면/건너편 초량의 산꼭대기 집들의 불빛을 부러워했다/피어나는 산벚의 분홍구름 떼/꿈인 듯 생시인 듯 그때는 담배를 참 많이도 피워댔다/인생은 괴롭다는데 나도 빨리 구름처럼 사라지고 싶었지/순서를 기다리던 공동 세탁기/그래도 옥상에 널린 사내들의 빨래는 깨끗하였다/초량에는 돼지갈비 골목이 있고/찌그러진 냄비에 끓여주는 감자탕 집도 있었다/고관에는 오래된 목욕탕 굴뚝만 아득히 높았고/고관(高官)도 대작(大爵)도 볼 수 없었다/흘러가는 흰 구름, 흘러가는 산벚의 연분홍 구름들,/흘러가는 초량의 백빽한 가난들,/고관의 달셋방 옥상에서 바라본 초량의 산복도로 산벚은/불에 덴 자국처럼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다시 가난해질 때마다 나는 고관의 달셋방 옥상을 생각한다/나빠지려고 할 때마다 고관 옥상의 흰 빨래를 생각하는 것이다
-「고관(高官)」 전문
부산 초량에 있는 고관마을에서 일했던 경험이 담긴 위의 시는 이번 시집에 실려 있지만 경험 내용으로 보면 첫 번째 시집에 수록되어야 할 작품이다. “여인숙을 개조한 달셋방”에서 혼자 지내며 가족의 생계를 위해 적막한 노동을 하던 시절의 풍경을 꼼꼼하게 형상화한 이 작품은, 이 무렵의 시편들과는 달리 자신의 형편을 소상하게 그리고 있다. 상황에 대한 상세한 형상화만으로도 시인이 겪었을 신산한 마음을 핍진하게 전달하고 있는 시는 끝에 몰린 한 시절의 처지와 내면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시간적 거리감이 언어적 간명함의 한 이유이기도 하겠지만. 김수상의 시에는 현실적 궁핍함이 시의 언어로 고스란히 옮겨 앉는 법은 별로 없다. 그의 시는 기본적으로 일상적 삶의 결여를 시적 자양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시인과 작품을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으며, 이와 같은 성격은 적어도 이번 시집에까지 두루 이어지는 특징이다.
당당의 대표적 문장가인 한유韓愈는 좋은 문장이란 기려초야羈旅草野에서 비롯된 궁고수사窮苦愁思에 있음을 강조한 바 있고, 아는 한시의 오랜 시학적 관점인 ‘시는 궁해진 뒤에 더 좋아진다’詩窮而後工는 생각으로 자리 잡았다. 결핍과 절실함이 문장의 좋은 자양이 된다는 것이다. 김수상의 작품은 이러한 시학적 관점에 부합 하는 세계이다. 그의 시는 현실적 삶의 곤궁困窮에서 발원하며, 이는 10여 년 동안의 그의 시 세계를 가로지르는 기본적인 자질이다. 그러나 시가 결핍과 결여의 소산이라는 것은 문학원론에서도 기술될 만큼 보편적이라는 점에서, 곤궁을 개별 시인의 시적 특징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시궁이후공詩窮而後工과 대척점에 놓인 전통 시학의 또 하나의 관점 즉 ‘시가 능히 사람을 궁하게 한다’는 시능궁인詩能窮人의 시학적 관점이 필요한 이유이다. 이 둘은 시에 대한 상반된 관점으로 다루어지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긴밀히 연관 지어 논의되기도 하였다.
-김문주(문학평론가) 시집해설 「구원으로서의 시 쓰기와 포월包越의 시학」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