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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장 찍으러 와야지
전국에 비가 내리는 초하루, 문수선원에는 군데군데 비어있는 자리가 많았다.
<자비도량 참법><인공지능, 붓다를 꿈꾸다> 라는 책과 <혜인스님 법문씨디> 어느 스님이 토요일에 오셔서 맡기고 가셨다는 <커피 한 상자> 책상 위에 선물이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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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큰스님을 제일 기쁘게 한 손님은 문수경전연구회 법회를 열면서 지금까지 화엄법회 때마다 꼬박 자원봉사를 나오시는 혜일성보살님의 손자다. 복숭아처럼 잘생긴 얼굴에 보송보송한 웃음을 짓고서 도현은 노랗고 빨간색의 로봇 장난감과 함께 왔다. 큰스님이 선원에 들어오시자 마자 달려나와서 그 자리에서 절을 올렸다. 격식에 맞게 귀로 번쩍 들어올린 두 손이 앙증맞았다. 큰스님이 몹시 기뻐하시면서
“오 왔어? 너 이담에 스님이 되어야 한다. 할머니는 듣기 싫어해도 할 수 없지.”
하시고 커다란 손으로 합장하시고 도현의 손을 꼭 잡고, 작은 어깨에도 살짝 손을 올려주셨다.
스님들과 이야기 나누시면서도 도현이 한손으로 쑥 내미는 초콜렛도 무심하게 받아 드시고, 꼭 안아 주시고 지갑을 열어 용돈을 주시면서
“너 장학금은 내가 다 줄게.” 하셨다.
도현이 웃으며 줄행랑을 쳐서 할머니에게로 가는 것을 보시고
“법문할 때 쌔근쌔근 잘 자던 아기가 벌써 많이 컸다. 도현, 꼭 불명 같다 그치?” 하고 큰스님이 함빡 웃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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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고 안개가 많이 껴서 어떻게 해? 내려오기 힘들지 않았어?”
하고 큰스님이 해인사에서 오신 비구니스님을 반가와 하셨다.
“도장 찍으러 왔습니다.” 하시자 큰스님은
“도장 찍으러 와야지.” 하시면서
“오늘 마침 초하룬데 왔네. 오는 사람은 온다니까. 초하루라도 화엄법회 무조건 해야 돼. 오늘 와가지고 커피도 있고 책도 있고 복이 많아. 진관사는 안가나?”하고 물으셨다.
하루 전 서울 진관사의 회주스님인 진관스님이 입적하셨다고 했다. 비구니스님들이 그곳으로 많이 가셨을 거라고 보살님이 이야기 해주셨다.
“내일 아침 6시 20분차 표 끊어놨습니다. 오늘은 여기 와야 하니까.”
“그렇지 오늘은 여기 와야지.”
“우리 은사스님 노스님 때 오셔서 가서 뵙기는 해야 돼요. 품앗이니까요.”
“그렇지. 난 혜인스님 영결식에 갔었어.”
“네 스님 뵀어요. 분향하러 가시는거. 너무 아까와요. 그런 분들 오래오래 계시면 좋은데. 해인사에서 저 어릴 때 엄청 이뻐했는데. 그 스님이 연세가 적어서 출가하셔서, 우리는 어리고 그 스님은 총각이고.”
하셔서 눈물 글썽하게 듣다가 반사적으로 웃음이 나왔는데
“맞지 뭐 맞는 말이야. 총각이고 처녀고.”
하고 큰스님은 웃지 않고 말씀하셨다.
지난 6월 23일 입적하신 은해사 조실스님이 큰스님 도반스님이냐고 여쭙자 “응, 속가 나이도 나랑 같아.” 하셨다. 집에 돌아와 찾아보니 은해사 조실 혜인스님은 제주도 약천사를 창건하신 회주스님이기도 하셨다. 염화실 영상일기방에서 찾아보니 2012년 문수경전연구회 스님들이 제주순례를 갔을 때 활달하신 모습으로 큰스님을 반갑게 맞이하시는 혜인스님이 사진으로 계셨다.
큰스님께서 불사를 엄청 잘하시는 스님이라고 소개해 주셨던 것이 생각났다.
<이 큰 절 약천사를 창건해서 멋지게 완성하신 혜인스님은 항상 바쁘시고, 이 날도 아침에 시내 볼일이 있으셨다고 해요. 마침 큰스님을 뵈었는데 몹시 반가와 하셨어요. "약천사 생긴 이래 최대 경사"라고 하셨어요. 그리고 나중에 문수경전연구회에서 공부하시는 스님 전체를 초대하겠다고까지 말씀하셨어요>라는 덧글도 적어놓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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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학스님과 함께 범어사 대교과 학인스님들이 단체로 오셨다.
“오늘 법공양이 상당히 많은데 잘 맞춰서 왔네. 커피도 한통씩 가져가고 좋은 자리에 앉아요.범어사 학인들 교재 좀 챙겨주라고 해.” 하고 큰스님께서 말씀하셨다.
이윽고 상강례
법회의 시작
대방광불화엄경 강설이 어느새 스물여덟 번째 권이 나왔다. 서문을 한 번 읽는 것으로 점안식을 대신하겠다.
서문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세상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화엄경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이 화엄경 한 구절 한 구절마다에 출현하셨습니다.
여래께서 이 화엄경 한 글자 한 글자마다에 출현하셨습니다.
부처님의 법[佛敎]은 베푸는 일이고, 나누는 일이고, 보시하는 일이고, 회향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무엇을 나누어 보시하면 가장 수승한 보시가 되겠습니까? 무엇을 나누어 보시하면 가장 훌륭한 공덕의 과보를 얻겠습니까?
여래께서 세상에 출연하셨음을 알리는 일입니다. 여래께서 화엄경에 출현하셨음을 널리 알리는 일입니다. 여래께서 이 화엄경 한 구절 한 구절, 한 글자 한 글자마다에 출현하셨음을 만천하에 알리는 일입니다.
부디 온 세상에 화엄경이 있음을 널리 알리는 크나큰 보시공덕으로 회향합시다. 화엄경이 세상에 있음을 알리는 훌륭한 보시로써 복을 짓고 공덕을 닦읍시다. 이 세상에서 최상의 보물로써 무한보시를 실천하는 공덕을 닦는 보살이 됩시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더라.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인생은 오직 공덕을 닦는 일입니다. 수승한 공덕을 닦는 일입니다. 화엄경 부처님이 세상에 오셨음을 널리 알리는 크나큰 보시 공덕으로 회향하는 일입니다.
2015년 5월 15일
신라 화엄종찰 금정산 범어사
如天 無比
십회향품이 워낙 긴 품이다. 대방광불화엄경 강설집의 회향품만 벌써 여섯 권째다.
서문에는 ‘오다 오다 오다’라고 하는 향가를 실었다.
신라향가는 아름다운 문학인데 불과 몇 편 전해지지 않는다. 그 중에서도 이 향가는 장육사를 창건할 때 양지스님이 지은 짧은 향가다.
수많은 사람들이 절을 지으려고 맨손 맨 어깨로 울력을 나왔다.
흙과 돌과 기왓장과 목재와 서까래를 나르면서 ‘오다’‘서럽더라’‘우리’‘공덕’‘닦다’ 라고 하는 불과 다섯 낱말로 이루어진 이 단순한 노래를 불렀다. 단순하지만 이 노래 속에는 인생의 현실과 그 현실을 우리가 어떻게 살아야 바람직한가가 다 나와있다.
양지스님이 장육사 불사를 하는 사람들을 위해 이 노래를 지었다. 울력하는 사람들은 이 노래를 부르면서 힘도 덜 들고 신심도 나고 즐겁게 불사를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첫구절인 ‘오다 오다 오다’라는 말에는 우리의 삶이 과거 현재 미래 삼세에 끝없이 왔었고 오고 올 것이라는 의미가 담겨있다. 그렇게 와보니 인생은 고해이고 화택이다. 그것을 ‘서럽더라’라고 표현했다. ‘오다 서럽더라’ 와보니 인생이 고해이고 화택인 것은 팔자 사나운 몇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누구 없이 그의 인생은 고해이고 화택이다. 그래서 ‘서럽더라 우리네여’라고 하였다. 이 힘든 현실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길인가? ‘공덕 닦으러 오다’ 공덕을 닦는 일 밖에 달리 다른 것이 없다.
단순한 이 노래를 반복하다 보면 그 깊은 뜻이 마음에 젖어 들고, 인생의 현실을 깨닫게 되고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가 다져진다.
나는 평소에 이 향가를 참 좋아한다. 마침 기회가 되어서 오늘 받은 강설집의 서문에 인용했다. 대방광불화엄경강설이 벌써 28권까지 나왔으니 이제 보현행원품까지 하면 앞으로 53권만이 남았다. 53권이라고 해도 5년도 채 안남았다. 세월이 잘 간다.
大方廣佛華嚴經 卷第二十三
十廻向品 第二十五之一
四,十廻向
오늘 공부는 152쪽(화엄경 제2권 민족사 刊) 공덕수행과 중생이라고 하는 단락부터 할 차례다. 십회향품 중에 제2 불괴회향, 무너지지 않는 회향에 대한 내용을 공부하고 있다. 이것은 그야말로 회향의 원형이라고 볼 수가 있다.
지난 시간에 ‘아승지’라는 낱말을 붙여서 온갖 공양거리로 공양하는 부분을 우리가 함께 읽고 넘어갔다. 그와 같은 많은 공양거리로 공양했다는 내용이었다.
(5) 功德修行과 衆生
如是修集無量功德이 皆爲成熟一切衆生하야 無有退轉하며 無有休息하며 無有疲厭하며 無有執着하야 離諸心想하며 無有依止하야 永絶所依하며 遠離於我와 及以我所하고 如實法印으로 印諸業門하며 得法無生하야 住佛所住하며 觀無生性하야 印諸境界일새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닦는 것은 일체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한 것이니, 퇴전하지도 않고 쉬는 일도 없고 고달픈 마음도 없으며, 집착함이 없어 모든 생각을 여의었으며, 의지함이 없어 의지할 바를 영원히 끊었으며, 나와 내것을 멀리 여의고, 실제와 같은 법인으로 모든 업의 문을 인(印)하며, 법이 생멸이 없음을 얻어 부처님이 머무시는 데 머물며 남[生]이 없는 성품을 관찰하여 모든 경계를 인치(引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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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덕수행(功德修行)과 중생(衆生): 공덕을 닦는 일은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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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시수집무량공덕(如是修集無量功德)이 : 이와 같이 한량없는 공덕을 수집한 것이
개위성숙일체중생(皆爲成熟一切衆生)하야 : 일체 중생을 성숙시키기 위한 일이다.
‘오다오다오다’ 하는 향가에서 보았듯이 그 모두가 바로 공덕을 닦는 일이어서
무유퇴전(無有退轉)하며: 퇴전함이 없다. 인생에서 한 번만이 아니고 끝없이 할 일이 뭐가 있겠는가? 공덕 닦는 일밖에 없다. 그래서 퇴전함이 없으며
무유휴식(無有休息)하며 :쉬지도 아니하고
무유피렴(無有疲厭)하며 : 피곤해 하거나 싫증내는 일 없으며
무유집착(無有執着)하야: 집착이 없다.
그렇게 우리가 노력을 많이 기울였다고 해서 ‘내가 했네’ 하는 상(相)을 내거나 집착을 하게 되면 바로 부작용이 일어나고 공덕은 순식간에 사라져 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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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심상(離諸心想)하며: 모든 마음으로 생각하는 바를 떠나며
무유의지(無有依止)하야 : 닦은 공덕에 의지하는 바도 없어서
영절소의(永絶所依)하며: 영원히 의지하는 바를 끊으며
원리어아(遠離於我)와 : 나와
급이아소(及以我所)하고 : 나의 것을 멀리 떠난다.
중요한 말이 나왔다. ‘원리어아 급이아소’ 아와 아소는 소승교리, 대승교리 할 것 없이 중생의 병통을 말할 때 끊임없이 따라다니는 말이다. 중생들의 병이 바로 이 두 마디 말 때문이다. 나라고 하는 것은 아집이고 나의 것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아집에서 나오는 것이다. 소위 에고라고 하는 나라고 하는 것, 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 때문에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그것만이 전부가 아니다. 사람의 내면에 무한광대한 참나의 세계가 있다.
나는 강의를 할 때마다 근본종지로서 ‘차별없는 참사람’을 이야기 해왔다. 우리에게는 차별없는 참사람의 무한광대한 진여불성의 세계가 있다. 그것을 자주 잊고서 그만 조그맣게 쫄아들어서 나와 나의 것에만 집착을 하고 그것만이 나의 전부인양 생각하는 것이 중생의 병이다.
그것을 여기 잘 지적하고 있다. 아와 아소를 멀리 떠나고 어떻게 하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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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실법인(如實法印)으로: 참나의 세계, 진여자성의 도장으로
인제업문(印諸業門)하며 : 모든 업의 문에 도장을 찍는다. 이 대목에 밑줄을 그어야 된다.
여실법인으로 인제업문이다.
우리는 대부분 아(我)와 아소(我所)로 자기의 전부인양 살아간다.
그런데 그 아와 아소도 하나의 진여불성, 차별없는 참사람의 작용이다
참나의 세계, 차별없는 참사람, 무위진인(無位眞人)의 세계가 여실법인인데 이 여실한 법의 도장으로 모든 업덩어리인 제업문에 도장을 찍는다.
우리의 삶은 아와 아소를 떠날 수 없다. 안이비설신의(眼耳鼻舌身意) 육근을 가지고 법문하고,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가지고 지혜를 작용하고, 자비를 실천한다. 어떻게 할 길이 없이 순전히 아와 아소로서 업을 짓는다. 부처님도 아와 아소를 떠나서 참나의 삶을 펼치지 못한다.
그렇기 때문에 그 아와 아소가 다 참나의 한 작용이다.
이렇게 아는 것이 바로 ‘여실법인(如實法印)으로 인제업문(印諸業門)’이다.
아와 아소 아집의 삶이 제업문인데 그 모두에 차별없는 참사람의 도장을 찍어야 문제가 없는 것이다. 이것은 아주 중요한 내용이다.
이를테면 금을 가지고 불상이나 비녀나 반지, 코끼리, 사자, 칼 등등 온갖 것을 만들었다.
이것을 아와 아소의 입장에서 보면 그 모양만 보아서 ‘저것은 불상이고, 저것은 비녀고, 반지이고 시계다’‘저것은 칼이다’ 아니면 ‘코끼리다 사자다’라고 한다. 그런 것이 보통 우리가 살아온 중생의 삶의 모습이다. 모양만을 보는 아와 아소 아집의 입장이다.
그런데 그 모양에 그치지 않고 그것이 금부처, 금비녀, 금시계이므로 ‘전부 금이다’라고 이해한다면 금부처님도 금값이고 금사자도 금코끼리도 그냥 금궤로써 뭉쳐놓은 것도 역시 금이다. 여러 가지 모양이 다르다한들 아무런 문제도 안되고 허물도 없다. 금으로 불상을 만들었다고 해서 값이 더 나가고 그냥 금궤로 두었다고 해서 값이 덜나가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 여실하게 보는 것이다.
우리는 아집으로써 인생을 살아가지만 그것이 전부 우리 참마음의 현현이고 참마음의 작용이고 전부 금으로 만든 내용이라고 보는 것이 바로 ‘여실법인(如實法印)인제업문(印諸業門)’이다. 여실한 진리의 도장으로써 모든 업의 문에 도장을 찍는 것이다.
금으로 만든 것은 어떤 모양도 전부 금으로 보는 것이다.
불사를 하면서 점안할 때 서두에 나오는 유명한 게송은 ‘전단목주중생상(栴檀木做衆生像)급여비구보살형(及與比丘菩薩形)’이다 전단나무로 중생 모습도 짓고 부처님 모습도 만들고 불상 모습도 만들고 여러 가지를 다 만들어놨지만 그 낱낱에서 다 전단향기가 난다는 말씀이다.
전단 나무를 가지고 만들었다면 보살상을 만들었든 불상을 만들었든 나한상을 만들었든 전부 전단 향기가 난다. 심지어 자투리로 버려놓은 나무토막에서도 역시 전단 향기가 난다.
형상을 보는 것이 아니고 원래 재료인 전단나무로 보는 안목이 중요하다.
점안할 때 이 게송을 외우는 것은 아무리 그림 그릴 줄 모르는 사람이 형편없는 그림을 그려놨다 하더라도 불상을 그렸으면 그대로 부처님으로 보라는 뜻이다.
그대로 부처님으로 보아라. 그러면 그 사람에게는 그것이 곧 부처님이다.
나무로 만들었든 뭘로 만들었든 부처님으로 본다면 그대로 부처님이다.
아와 아소에만 집착하는 아집의 우리들 삶도 여실법인으로 모두가 참마음의 현현이다. 참마음의 한 작용이다. 그렇게 보아버리면 아무 문제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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득법무생(得法無生)하야 : 법이 생멸이 없음을 얻어서
주불소주(住佛所住)하며 : 부처님의 머무는 바에 머문다. 그러면 부처님 경지와 똑같다.
불보살이나 온갖 조사가 우리와 똑같은 생활을 한다. 부처님도 보살들도 선지식이나 조사들도 안이비설신의가 있어서 먹어줘야 되고 잠을 자줘야 되고 입혀줘야 되고 씻겨 줘야 된다.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가지고 살면 어쩔 수가 없다. 모두가 똑같이 그 한계를 벗어날 수가 없다. 단지 우리와 불보살의 차이는 ‘육근이나 아집이라고 하는 한계에만 갇혀 있다고 보는가’ 아니면 ‘그 모든 것이 진여자성의 현현, 진여불성의 현현이다 라고 보는가’ 하는 차이다.
그래서 주불소주다. 부처님이 주하는 바에 머문다.
관무생성(觀無生性)하야 : 생멸이 없는 성품을 관찰해서
인제경계(印諸境界)일새 : 모든 경계를 도장찍는다. 생멸이 없는 성품이 바로 진여불성자리고 참마음자리고 차별없는 참사람자리다. 바로 그것을 관찰해서 모든 경계에 ‘인친다’ 도장 찍는다는 것을 새기기를 옛날부터 ‘인친다’라고 하였다. 모든 경계에 도장 찍는다.
전단나무를 가지고 만들었다면 상을 만들다가 버렸든지 말았든지 전부가 전단나무고 전단나무 의 향기가 난다. 금을 가지고 만들었다면 금궤로 놔둬도 금이고 칼이나 창을 만들어도 금이고 불상을 만들어도 금이다.
내가 ‘당신은 부처님’‘사람이 부처님이다’라는 말을 곧잘 하는 근거 역시 여기 있다.
금으로 불상을 만들어야만 꼭 금의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듯, 사람이 선한 일을 하고 착한 일을 해야만 부처가 아니라는 뜻이다. 금을 가지고 만들었다면 칼을 만들든 창을 만들든 역시 금이다. 우리가 이 오온을 가지고 살면 나쁜 일도 할 수가 있고, 좋은 일도 할 수가 있고, 병도 들 수가 있고, 늙을 수도 있고 별별 상황이 다 벌어진다. 그래도 사람은 그대로가 다 부처의 삶이다. 선악과는 관계가 없는 차원이다.
선악을 가지고 부처의 경지다 아니다 라고 말하기로 한다면 답이 없다.
몸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부처님도 병이 들고 결국은 그 몸을 버려야 할 때가 왔었다.
선악과는 관계가 없다.
부처라고 하는 경지는 선악과는 아무 관계가 없는 참사람자리고 참마음자리고 참나의 자리이다. ‘생멸이 없는 성품을 관찰해서 모든 경계를 도장찍는다’라고 하는 이 대목이 중요한 대목이다.
육근, 육진으로써 짓는 모든 업의 문에 인친다. 그리고 법의 무생함을 얻어서 부처님이 머무는 바에 머문다. 부처님의 삶을 그대로 살아간다.
선한 일 뿐만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든지, 화장실을 가든지 법당에 가서 예배를 하든지 아무 관계없이 그대로 부처의 현현이고 부처의 작용이다. 그렇게 되어야만 답이 나온다.
그 자리를 보고 ‘사람이 부처님이다’라고 하는 것이고 ‘당신은 부처님’이라고 하는 것이다.
선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부처님이고 악한 일을 많이 한다고 해서 부처님이 아니고 하는 차원이 아니다. 그런 차원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런 차원, 그런 수준으로 이야기 하는 불교가 시중에는 아주 많다.
그야말로 삼아승지겁을 닦아야 된다느니 선한 일을 많이 해야된다느니 공덕만 많이 닦아야 된다든지 하는 차원이다. 그러나 그렇게 한다면 삼아승지겁을 가지고도 안된다. 증도가에 ‘구불시공조만성(求佛施功早晩成)가, 부처를 구하기 위해서 공을 베풀고, 수행을 하고, 참선을 하고, 삼아승지겁을 닦는다고 하는데 그렇게 해서 언제 이루어지겠는가’ 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것으로는 부처가 이루어질 기약이 없다는 뜻이다.
처음부터 무거운 주제가 이렇게 나왔다.
생멸이 없는 성품, 참나를 관해서 모든 아집과 아와 아소의 경계를 도장 찍는다는 것이 그런 말이다. 금으로 만들었다면 그 무엇을 만들었든지 금이다. 불법에는 이런 이치가 있다. 아주 대단한 이치다.
(6) 廻向의 相
諸佛護念으로 發心廻向하나니 與諸法性으로 相應廻向과 入無作法하야 成就所作方便廻向과 捨離一切諸事想着方便廻向과 住於無量善巧廻向과 永出一切諸有廻向과 修行諸行호대 不住於相善巧廻向과 普攝一切善根廻向과 普淨一切菩薩諸行廣大廻向과 發無上菩提心廻向과 與一切善根同住廻向과 滿足最上信解心廻向이니라
"여러 부처님의 호념(護念)으로 마음을 내어 회향하나니, 법의 성품과 서로 응하는 회향과, 지음이 없는 법에 들어가 짓는 일을 성취하는 방편회향(方便廻向)과, 모든 일에 집착하는 생각을 여의게 하는 방편회향과, 한량없이 공교한 데 머무는 회향과, 모든 유(有)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회향과, 온갖 선근을 널리 거두는 회향과, 모든 보살의 행을 깨끗이 하는 광대한 회향과, 위없는 보리심을 내는 회향과, 모든 선근과 함께 있는 회향과, 최상의 믿고 이해하는 마음을 만족하는 회향이니라."
*
회향(廻向)의 상(相):회향의 상(相)을 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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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불호념(諸佛護念)으로 : 모든 부처님이 호렴하는 것으로써
발심회향(發心廻向)하나니: 보리심을 발하는 회향과
여제법성(與諸法性)으로 : 모든 법의 성품으로, 법의 성품과
상응회향(相應廻向)과 : 딱 맞아떨어지는 회향과.
‘금으로 만들었다면 칼을 만들었든 창을 만들었든 모두가 금이다’ 라고 하는 것이 모든 법의 성품과 상응하는 것이다.
우리가 회향이라고 하면 선근회향이라고 해서 선한 일을 해서 남에게 베푸는 것의 차원으로 만 생각을 한다. 물론 그런 차원의 회향도 십회향품에서 많이 이야기 하고 있다. 그런데 이 불괴회향, 무너지지 않는 회향의 차원이라면 무엇을 주고받고 하는 그런 차원이 아니다. 그래서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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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무작법(入無作法)하야 : 지음이 없는 법에 들어가서
성취소작방편회향(成就所作方便廻向)과: 소작을 성취하는 방편회향과.
모든 것을 짓지만 지음이 없이 짓는 것이다. 짓되 지음이 없이 짓는 이치가 분명히 있다. 크게 어려운 문제가 아니다. 그런 방편회향과
사리일체제사상착방편회향(捨離一切諸事想着方便廻向)과: 모든 사상에 집착하는 것을 사리하는 방편회향과
주어무량선교회향(住於無量善巧廻向)과 :한량없는 데 머무는 선교회향과
영출일체제유회향(永出一切諸有廻向)과 : 일체 모든 갈래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회향과.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이러한 삶을 우리가 하루에도 몇 번씩이나 돌아다닌다.
그런 것이 제유다. 하루에도 육도를 몇 번씩 돌아다니는 삶을 사는 것, 일체제유에서 영원히 벗어나는 회향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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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행제행(修行諸行)호대 : 모든 행, 육바라밀을 행하되
부주어상선교회향(不住於相善巧廻向)과 : 상에 머물지 아니하는 아주 훌륭한 뛰어난 회향과. 육바라밀을 닦되 상에 머물지 않는 아주 훌륭한 선교회향과
보섭일체선근회향(普攝一切善根廻向)과: 일체 중생을 모두 거둬들이는 선근회향과
보정일체보살제행광대회향(普淨一切菩薩諸行廣大廻向)과 : 일체보살의 모든 행을 널리 청정하게 하는 광대한 회향과.
육바라밀과 십바라밀 사섭법 사무량심 심지어 인의예지신까지도 모두 일체보살을 훌륭하게 만드는 광대회향이다. 수행이 그대로 광대한 회향이다. 우리가 육바라밀을 잘 닦는다고 하면 그 영향력은 바로 옆사람에게 끼친다. 육바라밀을 잘 닦는 모습이 얼마나 아름답고 세상에 보탬이 되는가. 그 자체가 바로 광대회향이 되는 것이다.
인의예지를 잘 지키는 사람을 보면 ‘그사람 수행자답다 아름답다. 참 빼어나다 본받을만하다’라는 생각을 일으킨다. 이보다 더 좋은 회향이 어디 있는가. 그런 것이다. 일체 보살의 모든 행을 널리 청정하게 하는 광대회향. 참 좋다 그야말로 광대회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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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무상보리심회향(發無上菩提心廻向)과 : 무상보리는 가장 높은 이타심이다. 보리심은 바로 이타심이라고 번역하면 틀림없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것, 남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내는 회향.
근래에 달라이라마 스님 이야기가 불교계에 자주 나오는데 달라이라마 스님이 제일 많이 언급하는 말이 보리심이다. 보리심은 남을 먼저 이롭게 하고 남을 앞세우는 이타심이다.
한 예로 여기 공양거리가 많이 들어왔다면 옆사람에게 다 돌아갔는지, 빠지는 이가 없는지 살핀 후에 마지막으로 내 것을 챙기는 것도 역시 이타심이다.
발무상보리심 하는 회향과.
여일체선근동주회향(與一切善根同住廻向)과 : 일체 선근으로 더불어 함께 머무는 회향과. 모든 착한 일이라고 하는 착한 일은 내가 다하는 것이다. 좋은 일이라고 하면 어디서든지 내가 빠지지 않는다고 하는 회향과
만족최상신해심회향(滿足最上信解心廻向)이니라: 가장 높은 신심과 이해를 만족하게 하는 회향이다. 이러한 내용이 이 불교의 회향상이다. 회향의 모습이다.
(7) 廻向의 行成就
佛子야 菩薩摩訶薩이 以諸善根으로 如是廻向時에 雖隨生死나 而不改變하며 求一切智호대 未曾退轉하며 在於諸有호대 心無動亂하며 悉能度脫一切衆生하며 不染有爲法하며 不失無碍智하며 菩薩行位에 因緣無盡하며 世間諸法이 無能變動하며 具足淸淨諸波羅密하며 悉能成就一切智力하나니 菩薩이 如是離諸癡暗하야 成菩提心하며야 開示光明하야 增長淨法하며 廻向勝道하야 具足衆行일새
"불자들이여, 보살마하살이 모든 선근으로 이렇게 회향할 때에, 비록 생사(生死)를 따르지만 변개(變改)하지 않으며, 온갖 지혜를 구하여 퇴전하지 않으며, 모든 유(有)에 있으면서도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며, 일체중생을 모두 제도하여 해탈케 하며, 하염있는 법에 물들지 아니하며, 걸림없는 지혜를 잃지 아니하며, 보살의 수행하는 자리의 인연이 다하지 않으며,세간의 법으로 변동하지 못하며, 모든 바라밀다를 구족히 청정하며, 온갖 지혜의 힘을 다 능히 성취하니, 보살이 이와 같은 어리석은 어둠을 여의고 보리심을 이루며, 광명을 열어보이고 깨끗한 법을 증장하며, 훌륭한 도(道)로 회향하여 여러 행을 구족하느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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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향(廻向)의 행성취(行成就): 회향의 행(行)이 이루어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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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자(佛子)야
보살마하살(菩薩摩訶薩)이
이제선근(以諸善根)으로 : 모든 선근으로서
여시회향시(如是廻向時)에 : 이와 같이 회향할 때에
수수생사(雖隨生死)나 : 비록 생사를 따랐으나. 이 몸뚱이 가지고 사는 우리가 생사를 안 따를 수 있는가. 석가모니도 따랐고 달마 임제 황벽도 다 이 몸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생사를 따랐다. 그러나
이불개변(而不改變)하며 : 고치거나 변해지지 않는다. 참마음자리를 제대로 인지한 사람, 제대로 깨달은 사람, 제대로 견지한 사람은 비록 생사를 따르나 개변하지 않는다.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는데 ‘무슨 조건으로 듣느냐? 무슨 차별상을 가지고 듣느냐? 남자라고 하는 차별 가지고 듣느냐? 여자라고 하는 차별 가지고 듣느냐?’ 하고 내가 자주 참마음, 참사람 자리를 확인한다.
듣는 데는 어떤 조건도 없다. 그야말로 차별없는 참사람이 들어서 이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우리도 순간순간은 이렇게 그 참사람자리를 알 수가 있다.
순간 견성(見性)은 간단하다. 이 순간 불성을 분명히 확인했다. 그것이 바로 불성(佛性)이고, 진여자성(眞如自性)이다. 지금 우리는 차별없이 듣는 것이다. 그것은 틀림없다. 그런데 그것이 오래 가지 않을 뿐이다. 오래 가는 사람은 제대로 공부가 된 사람이고 오래 가지 않은 사람은 초견성이라고 할까 해오(解悟)라고 할까 그런 표현을 쓴다.
비록 순간의 견성이고 순간의 확인이지만 그렇게라도 확인이 가능한 것이다.
‘도(道) 불가수유리(不可須臾離) 가리(可離)면 비도(非道)라, 도라고 하는 것은 한순간도 떠날 수 없다. 가히 떠날 수 있다면 도가 아니다’ 라는 말이 있다.
우리도 참사람을 항상 가지고 있는데 우리의 육근 육진을 통해서 만약에 한 순간이라도 떠난다면 그것은 참마음, 차별없는 참사람, 진여불성, 진여자성이 아니다.
한순간도 떠날 수 없어서 내가 항상 가지고 있고 그것이 들어서 나를 운전하고 다니는데 그것을 확인하는 것이 무슨 어려운 일이겠는가. 요는 그 확인이 오래가지 않는 한순간의 확인이라는 것이다. 견성이라고 하는 것, 성품 보는 것을 순간으로 확인해서 그렇지 그것은 항상 우리가 떠날래야 떠날 수도 없다. 그 참마음 자리를 대승에서는 열반이라고 한다. 소승에서 말하는 열반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대승에서는 소승열반 같은 것이라면 열반하지 말라고 한다. 우리가 이미 열반되어 있는데 무슨 열반을 따로 찾는가 하는 말이다.
여기도 보면 석가 달마도 다 생사를 따르고 임제 황벽도 문수 보현도 다 생사를 따르지만 개변하지 않는다. 변하지 않는다.
이것을 좀 차원을 낮춰서 초발심자경문(初發心自警文)에서 배운 대로 이야기 할 수도 있다.
‘만반장불거(萬般將不去)요 유유업수신(唯有業隨身)이라. 만 가지가 있어도 죽을 때 가져가지 못한다. 그런데 업만 따라간다.’ 금생에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다음생을 좌지우지 한다.
우리가 금생에 화엄경을 공부하는 것도 그렇다. 우리가 이렇게 사람으로 태어나 불법을 만날 업을 지었고 불법가운데서도 최고의 경전인 화엄경을 공부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좋은 업을 지어놓았기 때문이다. 전생에 지은 업이 지금 따라오는 것이다. 또 이 업을 자꾸 더 많이 두텁게 하고 무겁게 한다면 다음생에는 그것이 더 확고하게 내살림살이가 될 것이다.
선업만이 아니다. 나쁜 업도 따라가고 공덕도 따라간다. 피할래야 피할 길이 없다. 그 생각을 하면 나쁜 짓을 못한다. 경찰이 현행범을 잡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업은 차원이 다르다. 현생에 잡히지 않는다고 해도 기어이 다음생까지 졸졸졸 따라온다. 다음생에 안받으면 다음 다음생에 이자까지 쳐서 받게 된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겁이 나서 도저히 부당한 일을 할 수가 없다.
또 한편 좋은 일을 했다면 ‘다음에 이자까지 붙어서 나한테 온단다’하고 아주 신이 난다. 비록 생사를 따르나 변하지 않는다. 참마음뿐만 아니고 업도 이 구절과 연관해서 해석할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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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일체지(求一切智)호대 : 일체 지혜를 구하되
미증퇴전(未曾退轉)하며: 일찍이 퇴전하지 아니하며. 화엄경을 보다 보면 제일 많이 나오는 낱말이 보리심, 일체지다. 지혜가 있어야 선을 행한다. 지혜가 있기 때문에 선을 행하는 것이다. 어리석은 사람은 선을 행할 줄 모른다. 지혜로운 사람이 선을 행한다.
재어제유(在於諸有)호대: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 아수라 육취 이런 것이 제유다. 우리가 하루에도 그 육취를 몇 번씩 돌아다닌다. 한순간 일초쯤 왔다 가기도 하고 이초, 삼초 사이에 왔다 가기도 하고 어쩌다가 누구와 잘못되어서 화가 나서 한시간씩 두 시간씩 지옥을 헤매다 돌아오기도 한다. 우리가 항상 제유에서 허덕이지만, 지금같이 화엄경을 앞에 놓고 ‘참 법문 근사하다’ 이렇게 하는 순간에는 극락에 와 있다.
심무동란(心無動亂)하며 : 마음이 동란하지 않는다. ‘금으로 칼을 만들었든 창을 만들었든 모두 금이다’ 하는 것이 심무동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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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능도탈일체중생(悉能度脫一切衆生)하며 : 그런 이치를 가지고 일체 중생을 전부 도탈하며
불염유위법(不染有爲法)하며 :유위법에 물들지 아니하며. 사실은 전부가 유위법이다.
눈에 보이는 전부가 유위법인데도 유위법에만 머물지 않고 그것이 우리 참마음의 현현이다. 참마음의 나타남이다 라고 알면 유위법에 물들지 않는 것이다.
금불상을 불상이라고만 볼 것이 아니라 저것은 금덩어리다 라고 보는 것이다.
‘불상이다’ 라고만 보는 것은 유위법이다.
‘금덩어리다’ 라고 보는 것이 무위법이다.
금이라고 보면 칼도 금이요 코끼리도 금이요 사자도 금이요 금괴도 금이다.
이렇게 보는 것이 무위이다.
이런 것을 불교에서는 물과 물결로도 비유하고 전단나무로도 비유를 들고 금으로도 비유를 든다. 불교의식집에도 들어있는 것이 전단나무이고, 제일 많이 이야기 하는 것은 금과 물이다.
불실무애지(不失無碍智)하며 : 걸림없는 지혜를 잃지 아니하며
보살행위(菩薩行位)에 : 보살행의 지위에 대한
인연무진(因緣無盡)하며 : 인연이 무진하며 다함이 없다.
지금은 흔히 52위를 이야기 하지만 보살의 지위가 어디 52위 뿐이겠는가. 사실은 천차만별이다. 그것을 축소하고 축소해서 52위를 말하고 그것을 더 축소하면 10지내지 10위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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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간제법(世間諸法)이: 세간에 모든 법에 있어서
무능변동(無能變動)하며: 능히 변동함이 없으며. 세간법의 잘잘못을 따라가려면 끝도 없다. 따라가지 않아야 된다.
구족청정제바라밀(具足淸淨諸波羅密)하며 : 아주 훌륭한 뛰어난 모든 바라밀을 구족하며. 제바라밀 하면 첫째 육바라밀이고 그 중에 하나만 선택하라면 보시바라밀이다. 십바라밀 사섭법 사무량심 인의예지 이런 것이 다 바라밀에 해당된다.
실능성취일체지력(悉能成就一切智力)하나니 : 일체 지혜의 힘을 다 능히 성취하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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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살(菩薩)이
여시이제치암(如是離諸癡暗)하야 : 이와같이 모든 어리석음을 멀리 떠나서. 늘 어리석음과 지혜의 싸움이다.
성보리심(成菩提心)하며 : 보리심을 이루며. 보리를 제대로 완벽하게 풀이하면 지혜와 자비인데, 더 직접적으로 하려면 이타다. 이타심을 이룬다. 남을 먼저 생각하는 마음을 이룬다. 이타심이라는 말에 보리심의 뜻이 제일 아주 잘 드러나 있다.
개시광명(開示光明)하야 : 광명을 우리의 마음 광명을 열어보여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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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장정법(增長淨法)하며 : 정법을 증장시켜
회향승도(廻向勝道)하야 : 수승한 도에 회향해서
구족중행(具足衆行)일새: 온갖 행으로 중생을 구족하게 한다. 그것이 육바라밀 행으로 남에게 보탬이 되는 행으로 나타나야 된다.
불괴회향의 내용이 볼수록 좋다. 나는 몇 번을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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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고맙습니다 ... 도현이 너무 이쁘네요 ^^_()()()_
고맙습니다. _()()()_ 스님 품에 안긴 모습이 참 정답습니다...
고맙습니다_()()()_
고맙습니다._()()()_
이 세상에서 최상의 보물로써 무한보시를 실천하는
공덕을 닦는 보살이 되어야....
如實法印 印諸業門..
觀無生性 印諸境界..
수고하셨습니다. 혜명화 님!!
나무 대방광불화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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