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상과 부석사에 대한 것은 김교수의 글에서 퍼온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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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석사에는 애시당초 탑이 없었던 것이다. 부석사를 창건한 의상은, 주존인 아미타불 외에 보처불, 그러니까 협시보살을 조성하지 않은 것과 그리고 탑을 세우지 않은 것을 일승 아미타불이란 말로 설명하면서 그것이 ‘일승의 깊은 뜻’이라고 강조했다.
해동화엄 초조(初祖)로 불리웠던 의상은 『화엄일승법계도』라는 짧은 글 속에 화엄사상을 다 담아냈다고 전한다. ‘일승’이란 화엄사상을 한 마디로 나타내는 말이다. 승(乘)은, 중생을 구제하여 태우는 큰 수레라는 뜻으로 성불에 이르는 방편이다. 일승은 소승불교에서 말하는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의 3승이 결국 대승불교의 일불승(一佛乘)에 귀일하는 것을 뜻한다. 이처럼 일승이라는 개념으로 집약된 화엄 사상에, 서방 정토를 내세운 아미타 신앙이 어우러진 것이 ‘일승 아미타불’의 경지이다. 그것은, 화엄의 연화장 세계와 아미타의 서방 정토가 원융(圓融)되는 것, 비로자나불과 아미타불이 조화를 이루는 것을 일컫는다.
안녕하세요,
겨울의 무량수전
이를 보여주는 예는 일승 아미타불이 봉안된 부석사 외에도, 역시 의상이 세웠다고 전해지는, 소백산 비로봉 아래 비로사에서도 발견된다. 비로사 적광전에는 특이하게도, 지권인을 하고 있는 비로자나불과 미타정인을 하고 있는 아미타불의 양존이 나란히 봉안되어 있는데 여기에서도 우리는 화엄사상과 아미타신앙의 원융, 조화를 읽을 수 있다.
의상은 당시 최고의 철학사상이었던 화엄학과, 대중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고 있던 아미타 신앙을 원융, 조화시켰던 것이다. 신라에 화엄학이 처음 도입되던 그 무렵, 원효가 무애행(无碍行)으로 대중 속에 파고들어 화엄 사상을 전파했다면, 의상은 일승 아미타불을 내세움으로써 아미타 신앙에 열광하던 대중을 화엄 사찰로 불러들였던 셈이다. 저간의 사정을 『삼국유사』 ‘의상전교’ 조는 이렇게 전해주고 있다.
비로사 적광전의 양존
“의상은 이른바 화엄십찰로 불리우는 열 곳의 절에 교(敎)를 전하게 하였으니, 태백산 부석사, 원주 비마라사, 가야산 해인사, 비슬산 옥천사, 금정산 범어사, 지리산 화엄사 등이 그것이다. 또 『법계도서인』(『화엄일승법계도』)을 저술하고 아울러 간략한 주석을 붙여 일승(一乘)의 요긴한 알맹이를 모두 포괄하였으니, 천년을 두고 볼 귀감이 되어 저마다 다투어 보배로 여겨 지니고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