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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작 몇 달 사이 이렇게 달라질 수 있는 것일까. 지난여름 선덜랜드에 입단하면서 한국인 최연소 프리미어리거가 된 ‘소년’ 지동원이 어느새 늠름한 ‘청년’으로 변신해 한국을 다녀갔다. A팀에서 날로 입지를 넓혀가는 지동원은 험난한 주전경쟁이 펼쳐지는 낯선 땅 잉글랜드에서도 묵묵히, 그러나 치열하게 앞날을 개척하고 있다. 이런 지동원을 만나 심도 깊은 이야기를 나눠봤다. 직접 만난 지동원은 부드러우면서도 강한 20살 ‘청년’이었다.
'추자도 소년'에서 英프리미어리거로 폭풍 성장한 지동원. 'EPL 대선배' 박지성과의 첫 맞대결을 고대하고 있다.(사진제공 : 나이키) |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하다. 그러나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가슴은 여전히 방망이질 친다. 밤잠도 뒷전이다. 작금 세계 최고의 무대인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한국선수가 활약하는 모습은 이토록 우리를 뜨겁게 한다. 2005년 여름 박지성을 필두로 이영표, 설기현, 이동국, 김두현, 조원희 등이 줄줄이 뒤를 따랐다. 실패하고 돌아온 이도 적잖았다. 하지만 한 번 트인 물꼬는 막히지 않았다. 2009년 8월 이청용이 볼턴에 입단했다. 올 여름에는 지동원과 박주영이 각각 선덜랜드와 아스널의 유니폼을 입었다. 지구 반대편 낯선 곳에 있는 이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흐뭇하다. 활약에 일희일비한다. 한국인 프리미어리거가 하나둘 늘어나다보니 또 하나의 재미가 생겼다. 바로 이들 간의 맞대결이다. 다가오는 주말, 한국인 프리미어리거 최고참과 막내가 맞붙는다. 맨체스터유나이티드와 선덜랜드. 박지성과 지동원이 11월6일 자정(한국시간) 올드트래포드에서 서로에게 창을 겨눈다.
박지성은 맨유에서 어느덧 7번째 시즌을 맞았다. 팀 내에서도 고참 축에 속하게 된 박지성은 퍼거슨 감독으로부터 변함없이 신뢰를 받고 있다. 박지성은 지난 10월23일 맨체스터더비에 출전하지 않았다. 벤치에서 팀의 1 : 6 대패를 바라만 봤다. 그러나 그 후 박지성은 칼링컵 16강전과 리그 10라운드 에버턴전에 연속 선발 출장했다. 챔피언스리그 오테룰갈라티와의 경기에서도 후반 그라운드를 밟았다. 그리고 이어 벌어질 리그 11라운드. 박지성은 맨체스터에서 지동원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지난 6월, 지동원은 전남을 떠나 선덜랜드에 입단했다. 사실 기대보다는 우려가 컸다. 고작 20살의 어린 나이, 병역문제, 꾸준한 경기출전 등에 대한 이유 때문이다. 전남의 이적허용조항을 놓고 잡음도 있었다. 그러나 지동원은 굽히지 않았다. 쉽게 오지 않는 기회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에게 온 프리미어리그행 티켓을 거머쥐며 정면승부를 택했다. 그렇게 지동원은 한국인으로서는 8번째, 그리고 최연소 프리미어리거가 됐다. 조커의 역할을 맡아 차츰 입지를 넓혀가고 있는 지동원이 드디어 ‘대선배’ 박지성과의 맞대결을 펼치게 됐다. 일찍이 가장 기다려지는 경기로 박지성과의 맞대결을 꼽았던 지동원. 그를 만나 그간의 생활과 앞으로의 목표에 대해 들어봤다.
비상을 꿈꾸다 - 프리미어리거의 유년시절
현재의 지동원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제주도 북단의 작은 섬 추자도에서 태어나 K리그 최고의 요람이라는 전남 유스시스템에서 성장하기까지 인내의 시간을 보냈다. 대한축구협회가 추진한 우수선수 해외유학프로젝트의 혜택을 받아 열여덟의 나이에 레딩으로 건너가 쉽지 않은 잉글랜드 무대를 앞서 경험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어요. 축구를 좋아했지만 꼭 축구선수가 돼야겠다는 마음은 없었습니다. 축구부에 들어간 것도 아버지의 권유 때문이었어요. 어렸을 때부터 특출한 선수도 아니었습니다. 제주도에서 선발하는 또래 대표에도 못 뽑혔을 정도니 말 다했죠. 그러다 중학교 3학년 때 대회에 나가 활약하면서부터 주목을 받기 시작했어요. 중학교 때 저를 지도한 현종협 감독님이 축구에 대한 전반적인 기본기를 탄탄히 훈련시켜 주셨어요. 이때 열심히 훈련했던 게 지금 큰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그때 팀 성적이 좋지 않아 전국대회에서는 입상하지 못했고 제주도에서 받은 상은 말하기 좀 쑥스럽네요.”
지동원은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린 시절을 회상했다. 유년기의 지동원은 이렇게 착실히 기본기를 연마하며 성장했고, 광양제철고에 진학한 뒤 전남드래곤즈 유스시스템 아래서 본격적인 담금질에 들어갔다.
전남의 탄탄탄 유스시스템 속에서 성장한 지동원. 지난 12일 '나이키 엘리트 트레이닝'에 참석해 '제 2의 지동원'을 꿈꾸는 유망주들에게 축구 시범을 보였다. |
“전남에서의 시간은 지금도 굉장히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1학년 때부터 바로 경기에 뛸 수 있었고 레딩에 다녀온 후 3학년 때도 대회에 나갈 수 있어서 참 좋았습니다. 전남 구단은 시설이 잘 갖춰져 있어서 어린 선수들이 성장하기에 참 좋아요. 식단, 운동장 등도 훌륭하고 전남드래곤즈의 홈경기가 있는 날에는 1군 선배들의 경기를 항상 관람했어요. 그렇게 전남에서 지내다 잉글랜드 연수의 기회가 주어졌습니다. 물론 레딩 유학은 제게 쉽지 않은 도전이었습니다. 얻은 것도 많았지만 잃은 것도 많았어요. 레딩에서 지내면서 다시 새로운 도전을 해야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어떤 점이 부족한가에 대한 고민도 이때 가장 많이 했던 것 같아요. 벤치에 앉는 서러움도 그때 처음 느꼈고, 통역관이 없어서 말이 통하지 않는 불편도 겪었습니다. 전반적으로 자신감을 많이 잃었지만 덕분에 한국에 다시 돌아가 나를 개선해야겠다는 의지가 생겼습니다.”
두 명의 감독 그리고 주전경쟁
어린 나이에 미리 겪은 고생 탓일까. 지동원은 강한 의지로 한걸음씩 나아갔다. 2011카타르아시안컵에서의 활약은 백미였다. 주전 스트라이커 박주영의 부상 후 대체자로 나선 아시안컵에서 지동원은 4골을 몰아쳤다. 이는 조광래 감독의 눈도장을 받고, 선덜랜드의 관심을 얻게 된 결정적인 계기였다. 그 결과 현재 지동원은 두 명의 감독 아래에서 성장하고 있다. 바로 대표팀의 조광래 감독과 선덜랜드의 스티브 브루스 감독. 국가대표팀과 클럽, 감독의 스타일, 팀 내에서의 위상 등 거의 모든 면에서 차이를 보이는 두 곳에서 지동원은 어떤 플레이를 요구 받고 있을까. 특히나 대표팀 합류를 위해서는 장거리 비행 역시 감수해야하는데 체력적인 부담은 없을까.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장거리 비행은 아직 낯섭니다. 다들 시차적응, 시차적응 하는 이유를 몰랐는데, 직접 겪어보니 알겠더라고요. 잠이 모자라는 것은 사실이지만 충분히 극복할 수 있는 문제입니다. 체력적인 부담 역시 크게 느껴지진 않아요. 최근 몇 번의 A매치에서 제가 선발로 나섰다고 해서 붙박이 주전이 됐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소속팀 선덜랜드에서 경기를 많이 뛰어야 몸 상태가 유지되는데, 지금 그러지 못하고 있잖아요. 사실 경기 감각이 떨어져서 대표팀 경기에 나설 때 조금 힘들 수도 있겠다는 걱정이 듭니다. 대표팀에서 조광래 감독님은 제게 수비수들을 깊숙이 끌고 다니라고 말씀하세요. 그러면서 경기를 쉽게 풀어가다 보면 득점 찬스는 저절로 온다고 강조하십니다. 개인적으로 측면보다는 중앙 스트라이커 자리가 더 편하긴 해요. 하지만 전방 공격수들이 서로 자주 위치를 바꾸며 플레이하기 때문에 어려운 점은 없어요.”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스트라이커로 성장중인 지동원. '퍼펙트 스트라이커'가 되어 비상할 날을 꿈꾼다. |
조심스럽지만 당찬 대답이었다. 대표팀에서 지동원은 이렇듯 스위칭 플레이를 통해 기회를 만드는 역할에 주력하고 있다. 그러나 선덜랜드에서는 다르다. 우선 경기에 자주 나서지 못한다. 선발은 고사하고 확실한 교체출전 역시 보장받지 못하고 있다. 스티브 브루스 감독은 지동원을 가리켜 “1년 반 뒤를 보고 영입했다. 선덜랜드 최고의 선수로 성장할 것”이라며 잠재성을 칭찬한 바 있다. 즉시 전력감은 아니란 뜻이다. 선발명단에는 스테판 세세뇽과 니콜라스 벤트너의 이름이 먼저 올라갔다. 지동원은 주로 후반 교체카드로 경기에 나섰다. 그렇게 서서히 출전기회를 잡아갔다. 4라운드 첼시전에서 데뷔골을 뽑아냈다. 제한적인 여건 속에 일궈낸 값진 득점이다. 이후에도 지동원은 브루스 감독의 신임 속에 차츰 선덜랜드에서의 생활에 익숙해져가고 있다.
고군분투, 선덜랜드 적응기
잉글랜드에 입성한 지 이제 고작 4개월 남짓. 주전이 아닌 교체멤버로 뛰며 서서히 선덜랜드에 스며들고 있는 지동원은 새로운 환경에서 어떻게 적응하고 있을까.
“역시나 의사소통이 가장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1주일에 2번씩 영어수업을 받으며 열심히 공부하고 있지만 언어라는 것이 쉽게 습득되는 게 아니잖아요. 시간이 필요한 일이죠. 팀 훈련은 오전에 한 번 있는데, 집에서 훈련장까지 차로 5~6분 거리라서 편하게 다니고 있어요. 오전 훈련이 끝나면 자유시간인데요 개인훈련을 하거나 누나와 쇼핑을 가기도 합니다. 선덜랜드는 도시 자체가 크지 않은 데다 아직 저를 알아보는 사람도 별로 없어서 다니기 편안합니다.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있어 심리적으로도 불안하지 않아요. 아침과 저녁식사는 집에서 어머니가 해주시는 한식으로 먹고 밤에는 간식도 챙겨 먹어요.”
입가에 웃음을 띤 채 차분한 어조로 대답하는 지동원의 말을 들으니 한결 마음이 놓였다. 안정된 생활 때문이었을까. 지동원은 짧은 출전시간에도 불구하고 지난 9월10일 데뷔골을 쏘았다. 상대는 프리미어리그의 강호 첼시였다. 수준 높은 잉글랜드 무대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증명한 것이다. 해외에 진출해서 쉽사리 상대 골문을 열어젖히지 못해 고생했던 선배들의 선례를 떠올려보면 분명 지동원의 출발은 긍정적이다. 데뷔골을 계기로 팀 내 위상이나 선수들과의 관계에 변화가 있었을까. 특히 지동원은 잉글랜드로 진출하면서 소심한 성격을 바꾸고 싶다고 말했는데, 내성적인 성향도 바뀌었을까.
“프리미어리그에서 직접 뛰어보니 상대 수비수들의 클래스가 다르다는 게 느껴졌어요. 몸싸움이 굉장히 격렬한데 파울이 잘 선언되지도 않더라고요. 때문에 웨이트 트레이닝의 필요성을 많이 느껴 체중을 2kg정도 늘렸습니다. 첼시와의 경기 때 특별히 좋은 컨디션은 아니었어요. 평소와 똑같이 준비했고, 브루스 감독님이 최전방에서 플레이하며 직접 골을 노리라고 하셨습니다. 제가 넣은 골이 0-2로 뒤지던 상황에서의 만회골이고 시간도 촉박해서 골 세리머니를 할 상황도 아니었어요. 원래 격하게 세리머니하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고요. 데뷔골을 넣었지만 여전히 저는 적응단계에 있습니다. 벤트너를 비롯한 다른 동료들이 저보다 더 잘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후반에 항상 교체 투입돼 들어가는데, 사실 이 역할이 쉽지만은 않습니다. 열심히 훈련하고 기회가 왔을 때 확실히 득점하다보면 선발로 나설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요.”
세계 각지에서 온 뛰어난 선수들 틈바구니에서 분투하는 것이 꽤나 힘겨운 일이라는 게 느껴졌다. 또 한국에서 거의 대부분의 경기를 선발로 나서 소화하던 지동원에게 조커의 역할이 아직은 낯선 듯한 인상이었다. 지동원은 팀 동료들을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선수들과 아직 많이 친하진 않습니다. 경기장에서 호흡을 많이 맞춰보지도 못했고 아직은 제가 영어를 잘 못하기 때문이겠죠. 그래도 필 반슬리와 크레이그 가드너가 저를 잘 챙겨주고 있습니다. 전 원래 자신감이 별로 없는 편이에요. 하지만 이제 스스로를 과소평가하지 말고 변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소심한 성격이 해외에서는 도움이 안 될 테니까요. 선덜랜드에 입단하고 나서는 제가 먼저 선수들에게 다가가 인사도 하고 말도 겁니다. 시간이 좀 더 흐르면 동료들과도 가까워지고 호흡도 좋아지지 않을까요. 프리미어리그에 온 이상 꼭 성공하고 싶습니다. 선덜랜드 최고의 선수가 되는 게 1차 목표입니다. 팬들께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말을 꼭 전하고 싶어요. 외국에 있다보니 한국에서 보내주시는 성원이 정말로 큰 힘이 되고 있어요. 제가 더 노력해서 출전시간도 늘리고 TV화면에도 자주 잡히도록 하겠습니다. 앞으로도 큰 관심과 응원 부탁드립니다.”
지동원 VS 박지성
프리미어리그, 성공, 그리고 최고의 선수. 지동원의 말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조급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어떤 ‘확신’ 같은 것이 배어 있었다. 야망을 품고 있는 ‘청년’ 지동원이 드디어 고대하던 박지성과의 대결을 벌이게 됐다. 11월6일 자정(한국시간) 펼쳐지는 맨체스터유나이티드와 선덜랜드. 두 팀은 각기 다른 이유로 승리를 바라고 있다.
1년 전만 해도 지동원은 최고의 무대 EPL에서 박지성과의 조우를 상상이나 할 수 있었을까? 축구팬들의 시선은 11월 6일 자정에 열릴 <맨유-선덜랜드>전에 온통 쏠려있다.(사진 : 연합뉴스) |
맨유는 ‘슬로우 스타터’란 별명이 무색할 정도로 10월 중순까지 6승2무를 달리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시끄러운 이웃’ 맨시티에게 대패를 당하며 무패행진을 마감했다. 맨시티전 이후 맨유는 올더숏, 에버턴, 오테룰갈라티 등을 상대로 3연승을 거두며 다시 상승세로 돌아섰다. 6득점, 무실점. 경기기록도 준수하다. 하지만 경기내용은 그렇지 못했다. 에브라의 컨디션 난조와 중앙미드필더들의 부진과 부상이 겹치며 시종 답답한 경기력을 보였다. 특히 챔피언스리그 최약체로 꼽히는 갈라티와의 홈경기에서 주전 스트라이커 루니가 미드필드 후방에서 수비역할을 맡을 정도였다. 시즌 초 클레버리와 좋은 호흡을 보였던 안데르손은 부진한 플레이를 펼치다 팬들의 환호 속에 박지성과 교체 아웃됐다. 선덜랜드와의 일전을 앞두고 퍼거슨 감독은 “박지성은 중앙 미드필더 역할 역시 훌륭하게 수행할 수 있다. 선덜랜드전에서 그에게 중요한 역할을 부여할 것”이라며 박지성의 출격을 예고했다. 맨유로서는 준수한 경기력을 바탕으로 승리를 이끌어 내야 한다.
상대적으로 약체인 선덜랜드는 맨유와의 경기가 부담스럽다. 게다가 올드트래포드 원정이다. 현재 선덜랜드는 2승4무4패로 14위에 쳐져 있다. 최하위 위건과의 승점 차는 불과 5점이다. 선덜랜드의 승점 획득이 절실한 이유다. 선덜랜드는 지난 8라운드 아스널 원정에서 1-2로 패했지만 이후 볼턴을 이겼고 난적 애스턴빌라와 비기며 숨을 골랐다. 지동원은 맨유전에서도 일단 벤치에서 경기를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 교체 출전을 노리며 ‘조커’ 역할에 충실해야 한다.
어느 팀을 응원하느냐는 중요치 않다. 유럽 최고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한 경기에서 두 한국선수를 동시에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다가오는 주말, 박지성과 지동원의 맞대결이 펼쳐진다.
[맨유-선덜랜드(11/06) 예상 포메이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