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해진 열사에게
오늘 열사의 장지에서 눈물 좀 흘렸소. 서럽고 화가 나서 눈물이 나왔을 게요. 마치 내 막내 동생이 죽은 듯 서러웠소. 나이 육십 중반 되는 늙은이가 젊은이들 틈에서 창피한 줄 모르고 코를 훌쩍였소. 임을 위한 행진곡을 목이 메어 따라 부르지 못했소.
지난 10월 27일 비정규직 대회 때, 열사의 분신 소식을 듣고 가슴이 철컹 했소. 죽어선 안 돼, 죽어선 안 돼, 박대규 비정규직 의장을 따라 병원에 가면서 기원했소. 가족을 포함한 모든 이들의 기원에도 열사는 그날 밤 끝내 숨졌소. 수원 집으로 내려오는 전철에서 소식을 듣고 사람들이 있는데도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소.
건설노동자이면서 건설노동조합 오산 화성 지회장인 전이현 동지가 어느날 술 마시다 ‘우리 건설 노동자는 왜 이렇게 살아야 돼’ 이러면서 펑펑 웁디다. 건설노동자의 설움과 억울함을 누가 알겠소. 현장의 건설노동자만이 알 뿐 아니겠소.
건설현장에서 일어나는 불법적이고 비인간적이고 비상식적인 일들, 누가 알겠소. 새벽잠 설치고 현장에서 열 시간 넘게 새빠지게 조 빠지게 일했는데 노임 못 받을까 노심초사한다면 누가 믿겠소. 일하다 다쳤는데 법에 있는 산재 안 해준다면 누가 믿겠소. 겪은 사람만 알뿐이요.
2003년 노무현이 대통령 되던 날 이 사람은 진주에 있었소. 대구의 건설 노동조합원들과 밀린 노임을 받기 위해 갔었소. 여름부터 일한 노임을 가을이 되어도 안주고 겨울이 되어서는 아예 못 준다는 거외다. 하청에 다 주었으니 하청에서 받으라는 거외다. 하청업자는 벌써 나른지 오랜데 하청에 받으라니 이게 말이 되겠소. 원청이 노임에서 산재까지 모든 관리 책임이 있거늘 이자들은 말도 안 되는 생떼를 쓰기 예사외다.
그해 겨울 대구 건설노동조합은 그 악질 현장에 바리게이트를 쳐 작업을 중단시키고 농성에 들어갔소. 그리고 본사가 있는 진주에 간 것이외다. 그날 이 사람은 마이크를 잡고 대뜸 말했소. ‘노무현이 어젯밤 대통령이 되었지만 우리 건설노동자가 변화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다 건설노동자는 오직 투쟁으로만 자신을 지켜야한다’
돌아보니 점쟁이처럼 이사람 말이 맞아 떨어졌소. 내가 점쟁이겠소. 아니요. 나는 근거가 있어 한 말이요. 노무현이 누구요. 김대중 아류가 아니요. 김대중이 우리 건설노동자의 권익을 조금이라도 배려했다면 이 사람이 그런 말, 대통령에 당선된 날 악담을 했겠소.
이사람 말처럼 노무현은 선배 김대중 뺨치게 노동자를 탄압하고 있소. 김대중 시절 구속 노동자가 900명 못되는데 노무현 정권은 이미 천명이 넘었소. 비정규직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던 말은 사기에 불과한 것이외다.
엊그제 김호중 서부건설노조 위원장 부친상에 갔었소. 얼굴이 반쪽이었소. 잡범들은 감옥에 살다 나오면 얼굴이 허여멀겋고 피둥피둥 살이 올라 나오던데 그간 얼마나 노심초사 했는지 얼굴을 알아보지 못할 번했소. 김호중이 무슨 살인을 했소. 큰 죄를 지었소. 구형 5년이 말이나 되오. 김호중은 현장에서 법을 지키라는 것이었소. 노임이 너무 적으니 좀 올려 달라는 것이었소. 며칠전 후배를 만나 일당을 물어보니 내가 12년전에 받았던 노임과 같았소. 십년 넘게 노임이 오르지 않으니 올려 달란 게 무슨 죄란 말이요.
감옥에 갈사람 따로 있는데 만만한 게 홍어 좆이라고 노동자만 잡아들이고 있소. 그날 김호중 부친상에 가기 전 서울 서초동 검찰청에 갔었소. 민주노동당의 떡값 검사 규탄 기자회견에 갔었소. 도착 전 차안에서 뉴스가 나왔소. 아무개 아무개 돈 받았고 국가 청렴위 위원장도 삼성 돈을 받았다는데 이르러서는 기가막혀 웃음을 참을 수 없었소.
이런 개판 세상에 열사가 살았소. 노동자로, 그것도 조선시대 천민같은 건설노동자로 살았소. 이 사람 역시 건설노동자로 60평생을 살았소. 건설노동자의 설음과 억울함을 평생토록 겪었소.
그래서요. 그래서 창피한줄 모르고 눈물 콧물 훌쩍였소. 부디 잘 가오. 건설연맹 위원장이 읽은 조사처럼 부디 차별 없는 곳으로 가서 편히 쉬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