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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론의 창시자, 찰스로버트 다윈
1856.5.14 종(種)에 관한 방대한 책을 집필을 시작하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모습을 닮은 사람을 만들자! 그래서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 또 집짐승과 모든 들짐승과 땅 위를 기어다니는 모든 길짐승을 다스리게 하자!”하시고, 당신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셨다. 하느님의 모습대로 사람을 지어 내시되 남자와 여자로 지어 내시고 하느님께서는 그들에게 복을 내려 주시며 말씀하셨다.
“자식을 낳고 번성하여 온 땅에 퍼져서 땅을 정복하여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 위를 돌아다니는 모든 짐승을 부려라!”
그랬다. 인간은 특별한 존재였다. 하느님이 창조하시고 친히 복을 내려 주신 아주 특별한 존재였다. 불과 두 세기 전까지만 해도 인간의 이런 특별한 지위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물론 하느님이 인간을 만들었다는 생각은 기독교 전통에 선 서양인들에게 국한된 것이었지만, 다른 생물에 비해 인간이 뭔가 특별한 혹은 우월한 존재라는 생각은 다른 전통에 선 사람들 역시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들어서면서 이런 믿음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찰스 다윈이란 잉글랜드의 아마추어 자연학자가 있었다. 그가 1859년에 세상에 내놓은 <종의 기원>이란 책은 서구 문화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이 책의 영향은 서양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그의 전기를 쓴 어떤 이들의 말대로 이 구세계의 자연학자는 “우리가 이 행성 위에서 자신을 이해하는 방법을 변혁했다”
어린 시절 다윈은 공부보다 딱정벌레 수집에 더 기쁨을 느꼈다
찰스 다윈은 1809년 2월 12일 의사 로버트 웨어링 다윈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친할아버지인 이래즈머스 다윈은 이름난 과학자이자 철학자였으며, 외할아버지는 유명한 도자기 제조업자인 조사이어 웨지우드였다. 어린 시절, 다윈은 식물이나 새알, 광물 등을 수집하는 ‘하찮은 소일거리’에 푹 빠져 있었다. 그에게 그것은 “누군가에게 영향을 받아서라기보다는 어쩔 수 없이 타고난 본능과 같은 것이었다.” 그도 처음에는 아버지처럼 의사가 되기 위해 에든버러 대학에 들어갔다. 하지만 처음 생각과는 달리 의학에 별다른 흥미를 느끼지 못했고, 특히 해부학은 “따분하고", "혐오스럽기”까지 했다. 그러자 아버지는 아들에게 목사의 길을 권했다. 다윈은 아버지의 권유대로 케임브리지 대학으로 학교를 옮겼다. 하지만 그곳에서도 그는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신학 공부보다는 딱정벌레를 수집하는 일에 더 기쁨을 느꼈다.
학교를 졸업하고 얼마 뒤인 1831년, 다윈은 인생의 전환점이 될 만한 제의를 받았다. 해군 측량선 비글 호에 자연학자로 승선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버지는 처음에는 완강하게 반대했지만, 곧 아들의 고집에 손을 들고 허락했다. 당시 스물두 살이었던 이 청년은 아직은 학자로서의 훈련을 받지 못했었다. 그해 12월, 다윈은 비글 호를 타고 남아메리카로 향했다. 그 후 다시 잉글랜드로 돌아오기까지 5년여 동안 그는 남아메리카와 남태평양 섬 등을 둘러보았다. 비록 뱃멀미에 시달리기도 하고, 그물침대에서 자다가 바닥으로 떨어지기도 하고, 향수병에 걸리기도 했다. 그리고 브라질에서는 노예 소년이 주인에게 채찍질을 당하는 끔찍한 모습을 목격하고 충격을 받기도 했다. 노예 제도를 혐오하는 가정 분위기에서 자랐던 그는 브라질을 떠나면서 “내가 또다시 노예 국가를 방문할 일이 없음을 하느님께 감사한다”고 썼다.
하지만 다윈에게 이 항해는 대단한 지적 자극제가 되었다. 그는 이 항해에 찰스 라이엘의 <지질학 원론> 첫 권을 가지고 갔다. 지구에서 일어난 변화는 바람이나 물 같은 힘들이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점진적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주장을 담은 책이었다. 훗날 다윈은 “내 생각은 반은 라이엘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썼다. 한편 그는 동식물을 수집하면서 지질학이나 생물학과 관련된 것들을 관찰하고 기록했다. 그는 “열성적인 노력과 집중적인 관심을 쏟은 결과 많은 것들을 습득할 수 있었다. (……) 이런 훈련이야말로 내가 과학사에 업적을 남길 수 있도록 가장 근본적인 도움을 준 것이라고 확신한다.”고 했다.
갈라파고스 제도를 항해한 후 '종의 변화'에 대해 착안하다
1835년에 도착한 갈라파고스 제도는 다윈에게는 아주 특별한 곳이 되었다. 약 4주 동안 머문 그곳에서 그는 작은 새들을 표본으로 만들어 가져왔다. 항해가 끝나고 잉글랜드로 돌아온 그는 그 작은 새들 중 십여 마리가 모두 핀치류라는 존 굴드의 말을 접하고 깜짝 놀랐다. 왜냐하면 그 새들은 부리의 모양이 모두 달랐던 것이다. 어떤 녀석은 짧고 두터운 부리가 있어 씨를 깨서 먹기에 용이했고, 또 어떤 녀석은 날카롭고 뾰족한 부리가 있어 곤충을 잡기에 용이했다.
사실 그는 이 새들의 표본을 채집하면서 정확히 어느 섬에서 잡은 것인지를 표시해 두지 않는 실수를 범했다. 자연학자로서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아마추어다운 실수였다. 하지만 그 새들을 서로 다른 섬에서 잡은 것만큼은 확실하게 기억해낼 수 있었다. 놀라운 일이었다. 새들이 모두 한 종류에 속하고, 게다가 섬마다 서로 다른 형태의 새들이 살고 있다니! 그는 이 사실들이 “종의 안정성을 손상시킬 수도”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렇다. 종은 고정된 것이 아니라, ‘변화’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생각을 발표하지 않았다. 그는 신중한 사람이었다. 설명해야 할 문제들이 남아 있었던 것이다. 하나의 종이 다른 종으로 변화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그 과정은 어떤 식으로 진행되는가? (아직까지 그는 ‘진화’라는 용어를 사용하지 않았다). 과연 인간도 ‘변화’해 온 것인가? 하지만 그는 흔들렸다. 그는 자신의 노트에 이런 말들을 적어놓았다. “인간은, 경이로운 인간은 예외다.” “인간은 예외가 아니다.” 그리고 이렇게 다짐하기도 했다. “찰스여, 너무 성급하게 굴지 말라. 신중하기를”
그러던 중 1838년 9월, 다윈은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 6판에서 결정적인 단서를 얻었다. 맬서스는 그 책에서 ‘과밀과 생존 수단에 대한 간섭’이 개체의 수를 제한한다고 했다. 다윈은 ‘종들의 싸움을 맬서스의 이론에서 추론하는 일’에 열중했다. 그는 연구를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20년이 넘게 흐른 1856년 5월 14일, 마침내 다윈은 종에 관한 방대한 저서를 집필하기 시작했다. 원고 작업이 3분의 2쯤 진행되었던 1858년 앨프리드 월리스라는 자연학자가 말레이 군도에서 그에게 원고를 보냈다. 발표 전에 다윈의 조언을 얻기 위해서였다.
다윈은 경악했다. 월리스가 보낸 원고가 다윈 자신이 집필하고 있는 내용과 너무도 비슷했기 때문이다. 자신이 20년 넘게 연구한 결과물이 다른 사람의 업적으로 넘어갈 수도 있었다. 과학사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추잡한 우선권 논쟁이 또 벌어질 수도 있었던 순간이었다. 다윈 역시 신의와 이기심 사이에서 갈등했다. 하지만 나름 합리적인 선택을 했다. 월리스와 다투지 않기로 한 것이다. 그는 런던의 린네 학회에서 자신의 1844년 원고 일부와 월리스의 원고를 함께 발표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이날의 발표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다.
초판 1250부가 당일로 매진되었고 '원숭이 다윈'만평이 쏟아져 나왔다
이듬해인 1859년 11월 22일 화요일,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란 제목의 책이 출간되었다. 원래 쓰려고 계획했던 방대한 내용을 간추린 것이었다. 초판 1250부가 당일로 매진된 이 책은 엄청난 파문을 불러일으켰다. <애서니엄>이란 학술지에 실린 서평에는 이런 문장까지 등장했다. “원숭이가 인간이 되었다면, 무엇이든 인간이 되지 말라는 법이 있겠는가?” (다윈의 책 어디에도 그런 내용은 없었다.) 다윈을 원숭이로 묘사한 만평들이 신문이나 잡지에 무수히 등장했다.
다윈을 원숭이의 모습으로 풍자한 캐리커쳐
그리고 1860년 6월 옥스퍼드의 주교 새뮤얼 윌버포스와 토머스 헉슬리 사이의 그 유명한 논전이 벌어진다. 옥스퍼드에서 열린 영국과학발전협회의 연례 회의장이었다. 윌버포스가 연설 도중에 헉슬리에게 그가 원숭이 자손이라면 할아버지 쪽인지 아니면 할머니 쪽인지를 물었다. 헉슬리는 중요한 과학 토론을 웃음거리로 만드는데 자신의 재능을 낭비하는 사람보다는, 차라리 원숭이를 할아버지로 삼겠다고 답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헉슬리는 ‘다윈의 불독’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지만 정작 다윈 자신은 이런 싸움의 선봉에 나서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건강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그는 자신의 학설을 보완해 좀 더 명확하게 할 연구를 계속해나갔다. 그는 <사육에 의한 동식물의 변이>, <인간의 유래 및 성에 관한 선택>,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 등의 책을 잇달아 내놓았다. 그는 한 종이 어떤 과정을 거쳐 더 강해지거나 더 빨라지거나 하는 지는 설명할 수 있었다. 하지만 새로운 종이 어떻게 생겨나는 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명확하게 설명하지는 못했다. 종이 변화한다는 생각을 한 이는 그가 최초는 아니었다. 이미 프랑스의 생물학자 장 바티스트 라마르크가 설명한 바가 있었다. 그는 1809년 <동물철학>에서 종의 변화를 주장했다. 그리고 다윈의 할아버지인 이래즈머스 다윈도 있었다. 하지만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진화가 왜 일어나는지 그리고 어떻게 전개되는지를 확실하게 설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는 이런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다윈은 1882년 4월 19일 세상을 떴다. 다윈을 지지하던 사람들은 그가 웨스트민스터 대성당 묘지에 묻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4월 26일 결국 그곳에 묻혔다. 물리학의 거인 아이작 뉴턴이 묻힌 곳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뉴턴이 물리학에서 그랬듯, 다윈도 종의 변화라는 생물학의 일반 법칙을 만들고자 했다. 그는 이 일에 성공했을까? <종의 기원> 마지막 문장은 이렇다.
“원래 극소수 또는 하나의 형상에 몇 가지 능력과 함께 숨결이 불어 넣어졌고, 그 뒤 이 행성이 정해진 중력 법칙에 따라 계속 도는 동안에, 처음에 그토록 단순했던 것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경이로운 무수한 형상들이 진화해 왔고 지금도 진화하고 있다는 이런 생명관에는 장엄함이 있다.”
1859년에 발행된 <자연 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에 관하여>의 타이틀 페이지
다윈은 1872년 <종의 기원> 제6판에서 처음으로 ‘진화’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그의 진화론은 뉴턴의 중력 법칙처럼 일반 법칙의 지위에는 오르지 못했다. 하지만 이 장엄한 생명관은 생물학과 관련해서는 뉴턴이 물리학에 끼친 영향 이상으로 크나큰 기여를 했다. 하지만 부정적인 영향도 컸다. 철학자 허버트 스펜서는 ‘적자생존’ 개념을 인간 사회에까지 적용했다. 그는 가난한 사람들은 부적합한 존재이기 때문에 자연 선택에 의해 도태되어야 한다는 과격한 주장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사회적 다윈주의는 자유경쟁을 지지하는 사업가들, 자신들이 인종적으로 우월하다고 믿는 인종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미쳤다. 한편 창조론과 진화론의 불화 역시 아직도 완전하게 봉합되지 않았다. 2004년 실시된 갤럽의 조사에 따르면 미국인들 중에 인간이 신의 인도 없이 다른 생명체로부터 발달했다는 주장에 동의하는 사람의 수는 13퍼센트에 불과했다고 한다.
찰스 다윈의 생애
찰스 다윈에 관해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는 두 가지 신화가 있는데, 그 두 가지 모두 진실과는 거리가 멀다. 첫째는, 이미 암시된 바와 같이, 그가 어설픈 지식을 지닌 젊은 신사로 운 좋게도 세계 여행길에 오르게 되었고, 계속 진행 중인 진화에 대한 다소 명백한 증거를 보았으며, 적당히 똑똑한 그 시대 사람 누구라도 같은 상황에 처했다면 생각할 수 있는 설명을 해냈다는 것이다. 둘째는, 그가 보기 드문 천재여서 그만이 가지고 있는 번뜩이는 통찰력으로 과학의 대의를 한 세대 또는 그 이상 앞당겨 놓았다는 것이다. 사실 찰스 다윈과 자연선택에 대한 생각 모두 상당 부분은 당시의 시대적 산물이었지만, 그는 다양한 범주의 학문들 속에서 과학적 진리를 찾기 위해 보기 드물게 열심히 일하고 고심했으며 끈질기게 연구했다.
에라스무스 다윈이 죽었을 때 그의 아들 로버트는 슈루즈버리 근처에서 성공적인 의사로 자리잡고 있었고, 그가 1800년에 완공한 마운트(The Mount)라는 멋진 저택으로 이사해 있었다. 로버트의 외모는 아버지를 닮아 키가 6피트가 넘었고 나이가 들면서 살이 쪘다. 다윈 가의 전통대로 로버트도 건강한 자녀들을 두었지만(수적인 면에서 아버지만큼은 아니었지만), 에라스무스는 손자 중에서 두 번째로 어렸던 찰스가 태어나는 것을 보지는 못했다. 찰스의 누나 메리앤, 캐롤라인, 수전은 각각 1798년, 1800년, 1803년에, 형 에라스무스는 1804년, 찰스 로버트 다윈은 1809년, 그리고 마지막으로 에밀리 캐서린(가족들 사이에서는 캐티라고 불렸음)이 1810년에 태어났는데, 그때 어머니 수재너의 나이는 마흔넷이었다. 찰스는 목가적인 어린 시절을 보낸 듯하다.
세 명의 누나들 덕에 응석받이로 자라면서 집 마당과 근처 시골을 돌아다녔고, 여덟 살이 될 때까지 집에서 캐롤라인에게 읽기와 쓰기를 배웠으며 우러러볼 형이 있었다. 그러던 중 1817년에 극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해 봄 찰스는 그 지방의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고, 1818년에는 기숙학교인 슈루즈버리 스쿨(형 에라스무스는 벌써 들어가 자리잡고 있었다)에 들어갔다. 1817년 7월, 이런저런 병으로 고생을 하던 어머니가 갑자기 장에 고통스런 병이 생겨 52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내를 잃은 상실감을 결코 극복하지 못한 로버트 다윈은 아버지처럼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기는커녕 먼저 떠난 아내에 대해 어떤 이야기도 못하게 금했으며 여생 내내 자주 우울증에 빠지곤 했다. 훗날 찰스 다윈이 어머니에 대해서는 거의 기억하는 것이 없다고 쓴 것을 보면 아버지의 명령이 효력이 있었음에 틀림없다.
메리앤과 캐롤라인은 집안일을 할 정도로 자랐고, 나중에는 여동생들도 자기 몫을 해냈다. 어떤 사학자들(그리고 심리학자들)은 어머니의 죽음, 특히 이에 대한 아버지의 반응이 어린 찰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고 그의 성격을 결정지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이들은 서너 명의 누이들과 하인들이 있는 커다란 집안에서 어머니는 오늘날의 여덟 살짜리 소년의 경우와는 달리 좀더 먼 존재였으며, 어머니의 죽음으로 오랫동안 상처를 받지 않았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어머니가 죽은 바로 그 이듬해에 기숙학교로 보내져 의지할 수 있는 가족적인 환경과 차단(형 에라스무스와는 더 가깝게 해주었지만)되었다는 것은 1817년과 1818년에 있었던 일들과 함께 그에게 정말로 깊은 영향을 남겼을 것임을 암시한다. 슈루즈버리 스쿨은 마운트와 가까운 거리(들판을 가로질러 약 15분 거리에 있었기 때문에 집을 자주 방문하는 것이 가능했다)에 있었지만, 처음으로 집을 떠나 사는 아홉 살짜리 아이에게는 집이 15분 거리에 있는지, 15일 걸리는 거리에 있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다윈은 슈루즈버리 스쿨에서 자연사에 큰 관심을 갖게 되었고 주위의 자연 환경을 관찰하기 위해 오랫동안 산책을 하며1) 표본을 채집했고 아버지의 서재에 있는 책을 열심히 읽었다. 1822년에 에라스무스는 졸업반이었고 찰스는 13세였는데, 형은 잠시이긴 했지만 화학(당시 매우 유행했던 과목)에 열정적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고, 손쉽게 찰스를 설득하여 자신의 조수로 삼고 관대한 아버지의 도움으로 거금 50파운드를 들여 마운트에 실험실을 만들었다. 에라스무스가 그해 후반에 케임브리지로 떠나게 되자 찰스는 집에 갈 때마다 그 실험실을 이용했다.
에라스무스는 집안의 전통에 따라 의사가 되기 위해 공부했지만 그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은 없었다. 케임브리지에서의 일상적인 공부는 따분했지만 과외 활동은 즐거웠다. 찰스 역시 에라스무스가 없는 슈루즈버리 스쿨의 생활이 따분하다고 느꼈고, 1823년 여름에 에라스무스를 방문해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냈다. 엄청나게 즐거운 시간으로밖에 설명할 수 없을 그 방문은 분명히 14세 소년에게 나쁜 영향을 주었던 것 같다. 집으로 돌아온 찰스는 새 사냥에 열중하게 되었고 학교 공부보다도 운동을 더 좋아하게 되었으며 쓸모없는 막내아들이 될 조짐이 분명했다.
결국 로버트 다윈은 1825년에 찰스를 학교에서 데리고 나와 몇 달간 자신의 조수로 데리고 있으면서 그에게 다윈 가의 '의사' 전통을 심어주려고 했다. 그런 다음 그를 의대생으로 에든버러에 보냈다. 그때 찰스는 겨우 16세였지만 에라스무스는 3년간의 케임브리지 생활을 막 끝내고 에든버러에서 일년을 보내며 의학 수업을 마치려던 차였다. 아버지의 생각은 에라스무스가 찰스를 잘 돌봐서 그해에 의학 수업을 듣게 하면 그 다음부터는 찰스가 스스로 알아서 공부하여 의사 자격을 딸 수 있게 될 것이고, 또 나이도 먹을 것(희망컨대 철도 들기를)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는 않았다.
에라스무스는 겨우 낙제를 면해 아버지에게 두 젊은이들의 과외활동이 자세하게 보고되는 일을 겨우 피하긴 했지만, 여러모로 에든버러에서의 일년은 케임브리지에서 보냈던 엄청나게 즐거운 시간의 재현이었다. 한편 찰스가 의사가 될 가능성은 이때 사라져버렸는데, 그것은 공부를 게을리 해서가 아니라 비위가 약해서였다. 찰스는 시체 해부 때문에 육체적으로 메스껍기는 했지만 학업은 계속했다. 그러나 드디어 전환점이 오고야 말았다. 그는 어린아이의 수술을 포함, 두 번의 수술을 목격하게 되었는데, 당시에는 수술이 마취제 없이 진행되었다. 비명을 지르는 아이의 모습은 특히 그에게 깊은 영향을 남겼다. 그는 훗날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나는 수술이 끝나기도 전에 서둘러 나왔다. 그리고 다시는 수술 참관을 하지 않았다. 아무리 강제로 들어가라고 윽박질러도 다시는 수술을 참관하지 않을 작정이었다. 이것은 클로로포름 시대가 오기 훨씬 이전의 일이었다. 그 두 사건은 아주 오랫동안 날 괴롭히며 쫓아다녔다.2)
아버지 앞에서 자신의 실패를 인정할 수 없었던 다윈은 1826년 10월, 에든버러로 돌아가 겉으로는 의학 공부를 계속했지만 자연사 강좌에 등록하고 지질학 강의를 들었다. 그리고 특히 스코틀랜드의 비교해부학자이며 해삼에 심취해 있던 해양생물 전문가 로버트 그랜트(Robert Grant, 1793~1874)의 영향을 받게 된다. 그랜트는 라마르크 진화론을 지지하고 모든 동물은 하나의 기본형에서 형성되었다는 생틸레르의 견해에 부분적으로 동의하기도 한 진화론자였다. 그는 이러한 생각들을 어린 다윈(다윈은 이미 의학적 통찰력을 얻기 위해 『주노미아』를 읽었다. 그러나 그의 자서전에 따르면 『주노미아』에는 진화에 관한 생각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시 그에게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않았다고 한다)에게 전해주었고 해변에서 발견한 생물에 대해 연구하도록 권했다.
다윈은 지질학에서 지구의 지형이 물에 의해 형성되었다고 생각한 수성론자들과 열이 원동력이라고 본 화성론자들 사이의 논쟁(그는 후자의 설명을 택했다)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다윈(아직 18세밖에 되지 않았다)은 자신의 관심분야를 찾아냈고 또 그 분야에 대해 열심히 공부할 자세까지 되어 있었다. 그러나 1827년 4월에 이르자 더 이상 의학 공부를 하는 척 아버지를 속일 수 없게 되었고 결국 그는 아무런 정식 자격도 얻지 못한 채 에든버러를 영원히 떠나고 말았다.
그가 마운트로 돌아가기까지는 시간이 좀 걸렸는데, 아마도 아버지와의 피할 수 없는 대면을 잠시나마 지연시키기 위해서 그랬던 것 같다. 스코틀랜드를 잠깐 방문한 뒤 그는 처음으로 런던을 방문하여 누나 캐롤라인을 만났고, 그의 사촌이자 이제 막 법정 변호사 자격을 딴 해리 웨지우드의 안내로 런던을 구경했다. 그런 다음 파리로 갔고, 스위스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는 길이었던 조시아 웨지우드 2세(해리의 아버지이자 찰스의 할아버지 에라스무스의 절친한 친구의 아들)와 그의 딸들인 패니와 엠마를 만났다.
그러나 8월에 드디어 문제를 해결해야 할 시간이 다가왔다. 결국 로버트 다윈은 찰스에게 남은 유일한 미래는 케임브리지로 가서 학위를 받고 시골 목사가 되는 것이라 생각했다. 당시 이는 장남이 아닌 말썽꾼 아들들을 모양새 좋게 처분하는 일반적인 방법이었다. 부자들이 하는 시골일(사냥과 파티 참석)을 하는 한편, 고전에 대한 지식을 기본수준까지 올려놓기 위해 필사적으로 벼락공부를 하며 여름을 보낸 찰스 다윈은 1827년 가을, 케임브리지의 크라이스트 칼리지에 정식으로 입학 허락을 받았고, 기를 쓰고 좀더 공부한 뒤 1828년 초에 그곳으로 옮겨 살았다.
다시 한 번 그는 에라스무스와 함께 지내게 되었다. 에라스무스는 이제 의학사 학위를 마치고 그에 대한 포상으로 유럽 일주를 시작하려 하고 있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4년간의 공부와 시골 교구 목사로서의 인생을 앞에 두고 있던 찰스는 현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다윈이 케임브리지에서 학부생으로 보낸 시간은 에든버러에서 보냈던 마지막 몇 개월과 비슷했다. 그는 전공과목 공부는 게을리 하고 그가 정말로 관심 있었던 자연 세계에 대한 공부에 전념했다. 이때 찰스는 케임브리지의 식물학 교수 존 헨즐로(John Henslow, 1795~1861)의 지도하에 있었는데, 그는 찰스에게 스승은 물론 친구가 되어주었다. 찰스는 애덤 세지윅(Adam Sedgwick, 1785~1873) 밑에서 지질학을 배우기도 했는데, 우드워드를 추종한 이 지질학 교수는 비록 허턴과 라이엘의 동일과정설을 거부하기는 했지만 현장연구에서 출중한 실력을 발휘하고 있었다. 두 교수 모두 다윈을 특출한 학생으로 여겼고, 다윈의 지적 능력과 성실성은 식물학과 지질학을 공부하느라 게을리 했던 다른 교과목들을 마지막 순간에 벼락치기로 공부하며 따라잡을 때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심지어 다윈 자신도 1831년 초에 본 시험에서 매우 훌륭한 성적을 거두자(178명 중 10등) 깜짝 놀랄 정도였다. 그러나 과학적 재능이 있음에도 그는 선택의 여지없이 당연히 시골 교구 목사가 될 것으로 보였다. 찰스가 케임브리지에 있는 동안, 자신이 의사 생활과는 맞지 않다는 것을 아버지에게 납득시킨 에라스무스는 25세의 나이에 의사직을 포기하고 아버지에게서 생활비를 받으며 런던에 정착하기로 했다. 로버트가 관대한 의사였는지는 모르지만, 당연히 그는 아들 중 적어도 하나는 존경받는 직업을 갖기를 바랐다.
찰스는 1831년 여름, 자신에게는 마지막이 될 것이라고 생각한 지질학 대탐험을 하며 웨일스 지방의 돌을 관찰하고 8월 29일에 마운트로 돌아왔다. 그곳에서 그는 케임브리지의 스승이었던 조지 피콕(George Peacock)에게서 전혀 예상치 못한 편지 한 통을 받았다. 피콕은 자신의 친구인 해군 본부의 프랜시스 보퍼트(Francis Beaufort, 1774~1857) 대령(지금은 그의 이름을 딴 보퍼트 풍력 계급으로 유명한)의 제안을 전해주었다. 비글호(HMS Beagle)의 탐사 여행에 참여하라는 제안이었다. 비글호를 지휘할 사람은 로버트 피츠로이(Robert FitzRoy) 대령이었는데 그는 장거리 항해에서 자신을 수행하고 그 기회를 이용해 특히 남아메리카의 자연사와 지질학 연구를 할 적당한 신사를 찾고 있던 중이었다.
다윈의 이름을 거론한 이는 헨즐로였는데, 그 역시 다윈에게 편지를 써서 그 기회를 잡으라고 권했다. 사실 그 자리를 제안받은 것은 다윈이 처음이 아니었다. 헨즐로도 그 기회를 잡아볼까 잠시 생각했고, 그의 또 다른 제자도 제안을 받았으나 케임브리지 근교 보티셤의 교구 목사가 되기 위해 그 제안을 거절했다. 그러나 찰스는 완전한 자격을 갖추고 있었다. 피츠로이는 자신이 대등하게 대하며 장거리 항해를 하는 동안 자신과 동등한 조건을 갖춘 신사 계급(젠틀맨)을 원했다. 그렇지 않다면 명령 체계에서 신과 같은 위치 때문에 자신이 그 부류와의 접촉에서 소외되고 말 것이기 때문이었다. 탐사에 참가할 이는 (물론) 경비를 자비로 부담해야 했고, 해군 본부는 그가 남아메리카와 (가능성이 있는) 전 세계 탐사의 기회를 이용할 수 있는 실력 있는 박물학자이기를 원했다.
헨즐로가 보퍼트에게 (피콕을 통해) 다윈을 거론하자 보퍼트는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었다. 할아버지 에라스무스 다윈의 친한 친구 중 리처드 에지워스가 있었는데, 그는 마음에 맞는 행복한 결혼을 네 번이나 했고, 22명의 아이들을 낳은 사람이었다. 에라스무스보다 열두살 어렸던 에지워스는 1798년 네 번째이자 마지막으로 결혼을 했는데, 그 상대가 당시 해군의 수로 측량사였던 프랜시스(Francis) 보퍼트의 29세 된 누이 프랜시스(Frances) 보퍼트 양이었다. 그래서 보퍼트는 피츠로이에게 그 항해에서 동반자이자 박물학자 역할을 할 사람으로 젊은 찰스를 추천할 때,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었지만 기쁜 마음으로 그를 "유명한 철학가이자 시인의 손자 다윈 씨는 열정과 모험심에 가득 찬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美 연구팀, 다윈 '진화론' 155년만에 입증
생물진화론의 창시자인 찰스 다윈의 이론이 155년 만에 미국 연구팀에 의해 사실로 입증됐다.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과 조지워싱턴대학 등 합동 연구팀은 대륙에 사는 도마뱀 5종(種)과 대서양과 태평양, 캐리비안과 지중해 연안의 섬에 사는 도마뱀을 비교한 연구결과를 최근 발표했다.
조사결과 섬에 사는 개체는 더욱 가깝게 접근할 수 있는 ‘친화력’이 더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특히, 섬의 포식자는 ‘환경에 길들여진’ 순한 도마뱀에 더욱 가까이 접근할 수 있으며, 섬의 도마뱀이 포식자를 인식하고 이로부터 도망가는데 걸리는 시간이 육지의 도마뱀보다 짧다는 것을 연구팀은 발견했다.
이는 육지보다 섬의 포식자 개체수가 적기 때문으로 ‘자연선택’에 따라 도마뱀이 도망치거나 숨는 행위에 에너지를 쓸 필요가 없게끔 진화됐기 때문이라는 다윈의 이론과도 맞는것이기도 하다. 이번 연구결과는 영국학회지 ‘로열 소사이어티 B 학회 회보: 생물학’(Proceedings of the Royal Society B)에 게재됐다.
한편 1859년 다윈이 주장한 진화론은 ‘자연선택’에 따라 환경에 적응한 개체가 자연적으로 선택돼 살아남고 그 형질이 후대에 유전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당시 다윈은 “지구에 사는 수많은 종(種)이 공동조상들로부터의 거듭된 분화의 결과물”이라고 언급했으며, 이것을 인간의 조상은 원숭이라는 뜻으로 해석한 사회 각층의 분노를 야기하기도 했다.
다윈이 주목했던 ‘웃음’과 인간의 감정표현
새해에는 웃을 일이 많았으면 좋겠다. 웃음이 없다면 인간은 소외된 개인으로 머무르게 될 것이다. 특정인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끼면 왜 정신이 팔릴까? 개는 왜 꼬리를 흔들고 고양이는 왜 으르렁 거리는가? 우리는 왜 당황해하며 당황하면 왜 얼굴색이 붉어질까?
이런 질문에 최초로 과학적으로 접근한 사람은 『종의 기원』을 저술한 찰스 다윈이다. 다윈은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1872)이란 책을 통해 이런 종류의 의문에 답하고 있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베스트셀러에 올랐으며, 감정과 ‘안면 표현’에 대한 연구를 진척시키는 출발점이 되기도 했다. 그는 영아와 어린이, 정신이상자, 화가, 조각가, 고양이, 개, 그리고 원숭이에 대한 연구와 서로 다른 문화에서 생활해온 사람들이 그들의 감정을 표현하는 방법에 대해 연구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 다윈은 인간과 동물이 그들의 감정을 어떻게 표현하고 행동하는지를 이해하고자 했다. 자연선택이론을 통해 인류의 기원과 사람의 심리를 분석했던 『인간의 혈통』(1871)의 후속 판이라 할 수 있다.
『인간과 동물의 감정 표현』은 유전적으로 결정된 행동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다윈은 집중할 때 입술을 오므린다든가 분노를 표현할 때 눈 주위의 근육이 조여지는 것 같은 인간 특성들의 기원을 동물에서 추적하는 등 진화적으로 접근했다. 동시에 영국의 저명한 정신과 의사들의 의견을 세밀히 조사·반영하기도 했다.
다윈은 ‘표현의 일반적인 원칙’이라는 주제로 이 책을 시작한 다음 사람을 포함한 특정 종의 특이적인 감정표현 양식에 주목했다. 이어 매우 광범위하고 세밀한 관찰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쳤다. 즉 불안, 슬픔, 낙담과 절망을 포함한 ‘의기소침’을 논하는가 하면(7장), 즐거움, 사랑, 다정함, 헌신 같은 ‘의기양양’(8장)이나, 추상과 명상에 대해 고찰(9장)했으며, 증오와 분노(10장), 모멸, 모욕, 혐오, 죄의식, 자존심, 무력감, 인내와 확신 등(11장)을 끄집어냈다. 놀라움, 경악, 두려움과 공포(12장), 관심, 부끄러움, 수치심과 겸손 등을 포함하는 복잡한 감정 상태(13장)도 다뤘다.
결론적으로 다윈은 ‘안면 표현’으로 드러나는 감정은 진화의 산물이라 주장하고 있다. 그는 여러 사람들에서 나타나는 ‘안면 표현’을 비교해 인종 또는 문화적 배경과 상관없이 동일한 기본적인 움직임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다. 또한 그는 인간과 동물의 표현을 비교해 많은 놀랄만한 유사성을 찾아내기도 했다. 그는 ‘안면 표현’은 학습된 행동이 아니라 어느 정도 타고난 것이라 생각했다. 다윈은 자연선택의 개념을 여기에 도입해 설명하고 있다.
흥미로운 사실은 라마르크가 주장한 ‘획득형질의 유전’에 대한 다윈의 신념이다. 다윈은 자주 사용된 표현, 즉 습관적 행동을 결국 획득하게 된다는 생각을 부정하지 않았다. 이런 면에서 다윈 역시 그 시대의 사람이라 할 수 있다. 그 당시에는 자손에게 전달되는 유전자가 어떻게 자연 선택되는지에 대한 물리적인 설명이 없었다. 즉 다윈은 멘델의 업적을 모르고 있었다. 21세기 들어 감정 표현과 행동에 대한 다윈의 업적은 생물학, 정신과학과 심리학 분야에서 재검증되고 있다.
다윈이 사람의 사회적 교류의 핵심요소로 맨 먼저 확인했던 인류 공통의 표정은 웃음이다. 웃음은 우리를 ‘사회적 種’의 하나로 묶어준다. 인간 행동의 대부분은 진화한 것이므로 다른 동물 종에서도 원시적인 형태의 유사성을 발견할 수 있다. 인간이나 동물의 감정표현은 의사소통의 차원에서 보면 시각신호의 일종이다. 동물의 시각신호는 의례화 돼 있다. 즉 진화를 겪어오면서 과장되고 정형화 돼 있어서 시각적으로 쉽게 탐지될 수 있다. 시각신호는 밤이나 심해의 어두운 환경에서도 사용되는데 개똥벌레나 일부 물고기들은 멀리 있는 수신자에게 빛을 내어 신호를 전달한다. 발신자가 보낸 신호에 대한 수신자의 반응은 종종 예측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린 개코원숭이 수컷은 나이든 수컷의 위협행동을 보면 암컷과의 교미가 달려있는 경우라도 도망친다.
생물학적 진화와 문화적 진화는 동반된다. 미국의 심리학자인 제임스 볼드윈은 자연선택이 생물학적 법칙일 뿐만 아니라 생명과 정신을 다루는 모든 과학에 적용되는 원칙이라 주장했다. 다윈이 감정의 ‘안면 표현’은 자연선택에 의한다고 제안한 것을 제임스 볼드윈은 ‘사회적 유전’이란 용어로 대체해 설명하고 있다. 책 말미에서 다윈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표현을 통해 다른 사람들과의 조화를 인식할 수 있고 그 결과 우리의 고통이 경감될 수도 있으며 기쁨이 배가 될 수도 있다.”
찰스 다윈의 종의 기원
찰스 다윈(Charles Darwin, 1809∼1882)은 ‘왜 멸종한 동물들과 같은 지역에서 살고 있는 오늘날의 동물들 사이에 연속성이 있는가’가 궁금했다. 오늘날의 동물들은 결국 화석동물들의 변형된 후손이 아닐까 하는 것이 그의 큰 의문점이었다. 그 이유를 다윈은 ≪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에서 생명체가 자연선택을 통해 진화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의 설명을 일반적으로 다윈의 ‘진화론’이라고 부른다.
다윈의 진화론은 우리에게 단순함이 어떻게 복잡함으로 바뀔 수 있는지, 어떻게 무질서한 원자들이 서로 결합해 더욱 복잡한 형태로 바뀌고 결국은 인간까지 만들어내게 되었는지를 비교적 만족스럽게 설명해 주고 있다. 다윈은 우리의 존재와 관련된 질문에 대해 이제까지 제시된 답들 중에서 그럴듯한 답을 제공한 최초의 인물이다.
남아메리카 대륙에서 말을 타고 팜파스(인디오 말로 ‘평원’)를 달리던 다윈은 드넓은 초원에 야생 토끼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토끼 서식 환경을 잘 알고 있던 다윈에게 토끼가 잘 자랄 수 있는 팜파스에 토끼가 없다는 것이 수수께끼였다.
다윈의 결론은 마치 난센스 퀴즈의 답과 같다. 정답은 팜파스에 토끼가 살지 않기 때문이다. 팜파스에 토끼가 살지 않는 이유는 토끼가 아프리카에서 남아메리카로 대서양을 헤엄쳐 건너올 수 없기 때문이다. 이 같은 질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 수 있다. 다윈의 역작인 진화론은 바로 이런 의문에서부터 출발한다.
보통 사람들도 이러한 아이디어를 쉽게 생각해 낼 수 있지만 다윈의 업적은 이러한 작은 생각에서 출발해 진화론이라는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도출했다는 데 있다. 그가 도출한 진화론을 담은 ≪종의 기원≫은 인류사의 위대한 책으로 거론되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특히 ‘디스커버리 채널’은 세계의 각 전문가들을 대상으로 인류사를 바꾼 위대한 발견 열 가지를 선택했는데 첫 번째로 다윈의 진화론을 올려놓고 아인슈타인이 구상한 ‘상대성이론’과 ‘E=mc2’ 두 가지를 지식적 업적의 둘째와 셋째로 꼽았다.
줄리언 헉슬리 경은 ≪종의 기원≫ 출판 100주년을 기념해 진화론이 인류사상 최고의 발견으로 알려질 정도로 중요성을 부여받고 있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썼다.
첫째로 당대 사람들이 믿고 있던 생각과는 달리 현존하는 동물 및 식물이 처음부터 개별적으로 그들의 현재 형태로 창조된 것이 아니라 완만한 변형에 의해 초기의 형태에서 진화되어 온 것이라는 방대하고 설득력 있는 증거를 제시했다는 점이다. 둘째로는 ≪종의 기원≫에서 그가 명쾌하게 설명한 자연선택의 이론이 진화를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제시했다는 점이다. 그의 장점은 진화가 보편적인 현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갈파하고 가장 일반적인 결론을 끌어내기 위해 가능한 한 모든 자료를 모으고 분석하는 한편 자신에 반대하는 사람들도 있다는 점을 잊지 않았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주장을 전개하기 위해 그에 반대하는 주장을 일일이 격파하도록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1)
그러나 다윈은 자신의 혁신적인 진화론에 두 가지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다.
우선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론의 증거가 아무리 많다고 하더라도 정황적인 것이지 확연한 과학적 사실에 의해 증명될 성질의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두 번째로는 그의 종교적인 믿음에 명백히 반(反)한다는 것이다. 다윈은 종의 독자성과 불가침성, 생명의 목적성, 그리고 인간의 도덕적 지위가 그의 이론에 의해 손상을 받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윈은 이런 문제를 극복할 방법으로 매우 조심스러운 접근을 시도했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완전히 증명했다고 말하지 않고 자연선택은 생물체의 다양성에 대한 주요 원인일 수 있다는 것을 제시하고, 이 가정에 따를 경우 이제까지 생물계에서 혼란스럽고 연관이 없어 보이는 모든 종류의 생명체의 존재 이유와 존재하게 된 방법에 대해 쉽게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하지만 당대의 과학 수준에 기초한 이론이었기 때문에 방대한 자료를 제시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반인들은 그의 이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그가 ≪종의 기원≫을 발표하자마자 세기의 ‘원숭이 논쟁’에 휘말린 것은 그 때문이다.
다윈이 생존경쟁이란 아이디어를 생각해 낸 것은 생태계를 유심히 관찰한 결과이기도 하지만 가장 잘 알려져 있는 곤충의 번식력을 계산한 결과이기도 하다.
그는 파리 한 마리가 한 번에 200개의 알을 낳는데 그것이 전부 파리가 된다면, 그중 암컷이 절반인 100마리라고 추정했을 때 그 파리가 다시 200개씩 알을 낳아 2만 마리의 파리가 되고, 그중 절반인 1만 마리의 암컷이 다시 200개씩의 알을 낳는다면 단 세 번의 번식으로 무려 200만 마리의 파리가 태어난다고 추산했다.
그들이 다시 알을 낳고 또 알을 낳으면 세계가 몇 년 안에 파리 천지가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실상은 그렇지 않다. 한 번에 200개의 알을 낳는다 하더라도 다시 알을 낳는 파리는 두세 마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다윈의 자연선택이라든가 생존경쟁이라는 이론이 나오게 된 배경이다. 진화론은 한마디로 자연계의 수많은 생명체가 다같이 영양, 생식, 환경조건의 제약을 받으며 상호 연관되어 변하고 진화한다는 뜻이다.
다윈은 더 나아가 인간이 단지 지능이 뛰어난 동물의 한 종에 불과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윈은 노트 위에 한 종이 새로운 종으로 가지 치기를 해나가는 계통도를 그리면서 인간도 진화의 산물에 불과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다윈은 노트에 이렇게 썼다.
“인간은 원숭이에게서 왔는가?”
다윈은 자신의 생각이 위험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인간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진화된 것이라는 주장은 당시의 학계로부터 따돌림을 당할 수도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윈은 자신이 발견한 것이 엄청난 파괴력을 지니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과감히 도전하기로 결정했다. 다윈은 꼼꼼하고 신중한 사람이었으므로 자기의 주장을 뒷받침할 증거들을 계속 모으면서 이론을 정리해 나가기 시작했다.
이때 그는 맬서스(Thomas Malthus, 1766∼1834)가 1798년에 쓴 ≪인구론(An Essay on the Principle of Population)≫을 읽었다. 맬서스는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생물은 많은 자손을 만들기 때문에 만약 그것이 모두 자란다면 지구는 곧 포화 상태가 될 것이다. 인구의 증가는 식량의 증가보다 빠르다. 따라서 인간의 수를 전쟁, 질병 등으로 항상 감소시킬 필요가 있다. 생활이란 생존을 위한 투쟁이며 여기에서는 가장 잘 적응하는 자만이 살아남는다.”
맬서스에 따르면 시간이 경과함에 따라 인구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는 데 반해 식량 공급은 한정된다. 그 결과, 인위적인 조치가 따르지 않는다면 만성적인 식량 부족 상태에 빠지게 되므로 자연적인 요소가 개입해 가장 허약한 인구 집단을 절멸시킨다는 것이다. 이 책을 읽고 다윈은 생존경쟁과 그 결과로서의 적자생존에 의해 이 같은 종의 차이가 생겼다고 생각했다.
다윈은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 진화하는 과정에서 적자만 생존하고 부적자는 멸종한다는 것은 다소 무리한 추정이라는 것이다. 부적자의 생존을 허락하는 환경을 가진 장소가 있는 경우에는 부적자도 그곳에서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진화론 자체는 다윈 이전에도 유럽의 지식인 사회에서 널리 알려져 있었다. 행성 체계는 태양이 중심일지 모른다는 주장이 코페르니쿠스 이전에도 있었던 것처럼 일련의 선구자들이 다윈에 앞서 종의 변화를 거론했다.
프랑스의 자연학자이며 파리왕립식물원의 총책임자였던 박물학자 뷔퐁(Georges Louis Leclerc de Buffon, 1707∼1788)도 종들이 진화한다고 주장했다. 영국의 저명한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Charles Lyell, 1797∼1875)은 종들이 먹이와 영역을 두고 벌이는 싸움에서 어떤 종은 승리하고 어떤 종은 패배하기 때문에 결국 강한 종이 번성한다는 것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찰스 다윈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Erasmus Darwin, 1731∼1802)도 일련의 과학적 시를 통해 유용한 형질이 생물학적 유전을 통해 대물림되며 그런 형질들이 서서히 축적되면 다양한 생물이 탄생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진화론으로 가장 잘 알려진 사람은 다윈과 쌍벽을 이루는 라마르크(Chevalier de Larmarck Jean-Baptiste-Pierre Antoine de Monet, 1744∼1829)다. 그가 자신의 ‘형질변경 이론’을 쓴 ≪동물 철학(Philosophie zoologique)≫을 발간한 것은 1809년으로 다윈의 ≪종의 기원≫이 발간되기 50년 전이다. 그는 생물의 종이 여러 세대에 걸쳐 ‘자연의 계단’ 위를 몸부림치면서 기어오른다는 진화의 개념을 도입했다. 종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완전성을 획득하면서 진화하는데 이는 동물들이 환경조건에 적응하려고 애쓰는 의지를 구현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라마르크가 제시한 예는 기린이었다. 그는 “영양이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먹으려고 오랫동안 목을 늘이다 보니 기린이라는 새로운 종으로 변했다”고 설명했다. 반면에 두더지나 도롱뇽의 눈처럼 계속해서 사용하지 않는 기관은 퇴화한다는 주장이다.
엄밀한 의미에서 라마르크와 다윈의 이론은 차별화되는 점이 있으므로 별개의 이론으로 설명되기도 한다. 라마르크는 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했고 다윈은 획득형질의 유전을 주장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다윈도 획득형질이 유전된다고 믿었다. 다윈과 라마르크의 차이는 라마르크는 진화의 요인이 획득형질의 유전이라고 본 반면에 다윈은 진화의 주된 추진력으로 획득형질의 유전보다는 생존경쟁을 꼽았다.
다윈의 설명은 라마르크의 이론을 뛰어넘는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라마르크는 환경이 부모에게서 자식으로 이어지는 바람직한 변이를 낳는다고 단순하게 설명했다. 다윈은 라마르크와는 달리 특정한 환경에서 살아남아 번성할 수 있는 특성을 진화시킨 종이 그렇지 못한 종보다 우세할 수 있었다고 설명했다. 즉 라마르크는 기린이 높은 곳에 있는 나뭇잎을 먹기 위해 자꾸만 목을 뻗다 보니 목이 길어졌다고 했지만 다윈은 우연히 다른 기린보다 더 긴 목을 가지고 태어난 기린이 먹이를 차지하는 데 유리했기 때문에 더 빨리 번식했다고 설명했다.
다윈의 할아버지 이래즈머스 다윈과 뷔퐁, 라마르크 등이 다윈보다 먼저 진화론에 대한 개념을 이야기했는데도 그들보다 후대의 다윈을 진화론의 실질적인 주창자로서 인식하는 이유는, 다윈보다 선행한 사람들이 진화가 일어나는 이유와 과정에 대해 확신을 가질 수 있는 설명으로 뒷받침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다윈은 자연선택에 의한 진화의 메커니즘을 제시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가설을 지지하게 할 만한 수많은 증거를 제시했다. 한마디로 종이 변화할 수 있는 개연성을 수많은 자료로 자연스럽게 설명해 준 것이다.
당대의 세계인들을 충격과 혼란으로 몰아간 ≪종의 기원≫은 머리말과 총 15장으로 되어 있다. 다윈은 머리말에서 비글호의 항해를 통해 얻은 지식을 통해 ≪종의 기원≫을 쓰지 않을 수 없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했고 이어서 총 14장에 걸쳐 흥미진진한 3막극처럼 3단계로 자신의 주장을 펼친 후 제15장 ‘요약과 결론’으로 총 500여 쪽에 달하는 장쾌한 논리를 마무리 짓는다.
제1막에서는 진화론의 윤곽을 설명한다. 그는 논란의 소지가 많은 진화론을 직접적으로 증명하는 증거를 확실하게 제시할 수 없음을 전제하고 유비추리를 도입해 식물 및 동물을 기르는 농부들이 인공적인 선택을 통해 다양하게 길들인 품종들을 생산해 낼 수 있다는 것을 논한다. 다윈은 길들인 개와 비둘기의 자연적인 다양성도 매우 긴 시간이 흐르면 충분히 극단적으로 변화해 단일 종 내부의 종족뿐 아니라 별개의 종도 산출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이어서 다윈은 다양성, 생존투쟁, 자연선택을 통한 종의 변화 등 진화론의 근본적인 요소들을 제시한다. 그가 채택한 원리들은 하나의 종의 개체들이 각각의 특징에서 다양성을 나타내며, 맬서스가 말한 대로 인구 증가가 불가피하게 생존을 위한 경쟁과 투쟁을 일으킬 것이라고 설명한다. 이들 과정에 의한 ‘자연선택’을 통해 가장 우수한 개체들이 더 많이 증식해 퍼져나가고 장기적으로 종의 변화를 도출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다. 특히 인간이 인공적인 육종을 통해 비교적 짧은 시간에 이룬 성과를 감안하면 지질학적 시대 전체에서 자연선택을 통한 생존투쟁의 결과는 대단하다고 주장했다.
제2막에서 다윈은 자신이 설명하는 진화론의 문제점들에 대해 심층적으로 고찰했다. 그는 스스로 비판자의 입장에 서서 진화론이 안고 있다고 여겨지는 심각한 문제점을 미리 해명하기 시작한다. 동물의 눈과 같은 극도로 민감한 기관들이 신의 설계에 의하지 않고 작은 축적만으로 어떻게 가능할 수 있으며, 다른 새의 둥지에 알을 낳는 뻐꾸기, 놀라운 집짓기 능력을 지닌 꿀벌, 노예 개미들의 특이한 습성이나 본능을 자연선택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를 설명했다. 각각의 사례에 대해 다윈은 자연 속의 예외적인 행동과 습성이 작은 변화의 점진적인 축적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제3막에서는 개별 창조 이론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지만 진화론으로는 쉽게 설명할 수 있는 문제들을 논했다. 왜 화석 자료가 불완전함에도 불구하고 멸종과 종의 시간적인 변화를 증언할 수 있으며 식물과 동물의 지리적인 분포를 어떻게 설명할 수 있는지 보여주었다. 매우 다른 종들의 태아가 놀랍도록 유사한 것을 진화의 원리 외에는 설명할 수 없다는 것도 적었다. 또한 ‘꼬리 없는 종이 가진 꼬리 밑동’과 같은 흔적기관이나 퇴화기관을 창조론으로는 설명할 수 없지만 진화론으로는 명쾌하게 설명할 수 있음을 지적했다. 그는 대체 어떤 신이 무용한 기관이 잔뜩 있는 동물계를 만들겠느냐고 반문하면서 바로 그런 기관들의 존재가 오히려 진화론의 가설을 뒷받침한다고 설명했다.2)
다윈이 진화론을 쓰게 된 계기는 대영제국의 군함 비글호(HMS Beagle) 탑승이다. 영국 정부는 정밀한 신형 시계를 검증하고 해군이 사용하는 남아메리카의 해안선 지도를 개량하기 위해 해군 탐사선 비글호에게 세계 일주 항해를 명령했다. 비글호는 당시 새로 발명된 피뢰침을 큰 돛대 끝과 뱃머리 돛의 끝에 설치할 정도로 첨단 장비로 무장했으며, 길이 27미터에 500톤 정도가 되는 작지 않은 선박으로 승무원도 70여 명이나 되었다. 다윈은 우여곡절 끝에 무보수 박물학자로 1831년 12월부터 1836년 10월까지 탐험에 참가했는데, 특히 1835년 9월 15일부터 10월 20일까지의 갈라파고스 제도에서의 탐사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
비글호의 항해 목적은 파타고니아, 푸에고 섬, 칠레, 페루 등 남아메리카의 해안과 태평양의 섬들을 조사하는 것이었으므로 다윈은 갈라파고스 제도만 방문한 것은 아니다. 이것도 다윈이 진화론을 생각하게 된 또 다른 계기가 되었다. 그런데 그가 처음 방문한 섬 중에서 갈라파고스 제도는 곤충과 포유류가 적은 반면에 파충류와 조류의 천국이었다.
갈라파고스 제도의 생물들은 다른 지역에서 볼 수 있는 것들과는 매우 달랐다. 파충류와 조류뿐만 아니라 곤충, 꽃 등도 마찬가지였다. 이를테면 다윈이 잡은 15종의 물고기 전부와 185종(또는 외지에서 온 잡초를 뺀 174종)의 식물 가운데 꽃 피는 식물 100종이 신종이었다. 그야말로 갈라파고스 제도는 ‘종’의 보고(寶庫)였다. 다윈이 놀란 것은 이 신종들에게서 멀리 500∼600마일이나 떨어진 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의 생물과 어딘가 다르면서도 유사한 점을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다윈이 갈라파고스 제도에서 발견한 여러 가지 사실은 그에게 큰 의문을 주었으며 이것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 진화론의 기본 아이디어가 되었음을 확연히 보여주는 글을 ≪비글호의 항해(The Voyage of the Beagle)≫에 적었다. 이 책은 다윈이 비글호의 항해를 끝낸 1836년에서 얼마 되지 않는 1839년부터 1860년까지 여러 번 수정ㆍ보완되면서 발간된 것이다. 이는 다윈이 비글호의 항해를 끝낸 지 얼마 안 되어 이미 진화론의 기본 아이디어를 도출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다윈의 진화론이라는 독창적인 아이디어는 많은 종이 공통의 조상을 가지고 있다면 이들 간의 차이점들을 만족스럽게 설명할 수 있다는 것이지만, 논문이나 책을 발간하려고 하지는 않았다. 머리말에서조차 자신의 연구가 끝나려면 마무리까지 2∼3년은 더 걸려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다고 실토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건강 상태가 좋지 않지만 특별한 사건이 생겼기 때문에 책을 쓰지 않을 수 없다고 적었다. 그야말로 놀라운 사건이 그로 하여금 조속히 논문과 책을 발간하도록 부추겼기 때문이다.
그것은 1858년 6월 18일, 동인도 제도에 사는 앨프리드 러셀 월리스(Alfred Russel Wallace, 1823∼1913)가 다윈에게 보낸 한 통의 편지 때문이다. 월리스는 다윈과 편지를 주고받으며 교류하는 학자 중 한 사람이었다. 다윈보다 열네 살이나 어린 무명의 월리스는 대학자인 다윈에게 자신의 논문 초고를 보내면서 다윈의 의견을 물었다. 월리스는 1823년 영국 남서부(웨일스 지역)에 있는 궨트 주의 우스크에서 태어났다. 월리스는 학교 교사 시절에 사귄 베이츠와 함께 1848년부터 1852년까지 남아메리카의 아마존 지방으로 박물 채집에 나섰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1853년에 ≪아마존 및 리오네그로 여행 이야기≫를 출간해 학회에 알려졌다. 1854년부터 1862년까지 말레이 반도와 인도네시아 제도를 여행해 1869년에 ≪말레이 군도≫라는 책도 출판했다.
이때 맬서스의 ≪인구론≫을 읽은 월리스는 다윈과 종의 진화에 대한 동일한 결론을 내린 후 다윈에게 편지를 보낸 것이다. 다윈은 이 편지를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진화에 대한 이 논문의 결론은 맬서스의 ≪인구론≫을 인용한 것부터 자연선택설까지 다윈의 생각과 완전히 일치했기 때문이다. 맬서스의 책은 당시 베스트셀러였으므로 다윈과 월리스가 이 책을 읽고 같은 결론을 유도한 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자신과 똑같은 결론을 내린 월리스의 논문을 보고 다윈은 재빨리 지질학자 찰스 라이엘과 조지프 후커에게 편지를 보내고 조언을 구했다. 라이엘은 다윈에게 두 사람 공동의 논문을 권위 있는 <린네학회지>에 발표하고 또 그가 집필해 놓은 원고를 조속히 정리해 출판하도록 충고했다. 월리스의 동의를 얻은 다윈이 이 충고를 따랐고 다윈은 그동안 작성 중이던 ≪종의 기원≫에서 발췌해 1858년 7월 1일 <자연선택에 의한 종의 기원, 즉 생존경쟁에서 유리한 종족의 존속(On the 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 or the Preservation of Favoured Races in the Struggle for Life)>을 <린네학회지>의 7편의 논문 중 하나로 발표했다.
아이러니한 일이지만 당시 발표회에는 30여 명이 참석하고 있었는데 아무도 그 후 세계를 온통 논쟁 속으로 몰아넣은 다윈과 월리스의 논문에 주목하지 않아 토론도 없었다.
다윈과 월리스가 공동으로 진화론에 대한 논문을 발표했음에도 다윈이 진화론의 시조로 거론되는 이유는 1842년 다윈이 진화론의 얼개인 <종의 변화에 대한 기록(Notes on the Transmutation of Species)>이라는 35쪽짜리 짤막한 논문을 지인들에게 알려주었고, ≪종의 기원≫을 발표하기 거의 15년 전인 1844년에 소논문(230쪽에 달함)으로 작성해 당시 유명한 학자였던 라이엘과 후커에게 보여주었으며, 또한 다윈이 한 미국인 교수에게 자신이 연구하는 내용을 적어 보낸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논문이 발표되기 20년 전에 그가 비글호의 항해를 마친 후 ≪비글호의 항해기≫를 발간한 것도 영향을 주었다.
다윈은 머리말에서 ≪종의 기원≫ 초본이 불완전하지만 어쩔 수 없이 출판한다는 것도 실토했다. 그러면서도 다윈은 자신이 설명하는 것이 정확하다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면서 앞으로 자신의 책에 나오는 내용에 반대하는 주장에 대해서 충분한 자료를 갖고 자신의 이론이 옳다는 것을 다시 제시하겠다고 했다. 그가 ≪종의 기원≫을 발간한 후 일어나게 될 후폭풍을 사전에 예견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진화론은 인간으로 하여금 자연, 인간의 본질, 존재의 의미에 큰 이정표를 주었다는 데서 큰 의미가 있지만, 현대 산업사회를 뒷받침하는 이론으로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유럽이 세계 각지에 식민지를 확보한 제국주의가 생존경쟁의 논리를 펼친 진화론에 근거한 것임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그러나 진화론은 그보다 더 큰 틀에서 인간의 사고에 큰 영향을 미쳤다.
다윈의 진화론이 발표되었을 때 유럽은 엄격하게 제한된 사회구조를 갖고 있었다. 각 개인이 사회구조 안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엄격한 계급제도 속에서 복잡한 상호 의무를 충실히 수행해야만 했다. 중세시대의 농노, 기사, 영주, 절대 군주에 이르기까지 불평등한 계급구조는 당시 어느 정도 해체되어 있었지만 그래도 각 계층은 자신이 속한 계층에 따라 상대방과 경쟁하면서 살아야 했다.
이것이 산업시대에 진화론이 매우 적합한 이론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이유다. 즉 진화론은 다양한 정치경제적 이데올로기와 이해관계를 정당화하기에 좋은 이론이었다는 점이다. 더구나 다윈의 진화론은 자연의 원리를 공평하고 객관적으로 기술하고 있으므로 사회적 환경이나 문화적 편견의 영향을 받지 않는 상태에서 이론을 전개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누구든 어떤 분야에서든 자기가 원하는 사회적 목적에 맞게 다윈의 진화론을 활용할 수 있음을 의미했다.
사실상 다윈이 살고 있던 당시는 농업경제로부터 상업자본주의 시대로 이전하던 과도기적 시기였다. 당시 영국은 혁명적 변화의 선봉에서 유럽의 경제생활을 변모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낯선 변화의 과정에서 다윈의 진화론처럼 입맛에 맞는 이론은 없었다. 한마디로 재빨리 변화하는 산업사회에서는 더 이상 무작위적인 자연선택 과정으로는 살아남을 수 없다는 역설도 성립한다. 즉 생물들은 자기 자신을 역동적으로 조직화해 창조하지 않으면 결국 다윈이 지적한 것처럼 절멸 수순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종의 기원≫은 19세기에 출판된 자연과학 책 중에서 인간의 사고방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책이었다. 그러나 다윈은 자신의 책 때문에 말썽이 벌어지는 것을 반기지 않았으므로 ≪종의 기원≫에서 인류에 대한 것은 쓰지 않았다. 신의 섭리도 아닌 우연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자연선택만으로 다양하고 복잡하고 아름다운 지구상의 생명체가 태어났다는 것은 그야말로 신에 대한 모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의 기원≫은 즉시 과학자들과 일반 독자, 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고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1859년 초판의 정가가 15실링이었음에도 1259부는 출판된 첫날 모두 팔렸고 다음해 1월 발간된 3000부도 나오자마자 매진되었다. 6판인 최종판이 1872년에 나올 때까지 9750부가 팔렸으며 다윈이 자서전을 쓰던 1876년까지 무려 1만 6000부가 팔려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초베스트셀러였다. 다윈의 책은 국내에도 30여 종의 책이 어린이, 청소년, 전문가 용도로 번역 또는 편역되었을 정도로 많은 독자층을 갖고 있다.
그러나 ≪종의 기원≫의 원본은 500여 쪽에 달하는 방대한 분량을 갖고 있는데다 다윈이 진화론을 설명하면서 자신이 평생을 거쳐 연구한 따개비, 비둘기, 지질학 등 전문적인 분야에 많은 지면을 할애해 난해하면서도 이해하기 매우 어려운 점이 있다.
더구나 현대의 유전자 이론 등이 나오기 전 당대의 과학기술 수준에 기초한 논리를 전개하고 있어 오늘날의 시각으로 보면 몇몇 장은 힘에 부치기도 한다. ≪종의 기원≫의 어떤 부분은 다윈의 또 다른 역작인 ≪인간의 유래와 성선택(The Descent of Man, and Selection in Relation to Sex)≫을 참조하지 않고는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으므로 함께 읽을 것을 추천한다.
첫댓글 찰스 다윈과 엠마의 러브스토리 책 <찰스와 엠마>가 있어요. 미도서관에서 올해의 논픽션으로 선정되기도 했다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