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불안
이 애 경
“딸내미 덕분에 이런 호사를 누리네. 우리가 복이 많다. 고맙데이.” 청쾌한 날이다. 부모님께서는 제주도의 푸른 바다를 나란히 바라보시며 연신 해사하게 웃으신다. 힘들었지만 참 잘한 선택이라고 생각하며 뿌듯해한다. ‘갈매기도 몇 마리 날아다니겠지. 새우깡도 한 봉지 사야 하나?’
“진짜 괜찮겠나? 겁도 없다.” 썩 반갑지 않은 남편의 목소리가 내 상상을 조각내며 여객선 갑판 위에서 행복감에 젖어 있던 나를 현실로 데려온다. 물가에 내놓은 어린애를 보듯 남편이 걱정스럽게 되묻는다. “남의 차를 몰아 본 적도 없으면서 어쩌려고 하는데.” “뭐, 가보는 거지. 어떻게든 되겠지.” 대수롭지 않게 받아치는 내 대답에 미덥지 않은 듯 한숨짓는다. 그도 그럴 것이 평소 계획적이지 않고 즉흥적이면서 꼼꼼하지 못한 성격에 심한 길치인 내가 혼자서 부모님을 모시고 제주도 여행을 간다고 하니 그럴 만하다.
이번 여행도 나의 그런 즉흥적이고 무모한 데서 시작되었다. 가족에 관한 이야기를 그린 드라마를 보다가 부모님 생각이 났다. ‘살아 계시는 동안 한 번이라도 더 찾아뵙자.’라는 생각에 이어 어머니, 아버지 모시고 어디 가까운 곳에라도 바람 쐬러 갔다 와야겠다고 맘먹는다. 어디를 갈지 잠깐 고민하다가 이왕이면 제주도로 다녀오자고 결정 내리기까지 채 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런 나를 보며 남편은 벌써 걱정이 태산이다.
남편은 매사 신중하고 꼼꼼하다. 일어나지 않는 일들에 대해 미리 대비하고 계획을 짜는 일을 잘하고 가끔씩은 그런 일을 즐기기도 한다. 사소한 것도 소홀히 넘기지 않다 보니 실수가 적다. 남편이 하는 일은 믿음이 간다. 해서 집안의 크고 작은 일을 해결해 나가는 데 큰 역할을 한다. 그런 사람이 칠칠하지 못한 나를 보고 있자니 얼마나 걱정이 크겠는가.
종종 남편의 지나친 걱정과 염려가 과하게 여겨져 답답할 때도 있다. 놀이기구는 안전하지 않아 타면 안 되고, 패러글라이딩은 떨어질까 위험해서 안 되고, 외국 여행이라도 갈라치면 어떤 나라는 지진 때문에, 다른 나라는 치안 때문에 등의 이유로 시도조차 하지 못할 때가 허다하다.
남편은 어느 때보다도 더 격렬히 걱정한다. 걷기 불편하신 두 분을 모시고 다니는 것도 걱정, 혼자 렌터카를 빌려 본 적이 없는 것도 걱정, 익숙하지 않은 관광지에서 운전하는 것도 걱정, 무엇보다 제일 큰 걱정은 겁 없는 무모함일 것이다. 그렇다고 물러설 내가 아니다. 가끔은 무계획으로 무모하게 일을 시작하는 것이 필요할 때도 있지 않을까. 지금이 그때다.
남편의 쏟아지는 걱정에 나의 뜬금없이 불붙은 효성이 사그라질까 봐 부모님께 전화해 쐐기를 박는다. 작년에 두 분 다 인공관절 수술로 꼼짝 못 하셔서 매우 답답하셨던지 부모님도 뭘 그렇게 고생스럽게 일을 만들려고 하냐며 염려하시면서도 내심 좋아하는 눈치다.
말려도 소용없겠다 싶었던지 남편은 부모님 모시고 잘 다녀오라며 직장과 제휴된 호텔을 예약해 준다. 숙소는 해결됐다. 항공권도 예매하고 나니 실감이 난다. 렌터카는 운전하는데 익숙한 내 차와 같은 모델로 선택해서 예약했다. 이미 여행 준비의 반은 한 것 같다. 남편이 괜한 걱정을 했다는 걸 증명해낸 듯하다. 뿌듯하다.
이제 뭘 해야 하나? 제일 중요한 것이 남았다. 오래 걷는 것이 불편한 부모님을 위해 최소한의 동선으로 최선의 여행이 될 수 있도록 완벽한 계획이 필요하다. 부모님이 어디를 가면 좋아하실까? 뭘 하면, 어떤 음식을 드시면 좋아하실까? 전화해서 여쭤보지만, 그냥 다 좋다 하신다. 예약이 필요한 장소와 식당은 미리 신청해 둔다. 제주도 지도를 그려보면서 동선을 다시 체크해 본다. ‘챙겨 가야 할 준비물은 뭐가 있지?’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벌써 제주도를 몇 번 다녀온 듯 지친다.
“그냥 가면 되지. 뭐 당신이 언제부터 그렇게 계획을 세웠다고. 왜, 슬슬 걱정은 되는가 보지?” 빈정대듯 들리는 남편의 말이 서운하지만 반박할 말이 없다. ‘내가 괜한 일을 벌였나?’ 평소에는 여행 하루 전날 짐을 싸 떠나도 불안하지 않았다. 없으면 없는 대로, 부족하면 부족한 대로 그것 또한 나쁘지 않았다. 그런 내가 좋다. ‘그런데 지금은 왜 이렇게 불안하지?’
얼마 전 다섯 식구가 모여 오랜만에 가족 여행을 다녀왔다. 성인이 된 아이들이 계획부터 준비까지 다 해주니 대견하고 고마웠다. 딸이 엄마, 아빠는 다른 것 신경 쓰지 말고 마음가짐만 챙겨오라며 ‘부모님 여행 십계명’을 보내왔다. ‘아직 멀었냐 금지, 음식이 달다 짜다 금지, 겨우 이거 보러왔냐 금지, 돈 아깝다 금지, 물이 제일 맛있다 금지……’ 남편과 나는 몇 번을 읽으면서 포복절도하도록 웃었다. 절대로 하지 않으리라 그 말들을 마음에 새겼다. 그리고 우리는 여행 내내 마음에 새긴 말들 중 ‘금지’라는 단어만 빼고 충실히 실행에 옮겼다. 아이들이 얼마나 낭패감이 들었을까.
여든이신 아버지는 내가 보기에 여전히 성미가 까다롭고 꼬장꼬장하다.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 옆에서 늘 비위를 맞추느라 당신 생각과 감정을 죽이며 마음에 없는 말들을 하신다. 엄마 보고 싶어 친정 갔다가 아버지 때문에, 아버지를 편드는 엄마 때문에 속상해서 돌아오는 차 안에서 울 때도 많았다.
남편과 나처럼 우리 부모님도 자식들에게는 만만찮은 분들이다. 그렇다고 두 분께 십계명을 보내드릴 수도 없고. 우리는 마음에 새기고 갔어도 지키지 못했는데……. 여행 가방에 차곡차곡 준비물을 넣는다. 미리 사둔 부모님 옷 한 벌씩도 챙겨 넣는다. 마지막으로 설레는 마음과 함께 부모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인정의 마음을 고이 접어 가방에 담는다.
처음부터 완벽한 여행은 없었다. 완벽한 여행을 하고 싶다는 내 마음만 있을 뿐이다. 그 마음이 시간을 보내며 행복한 불안을 오게 했나 보다. ‘계획한 대로 잘 안 될 수도 있지. 완벽할 수도 없고 완벽할 필요도 없지. 모든 상황이 내가 기대한 대로 흘러갈 수는 없지. 부모님도 마찬가지지. 그건 내가 어쩌지 못하는 거야.’ 이 밤 나에게 말을 걸며 불안과 걱정은 잠시 마음의 작은 방에 넣어 두고 문을 닫는다.
드디어 내일 출발이다. 파이팅! 음, 잘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