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절에서는 고토의 지질구조도가 현행 교과서의 산맥도로 정립되기까지의 과정을,
지리학과 대학원 석사학위 논문인 <우리나라 산맥의 분류체계 및 명칭의 변천>(1996년, 박민)의 내용을 전재해서 살핀다.
산맥변천사에 관한 논문으로는 유일한 것이다.
1. 고토 분지로의 <조선산악론>(1903)
고토는 <조선남부의 지세>(1901), <조선북부의 지세>(1902) 를 발표한 후 종합하여
<조선의 산악론>(1903) 논문을 발표했다.
고토는 한반도를 크게 한토, 개마지역, 고조선지방으로 나누어,
그 안에 무려 36개의 산맥선을 분류해 넣었다(<표 참조).
현행체계에 비해 산맥 수가 2배 이상 많은 것은, 주요 산맥들을 연맥(聯脈)으로 정의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태백련맥은 4개의 평행하는 분맥들이 형성하고 있는 연맥이다.
한반도의 3개 구조선, 추가령곡의 존재 또한 고토가 처음 정립하였다.
2. 야쓰쇼에이의 <한국지리>(1904)
동경에서 출판된 <한국지리>에 고토의 지질구조도를 크게 단순화시킨 <조선산계도>를 수록했다.
그 과정에 별도의 지질조사는 없었고, 고토의 것을 정리한 것이다.
특히 고조선지방 산맥들을 단순화시켰고, 고토가 태백련맥,
소백련맥을 구성하는 각각의 분맥에 명칭을 부여한 데 반해
야쓰쇼에이는 그림에 표시는 했되 이름은 하나만 부여했다.
따라서 이름만으로는 산맥 수가 14개로 줄었다.
낭림산맥을 없애버린 것도 특이할 만하다.
3. 실업실찬지리(1906)
야쓰쇼에이가 없앴던 고토의 낭림산맥이, 평안산맥이라는 이름으로 부활했다.
가장 큰 특징은 부채살처럼 복잡하던 태백련맥, 소백련맥의 분맥들을 말끔히 정리,
한 줄기 선으로 단순화했다는 것이다.
그것으로써 오늘날의 산맥그림과 거의 비슷해졌다.
즉 고토 이후 3년만에,
추가적인 지질조사 없이, 오늘날 쓰이는 산맥체계와 명칭이 거의 확립되었다.
4. 기타(해방 이전)
<고등소학대한지지>(1906) :
"교과서를 새로운 산맥체계로 개정한다"는 선언을 하여 사료적 의의는 있겠으나,
그림 자체는 야쓰쇼에이의 것과 같다.
<조선지리풍속>(1930) :
"조선의 산맥은 고래로 많은 삭박(削剝)을 받아왔으므로 지학적으로 나타내기는 곤란하다.
따라서 산맥은 분수계를 나타내며, 지질구조선과도 일치하지 않는다."
(여기서의 산맥은 전래의 산줄기다.)
<조선광상론>(1944) :
기존의 3방향 외에 마식령방향을 추가하여, 조선의 산맥방향을 4개로 나누었다.
5. 일제시대 산맥의 요약(박민)
산맥을 서술함에 있어 산맥형성 요인, 지반운동, 조산운동에 대한 독자적 연구 없이 천편일률적으로
고토의 분류방식에 따라 산맥이 뻗은 방향을 중심으로 추가령구조곡 이북은 요동방향,
이남은 중국방향의 산맥이 발달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또한 저자에 따라 산맥의 분류체계나 명칭이 다르고, 주향에 일관성이 없었으며,
산맥을 표현하는 방법에서도 차이를 보여 통일된 산맥도를 찾아볼 수 없었다.
6. 라우텐자하(Lautensach)의 <코리아(Korea)>(1945)
라우텐자하는 고토의 연구를 답습하지 않은 최초의 사람이었다.
"고토가 단애의 관찰만으로 단층구조를 추정한 것은 지질학적으로 증명된 방법이 아니며 임의의 시도에 불과하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그는 <조선지세도>에서 주한국산맥(낭림산맥+태백산맥) 및 함경산맥, 소백산맥만을 주요 산맥으로 인정하고 나머지는 2차적인 것으로 보았다.
7. 다테이시의 <조선-일본열도지대 지질구조 논고>(1976)
고토의 선구자적 노력은 인정하되, 견해는 고토와 크게 달랐다.
고토가 지나방향을 고기(古紀)에 형성된 습곡산맥으로 본 반면,
다테이시는 중생대 이후의 단층운동에 의한 것으로 보았다.
"습곡에 의한 산맥은 생성년대가 오래되어 현 지형에서는 찾아볼 수 없으며,
결과적으로 한국에서는 한국방향과 지나방향만 인정할 수 있고 모두 단층기원으로 보인다"는 것이다.
8. 김상호의 <한국의 산악론>(1977)
고도가 낮고 연속성이 약한 광주산맥, 차령산맥의 중요성이 강조되어온 반면
경상도의 1,000미터 이상 산들이 상당수 산맥호칭이 없다는 사실,
평야지대인 황해도에 멸악산맥을 비롯한 다수의 지괴,
산맥을 그린 사실 등 불합리한 현행 산맥체계가 결과적으로 지형인식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9. 김옥준의 <남한 중부지역의 지질과 지구조>(1970)
연구범위가 옥천지향사대(차령, 노령, 소백산맥 등 남한 중부지방)로 한정되긴 했지만,
지질학적 관점에서 지층 내부의 지질을 바탕으로 외부 지형을 판단했다.
결과 소백산맥을 평행하는 두 산맥으로 나누었다.
소백노령산맥(노령산맥을 포함한다) 및 덕유산맥이 그것이다.
10. 대학교재 기타
강석오의 <신한국지리>(1985) :
분류체계는 고토의 것을 수용하였으나 인문상의 영향을 고려하여 주간산계, 서한산계, 서남산계, 동북산계로 나누었다.
권혁재의 <한국지리> :
"한국방향과 요동방향만 뚜렷할 뿐 나머지는 2차적인 것이어서
태백, 함경, 마천령, 낭림, 소백산맥 외에는 산맥이라 할 만한 것이 없다"고 하여 다테이시의 견해와 유사하다.
임덕순의 <우리나라 국토 전체와 각 지역>(1992) :
노령산맥이 차령산맥에서 분기하는 것으로 보고,
광주산맥 아래에 용문산맥을 새로 만들어넣는 등 학계의 검증도 거치지 않은 독단적 분류를 했다.
11. 해방 이후 산맥의 요약(박민)
해방 이후에도 한국의 산맥 분류체계 및 명칭은 고토의 틀을 유지한 채 수용, 전수되었다.
라우텐자하, 다테이시, 김상호 등이 부분적 비판을 제기하였으나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연구를 바탕으로 한 산맥관이 수립되지 못한 탓에 학자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이처럼 고토의 연구결과를 오늘날까지도 그대로 답습할 수밖에 없는 이유도,
그의 <조선산악론>이 전적으로 옳게 평가받아서가 아니라 그에 대한 대안을 제시할 수 없기 때문에
교과서 내에 형식적으로나마 계속 실리는 것이라 생각된다.
어지럽지 아니한가.
체계의 근간이 된다는 구조선만 해도 3개에서 출발, 2개, 1개, 4개가 주장되다 다시 3개로 돌아왔다.
각각이 "습곡이다, 단층이다" 말도 많았다.
구조선이 춤을 추니 거기 따라야 하는 산맥들이 어지럼을 타는 것은 당연한 일.
붙었다 떨어졌다 구부러졌다 펴졌다 하는 것이 자유자재다.
자고로, 설이 많다는 것은 맞는 소리가 없다는 뜻이다.
산맥은 이처럼 어지러운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결론은 늘 원위치로 돌아왔다.
위에 전재한 논문의 줄거리를 요약해 드리자면 이렇다.
산맥체계는 1903년의 고토의 연구에 모든 근간을 두고 있다.
3년 후인 실업실찬지리에 이르러 현행산맥의 명칭 및 체계가 거의 정립되었다.
이후 체계의 근본을 흔들 만한 몇 가지 이견들이 제기되었으나, 고토 분류의 근본을 바꾸지는 못했다.
고토가 옳아서가 아니라, 바른 대안을 정립해보겠다는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의지가 없었기 때문이다.
결과 현행 교과서에 실려 가르치고 있는 산맥도들의 난맥상은 난무했던 학설만큼이나 다양하다.
고토의 바둑판 같던 산맥도가,
두 명의 저자를 거치면서 3년만에 현재의 날씬한 그림으로 바뀌는 과정은 시사하는 바가 많다.
그것이 추가적인 지질연구 없이 단순히 책상머리에서 이루어진 일이었다는 것은 언급했었다.
학자들은 대체 무슨 근거로 부채살같은 소백련맥에서 분맥 하나를 쏙 뽑아 대표 소백산맥이라 낸세운 것일까.
다시 , 야쓰쇼에이는 무슨 근거로 산맥체계의 중심인 낭림산맥을 지도에서 삭제했고,
실업실찬지리는 또 무슨 근거로 그것을 부활시켰을까?
대답은 없고 학설만 잔뜩인 것이 산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