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충정로 민영환 혈죽
민영환은 자결 순국 충절의 위인으로 숭앙받는다. 하지만 처음부터 존경받는 인물은 아니었다. 동학농민전쟁의 지도자 전봉준(1855~1895)은 1895년 2월 11일 심문을 받으며 ‘백성에게 해(害)를 끼치는 자들을 없애려고 봉기했다는 건가.’라는 물음에 ‘그렇다. 내직에 있는 자가 매관매직을 일삼고….’라며 그들이 민영준과 민영환, 고영근이라고 했다.
임오군란(1882.6.9)은 구식군인에게 지급할 급여 쌀을 13개월이나 주지 않아 일어났다, 민영환(1861~1905)은 이때 피살된 선혜청 책임자 병조판서 민겸호(1838~1882)의 아들로 고종과는 사촌 간이다. 큰아버지 민태호(1834~1884)의 양자가 되어 그 가문의 후광으로 1878년 18살에 정시문과에 병과 9위로 급제, 1881년 21살에 정3품 동부승지, 이듬해에 성균관 대사성(오늘의 서울대 총장) 겸 도승지(오늘의 대통령 비서실장)로 초고속 승진했다.
그런 민영환이 1905년 11월 을사늑약 직후 ‘육군부장 정일품 대훈위 민영환’의 명함 앞뒤에 연필로 ‘이천만 동포에게 고하는 글’이란 유서를 쓰고 자결 순국했다. 이때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사이불사(死而不死)’ 유언으로 온 백성은 통곡했다.
또 민영환의 유품 ‘피 묻은 옷’과 사용한 ‘칼’을 보관한 곳에서 자란 ‘혈죽 5줄기’는 ‘1906년 2월 자라나서 그해 9월 시들었다’는 글과 함께 부인 박수영이 다락에 숨겨 보관했기에 오늘 우리의 가슴을 다시 뛰게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꽃길을 걷던 민영환의 삶은 왜 바뀐 걸까? 고종 33년(1896) 5월 26일 민영환은 러시아 니콜라이 2세의 대관식에 특사로 참석했다. 1895년 10월 8일 명성황후가 시해되고 1896년 2월 11일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아관파천)한 절체절명의 시국이었다.
민영환은 1897년 3월 상해, 요코하마, 밴쿠버, 뉴욕, 런던, 플러싱, 베를린, 바르샤바를 거쳐 모스크바에 들어갔고, 이르쿠츠크, 바이칼호, 치타, 하바로프스크, 아무르강 등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6개월 21일만인 10월 21일 귀국했다.
민영환은 당시 미온적인 러시아 태도에 한숨을 쉬며 낙담했으나 13명의 러시아 군사교관을 데려와 800여 명의 조선군을 양성하였고, 이듬해인 1897년 2월 고종이 환궁할 수 있게 했다. 그리고 그해 10월 고종이 대한제국을 선포했으니 민영환의 외교는 빈손이 아니었다.
황현이 ‘매천야록’에 ‘구라파와 미국을 둘러보고 천하대세를 연구하고 국사를 걱정한…. 민영환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고 쓴 이유이고 독립신문도 ‘민찬정(민영환)이 새사람이 되었다’(1896년 11월 10일)고 평가했다.
1905년 을사늑약에 민영환은 조병세(1827~1905) 등과 함께 을사오적(박제순·이지용·이근택·이완용·권중현)의 처단과 조약 파기를 요구하는 연명 상소를 두 차례 올렸으나 무위로 끝났다.
민영환은 자결 전 어머니를 찾았다. 또 임신 중인 아내를 만나 자고있는 세 아이를 보고 ‘관상가가 나보고 아들이 5명이라 했는데, 부인이 지금 쌍둥이를 임신했구려!’ 하며 웃었다. 하지만 부인은 말뜻을 알지 못해 빙긋 웃었고, 민영환은 방을 나와 소리 죽여 통곡했다. 그리고 옛 하인 이완식의 집으로 갔다. 칼을 꺼내 목을 찔렀으나 길이가 짧고 피가 묻어 칼자루가 미끄럽자 피 묻은 손을 벽에 닦은 뒤 다시 찔렀다.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였다.
이 민영환의 동상이 충정로 사거리 교통섬에 있다. 동상을 지키는 대나무를 바라보니, 푸른 댓잎에 붉은 피가 흘러 혈죽이 된다. 어디 죽기가 쉬운가? 더욱 나라를 위해 죽는 것도 아무나가 아니다. 친일매국, 내란, 정적 처단 등 현 세태의 어지러움에 그저 고개만 숙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