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진박해로 순교한 이양등·김종륜·허인백 복자 기려, 피신처·가매장터 등에서 신앙의 숨결 느낄 수 있어
▲ ◀◀이양등, 김종륜, 허인백 등 세 순교자가 시복되자 복자본당에선 이들을 주제로 한 유리화를 제작 봉헌했다.
역설적이게도 ‘박해’는 천주교가 퍼져나가는 데 ‘민들레 씨앗’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한양(서울)과 근기(경기), 내포(충청) 등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영ㆍ호남 일대로 피신하면서 복음이 퍼졌고, 경상좌도 일대, 곧 낙동강 동쪽 남부 지역에서도 교우촌을 중심으로 복음이 뿌리를 내렸다.
언양 간월과 울산 죽령 등 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일대 교우촌이 대표적이다.
100년에 가까운 박해는 병인박해기에 이르면서 절정을 보인다.
1866년 봄의 박해 병인양요 직후인 1866년 가을부터 이듬해까지의 박해, 1868년의 박해, 미국 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해 발발한 1871년 신미양요 사건에 따른 박해 등 네 차례에 걸친 병인박해 중 1868년 박해를 특히 ‘무진박해’라고도 부르는데,
한양 출신으로 죽령 교우촌 공소회장으로 활동한 이양등(베드로, ?∼1868) 회장과 공주 출신 김종륜(루카, 1819∼1868), 김해 출신 허인백(야고보, 1822∼1868) 등은 울산 지역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가 무진박해 때 순교했다.
▲ 울산 병영순교성지 약도.
박해의 손길은 진목정으로 향하고
이들은 박해가 일어나자 단석산 소태골의 호랑이굴, 곧 범굴로 숨어든다. 현재 진목정 성지(경북 경주시 산내면 소태길 24-13)에서 20여 분가량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천연동굴이다.
해발 827m의 비교적 험준한 산악지대 골짜기로 숨어든 교우들은 10여 명이 지낼 수 있는 30m 길이의 굴에서 살게 된다.
꿀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수계생활을 해온 이양등 회장 일가 3명을 비롯해 상주 멍에목(경북 문경시 동로면 문안길 일대)과 언양 간월 교우촌을 거쳐 죽령 교우촌로 이주했던 김종륜 일가 5명,
1860년 경신박해 당시 잡혀가 50여 일간 고초를 당하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돼 풀려나와 역시 죽령 교우촌으로 피신했던 허인백 일가 4명 등 12명이었다.
낮이면 남자들은 목기를 제작하거나 신을 삼고, 여자들은 동냥을 해 끼니를 이어나갔다.
또 밤에는 모두 동굴 바닥에 꿇어앉아 정성스럽게 저녁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치고 교리와 성인 이야기를 나누며 가족들에게 신심을 일깨우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 그 세월이 2년이나 지속됐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였다. 1868년 4월 독일 상인 E. J. 오페르트가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생부 남연군 이구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이른바 ‘덕산 굴총 사건’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박해의 피바람이 분다.
이양등 회장 등 세 명은 죽령교우촌이 발각된 직후에 경주 포졸들에게 잡힌다.
▲ ▲날마다 오전 11시면 어김없이 울산 병영순교성지에서 봉헌되는 미사를 봉헌한 신자들은 성지 내 십자가의 길 14처 기도를 바치며 순교신심을 새긴다.
이들이 살았던 신앙의 터전은 현재 대구대교구에서 순교성지로 조성되고 있다. 매달 둘째 주 토요일 오전 11시에는 산내성당에서 후원회 미사가 봉헌되고 있으며, 성지엔 소규모 피정의 집 10채를 지을 계획이다.
또 지난 5월엔 경북 경주시 산내면 내일1리 389 현지에서 순교자 기념 성당도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범굴은 무너져 돌무더기가 입구를 가로막고 있어 옛 신앙의 흔적을 살필 수는 없다.
세 순교복자는 천국으로 들어가고
경주 관아로 끌려간 이양등 회장과 김종륜, 허인백 등 3위 복자에 대한 문초는 아주 혹독했다. 그 참상이 「병인치명사적」 제3권에서 이렇게 전해진다.
“세 차례 형문 일 차씩 치니 다리에서 뼈가 드러나고 피가 많이 흐르고 또 진졸들이 돈 달라 하여 사사로이 노(줄)로 톱질하매 다리가 끊어지게 되었더라.…”
그럼에도 이 회장 등은 굳건하게 신자임을 고백하고 신앙을 증거한다. 이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영이 있던 울산 병영에 이송된 이 회장 등 세 명은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이송된 지 이틀 만에 사형선고를 받는다.
순교는 이들에게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사형이 선고되자마자 허인백이 한 말이 이를 방증한다.
“들어간다. 들어간다. 우리 세 사람 천국으로 들어간다.”
이어 십자성호를 긋고 예수ㆍ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부른 이들은 1868년 9월 14일 참수형을 받았다. 이들이 참수된 곳이 현재 정확히 어딘지는 고증이 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들 순교자의 시신을 가매장했던 동천강변 가매장터는 6·25전쟁 이후까지도 팻말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울산시에서 강변 정비를 하면서 없어졌다. 그 아쉬움은 1957년에 울산본당(현 복산본당)에서 매입한 터전에 ‘울산 병영 순교성지’가 세워져 달랠 수 있다.
지난 3월 축복식을 거행한 울산 병영 순교성지성당은 제대를 중심으로 전 신자가 원형으로 둘러앉아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지어진 독특한 성당이다.
천장 십자가 중심 아래에 제대가 놓여 있고, 제대 중앙과 감실에 못이 세 개 박혀 있어 이 회장 등 3위 순교복자를 기리고 동시에 예수님 십자가에 박혀 있던 못 세 개를 기념한다.
부산교구 울산대리구 성지사목 담당 김종규 신부는 “울산 병영에서 순교하신 세 분의 영성과 신앙적 모범을 현양하고자 울산대리구에선 현재 이 세 분의 초상과 흉상,
성지 입간판, 안내문 등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볼거리보다는 그분들의 영성과 신앙적 모범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순교의 모범은 신앙의 빛이 되고
이 회장 등 3위의 시신은 동냥을 하며 옥바라지를 하고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에 의해 거두어져 동천강변 모래사장에 가매장됐다.
세 순교복자의 머리를 치마에 싼 박조이는 형장 부근 동천강변 모래사장에 머리를 매장하고, 시신은 진목정 교우들을 시켜 가져오게 한 뒤 훗날 머리와 몸을 붙여 진목정 인근 도매산에 매장했다.
이후 이들 세 순교 복자의 시신은 1932년 5월 후손들에 의해 대구대교구 감천리 묘역에 안장됐다가 1962년에는 묘역 내 성모상 앞으로 재이장된다.
또 1973년 10월 대구 신천동에 순교자 기념성당으로 복자성당이 건립되자 다시 성당 경내로 이장돼 오늘에 이른다. 1997년 말 이들에 대한 시복 운동이 시작되자 복자본당은 그간 시복을 기원하는 순교자 현양미사를 봉헌해 왔으며, 본당 공동체 구성원들과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124위의 순교 행적을 알리며 시복 기도운동을 해왔다.
지난 8월에 세 순교자가 시복된 이후 본당은 순례자들에게 자신의 지향과 기도, 청원, 신앙적 다짐을 담은 기도문을 성당 제대에 봉헌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또 제대 맞은편에는 세 순교 복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김율석 신부의 유리화를 봉헌했다.
▲ 정의섭(왼쪽) 부회장이 이양등 회장 등 세 순교복자의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복자본당 교우인 정의섭(마리노)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회 부회장은 “이양등과 김종륜, 허인백 등 순교복자 세 분의 시복은 저희에게는 정말 특별한 일이고 큰 경사였다”면서
“유해가 남아 있는 순교복자는 124위 중에서 아주 드문 경우여서 저희 본당 공동체는 세 분 순교자의 시성 운동에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고 전했다.
무진박해로 순교한 이양등·김종륜·허인백 복자 기려, 피신처·가매장터 등에서 신앙의 숨결 느낄 수 있어
▲ ◀◀이양등, 김종륜, 허인백 등 세 순교자가 시복되자 복자본당에선 이들을 주제로 한 유리화를 제작 봉헌했다.
역설적이게도 ‘박해’는 천주교가 퍼져나가는 데 ‘민들레 씨앗’과도 같은 역할을 했다.
한양(서울)과 근기(경기), 내포(충청) 등지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영ㆍ호남 일대로 피신하면서 복음이 퍼졌고, 경상좌도 일대, 곧 낙동강 동쪽 남부 지역에서도 교우촌을 중심으로 복음이 뿌리를 내렸다.
언양 간월과 울산 죽령 등 현재의 울산광역시 울주군 상북면 일대 교우촌이 대표적이다.
100년에 가까운 박해는 병인박해기에 이르면서 절정을 보인다.
1866년 봄의 박해 병인양요 직후인 1866년 가을부터 이듬해까지의 박해, 1868년의 박해, 미국 군함이 강화도에 침입해 발발한 1871년 신미양요 사건에 따른 박해 등 네 차례에 걸친 병인박해 중 1868년 박해를 특히 ‘무진박해’라고도 부르는데,
한양 출신으로 죽령 교우촌 공소회장으로 활동한 이양등(베드로, ?∼1868) 회장과 공주 출신 김종륜(루카, 1819∼1868), 김해 출신 허인백(야고보, 1822∼1868) 등은 울산 지역에서 복음의 씨앗을 뿌리다가 무진박해 때 순교했다.
▲ 울산 병영순교성지 약도.
박해의 손길은 진목정으로 향하고
이들은 박해가 일어나자 단석산 소태골의 호랑이굴, 곧 범굴로 숨어든다. 현재 진목정 성지(경북 경주시 산내면 소태길 24-13)에서 20여 분가량 올라가야 만날 수 있는 천연동굴이다.
해발 827m의 비교적 험준한 산악지대 골짜기로 숨어든 교우들은 10여 명이 지낼 수 있는 30m 길이의 굴에서 살게 된다.
꿀장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열심히 수계생활을 해온 이양등 회장 일가 3명을 비롯해 상주 멍에목(경북 문경시 동로면 문안길 일대)과 언양 간월 교우촌을 거쳐 죽령 교우촌로 이주했던 김종륜 일가 5명,
1860년 경신박해 당시 잡혀가 50여 일간 고초를 당하다가 박해를 중단하라는 임금의 명에 따라 석방돼 풀려나와 역시 죽령 교우촌으로 피신했던 허인백 일가 4명 등 12명이었다.
낮이면 남자들은 목기를 제작하거나 신을 삼고, 여자들은 동냥을 해 끼니를 이어나갔다.
또 밤에는 모두 동굴 바닥에 꿇어앉아 정성스럽게 저녁기도와 묵주기도를 바치고 교리와 성인 이야기를 나누며 가족들에게 신심을 일깨우며 공동체 생활을 했다. 그 세월이 2년이나 지속됐다.
하지만 그 행복도 잠시였다. 1868년 4월 독일 상인 E. J. 오페르트가 충남 예산군 덕산면에 있던 흥선대원군의 생부 남연군 이구의 묘를 도굴하려다가 실패한 이른바 ‘덕산 굴총 사건’이 일어나면서 전국에 박해의 피바람이 분다.
이양등 회장 등 세 명은 죽령교우촌이 발각된 직후에 경주 포졸들에게 잡힌다.
▲ ▲날마다 오전 11시면 어김없이 울산 병영순교성지에서 봉헌되는 미사를 봉헌한 신자들은 성지 내 십자가의 길 14처 기도를 바치며 순교신심을 새긴다.
이들이 살았던 신앙의 터전은 현재 대구대교구에서 순교성지로 조성되고 있다. 매달 둘째 주 토요일 오전 11시에는 산내성당에서 후원회 미사가 봉헌되고 있으며, 성지엔 소규모 피정의 집 10채를 지을 계획이다.
또 지난 5월엔 경북 경주시 산내면 내일1리 389 현지에서 순교자 기념 성당도 기공식을 갖고 공사에 들어가 있다. 하지만 범굴은 무너져 돌무더기가 입구를 가로막고 있어 옛 신앙의 흔적을 살필 수는 없다.
세 순교복자는 천국으로 들어가고
경주 관아로 끌려간 이양등 회장과 김종륜, 허인백 등 3위 복자에 대한 문초는 아주 혹독했다. 그 참상이 「병인치명사적」 제3권에서 이렇게 전해진다.
“세 차례 형문 일 차씩 치니 다리에서 뼈가 드러나고 피가 많이 흐르고 또 진졸들이 돈 달라 하여 사사로이 노(줄)로 톱질하매 다리가 끊어지게 되었더라.…”
그럼에도 이 회장 등은 굳건하게 신자임을 고백하고 신앙을 증거한다. 이에 경상좌도 병마절도영이 있던 울산 병영에 이송된 이 회장 등 세 명은 다시 문초와 형벌을 받았고, 이송된 지 이틀 만에 사형선고를 받는다.
순교는 이들에게 하느님과의 영원한 친교에 들어가는 것이었다. 그러기에 기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사형이 선고되자마자 허인백이 한 말이 이를 방증한다.
“들어간다. 들어간다. 우리 세 사람 천국으로 들어간다.”
이어 십자성호를 긋고 예수ㆍ마리아의 이름을 크게 부른 이들은 1868년 9월 14일 참수형을 받았다. 이들이 참수된 곳이 현재 정확히 어딘지는 고증이 되지 않고 있다.
다만 이들 순교자의 시신을 가매장했던 동천강변 가매장터는 6·25전쟁 이후까지도 팻말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이마저도 울산시에서 강변 정비를 하면서 없어졌다. 그 아쉬움은 1957년에 울산본당(현 복산본당)에서 매입한 터전에 ‘울산 병영 순교성지’가 세워져 달랠 수 있다.
지난 3월 축복식을 거행한 울산 병영 순교성지성당은 제대를 중심으로 전 신자가 원형으로 둘러앉아 미사를 봉헌할 수 있도록 지어진 독특한 성당이다.
천장 십자가 중심 아래에 제대가 놓여 있고, 제대 중앙과 감실에 못이 세 개 박혀 있어 이 회장 등 3위 순교복자를 기리고 동시에 예수님 십자가에 박혀 있던 못 세 개를 기념한다.
부산교구 울산대리구 성지사목 담당 김종규 신부는 “울산 병영에서 순교하신 세 분의 영성과 신앙적 모범을 현양하고자 울산대리구에선 현재 이 세 분의 초상과 흉상,
성지 입간판, 안내문 등을 준비하고 있다”면서 “하지만 볼거리보다는 그분들의 영성과 신앙적 모범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조성하겠다”고 밝혔다. 순교의 모범은 신앙의 빛이 되고
이 회장 등 3위의 시신은 동냥을 하며 옥바라지를 하고 형장까지 따라온 허인백의 아내 박조이에 의해 거두어져 동천강변 모래사장에 가매장됐다.
세 순교복자의 머리를 치마에 싼 박조이는 형장 부근 동천강변 모래사장에 머리를 매장하고, 시신은 진목정 교우들을 시켜 가져오게 한 뒤 훗날 머리와 몸을 붙여 진목정 인근 도매산에 매장했다.
이후 이들 세 순교 복자의 시신은 1932년 5월 후손들에 의해 대구대교구 감천리 묘역에 안장됐다가 1962년에는 묘역 내 성모상 앞으로 재이장된다.
또 1973년 10월 대구 신천동에 순교자 기념성당으로 복자성당이 건립되자 다시 성당 경내로 이장돼 오늘에 이른다. 1997년 말 이들에 대한 시복 운동이 시작되자 복자본당은 그간 시복을 기원하는 순교자 현양미사를 봉헌해 왔으며, 본당 공동체 구성원들과 순례자들을 대상으로 124위의 순교 행적을 알리며 시복 기도운동을 해왔다.
지난 8월에 세 순교자가 시복된 이후 본당은 순례자들에게 자신의 지향과 기도, 청원, 신앙적 다짐을 담은 기도문을 성당 제대에 봉헌하도록 배려하고 있다. 또 제대 맞은편에는 세 순교 복자의 모습을 형상화한 김율석 신부의 유리화를 봉헌했다.
▲ 정의섭(왼쪽) 부회장이 이양등 회장 등 세 순교복자의 삶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복자본당 교우인 정의섭(마리노) 관덕정순교기념관 운영위원회 부회장은 “이양등과 김종륜, 허인백 등 순교복자 세 분의 시복은 저희에게는 정말 특별한 일이고 큰 경사였다”면서
“유해가 남아 있는 순교복자는 124위 중에서 아주 드문 경우여서 저희 본당 공동체는 세 분 순교자의 시성 운동에도 적극 동참하고 있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