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 여행12 -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만든 일본의 전통 정원 고라쿠엔을 구경하다!
2022년 11월 7일 도쿄역에서 “도쿄 프리깃푸” 를 구입해서 야마노테센(山手線) 전철을 타고
구 후루카와 정원과 리쿠기엔 六義園(육의원) 정원에 도쿄 대학교 를 구경하고는
고이시카와 고라쿠엔 小石川後楽園 을 보기 위해..... 다시 야마노테센(山手線) 전철을 탑니다.
이다바시(飯田橋) 역 에서 전철에서 내려서는 분쿄구 고라쿠 (1, Kouraku, Bunkyo-ku) 에 위치한
고이시카와 고라쿠엔 小石川後楽園 출입구를 찾는데.... 일본 처녀의 도움을 받았고
또 지하철 역을 나와 길을 잘못 접어들었다가 또 다른 일본 처녀의 도움을 받아 정원을 찾아갑니다.
드디어 분쿄구에 위치한 고이시카와 고라쿠엔 小石川後楽園 에 도착하는데, 에도시대
초기에 미토번 가미야시키 안에 만들어진 회유식 쓰키야마센스이 정원 으로 초대
번주 도쿠가와 요리후사가 착수해 2대 번주인 도쿠가와 미쓰쿠니가 완성 시켰다고 합니다.
도쿠가와 쇼군이 대가 끊길까 염려해 세 아들을 지방에 배치하니 고산케 (御三家 어삼가) 로 9男 도쿠가와
요시나오(徳川義直) 는 오와리 번(나고야성 名古屋城), 10男 도쿠가와 요리노부(徳川頼宣) 는 기슈 번
(와카야마성 和歌山城) 에 11男 도쿠가와 요리후사 (徳川頼房) 는 미토번 (미토성 水戸城, 35만 석) 입니다.
일본 260여개 번의 번주는 2넌 중에 1년은 자기 영지에 있지만 다음 1년은 참근교대
라고 해서 에도(도쿄) 로 올라와서 머무니 도쿄에 번주와 수행원을 위한
주택 이 있어야 하고 아울러 정원을 만들었으니 여기 고라쿠엔 小石川後楽園 입니다.
그런데 미토번 은 도쿄 북동쪽 현재 미토시에 있으니 거기에도 후손 도쿠가와 나리아키 (徳川斉昭)가 일본
3대 정원에 들어간다는 수천그루의 매화 나무 로 유명한 가이라쿠엔 偕樂園(해락원) 을 만들었습니다.
그런데 여기 고라쿠엔 小石川後楽園 을 만든 도쿠가와 미쓰쿠니 는 대일본사 大日本史 라는 역사서
편찬을 시작했으니 일본 첫 역사서는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이고 두 번째 역사서는 797년
에 완성된 속일본기이니 그 이후의 역사를 위해 1657년에 사국(史局)을 열고 편찬을 시작해
1715년에 초판을 완성하지만...... 최종 완성된 것은 250년 이나 지난 메이지 39년인 1906년 입니다.
본기(本紀) 73권, 열전(列傳) 170권, 지(志)・표(表) 154권으로 전 397권이며 목록
5권을 포함하면 402권으로 일본 정부가 아닌 일개 지방의 번이 편찬한
것이 특이합니다만.... 고산케 (御三家 어삼가) 이기 때문에 가능했다고 여겨집니다.
대일본사 (大日本史) 는 다이니혼시 라고 하는데...... 초대 신무왕(神武天皇 진무천황) 부터 100대
고코마쓰왕(後小松天皇 후소송천황) 까지 일왕(천황)의 치세를 다룬 기전체 사서 로 “대일본사”
라는 이름은 편찬을 시작한 미쓰쿠니 사후인 1715년에 번주 도쿠가와 쓰나에다 가 지었다고 합니니다.
저 미토번 은 일본에서도 유학의 본산 이었으니 유학자들이 많았던지라 수준높은 한문체 로 쓰여졌고
기사에는 출전을 명시 했으며 고증에도 주의를 기울였는데 의공행실등 전기사료에 의하면...
청년기의 미쓰쿠니는 비행도 많이 저질렀지만 1645년에 “사기, 백이(伯夷)전” 을 읽고 백이・숙제
고사에 감명 을 받아 이후 자신의 비행을 반성하고 학문에 정진하여 사서 편찬에 뜻을 두었다고 합니다.
일본에서는 일본서기를 위시한 육국사등 사서는 편년체 로 편찬된 것이 일반적이고 중국 사마천의 “사기”
같은 기전체 의 사서가 편찬된 선례가 없었는데, 사관의 반대 의견도 있었으나 미쓰쿠니는 기전체 를
고수했으니 에도 막부의 사서 편찬이 1657년에 발생한 도쿄 메이레키 대화재로 자료가 대부분 망실
된 것이나.... 유학자로 막부에 봉사했던 하야시 라잔의 서고 소실과 죽음 등이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미쓰쿠니 는 부친 사후 미토번주 에 오른후 막부에서 1662년 하야시 가호에게 명해 편년체의 사서 “본조통감”
편찬을 개시하자 번저에 초대해 자문 을 들었다고 하며 이후 고마고메 별저의 사관(史館) 을 고이시카와
본저로 이전해 “쇼코칸” 이라 개칭하고 사관 수도 늘려 멀리 지방과 남조에 관련된 사료를 폭넓게 수집합니다.
미토번주 미쓰쿠니 는 일본에 망명한 명왕조의 유신이었던 “주순수” 를 초빙하여 "역사의 정통성"
이라는 전통 개념에 대한 가르침을 받았으니 북조가 아닌 "남조를 정통" 으로 보았고 특히
남조측 무장 구스노키 마사시게의 충성심을 다루는데도 주순수 에게서 영향을 받은 결과이며
또 신공황후를 천황에서 제외 했고 그외 기타바타케 지카후사의 “신황정통기” 의 영향도 받았습니다.
이 정원에는 세열단풍과 거먕옻나무, 느티나무, 은행나무 등이 심어져 있으며 11월 하순부터
12월 초순에 물든다는데... 교토의 아라시아먀를 본떠서 만든 오오이가와(大堰川) 부근과
간토쿠테이 (涵徳亭) 를 등지고 도게쓰(渡月) 에서 바라보는 단풍은 유독 예쁘다고 합니다.
동양 정원은 자연친화적이며 인간 중심적 으로 명상과 함께 자연을 생각하면서 보는 기쁨을 얻는데 목적이
있으니 "도가" 사상 혹은 "선" 사상의 영향으로 비정형적인 형태 를 띈다는 점에서는 3국이 비슷한가 합니다.
3국 공통은 "수목과 물 그리고 암석" 이니 그 중에 일본의 전통적인 정원은 바위의 배치, 그림자의
형태, 식물 상호간의 조화 등에 "상징적이고 비유적" 인 의미를 부여했으니.... 일본 정원
의 4대 양식으로 고산수식 정원, 선정식 수경정원, 문인조 정원 및 다정식 정원 을 들 수 있습니다.
반듯한 정원을 구경하다 정자가 있어 앉았더니 문득 이한씨의 책을 소개하는 글을 국제신문에 쓴 박현주
기자의 신문기사가 떠오르니 제목은 “선비 이황은 ‘수익율 200%’ 투자의 신 이었다, 우리는 투기의
민족 입니다” (이황은 결혼을 두번하는데 그때 마다 부인이 처가의 논과 노비 를 가져와서 밑천이 됩니다)
조선이 개국하고 한양을 새로운 수도 로 정했을 즈음 한양에는 부동산 광풍 이 불어닥친다. 새로 유입
되는 주민이 너무 많아 집이 모자랐기 때문 이다. 역사 전공자의 치밀함과 스토리텔러의
생생함을 겸비한 이한 작가는 역사의 바다에서 사람냄새 나는 이야기를 찾는 ‘역사 커뮤니케이터’ 이다.
조선시대 사람들은 어떻게 먹고살았을까 하는 질문에서 이 책이 시작됐다. 많은 역사책이 조선의
경제는 사농공상의 유교 질서를 바탕 으로 돌아갔다고 설명한다. 작가는 그 빈틈을 파고든다.
법과 제도, 사상과 질서의 틈바구니에서 당시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행한 수단과 방법을 복원했다.
우리가 잘 아는 역사속 인물부터 낯선 이름까지 누구보다 돈을 사랑했던 사람들 이야기 가 펼쳐진다.
저자는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록부터 이황의 편지 같은 개인 기록까지, 사료의 바다에서 돈과 관련된 온갖
소동을 샅샅이 건져냈다. 조선을 개국하고 수도를 한양으로 정하면서, 한양에는 부동산 광풍 이 일어났다.
갑자기 한양 인구가 불어나면서 집을 구하기 힘들었기 때문이다. 몇몇 상인 집단은 매점매석
으로 큰돈을 벌어 유통 공룡이 됐다. 일제 강점기에는 주식 지옥도 가 개항 도시
인천에 펼쳐지고, 금광 은광에 전 재산을 투자하고, 기회의 땅을 찾아 만주로 떠나기도 한다.
저자가 되살려낸 조선은 ‘재테크의 나라’ 라 불러도 될 만큼 역동적이다. 책에서 ‘이황’ 이라는 이름을 만났을때
당황했다. 성리학자가 아닌 투자자 이황은 처음 이다. 이황은 가장으로서 가족이 굶을까 봐 진심으로 걱정했다.
따라서 농지를 사거나 농장에 심을 작물을 정하는 등 투자할때 매우 신중 했다. 벼는 논에
물을 가두고 모내기하는 이앙법을 써야 소출이 는다. 하지만 백성 사이에
물을 둘러싼 싸움 이 크게 일어나는 등 사회문제가 심각해 당시 조선은 이앙법을 금지 했다.
이황은 소출을 늘리고자 불법이던 이앙법을 슬쩍 도입 한다. 돈이 되는 작물인 목화씨를
심어두고 누가 훔쳐 가지 못하게 망보게 했다. 노비 중 누가 일을 잘하고 못하는지
체크했다. 뛰어난 농장 경영자이며 투자자였던 이황은 수익률 200% 의 신화 를 남겼다.
그러면서 검소했다. 말에게 먹일 콩을 살 때면 직접 영수증 을 챙겼고, 아들에게 근검절약을
당부했다. 본인에게 돈을 쓰는 데는 엄격했으나, 생필품이나 특산물 선물을 가족과
친지에게 챙겨 보냈다. 아들에게 세금이 누락되지 않도록 조심하라고 당부하는
모범 납세자 였다, 이황은 투자하면 성공하고, 쓸 때는 쓰고, 아낄 때는 아꼈던 인물이다.
조선시대에는 토지 보다도 더 이익이 되는 재산은 "노비" 였으니..... 1618년 이지 남매
분재기(分財記) 에 보면 노비 299구를 8남매가 분할 상속 하며, 1570년 퇴계
이황 선생이 죽었을 때도 노비 367구 를 5남매 가 나누니 "조선은 노예제 사회" 였습니다.
노비를 생각하노라면 동아일보 ‘왕은철의 스토리와 치유’ 칼럼에 나오는 “살아있는 순교” 라는 글이
떠오르는데 저 임진왜란때 보다는 300년이 지난 이후에도 조선인들의 순교 는 더 많아졌습니다.
“어미와 떨어지거든 하늘이 찢어지도록 울어라. 울어서 네가 살아 있음을 알려야
한다. 그래야만 네가 산다. 그 울음을 주께서 들을 것이고 사람의 귀가 들을
것이고 종국에는 인정이 움직일 것이다.” 김소윤의 소설 ‘난주’ 에 나오는 말이다.
아이를 떼어놓는 어미는 정약현 (다산 정약용의 형)의 딸 난주 이고, 아이는 1801년
신유박해 때 참수당한 천주교인 황사영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살배기 아들 이다"
"신유박해는 백서(帛書) 사건이 단초였다. 백서는 황사영이 종교 탄압과 관련하여 베이징의
천주교 주교에게 보내려고 비단(帛) 에 쓴 밀서 였다. 그 사건으로 황사영은 능지처참
을 당하고 부인은 관비 가 됐다. 그런데 그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만, 역사는 관비가
된 부인에 대해서는 침묵 한다. 영웅의 자리는 남성의 몫 이었다. 소설은 사실에 주목한다.
부인에게 신앙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버리는 순교(殉敎)는 일종의 사치 였다." "신앙심이 덜해서가 아니라
두살된 아이 때문이었다. 배교(背敎), 종교를 배반해서라도 목숨을 보전해 젖먹이를 거둬야 했다.
그녀는 예수의 어머니를 떠올리며 위안을 삼았다. “성모께서 처녀의 몸으로 잉태한 예수를 기쁨으로
낳았으며 아들의 마지막 길까지 묵묵히 곁을 지켜주지 않았던가.” 난주가 택한 길은 ‘살아 있는 순교’ 였다."
"그녀는 제주도로 끌려갈 때 배가 추자도 에 정박하자 모래밭에 있는 소나무에 아이를
묶어 놓게 했다. “하늘이 찢어지도록 울어라.” 누군가에게 발견되어 양민의 삶을
살도록 하려는 배려였다. 그렇지 않으면 노비가 될 터였다. 노비는 대물림 이었다."
로마는 전쟁에서 잡아온 포로인 이민족을 노예 로 삼았고 노예가 돈을 모아 자유를 살수도 있었으며
또는 성심성의껏 하면 주인이 풀어주기도 하니 이러한 사람을 "해방노예" 라고 하니 훗날 황제가
되는자도 나오지만 조선은 자기민족을 노비 로 부리고 신분에서 벗어날수 없는 영원한 노비 였습니다.
노비제도는 1894년 동학 봉기때 아베 신조총리 외고조부 오오시마 요시마사 가 서울에 진주해 경복궁을
공격해 두시간만에 고종을 포로로 잡고 김홍집 친일내각 을 세우니 이노우에 공사가 지도해서
갑오개혁 을 하는데..... 노비제도를 폐지 하고 양반과 상놈의 신분제도와 천민제도를 폐하며 500
년간 이어진 과부 재혼금지 제도를 철폐 하니 친일파가 아니라 조선 스스로 개혁 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그녀는 제주도에서 37년을 관비 로 살았지만, 신앙의 가르침대로 낮은 자들에게 헌신하고
봉사하는 삶을 살았다. 추자도에 버린 아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그럼에도 소설은
그녀가 노년에 아들을 만나 살아가는 것으로 묘사한다. 그렇게라도 그녀의 상처와
응어리를 풀어주려는 배려에서 나온 상상 이다. 이럴 때 소설은 애도의 한 형식 이 된다 "
조선시대 얘기가 이어지니 후기 정조때 무관 노상추의 삶은 한양 중심의 조선 을 보여준다. 경상도 선산에서
태어난 노상추의 조부는 한양에서 벼슬하다가 고향으로 돌아왔다. 양반가문을 유지하기 위해 노상추도
과거를 준비한다. 지방에 사는 노상추가 과거 보러 한양에 몇 번 오가는 동안 조부가 남긴 가산이 줄어든다.
과거 공부에 신경쓰면 가문의 농사가 엉망 이 되고(이황의 경우를 생각해보라!), 농사에 신경쓰면 과거 공부가
엉망 이 된다. 과거 날짜에 맞춰 겨우 한양에 올라가면 갑작스레 과거가 연기되기도 하고, 연기된 날
까지 기다리자면 머물 곳이 없다. 고향에 있는 동안 한양에서 갑자기 특별 과거가 실시 됐다는 소식도 들린다.
노상추는 문과에서 무과로 아예 전공을 바꾸고 겨우 급제하는데 한양에서 벼슬하는 내내 집
문제로 시달린다. 세 들 집이 없거나, 집세냈지만 힘 있는 세입자에게 밀려나기도 한다.
반대로 집주인들은 부패한 관리에게 집을 빼앗기기도 한다. 노상추가 사직하고
낙향할 때 그는 자기 인생에서 가장 큰 돈 먹는 하마였던 집세에서 풀려나는 기분 을 맛본다.
조선시대 사람들의 인생 역전 분투기, 그 좌충우돌을 보노라면 오늘을 사는 우리가 ‘투기의 민족’ 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부자 되고 싶은 욕망, 돈에 대한 갈망 은 조선 시대나 21세기 대한민국이나 다르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