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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이산 4 - 무이정사를 지나 돌계단을 걸어서 10대 명산인 무이산 천유봉으로!
2025년 3월 5일 푸젠성(복건성) 우이산(武夷山 무이산) 호텔에서 택시 영업을 하는 승용차를 타고 20원
을 주고 우이산난먼 (武夷山 景区 南门) 으로 들어가니 경구 입장권 티켓은 140 元
이고 전동차 운임은 1일은 70元 인데, 65세 이상은 입장료가 무료이고 전동차도 절반 값인 40元 입니다.
40元에 뗏목 배인 주파이( 竹筏, 죽벌) 130원 합쳐 1인당 170원을 내는데 배 탈 시간을 묻기에 표를 보고는
7개 중에서 마지막에서 2번째인 2시 10분을 선택하고는 전기차인 전동차를 타고 안으로 들어갑니다.
우리는 6개 경구 중에 3개 경구를 보려고 하니.... 1. 운와(云窩), 천유(天游), 도원동 경구(桃源洞景區) 와
2. 무이궁 경구(武夷宮景區) 3. 수렴동- 대홍포 경구 (水簾洞-大紅袍景區) 인데 다 볼수 있을른지.....
전기차인 전동차를 타고 들어가 천유(天游) 정류소에서 내려 10여분을 걸어 강에 다리가 나타나니
五谷 大橋 (구곡계 주취시 5곡) 대교로...... 주파이 竹筏(죽벌) 가 여러척 지나가는걸 구경합니다.
그러고는 5분쯤 걸어들어가니 '무이 서원' 안내판이 보이고 '주희원(朱熹園)' 이라 새긴 바위가 보이며
그 뒤에 무이정사 (武夷 精舍) 라는 건물이 있어 구경하는데.... 유학을 대성해
성리학 곧 주자학을 만든 주자(주희) 가 8년간 머물며 성리학을 연구하고 제자를 기른 곳이라고 합니다.
거의 평생을 무이산에서 살며 주자학을 집대성하고 후학을 양성한 주희는
구곡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무이구곡가" 라고 하는 시를 지었습니다.
山無水不秀 水無山不淸
산은 물이 없으면 수려하지 않고, 물은 산이 없으면 맑지 못하다.
曲曲山回轉 峯峯水抱流
골짜기 골짜기마다 산이 돌고, 봉우리 봉우리마다 물이 감아돈다.
그러고는 무이정사 (武夷 精舍) 를 뒤로 하고 걸어서 늙은 호랑이굴 통과한후 작은 고개(?)
를 넘고 돌 계단을 올랐다가 다시 내려가서 다동 (茶洞 차동굴) 에
도착하는데, 여기서 본격적으로 텐요우펑 (천유봉 天遊峰 천유봉) 등산을 시작하게 됩니다.
지극히 가파른 돌계단 840개를 한시간에 걸쳐 앞 사람 운동화 뒷꿈치만 보고 오르게
되는데..... 아득한 통바위를 보고 올라가면 성수기에는 '인간 띠' 가 정상까지
이어져 있으니 쉬엄쉬엄 올라가며 사진도 찍고, 산 아래의 구곡도 감상할 수 있습니다.
정상에서는 오히려 구곡이 제대로 보이지 않으므로 중턱의 관폭정에서 조망하는 것이 아름답다고
하는데.... 구곡계 6곡에서 절벽 끝에 달랑 놓인 이 관폭정을 보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왼쪽에 날이 선 바위인 은병봉은 3개의 바위 묶음으로 산 위에서는 접순봉이라 하며,
천유봉의 한쪽 벼랑 (쇄포암) 을 빼고 가장 가파르고 위용이 있는 바위이며
오른쪽으로 나란히 솟은 봉우리는 여자의 젖가슴을 닮았다 해서 '쌍유봉' 으로 불립니다.
천유봉은 67도가 넘는 예각의 통바위이나 정상은 평지인데.... 거의 90도로 내리꺾은 6곡에서 보이는
부분을 구곡계에서는 쇄포암으로 부르니, 더 보였다 덜 보였다를 반복하는 구곡을 보며 정상인
천유봉에 도착하는데 매표소에서 1시간 30분 정도 걸리고 다동 (茶洞) 에서는 1시간 정도 잡으면 됩니다.
이곳 천유봉은 계단이 총 848개인데.... 계단의 개수 보다도 그 가파름이 거의
직각 수준 이라 여간 마음을 내지 않으면 정상에 오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높이로 말하면 천유봉은 삼앙봉(三仰峰)만 못하다.
깎아지르기는 대왕봉(大王峰) 만 못하다.
수려하기로는 옥녀봉(玉女峰) 만 못하다.
험하기로는 접순봉(接筍峰) 만 못하다.
그자체로 봤을때는
그저 하나의 큰 돌덩어리에 불과하다.
그런데도 칭송의 대상으로 독보적인 것은
그 위치와 각도때문이다.
그 위치와 각도가 훌륭한 경관을 만드는 것이다."
말이 있을정도로 이곳 천유봉의 경사진 각도에서 그 위엄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데 올라가는 내내
사람들은.... "이거 좀 아닌거같아", "너무 가파른데", "나 다시내려가고 싶어" "온몸이
땀투성이야" "너무 힘들다" "정상까지 얼만 남았어?" 등 거친 숨소리와 함께 돌계단을 오릅니다.
그렇게 중간중간 어디까지 왔나 하며 뒤를 돌아볼 때 마다 와! 장관이다. 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천유봉, 저멀리 보면 대나무 뗏목을 타는 곳인 구곡계(九曲溪)가
보이는데.... 이곳 천유봉이 위치한 곳은 구곡계의 아홉개의 굽이중 6곡(六曲) 입니다.
천유봉 정상의 누각은 '천유각' 이니 1층에는 도교와 관련된 '팽조' 인물상이 있고, 2층은 송미령
여사가 춤을 춘 곳이라는 글귀가 있으며 쉼터가 있는데... 장개석 부부가 가마로 오르내리기
위해 만든 길이 등산하는 길 반대편에 하산하는 완만한 숲길로 일명 '국민당 길' 이라고 합니다.
발 아래의 절경을 감상하면서 올라온 가파른 계단은 공산당이 중국을 장악한후 만든 일명 '공산당
길' 이니.... 정상의 천유각 앞에는 6위안 (한화 1,300원 정도) 에 깎아주는 오이가
꿀맛이고, 천유각 안을 둘러보고 하산 길로 접어들면 요란한 바위 각자들이 눈 앞에 펼쳐집니다.
순탄하지만 시계가 막힌 국민당 길에는 국민당이 세운 패방이 있으며 이 하산길은 청아한 새
을음을 들으며 내려가노라면 소프트 아이스크림점이 있으니 무이산을 대표하는
차(茶) 인 '대홍포(大红袍)' 로 만든 아이스크림으로 은은하게 나는 대홍포향이랑 잘어울립니다.
여기 정류소에서 다시 전동차를 타고 달려서 대홍포 정류소참 (大紅袍站) 에
내려 걸어서 馬斗岩(마두암) 차밭을 지나면 대홍포 (大紅袍) 가 나옵니다.
산 아래 무이산의 명물인 차밭이 펼쳐지니... 출구로 나오면 시계가 트이고 거대한 바위가 앞을 막는데
접순봉(은병봉?) 으로 바위의 틈이 한일(一) 자로 보일 정도로 좁은 일선천으로 갈수도 있습니다.
무이산 대홍포 경구는 따로 입장료를 받는데, 무이산을 입장할때 6개 코스가 묶인 표를 샀으면 입장이
가능하며, '대홍포는 무이암차이고 “茶 중의 왕” 으로 불리는데, 대홍포 (大紅袍) 는 단 6그루라 1년
생산량이 500g 정도 밖에 안되는 고가품이기 때문에 '소홍포' 라 불리는 후손들을 많이 키운다고 합니다.
馬斗岩 (마두암) 차밭에서 나는 대홍포는 명나라 때 농부들이 가렴주구에 시달려 달아났다가 돌아와
보니 차잎이 붉게 발효(우롱차) 되었으니 맛이 좋아 알려졌다고 하는데, 무이산 암반에서
자라는 우이암차가 특산품이며 대홍포를 최고로 치니 무이산 정산소종은 홍차의 기원이 되었답니다.
대홍포를 보러 가는 10분 거리인 산길 양쪽으로 거대한 바위들이 서 있으며 대홍포 입구와
출구는 같으며 '비단 羅' 자가 들어가는 이름의 식당은 차와 더불어 무이산의
또 다른 특산품인 목이(石耳 속이)와 느타리볶음 요리가 졸깃한 게 입에 착착 달라붙습니다.
도보 - 유향간 (流香涧) - 도보 - 혜원선사(慧苑禪寺) - 고애거 - 수렴동 (水帘洞) -
폭포 - 三賢司 (삼현사, 유자휘, 유보, 주자) - 안쪽에 보이는 아슬아슬한
계단이 출구 - 도보 - 전동차 - 우이산 베이먼 武夷山 景区 北门 에 이르게 됩니다.
수렴동도 무이산 안의 관광 코스이며, 대홍포는 이 바위 앞에 있는 좀 작은 바위에 있는데 혹은
텐요우펑 (천유봉 天遊峰) 등산 → 도원동 桃源洞 - 주취시 구곡하류 九曲河流 로 가거나
전동차를 타고 武夷宮 무이궁(주희기념관) 관람 → 송가(宋街) - 무이산박물관을 볼수도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오른 무이산 (武夷山) 은 구이린(계림) 과 더불어 壁水斷山 (벽수단산)
이라고 불리니 중국의 10대 명산으로.... 나머지는 황산, 아미산,
오대산, 태산, 여산, 화산, 옥산, 초몰링마봉 (에베레스트)에 "백두산(장백산)" 입니다.
그런데 위의 마지막 산에는 장백산이라고 써야할지 백두산, 혹은 장백산(백두산) 아니면
백두산(장백산) 이라고 써야할지 망설이게 되는데..... 백두산(장백산)은 BC
2세기에 편찬된 중국 山海經(산해경) 에 不咸山(불함산) 으로 처음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그후 한나라 시대에 개마대산, 위진 남북조시대에 태백산과 도태산으로 기록됐으며 이후 백산,
삼신산으로 불리다가 금나라 때는 영웅산을 거쳐 長白山(장백산)으로 불리게 됩니다.
여진어로 "골민샹기얀알린 (Golmin Šanggiyan Alin)" 곧 궤리만싸에아린 (果勤敏瑢廷阿林)
을 중국인들의 한자로 옮기니..... 큰흰산(태백산) 또는 "긴흰산(장백산)" 으로 기록됩니다!
백두산은 1285년에 일연이 쓴 삼국유사에서 "환인의 아들 환웅이 하늘나라에서 태백산 신단수에
내려와 신시를 열었으니....." 에 나오는 "태백산(太白山)" 을 오늘날
우리는 백두산으로 보기도 합니다만, 정작 일연은 각주에서 '태백산을 묘향산' 이라고 적었습니다.
그런데 일연은 “魏書(위서) 에 의하면....” 이라고 근거를 밝혔지만 정작 중국의 25사인 위서(魏書) 에는 단군
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으니... 그럼 그가 잘못 알았는지 아니면 틀린 말을 했는지는 알수가 없습니다?
백두산(白頭山) 에 대한 우리나라 사서(史書) 의 최초 기록은 조선시대에나 나오지만
개인이 쓴 책 까지 보면, 역시 1285년에 쓴 삼국유사가 처음이니....
BC 2세기에 편찬된 중국 山海經 (산해경) 에 비하면 무려 1,400년이나 늦습니다?
삼국유사 권제3 탑상(塔像第四) 대산오만진신에 (臺山五萬眞身)에“留二十日乃還<五臺山> 此山乃<白頭山>
之大脉, 各臺眞身常住之地.” 이라고 나오니.... “이 산(五臺山 오대산) 은 곧 백두산(白頭山) 의
큰 줄기로 각 대(臺)는 (불보살의) 진신이 항상 머무는 땅이다.” 에서 백두산이라는 명칭이 처음 보입니다.
두번째는 1396년 조선 개국후 정도전과 조준이 편찬한 "고려사" 에 “白頭山(백두산)" 이란 이름이 나오니
“성종 10년 991년 10월 왕이 서도에 갔으며 압록강 바깥에 사는 여진족을 백두산 너머로 쫓아내
거기서 살게 했다.” 이며 그 외에도 “有名虎景者.... 自白頭山遊歷, 至扶蘇山 이름이 호경(虎景)
이라는 사람이 백두산(白頭山)에서 부터 두루 돌아다니다가 부소산(扶蘇山) 에 이르러” 라고 나옵니다.
또 고려사에는 “玉龍記云, ‘我國始于白頭, 終于智異 옥룡기(玉龍記) 에 이르기를 '우리나라 (의 지형지세) 는
백두산(白頭山) 에서 시작하여 지리산(智異山) 에서 끝나는데” 라고 언급 되며 용비어천가 1권 4장의
주석에 “慶源府西有長白山, 一名白頭山, 山凡三層, 其頂有大澤 南流鶯鴨緑江” “경원부(慶源府)
서쪽에 장백산이 있는데 일명 백두산이다. 정상에 큰 못 (大澤) 을 길러서 남으로 흘러 압록강” 이 보입니다.
고려시대까지 백두산(白頭山) 이름이 안나오는 이유는 고구려는 하늘에 대한 제사를 압록강변 대혈(동굴)
에서 지냈으며.... 668년 고구려가 망한후 우리 국경선은 "황해도에서 원산" 이라 백두산은 남의 땅이
됐으며, 조선인이 처음 백두산에 오른 것은 청나라 목극등의 요구로 1,044년이나 지난 1712년이었습니다.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역사책인 1145년에 편찬된 삼국사기에도 백두산이라는 말은 전혀 없는데, 고구려
시조 주몽의 이름이 사서마다 다르니..... 주몽(朱蒙), 추모(鄒牟), 중모(中牟), 중해(衆解), 상해(象解),
추몽(鄒蒙), 중모(仲牟), 주배(朱背) 와 도모(都慕) 라? 고대에 문자를 만들지 못한지라 주몽 당대에 한자
로 기록되지 못하고 말로만 부르다가 후대에 한자로 기록되면서 각기 다른 발음들이 저리 기록된 것입니다.
반면에 고구려시대에도 속민인 말갈족은 백두산 북쪽 장백폭포가 흘러 송화강으로 들어가는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고 사냥과 약초 채취로 살았으니... 훗날 여진족 너옌부, 주셔리, 야루걍부로 후금(청나라)
태조인 누르하치가 직접 조문하고 곡한 후금 5대 공신 어이두 바투루는 백두산 여진족 뉴호록씨 입니다.
해서 여진족들은 장백산(백두산) 을 조상의 탄생지로 여기니, 가오홍레이가 쓴 1,100페이지에 달하는
‘절반의 중국사’ 라는 책 제 8장 말갈편에 보면..... “장백산 기슭에 놀던 선녀 셋 중에 푸쿠룬이
까치가 떨어뜨린 붉은 열매를 먹고는 후금을 건국하는 아이신기오르 (애신각라 ) 를 낳았다고 나옵니다.
1115년 여진족들이 金(금) 나라를 세우자 자기민족의 발상지는 장백산이며, 그 천지의 물이
북쪽으로 흐르는 송화강 유역이 천년이 넘는 삶의 근거지라 1172년에 금나라는 장백산에
제를 올렸으며... 1193년에는 장백산을 開天宏聖帝(개천굉성제) 로 이름(존호) 을 지어 올립니다.
청나라 강희제는 장백산(백두산)을 만주족(여진족)의 발상지라 1677년 12월에 백두산을 "장백산지신" 이라
부르며 천지에 손수 올라 직접 제사를 올렸는데... 김대건 신부가 페레올 주교에게 보낸 편지에
"만주족들은 장백산을 청나라 시조 누루하치가 탄생한 곳이라 하여 신성시하며 제사 지낸다" 고 적었습니다.
“장백산(長白山) 동쪽 포이호리 연못에 사고륜과 정고륜, 불고륜(弗庫倫) 천녀(天女) 셋이 목욕을 마쳤을 때,
신작(神鵲)이 붉은 과일을 막내 옷에 떨어뜨리니 입에넣자 뱃속으로 들어간후 임신이 되어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어머니는 아이신고로(愛新覺羅 애신각라) 로 성(姓) 을 삼으라, 하늘이 너를 탄생시킨 것은
난국을 평정하도록 함이니 물흐름을 따라가라고 하며 배를 띄운뒤 태우고, 어미는 구름을 타고 사라졌다 "
다산 정약용도 신광하에게 ‘백두산은 산해경에 불함산, 지리지에는 장백산이다’, ‘청 황제가 오악(五嶽) 에
백두산을 더해 육악으로 삼고, 제사를 지내니 존귀함과 중대함이 옛날에 비할비가 아니다’ 라 했는데,
정약용 뿐만 아니고 고려말 목은 이색은 ‘곡주공관신루기 (谷州公館新樓記)’ 에서 “우리 나라의 영토는
삼면이 큰 바다에 닿았고, 북쪽으로는 장백산에 이른다 (我國壤地。三面大海。北連長白山)” 고 썼습니다.
1458년 신숙주가 집필한 ‘국조보감’ 의 세조 초 기록에도 “삼각산을 중악, 금강산을 동악, 구월산
을 서악으로, 지리산을 남악으로, 장백산을 북악으로 삼자고 건의했다” 는 기록이
있으며 조선왕조실록에는 같은 산을 가리키는 이름으로 백두산이 95회, 장백산이
40회 나오는데, 초기에는 "장백산이 대부분" 이고 후기로 오면 거의 대부분 백두산으로 바뀝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