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봉(鶴峯)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은 서애(西厓) 유성룡(柳成龍, 1542~1607)과 여러 가지로 얽힌 인연이 깊다.
안동지방의 두 명문대가로서 얼핏 보면 서로 대립되는 듯이 보이지만, 당시 이 두 사람은 동문수학한 친우인데다가 왜국에 통신사로도 함께 다녀왔다. 임진왜란 때에도 한 사람은 영의정, 다른 한 사람은 의병장으로 나라를 보전하는 일에 같이 힘을 썼다.
1620년 여강서원에 김성일, 유성룡을 배향하였다. 그런데 이황(李滉, 1501~1570)의 왼편에 누구를 모시냐에 대해 논란이 벌어졌다. 조정에서의 순서가 영의정 다음에 좌의정, 우의정의 차례이듯이 좀 더 서열이 높은 분은 왼쪽에 모시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었기 때문에 왼편에 누구를 모시느냐에 따라 제자의 서열이 정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서애 유성룡 쪽에서는 벼슬로서 영의정이 더 높으니 서애를 왼쪽에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고, 학봉 김성일 쪽에서는 나이로 보나 학문으로 보나 학봉을 윗사람으로 모셔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단순히 서애와 학봉의 인물이나 학문에 대한 평가뿐만 아니라 서애의 사상을 따르는 제자들과 학봉의 사상을 숭상하는 제자들 가운데 어느 쪽이 더 가치 평가를 받느냐의 문제이기도 했고, 또 한편으로는 풍산유씨와 의성김씨라는 안동의 명문사족 간의 세력 견줌이기도 했다.
양쪽의 주장과 세가 팽팽히 맞서 결말이 나지 않자 당시 상주에 있던 우복 정경세(鄭經世, 1563∼1633)의 자는 경임(景任), 호는 우복(愚伏)에게 물었는데, 그가 서애 쪽에 가까웠기 때문인지 유성룡을 왼쪽에 모시라고 했다. 시비는 여기에서 일단락되는 듯 했지만 세월을 넘어서 다시 이어졌다.
1805년 영남 유림들이 서울 문묘에 김성일, 유성룡과 한강 정구, 여헌 장현광 네 분을 종사하게 해달라고 청원을 올리려는데, 누구를 앞에 적느냐에 문제가 생겼다. 이때 나이순으로 학봉이 앞에 오르니, 서애 쪽에서 서열이 잘못 됐다고 따로 상소를 올리는 바람에 조정에서는 이건 자체를 기각해 버렸고, 네 분의 문묘 종사가 다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이때 억울하게 문묘 종사의 길이 막혀버린 정구와 장현광의 제자들이 두 분을 따로 대구의 이강서원에 모실 것을 결정하자 안동 유림은 이를 규탄하는 통문을 썼다. 이때 통문의 작성이 학봉 쪽이었던지 이번에도 학봉을 앞에 거명하니, 서애파는 다시 문제를 삼았던 것이다. 이렇게 200여 년에 걸쳐 세 번이나 서열이 문제되었다, 그래서 결국 이황은 도산서원에, 학봉은 임천서원에, 서애는 병산서원에 갈라 모시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두고 병산서원과 호계서원 사이의 시비라고 해서 ‘병호시비’라고 부른다. 그 뒤 모실 분을 잃어버린 호계서원은 서당 없이 강당만 남았다가, 안동댐 건설로 서원 자리가 수몰되게 되자 임하면 임하리로 옮겨지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