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학의 쇠퇴와 교회의 쇠퇴: 좁은 길을 다시 생각하다]
교회가 쇠퇴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듣는다. 교인 수가 줄고, 젊은 세대가 교회를 떠나고, 교회에 대한 사회적 신뢰가 낮아졌다는 이야기도 반복해서 들린다. 이것은 단순한 체감이 아니다. 미국에서는 퓨 리서치 센터(Pew Research Center)가 수십 년에 걸친 기독교 인구 감소를 보고해 왔고, 한국에서도 한국교회의 사회적 신뢰도 하락을 보여주는 여러 조사가 반복해서 발표되고 있다. 그래서 교회는 다시 성장해야 한다고 말한다. 더 좋은 프로그램, 더 세련된 예배, 더 강력한 전도 전략, 더 효과적인 미디어 활용을 고민한다.
물론 그런 고민도 필요하다. 그러나 나는 교회의 쇠퇴를 조금 더 깊은 자리에서 생각해 보고 싶다. 교회의 쇠퇴는 단순히 사람들이 교회를 덜 찾게 된 현상만은 아니다. 어쩌면 더 근본적인 문제는 교회가 인간과 시대를 읽는 능력, 권력의 언어를 의심하는 능력, 고통의 의미를 해석하는 능력을 잃어버린 데 있는지 모른다. 나는 이것을 인문학의 쇠퇴와 연결해서 생각한다.
현재 미국에서도 인문학의 제도적 위축은 뚜렷하다. 미국학술원(American Academy of Arts & Sciences)의 인문학 지표(Humanities Indicators)에 따르면, 2024년 미국 대학에서 인문학 학사학위는 전체 학사학위의 8.4%에 그쳤다. 이는 2012년 13.1%에서 크게 줄어든 수치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같은 기간 인문학 안에서도 종교학(religious studies) 학사학위가 무려 59% 감소했다는 사실이다. 인문학이 쇠퇴하는 가운데 종교를 학문적으로 사유하는 능력이 가장 가파르게 무너지고 있는 것이다. 인문학의 쇠퇴는 단순히 문학, 역사, 철학을 덜 공부하게 되었다는 뜻이 아니다. 그것은 인간을 깊이 이해하는 힘이 약해졌다는 뜻이다. 문학은 타인의 고통 속으로 들어가게 하고, 역사는 권력과 폭력이 어떻게 반복되는지 보여주며, 철학은 우리가 당연하다고 믿는 전제들을 의심하게 한다. 인문학은 인간이 무엇인지, 좋은 삶이 무엇인지, 공동체가 무엇인지, 진실이 무엇인지 묻게 한다.
그런데 이런 질문들이 사라지면, 교회도 함께 가난해진다. 성경을 읽어도 인간을 읽지 못하고, 교리를 말해도 시대를 읽지 못하며, 복음을 전해도 고통의 자리를 읽지 못한다. 그렇게 되면 성경은 살아 있는 말씀이 아니라 권위를 정당화하는 문장 조각이 되고, 교리는 신앙의 깊이가 아니라 통제의 언어가 되며, 공동체는 사랑의 몸이 아니라 순응을 요구하는 조직이 되기 쉽다.
종교개혁은 단순히 종교 내부의 사건이 아니었다. 그것은 인문학적 각성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르네상스 인문주의는 ad fontes, 곧 “원천으로 돌아가라”(back to sources)는 정신을 일깨웠다. 사람들은 성경 원전으로 돌아가려 했고, 교회가 말해 온 전통을 다시 질문하기 시작했다. 에라스무스가 헬라어 신약성서를 편집하고 출판한 일은 단순한 학문적 작업이 아니었다. 그것은 교회의 언어를 다시 검토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루터의 종교개혁도 이런 지적 분위기와 무관하지 않았다. 인문학이 살아났을 때 사람들은 질문할 수 있었다. 이것이 정말 복음인가? 교회가 말하는 권위는 어디에서 오는가? 전통이라는 이름으로 굳어진 것이 혹시 복음을 가리고 있는 것은 아닌가? 인간의 양심은 어디에 서야 하는가? 종교개혁은 이런 질문의 힘에서 태어났다.
그렇다면 오늘 교회의 쇠퇴는 단순히 세상이 세속화되었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교회가 세상을 읽는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교회는 인간의 불안, 청년들의 절망, 노동의 피로, 경제적 불평등, 기술 문명의 폭력, 정치적 혐오, 생태 위기 앞에서 충분히 깊이 말하지 못했다. 때로는 세상을 비판하기보다 세상의 욕망을 그대로 반복했다. 성장, 성공, 규모, 영향력, 효율, 성과라는 언어가 교회의 언어가 되었다.
이 지점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이 『찬미받으소서』(Laudato si')에서 말한 기술관료주의(Technocratic Paradigm) 비판은 매우 중요하다. 교황은 기술 자체를 악한 것으로 보지 않는다. 기술은 인간의 창의성과 지성의 산물이고, 많은 선을 이룰 수 있다. 문제는 기술이 도구의 자리를 넘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전체가 될 때이다. 그것이 기술관료주의다.
기술관료주의는 모든 것을 계산 가능한 대상으로 만든다. 자연은 선물이 아니라 자원이 되고, 노동은 삶의 자리라기보다 생산성의 단위가 되며, 인간은 존엄한 존재가 아니라 기능과 효율로 평가되는 존재가 된다. 관계도 네트워크가 되고, 시간도 관리 대상이 되고, 몸도 성과를 위한 도구가 된다. 기술관료주의는 인간을 없애지 않는다. 다만 인간의 얼굴을 지운다. 그리고 그 자리에 숫자, 성과, 효율, 생산성이라는 이름표를 붙인다.
기술 자체는 악하지 않다. 인문학은 기술을 반대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다. 인문학은 기술에게 목적을 묻기 위한 공부다. 기술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묻는다. 인문학은 “왜 해야 하는가?”를 묻는다. 기술은 “얼마나 빠른가?”를 묻는다. 인문학은 “그 속도가 인간을 살리는가?”를 묻는다. 기술은 “얼마나 효율적인가?”를 묻는다. 인문학은 “그 효율 속에서 누가 지워지고 있는가?”를 묻는다. 그리고 신학은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묻는다. “이것은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의 뜻에 합당한가?”
프란치스코 교황의 지적대로, 기술관료주의에 깊이 매몰된 시대에, 이제 우리는 “좁은 길”을 다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좁은 길을 너무 자주 개인적 고난이나 종교적 불편함 정도로 이해해 왔다. 예수 믿기 때문에 손해 보는 것, 교회 다니느라 세상 재미를 조금 포기하는 것, 신앙생활을 하면서 겪는 어려움 정도로 좁은 길을 생각해 왔다. 물론 그런 의미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너무 모호하다. 오늘의 좁은 길은 더 구체적으로 말해져야 한다.
인간이 기능으로 축소되는 시대에, 좁은 문은 다시 인간을 배우는 길이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생각하기를 선택하는 길이다. 소비하면 되는 시대에 읽기를 선택하는 길이다. 빠른 답을 원하는 시대에 오래 묻고 깊이 성찰하는 길이다. 효율이면 충분하다는 시대에 인간의 얼굴을 바라보는 길이다.
그런 의미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단순한 교양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제자의 길과 연결되어 있다. 인간을 잃어버린 시대에 인간을 다시 배우는 것이 오늘 그리스도인의 좁은 길일 수 있다. 문학을 통해 타인의 아픔에 들어가고, 역사를 통해 권력의 폭력을 분별하고, 철학을 통해 시대의 우상을 의심하고, 신학을 통해 그 모든 것을 하나님의 창조와 십자가와 부활의 빛 안에서 다시 해석하는 일, 그것이 오늘 우리가 걸어야 할 좁은 길이다.
교회는 다시 읽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성경을 읽고, 인간을 읽고, 시대를 읽고, 고통을 읽고, 권력을 읽고, 자기 자신을 읽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교회 교육은 단순한 지식 전달이나 교리 주입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성도들이 세상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복음의 눈으로 해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설교도 정답을 주입하는 시간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세계를 다시 보게 하는 사건이 되어야 한다.
물론 인문학이 우리를 구원하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하나님께 속한 일이다. 그러나 인문학은 우리가 인간을 더 깊이 이해하게 하고, 복음이 도달해야 할 인간의 자리와 시대의 고통을 보게 한다. 신학 없는 인문학은 방향을 잃을 수 있고, 인문학 없는 신학은 인간을 잃을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 교회가 걸어야 할 길은 깊은 신학과 깊은 인문학이 만나는 자리다.
교회의 쇠퇴는 숫자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해석 능력의 문제다. 교회가 다시 살아나려면, 단순히 더 많은 사람을 모으는 방법을 찾는 데서 멈추면 안 된다. 해석 능력을 잃은 교회가 숫자만 키울 때, 교회는 세상을 위한 복음의 공동체가 아니라 사회적 불안을 증폭시키는 집단이 될 위험이 있다. 이것은 이미 미국과 한국 사회가 경험하고 있는 일이기도 하다. 교회는 좁은 길을 걸어가는 사람들이 모이는 곳이다. 그래야 교회는 예언자적 기능을 상실하지 않은, 세상을 위한 따뜻한 숨구멍이 될 수 있다.
좁은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시대에 생각하기를 선택하는 것, 소비하면 되는 시대에 읽기를 선택하는 것, 효율이면 충분하다는 시대에 사랑하기를 선택하는 것, 그것이 오늘 우리가 다시 걸어야 할 좁은 길이다.
장준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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