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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14 – 10:22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우상 제물은 멀리하십시오
주님과 친밀하게 교제하고 우상 제물은 멀리하십시오
여러분 생각해 보십시오.
음행과 우상숭배가 만연했던 세속 도시 고린도에서
먼저 예수 믿어 그리스도인이 된 성도들은 얼마나 귀한 사람들입니까?
요즘처럼 주변에 교회가 많고 기독교에 대해 잘 알고 있던 때가 아니었습니다.
곳곳에 아프로디테에나 제우스나 아폴로 신전들이 있었고 황제 숭배 사상이 만연하던 때였습니다.
신전마다 매일 수차례 우상 숭배가 이루어지던 곳이었죠.
이 우상숭배가 삶과 문화의 일부분이 되었던 그 땅에서 먼저 믿기로 결단한 것은 대단한 용기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믿음의 길로 나올 수도 없겠죠.
그럼에도 고린도 성도들은 아직도 충분히 신앙적 훈련과 지식을 갖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영적으로는 어린아이 같은 상태였으니 그들이 난제에 직면할 때마다 영적 아버지 된 바울에게 신앙적 지침을 구해야만 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도 '우상에게 드려졌던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와 관련된 성경적 지침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미 8장을 묵상할 때 '우상에게 바쳐졌던 고기를 먹어도 되는가?' 하는 문제가 그것이 잘못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씀 들었습니다.
우상은 신적 존재도 아닙니다.
제사에 바쳐졌던 제물이라 해도 그 자체가 어떤 영적 힘을 가진 것이 아니라는 것이 밝혀진 것입니다.
단지 음식 중에 하나로 여겨도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난해한 문제가 남아 있었습니다.
고린도에는 수많은 신들의 축제가 열렸고 제사 이후에는 축제에 참석한 이들과 함께 먹고 마시는 공동 식사 행사가 뒤따랐던 겁니다.
이 자리에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앉아서 식사해도 괜찮은가?' 하는 질문이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 음식이 자유롭다면 축제에 참석하는 것도 자유롭지 않을까요?
그러나 바울은 14절에서 우상들의 신전 행사에서 함께 먹는 것은 우상 숭배하는 일이 될 수 있음을 밝히며 이를 금하고 있습니다.
14 그런즉 내 사랑하는 자들아 우상 숭배하는 일을 피하라
바울은 그들이 이러한 축제의 식탁이 어떻게 우상숭배가 될 수 있는지를 설명하기 위해서 성찬과 구약의 제사를 예로 들었습니다.
16절, 18절 말씀인데요. 읽어보겠습니다.
16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17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18 육신을 따라 난 이스라엘을 보라 제물을 먹는 자들이 제단에 참여하는 자들이 아니냐
바울은 고린도 교회 성도들이 참여하고 있는 성찬식의 의미를 기억하게 합니다.
성찬식에서 떡과 잔에 참여하는 것은 한 몸 되신 그리스도와 연합한다는 의미이며, 동시에 함께 참여하는 성도들과 한 몸을 이룬다는 뜻이었습니다.
또한 성막과 성전에서 제사드린 이후에도 제물을 먹을 수 있었던 사람들은 제한적이었습니다.
왜냐하면 재물과 예배자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단순히 제물을 먹고 빵과 포도주를 나누는 음식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제사 후의 식사는 연합의 의미를 가진 제사의 연장이었던 겁니다.
그렇다면 고린도 성도들이 비록 음식에는 거리낌이 없다. 할지라도,
우상 제사 이후에 바쳐졌던 제물을 함께 나눠 먹는 것은 부지 중에 우상과 연합하고 우상숭배자들과 교제하는 일이 된다는 것입니다.
우상들의 축제에서 공동 식사를 나누는 것이 고린도 성도들에게는 사회적 활동이나 사교 모임 정도로 여겨지고 있었을 겁니다.
만일 이런 모임까지 빠지면 가족이나 친구들을 만날 기회조차도 없다고 항변할 수 있었을 겁니다.
그러나 사도바울은 축제의 식탁에 참여하는 것이 우상숭배가 될 수 있음을 경계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일상을 돌아봅시다.
죄의 경계선 언저리에 아슬아슬하게 통과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친구들과 가볍게 나누는 음담 패설이나 술과 담배들 혼전성관계 다른 성도들의 가십거리들과 비난 혹 교회 안에 들어온 편향된 이념들, 이 모든 것들이 세상 문화와 맘모니즘이라는 우상의 식탁에 앉는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겁니다.
15절에 돌아가서 읽어보겠습니다.
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가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스스로 판단하라 하십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 지혜가 있다면, 우리의 삶 속에 자연스럽게 젖어드는 신앙의 회색지대 스스로 판단해보아야 되지 않겠습니까?
나는 믿음에 바로 서 있습니까? 혹, 보통과 정상의 차이를 혼돈하고 있지는 않는지요.
요즘 보통 그 정도는 다 한다고 말하면서, 마땅히 그리스도인으로서 살아야 하는 정상적인 삶을 따르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요.
참으로 신앙 공동체를 귀히 여기고 있습니까?
예배를 사모하는 마음은 바로 서 있는지요?
스스로 내 믿음을 점검해보고 묵상하는 시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성찬에서 '한 몸' '한 떡'이 강조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은 어린 고린도 교회가 우상 승배의 위험 가까이에 노출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아직 이 같은 죄의 유혹을 이길 만한 충분한 영적 판단력과 지혜를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20절 말씀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20 무릇 이방인이 제사하는 것은 귀신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가 귀신과 교제하는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노라
고린도 지역에서 이루어지는 이방인들의 우상 숭배는 실제로 그 배후에서 역사하는 귀신들을 섬기는 것이 되었다는 겁니다.
그들이 섬기는 우상의 형상들 그것은 사실 그리스 로마 신화 속 이야기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신화와 우상들 배후에는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고 조정하는 귀신들의 역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상의 형상에도 그 앞에 받혀진 음식도 아무것도 아닐 수 있지만, 우상숭배를 통해 사람들의 마음을 미혹하는 귀신들의 영적 실체는 바로 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겁니다.
그래서 말씀하시죠.
21 너희가 주의 잔과 귀신의 잔을 겸하여 마시지 못하고 주의 식탁과 귀신의 식탁에 겸하여 참여하지 못하리라
고 하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유일하신 경배의 대상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우상을 가까이 하고 귀신들이 좋아하는 일에 참여하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22절 말씀처럼
22 그러면 우리가 주를 노여워하시게 하겠느냐 우리가 주보다 강한 자냐
우리는 결코 주보다 강하지 않습니다.
저와 여러분 설사 신앙생활을 오래 해왔더라도 우리는 작은 유혹과 시련 앞에서도 쉽게 넘어질 수 있는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교만과 안일함으로 주님을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을 시험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지난 2년 이상 팬데믹을 맞이하면서 배운 감염병 예방하는 좋은 방법이 있었죠.
가장 좋은 길은 감염원을 가까이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이와 같이 죄에 빠지지 않는 가장 좋은 방법은 죄를 멀리하는 것입니다.
우상숭배에 빠지지 않으려면 이교도의 축제에 참석하지 않는 것이 최상의 방법입니다.
지금 QT 방송을 보시는 분 중에 누가 우상 앞에 가서 경배할 분이 있겠습니까?
그러나 사탄의 전략은 날로 교활해지고 있습니다.
때로는 우리의 탐심을 자극해서 우상숭배의 자리로 이끌기도 합니다.
주님보다 더 중요하게 여기게 만드는 것들, 예배보다 더 급하게 만드는 일들을 통해서 우리의 마음을 서서히 주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듭니다.
쉽고 편안하게 신앙생활하는 묘수를 우리 귀에 속삭이기도 하지요.
하나님의 은혜를 빙자해서 죄에 대해서 경각심을 잃어버리게 만들기도 합니다.
무엇이 죄인지 죄가 아닌지조차 모호한 사상과 이념들로 우리를 미혹하기도 합니다.
스스로 분별하여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바른 판단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십자가의 은혜로 주님과 연합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세상이라는 우상을 가까이 하지 않도록 오늘도 이 한 주간도 깨어 있어야 합니다.
믿음 안에서 승리해 나가심으로 하나님 앞에 영광 돌리는 복된 삶이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우상에게 바쳐졌던 음식을 성도가 먹지 말아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요?
존귀하신 주님
늘 믿음에 깨어 있어 바른 분별력을 갖게 하시고
진리 위에 바로 서서 세속적인 즐거움과 탐욕의 우상에 참여하지 않도록
저희를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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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 10:23 – 11:1 남의 유익을 구함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안녕하십니까?
온누리 교회를 섬기는 도육한 목사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행복하기를 원하지만 어떻게 해야 행복해질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갖지 않는 것 같습니다.
저와 여러분은 그 비결을 알고 있습니다.
행복은 관계로부터 옵니다.
위로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가질 때 영혼의 평안과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옆으로는 다른 사람들과 좋은 관계를 가질 때 안정감과 소속감을 가질 수 있습니다.
성부, 성자, 성령
세 분 하나님께서 완벽한 하나 됨으로 그분의 사랑을 드러내셨듯이 그 형상으로 지원받은 우리도 서로 사랑하고 존중함으로 온전한 관계를 가질 수 있고 그것이 우리의 행복의 비결입니다.
오늘 말씀 고린도전서 10장 23절에서 11장 1절까지의 말씀을 함께 읽으며 묵상하겠습니다.
남의 유익을 구함으로 그리스도를 본받는 삶
우리는 어제 큐티 본문을 묵상하면서 우상에게 제물로 바쳐졌던 음식에 참여하는 것이 귀신과 교제하는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음식을 먹고 마시는 사소한 일에서부터, 우리 인생의 중요한 결정에 이르기까지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바른 것인가를 늘 분별해 보아야 합니다.
이렇게 우리가 분별할 때 붙들어야 할 두 개의 원칙이 있습니다.
23절 24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10:23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10: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마틴 루터의 말대로 그리스도인은 모든 것 위에 우위에 서는 자유로운 군주로서 그 누구에게도 종속되지 않습니다.
모든 것이 가합니다.
그러나 자유를 행사할 때 두 개의 원칙은 반드시 확인해야 합니다.
이것이 유익한 것인가? 또한 이것이 덕을 세우는 것인가? 여기서 유익과 덕은 우리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하고 공동체의 덕을 세울 수 있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를 위한 원칙입니다.
비록 우상에게 바쳐졌던 재물을 먹는 것이 자기 자신의 양심에는 아무 거리낌이 없을지라도 혹 이로 인해서 신앙이 약한 누군가의 마음을 다치지 않을까를 항상 생각하는 것입니다.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하십니다.
이미 9장 19절에서 우리가 묵상했던 바와 같이
고린도전서 9:19
내가 모든 사람에게서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바울은 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로우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말씀하십니다.
바울은 자신의 자유가 어느 누군가의 거침이 되지 않기를 원했습니다.
이를 통해 한 사람이라도 더 많은 영혼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할 수만 있다면 기꺼이 다른 사람들을 위해서 희생하겠다는 겁니다.
그러므로 시장에 파는 것이나 어느 불신자의 초청을 받아 음식을 대접받게 되었다면 무엇이든지 양심을 위하여 고기의 출처를 묻지 말고 먹으라 하십니다.
누구의 양심을 말하는 것입니까?
신앙이 약한 이들의 양심을 위한 것입니다.
비록 그것이 우상 앞에 바쳐졌던 죄물이라 할지라도 본질적으로는 창조주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일 뿐입니다.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죠.
땅과 온 세상에 충만한 모든 것이 하나님의 피조 세계입니다.
그 사실을 인정하면 그것이 어떤 음식이든 중요하지 않다는 겁니다.
앞에 차려진 음식은 묻지 말고 먹으면 됩니다.
한편 어느 누군가 아마도 믿음이 약한 사람이 이 음식이 우상에게 들려줬던 재물인데요라고 알려주거든 그 사람과 약한 양심을 위하여 먹지 말라 하십니다.
약한 양심이란 스스로 분별하여 소신껏 결정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사람을 말하죠.
우상에게 바쳐졌던 것이니 아마도 그 음식에 어떤 영적인 작용이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그를 위해서는 먹지 않는 것이 덕을 세우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원칙이 29절에 나옵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말한 양심은 너희의 것이 아니요 남의 것이니 어찌하여 내 자유가 남의 양심으로 말미암아 판단을 받으리오
우리가 배려해야 할 양심은 우리 자신의 신념이 아니라 믿음이 약한 다른 사람의 양심입니다.
음식을 먹고 안 먹고는 내가 임의로 결정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합니다.
그것이 죄냐 아니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러나 내 자유가 혹시 다른 사람의 양심에 혼란과 상처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뿐만 아니라 주님의 몸 공동체의 유익을 구하고 덕을 세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은 내가 잘못한 것이 없으면 된다는 소극적인 윤리가 아니라 혹 나로 인해 다른 사람의 마음이 상하지 않을까를 배려하는 적극적인 윤리를 가져야 합니다.
강한 자가 약한 자의 마음을 살피는 것입니다.
칸트는 양심은 인간의 마음속에 있는 법정이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법정에서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일이라 할지라도 내 내면의 법정 그리스도께서 재판장 되시고 그 법정의 결정을 할 때 우리는 내면의 양심을 따라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법정은 판결의 기준이 다릅니다.
오리를 가자고 하는데 심리를 같이 가라 하시고 속옷을 달라 하는데 그 옷까지 내어주라 하십니다.
내가 가졌고 누릴 수 있고 그것이 내 자유이지만, 혹 그럴 수 없는 사람의 마음을 살피라 하십니다.
저마다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고 마음이 이끄는 대로 살면 된다고 주장하는 이 세상을 살면서 그 가운데 있는 저와 여러분이 주님의 뜻을 따르는 것 결코 쉽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가질 자유의 대원칙은 분명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지만 덕을 세울 수 있는가? 이 일이 다른 사람에게 유익이 되는가를 묻는 것입니다.
그것이 주의 몸에 속한 제자들의 좁은 길입니다.
우리는 이미 이 좁은 길로 초대받았고 뒤돌아설 수 없는 외길을 걷고 있습니다.
자신에게 맡겨진 십자가 지고 끝까지 이 제자의 길을 함께 걸어갑시다.
불신자가 차린 음식을 먹을 때 그 출처를 묻지 말라고 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사도 바울은 지금까지 길게 나누었던 논제 곧 우상에게 드려진 재물을 먹는 문제에 대해서 결론적으로 두 가지 지침을 주었습니다.
첫째는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나 유명한 말씀이죠. 31절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아멘 아멘입니다.
우리가 어떤 음식을 먹을 수 있는가 먹지 말아야 하는가? 이 문제보다 더욱더 본질적인 삶의 목적이 있습니다.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일상 속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 내가 도모하고 꿈꾸고 원하고 행하는 모든 일들이 이 원칙에 부합하는 것인지 그것을 점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가를 물어보자는 것입니다.
두 번째 지침은 사람들에게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32절 말씀인데요.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유대인 곧 같은 신앙을 가진 사람에게나 헬라인 곧 불신자들에게나 거침돌이 되지 말라 하십니다.
내가 옳다고 스스럼없이 행한 일이 그 누구를 시험에 빠지게 하고 실족케 할 수 있다는 걸 기억하라는 겁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의 교회에 거치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십니다.
내 주장이 더 옳을 수 있고, 내 말에 일리가 있더라도
주의 몸인 교회에 상처나 분열을 주지 않도록 늘 주의해야 합니다.
바울은 이 같은 지침을 말로만 가르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33절은 우리의 관계 안에 지켜야 할 대원칙을 주고 있는데요.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불가능해 보이는 일 같습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자신의 유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삶을 살도록 초대받았습니다.
어려워 보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보이는 이 아름다운 삶의 원칙이 저와 여러분의 인간관계의 기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물론 우리의 인격과 양심으로는 못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기로 뜻을 정하면 이 같은 삶의 열매가 점점 더 많이 맺히게 되지 않을까요? 그리고 우리에게는 먼저 이 아름다운 삶의 본을 보여주신 분이 계십니다.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시죠.
우리 주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모든 일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의 기쁨을 주셨고, 많은 사람들을 위한 대 선물로 자신을 내어주셨습니다.
바울은 이 사실을 분명히 알았기에 그가 먼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담대하게도 그리스도의 제자 된 우리에게도 이 영광스러운 삶으로 초대하고 있습니다.
고린도전서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그리스도를 본받아 우리의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고 이웃과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복된 삶 행복한 인생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나 중심적 습관을 버리고 이타적으로 행동할 일은 무엇인가요?
존귀하신 주님
우리의 삶이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삶이 되게 하시고
모든 사람들과 화평하며 공동체의 덕을 세우는 가치 있고 복된 삶을 살아가는 인생들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 존귀하신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우리의 삶의 본질 ~~~~부름받고, 선택된 이유는
고전9:19.내가 모든 사람에게 자유하였으나 스스로 모든 사람에게 종이 된 것은 더 많은 사람을 얻고자 함이라
24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31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33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11:1.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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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경은 우리가 무엇을 위해서, 어떻게 살아가야 한다고 말합니까? (31절)
3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
2. 하나님의 영광이라는 목적 다음으로 우리 삶에서 중요한 목적은 무엇입니까? (33b절)
33b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3. 사람을 구원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 일을 위해서 성경은 우리에게 어떻게 하라고 말합니까? (32-33절)
32-33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유대인에게나 헬라인에게나 하나님의 교회에나 거치는 자가 되지 말고 나와 같이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여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하라.”
4. 바울은 세 번째 목표가 될 만한 것도 제시합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11:1)
11장 1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된 것 같이 너희는 나를 본받는 자가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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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만을 자랑하고 그 복음을 효과적으로 전하기 위해 자신이 가진 모든 자유와 권리를 내려놓고 다른 사람을 위해 살아가는 바울 사도의 모습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가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좋은 모델입니다.
바울 사도가 선포하고 삶으로 살아내는 복음은 우리가 주변에서 흔히 경험할 수 있는 자기중심적이고 개인적이며 기복적인 복음과는 완전히 다른 것입니다.
기독교의 역사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라는 명분으로 자행했던 수많은 폭력과 정복, 차별과 심판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사도 바울의 복음과 반대되는 모습이었습니다.
오늘날 성도들의 신앙생활은 내가 사람들에게 인정받고,
내가 지적인 즐거움이나 감동을 느끼고,
내가 무언가를 성취하고,
내가 선생이 되어 가르치고,
내가 재판관이 되어 다른 사람을 심판하는 모습들로 가득 차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을 충족시켜주는 교회를 좋은 교회라고 판단하며,
이 모든 것이 만족될 때 스스로 훌륭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이미 받은 사람의 사랑과 섬김은 자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향합니다.
물론 모든 일에 모든 사람을 기쁘게 하는 것,
자신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많은 사람의 유익을 구하는 일은 외롭고 고단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본을 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와 함께 하시며 우리를 인도하시고 우리에게 새 힘을 공급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삶을 통해 누군가가 십자가 복음을 받아들이고 구원을 얻는다면, 어떤 수고와도 바꿀 수 없는 기쁨과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