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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원 방학특강6 2015.7.21.mp3
장소: 전북 익산 원광대학교 교학대학 1층 세미나실 일시: 2015년 7월 21일(화,오후 3시~6시) 강사: 곽준(묘원 법사님)
교재 : 사념처 명상의 세계(도서출판 행복한숲 刊)
5. 법념처
1) 다섯 가지 장애[五蓋]를 알아차림
2)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
(1) 오온에 대한 개요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두 번째는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입니다. 다섯 가지 장애가 일어나는 것은 다름 아닌 오온(五蘊)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오온을 집착하기 때문에 다섯 가지 장애가 생깁니다. 그러므로 법념처의 첫 번째인 다섯 가지 장애를 제거하기 위해서 두 번째인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에 대해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것은 오직 정신과 물질입니다. 이 정신과 물질 중에서 마음을 자세하게 분류한 것이 오온입니다. 이처럼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오온을 모르고서는 자신에게 생긴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온을 가지고 생긴 문제는 오온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비로소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잘못된 견해로 인해 결코 자신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습니다.
오온이 무엇인지를 안다는 것은 어떻게 하면 오온에 적절하게 대처할 수 있는가를 아는 것입니다. 자신을 구성하고 있는 오온의 실재를 아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오온이 무엇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오온을 집착하여 오취온(五取蘊)이 됩니다. 그러므로 오온도 알아차릴 대상이라서 법이고 똑같이 오취온도 알아차릴 대상이라서 법입니다.
오온을 나의 몸과 마음이라고 생각하는 잘못된 견해 때문에 오온을 집착하게 됩니다. 오온을 집착하면 느낌에서 갈애를 일으켜 집착하게 되고 다시 업을 생성하여 윤회를 계속합니다. 그러나 나의 오온이 내가 아니고 내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알면 느낌에서 갈애를 일으키지 않아 느낌과 괴로움이 소멸하는 깨달음에 이릅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오온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그래서 오온을 모르고서는 오취온이 계속되므로 수행이 한 발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수행의 시작은 오온에 대한 알아차림이고, 수행의 끝이 오온의 소멸입니다. 오온이 소멸할 때 자아도 소멸하여 집착이 끊어집니다.
오온은 인간의 정신과 물질을 구성하고 있는 다섯 가지 무더기인데 색온, 수온, 상온, 행온, 식온입니다. 바로 이 오온을 집착하여 오취온인 색취온, 수취온, 상취온, 행취온, 식취온이 됩니다. 중생의 모든 괴로움은 오온을 있는 그대로 보지 않고 집착을 해서 오취온을 만든 것에 기인합니다. 이것이 가장 큰 어리석음입니다.
오온의 특성에 대해 몇 가지로 나누어서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분류하기 위해 오온이라고 합니다. 정신과 물질을 오온이라고 할 때는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밝히고자 분류한 것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다섯 가지로 나누는데 색온은 물질이고 수온, 상온, 행온은 마음의 작용이고, 식온은 마음입니다. 그러므로 오온이라고 할 때는 정신을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나누어서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냥 정신과 물질로 나누지 않고 마음의 작용인 수온, 상온, 행온을 포함시켜서 오온이라고 한 의미는 매우 큽니다. 마음은 마음의 작용과 함께 있으면서 마음의 역할이 있고, 마음의 작용의 역할이 있어서 우리가 사는 것입니다. 주석서에서는 오온의 식은 왕에 비유하고 수, 상, 행은 신하에 비유합니다.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이 하는 일을 식이 아는 기능을 하므로 신하와 왕에 비유합니다.
둘째, 오온은 다섯 가지 무더기들입니다. 정신과 물질을 오온이라고 밝힌 것은 다섯 가지가 모두 무더기로 구성되어 있는 것을 밝히기 위한 것입니다. 다섯 가지 요소들이 각각의 무더기로 구성되었다는 것은 정신과 물질에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무아라는 것을 밝히고자 하는 뜻이 있습니다.
오온(五蘊)의 온(蘊)은 무더기를 뜻합니다. 그래서 무더기, 모음, 무리, 쌓임이라는 존재의 요소를 말합니다. 오온은 단독으로 일어나지 못하고 반드시 여러 가지 요소들이 결합하여 무리지어 나타납니다. 이러한 분석적 사실에 입각해 본다면 이것들은 조건에 의해 결합되어 조건에 의해 소멸하는 것일 뿐이지 이것을 일으키는 어떤 주체가 있어 일으키거나 소멸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내가 있다고 생각하거나 자신의 몸과 마음을 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음은 변하지 않고 항상 하며 그래서 영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몸을 자신의 소유로 생각합니다. 몸과 마음을 통찰지혜로 살펴보면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고 매순간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연속적 현상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은 여러 가지의 조건으로 결합된 것일 뿐이지 여기에 자아가 있어 소유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을 밝히기 위해 정확하게 분석한 것이 무더기들의 결합입니다.
몸이라고 하는 것도 여러 가지 부속물들의 결합으로 구성된 물질에 불과합니다. 이것을 만든 어떤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니고, 이것을 소유하는 어떤 주체가 있는 것이 아닌 단지 조건에 의한 결합물입니다. 그러므로 편의상 몸이라고 할뿐이지 이것이 나의 몸이 아닙니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수많은 부품들로 결합되어서 자동차이지 처음부터 자동차로 태어난 것이 아닙니다. 몸도 이와 같다면 단지 몸이라고 명칭을 붙인 물질에 불과한 것이지 나의 몸은 아닌 것입니다. 몸과 함께 마음도 똑같은 요소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몸과 마음을 나의 몸과 마음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이 몸과 마음을 집착하여 괴로움이 생깁니다. 그래서 오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나의 몸과 마음이라고 생각하면 반드시 집착해서 업을 생성하기 때문에 나쁜 과보를 받아야 하며, 다시 태어나는 괴로움을 겪습니다.
오온은 조건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입니다. 조건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은 조건에 의해서 소멸합니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라는 조건의 특성입니다. 이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이 없기 때문에 항상 하는 그런 자아는 없습니다. 단지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정신과 물질만 있습니다. 이것을 오온이라는 무더기의 결합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오온의 색온은 물질로서 이 형상은 일어났다 사라지는 한 조각의 거품입니다. 수온은 느낌으로 하나의 물방울처럼 순간에 일어나서 순간에 사라집니다. 상온은 관념으로 한 편의 아지랑이처럼 어른거리면서 일어났다 사라집니다. 행온은 의지작용으로 파초나무와 같이 구체적 실체가 없습니다. 식온은 아는 마음으로 마치 요술의 환상과 같이 갖가지로 나타납니다. 이렇듯 오온은 실체가 아니고 끊임없이 일어났다 사라지는 연속적 현상의 무더기에 불과합니다.
셋째, 오온은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집니다. 오온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드러내기 위해 분류한 것이고, 이들 요소들은 모두 무더기로 모여서 구성된 것입니다. 이렇게 모여진 색, 수, 상, 행, 식의 다섯 가지가 함께 일어나서 함께 소멸하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오온의 구성요소들은 무엇이 먼저이고, 무엇이 나중이 없습니다. 흔히 마음이 모든 것을 이끈다고 하는 생각으로 마음이 먼저이고 색, 수, 상, 행이 나중에 일어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그렇지 않습니다.
마음에 종자가 있어서 다음 마음에 과보를 전하기 때문에 마음이 먼저 일어나고 나머지는 뒤따르는 것이 아닙니다. 마음의 종자 안에 색, 수, 상, 행이 모두 포함되어 있으므로 오온은 항상 함께 일어나서 함께 소멸합니다. 다만 마음이 몸을 겨냥할 때 몸에 있는 현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입니다. 마음이 느낌을 겨냥할 때 느낌이 두드러지게 나타는 것일 뿐입니다. 다른 것들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몸을 알아차릴 때도 색, 수, 상, 행, 식은 모두 작용하고 있습니다. 마음이 느낌을 알아차릴 때도 색, 수, 상, 행, 식이 모두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가 다시 한 번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몸에 있는 것을 인식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마음이란 한 순간에 하나밖에 알아차릴 수 없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합니다. 가령 좌선 중에 몸에 통증이 나타나서 알아차리고 있는 중에 다른 망상이 떠올랐을 때는 통증은 있지만 의식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순간 마음이 통증이 아닌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망상이 사라지면 있던 통증이 다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이때 오온이 모두 작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만약 망상과 통증이 함께 있는 것을 경험한다면 마음이 빠르게 망상과 통증을 오고 가면서 알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원리를 이용하여 다섯 가지 장애가 나타났을 때 하나의 대상에 강력하게 마음을 집중하면 근본집중의 힘이 생겨서 장애를 억누를 수 있습니다. 이때의 마음은 오직 하나의 대상에 집중되어 있기 때문에 다른 번뇌가 들어올 틈이 없습니다. 이것이 선정수행입니다. 그러나 위빠사나 수행은 하나의 대상을 고집하지 않고, 마음을 억제하지 않고, 나타나는 모든 대상을 자연스럽게 알아차립니다.
오온은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지기 때문에 이것을 구생법(俱生法)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몸과 마음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현상에 대해 놀라서는 안 됩니다. 수행을 하면 차츰 고요해지고 집중력이 커져서 아는 힘이 생깁니다. 그러면 전에는 몰랐던 몸과 마음에 있는 현상을 새로 알아차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것은 전에 없던 것이 나타난 것이 아니고 항상 있던 것을 새로 알아차리는 것뿐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오온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일어난 즉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만약 시간이 지나고 나서 알아차리면 실재하는 현재를 알아차리는 것이 아니라서 생각으로 아는 것입니다. 일어난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그 순간에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대상을 봅니다. 또한 나타나는 대상을 빠르게 좋다거나 싫다는 반응을 해버립니다. 그래서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넷째, 오온을 논장에서는 근본법(根本法)으로 분류합니다. 근본법을 빨리어로는 빠라마타 담마(Paramattha Dhamma)라고 합니다. 이는 궁극적 진리, 최승의법(最勝義法), 절대적 실재 등으로 부릅니다. 근본법은 네 가지가 있는데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 열반입니다. 그러므로 오온과 열반을 합쳐서 근본법이라고 말합니다. 열반에 이르기 위해서는 오온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그래야 근본법이 완성됩니다. 근본법은 최고의 가치를 지닌 것으로 가장 진실한 실재입니다. 그래서 누구나 이 길을 통하여 해탈로 나아가야 합니다. 사실 정신세계에서는 모든 사물의 기본이 자신의 오온입니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오온을 알아차리는 것이 수행자의 기본임무입니다.
근본법은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기 때문에 최고의 법입니다. 아무리 좋은 대상이 있더라도 그것을 알 수 있는 정신과 물질이라는 실재가 없으면 무가치한 것입니다. 최고의 진리라고 하면 우리가 모르는 특별한 것인 줄 알지만 사실 최고의 진리는 정신과 물질이며, 정신과 물질을 소멸시키는 열반이 최고의 진리입니다,
근본법의 처음 세 가지인 마음, 마음의 작용, 물질은 오온으로서 유위법(有爲法)입니다. 이 유위법은 알맞은 조건이 성숙되면 일어났다가 조건에 의해 사라지는 법으로서 원인과 결과가 있습니다. 네 번째는 열반입니다. 열반은 원인과 결과가 적용되지 않는 법으로서 무위법(無爲法)입니다. 그래서 원인과 결과가 적용되는 일어남과 사라짐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번뇌가 소멸한 아라한의 마음은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마음, 즉 단지 작용만 하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수행을 한다는 사실은 오온을 알아차려서 원인과 결과가 끊어진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이것이 괴로움이 끊어진 지고의 행복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항상 자신의 오온을 알아차리는 것에 대한 중요성을 간과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오온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붓다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며 궁극의 진리를 얻기 위해 누구나 반드시 가야 하는 길입니다.
다섯째, 오온이 가지고 있는 법은 무상, 고, 무아입니다. 정신과 물질이 가지고 있는 가장 일반적 특성은 변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무상입니다. 그래서 오온은 항상 일어나서 사라지는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정신과 물질의 본성은 매순간 계속해서 변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 진동하지 않는 것이 없듯이 자신의 몸과 마음은 항상 끊임없이 진동하면서 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같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만약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면 ‘변한다는 것’이 변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불변하는 그런 것은 이 세상 어디에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항상 하는 것은 없기 때문에 영원한 것이 없으며, 그래서 영혼이 없습니다. 단지 변하는 정신과 물질만 있습니다. 정신과 물질이 바뀐다는 것은 있던 것이 없어지고, 없던 것이 새로 생기는 것입니다. 아프지 않다가 아프고, 아프다가 아프지 않은 것도 변하는 것입니다. 몸이 뜨겁다가 차가워지고, 차갑다가 뜨거워집니다. 좋아하다가 싫어지고, 싫어하다가 좋아하는 것도 변하는 것입니다.
누구나 이러한 변화를 두려워하거나 항상 하지 않은 것에 불만족을 갖습니다. 없어서 괴롭고, 있으면 없어질까 봐 괴롭고, 더 얻지 못해서 괴롭습니다. 이것을 괴로움이라고 합니다. 이 괴로움을 불만족이라고 합니다. 누구나 느낌으로 사는데 이 느낌은 매순간 변하면서 항상 더 좋고, 더 많은 것을 원합니다. 누구나 생명으로 태어난 이상 무명과 갈애의 지배를 받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온을 가진 자체가 불만족인 것입니다.
몸과 마음은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몸과 마음은 조건에 의해 변하는 몸과 마음이므로 이것을 소유하거나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아는 없습니다. 몸은 있습니다. 마음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몸과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몸과 마음이 나의 소유가 아니라서 무아라고 합니다. 만일 몸과 마음이 나고, 내가 몸과 마음을 소유할 수 있다면 적어도 자신의 몸과 마음에 관해서는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몸과 마음을 자기마음대로 할 수 없습니다. 만약 몸과 마음이 자기 소유고, 자기마음대로 할 수 있다면 죽기 전에 호흡을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숨을 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누구도 그렇게 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무아입니다.
여섯째, 오온이 무더기로 모여 있는 것을 하나씩 살펴보겠습니다. 오온은 색온이라고 하는 물질의 무더기, 수온이라고 하는 느낌의 무더기, 상온이라고 하는 인식의 무더기, 행온이라고 하는 마음의 형성의 무더기, 식온이라고 하는 아는 마음의 무더기들이 모여서 이루어진 것들입니다. 그리고 이 각각의 무더기가 다시 하나의 무더기로 모여서 오온을 이룹니다. 이들 다섯 가지 무더기는 정신 현상의 무더기와 물질 현상의 무더기입니다. 그리고 이들 무더기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시제를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오온은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또한 내부에서 일어나는 현상과 외부에서 일어나는 현상을 함께 가지고 있습니다. 모든 것은 대상을 아는 감각기관과 대상을 알도록 하는 감각대상의 부딪침이라는 무더기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원인과 결과에 의해서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이라고 하며 조건 지어진 것이라고도 합니다. 이때 모든 것들이 이와 같은 과정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들이지 오온을 주도하는 어떤 존재도 없습니다. 그래서 위빠사나 수행을 통해서 궁극에는 자아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렇게 자아가 없다고 알 때만이 오온을 집착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오온을 집착하는 이유가 이것이 나의 오온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오온을 분석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인 것입니다.
(2)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를 알아차림
대념처경에는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五取蘊]를 알아차림이 다음과 같이 나와 있습니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라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다섯 가지 집착의 무더기라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이것이 물질적 형상[色]이다.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이것이 느낌[受]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이것이 인식[想]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行]이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이것이 의식[識]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라고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법에서 법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에서 법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에서 법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법이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이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그는 단지 법이 있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 법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그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① 색온(色蘊)
오온의 첫 번째는 색온입니다. 색온은 물질의 무더기입니다. “이것이 물질적 형상[色]이다.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사라짐이라고 안다”고 할 때 수행자는 물질이 일어날 때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물질적 형상이 사라질 때 이것이 물질적 형상의 사라짐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물질적 형상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상하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못됩니다.
물질적 형상을 물질(物質), 색(色), 몸, 신체(身體) 등 여러 가지로 부릅니다. 일반적으로는 정신과 물질이라고 할 때의 물질이라는 명칭을 사용합니다. 그러나 사념처 수행에서는 몸 또는 신체라고 합니다. 수행자는 몸에서 일어나는 모든 현상을 단지 물질적 형상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단지 물질적 형상이라고 알아차리는 것에는 이것들이 무더기로 구성되었다는 것이 포함됩니다.
위빠사나 수행의 최종 목표는 지혜입니다. 지혜만이 번뇌를 부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처음에 알아차림이 필요하고, 다음에 알아차림을 지속해서 집중해야 합니다. 이러한 집중에 의해서만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의 법을 알 수 있습니다. 이때 무상의 법을 알면 단순하게 무상의 법을 아는 것에 그치지 않습니다. 무상의 지혜가 나면 다음 단계인 괴로움이 있는 것을 아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그런 뒤에 최종적으로 무아의 지혜가 납니다. 이러한 최종 목표에 이르기 위해서 시작부터 반드시 기본적인 조건이 성숙되어야 합니다. 예를 들어 몸에서 일어나는 호흡을 알아차릴 때 단지 물질적 현상으로 알아차려야 하며, 이러한 물질현상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호흡을 알아차릴 때 호흡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에 집중을 해야지 ‘이 호흡은 왜 일어나고 사라지는가?’라는 식의 의문을 가지고 알아차려서는 안 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호흡이나, 몸의 네 가지 자세에 대해서나, 네 가지 분명한 앎에 대해서나, 몸의 네 가지 요소인 지, 수, 화, 풍에 대해서 어떤 것이나 몸에서 일어나는 것은 단지 물질적 현상의 하나라고 알아야 합니다.
몸에서 일어나는 현상은 다만 물질적 영역에서 일어나는 알아차릴 대상 이상의 의미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몸이란 일어나고 사라지는 무상에 불과하다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이렇게 몸이 가지고 있는 성품을 알 때만이 나의 몸이라는 생각으로 인한 집착에서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수행을 하면 전에 모르던 많은 현상들이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어떤 현상이 나타날 때마다 놀람과 두려움과 의혹을 갖기 마련입니다. 이때 이런 마음이 일어나면 그 순간의 알아차림을 놓친 것입니다. 그리고 생각에 빠져서 집중력이 흐트러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어떤 현상이 나타나거나 단순하게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것으로 끝내야 합니다. 만약 다양하게 나타난 현상으로 인해 놀라거나 근심걱정을 하게 되면 ‘지금 내 마음이 걱정을 하고 있네’ 하고 알아차려서 이것 자체를 대상으로 삼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무수하게 나타나는 현상을 하나하나 문제 삼으면 아직 갈 길이 먼 수행자가 갈 길을 바르게 가지 못합니다. 그래서 이렇게 나타나는 것들이 모두 장애인 것입니다. 그러나 수행자는 장애가 나타난 것을 장애라고 보지 말고 단지 대상으로 알아차리면 쉽게 목표로 하는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나타난 대상을 단지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것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렇게 단순하게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는 순간 어떤 선입관이나 번뇌가 침투하지 않고 온전하게 대상과 아는 마음만 있게 됩니다. 이렇게 청정한 상태에서 고요함이 생깁니다. 이러한 고요함에 의해 비로소 대상을 지속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이러한 집중의 상태에서 무상의 지혜가 납니다. 이러한 지혜가 나야 나의 몸이라는 생각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렇게 되어야 몸에 대한 집착이 일어나지 않습니다.
알아차림에서 일관되게 강조하는 것은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라고 하는 것입니다. 만약 바라거나 없애려 하거나 어떤 선입관으로 대상을 보면 대상이 가지고 있는 본래의 성품을 알 수 없습니다. 이것은 마치 흙탕물에서는 자신의 얼굴을 비쳐볼 수 없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단순하게 오직 거기에 대상이 있어서 지켜보아야 합니다. 그럴 때만이 자신의 마음이 정화되고 있는 그대로의 대상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물질은 아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며 일어난 순간 사라집니다. 그래서 물질은 무상한 것입니다. 물질은 매순간 진동하면서 변하기 때문에 항상 같은 물질이 아닙니다. 물질이 일어난 순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여 실재를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물질이 일어나는 순간에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물질은 괴로움입니다. 물질은 그 순간의 감각기관일 뿐이므로 나의 물질이 아닙니다.
모든 생명의 신체는 여러 가지 부분들로 결합되어 있습니다. 몸은 관념으로서의 몸과 실재로서의 몸이 있습니다. 관념으로서의 몸은 몸을 구성하는 32가지 부분들이 있습니다. 머리카락, 몸의 털, 손톱과 발톱, 이빨, 살, 힘줄, 뼈 등 32가지로 나눕니다. 물론 이 32가지는 부정관을 하기 위한 내용이라서 완전하게 몸을 구성하고 있는 부분이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몸을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부분들입니다.
실재로서의 몸은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라는 네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이것이 몸을 인식할 수 있는 실재입니다. 몸에는 단단함과 부드러움을 나타내는 땅의 요소[地大]가 있습니다. 그리고 물의 요소[水大]가 있습니다. 그리고 뜨거움과 차가움의 불의 요소[火大]가 있습니다. 그리고 진동하는 바람의 요소[風大]가 있습니다. 이들 요소들의 결합으로 몸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상 네 가지의 요소 외에 여러 가지 파생된 물질이 스물네 가지가 있습니다. 이렇듯 몸을 구성하는 부분도 다양하며, 몸을 인식하는 요소도 다양합니다.
이들 몸의 요소는 항상 변하며, 이것들은 불만족이고, 여기에 자아는 없습니다. 그래서 나의 몸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단지 색온이 일어난 것입니다. 몸은 단지 부르기 위한 명칭이지 이것이 나의 몸은 아닙니다. 존재하고 있는 자신의 몸은 있습니다. 그래서 유신(有身)은 있으나 이 몸이 나의 몸이라고 하는 유신견(有身見)은 관념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몸이라는 뜻으로 자신의 소유를 의미하는 유신견은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견해를 가지면 자아가 강해서 이기심이 생깁니다. 그리고 자신이 최고라는 우월감을 갖기 마련이라서 법의 성품을 보지 못하고 오온을 집착하게 됩니다. 무명(無明) 중에서 가장 나쁜 무명이 내 몸과 마음이라고 하는 유신견입니다. 살인을 해도 법을 알아차리면 도과를 성취하여 열반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유신견을 가지면 내가 본다는 견해를 가지고 보기 때문에 법의 성품을 볼 수 없어 도과를 성취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자아가 있다고 하는 어떤 견해에 대해서도 동조해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깨달음을 얻을 수 없게 하는 유신견이기 때문입니다.
② 수온(受蘊)
오온의 두 번째는 수온입니다. 수온은 느낌의 무더기입니다. “이것이 느낌[受]이다.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라고 안다”고 할 때 수행자는 느낌이 일어날 때 이것이 느낌의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느낌이 사라질 때 이것이 느낌의 사라짐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느낌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상하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못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느낌을 수(受) 또는 감각이라고 합니다.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릴 때는 모두 느낌으로 압니다. 그러나 느낌을 단지 느낌으로 알아차리면 대상을 법으로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느낌이 일어났을 때 일어난 느낌으로 인해 새로 반응한 느낌이 일어나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린 것이 아닙니다. 느낌을 알아차릴 때는 단지 아는 느낌 이외의 느낌으로 변화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느낌은 즉시 더 좋아하는 느낌으로 진행되거나 더 싫어하는 느낌으로 진행되거나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무지하고 덤덤한 느낌으로 머물기 마련입니다.
느낌은 언제나 갈애를 동반합니다. 그래서 감각적 욕망에 대한 갈애와 존재에 대한 갈애와 비존재에 대한 갈애를 일으킵니다. 이처럼 더 좋은 느낌을 원하고, 더 잘살기를 원하고, 더 좋은 곳에 태어나기를 원하고, 아니면 때로는 죽기를 원합니다. 이것이 모두 바라는 것입니다. 감각적 욕망은 물론이고 더 좋은 곳에 태어나고 싶은 것도 바람직한 것이 아닙니다. 윤회를 계속하기 바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죽기 원하는 것도 죽는 것을 좋아서 바라는 갈애에 속합니다. 이것들이 모두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고 새로 반응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자는 대상과 아는 마음이 접촉할 때 항상 알아차림을 일치시켜야 합니다. 조금이라도 뒤에 알아차리면 이미 느낌이 빠르게 반응하기 때문에 좋거나 싫은 느낌으로 진행됩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맨 처음에 느끼는 느낌은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느낌이 아닙니다. 이때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리지 못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느낌으로 진행된 것입니다.
느낌이 일어났을 때 즉시 느낌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은 있는 그대로의 느낌을 알아차리는 것을 말합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즉시 반응합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이것이 나의 느낌이라고 압니다. 그래서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느낌을 느낌으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느낌이 일어난 순간 사라지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느낌이 항상 하거나 영원한 것으로 압니다. 느낌의 실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다릅니다. 느낌은 항상 하지 않고 매순간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느낌은 즐겁지 않고 불만족스러운 것입니다. 느낌은 깨끗한 것이 아니고 더럽고 혐오스러운 것입니다. 느낌은 나의 느낌이 아니고 단지 조건에 의해 일어나는 느낌이며,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입니다. 그래서 느낌은 무아입니다.
누구나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가지고 여섯 가지 대상과 부딪칠 때 느낌이 일어납니다. 그래서 대상을 안다는 것은 대상을 느끼는 것입니다. 느낌은 마음의 작용이고, 아는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과 마음의 작용은 항상 함께 일어나기 때문에 아는 마음이 있을 때는 느낌도 함께 있습니다. 느낌의 종류는 매우 많습니다. 아는 마음이 다양한 만큼 느낌의 종류도 다양합니다.
느낌을 크게 나누면 맨 느낌, 육체적 느낌, 정신적 느낌으로 분류합니다. 맨 느낌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통해서 일어난 순수한 느낌입니다. 그리고 육체적인 느낌과 정신적인 느낌은 각각 즐거운 느낌, 괴로운 느낌, 덤덤한 느낌으로 나눕니다. 사실 백팔번뇌는 108가지의 느낌에 속합니다. 행복과 불행도 느낌이고, 슬픔과 비탄도 느낌입니다. 이 느낌의 본성은 일어나고 사라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무상합니다. 그리고 느낌은 변하기 때문에 괴로움입니다. 그리고 이 느낌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일어나서 사라지기 때문에 무아입니다. 느낌은 감각기관이 느끼는 것이지 내가 느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행복과 불행도 나의 행복과 불행이 아닙니다.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순간적인 느낌입니다. 그래서 나의 느낌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단지 수온이 일어난 것입니다.
③ 상온(想蘊)
오온의 세 번째는 상온입니다. 상온은 인식의 무더기입니다. “이것이 인식[想]이다.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라고 안다”고 할 때 수행자는 인식이 일어날 때 이것이 인식의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인식이 사라질 때 이것이 인식의 사라짐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인식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상하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못됩니다.
인식은 지각, 표상작용, 기억, 명칭, 표시, 상상력입니다. 인식은 느낌[受]과 마음의 형성[行]과 함께 마음의 작용입니다. 이러한 인식은 물질적 형상[色]이나 느낌처럼 분명하게 나타나는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인식은 미세한 대상이기 때문에 사실 알아차리기 어렵습니다.
일반적으로 인식은 대상이 나타날 때 감각기관의 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들에게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 정신적 과정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대상을 아는 마음과는 다릅니다. 그래서 대상을 인식할 때는 인식한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동안 저장되어 있는 정보에 의해 어떤 선입관을 가지고 안다면 바로 이 사실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꾸며서 대상을 보거나 선입관을 가지고 대상을 보면 실재하는 현상을 알아차릴 수 없습니다.
인식은 아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며 일어난 순간 사라집니다. 그래서 인식은 무상한 것입니다. 인식이 일어난 순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실재를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인식을 하는 순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인식은 괴로움입니다. 인식은 내가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순간의 마음이 인식합니다.
상온이라는 무더기는 여러 가지 기능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가 대상을 볼 때 선입관을 가지고 보는 것도 상(想)의 작용입니다. 없는 것을 만들어 보는 것도 상(想)의 작용이고, 실재하는 것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도 상(想)의 작용입니다.
인간은 유정물이나 무정물을 보고 먼저 인식합니다. 대상의 색깔, 크기를 인식한 뒤에 그것을 기억합니다. 마음은 대상이 있으면 받아들이고, 그다음 상이 나서서 이와 같은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인지하고, 기억하고, 표시를 해서 이것은 무엇이라고 분류를 합니다. 예를 들면 불은 뜨겁고 얼음은 차갑다고 분류를 합니다. 이때 무엇은 좋다거나 싫다고 인식하면 이것을 저장하여 기억한 뒤에 고정관념을 만듭니다. 이때 인식하는 것은 상(想)의 역할이며, 이것을 받아들여서 아는 것은 식(識)의 역할입니다. 그러므로 인식하는 것은 기억하여 판단하는 것이고, 의식하는 마음이 받아들여서 아는 것이라서 인식과 의식이 서로 다릅니다. 인식은 만들어서 보는 것으로 마음의 작용이고, 의식은 인식한 것을 받아들여서 아는 마음입니다.
인식은 무엇이라고 꼬리표를 붙여서 보관합니다. 이렇게 보관했다가 저장한 것을 꺼내서 보는 것이 기억입니다. 그러므로 상온은 기억의 저장탱크입니다. 고정관념이 많으면 잘못된 정보가 많은 것이고, 수행을 해서 지혜가 나면 실재하는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상온은 마음과 함께 일어나서 함께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상온은 무상한 것입니다. 이러한 상온은 끊임없이 변하므로 불만족이며 괴로움입니다. 잘못된 것을 기억해서 괴롭고 끊임없이 변해서 괴롭습니다. 이러한 상온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저 스스로의 힘으로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내가 기억하고 인식하는 것이 아니고 상온이 기억하고 상온이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아입니다. 그래서 나의 인식이 일어난 것이 아니고 단지 상온이 일어난 것입니다.
④ 행온(行蘊)
오온의 네 번째는 행온입니다. 행온은 마음의 형성의 무더기입니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行]이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마음의 형성의 사라짐이라고 안다”고 할 때 수행자는 마음의 형성이 일어날 때 이것이 마음의 형성의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마음의 형성이 사라질 때 이것이 마음의 형성의 사라짐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의 형성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상하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못됩니다.
마음의 형성을 행(行)이라고 합니다. 또 다른 말로는 의도라고도 합니다. 의도가 있는 행이기 때문에 업(業)이라고 합니다. 오온의 행은 12연기에서 과거의 행이 있고, 현재의 행이 있습니다. 과거의 행은 업의 형성이고, 현재의 행은 업의 생성입니다. 현재는 과거의 행에 의해 생겼습니다. 그리고 미래는 현재의 행에 의해 생깁니다.
수행자는 오직 미래의 원인이 되는 현재의 행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는 과거의 행을 알아차릴 것이 아니고 항상 현재의 행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현재 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리는 것이 행을 알아차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행을 알아차릴 때는 먼저 하고자 하는 의도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의도를 알아차린 뒤에 현재 하고 있는 행위 그 자체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마음의 형성은 아는 마음과 함께 일어나며, 일어난 순간 사라집니다. 그래서 행은 무상한 것입니다. 행이 일어난 순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의미를 부여하게 되어 실재를 왜곡합니다. 그러므로 행이 일어나는 순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행은 괴로움입니다. 행은 그 순간의 감각기관이 하는 것으로 나의 행이 아닙니다.
행온은 마음의 형성력입니다. 그래서 의도 또는 의지를 말합니다. 이처럼 의도에 의해 행위가 일어나는 것을 행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행이라고 할 때 몸의 움직임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고 몸을 움직이게 하는 의도를 말합니다. 행은 몸에 관한 것이 아니고, 의도가 있어서 몸이 움직이기 때문에 마음의 작용에 속합니다. 마음의 작용은 52가지가 있는데 수, 상을 제외하고 행은 50가지가 됩니다. 이 50가지는 모두 고유한 특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50가지는 모든 것들과 함께 있는 기본적인 행과 선행과 불선행으로 분류합니다.
이때 의도가 있는 행을 업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선한 마음이 선업을 행하면 선과보가 생깁니다. 그리고 불선한 마음이 불선행을 하면 불선과보를 받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태어났다는 것은 과거의 업으로 인해 재생연결식이 생겨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나 작용심으로 행위를 해서 태어날 업을 만들지 않으면 재생연결식이 생기지 않아 윤회가 끝납니다.
누구나 자신이 행위를 한 그대로 결과를 받는데 이것이 바로 업자성(業自性)의 법칙입니다. 수행자는 어떤 행위가 일어날 때 단순하게 겉모양의 행위만 알아차릴 것이 아니고 그 행위를 일으킨 마음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행위는 마음이 일으키므로 매순간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사라집니다. 그래서 무상입니다. 이러한 무상은 괴로움입니다. 그리고 행위를 일으키는 마음은 나의 의지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무아입니다. 그래서 나의 의도가 일어난 것이 아니고 단지 행온이 일어난 것입니다.
⑤ 식온(識薀)
오온의 다섯 번째는 식온입니다. 식온은 의식의 무더기입니다. “이것이 의식[識]이다.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다.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라고 안다”고 할 때 수행자는 의식이 일어날 때 이것이 의식의 일어남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의식이 사라질 때 이것이 의식의 사라짐이라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의식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법의 성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무상하기 때문에 집착할 것이 못됩니다.
의식을 식(識)이라고 합니다. 식은 대상을 아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마음과 마음의 작용으로 구별할 때의 마음인 심(心)이 있고, 감각기관의 마음인 의(意)가 있으며, 대상을 아는 마음인 식(識)이 있습니다. 이들 세 가지는 모두 같은 마음입니다. 다만 용도에 따라 다르게 사용합니다.
아는 마음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 들어오는 대상을 모두 알아차립니다. 그러므로 여섯 가지의 아는 마음이 있습니다. 아는 마음은 몸과 마음의 작용인 수, 상, 행과 함께 일어나며 일어난 순간 사라집니다. 그래서 마음은 무상한 것입니다. 마음이 일어난 순간 즉시 알아차리지 못하면 탐욕, 성냄, 어리석음이 일어납니다. 그러므로 의식을 하는 순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났다가 사라지는 마음은 괴로움입니다. 아는 마음은 내가 아는 것이 아니고 단지 순간의 마음이 압니다. 그래서 무아입니다.
식(識)은 대상을 아는 마음입니다. 마음은 대상을 아는 것으로는 하나이지만 태어난 곳에 따라, 태어난 생명의 수준에 따라 매우 많습니다. 마음에 대한 분류는 많습니다. 마음을 분류할 때 89가지 또는 121가지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여기서 주의할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마음의 분류는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일어나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지 마음의 종류가 여러 가지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전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마음은 단지 대상을 아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에서 벗어나서는 안 됩니다. 이것이 식(識)의 기능입니다. 가령 121가지의 마음이 있다면 이러한 종류의 마음이 일어났을 때 마음은 단지 이것을 아는 역할을 합니다. 그러므로 조건에 따라 다양하게 일어나는 마음의 종류가 아무리 많다 해도 아는 마음은 하나입니다. 이상 오온에 대해서 살펴보았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는 몸과 마음을 알아차릴 때 어느 특정한 대상을 선택해서 알아차릴 수도 있고, 때로는 나타나는 모든 현상을 자유롭게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몸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거나 느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거나 인식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거나 마음의 형성을 알아차리거나 이것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거나 어떤 것이나 상관하지 않습니다.
수행을 시작할 때 처음에는 강한 대상을 알아차려서 차츰 집중력을 키워야 합니다. 그리고 알아차리는 힘이 생기면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려도 좋습니다. 그래서 수행을 시작한 처음에는 강한 대상을 알아차린 뒤 집중이 되어서 차츰 대상이 미세해지면 미세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가 오온을 알아차린다는 것은 오온의 궁극의 실재인 무상함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고 나서 괴로움으로 불리는 불만족을 아는 것입니다. 그리고 자아가 있는 것이 아니라는 무아를 아는 것입니다. 이렇게 무상, 고, 무아를 알아야 비로소 오온(五蘊)을 바르게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오온을 집착하는 오취온(五取蘊)이 생기지 않습니다.
오온은 단지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만 있습니다. 그래서 오온은 무상(無常)합니다. 이러한 오온은 괴로움 그 자체입니다. 오온은 내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온은 무아(無我)입니다. 오온의 실재를 알아서 무아의 지혜가 나면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이 자리에 지고의 행복이 있습니다.
3)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十二處]를 알아차림
(1) 12처에 대한 개요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의 세 번째는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를 알아차림’입니다. 이는 열두 가지 장소를 뜻하는 말로 12처(十二處)라고도 합니다. 인간은 정신과 물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빠사나 수행은 이 정신과 물질을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이러한 정신과 물질을 세 가지로 나누는데 오온(五蘊), 12처(十二處), 18계(十八界)가 있습니다.
첫째는 오온(五蘊)은 정신과 물질의 다섯 가지 무더기들의 모임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오온은 정신을 마음과 마음의 작용을 구별하게 위해서 사용합니다. 오온은 색온(色蘊), 수온(受蘊), 상온(想蘊), 행온(行蘊), 식온(識薀)의 다섯 가지 무더기의 모임입니다. 다섯 가지 무더기라는 것은 오온의 하나하나가 여러 가지 요소로 결합되어 하나를 구성하고 다시 이들 다섯 가지가 모여서 오온을 이룹니다. 그러므로 오온은 거대한 복합체의 구성요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오온 중에서 색온은 물질의 무더기로 몸을 말합니다. 수온, 상온, 행온은 마음의 작용입니다. 마음의 작용은 마음과 함께 있으면서 느낌, 인식, 의도를 일으켜 마음이 알도록 합니다. 식온은 아는 마음으로 마음의 작용과 함께 있으면서 마음을 이끕니다. 그러므로 오온이라고 할 때는 이런 요소를 드러낼 때 사용하는 용어입니다.
둘째는 12처(十二處)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과 여섯 가지 감각 대상의 장소를 말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입니다. 그리고 여섯 가지 감각대상은 색(色), 성(聲), 향(香), 미(味), 촉(觸), 법(法)입니다. 안에 있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육내처(六內處)라고 하며 밖에 있는 여섯 가지 감각대상을 육외처(六外處)라고 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눈, 귀, 코, 혀, 몸, 마음은 반드시 여섯 가지 감각대상인 형상, 소리, 냄새, 맛, 접촉, 생각과 부딪칩니다. 이들 열두 가지를 각각의 장소라고 합니다.
셋째는 18계(十八界)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六根]과 여섯 가지 감각대상[六境]과 여섯 가지 아는 마음[六識]을 모두 합쳐서 18계라고 합니다.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은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입니다. 열두 가지 감각장소에 다시 여섯 가지의 아는 마음을 포함하여 18계라고 하는 것은 하나의 실재하는 세계를 말합니다.
위빠사나 수행에서는 18계를 전부(全部), 일체, 모든 것이라고 합니다. 전부를 알았다거나, 일체를 알았다거나, 모든 것을 알았다고 할 때는 정신과 물질에 관한 18계를 알았다는 뜻입니다. 수행자는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리기 때문에 18계를 하나의 세계로 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이러한 세계를 벗어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우주에 관한 것이나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위빠사나 수행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래서 수행자는 오직 자신의 몸과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립니다.
이외에도 12연기의 오온이 있습니다. 12연기의 오온은 현재라는 측면에서 식(識), 정신과 물질[名色], 육입(六入), 접촉(接觸), 느낌[受] 다섯 가지입니다. 12연기에서의 오온은 식을 원인으로 정신과 물질이 일어나고, 정신과 물질을 원인으로 육입이 일어나고, 육입을 원인으로 접촉이 일어나고, 접촉을 원인으로 느낌이 일어나는 과정입니다. 그러므로 12연기의 오온은 정신과 물질이 어떻게 원인과 결과로 일어나는가를 밝히고 있습니다.
12연기에서 식(識)은 재생연결식(再生連結識)의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죽을 때의 마음을 원인으로 새로 태어날 때의 마음이라는 결과가 생깁니다. 이때의 마음을 재생연결식이라고 합니다. 재생연결식에 의해 태어나는 것을 재생(再生)이라고 합니다. 재생은 죽고 난 뒤에 과거의 마음은 사라지고 그 마음에 있는 과보심에 의해 새로 태어나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같은 마음이 옮겨와서 새로 태어난다는 환생(還生)과는 다릅니다. 재생연결식은 태어나는 순간 일생에 한 번 일어납니다. 그래서 재생연결식이 일어나서 즉시 사라진 뒤에 식으로 바뀝니다. 또 육입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고 접촉은 여섯 가지 감각대상입니다. 그리고 느낌은 아는 마음과 함께 있습니다.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열두 가지 장소의 접촉으로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이 일어나서 살고 있습니다. 이러한 분류는 인간이 살아가는 삶의 기본구조를 밝힌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해서 들어오는 정보를 통해 여섯 가지 아는 마음으로 삽니다. 행복도 이러한 경로를 통해 들어오며, 불행도 이러한 경로를 통해 들어옵니다. 깨달음도 이러한 경로를 통해 들어옵니다. 그렇지 않고 이것 외에 다른 통로는 없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자신의 정신과 물질을 대상으로 알아차리는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마다 알아차림을 확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여섯 가지 아는 마음과 함께 느낌이 일어날 때 갈애로 진행되지 않아서 스스로 번뇌를 제거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육입(六入) 또는 육문(六門)이라고도 합니다. 이는 감각대상이 감각기관에 와서 부딪치는 것을 말합니다. 수행자가 일차적으로 알아차려야 할 장소는 밖에 있는 감각대상이 아니고 여섯 가지 감각장소인 육입입니다. 카메라의 렌즈가 밖에 있는 피사체로 나가 사진을 찍어오는 것이 아니고 밖에 있는 피사체가 카메라 렌즈에 접촉해서 사진이 찍히는 것처럼 수행자는 일차적으로 자신의 감각기관에서 대상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은 생존의 기본조건입니다. 눈이 없으면 형상을 볼 수 없으며, 형상을 보는 마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눈이, 빛에 의해, 형상을 보고,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 네 가지를 원인과 결과라고 하며 조건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성숙하기 위해서는 모든 요소들이 저마다의 영역에서 각각의 역할을 해서 보고 아는 것이 가능합니다.
귀가 없으면 소리를 들을 수 없으며, 소리를 듣는 마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귀가, 소리를, 막히지 않은 공간에 의해 듣고,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 네 가지를 조건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것을 원인과 결과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소리는 조건이 듣게 하는 것이지 이것을 주도하는 자아가 있어서 듣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내가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고 감각기관이 듣고 마음이 압니다.
코가 없으면 냄새를 맡을 수 없으며, 냄새를 맡는 마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코가, 냄새를, 바람의 방향에 의해 맡고,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 네 가지를 조건이라고 합니다.
혀가 없으면 맛을 볼 수가 없으며, 맛을 아는 마음이 생길 수 없습니다. 혀가, 맛을, 침에 의해서 맛보고,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 네 가지를 조건이라고 합니다.
몸이, 대상과, 접촉해서,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 네 가지를 조건이라고 합니다.
마음이, 마음의 대상과, 접촉해서,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 네 가지를 조건이라고 합니다.
이처럼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접촉해서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데 이러한 조건이 없으면 사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중 단 한 가지라도 결여되면 삶의 정상적인 기능을 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사는 것이 아니고 단지 이러한 조건에 의해 사는 것입니다. 여기서 조건이란 모든 것이 원인과 결과로 진행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이러한 조건을 지배하는 어떤 초월적 존재는 없습니다.
이러한 과정에서 수행자가 할 일은 눈이, 빛에 의해, 형상을, 아는 마음이 생길 때마다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눈이 빛에 의해 형상을 알 때 알아차림이 없는 상태에서 대상을 봅니다. 이때 알아차림이 없으면 느낌이 일어날 때 갈애가 일어납니다. 이 갈애가 열 가지 족쇄를 불러들입니다. 그러면 생명을 윤회의 수레바퀴에 붙들어 맵니다. 그래서 괴로움뿐인 끝없는 윤회를 합니다.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부딪쳐서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알아차림이 없으면 다섯 가지 장애보다 더 구체적인 열 가지 족쇄가 윤회의 세계에 발목을 붙들어 맵니다. 열 가지 족쇄는 감각적 욕망, 악의, 아만, 사견, 의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존재에 대한 욕망, 질투, 인색, 무명입니다. 이 열 가지 족쇄는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 일어납니다.
이상이 육내처가 육외처와 접촉할 때 알아차리지 못하면 일어나는 족쇄들입니다. 위빠사나 수행자가 대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바로 이 족쇄의 사슬에 묶이지 않기 위해서입니다. 만약 알아차리지 못한다면 윤회의 수레바퀴에 밧줄로 묶이는 신세를 면하기 어렵습니다. 이것이 위빠사나 수행을 해야 하는 가장 절실한 이유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면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야 할 것이 무엇이며, 왜 그것을 해야 하는지 다시 한 번 알아야 합니다.
십이처가 갖는 의미는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이 감각기관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감각기관을 기반으로 생긴 모든 문제들은 감각기관에서 해결되어야 합니다. 모든 것은 토대가 되는 감각기관이란 기반을 벗어나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눈이 대상을 볼 때 대상에서는 답이 없습니다. 오직 대상을 받아들여서 아는 자신의 마음이 어떤 상태를 유지하느냐에 따라 문제해결의 실마리가 잡힙니다. 수행의 세계에서는 현상계에서 답을 구하지 않습니다. 현상계를 보는 자신의 감각기관에서 답을 구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내면을 통찰하는 수행을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항상 자신의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리고 대상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면 언제나 본질에서 벗어나지 않고 일의 핵심에 접근하여 해결할 수 있습니다. 자신의 감각기관에 마음을 두고 알아차리는 것이 자신의 내면을 통찰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내면의 통찰에 의해서 존재하는 것의 특성을 알아 모든 번뇌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이 여섯 가지 감각대상과 부딪쳐서 여섯 가지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일반적인 인식 과정입니다. 수행자는 여기에 새로운 형태의 과정을 만들어야 합니다. 이렇게 일반적으로 아는 것에 알아차림이란 원인을 만들어서 깨어서 아는 결과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수행자가 아는 것은 일반적으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알아차림이란 새로운 원인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정에서만 통찰지혜가 성숙됩니다. 수행자는 반드시 이러한 통찰지혜가 계발되는 마지막까지 인내하면서 노력해야 합니다. 그래서 도과를 성취해야 비로소 노력한 결과가 분명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모든 수행자의 궁극의 목표는 도과를 성취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수행자가 처음부터 도과를 목표로 하지는 않습니다. 수행을 시작하는 수행자는 도과가 무엇인지 알 수 없으므로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도과는 바르게 수행을 한 결과로 오는 지혜의 산물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현재의 괴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모든 현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 결과로 자연스럽게 지고의 행복에 이르게 됩니다.
수행자에게는 두 가지 선택만 있습니다. 감각기관을 기반으로 해서 들어오는 번뇌를 알아차려서 일어나지 못하도록 할 것인가, 아니면 감각기관을 기반으로 해서 번뇌가 들어와도 좋으니 과연 알아차림을 할 필요가 있겠는가, 하는 두 가지의 선택입니다. 하나는 아는 마음이고, 또 하나는 모르는 마음입니다. 아는 마음은 지혜고 모르는 마음은 무지입니다. 아는 마음은 행복을 만들고 모르는 마음은 괴로움을 만듭니다. 이것의 선택은 온전하게 자신의 마음이 합니다. 이처럼 눈으로 형상을 볼 때, 귀로 소리를 들을 때, 코로 냄새를 맡을 때, 혀로 맛을 볼 때, 몸으로 접촉할 때 모두 똑같은 방식으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것을 벗어난 어떤 실재하는 진실은 없습니다. 이와 같이 수행자는 대상을 알아차릴 때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하며 혹은 대상을 알아차릴 때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혹은 대상을 알아차릴 때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해야 합니다.
하루 중 수행자가 처한 상황은 다양합니다. 어떤 때는 조용히 혼자만 있을 때도 있을 것이고 어떤 때는 상대가 있기도 할 것입니다. 그리고 자신이 맡은 일을 해야 할 때도 있을 것입니다. 이때마다 알아차리는 방법을 달리해야 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을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릴 수도 있으며, 때로는 감각대상에 두고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알아차림을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의 안팎에 두고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만약 수행자가 오직 자신의 감각기관에만 마음을 두겠다고 고집하면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 없어집니다. 상대가 있을 때는 마음을 안팎에 두고 알아차려야 합니다. 상대가 말을 하는데 마음을 오직 자신의 감각기관에만 두고 있으면 상대의 말이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면 상대를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위빠사나 수행이 아닙니다.
위빠사나 수행은 중도적 관점에서 조화를 이룹니다. 그래서 나와 남을 모두 함께 배려하는 마음으로 수행을 해야 합니다. 수행자의 기본적인 알아차림은 항상 자신의 감각기관에 두되 여러 가지 상황에 따라 탄력적으로 대처하는 것이 바른 수행입니다. 어느 곳에 마음을 두거나 대상을 깨어서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으면 훌륭한 수행을 합니다. 언제나 대상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대상을 알아차리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위빠사나는 진리의 성품을 알기 위해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입니다. 첫째, 몸을 알아차려서 부정(不淨)한 성품을 압니다. 둘째, 느낌을 알아차려서 괴로움의 성품을 압니다. 셋째, 마음을 알아차려서 무상의 성품을 압니다. 넷째, 마음의 대상인 법을 알아차려서 무아의 성품을 압니다. 이렇게 신(身), 수(受), 심(心), 법(法)이라는 네 가지 대상을 알아차려서 무상, 고, 무아의 세 가지 자각이 일어나면 갈애가 끊어져서 해탈의 자유를 얻습니다.
(2) 대념처경의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十二處]를 알아차림
대념처경에 나오는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十二處]를 알아차림’은 다음과 같습니다.
“다시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라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비구들이여, 어떻게 비구가 여섯 가지 안팎의 감각장소라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내는가?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눈[眼]을 알아차리고, 형상[色]을 알아차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린다. 비구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비구는 귀[耳]를 알아차리고, 소리[聲]를 알아차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린다. 비구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비구는 코[鼻]를 알아차리고, 냄새[香]를 알아차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린다. 비구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비구는 혀[舌]를 알아차리고, 맛[味]을 알아차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린다. 비구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비구는 몸[身]을 알아차리고, 접촉[觸]을 알아차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린다. 비구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비구는 마음[意]을 알아차리고, 마음의 대상[法]을 알아차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나는 족쇄를 알아차린다. 비구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이와 같이 그는 법에서 법을 안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에서 법을 밖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에서 법을 안팎으로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비구는 법이 일어나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이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혹은 법이 일어나고 사라지는 현상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비구는 단지 법이 있다는 알아차림을 확립할 때까지 법의 현상들에 대한 분명한 앎과 알아차림을 확립하고, 유지한다. 비구는 갈애와 잘못된 견해에 의지하지 않고 지낸다. 그는 세상에서 아무것도 집착하지 않는다. 비구들이여, 이와 같이 비구는 법에서 법을 알아차리는 수행을 하면서 지낸다.”
① 눈과 형상의 알아차림
“비구들이여, 여기 비구는 눈[眼]을 알아차리고, 형상[色]을 알아차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린다. 비구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
수행자가 눈으로 대상을 볼 때는 눈이라는 감각기관과 형상이라는 감각대상이 부딪쳐서 보는 것이 성립됩니다. 모든 앎은 이처럼 안에 있는 감각기관과 밖에 있는 감각대상이 있어서 일어납니다. 이것은 정신적 영역과 물질적 영역이 서로의 역할을 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알아야 정신과 물질을 구별해서 아는 지혜가 납니다. 그리고 다음으로 원인과 결과를 아는 지혜가 성숙됩니다.
수행자는 항상 대상과 그것을 아는 마음이 각각의 영역에서 각자의 기능을 하는 것을 알아야 잘못된 견해에 빠지지 않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대상을 볼 때 내가 본다는 생각을 가지고 봅니다. 그러면 대상의 성품인 법을 볼 수 없습니다. 이렇게 알아차려야 내 몸과 마음이라는 잘못된 견해에 사로잡혀 집착을 하지 않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안에 있는 감각장소라고 하는데 인간이 생존하는데 없어서는 안 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사실 정신과 물질이라고 할 때 감각기관은 정신과 물질을 구성하는 가장 핵심적인 요소입니다. 우리가 사는데 필요한 모든 정보는 오직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통해 들어오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감각기관은 삶 그 자체입니다.
“여기 비구는 눈[眼]을 알아차리고, 형상[色]을 알아차리고”라고 했을 때 눈을 알아차리는 것은 안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감각기관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형상을 알아차리는 것은 밖을 알아차리는 것으로 감각대상을 알아차립니다. 수행자는 상황에 따라 감각기관을 알아차릴 때가 있고 감각대상을 알아차릴 때가 있습니다.
눈이 형상을 볼 때는 밖에 있는 감각대상과 접촉합니다. 이때 형상은 대상으로써 법이라고 합니다. 수행을 할 때 알아차릴 대상은 정신적인 것과 물질적인 것과 열반입니다. 이것이 모두 법입니다. 그러므로 법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여섯 가지 안에 있는 감각기관은 여섯 가지 밖에 있는 감각대상과 접촉합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그치지 않습니다. 밖에 있는 감각대상이 안에 있는 감각기관과 접촉합니다. 그래서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은 서로 되먹임 합니다. 눈에 의해 대상이 보이고 또 대상이 있어 눈을 토대로 일어난 안식이 대상을 압니다. 만약 눈이 없다면 보는 것이 성립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때의 눈은 안식의 기반입니다. 그러므로 눈은 안식이 일어나는 장소입니다. 마찬가지로 눈으로 볼 수 있는 형상이 없으면 보는 것이 성립될 수 없으므로 형상은 안식이 일어날 수 있도록 하는 조건입니다. 이러한 상호적 관계가 열두 가지 감각장소인 십이처입니다. 이상의 열두 가지 장소는 모두 알아차릴 대상이라서 법에 속합니다. 십이처는 모두 여러 가지 조건하에 상호적으로 작용합니다.
눈으로 형상을 볼 때는 눈이라는 감각기관과 형상이라는 감각대상이 부딪쳐서 보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이때 눈이라는 감각기관과 형상이라는 감각대상이 부딪친 것을 다시 아는 마음이 받아들여서 압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알아차림이 있으면 번뇌가 침투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보기 나쁜 형상이라고 화를 내거나, 보기 좋은 형상이라고 감각적 욕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형상은 단지 형상일 뿐입니다. 형상은 있을 만해서 있는 것입니다. 있을 만해서 있는 형상을 자신의 입장에서 보고 당위성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에 따른 고통이 일어납니다.
형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형상은 기분이 좋고, 어떤 형상은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은 형상은 좋은 느낌이 일어나서 집착하고, 기분이 나쁜 형상은 싫은 느낌이 일어나 화를 냅니다. 이것은 형상하고 상관없이 온전히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이때의 형상은 단지 원인을 제공했을 뿐이고 이러한 결과는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만약 형상으로 인해 어떠한 느낌이 일어났다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때 일어난 좋은 느낌이나 싫은 느낌이 바로 족쇄입니다. 족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반응한 느낌입니다. 이러한 느낌이 다양한 형태의 번뇌로 번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느낌일 뿐입니다. 형상이라는 단순한 느낌에 여러 가지 형태로 반응했다면 이것은 자신의 유신견으로 인한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일반적으로 눈으로 대상을 볼 때 아는 마음이 일어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원인과 결과입니다. 눈이라는 원인이 있어 대상을 보는 것은 결과입니다. 그리고 눈과 대상을 원인으로 아는 마음이라는 결과가 있습니다. 이때 이렇게 아는 것은 깨어서 대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각성된 상태가 아닙니다.
수행이란 눈이 대상을 보고 아는 마음이 일어날 때 알아차림이란 새로운 행위가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그냥 아는 것과 알아차려서 아는 것과는 다릅니다. 그냥 아는 것은 집중력이 없고 습관적으로 아는 것이지만 알아차리는 것은 집중력이 있고 새로운 습관을 길들이는 행위입니다. 수행에서 알아차린다는 것은 대상을 받아들여서 알 때 깨어서 대상을 지켜보는 행위가 포함된 것입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선한 행위이지 아는 마음이 아닙니다.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린다”라고 했을 때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접촉하면 열 가지 족쇄가 일어납니다. 감각기관과 감각대상이 두 가지 조건입니다. 이 조건이 원인과 결과입니다. 이렇게 두 가지를 조건으로 해서 일어난 열 가지 족쇄는 인간을 다시 태어나게 하는 윤회의 수레바퀴에 붙들어 매는 역할을 합니다. 그래서 밧줄로 묶는 것과 같아서 결(結)이라고도 합니다.
열 가지 족쇄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감각적 욕망의 족쇄, 둘째는 악의의 족쇄, 셋째는 아만의 족쇄, 넷째는 사견의 족쇄, 다섯째는 의심의 족쇄, 여섯째는 계율과 금지조항에 대한 족쇄, 일곱째는 존재에 대한 욕망의 족쇄, 여덟째는 질투의 족쇄, 아홉째는 인색의 족쇄, 열째는 무명의 족쇄입니다.
이상이 논장에 있는 열 가지 족쇄입니다.
이상의 족쇄가 일어나면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 족쇄에 걸린 것을 아는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가슴으로 와서 족쇄에 걸린 마음으로 인해 일어난 느낌을 알아차립니다. 처음에는 거친 느낌을 차츰 중간 느낌을 나중에는 미세한 느낌이 될 때까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느낌이 고요해지면 그 자리에서 일어나고 꺼지는 호흡이나 맥박을 알아차립니다.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려서 열 가지 족쇄가 일어나지 않으면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알아차림을 계속해야 합니다.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안다”고 할 때 족쇄가 일어났으면 어떻게 일어나는지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때 왜 전에 없던 족쇄가 일어났는지를 아는 것이 바로 지혜입니다. 그러므로 족쇄가 일어났을 때 생각으로 족쇄가 일어난 것을 궁금하게 여겨서는 안 됩니다. 단지 족쇄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런 뒤에 조건이 성숙되면 지혜가 나서 족쇄가 일어난 원인을 알 수 있습니다. 수행자는 언제나 지금 일어난 대상을 즉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계속해서 대상을 알아차리면 결국에는 왜 이런 족쇄가 일어났는지를 지혜로 알 수 있습니다.
열 가지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첫째, 눈이 대상과 접촉했을 때 감각적 욕망의 달콤함을 즐기면 감각적 욕망의 족쇄가 일어납니다.
둘째, 원하지 않는 대상을 증오하고 화를 낼 때 악의의 족쇄가 일어납니다.
셋째, 자기밖에 모른다고 자만에 빠질 때 아만의 족쇄가 일어납니다.
넷째, 이 형상은 항상 하고 견고하다고 생각하여 사견의 족쇄가 일어납니다.
다섯째, 이 형상이 중생인가, 아니면 중생의 것인가라고 의심할 때 의심의 족쇄가 일어납니다.
여섯째, 의례와 형식에 대한 믿음이 강할 때 계율과 금지조항에 대한 족쇄가 일어납니다.
일곱째, 더 좋은 삶을 살고 싶고 더 좋은 세상에 태어나고 싶을 때 존재의 욕망에 대한 족쇄가 일어납니다.
여덟째, 이 형상을 다른 사람이 얻지 못하기를 바랄 때 질투의 족쇄가 일어납니다.
아홉째, 자신이 가진 것을 숨기고 남과 함께 나누기 싫어할 때 인색의 족쇄가 일어납니다.
열째, 지금까지 말한 모든 것과 함께 할 때 무명의 족쇄가 일어납니다.
모든 것의 근본원인은 무명과 갈애입니다. 어리석음과 바라는 마음이 있으면 알아차림을 확립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나 지혜가 없다면 필연적으로 열 가지 족쇄가 일어납니다. 그래서 족쇄가 일어났을 때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려야 합니다.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 안다”고 할 때 수행자는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수행자가 일어난 족쇄를 즉시 알아차리면 그 족쇄는 알아차림에 의해 스스로 사라집니다. 그렇지 않고 족쇄를 없애려고 하거나 이것을 없애기 위해 다른 것을 바란다면 족쇄가 더 커져서 완전히 소멸시킬 수 없습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 안다”고 할 때 수행자는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알아야 합니다. 다시 족쇄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족쇄가 일어난 원인을 제거하면 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족쇄가 일어난 것을 알아차려야 하며, 알아차린 결과로 족쇄가 사라진 것을 다시 알아차려야 합니다. 족쇄가 어떻게 사라졌는지를 알아차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거치면 사라진 족쇄가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만약 이때 다시 이러한 번뇌가 나타난다면 처음부터 이러한 과정을 다시 되풀이해서 시작해야 합니다. 번뇌의 힘은 언제나 알아차리는 힘보다 큽니다. 번뇌는 오랫동안 생성되어 온 것이라서 제거하려 해도 제거되지 않습니다. 이 번뇌를 제거하는 유일한 방법은 알아차리는 것이고, 알아차림을 지속하는 것입니다. 이것밖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만약 쉽게 결과를 얻으려고 하면 오히려 번뇌의 힘을 키우는 결과가 생깁니다. 하지만 이러한 악순환이 모든 사람들의 삶의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으로는 결코 바람직한 결과를 얻을 수 없습니다.
사라진 족쇄가 확실하게 다시 일어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지혜가 나서 도과를 성취해야 합니다. 이것은 생각이 아닌 위빠사나 수행의 실천을 통해 얻는 것입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사견, 의심, 계율과 의식에 대한 집착, 질투, 인색이 소멸됩니다.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하면 거친 감각적 욕망과 거친 악의가 소멸합니다. 아나함 도과를 성취하면 미세한 감각적 욕망과 미세한 악의가 소멸합니다. 마지막으로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하면 이때까지 남아 있던 아만, 존재에 대한 욕망, 무명이 소멸하여 열 가지 족쇄가 모두 소멸합니다.
이상 열 가지 족쇄는 논장에 있는 내용입니다. 대념처경 주석서에서도 이러한 열 가지 족쇄를 밝히고 있습니다. 그러나 경장에서 말하는 족쇄는 같은 내용이지만 약간 다릅니다. 족쇄의 소멸은 번뇌를 소멸시키는 것으로 깨달음으로 가는 매우 중요한 요소입니다. 그러므로 족쇄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살펴보겠습니다.
경장에 있는 열 가지 족쇄는 오하분결(五下分結)과 오상분결(五上分結)입니다. 오하분결은 욕망의 세계[欲界]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다섯 가지 족쇄로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는 유신견(有身見)입니다. 유신견은 자신의 몸과 마음이 나의 소유라는 잘못된 견해입니다. 이것을 삿된 견해라고 하거나 사견(邪見)이라고 합니다.
둘째는 회의적 의심입니다. 회의적 의심은 믿음과 지혜가 없어 어떻게 할지 몰라 결정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셋째는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입니다. 계금취견(戒禁取見)이라고도 하는데 어떤 의례와 형식을 통해서만 깨달음에 이를 수 있다는 견해입니다.
넷째는 감각적 욕망입니다. 감각적 욕망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 일으키는 탐욕입니다.
다섯째는 악의입니다. 악의는 악한 의도로 성내는 마음입니다.
이상 오상분결은 미세한 물질의 세계인 천상의 색계(色界)와 몸이 없는 정신세계인 무색계(無色界)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다섯 가지 족쇄로 다음과 같습니다.
여섯째는 색계에 대한 욕망입니다. 색계에 대한 욕망은 선정수행을 해서 얻은 고요함에 대한 집착으로 색계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일곱째는 무색계에 대한 욕망입니다. 무색계에 대한 욕망은 무색계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는 마음입니다.
여덟째는 아만입니다. 아만은 자만심으로 오직 나만이 이것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갖는 오만입니다.
아홉째는 들뜸입니다. 들뜸은 불안정한 상태에서 항상 흔들리는 마음을 갖는 것입니다.
열째는 어리석음입니다. 어리석음은 무지로 모르는 마음입니다. 어리석음은 불선심을 이끄는 마음으로 언제나 다른 족쇄와 함께 있습니다.
이상 열 가지 족쇄는 통찰지혜 수행을 해서 도과를 성취하면 단계적으로 소멸됩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하면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이 소멸됩니다. 다음에 사다함의 도과를 성취하면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이 소멸되고 감각적 욕망과 악의가 약화됩니다. 다음에 사다함이 되면 유신견, 회의적 의심, 계율이나 금지조항에 대한 집착, 감각적 욕망, 악의가 완전하게 소멸합니다. 그러므로 아나함의 도과를 성취해야 비로소 욕계에 존재를 붙들어 매는 족쇄를 완전하게 소멸시켜 색계천상의 정거천에서 태어나 다음에 아라한이 되어 윤회를 끝냅니다.
마지막으로 아라한의 도과를 성취하면 열 가지 족쇄를 모두 끊어서 다시 태어나는 윤회를 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장애는 정신적 상태에 따라 소멸되므로 수행자는 결과를 바라지 말고 오직 알아차리는 일에 전념해야 합니다. 특히 색계, 무색계 천상에 태어나기를 바라지 않으며, 아만심이나 들뜸이 모두 소멸되어야 비로소 아라한이 됩니다. 이상이 경장에서 밝히는 열 가지 족쇄입니다.
도과를 성취한다는 것은 열반을 의미합니다. 열반은 번뇌가 불타버린 최고 집중의 상태입니다. 그러나 수다원의 열반과 사다함의 열반과 아나함의 열반과 아라한의 열반은 종류가 다릅니다. 그래서 어떤 도과를 성취한 열반이냐에 따라 소멸되는 족쇄의 종류가 달라집니다. 이렇듯이 번뇌도 도과의 지혜에 따라 소멸되는 종류가 다릅니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번뇌가 없기를 바란다면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도과를 성취해야 합니다. 이 길이 아닌 곳에서는 괴로움을 피할 방법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몰라서 이 길을 가지 못했다면 이제 알았으니 이 길로 가야 합니다.
법은 다른 곳에 있지 않습니다. 법은 지금 여기 있는 자신의 몸과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순간의 몸과 마음을 알아차리는 것이 도과를 얻는 출발입니다. 우리가 무엇이 진리인지 알았다 해도 진리를 실천하지 않으면 진리를 바르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위빠사나 수행을 해서 통찰지혜가 나야 진리가 무엇인지 바르게 압니다.
예외적으로 도과를 성취하지 않아도 12연기법을 철저하게 숙지한다면 의심에서 해방되는 지혜를 얻습니다. 그러면 지옥, 축생, 아귀, 아수라의 사악도에 태어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수다원의 도과를 성취해야 사악도에서 태어나지 않지만 12연기법을 숙지했다면 사악도에 태어나지 않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불선행을 하면 불선과보를 받는다는 원인과 결과를 알기 때문에 12연기를 공부한 사람은 사악도에 떨어질 악행을 범하지 않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입니다.
이제 수행자는 번뇌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의 문을 통해서 들어온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 생긴 결과고, 모든 원인은 감각기관이 있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이러한 감각기관을 감각영역, 감각장소, 감각기반, 감각토대 등으로 부릅니다. 무엇이나 어떤 기반을 토대로 일어납니다. 그래서 기반에 대한 알아차림을 확립해야 합니다. 그래서 알아차림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을 지키는 문지기입니다. 만약 문지기가 없으면 번뇌가 자신의 몸과 마음을 제집 드나들듯이 들락거릴 것입니다. 그래서 번뇌와 함께 동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도둑이 들어와 주인 행세를 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알아차려야 합니다. 수행자가 얼마나 문지기 역할을 충실히 했는가 하는 것으로 수행의 기준을 삼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이 바로 지혜를 계발하는 기준입니다. 그러므로 수행자는 번뇌가 들어오면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고, 번뇌가 사라졌으면 사라진 것을 알아차리고, 번뇌가 들어오지 않았으면 들어오지 않은 것을 알아차려야 합니다. 이런 단순한 알아차림을 해야 끈질긴 번뇌와의 다툼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에서 알아차릴 때 두 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첫 번째는 아는 마음을 자신의 여섯 감각기관에 두고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두 번째는 아는 마음을 현재 대상을 지켜보는 마음에 두고 알아차리는 방법입니다.
여기서 두 번째 방법이 아는 마음을 알아차리는 심념처(心念處) 수행입니다.
눈으로, 형상을, 빛에 의해 보고, 아는 마음이 생기는 과정은 네 가지 조건의 결합입니다. 여기서 하나라도 빠지면 보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때 내가 있어 보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에 의해 보는 것이 성립됩니다. 그리고 내가 있어 아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기관이 있어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자아는 없습니다. 보고 아는 순간 감각관이나 감각대상이나 아는 마음이나 즉시 일어나서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무상합니다. 이렇게 무상한 것이 괴로움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자아가 없어 무아입니다.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기반으로 형상이라는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 열 가지 족쇄가 일어나기도 하고, 열 가지 족쇄를 알아차리면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족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면 족쇄가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도과를 성취하면 사라진 족쇄가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해탈의 자유입니다. 여섯 가지 감각기관 중 하나인 눈이 대상과 접촉해서 아는 과정처럼 나머지 감각기관이 감각대상과 접촉해서 아는 과정도 모두 똑같습니다.
② 귀와 소리의 알아차림
“비구는 귀[耳]를 알아차리고, 소리[聲]를 알아차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린다. 비구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고 할 때 수행자가 소리를 들을 때는 귀라는 감각기관과 소리라는 감각대상이 부딪쳐서 소리가 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이때 귀라는 감각기관과 소리라는 감각대상이 부딪친 것을 다시 아는 마음이 받아들여서 압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알아차림이 있으면 번뇌가 침투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시끄러운 소리라고 화를 내거나 달콤한 소리라고 감각적 욕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소리는 단지 소리일 뿐입니다. 소리는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소리를 자신의 입장에서 들으면 일어날 만한 당위성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고통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소리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소리는 기분이 좋고, 어떤 소리는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은 소리는 좋은 느낌이 일어나서 집착하고, 기분이 나쁜 소리는 싫은 느낌이 일어나 화를 냅니다. 이것은 소리하고 상관없이 온전히 자신의 감정이 만듭니다. 이때의 소리는 단지 원인을 제공했을 뿐이고 이러한 결과는 자신이 만든 것입니다.
만약 소리로 인해 어떠한 느낌이 일어났다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때 일어난 좋은 느낌이나 싫은 느낌이 바로 족쇄입니다. 족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반응한 느낌입니다. 이러한 느낌이 다양한 형태의 번뇌로 번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느낌일 뿐입니다. 소리라는 단순한 느낌에 여러 가지 형태로 반응했다면 이것은 자신의 유신견으로 인한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귀라는 감각기관과 소리라는 감각대상이라는 두 가지 조건은 원인과 결과입니다. 귀라는 원인이 있어서 소리라는 결과가 있습니다. 다시 귀와 소리라는 원인이 있어서 이것을 아는 마음이란 결과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소리를 듣고 아는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수행자는 여기서 새로운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합니다. 귀와 소리와 아는 마음이라는 원인이 있어서 이것을 깨어서 아는 알아차림이란 결과가 수행입니다.
귀로, 소리를, 장애물 없이, 듣고 아는 마음이 생기는 과정은 네 가지 조건의 결합입니다. 여기서 하나라도 빠지면 듣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때 내가 있어 듣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에 의해 듣는 것이 성립됩니다. 그리고 내가 있어 듣는 것이 아닙니다. 감각기관이 있어 듣고 압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자아는 없습니다. 듣고 아는 순간 감각기관이나 감각대상이나 아는 마음이나 일어나서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무상합니다. 이렇게 무상한 것이 괴로움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자아가 없어 무아입니다.
귀라는 감각기관을 기반으로 소리라는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 열 가지 족쇄가 일어나기도 하고, 열 가지 족쇄를 알아차리면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족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면 족쇄가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도과를 성취하면 사라진 족쇄가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해탈의 자유입니다.
③ 코와 냄새의 알아차림
“비구는 코[鼻]를 알아차리고, 냄새[香]를 알아차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린다. 비구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고 할 때 수행자가 냄새를 맡을 때는 코라는 감각기관과 냄새라는 감각대상이 부딪쳐서 냄새가 나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이때 코라는 감각기관과 냄새라는 감각대상이 부딪친 것을 다시 아는 마음이 받아들여서 압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알아차림이 있으면 번뇌가 침투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싫은 냄새라고 화를 내거나 좋은 냄새라고 감각적 욕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냄새는 단지 냄새일 뿐입니다. 냄새는 일어날 만해서 일어납니다.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냄새를 자신의 입장에서 맡으면 일어날 만한 당위성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 따른 고통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냄새를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냄새는 기분이 좋고, 어떤 냄새는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은 냄새는 좋은 느낌이 일어나서 집착하고, 기분이 나쁜 냄새는 싫은 느낌이 일어나 화를 냅니다. 이것은 냄새하고 상관없이 온전히 자신이 만듭니다. 이때의 냄새는 단지 원인을 제공했을 뿐이고 이러한 결과는 자신이 만듭니다.
만약 냄새로 인해 어떠한 느낌이 일어났다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때 일어난 좋은 느낌이나 싫은 느낌이 바로 족쇄입니다. 족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반응한 느낌입니다. 이러한 느낌이 다양한 형태의 번뇌로 번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느낌일 뿐입니다. 냄새라는 단순한 느낌에 여러 가지 형태로 반응했다면 이것은 자신의 유신견으로 인한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코라는 감각기관과 냄새라는 감각대상이라는 두 가지 조건은 원인과 결과입니다. 코라는 원인이 있어서 냄새라는 결과가 있습니다. 다시 코와 냄새라는 원인이 있어서 이것을 아는 마음이란 결과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냄새를 맡고 아는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수행자는 여기서 새로운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합니다. 코와 냄새와 아는 마음이라는 원인이 있어서 이것을 깨어서 아는 알아차림이란 결과가 수행입니다.
코로, 냄새를, 바람의 방향에 의해 맡고, 아는 마음이 생기는 과정은 네 가지 조건의 결합입니다. 여기서 하나라도 빠지면 냄새를 맡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때 내가 있어 냄새를 맡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에 의해 냄새를 맡는 것이 성립됩니다. 다만 감각기관이 있어 냄새를 맡고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자아는 없습니다. 냄새를 맡고 아는 순간 감각기관이나 감각대상이나 아는 마음이나 모두 일어나서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무상합니다. 이렇게 무상한 것이 괴로움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자아가 없어 무아입니다.
코라는 감각기관을 기반으로 냄새라는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 열 가지 족쇄가 일어나기도 하고, 열 가지 족쇄를 알아차리면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족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면 족쇄가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도과를 성취하면 사라진 족쇄가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해탈의 자유입니다.
④ 혀와 맛의 알아차림
“비구는 혀[舌]를 알아차리고, 맛[味]을 알아차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린다. 비구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고 할 때 수행자가 맛을 알 때는 혀라는 감각기관과 맛이라는 감각대상이 부딪쳐서 맛을 아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이때 혀라는 감각기관과 맛이라는 감각대상이 부딪친 것을 다시 아는 마음이 받아들여서 압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알아차림이 있으면 번뇌가 침투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맛이 없다고 화를 내거나 맛이 좋다고 감각적 욕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맛은 단지 맛일 뿐입니다. 맛은 음식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특성입니다. 맛은 있을 만해서 있는 것입니다. 있을 만해서 있는 맛을 자신의 입장에서 맛보면 있을 만한 당위성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그에 따른 고통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음식을 먹을 때 있는 그대로의 맛을 알아차리면 재료 맛으로 먹고 맛을 알아차리지 못하면 자기 주관적인 맛으로 먹습니다. 주관적인 맛으로 먹으면 맛이 있을 때는 감각적 욕망을 일으키고 맛이 없을 때는 성냄을 일으킵니다. 이것이 어리석음으로 먹는 것이라서 계율을 지키지 않고 먹는 것입니다. 먹을 때 욕망이 가장 많이 일어나기 때문에 수행자는 먹을 때 특별하게 알아차려야 합니다. 그래서 먹을 때는 먼저 무슨 마음으로 먹는지 알아차리고 나서 음식이 가진 고유한 맛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고 먹어야 합니다.
맛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맛은 좋아서 집착하고, 어떤 맛은 나빠서 싫어합니다. 이렇게 반응하면 자신에게 유익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좋은 맛에는 좋은 느낌이 일어나고, 싫은 맛에는 싫은 느낌이 일어납니다. 이것은 맛하고 상관없이 온전히 자신이 만듭니다. 이때의 맛은 단지 원인을 제공했을 뿐이지 결과는 자신이 만듭니다.
만약 맛으로 인해 어떠한 느낌이 일어났다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때 일어난 좋은 느낌이나 싫은 느낌이 바로 족쇄입니다. 족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반응한 느낌입니다. 이러한 느낌이 다양한 형태의 번뇌로 번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느낌일 뿐입니다. 맛이라는 단순한 느낌에 여러 가지 형태로 반응했다면 이것은 자신의 유신견으로 인한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혀라는 감각기관과 맛이라는 감각대상의 두 가지 조건은 원인과 결과입니다. 혀라는 원인이 있어 맛이라는 결과가 있습니다. 다시 혀와 맛이라는 원인이 있어 이것을 아는 마음이란 결과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맛을 느껴 아는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수행자는 여기서 새로운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합니다. 혀와 맛과 아는 마음이라는 원인이 있어 이것을 깨어서 아는 알아차림이란 결과가 수행입니다.
혀로, 맛을, 타액인 침에 의해서 맛보고, 아는 마음이 생기는 과정은 네 가지 조건의 결합입니다. 여기서 하나라도 빠지면 맛을 아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때 내가 있어 맛보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에 의해 맛보는 것입니다. 다만 감각기관이 있어 맛보고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자아는 없습니다. 맛보고 아는 순간 감각기관이나 감각대상이나 아는 마음이나 일어나서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무상합니다. 이렇게 무상한 것이 괴로움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자아가 없어 무아입니다.
혀라는 감각기관을 기반으로 맛이라는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 열 가지 족쇄가 일어나기도 하고, 열 가지 족쇄를 알아차리면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족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면 족쇄가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도과를 성취하면 사라진 족쇄가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해탈의 자유입니다.
⑤ 몸과 접촉의 알아차림
“비구는 몸[身]을 알아차리고, 접촉[觸]을 알아차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난 족쇄를 알아차린다. 비구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고 할 때 수행자가 몸으로 대상을 접촉할 때는 몸이라는 감각기관과 접촉하는 감각대상이 부딪쳐서 접촉한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이때 몸이라는 감각기관과 접촉하는 감각대상이 부딪친 것을 다시 아는 마음이 받아들여서 압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알아차림이 있으면 번뇌가 침투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싫은 접촉이라고 화를 내거나 좋은 접촉이라고 감각적 욕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접촉은 단지 접촉일 뿐입니다. 접촉은 일어날 만해서 일어납니다.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접촉을 자신의 입장에서만 보면 일어날 만한 당위성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고통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접촉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접촉은 기분이 좋고, 어떤 접촉은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은 접촉은 좋은 느낌이 일어나서 집착하고, 기분이 나쁜 접촉은 싫은 느낌이 일어나 화를 냅니다. 이것은 접촉하고 상관없이 온전히 자신이 만듭니다. 이때의 접촉은 단지 원인을 제공했을 뿐이고 이러한 결과는 자신이 만듭니다.
만약 접촉으로 인해 어떠한 느낌이 일어났다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때 일어난 좋은 느낌이나 싫은 느낌이 바로 족쇄입니다. 족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반응한 느낌입니다. 이러한 느낌이 다양한 형태의 번뇌로 번집니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느낌일 뿐입니다. 접촉이라는 단순한 느낌에 여러 가지 형태로 반응했다면 이것은 자신의 유신견으로 인한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몸이라는 감각기관과 접촉하는 감각대상의 두 가지 조건은 원인과 결과입니다. 몸이라는 원인이 있어서 접촉하는 결과가 있습니다. 다시 몸과 접촉이라는 원인이 있어서 이것을 아는 마음이란 결과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접촉을 해서 아는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수행자는 여기서 새로운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합니다. 몸과 접촉과 아는 마음이라는 원인이 있어서 이것을 깨어서 아는 알아차림이란 결과가 수행입니다.
몸과, 대상과, 접촉에 의해, 아는 마음이 생기는 과정은 네 가지 조건의 결합입니다. 여기서 하나라도 빠지면 접촉해서 아는 것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때 내가 있어 접촉한 것이 아닙니다. 조건에 의해 접촉하는 것이 성립됩니다. 다만 감각기관이 있어 접촉하고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자아는 없습니다. 접촉하고 아는 순간 감각기관이나 감각대상이나 아는 마음이나 일어나서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무상합니다. 이렇게 무상한 것이 괴로움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자아가 없어 무아입니다.
몸이라는 감각기관을 기반으로 접촉할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 열 가지 족쇄가 일어나기도 하고, 열 가지 족쇄를 알아차리면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족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면 족쇄가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도과를 성취하면 사라진 족쇄가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해탈의 자유입니다.
⑥ 마음과 마음의 대상에 대한 알아차림
“비구는 마음[意]을 알아차리고, 마음의 대상[法]을 알아차리고, 이 두 가지를 조건으로 일어나는 족쇄를 알아차린다. 비구는 전에 없던 족쇄가 어떻게 일어나는지를 안다. 일어난 족쇄가 어떻게 사라지는지를 안다. 사라진 족쇄가 어떻게 하면 앞으로 다시 일어나지 않는지를 안다”고 할 때 수행자가 생각을 할 때는 의근이라는 감각기관과 의근의 대상이라는 법이 부딪쳐서 아는 것이라고 알아야 합니다. 이때 의근이라는 감각기관과 의근의 대상이라는 법이 부딪친 것을 다시 아는 마음이 받아들여서 압니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에서 알아차림이 있으면 번뇌가 침투하지 못합니다. 그러면 싫은 마음으로 화를 내거나 좋은 마음으로 감각적 욕망에 빠지지 않습니다. 법은 단지 마음의 대상일 뿐입니다. 아는 마음은 일어날 만해서 일어납니다. 일어날 만해서 일어난 마음을 자신의 입장에서 생각하면 일어날 만한 당위성을 용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에 따른 고통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의근은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안, 이, 비, 설, 신, 의 중에서 의(意)에 속합니다. 의는 마음에 속하는 감각기관입니다. 이 의(意)가 어떤 생각을 할 때 이 생각이 의(意)가 부딪치는 대상입니다. 이때의 생각이 법(法)입니다. 마음은 몸을 알아차릴 수도 있고 마음을 대상으로 알아차릴 수도 있습니다.
마음의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 어떤 생각일 때는 기분이 좋고, 어떤 생각은 기분이 나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기분이 좋은 생각은 좋은 느낌이 일어나서 집착하고, 기분이 나쁜 생각은 싫은 느낌이 일어나 화를 냅니다. 이것은 생각하고 상관없이 온전히 자신이 만듭니다. 이때의 생각은 단지 원인을 제공했을 뿐이고 이러한 결과는 자신이 만듭니다.
만약 생각으로 인해 어떠한 느낌이 일어났다면 대상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지 못한 것입니다. 이때 일어난 좋은 생각이나 싫은 생각이 바로 족쇄입니다. 족쇄라는 것이 다른 것이 아니고 바로 반응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마음이 다양한 형태의 번뇌로 번집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단지 한 순간의 생각일 뿐입니다. 단지 생각일 뿐인 단순한 생각에 여러 가지 형태로 반응했다면 이것은 자신의 유신견으로 인한 어리석음 때문입니다.
의(意)라는 감각기관과 생각이라는 감각대상의 두 가지 조건은 원인과 결과입니다. 의(意)라는 원인이 있어서 생각이라는 결과가 있습니다. 다시 의와 생각이라는 원인이 있어서 이것을 아는 마음이란 결과가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을 아는 과정에 관한 것입니다. 수행자는 여기서 새로운 원인과 결과를 알아야 합니다. 의와 생각과 아는 마음이라는 원인이 있어서 이것을 깨어서 아는 알아차림이란 결과가 수행입니다.
의(意)와 생각과 접촉에 의해서 아는 마음이 생기는 과정은 네 가지 조건의 결합입니다. 여기서 하나라도 빠지면 아는 마음이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때 내가 있어 아는 것이 아닙니다. 조건에 의해 아는 것이 성립됩니다. 다만 의(意)라는 감각기관이 있어 생각하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에 자아는 없습니다. 아는 순간 감각기관이나 감각대상이나 아는 마음이나 모두 일어나서 사라집니다. 그러므로 무상합니다. 이렇게 무상한 것이 괴로움입니다. 이러한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는 자아가 없어 무아입니다.
의(意)라는 감각기관을 기반으로 생각이라는 감각대상과 접촉할 때 열 가지 족쇄가 일어나기도 하고, 열 가지 족쇄를 알아차리면 도과를 성취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족쇄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알면 족쇄가 사라지게 하는 방법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하여 도과를 성취하면 사라진 족쇄가 다시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것이 해탈의 자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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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방일하지 않고 열심히 노력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