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가 되면 비가 오는 날 굳이 외출할 절박성을 느끼지 못한다. 비가 내려 집에
갇혀 있다가 지난 목요일 오후 잠시 그친 틈을 타 도동서원을 다녀왔다. 내 페이스북 유일한 친구인 사월선생님이
며칠 전 도동서원 사진을 올려 오랜만에 가고 싶어졌다. 그리고 오늘 합천 가야면에 있는 소학당에 다녀왔다.
도동서원은 한훤당 김굉필을 모신 서원인데 그 이름이 참 크고 무겁다. 성리학은
주자학, 정주학, 이학, 도학
등으로 불리는데 ‘도학’은 실천성을 중시한 이름이다. 그 도학이 동쪽으로 왔다고 했으니 김굉필은 조선 도학의 시조임을 국가로부터 공인받은 셈이다.
김굉필은 공자의 사당인 문묘에 처음 배향된 ‘동방5현’의 가장 앞자리 인물로 인정받고 있지만 사실 김굉필에 관한 자료는
거의 남아있지 않다. 이는 그의 저술이 실제로 거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그가 문묘에 배향될 때 ‘실제로 한 것이 뚜렷하게 없다’고 비판 받기도 하였지만 그가 소학을 중심으로 실천적 삶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특히 조광조가 그의 제자였다는
점이 작용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김굉필의 호 '한훤당'은 그가 결혼 초기 처가에서 공부하던 집의 당호에서 유래했다. 사진은
합천 가야면 매안리에 있는 소학당(小學堂)이다. 조선 성종 3년(1472) 김굉필(1454∼1504)이 어린 시절 독서와 수양에 힘쓰던 ‘한훤당’이 있던 곳이다.
한훤당 건물이 화재로 없어진 것을, 중종 원년(1506)에 김굉필, 정여창(1450∼1504)을 추모하기 위하여 사당과 소학당을 세웠다. 숙종 22년(1696) 또 다시 불타 없어진 것을 고쳐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김굉필은 소학을 중시하며 스스로를 ‘소학동자’라고 칭했다.
'소학'은 중국 송나라 때 주자 문인 유자징이 삼대(三代)의 소학에서 가르치던 교과내용을 복원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던 스승의
가르침을 받아 지은 책이다. 여러 경전 가운데에서 유교 규범이 될 만한 내용을 가려 뽑아 편집한 유학
기본서이다.
소학은 실천성이 강한 책인데 고려 후기부터 수용되기 시작하여 조선시기 유학자들에게 강조되었다. 소학이 강조되던 학풍은
아마도 고려 성리학이 원나라를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원나라에서 성리학 정착에 공이 있었으며 소학을 강조하던 허형의 학풍 영향이 아닌가 여겨지고
있다.
한훤당은 21세 때 함양 현감으로 있던 김종직을 찾아가서 가르침을 청하였다. 처음 김굉필은 상서(尙書)를
공부하고자 하였으나 김종직은’소학小學’을 주면서 ‘정말로 학문을 하겠다는 마음을 정했다면 마땅히 이 책부터 시작하여야 한다.’고
말하면서 소학공부를 강조하였다.
김굉필 가문은 황해도 서흥의 토착 가문이었는데, 증조부 되는 김중곤이 조선
초기 수령과 여러 관직을 거치다 처가집(현풍 곽씨)이 있던
현풍에 이주하면서 현풍인이 되었다. 서울 정릉동에서 태어난 김굉필은 19세에 합천군 야로에 살고 있는 순천 박씨 집안에 장가를 들어 처가가 있는 야로(현 가야면)에 살게 되었는데 그의 장인이 ‘한훤당寒暄堂’이라는 서재를 마련해 주었다. 그 서재 이름에 따라 호를 한훤당으로 스스로 지어 불렀다. ‘한훤’이란 만났을 때 날씨가 춥고 더움을 말하며 서로 인사를 나누는 말이다. 이후
김굉필은 다시 현풍으로 돌아와 살게 된다.
위의 예에서 불 수 있듯이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혼인을 하면 남성이 처가 집에 가 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현재 우리가 전통이라고 고집하는 것이 사실은 역사가 그렇게 오래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리가 전통을 맹목적으로 지킬 것을 고집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관습이나
풍습, 예절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첫댓글 지난번 도동서원 갈 때 이로당 거쳐 소학당까지 다녀올까 생각했었는데 비도 오고 해서 발길을 돌렸습니다. 1년 조금 못 된 작년에 갔었던 모습 올려 봅니다. 언제 한번 함께 둘러볼 기회가 있으면 배울 것이 참 많을 것 같습니다.
현장에 간다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도 문자가 없이도 뭔가를 배우는 느낌이 들곤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