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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월. 술과 고기-음식유감
0. 음식유감
음식에 대해 시비걸기를 하려고 한다. 나는 글을 시작하기 전에 몇 차례 자기 검열을 했다. 내가 너무 민감한 것은 아닌지 개인의 기질과 취향의 문제를 너무 일반화해 쓰는 것은 아닌지. 하지만 폭식의 시대, 성찰이 부족한 풍토 속에서 음식에 대한 시비걸기가 누군가에게는 도움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일말의 희망으로 글을 쓰기로 했다. 마침 얼마 전 한강의 『채식주의자』가 맨부커상을 받자 음식에 대해 시비를 걸 더없이 좋은 기회라는 생각도 들었다. 왜냐하면 상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채식주의자』가 음식이 가진 근본모순 즉 살기 위해 죽음에 의존하는 희생을 필요로 하는 근원적 폭력성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우리의 고뇌는 먹는 자의 쾌락이 아니라 먹히는 자의 고통에 공감하며 시작한다.
우선 나의 특수한 상황이 있었다. 몇 년을 시골과 산에서 홀로 살다보니 자연히 사람들과 어울려 술 먹고 고기 먹을 일이 거의 없었다-사람들과 어울리면 의례히 술과 고기가 따라온다. 그렇지 않아도 술과 고기를 일부러 사먹는 일이 없던 터라 잘 됐다 싶어 나는 술은 완전히 끊고, 음식을 가리지는 않지만 고기도 특별히 먹지 않게 되었다. 물론 간혹 계란을 사먹을 때는 있다. 근 5~6년을 채식주의자로 살기도 했지만 이슬람과 티베트를 여행하며 채식과 육식을 구분하는 것보다 음식에 대한 태도와 관계 방식이 중요하다는 생각을 한 뒤로 지금은 가리지 않고 먹되 소박하게 먹는 것을 지향하고 있다.
그런데 작년과 올해 술과 고기를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먹고 있다는 인상을 자주 받으면서 술과 고기에 대해 글을 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내가 고립된 생활을 하는 탓에 지나치게 민감해진 건 아닐까 고민이 되었지만, 사람들이 지나치게 소비문화에 물들어버린 게 아닐까 더 염려 되었다. 정서의 차이가 대화를 불가능하게 하지 않기를 바란다. 아무튼 우리는 전반적으로 음식 과잉의 시대를 살며 GMO, 농약, 첨가물, 유기농 등을 건강차원에서는 따지지만 그 이상 성찰하고 있지는 않아 보였다. 내 생각엔 몸의 건강 외에도 생각해봐야 할 게 많다고 생각했다.
1. 술
술의 구속
며칠 전 하산하는데 지역분이 오라고 손짓을 했다. 그래 가보니 술과 삶은 돼지고기를 벌려놓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별로 생각이 없었지만 돼지고기를 한 점 먹었다. 이 지역에서 제일 맛있는 집이라고 하는데 별로 모르겠다. 한 시간 정도 이야기를 듣다가 내려왔다. 특히나 보수적인 정치 이야기를 하고 이것저것 부탁도 하는 통에 점점 흥미가 떨어졌다. 나중에는 식사는 식사대로 하고 무슨 좋은 시절을 만났다고 술판을 벌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작년 안내판을 세우는 인부들이 화엄벌에 온 적이 있다. 뜨거운 볕 아래 열심히 작업하며 계속 욕을 하였다. 공부를 안 해 노가다를 한다는 신세타령이었다. 그러고 내려가시면 또 술판을 벌리실 터였다. 그는 자신의 힘든 삶을 학력사회의 차별을 내면화한 탓에 공부 안 한 탓이라고 생각했다. 자기 삶의 뿌리와 사회 모순을 통찰하고 개선한다는 것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스스로가 저주하는 술과 노동의 악순환에 빠진 것 같아 안타까웠다. 이후 술독과 일독으로 검붉은 얼굴을 한 일꾼을 볼 때 아저씨의 푸념이 메아리쳤다.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굴레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술보다 얼음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지만, 그것은 나 같은 책상물림에게나 해당하는 일이다. 더구나 육체노동에 대한 편견과 차별이 심한 우리나라에서는 이들의 이데올로그들도 없지 않은가? 스스로 지적 통찰을 하고 현실을 돌파할 수단을 발명하는 것은 역시 어려운 일이다. 그에 비해 술은 얼마나 가까운가? 술이 또 다른 구속이 되고 있지 않은가?
해방감을 느끼기 위해 마시지만 술은 구속같다. 우리가 치열하게 분석하고 통찰하기보다 감정적으로 단정하고 대응하는데 익숙한 것도 과도한 음주문화와 연관 있을 것 같다. 대학시절이나 직장을 다닐 때 선배나 상사라는 이유로 음주를 강요하는 문화는 정말 질색이었다. 술 권하는 사회는 그만큼 사유력이 결핍되고 감정적이어서 인정이 넘친다고 하지만 비리와 범죄도 넘치는 사회다. 더구나 술에 대한 온갖 미사여구와 찬양, 그리고 술실수에 대한 너그러움, 술 좀 먹어야 문학을 하고, 술 좀 먹어야 남자라는 과잉되고 과시적인 음주낭만주의는 문화 빈곤과 이중성을 허세로 감추기 위한 장치로 사용된 바 없지 않다. 하지만 무엇보다 한밤의 음주 카타르시스를 통해 소비자본주의의 체제순응 문화로 길들여지지 않았나 싶다. 술이 가져다주는 긍정적 기능을 아무리 이야기해도 술은 기본적으로 마취와 도취 기능을 한다. 억압을 극복하는 기능을 하면 좋을 텐데 오히려 이성을 마비시키고 개인적으로 해소하는 데 머무를 뿐이 다.
그런데 술은 물로 만들어지는가? 아니다. 물론 물이 들어가지만 주된 재료는 곡식이다. 쌀, 보리, 옥수수, 밀 등이 술의 재료로 많이 쓰인다. 여전히 지구 어느 곳은 기아에 허덕이고 환경파괴는 날로 심해 가는데, 술은 술대로고 혁명은 혁명대로인가? 나는 술을 소비상품으로 또 어떤 점에서는 음식의 타락으로 바라본다.
술과 폭력
원래 나쁜 것은 없다. 돈이 교환수단을 너머 치부수단으로 사용되면서 사회적 지배 수단이 된 것과 마찬가지다. 인간이 발명한 도구는 모두 양면적이다. 순기능과 역기능이 공존하는데 많은 경우 역기능으로 발전시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도구의 역기능은 권력의 수단이 되어 개인을 억압하고, 도구의 순기능은 만인의 수단이 되어 만인을 자유롭게 한다. 술은 어떤가?
나는 술을 음식의 타락이라고 불렀다.
술은 쌀, 보리, 밀, 포도 등 음식이 될 만한 것들로 만든다. 그래서 그런지 밥 대신 술을 먹는다며 술 먹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밥 대신 술은 설사 그럴 수 있는 사람이 몇이 있다 해도 역시 억지 논리다.
아직도 세계 곳곳에 기아와 난민이 넘치고, 나라 안에서도 빈곤을 견디다 못해 자살하는 사람이 있는 시대에 술이라도 마셔야 살겠는가? 더구나 치맥처럼 술과 고기의 궁합이라면 조그만 생태학적 지식을 동원해 봐도 뭔가 문제가 있음을 느낄 수 있을 것이다. 못 느끼는가? 물론 문제의식을 강요할 순 없다. 하지만 제안을 해볼 참이다.
얼마 전에도 의도적으로 술판을 벌리고 섬마을의 여교사를 학부모와 마을주민들이 윤간한 사건이 벌어졌다. 맨 정신으로는 피하고 두려워하는 일을 술 마시고 술을 빙자해 저지르곤 한다. 대통령을 수행하러 간 윤창중 씨가 미국에서 성추행을 해 국가적 망신을 당한 일만 해도 우리사회에 술이 어떤 방식으로 기능해왔는지 보여주는 예이다. 한국만큼 밤문화가 활성화된 곳도 없다. 정말 한국은 밤에 놀기 참 좋은 곳이다. 하지만 한국의 밤의 카니발은 뭔가 그로테스크하다. 건강하다기보다 병적인 면이 있다. 왜 우리에겐 병적인 밤의 카니발이 필요한가?
억압과 폭력 때문이다. 억압과 폭력 문화 속에서 우리는 술을 마셔도 폭탄주를 제조하고 얼차려 하듯 파도타기를 한다. 지금은 많이 나아졌겠지만 대학 신입생 환영회와 회사의 회식문화는 그대로가 억압사회의 카니발이다. 토하고 졸도할 때까지 술을 먹이고 선배라고 명령하고 기압을 주기도 한다. 남자들끼리의 술자리면 음담패설을 하고 여자들을 찾아다닌다. 대학교수와 상사가 성희롱을 일삼는 자리가 되기도 한다.
최근의 사건 때문에 술자리와 성폭력 이야기를 많이 하게 됐지만 사실 위계와 군사문화 아래 있는 한국사회에서 이런 문제는 필연적이다. 왜냐하면 술이 억압된 것을 해소하는 기능을 하기 때문이다. 억압된 폭력과 억압된 섹스. 억압과 술은 내연관계다.
나쁜 술
나는 위에서 술의 세 가지 기능을 이야기 했다. 마취, 도취, 카타르시스다. 그래서 술은 잘 사용하면 약이 되지만 잘못 사용하면 독이 된다. 인간은 이성의 존재지만 이성의 존재만은 아니다. 감정도 있고 욕망도 있다. 하지만 전두엽에서 발달한 이성의은 자기 안의 동물적 부분인 감정과 욕망을 억제하면서 사회적으로 적합한 행위를 하려고 노력한다. 때문에 개인 안에도 내적 억압이 발생한다. 물론 개인 뿐 아니라 사회적 위계에 따른 외부의 억압도 있다. 이성조차 억압을 받아 권력자의 지배를 받는 노예적 상태에 놓이기도 한다. 인간은 자기 자신에게도 주인과 노예이지만 사회적으로도 주인과 노예 관계를 강요받는다. 그리고 모든 권력은 억압과 폭력을 항상 거느린다. 하지만 프로이트의 주장처럼 억압한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억압된 것은 왜곡되고 변형되면서 의외의 형태로 분출하게 된다.
이러한 기능에 술이 사용된다.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카니발은 이성에 의해 억압된 감정과 욕망을 분출하는 사회적 의례가 되었다. 모든 문명이 사회를 유지하며 어느 정도의 억압을 필요로 했기 때문에 술과 카니발은 꽤 보편적으로 발견된다. 니체가 『비극의 탄생』에서 디오니소스 축제를 통해 이성중심의 아폴론 대신 감성과 욕망으로 충만한 디오니소스를 내세우게 된 것은 그리스사회는 물론 서구문명의 억압에 대한 전복적 사유를 진행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했다. 그때 술의 기능이 가장 잘 활용된다. 즉 이성을 마취시키고, 감정과 욕망의 도취를 이끌어 억눌린 것들이 분출하고 해소되는 카타르시스를 경험하게 하기 때문이다. 술 마시고 소위 꼬장 부리고 울부짖는 모습은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한 모습 아닌가? 이러한 술의 기능을 알기 때문에 우리는 술을 빙자해 오히려 이러한 행동을 노골적으로 하는 경향도 있다. 사회적으로도 이런 술문화가 어느 정도 허용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억압된 것이 표출될 때 이성의 기준에 맞게 세련될 수는 없다. 도취의 힘에 의해 욕망과 감정이 폭력적으로 발휘되곤 하기 때문이다. 억압사회일수록 카니발은 성폭력적 성격이 강해진다.
그런데 억압적 사회에서는 왜 술에 대해 관대할까? 왜냐하면 술이 사회 구조적 폭력을 개인화해서 해소하는데 기여하기 때문이다. 카니발이 사회에 순기능적이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카니발이 그럴 수 있는 이유는 밤의 일탈문화를 공인받는 대신 낮의 억압을 허용할 수 있는 구조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더구나 밤문화는 욕망과 감정의 소비에도 기여한다. 흔히 80년대 전두환 정권 시절의 3S(Sex, Screen, Sports) 정책이 군부독재를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었다고 한다. 통금이 없어지고 유흥가가 번창했지만 정권에 대한 반대는 허용되지 않았다. 국가와 자본에 유익하도록 욕망과 감정을 소비문화와 결합시키기 위한 3S 정책은 일종의 소비사회의 발전단계에 해당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성적 성찰과 비판적 토론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 문화를 떠올릴 때 술의 역기능은 자명한 것이다.
좋은 술
하지만 술의 순기능도 분명 있다. 술은 뜨거운 물이다. 앞에서 술의 세 가지 기능을 말한 것처럼 술은 기본적으로 해소의 기능을 갖고 있다. 먼저 두 가지 차원을 고려할 수 있다. 물질적 차원과 정신적 차원인데 물질적으로는 잉여의 해소고, 정신적으로는 억압의 해소다.
신석기적 원시사회를 떠올려보자. 술의 탄생 배경은 굳이 신석기로 잡을 필요는 없다. 하지만 신석기에는 이미 술이 발견되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수렵채집 단계에도 생활에 필요한 용기(그릇과 주머니)를 제작하였을 테고 일단 용기가 제작될 수 있다면 술의 탄생도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과일과 곡물, 우유 등 어느 것이든 시간이 지나면 부패하는 과정에서 당이 분해되어 식초가 생성 되고 이미 약간의 알코올을 함유하기 때문이다. 포도 등의 과일을 먹다보면 좀 상했지만 아까워 그냥 먹는 경우가 있다. 그런 것처럼 냉장고가 없는 원시사회에서 과잉으로 획득된 산물이 부패하고 거기서 식초를 얻고 그 맛의 매력에 끌리게 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래 나중에는 술이나 식초, 그리고 각종 발효식품처럼 의도적으로 만들어 즐기게 되는 것이다. 나는 아직도 홍어회를 잘 못 먹지만 홍탁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홍어회의 독특한 풍미에 매력을 느끼는 것을 보면 우리 몸은 본능적으로 신맛을 내는 미생물과 성분을 요구하는 면이 있음에 틀림없다. 아무튼 술의 제조와 기능을 발견한 뒤로는 잉여물을 아예 술로 만들어 사용하는 일이 발생했다. 하지만 잉여가 많지 않은 사회에서는 술을 일상에서 소비할 정도로 만들어 마시지 않았을 것이다. 술이 일상적으로 만들어 사용되는 것은 제의의 발달 외에 계급이 분화되어 지배와 착취과계가 사회적으로 자리를 잡아 잉여를 지배자가 독점하면서일 것이다.
즉 물질적 잉여의 해소는 다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는데, 첫째 원시사회에서 잉여물을 해소해 평등사회를 유지하기 위해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것은 카니발과 같은 의례를 통해 정기적으로 잉여물 탕진의 방식으로 행해질 수 있다. 둘째 위계사회가 정착함에 따라 잉여 산물을 독점한 계급이 잉여물을 쾌락적으로 소비하는 수단으로 활용되는 방식이다. 같은 잉여물의 해소지만 앞의 것이 평등에 기여한다면 뒤의 것은 불평등에 기여하게 된다.
그 다음 정신적 해소는 억압에 대한 디오니소스적 해소에서 이미 말했다. 특히 카니발은 개인은 물론 사회를 새로운 차원에서 통합하고 혁신하는 기회가 되었을 것이다. 물질적 잉여를 해소하고 정신적 억압을 해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술은 마취와 도취 기능 또한 있는 까닭에 우리가 원하는 카타르시스로만 귀결되지 않는다. 습관화에 따른 중독과 과잉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술도 중도에 맞는 주도를 요구받게 된다. 술이 가진 힘이란 조절과 발휘일 것이다. 일상의 긴장 속에 갇히고 억압당한 감정과 욕망을 술이 가진 불의 힘으로 북돋워주고, 지나치게 과열된 이성과 권위는 물의 힘으로 식혀주는 것이다. 하지만 조절력을 유지할 때의 이야기다. 적당한 술은 약주가 되고 개인과 사회의 건강에 이바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왕도는 없다.
때문에 각 문화의 종교는 술을 금하거나 혹은 절제를 강조했다. 힌두, 이슬람, 불교는 술을 금하고,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는 절제를 강조했다. 그것은 아무래도 술의 부작용과 한계에서 비롯된 금계일 것이다.
우리 사회가 평등한 공동체가 아니라면 술에 대해서는 비판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우리가 소비하는 술이 물질의 잉여와 정신의 억압에 기여하고 있지만 그것을 참된 방법으로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빈곤과 착취가 강화되고 억압을 심화하는데 기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술이 가진 사회문화적 원인과 과정을 망각한 채 술이라는 결과에 취하면 끝내 소비문화의 중독에서 벗어날 수 없다. 과연 이 시대에 좋은 술을 노래할 수 있을까?
2. 고기
닥치고 닭
몇 해 먹방 대세다. 요즘엔 중국인들에게까지 치맥과 삼계탕이 유행해 음식도 한류라고 좋아들 한다. 하지만 치맥과 삼계탕에 사용되는 닭을 생각해보자. 닭이 어떻게 자라는가? 가로세로 30㎝ 케이지 안에서 성장 촉진제와 호르몬이 첨가된 사료를 먹고 급성장을 강요당한다. 불과 한 달을 살고 치킨과 삼계탕이 되는 닭의 고통을 생각해봤는가? 그 닭을 각종 소스를 발라 튀기거나 삶아 먹는다. 더구나 한류라며 닭 소비를 더욱 부추기고 있다. 그런데 다리만 팔기도 하고, 앞가슴살만 먹기도 하고, 뼈는 다 말라 살코기만 먹기도 한다. 모가지며 발이며 간이며 내장이며 껍데기며 모래주머니, 똥집 따위는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 부위별로 취미 따라 닭을 과자처럼 소비한다. 죄책감 없이. 이게 정상일까? 고양이와 개는 안달을 하며 귀여워하고 닭은 맥주와 함께 취향에 따라 부위별로 심심풀이 과자처럼 먹어 마땅한가? 분업사회니 먹는 것도 분업해서 먹고 싶은 것만 먹고 보기 싫고 먹기 싫은 것은 상관없는가? 그런데 닭은 생명이 아닌가? 닭도 고통 받고 비명을 지를 줄 안다. 뭔가 비도덕적이고 잘못된 느낌이 들지 않는가? 닭을 이렇게 소비하며 전혀 그런 생각이 안 든다면 우리는 이미 순수한 소비자로 증류된 존재들이다. 아무리 착한 맛집을 드나들고, 유기농산물로 건강식을 차려도 대상의 원인과 과정이 생략된 음식을 도덕적이라고 부를 순 없다. 어차피 우리가 거두절미 필요한 부분한 얌체처럼 쏙쏙 빼먹는다면 GMO든 유기농이든 상품소비자로서 오십 보 백 보의 차이밖에 없다. 근본적으로는 우리의 존재 여건은 부조리하고 비도덕이다. 이런 모순에 대한 각성 없이 어찌 도덕적 사회로 변한 수 있겠는가?
하지만 우리가 소비자본주의로 진입하기 전 세대의 닭 잡아먹는 풍경을 기억해보자. 나만해도 방학 때 시골에 내려가면 할아버지가 닭을 잡으셨다. 요동치는 닭의 목을 비틀어 잡고 뜨거운 물에 넣어 털을 뽑고 배를 가르고 내장을 정리하시며 생간을 소금에 찍어 소주와 함께 드시던 모습이나 미끌미끌한 내장을 갈라 비벼 빨던 장면은 아직도 눈에 선하다. 그 닭으로 닭도리탕을 하면 똥집이나 내장, 모가지, 껍데기, 발가락까지 다 들어 있었다. 그걸 형이랑 할아버지 할머니랑 삼촌이랑 다 같이 먹었다. 마당에서 뛰놀던 닭이 우리 땜에 사라지는 것은 애석한 일이지만 한 마리의 닭이 마당에서 상까지 오는 과정을 눈으로 보는 것은 여간 신기한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풍경과 지금 닭공장에서 나온 부위별 닭요리 제품을 비교하면 질적으로 엄청난 차이를 느낀다. 적어도 나는 내가 먹는 닭이 암탉인지 수탉인지 어떻게 자랐는지 정도는 알고 있지 닥치고 닭은 아니었다. 소 한 마리를 잡아도 돼지 한 마리를 잡아도 털 외에 버리는 것이 거의 없었다. 소화 안 되는 것 빼고 모두 먹었다. 그 시절 가축은 재산이었고 고기는 일 년에 몇 번 손님이 오거나 제삿날 구경하는 귀한 것이기도 했지만 응당 그것이 음식에 대한 예의라고 믿었다.
하지만 나는 농경사회를 이상화하고 싶지는 않다. 농경사회가 음식의 과정과 관계를 고스란히 유지하고 있었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이야기했다.
도축의례와 식사기도
티베트를 여행하며 야크나 양을 도축하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수미산 밑 마을에서는 야크 잡는 모습을 보고, 국경의 한 마을에서는 정기적으로 양을 잡는 모습을 보았다. 모두 마을의 식량으로 필요하기 때문에 하는 정기 도축이었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항상 아침 일찍 잡는데 특히 소를 잡은 뒤 소머리는 천끈에 묶어 흐르는 물 위에 매달아놓았다. 우리의 경우 소의 골이며 혀까지 모두 먹지만 티베트는 소의 머리를 존경과 감사의 예로 업을 씻고 천도하는 예에 사용하고 먹지 않았다. 이슬람의 경우도 우리나라에서 최근 논란이 되었던 할랄음식처럼 음식에 대한 규정이 있어 도축을 일정한 의례를 통해 봉행했다. 티벳불교든 이슬람이든 동물을 잡기는 하지만 신성한 의례를 통해 부정을 막고 희생된 동물에 감사하는 의례를 지니고 있었다. 불행하게도 우리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백정의 문화에 대를 해 아는 바가 없지만 우리에게도 나름의 도축의례가 있었을 것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은 이렇게 희생이 전제된다. 때문에 각 종교는 음식에 대한 희생의례 내지 식사의례를 가지고 있다. 우리가 아는 추수감사제나 추석 등도 단지 풍요한 결실에 대한 감사만이 아니라 희생에 대한 감사 의례 의미가 담겨 있다. 동물이나 식물이나 우리를 위해 희생되기 때문이다. 기독교도 식사 전 주기도문을 외우고, 불교도 오관게를 외운다. 우리는 최소한 음식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에 음식 남기는 것을 죄로 알았다. 모두 희생에 뒤이은 죄책감과 감사의 마음이 담겨 있다. 우리와 같은 농경문화도 그렇지만 유목문화에 희생의식이 더 풍부하고 생생하게 남아 있는 이유는 아무래도 동물을 자주 도축해야 하기 때문일 것이다.
곰토템
희생의례 전통은 꽤 보편적인데 수렵채집 시절부터 전해온 것이다. 특히 사냥에서 발생하는 살생의 죄책감이 중요하다. 나는 인간이 살생을 할 때 일말의 거리낌과 죄책감을 가진다고 믿는다. 그런데 죄책감은 본능이라기보다 사회적으로 습득된 감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만약에 살생의 죄책감이 본능이라면 적응이 어렵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간은 공동체적 동물로 공감과 상상 능력이 뛰어나다. 공감은 무력한 존재로 태어나 공동체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존재로서 공동체의 유지와 결속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요소이다. 상상은 특히 대뇌피질이 발달하고 언어를 통한 상호작용을 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는데 이를 통해 세상과 인간을 적극적으로 통합시킨다. 살생의 고통은 공감 능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고, 희생 의례의 발명은 상상 능력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이것에 대한 확실한 증거는 우리가 속한 동북아 민족의 곰토템에서 찾을 수 있다. 부여족 계통은 곰 토템을 가지고 있다. 고구려, 백제가 모두 그렇다. 공주의 곰나루 설화 같은 경우는 곰과 결혼한 남자의 이야기를 전하고 있다. 단군신화에 등장하는 곰 어머니도 전형적인 곰 토템기원 신화이다. 하지만 그 원형을 찾기 위해서는 시베리아, 축치, 아무르, 우수리, 홋카이도의 소수민족들이 간직한 샤머니즘과 곰토템 신화와 의례를 참고할 필요가 있다. 아무르와 우수리에는 부리야트, 예벤키, 오로촌, 나나이족 등이 살고, 일본에는 아이누족이 산다. 부여족은 아마 부리야트의 후예일 것이다.
이들의 곰의례는 나카자와 신이치의 『곰에서 왕으로』에 잘 나타나 있다. 신이치가 전하는 전설에는 곰과 인간이 형제가 된 유래가 나타나고, 곰이 인간을 먹여 살리기 위해 스스로 희생이 되는 과정이 담겨 있다. 이를 통해 신이치는 나중에 ‘대칭성 인류학’을 주장하는데, 즉 자연과 인간의 균형을 맞추어 공존하려는 의식이 인류사에 면면이 흐르는데 그 원형을 곰 토템과 희생의식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곰 토템 즉 곰의 희생의식을 통해 곰의 후손이 됨으로써 우리는 곰을 잡아먹지만 곰을 대신해서 살아야하는 일종의 성스런 계약을 맺게 된다. 때문에 인간은 희생이 되는 곰을 존경하고 감사하고 성스러운 관계를 유지해야 할 의무가 있다. 결국 희생의례를 통해 우리는 공감의 고통을 상상으로 치유하게 되었는데 그 장치가 다양한 토템과 희생의례이다. 곰의 신성에서 유래된 말이, 검, 금, 개마, 가마, 고마이다. 우리가 윤회와 영생의 사고를 하게 된 이유도 근원적으로는 살생의 고통에서 비롯되었고, 희생의례와 관계가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이 세계는 너무나 부조리하고 고통스런 세계가 되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 음식 이야기를 하다가 사냥과 곰토템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곰토템 의식을 가진 사람이 곰을 어떤 마음으로 먹느냐는 자명하다. 내가 곰을 먹는 것은 곰을 내 몸 안에 모시고 내가 곰 대신 사는 것이다. 간디는 ‘먹는 것이 곧 나다’ 라고 말했지만 실제로 원시적 사유에서 나는 먹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식인풍속도 이해될 것이다. 식인은 두 가지의 경우가 있다. 죽은 조상의 살점을 먹는 식인과 싸움에서 죽인 전사를 먹는 식인이다. 하지만 이들은 고기를 즐기고 배부르기 위해 사람을 잡아먹는 것이 아니다. 즉 자기가 먹은 조상과 전사를 내 몸에 모시고 함께 살기 위해서 먹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억울함을 푸는 방식이고 나의 죄책감을 해소하는 방법이다. 나는 조상의 뜻과 죽은 전사의 용기를 계승하여 그들과 함께 살게 된다. 그들이 야만적이라고 생각하는가? 그들은 음식을 통해 타자들과 성스러운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거기엔 일종의 승화와 깊은 유대가 자리하고 있다.
‘닥치고 닭’에서 시작한 음식 이야기가 농경사회와 유목사회 그리고 원시사회로 깊어졌다. 그리고 우리는 희생음식 먹기로 돌아왔다. 희생된 음식은 맛으로 먹는 것이 아니다. 상품인 음식은 맛과 영양으로 먹지만 희생음식은 대상의 삶과 과정을 내가 잇는 또 다른 과정이다. 그래서 버리지 않고 모두 먹는 것이 기본이었다. 우리가 잃어버리고 잊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알겠는가?
3. 먹는다는 것
먹는다는 것은 관계 맺는다는 것이다. 먹는다는 것은 먹거리의 희생을 전제로 한다. 산다는 것은 희생에 의해 산다는 것이다. 때문에 응당 희생에 대한 예의를 지킬 필요가 있다. 우리가 먹방에 환호하고 맛집을 찾아다니며 맛을 추구하는 것은 희생하는 대상의 원인과 과정을 보지 않고 음식을 결과와 상품으로 주목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황순원의 소설 「목넘이 마을의 개」에서 개를 뚜드려 패 잡아 먹는 사람들보다 나은 게 무엇일까? 누가 누구를 욕하겠는가? 보신탕을 욕하는 서양인들의 시각이 얼마나 편협하고 몽매한 것인가. 내가 보신탕을 옹호하고자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우리는 야만과 문화를 정반대로 생각하고 있다. ‘먹는 것이 나다’라고 믿고 감사와 책임을 잊지 않고 살려했던 사람들과 맛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삶이 어찌 같겠는가?
나는 우리가 너무나 소비에 중점을 두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러다보니 소비자본주의사회의 분업시스템과 상품문화의 다양성에 포섭되어 있기 쉽다. 나는 100% 자급자족을 하며 원인과 과정과 관계를 회복하라고 말하지 않겠다. 그렇게는 나도 못한다. 더구나 도시에 살면 음식의 거의 100%를 외부에 의존하게 된다. 도덕이고 비도덕이고 따질 계제가 아니다. 시골에 살아도 완전 자급자족은 힘들다. 때문에 70~80%의 자급이면 훌륭하다. 하지만 도시와 농촌을 떠나서 중요한 것은 끈을 놓지 않는 일이다. 빈 상자에 화분을 만들어 상추 한 포기, 고추 한 포기라도 심고, 1%이 자급을 하더라도 음식으로 희생되기 전 상추가 싹을 내고 자라는 과정을 지켜보기 바란다. 우리에게는 끊어진 관계와 과정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먹는다는 것은 관계를 맺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관계없는 일방적인 먹음은 착취이고 파괴다. 만약 우리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을 함께 하고 먹는다면 우리는 맛이 아니라 영혼으로 상추를 살게 되리라. 음식은 영양만이 아니다. 그것은 살았던 것들의 혼이고 삶이다. 때문에 맛으로 자꾸 혼과 삶을 가리는 문화를 극복하려고 노력해야 한다. 그래서 1%라도 내가 직접 먹을 것을 생산하기를 바란다. 당신이 화분에 당근이나 감자를 심어본다면 당신은 이미 삶을 다르게 사는 요령을 배우고 있는 것이다. 먹거리와의 올바른 관계를 회복하면서 우리는 희생의 진정한 의미도 알게 된다.
모든 삶은 끝나지 않는다. 희생에 의해 또 다른 삶으로 지속되고 윤회한다. 삶이 단지 죽음으로 이어진다고 말하지 말라. 희생이야말로 삶을 지탱하는 발판이다. 헛된 희생을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제대로 살자. 그리고 또한 희생되는 존재들에게도 제대로 살 권리가 있음을 명심하자.
물론 술과 고기도 먹을 수 있다. 하지만 참된 의미에서 제대로 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 공장식으로 생산된 치맥과 삼계탕의 범죄적 음식문화를 상상해 보라.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면 멈출 줄도 알아야 한다. 빈곤이 아니다. 우리는 인류의 본모습인 소박으로 돌아가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