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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다운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
비노바 바브(Vinoba Bhave)
간디의 정신을 이어받은 인도의 비폭력주의 사회운동가이자 현인. ‘토지공여운동’을 시작하여, 가난한 사람들에게 무상으로 땅을 나눠주도록 지주들을 설득하기 위해 인도 전역을 몇십 년 동안 돌아다녔고, 그리하여 수백만 에이커(1에이커는 약1224평) 땅이 실제로 땅없는 농민들의 손에 들어갔다. 교육에 관한 이 글은 ≪Resurgence ≫1974년 1-2월호에 실린 연설문으로 ≪녹색평론≫25호에 소개된 것이다.
샘물처럼 햇빛처럼
공식적인 교육의 중요성은 이치에 맞지 않게 지나치게 강조되어왔다. 그리하여 우리의 교육방식은 우스꽝스러울 만큼 자연스럽지 못하고 해독을 끼치는 것이 되었다. 한 어린이가 재빠른 암기력을 가졌다고 보이면 그 아이는 지나치게 학습을 강요당하고 만다. 부모와 교사들은 그 아이의 머릿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들어가 박힐 수 있는지 궁금하게 생각한다. 그리고 만약 느린 아이라면 흔히 일부러 무시된다. 그래서 영리한 아이들은 어떻게 해서든 대학에 갈 때까지 잘 꾸려가지만, 대학에 들어가서는 또, 많은 숫자가 뒤처지고 만다. 설령 대학에서 낙오되지 않는다 해도 대개 나머지 인생에서 아무런 가치있는 것도 이루지 못한다. 그들의 미숙한 정신이 너무나 무거운 짐을 지고 있기 때문이다. 말이 힘차게 달리고 있을 때는 회초리가 필요없는 법이다. 좋은 말이라는 것을 알면 그대로 혼자 내버려두어야 하지 않는가? 회초리를 들면 무슨 일이 일어나겠는가? 말은 놀라서 뒷걸음을 치면서, 말 탄 사람과 함께 도랑으로 떨어져버릴 것이다. 이런 압력은 야만이며, 교육방법으로서는 사라져야 한다.
학생이 ‘지금 나는 배우고 있어.’라고 느끼기 시작하면 교육방식에 뭔가 잘못이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어린아이들의 신체 단련과 발달을 위해 가장 좋은 것은 놀이이다. 아이는 ‘나는 지금 내 몸을 단련하고 있어.’라고 느끼지 않는다. 아이가 놀이에 빠져 있을 때 외부세계는 존재하지 않는다. 놀고 있는 아이들은 분열되지 않는 하나의 경험 속에 녹아 있다. 편안함이나 불편함도, 배고픔이나 갈증도, 고통이나 권태로움도 느끼지 않는다. 아이들에게 놀이는 기쁨이지 의무가 아니다. 이러한 원리는 모든 학습에 적용되어야 한다. 교육은 의무라는 인위적인 개념 대신에 교육이 기쁨이라는 자연스럽고 고무적인 생각을 북돋워야 한다. 오늘날 아이들 사이에 퍼져 있는 느낌은 교육이 징벌이라는 것이다. 아이의 샘솟는 에너지가 발달하기 시작하자마자, 독립성에 대한 경향이 보이기 시작하자마자, 부모들은 이제 아이들을 학교에 가두어야 할 때라고 결정한다. 학교의 의미는, 그러니까, 아이들을 가둬 놓는 곳이다! 이러한 일을 하는 교사들은 결국 학교라는 감옥의 형리들이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는 직업적인 태도에서 교사는 자유로워야 한다. ‘스승(guru)'이 한결같은 마음을 지닌 자연스런 교사가 아니라면 학생들은 자연스럽게 배울 수가 없다. ’우리는 지금 프뢰벨 또는 페스탈로치, 또는 몬테소리 방법으로 가르치고 있어.‘라고 생각할 때마다 공허한 말장난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그것은 무의미한 포장일 뿐이다. 유령이지,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교육은 대수학 같은 것이 아니다. 교육은 공식을 적용하고, 준비된 해답을 얻는 문제가 아니다. 교육은 안에서 솟아올라 바깥세계로 자연스럽게 흘러넘치는 샘물 같은 것이다. 이러한 자연스러운 교육에 뭔가 결함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큰 문제가 아니다.
우리가 결코 그냥 넘어가서는 안될 것은 하나의 고정된 방법을 쫓는 노예들이 질서정연하게 무지를 분배하는 일이다. 이것은 무지의 제도화일 뿐이다. 교육철학자였던 허버트 스펜서는 “고매한 인격을 만드는데 교육은 아무런 힘을 갖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교육방법이란 것에 무슨 가치를 부여할 수 있겠는가? 셰익스피어는 드라마 이론이라는 것을 조금이라도 연구했던가? 수사학의 규칙을 암기함으로써 위대한 시인이 된 사람이 있는가? ‘체계’와 ‘방법’이라고 하는 말들 자체에는 아무런 큰 의미와 가치가 없는 것이다. 뭔가 있을 듯한 환상을 심어줄 뿐이다.
가장 깊은 통찰력을 지니고 있었던 선지자들은 교육이 어떻게 이루어지는지 자신도 모른다는 것을 아주 분명히 말했다. ≪케나 우파니샤드≫에서 말하고 있듯이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이 안다.’ 방법이니 수업계획서니 시간표니 하는 것들, 이러한 것은 전부 의미없는 것들이다. 자기기만일 뿐이다. 교육은 오직 살아 있는 행동으로만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다. 생명활동과 아무 관련이 없는 어떤 활동이 교육의 이름으로 주어질 때 이러한 ‘교육’은, 흔히 몸속으로 들어오는 이물질이 나쁜 영향을 끼치듯이, 사람의 마음에 건강치 못한 해독을 끼친다. 스스로 갈망을 느끼는 것에 대한 탐구가 아닐 때, 아무런 의욕도 느끼지 않는 사람에게 억지로 학습이 강요될 때, 누구도 그런 것을 소화해내지 못한다. 머릿속에 책을 잔뜩 채워넣어 지혜가 얻어지는 것이라면 도서관 선반이야말로 참말 지혜로울 것이다. 그러나 억지로 쑤셔넣은 지식은 소화되지 않는다. 그렇게 되면 우리에게는 정신의 설사병이 일어나고, 우리의 지적 능력은 마비되고 죽어버린다. 그러므로 우리는 교육이란 ‘아무런 방법 없이 스스로 질서 있는 전체를 이루며, 어떠한 스승도 베풀어줄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주어지는 것’이라고 정의하기로 하자.
참다운 교사는 가르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이의 옆에서 우리는 배운다. 태양은 아무에게도 빛을 ‘주지’ 않지만 모두가 가장 자연스럽고 쉽게 그 빛을 받는다.
베다의 베다
삶에서 동떨어져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가르칠 힘을 잃는다. 교육을 삶과 삶의 문제들에서 떼놓으려는 기조는 마치 죽음에 대한 생각을 자꾸만 미루는 것과 같다. 실제로 우리는 순간마다 죽어가고 있으며, 죽의 날이란 단지 그 마지막 단계일 뿐이다. 열린 눈으로 죽음이라는 현실을 바로 봄으로써 ‘죽음 전에 죽는’ 사람이 진정으로 자유로운 사람이다. 죽음이 다가오는 것을 일상 체험의 하나로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라면 죽음을 부드럽게 맞이할 것이다. 그러한 체험에서 도피하고, 삶에서 쫓아버리려고 하는 사람은 죽음을 악몽으로 맞게 될 것이다. 소경은 머리를 부딪치고 나서야 길 가운데 기둥이 있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미리 기둥을 볼 수 있는 사람은 충돌을 피한다.
가르치는 일은 실제 생활 속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아이들을 밭에서 일하게 하고, 어떤 문제가 생기면 풀어가는데 필요한 지식-우주론, 물리학, 또는 다른 과학 지식을 주어야 한다. 아이들에게 밥을 짓게 하고, 필요할 때 과학을 가르쳐야 안다. 간단히 말해, 아이들이 실제로 살게 해야 하는 것이다. 아이들에게는 누군가가 옆에 있어야 한다. 그러나 그 누군가는 교사라고 하는 특별한 범주에 속해 있어서는 안되며, 실제 세계에서 보통생활을 하고 있는 어떤 사람이어야 한다. 아이들을 지도하기로 되어 있는 사람은 아이들의 생활을 지성적으로 이끌어야 하며, 기회 있을 때마다 삶과 일의 과정을 아이들에게 설명해줄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교육은 학생들의 머리에 정보를 채워주는 일이 아니라 지식에 대한 갈망을 불러일으켜 주는 일이다. 교사와 학생은 서로 접촉하면서 둘 다 같이 배운다. 양쪽이 모두 학생인 것이다. 진정한 교육은 체험하고, 실험하고, 소화시키는 일이다. 측정하고 기록할 수 있는 것은 교육이 아니다. 교육은 나눠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우파니샤드≫에는 무지에 대한 찬양이 지식에 대한 찬양과 나란히 나와 있다. 우리에게는 지식뿐만 아니라 무지도 필요하다. 지식만으로는, 또는 무지만으로는 우리는 어둠속으로 끌려간다. 그러나 적절한 지식과 적절한 무지의 결함은 영혼의 감로수를 준다. 세상은 너무나 많은 지식으로 꽉 차 있어서 우리가 그 모든 지식을 우리 머릿속으로 채워넣으려고 한다면 미쳐버릴 것이다. 망각능력은 기억능력만큼이나 우리에게 필요하다.
교육에서 자립의 중요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동의할 것이다. 자립은 매우 깊은 뜻을 가지고 있다. 육체노동을 해서 경제적으로 자립할 수 있어야 한다. 사람은 누구든지 자기 손을 쓰는 법을 배워야 한다. 모든 사람이 어떤 일이든 손일을 한다면 그 혜택은 엄청날 것이다. 계급구분이 없어지고, 생산이 늘어나며, 번영하고 건강해질 것이다. 적어도 이러한 뜻에서 자립성이 우리 교육 프로그램의 일부를 이루어야 할 것이다.
교육은 학생들이 지적으로 자립하고, 스스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이것이 학습의 주된 목표가 된다면 전체 학습과정은 탈바꿈할 것이다. 현재의 학교 교육과정은 수많은 언어와 과목을 포함하고 있으며, 학생들은 이 모든 과목에서 여러 해에 걸쳐 교사의 도움이 필요하다고 느낀다. 그러나 혼자 힘으로 나아가서 지식을 얻을 수 있는 힘을 발휘하도록 학생들을 가르쳐야 한다. 세상에는 무한한 지식이 있고, 사람들은 저마다 자기 일을 하기 위해 어떤 지식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삶에 필요한 이러한 지식이 학교에서 얻어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삶에 필요한 지식은 오직 삶 속에서만 얻을 수 있다. 학교가 할 일은 삶에서 배울 수 있는 능력을 학생들에게 일깨우는 것이다.
대부분의 부모는 자기 아이들이 봉급받는 일자리를 얻고, 편안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학교 과정을 마치기를 바란다. 이것은 교육을 보는 그릇된 방식이다. 배움은 그 자체로서 가치있는 일이다. 배움의 목적은 자유이다. 자유는 타인들로부터의 독립뿐만 아니라 자기 기분과 충동으로부터의 독립도 뜻한다. 감각의 노예가 되어, 충동을 억제하지 못하는 사람은 자유롭지도 않고 자기충족적인 인간도 아니다.
‘우리 아이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것인가’라는 질문이 ≪우파니샤드≫에 제기되어 있다. 그 대답은 ‘베다의 베다’를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베다≫를 가르치면서 ≪바이블≫은 생략한다. 우리는 ≪바이블≫을 가르치면서 ≪코란≫을 생략한다. 우리는 ≪코란≫을 가르치면서 ≪다마파다≫를 생략한다. 우리는 ≪다마파다≫를 가르치면서 과학은 생략한다. 우리는 과학을 가르치면서 정치경제학을 생략한다. 어디에서 멈추어야 하는가? 그럴 것이 아니라, 우리가 아이들에게 주어야 할 것은 ‘베다의 베다’, 다시 말해 ≪베다≫를 공부할 수 있는 능력이며, 나머지 모든 것은 스스로에게 맡겨야 한다. 지식에 대한 열쇠를 아이들 손에 쥐어주어야 하는 것이다.
교육의 목적은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이어야 한다. ≪우파니샤드≫에서, 스승이 제자들을 가르칠 때 스승은 이렇게 말한다. “너희가 나한테서 무엇이든 좋은 것을 발견하면 따르고, 무엇이라도 좋은 것이 아니면 따르지 말라.” 다시 말해, 스승은 학생들에게 자유를 주고, 옳고 그름을 결정할 때 스스로 판단내릴 것을 일러주고 있다. 스승이 말하는 것은 모두 옳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물론 스승은 진리에 따라 살고자 노력한다. 그렇지 않으면 스승이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자신의 모든 행동이 진리와 조화를 이룰 것이라고 주장할 수 없다. 그래서 스승은 제자들이 주의를 게을리해서는 안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두려움 없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두려워해서도 안되지만, 다른 존재에게 두려움을 느끼게 해서도 안된다는 것을 뜻한다. 호랑이를 두려움이 없는 존재라고 말할 수는 없다. 호랑이는 다른 동물에 대한 두려움이 없을지 모르지만 총을 겁낸다. 그리고 호랑이는 다른 생물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킨다. 참다운 ‘두려움 없음’은 노예처럼 다른 누구에게 복종하는 것도 아니고, 누구를 노예로 만드는 것도 아니다.
그러한 ‘두려움 없음’을 위한 충분하고도 유일한 기초는 자기인식이다. 자기인식은 교육의 근본토대이다. 그러나 오늘날 아이들이 받는 교육은 이와 정반대다. 어떤 아이가 잘못을 저지르면 우리는 그 아이를 때린다. 그러면 아이는 두렵기 때문에 우리에게 복종하기 시작한다. 교육이 진실로 ‘두려움 없음’에 기초하지 않는다면 어떠한 사회변혁의 희망도 없다. 아이들이 자기를 때리는 사람들에게 복종하지 않도록 가르쳐야 한다. 유감스러운 것은 아버지와 어머니들도 그렇게 한다는 것이다. 자신들의 모든 말을 믿고, 자신들을 완전히 신뢰하는 아이를 부모들은 신으로부터 받았다. 신은 부모들의 손에 완전히 진실한 제자를 안겨주었다. 그런데 그 아이가 매를 맞는다. 우리는 가정에서 먼저 ‘두려움 없음’을 가르치고, 그것을 학교에서 이어가야 한다.
행동이 없는 지식
이 세상 모든 분쟁의 뿌리는 지식이 행동에서 분리되어왔다는 것이다. 행동과 분리된 지식이란 원래 없지만 이 법칙에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내가 존재한다’는 지식이다. 자신에 대한 인식은 행동과 분리되어 있다. 그 인식은 행동 너머에 있다. 그러나 나머지 모든 지식은 행동에 결부되어 있다. 행동 너머에 있다. 그러나 나머지 모든 지식은 행동에 결부되어 있다. 행동이 없으면 지식이 없고, 지식이 없으면 행동이 없다. 그 둘은 하나다. 이것은 방법의 문제가 아니라 교육의 근본 원리다. 사람들은 묻는다 - 아이들이 만약 하루에 서너 시간씩 일해야 한다면 어떻게 뭘 배울 수 있겠느냐고. 나는 이것을 별난 질문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정말 물어야 할 것은 만약 아이들이 하루에 서너 시간씩 책읽기에 매달려야 한다면 어떻게 뭘 배우겠느냐 하는 것이다. 서너 시간에 걸친 책읽기가 과연 무엇을 뜻하는지 생각해 보면 놀랄 것이다. 세 시간 동안 한 아이가 60쪽에서 70쪽을 읽을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해서 무엇을 진정으로 배우는가?
물론 아이들의 눈 근육은 운동을 좀 하게 될지 모른다. 아이가 책을 읽음으로써 지식을 얻고, 독서야말로 지식에 이르는 지름길이라고 우리는 아무 의심없이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오히려 반대로, 책을 통한 학습은 진정한 세계와 우리를 가로막는 커튼과 같은 것이다.
<양봉의 모든 것>이라는 책이 있다. 거기에는 양봉에 관한 모든 정보가 다 들어있다. 그 책을 읽고서 ‘이젠 우리도 뭘 할 수 있겠구나. 꿀벌을 좀 구해야지.’하고 생각했다. 하지만 꿀벌을 구할 수 있기까지 우리는 여러 날을 돌아다녀야 했고, 그 꿀벌들에게 신뢰를 얻기까지는 꼬박 두 달이 더 걸렸다. 모든 것이 책 속에 적혀 있었고, 책은 물론 어느정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지식에 이르는 참된 길은 실제 행동이다. 책읽기와 연구는 행동의 보조 수단이다, ‘저 사람은 안경이 없다. 어떻게 볼 수 있을까’ 하지만 보는 기관은 눈이지 안경이 아니다. 물론 시력이 약하면 안경이 도움이 될 수는 있다.
학습과 노동의 분리는 또한 사회의 부정의를 낳는다. 어떤 사람들은 연구만 하고, 다른 어떤 사람들은 힘든 노동만 한다. 그러면 사회는 둘로 쪼개지고 만다. 육체노동으로 빵을 버는 사람들이 한 사회계급을 이루고, 머리를 굴리는 사람들이 또다른 계급을 이룬다. 인도의 육체노동자는 하루에 1루피를 받고, 지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은 25루피에서 30루피를 받는다. 육체노동과 지식노동을 그토록 달리 평가함으로써 엄청난 부정의가 생기는 것이다. 이러한 사회 부정의를 뿌리뽑는 것이야말로 우리 교육의 목표가 되어야 한다.
이러한 차별이 없어진다고 하더라도 아직 충분치 않다. 우리가 자연과 좀 더 친밀한 조화 속에서 살 수 있을 때 우리의 행복은 더 커질 것이다. 우리가 자연에서 멀어질수록 우리는 더욱 큰 불만을 느낄 것이다. 되도록 적은 인구가 농사를 짓고, 되도록 많은 인구가 다른 생산 일을 하도록 해야 하겠지만, 그와 함께 전체 인구의 생활은 농업과 가까이 닿아 있어야 한다. 한 개인이 농업생활과 관계가 끊어지면 그 삶은 불완전한 삶이 될 것이다.
사람이면 누구나 땅과 닿아 있고, 흙에 뿌리박은 삶이 필요하다. 사람의 삶이란 자양분을 공급하는 흙에서 차단되면 살 수 없는 나무와 같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흙을 일구는 기회를 가져야 한다. 땅과 만나는 것은 사람의 기본 욕구가 땅과 관계가 끊어진 민족이나 문명은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활력을 잃어버리고 쇠퇴하게 된다.
‘기초교육’은 자연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는다. 기초교육이 어떻게 대도시에서 이루어질 수 있겠는가? 도시가 땅과 흙에서 멀어진 것은 큰 불행이다. 왜냐하면 사람의 삶에 그보다 더 큰 손실이 없기 때문이다. 내가 감옥에 있는 동안 사람들은 내가 스스로 즐기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어느날 교도관이 내게 말했다. “당신은 만족스러워 보이는군요. 아쉬운 것이 없나요?” “한 가지 있지요.” “그게 뭔데요?” “알아맞혀 봐요. 일주일 여유를 드리지요.”하고 내가 말했다. 일주일 동안 열심히 생각한 뒤에 교도관이 말했다. “당신이 아쉬워하는 것이 뭔지 통 모르겠어요.” 그래서 내가 말해주었다. “나는 모든 것에 다 만족하고 있지만,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볼 수 없어서 슬프답니다.”
열려 있는 대기 속으로, 창조된 자연만물 사이로 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큰 기쁨인가! 도시 사람들은 이러한 기쁨을 알 수 없다. 그래서 가엾게도 도시 사람들은 화분에다 플라스틱꽃들을 꽂고, 해돋이와 해지는 정경이 그려진 그림들을 벽에 걸어놓는다! 도시의 생활은 너무나 인위적이어서 밤에도 별을 볼 수 없다. 우리 도시들이 그 모든 인공불빛 가운데서 하늘의 별빛으로 축복을 받을 수 있겠는가? 도시인들은 우리에게 평화와 휴식과 고요한 생각을 위해 주어진 어둠, 밤의 어둠을 태워버렸다. 교육의 앞에 놓인 과제는 지금 우리 도시들을 지배하고 있는 모든 가치체계와 생활방식을 바꾸는 것이다. 자유로운 삶의 기쁨에 견줄 수 있는 기쁨은 아무것도 없다. 산스크리트 말에서 무한한 기쁨을 나타내는 말은 ‘수카’라는 낱말이다. 그런데 ‘수카’의 원래 뜻은 ‘드넓은 하늘’이다. 행복은 열린 하늘 밑에서 발견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가르치기만 하는 일이란
어떤 사람 집에 약병들이 가득 차 있으면 우리는 그 사람이 병을 앓고 있다고 추리한다. 그런데 그 사람 집이 책으로 꽉 차 있을 때 우리는 그가 지성적인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정말 옳은 생각인가? 건강의 첫째 법칙은 반드시 필요한 때만 약을 먹는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지성의 첫째 법칙은 되도록 책 속에 눈을 파묻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약병들을 병든 몸을 말해주는 신호로 본다. 우리는 세속적이든 종교적이든 모든 책들은 병든 마음을 나타내는 신호로 보아야 한다!
낡은 교육제도의 모습을 가장 역겹게 드러내는 것은 시험 제도인 것 같다. 시험을 칠 때면 우리를 감시하고, 어떤 학생도 다른 학생 답안을 베끼지 못하도록 지켜보기 위해 감독관이 지명된다. 이것은 내게 매우 서글픈 광경이다. 우리가 학생으로서 도둑 혐의를 받을 수 있다면 이미 우리는 실패한 것이다. 시험쳐야 할 무엇이 아직 남아있단 말인가?
나는 내가 치러야 했던 시험과목들에 대해 지금 아무것도 아는 것이 없지만, 시험을 치지 않았던 것들은 잘 알고 있다. 그러므로 내 경험으로 보건대 시험에 어떠한 가치도 둘 수 없다. 시험이란 뱃속을 씻어 내기 위해 사람들이 먹는 설사약과 똑같은 것이다. 우리가 시험을 보면 우리가 가진 모든 지식들이 깨끗이 씻겨 없어져버린다! 교육학자들이 만들어놓은 이 덫에 우리가 빠져야 할 아무런 이유가 없다.
만일 아이들에게 문이나 창에 대해 가르치고 싶다면 나는 아이들에게 무엇 때문에 창이 필요한지 물어볼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왜 창과 문이 필요한지 아이들이 분명하게 이해할 때, 나는 말할 것이다.
“자 그러면, 너희들 몸에 있는 창과 문들은 어떤 건지 말해보렴.” 산스크리트 말에서 눈과 귀와 입과 코는 모두 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나서 아이들에게 창을 그리고, 눈을 그리도록 한다. 그러면 그림 그리는 실습이 이루어진다. 그 뒤에 나는 아이들에게 사람들이 만들어온 여러 가지 창문들에 대해 얘기한다. 그래서 또 역사공부가 이루어진다. 이렇게 오래된 창문들이 오늘날 세계 다른 곳에도 있는가? 나는 아이들을 리플란드로 데리고 갈 것이다. 그리고는 창이나 문과 관련하여 아이들에게 리플란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을 얘기해 주는 것이다.
인도처럼 중국도 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 동안 땅을 집중 경작해온 나라다. 그러한 중국이 어떻게 그처럼 높은 생산력을 유지하고 있는가? 비옥한 땅을 지키려고 중국사람들은 무엇을 하는가? 이런 문제와 관련지어 나는 아이들에게 퇴비 얘기를 들려줄 것이다. 우리는 중국에서 특히 인분을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인분은 중국에서 널리 이용되고 있고, 덕분에 중국의 흙은 오랜 세월 경적되었지만 여전히 높은 생산성을 유지하고 있다.
어떤 미국사람이 중국 농업을 이야기한 ≪마흔 세기에 걸친 농부들≫이라는 책을 썼는데 거기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 미국사람들은 얼마나 낭비가 심한가! 우리는 한 사람이 15에이커(1에이커는 약 1224평)에서 20에이커 땅을 소유하고, 기껏해야 4세기 동안 경작해왔다. 하지만 생산성을 올리려고 온갖 화학비료를 써서 흙을 망쳐놓았다. 사람의 배설물 같은 귀중한 거름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말이다.”
아주 큰 비가 내리는 날은 아이들에게 노는 날이 되어야 한다. 교사도 옷을 벗고 아이들과 함께 빗속에서 놀아야 한다. 인도에서는 비가 오는 날이 노는 날이고, 영국에서는 해가 비치는 날이 노는 날이다. 왜? 영국에는 보통 하늘에 구름이 끼어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아이들이 놀고 즐기는 동안 나는 아이들에게 영국 기후에 대해 얼마쯤 지식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지식이 자연스러운 흥미를 떠나서 주어져서는 안된다. 교사가 일방적으로 나서서 리플란드에 관해 얘기해서는 안된다. 자연스러운 기회가 생기도록 해야 한다. 아이들의 지식을 넓혀줄 자연스러운 기회를 잡는 것이 교사의 과제다.
한번은 어떤 젊은이가 사회를 위해 좋은 일을 해보고 싶다고 말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잘할 수 있을 것 같으냐고 내가 물었다.
“그냥 가르치는 일이지요. 다른 것은 제가 할 수 없어요. 저는 가르치는 일에 흥미를 느끼고, 그건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그래, 그걸 의심하는 건 아니야. 하지만 뭘 가르치지? 물레질! 실 고르는 일! 아니면 베짜는 일! 이런 걸 가르칠 수 있겠어?”
“아뇨, 전 그런 건 가르치지 못해요.”
“그러면 옷 만드는 일은? 아니면 물감들이는 일이나 목수일은?”
“아뇨, 그런 것에 대해 저는 아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 요리나 맷돌질이나 집안일은 가르칠 수 있겠지.”
“아뇨, 전 그런 일도 해본 적 없어요. 전 오직 가르치는 일만 할 수 있어요.”
“이보게, 자네는 전부 아뇨라고 하면서, 가르치는 일만 하겠다고 하는군. 그게 무슨 뜻이지? 텃밭가꾸기를 가르칠 수 있을까?”
교사를 희망하는 그 젊은이는 조금 성난 듯이 “왜 자꾸 그렇게 물으세요? 처음에 말씀드렸잖아요. 저는 다른 것은 못한다고요. 저는 문학을 가르칠 수 있어요.”
“맙소사.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 같군.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타고르나 셰익스피어처럼 책을 쓸 수 있도록 가르칠 수 있단 말이지?”
젊은이는 몹시 화가 난 모양이었다. 나는 웃었다.
“그래 좋아, 자네 뜻이 뭔지 안다네. 자네는 읽기, 쓰기, 역사와 지리를 가르칠 수 있다는 얘기지. 그래. 그런 것이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니야. 인생에서 그런 것이 필요할 때가 있지. 하지만 그런 것이 삶에서 기본은 아니란 말일세. 베짜기를 배워보고 싶지는 않은가?”
“지금 새로운 것을 배우고 싶지는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 베짜기를 배울 수 없을 겁니다. 전에 한번도 손으로 하는 일은 해본 적이 없거든요.”
“그렇다면 배우는데 시간이 좀더 걸리기는 하겠지만, 어째서 배울 수 없다는거지?”
“저는 제가 베짜기를 배울 수 있다고도 생각하지 않지만, 배울 수 있다고 해도 그건 너무 힘들고 고통스런 과정일 겁니다. 그러니 제발 제가 그런 일을 할 수 없다는 걸 이해해 주십시오.”
이 대화는 오늘날 너무나 많은 우리 ‘교사들’의 심리와 특성을 잘 이해할 수 있게 해 준다. ‘오직 가르치기만 하는 일’이란, 실생활에서 쓸모있을지도 모르는 어떤 실용기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을 뜻한다. 어떤 것이든 손으로 하는 일에는 무관심하면서 자기만족적으로 책 속에 묻혀 지내는 사람들이 바로 교사들이다.
‘오직 가르치는 일’이란 삶에서 동떨어진 시체 상태를 말한다. 교사들은 ‘오직 가르치는 일’이라는 그릇된 견해를 버리고, 노동자들과 농민들처럼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 자기가 가르치는 학생들이 이런 책임에 참여하도록 해야 하고, 그들을 둘러싼 전체 환경이 교육의 수단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다시 말해, 교육이 스스로 우러나오도록 해야 하는 것이다.
교사는 그 학교가 속한 전체 마을을 고무시키는 사람이 되어야 하고, 학교는 봉사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지역사회에 의약품이 필요하다면 학교에서 공급해주고, 거리에 청소가 필요하다면 학교가 청소를 시작해야 한다. 사람들이 분쟁 해결에 도움을 구하러 교사에게 가야 한다. 학교는 축제 계획을 짜야 한다. 이런 식으로 학교는 공동체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차 한 잔 속의 교육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정신의 독립성이다. 완전한 자유에 대한 권리를 누군가 가진다면 마땅히 학생이 가져야 한다. 신뢰가 없는 곳에 지식이 얻어질 수 없다. 마찬가지로 중요한 것은 학생이 지적 자유를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신뢰와 지성은 양립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은 잘못이다. 눈과 귀는 다른 기관이지만, 서로 충돌하지는 않는다. 신뢰와 지성의 관계도 같다. 신뢰가 없으면 무엇인가를 배우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식은 신뢰 속에서 시작된다. 그러나 지식은 독립적인 사고 속에서 완전해진다. 따라서 학생들은 사고의 자유를 방기해서는 안된다. 학생들의 동의를 강요하는 선생은 선생이 아니다.
나는 학생들의 그러한 권리가 현대세계에서 상실될 위험에 있다는 것을 경고하고 싶다. ‘규율’이라는 이름으로 학생의 마음을 한 가지 꼴 속에 억지로 집어넣으려는 기도가 이루어지고 있다. 규율이라는 이름으로 우리는 기계적 획일성을 강요하고, 이것 때문에 아이들의 정신은 훼손된다.
전세계에서 교육은 정부의 통제를 받고 있다. 이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정부는 교육에 대해 어떠한 권위를 가져서도 안된다. 교육에 관한 일은 지혜로운 사람들에게 맡겨야 한다. 그러나 지금은 교육을 정부가 장악하고 있다. 그리하여 학생들은 교육부가 처방하는 책이라면 무엇이든지 학습해야 한다. 정부가 파시스트 정부라면 학생들은 파시즘을 배워야 하고, 공산주의 정부라면 공산주의를 공부해야 한다.
자본주의 정부는 자본주의의 위대함을 선전할 것이다. 계획경제를 믿는 정부라면 학생들은 계획경제에 관해 모든 것을 배울 것이다. 인도의 전통에서 우리는 교육은 국가의 통제에서 완전히 자유로워야 한다는 원칙에 익숙해왔다. 국왕은 스승들(gurus)에게 어떠한 권위도 행사하지 못했다. 왕은 교육을 통제하는 힘을 갖지 못했다. 그리하여 산스크리트 문학은 세계 어디서도 볼 수 없을 만큼 사상의 자유를 성취했고, 힌두철학 안에 적어도 여섯 개가 넘는 서로 양립하기 어려운 철학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활력은 교육이 국가에서 독립함으로써 나온 것이다.
교사들은 지위가 너무 떨어져서 스스로 아무런 권위도 갖고 있지 않다고 느끼고 있다. 교사들은 정부가 지시하는 대로 따라야 한다. 교사들은 명령에 복종하는, 귄위의 하인들이다. 오늘날 교육을 확대하려는 시도가 있고 학교와 교사 수는 늘고 있지만, 진정한 스승의 정신은 거기에 없다. 좋은 선생은 좋은 하인을 뜻하고, 나쁜 선생은 나쁜 하인을 뜻한다. 좋든 나쁘든 하인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돈으로 살 수 있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 현금으로만 살 수 있는 지식은 무지다. 진정한 지식은 오직 사랑과 봉사로써만 얻어질 수 있다. 그리하여 지혜로운 선생이 여기서 저기로 여행하면서 어느 마을에 이르면, 사람들은 기꺼이 선생을 며칠 동안 머물도록 초대하여 공경하면서 선생이 베푸는 지식을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이것은 얼마든지 실행할 수 있는 계획이다. 강물이 스스로 마을에서 마을로 흘러 사람들에게 봉사하듯이, 소들이 숲속에서 풀을 뜯어 먹고 스스로 돌아와 아이들에게 우유를 주듯이, 지혜로운 선생들은 이곳에서 저곳으로 다닐 것이다. 우리는 이 ‘방랑하는 스승’이라는 제도를 부활시켜야 한다.
이런 방식으로 마을은 대학을 갖게 되고, 세계의 모든 지식이 온갖 마을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또한 ‘바나프라스타슈람’(세속적 책임으로부터의 자유)의 전통을 되살려내어 모든 마을에 큰 비용을 들이지 않고 늘 선생이 있도록 해야 한다. 모든 ‘바나프라스타’는 선생이어야 하며, 방랑하는 모든 ‘산야시(구도자)’는 대학이어야 한다. 학생들은 배우고자 하는 아이들과 젊은이들이다. 모든 마을에는, 배우는데 한두 시간을 보내고 나머지 시간은 일하는 데 쓰는 사람들이 있을 것ㅇ다. 태어나서 죽음에 이르기까지 이렇게 하여 완전한 교육과정이 이루어질 것이다.
이러한 교육의 목적은 전체 마을이 자기 힘으로 삶의 문제를 푸는 것이다. 그러므로 마을의 부와 자원은 개인들이 아니라 마을 자체에 속해야 한다. 그럴 때만 모든 아이들이 똑같은 교육기회를 누리도록 계획을 세울 수 있다. 우리가 아이들에게 순수하고 영양있는 음식을 나누어주지도 못한다면, 어떻게 우리가 아이들에게 균등한 교육을 베풀 수 있는가?
우리가 누구더러 지금 마시고 있는 것이 무엇이냐고 물으면 ‘차’라고 대답할지 모른다. 그 속에 설탕도 들어 있을 수 있지만 사람들은 설탕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고, 또 차와 설탕을 마신다고도 말하지 않는다. 설탕의 단맛이 차 속에 퍼져 있지만 그것을 마시면서도 설탕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교육이란 이 설탕과 같은 것이라야 한다. 교육은 은밀히 작용하는 것이다. 우리는 손과 발, 귀와 혀가 활동하는 것을 볼 수 있지만, 아무도 영혼이 무엇을 하는지 보지 못한다. 우리의 귀는 귀기울이는 것 같고, 혀는 말하는 것 같다. 그러나 어떻게 보이든지 말하는 것은 혀 혼자가 아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어떻든 듣는 것도 귀 혼자가 아니다. 말하고 듣는 것은 우리 안에 있는 영혼이다. 영혼은 보이지 않는다. 가장 좋은 교육은 이처럼 보이지 않는다. 많이 보이면 보일수록 그 교육은 그만큼 완전하지 못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