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어린 나이에 결혼을 한 나는 이듬해 첫 딸을 얻었다.
요즘 사람들 이라면 창피하게 느낄 테지만 그 당시 나에게는 효도의 한
표현이었다.
고등학교 중학교 초등학교에 다니는 동생들에 다시 아이까지 태어났으니 우리 집이
오죽 복잡해 졌으랴!
알뜰하고 살뜰한 나의 집사람은 그동안 모은 돈으로 대구 시 둔산 동 외진 곳에
집을 샀다.
방 두개에 부엌이 딸린 남들이 볼 때는 초라한 집이었지만 앞마당에서는 동생들이
뛰어놀 수 있었고 뒷마당에다는 닭과 돼지를 키울 수 있는 우리에겐 자랑스러운
집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나 뒷산에 올라 아카시아 잎을 따다 닭을 먹이니 자연 운동도 되어
님도 보고 뽕도 따는 식이었다.
병아리들을 수백 마리 씩 사다 키우자면 몇 달이 안 되어 알을 낳기 시작해 아내의
저금통장이 채워져 갔다.
상품의 가치가 없는 물알( 껍질이 없는 계란)을 낳으면 덕분에 상에 오르는 행운도
얻었다.
또한 동네에서 버리는 음식 찌꺼기를 거두어다 돼지를 먹이니 동네에 칭찬이
자자하다.
“그 황 수관 선생 안 있나? 사람이 되었구먼!”
“그러게 말이오! 새벽에 일어나 닭 먹이고 낮에는 아-들 가르치고 저녁에는 돼지
먹이고 밤에는 공부 한대이.”
그게 다 농고 다닐 때 배운 풍월 때문이었다.
때 맞춰 돼지 접붙여 새끼를 낳게 되면 아내와 나는 거의 잠을 못 잔다.
내가 어미 돼지에게서 새끼를 받으면 아내는 목욕시키며 한 마리 한 마리 받는데
언제 다음 녀석이 나올지 모르므로 돼지우리 안에 앉아 꼬박 밤을 새는 때도 간혹
있었다.
많을 때는 열두 마리까지 받아 보았는데 어미 돼지 젖꼭지가 10 개 인데 12 마리가
나오면 두 마리는 땅에 묻어 죽인다.
돼지 새끼는 냄새를 맡고 자기가 빨던 젖꼭지만을 빨기 때문에 결국 네 마리가
영양실조로 죽게 되지 않는가?
둘째 딸을 낳고 다시 아들을 거의 연연 생으로 낳으며 우리 집 마당에는 기저귀
깃발이 늘 펄럭였다.
첫째가 초등학교 다니던 어느 날, 나는 아내에게 고백했다.
“여보! 내 인제는 혼자 공부하는 것 그만 할란다. 내.... 학교 가고 싶은데
괜찮겠나?”
“당신 그만큼 준비해 오셨는데 당신 뜻대로 하세요.”
“당신 도움 없이는 못 한대이! 식구들 고생이 클 거야!”
“가족들 걱정은 마세요. 살림은 제가 하잖아요?”
일일이 손가는 어린 자녀들과 시동생 시누이까지 총 9식구를 위해 이리 뛰고 저리
뛰면서 가녀린 몸이 과연 견디어낼까?
나 또한 한창 재롱떠는 아이들도 못 보며 새벽에 나갔다 한 밤에 들어와야 하는
고생을 꼭 시작해야 하는 것인가
드디어 나는 자녀들에게는 불성실한 아빠요, 아내에게는 매정한 남편이 되는 길에
들어섰다.
야간대학, 야간대학원, 야간에 야간을 걸치는 동안 아이들은 콩나물처럼 잘도
자랐고 나는 지쳐갔다.
경북대 의과대학 연구생이 되면서 아내가 제의해 온다.
“당신, 이렇게 밤 낮 없이 살다가는 병을 얻겠어요. 낮에 가는 학교를 그만두던지
밤에 가는 학교를 그만 두던지 하나를 결정하세요!”
“이제부터는 연구에만 몰두해도 다 못 따라가는데..... 초등학교 나가면서는 길이
없대이!”
“학교를 그만두고 당신 공부에만 집중하세요.”
“초등학교 안 나가면 생활은 뭐로 하려고?”
“저축해 놓았던 돈 쓰고 그래도 안 되면 집을 팔지요. ”
“................ 그렇게 해야 되나?”
“당신 건강이 첫째예요.”
아내 앞에서 사나이의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 안간힘을 쓰기가 그렇게 힘들 줄은....
초등학교 아이들과 함께 뒹굴며 지내던 생활을 13년으로 마감하고 학교 문을 나서다
아쉬워 꾸만 돌아본다.
‘초등학교 선생이 나 한테는 꼭 맞는데.... 흙먼지 날리는 학교 운동장에 언제
다시 오려나?’
날마다 밤늦도록 연구실에 있다가 집에 돌아오면 아이들의 자는 얼굴만 보게 되는
것에 안타까움을 느낀 나는, 어느 날 다 덮고 일찍 집으로 들어왔다.
“얘들아 아빠 왔다! 아빠가 오늘은 일찍 왔대이!”
당연히 달려와 매달려야 하는 아이들이 낯설어하지 않나?
그도 그럴 수밖에..... 아무리 내가 야단을 치거나 때리지 않는다 해도 아침 일찍
가방 들고 나가는 모습이나 보는데, 어려울 수밖에......
언제 놀아 주기를 했나 함께 소풍을 가봤나, 옆방 아저씨와 무엇이 다를까?
“자! 이리 오너라! 아빠가 안아 준대이!”
“.........................”
둘째 딸과 막내가 마지못해 무릎위에 앉는다.
“어디....명아랑 진아랑 피아노 많이 배웠나? 한번 쳐 봐라!”
“.................................”
눈만 껌뻑일 뿐 피아노 앞에 가서 앉아 볼 생각도 안하지 않나?
“그러면 진훈이가 먼저 암산쫌 해 봐라!”
막내 녀석도 누나들 눈치만 살필 뿐 까닥도 않는다.
“너희들 와 이라노? 아빠 앞에서는 안 할 거야?”
그때 큰 딸이 툭 한 마디 던진다.
“우리 피아노 안 배워요! 진훈이도 주산 학원 같은 거 안 다녀예.”
“아니 와? 와 그만 뒀노?”
“엄마가 돈 없다꼬 고만 가라 했어예.”
“뭐라고? 언제부터 안 갔다 말이가?”
“벌써 두달 됐어예.”
나의 가슴은 벌써 내려앉았고 숨소리도 가빠왔다.
그대로는 앉아 있을 수없어 밖으로 나왔다.
“이런 못난 것! 니가 가장이가? 니 가장 자격 없다!”
그날 밤 나는 나를 돌아보았다.
손에 잡히는 것도, 보이는 것도, 내일에 대한 확신도 없는 나를,,,,,,
광야에 홀로 서있는 가장인 나를 보았다.
아내가 곁에 와서 나의 어께에 자신의 머리를 기댄다.
“우리 아이들은 아빠를 자랑스러워하고 있어요.”
“내일부터 당장 아-들 피아노랑 주산 배우게 해요!”
“집이나 아이들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마세요.”
“명색이 가장이, 모르는 척하라 말이오?”
“당신이 술을 먹기를 해요, 담배를 피워요, 공부하느라 그러는데..... 조금만
참으세요!”
아내는 계란 팔아 돼지 팔아 가계를 꾸려 보았지만 역 부족이라 얼마 후, 우리는
집을 팔았다. 그리고 전셋집에서 다시 전셋집으로, 또 사글세방에서 사글세방으로
전전하면서도 그 무거운 피아노는 끌고 다녔다.
초등학교 선생 퇴직금으로 산 피아노이기 때문도 때문이려니와 우리 가족들의
희생과 인내의 역사가 깃들어 있기 때문에 버릴 수 없는 보물이 되었다.
돈이 없음으로 생기는 불편한 일들이 많고도 많았지만 몇 가지 떠올려
보자면.....,
아이들 커가는 모습을 사진으로 못 남겼다. 심지어 돌 사진도 못 찍었다.
동료들 파티나 놀러 갈 때 피하는 것은 물론이요 친지들 약혼 결혼 에도 못가고
장례식에도 못 갔다면 사람들이 아마도 웃을 것이다.
교회 헌금 시간에 헌금 바구니가 내 앞에 와도 참여 못하는 그 순간, 하나님은 내
형편을 아시지만 사람들 앞에 너무나 무안했다.
하지만 돈이 없었기에 득이 된 경우도 있다.
과자나 아이스크림 등의 군것질을 못하니 아이들이 밥 잘 먹고 건강하게 자랄
수밖에...
고기보다 제 철 과일이나 채소만 먹게 되고 흔한 생선이라니 온 가족이 자연
건강식을 하게 되지 않나?
무엇보다 다른 짓은 할 수 없고 다른 곳은 갈 수 없는 나는 연구실에 앉아 연구에만
몰두해 덕분에 다른 교수들 평생 걸려 쓰는 분량의 논문을 연구생과 조교 시절에 다
써버렸다.
경북대 의대 조교가 된 다음 정말 오랜만에 아내에게 월급봉투를 내 밀었다.
“많지 않대이!”
“어머.....” 아내의 눈에서 투명한 보석이 맺힌다.
“내 인제부터 가장 노릇 할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