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는 사랑이다.
공부란 삶의 길 찾기다. 삶의 길찾기란 개체가 환경 속에서 조화롭게 행복하게 살아가는 것을 뜻한다. 태어나 살면 되는 것을, 뭐 억지로 사는 방법을 찾아야 한단 말인가? 근데 그게 쉽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엄마 뱃속에 있을 때는 자연이 곧 엄마로서 저절로 태아인 나를 보호하고 길러줬지만, 일단 태어나면 세상에 던져진 것이나 마찬가지여서 낯선 세상이라는 문제를 만나 해결해가야 하기 때문이다. 엄마 뱃속에서는 나를 세상과 분리할 필요도 없을 정도로 보호를 받았다. 하지만 태어나는 순간 우리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가 된다. 어떻게든 낯선 세상에서 적응해 생존하기 위한 삶의 길찾기가 시작된다. 그래서 울고 불고 매달리기도 했던 것이다. 내 뜻대로 세상이 돌아가지 않고 내가 세상에 맞춰가야 한다는 것들이 많아졌다. 내 욕망대로 외치고 명령하고 행동하는 것을 멈추고, 세상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하나 배우며 사랑하며 조화롭게 살아가는 맛도 알게 되었다. 나는 그게 공부라고 생각한다.
근데 학교라는 게 영 이상하다. 이건 세상이 없고 온통 세상에 대한 지식만 가득하지 않은가? 학교가 제공하는 지식은 온통 가짜세상이다. 가짜의 추상성이 아이들의 흥미를 못 끄는 것은 당연하다. ‘이것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다. 그런데 학교란 곳이 묘하게 계급을 재생산하고 분류하는 기능을 담당하다보니 경쟁과 줄 세우기가 본질적 기능인 것처럼 작동하고 있다. 수도권 명문대, 의대가 목표인 것이다. 계급에서는 적성이고 뭐고 따지지 않는다. 그래도 학교를 순수하다고 믿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신기한 일이다, ‘어안이 벙벙하다’ 다. 더구나 가짜지식을 신봉하는 지식병에 걸린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
그래서 가짜지식과 진짜지식이 있고, 가짜공부와 진짜공부가 있다고 나눠 생각할 필요가 있다. 특히 지식중심의 입시교육이 지배적인 한국에서는 더.
하지만 삶의 길을 찾는 공부는 사랑이다. 사랑은 남과 하는 것이다. 모르는 남과 만나 모르는 남이 아는 내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세계와 내가 점차 통합되는 과정이다. 그런데 그러질 못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다. 사회와 제도가 복잡해지고 거대화하면서 사랑보다는 편리가 우선이 되고 생존이 우선이 되었다. 사랑은 남과 하는 것이지만 사랑도 자기중심적으로 자기를 사랑하는 자기애가 중심이 되어버렸다. 자본주의 사회의 인간상이 부르주아가 되는 것이고, 그 정신이 이익추구라지만, 이게 편리할지는 몰라도 제대로 된 삶의 길이라고 볼 수는 없다. 노예를 필요로 하는 주인의 삶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공부를 묻는 일이나 진정한 사랑을 묻는 일이나 마찬가지다.
공부도 추상적 공부와 현실적 공부로 나눌 필요가 생겼다. 추상적 공부는 앞으로 필요할 거라고 생각해서 학교에서 부과하는 모든 지식을 포함한다. 현실적 공부는 지금 내가 살고 있는 곳에서 혹은 세계에서 타자를 만나 배우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로부터 소외된 인간의 입장에서 세계가 곧 타자이므로 우리는 거대한 소외라는 문제상황에 봉착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더구나 과거 세계와 달리 현재의 세계는 이해할 수 없는 불가해성의 구조 속에서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존재론적 무지와 무기력을 의식할 수밖에 없다. 스마트폰을 잘 사용할 수 있지만 그것의 생산과정과 작동원리 영향 등을 제대로 아는 것은 너무나 어렵다. 그저 사용할 뿐. 그리하여 인공이 자연을 앞도하고, 가짜가 진짜를 말살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현재 우리가 겪는 생태파괴, 기후재난은 인간주체만이 생존하고 타자가 소멸하는 세상의 풍경이기도 하다. 그래서 ‘저것은 가짜야’ 하고 외칠 줄 아는 어린아이가 필요하다. 막연히 필수로 여기는 지식더미가 아니라 우리를 둘러싼 자연을 만나고 진짜 삶의 살도록 안내하는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그런데 이걸 너무 어려워한다. 신기한 일이다. 살아가는 모든 생명이 할 줄 아는 것은 인간이 못한다. 그럴 리가 없다. 인간도 세상과 조화롭게 살아가는 법을 스스로 터득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인정해야겠다. 우리는 인공낙원에서 태어나 자라는 인조인간들이라는 것을. 비록 우리가 여전히 자연의 존재로서 사람이기도 하지만 인공낙원의 인조인간 내지 사이버인간이라는 추상적 존재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아니 부인해야 한다.
그렇지만 영화 매트릭스의 레오처럼 빨간 알약을 삼키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이미 세상의 편리와 쾌락에 중독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처럼 다소 충격적인 전도가 필요하 다. 의미 있는 것은 의미 없고, 의미 없는 것이 의미 있다고, 중요한 것이 중요하지 않고, 중요하지 않은 것이 중요하다고. 필수도 당위도 반드시도 없다고. 아이의 놀이처럼 내 안의 아이를 세상 속에서 우선 놀며 자연스럽게 세상으로부터 배워나가도록 내가 나를 세상에 초대해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점점 그것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줄어들고 있다. 저마다 자기중심성과 자기애에 빠져 세계를 잃어버린 채 인공낙원을 헤매고 있다.
당신의 애인은 어디 있는가? 사랑하는 타자는? 공부를 하기 위해서는 우선 타자를 인식해야 하는 것이다. 타자의 회복이 필요하다. 그것이 벌레든 꽃이든 빗줄기든 해살이든 할머니든 친구든 소설이든 상관없이 타자를 인식하고 타자에게 듣고 배우며 타자를 사랑하는 것이다. 세계를 사랑하는 것 자체가 공부일 수밖에 없다. 나와 분리할 수 없는 세계를 알게 되었다면 아마 공부의 시작과 끝을 동시에 체험한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내가 모르는 세계조차도 나와 하나고 상호연결 되어 있다는. 이런 실존이 공부의 기본이고 궁극적 상태일 것이다. 앎과 지식도 무궁무진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참과 거짓을 나누어 출발할 수밖에 없다.
님만이 님이 아니라 그리워하는 것은 모두 님이라고 하지 않는가? 공부인 것도 없고, 공부 아닌 것도 없다. 사랑하는 마음이라면 시작하기 딱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