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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11:1-35절) 이스라엘의 불평 우리는 새로운 변화(變化)에 대하여 언제나 기대를 가집니다. 부인(婦人)들이나, 아이들은 이사(移徙)를 할 때, 새로운 집이 옛날 집에 비해서는 살기에 모든 것이 편리하기를 기대를 합니다. 그러나 새로 이사한 집이 옛날에 살던 집에 비하여 모든 면에서 살기가 좋을 때는 상관이 없지만, 새로 이사한 집이 옛날 집에 비해서 살기가 훨씬 불편하고, 고생스러울 땐, 부인(婦人)들이나, 아이들은 불평(不平)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옛날에 살던 집과 새 집이 비교가 되기 때문입니다.
또한 우리가 과거의 불신앙이나, 미신(迷信)을 버리고, 예수를 믿게 될 때, 우리는 이제 새로운 신앙을 가지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나를 축복(祝福)해 주셔서 과거보다는 훨씬 나은 삶을 살게 하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예수를 믿음으로 우리가 많은 축복(祝福)을 받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를 믿고 난 후에 과거 예수를 믿기 전보다 경제적(經濟的)으로도 못살고, 또 육체적(肉體的)으로도 건강하지 못할 때, 우리는 자신의 신앙에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 의심을 가지게 됩니다. 경제학(經濟學)에서는‘기회비용(機會費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기회비용(機會費用)’이라는 것은 지금 내가 여기에 쓴 돈을 여기에 쓰지 않고, 다른데 사용하였더라면, 어떤 결과가 나왔을까? 하는 것을 혼자서 계산해 보는 것입니다.
우리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는 이런 점이 굉장히 심합니다. 즉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가 한 번씩‘만약 내가 예수를 믿지 않고 그대로 세상 적으로 나갔더라면 지금쯤 어떻게 되어 있을까? 라는 것을 스스로 생각을 해보는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비교하는가 하면, 자기 친구나, 형제들 중에서 예수 믿지 않고, 세상 적으로 나가서 성공한 사람들과 비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 은근히‘나는 예수를 믿어서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하지 못했고 손해를 봤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즉 내가 예수 믿지 않고, 옛날 그대로 나갔더라면, 지금 보다는 더 성공했고, 더 잘살고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는 기쁘고, 감사한 것이 많이 있지만, 여전히 세상 적으로는 내 뜻대로 성공하지 못한 것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연단하실 때, 누구든지 처음 예수 믿자말자 곧바로 연단하시지는 않습니다.
왜냐면 예수 믿자말자 연단을 해버리면, 모두 너무나 놀라서 신앙을 다 버려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많은 축복(祝福)을 주시고, 사랑을 주십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 하나님의 때가 되었을 때, 하나님께서는 사랑하는 자들을 연단(鍊鍛)하기 시작하십니다. 그때 세상의 좋았던 시절은 다 물 건너 가버리고 이제는 하나님의 손에서 철저하게 낮아지는 훈련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때는 이미 신앙적으로 어느 정도 철이 들었기 때문에 자기가 세상으로 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침체(沈滯)가 되어 버립니다. 왜냐면 세상 적으로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없으니까 화가 나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물론 내가 어렵다고 해서 세상으로 갈 수는 없지만 나는 예수를 믿어서 많이 손해를 보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일종의 자기 의(義)입니다.
그러나 나중에 하나님께서 폭포수 같은 은혜(恩惠)와 축복(祝福)을 부어주실 때는‘내가 하나님 앞에서 손해 본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무지무지하게 복 받은 자라’는 고백이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광야 훈련(訓練)은 오늘 본문 민수기 11장에서부터 시작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훈련받으면서 처음으로 한 것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에 대하여 불평(不平)을 한 것입니다.
즉 자기들이 지금 살고 있는 형편이 애굽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못하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당장 하나님 앞에서 고기를 먹게 해 달라고 떼를 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 앞에서 얼마나 떼를 썼는지, 모든 백성들이 장막 문에 나와서 고기를 달라고 울어댔습니다. 이때 모세도 너무나 기가 막혀서 하나님께 왜 이 사람들을 내게 맡겨서 이렇게 고생을 시키시느냐? 면서 차라리 죽게 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는 메추라기를 보내셔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실컷 고기를 먹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의 70인의 장로들을 회막 문에 불러서 성령으로 충만케 하시는 체험을 하게 하셨습니다.
Ⅰ.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 오늘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불평이 두 가지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출애굽의 전반적인 것에 대한 것이고, 다른 하나는 구체적으로 고기를 먹지 못한 불평이었습니다. 11:1절)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어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세를 따라서 애굽을 떠나면, 애굽에서 살던 것보다는 훨씬 더 풍족하고, 편한 삶이 기다리고 있을 줄로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능력과 기적으로 바다를 건너서 애굽을 떠나고 보니까, 편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모든 것이 애굽에 있을 때보다 훨씬 더 못한 것이었습니다. 비록 애굽에서는 강제노동 하기는 했지만, 밤에는 돌아와서 편안하게 잘 수 있는 집이 있었고, 적어도 먹는 것은 궁색(窮色)하지는 않았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모세를 따라 광야로 나와 보니까 집도 없고, 먹는 것도 없고, 물도 없고, 당장 살 수 있는 기본적인 것도 보장이 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에 대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을 했다’고 했습니다. 여기에서‘악한 말로 원망하는 것’은 어떤 것일까? 우리가 부부 싸움하는 것을 예(例)를 들어서 생각을 해 봅시다. 어느 집에 남편이 출근을 해야 하는데, 부인(婦人)이 남편의 와이셔츠를 빨아 놓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아무소리 하지 않고, 냄새가 나는 입던 와이셔츠를 가지고 나가면서‘여보사랑해요’라고 말하는 남편이 있다면, 아마 그 사람은 천사일 것입니다.
그런데 반대로 악(惡)하게 말을 해야 직성이 풀리는 남편이 있습니다. 그는‘당신은 정신이 나간 여자야. 지금까지 내가 해 달라는 것을 제때, 제때 해 준 적이 한번이라도 있어? 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분명히 시비(是非)조인 것이고, 정도를 넘어선 것입니다. 남편이‘와이셔츠가 준비되지 않았군. 당신 어떻게 된 거야? 라고 이 정도로 말한다면,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절대로 그 수준으로 만족하지 않습니다. 무슨 말을 하면, 상대방의 기(氣)를 완전히 꺾어 놓아야하고, 극단적으로 자기 속에 있는 화를 퍼부어야 직성이 풀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옛날 것까지 끄집어내서 비난을 할 때, 이것은 이미 죄(罪)를 짓는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부인(婦人)은 자기가 잘못하기는 했지만, 과거까지 들먹이니까 화가 납니다. 그래서 부인(婦人)도 말이 곱지 않습니다.‘당신은 손이 없어요? 한다든지, 아니면‘내가 시집오고 난 후에 당신 나에게 해 준 것은 뭐가 있어요? 라고 말한다면, 이 집은 제대로 싸움이 붙은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 따라 나온 후에‘모세에게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것은 처음에 기대했던 것과는 많이 다른데 혹시 우리가 잘 못된 길을 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고 한다든지,‘우리는 언제쯤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안정된 생활을 할 수 있을까요? 라고 하는 것은 얼마든지 할 수 있는 이야기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런 말까지도 하지 말라고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화가 나니까 이 화(禍)를 하나님과 모세에게 퍼부었습니다. 즉‘모세야 너는 애굽에 무덤이 없어서 우리를 여기에 끌고 나와서 죽이려고 하느냐? 는 식의 말을 한 것입니다.
이것은 벌써 시비(是非)조요, 싸우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을 하나님께서 들으셨습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에 어떤 사건에 대하여 말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거기에 감정이 살리게 되면, 이미 죄(罪)를 짓게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서 ‘오늘은 춥다’든지, 혹은‘지금은 피곤하다’든지, 하는 말은 죄를 짓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오늘은 더럽게 춥다’든지,‘너의 얼굴만 봐도 피곤하다’든지 하면, 이것은 죄(罪)를 짓는 것입니다.
우리는 말을 할 때, 너무나도 상대방의 인격 자체를 공격의 대상으로 삼습니다. 이것은 아무리 옳아도 전부 다 악(惡)한 것입니다. 즉‘저 사람이 하는 것은 언제나 그렇지 뭐’라고 한다든지,‘저 집 식구들 모두 다 저래’라는 것은 이미 인격적으로 판단을 하고, 정죄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을 인격적으로 심판할 자격을 가기고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은 귀가 있으셔서 우리가 하는 모든 말을 다 듣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원망하는 말이나, 불평하는 말들을 전부 다 듣고 계시고, 심지어는 농담하는 말이나, 희롱하는 말까지 하나님은 다 듣고 계십니다. 그래서 진노(震怒)를 하십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에 대하여 자신들의 기대와 맞지 않는다고 원망하고 불평했을 때‘하나님의 불’이 임했습니다. 1절 끝에 보면‘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라고 했습니다.
여기서‘여호와의 불’이라는 것은 인간적으로 볼 때, 도저히 일어날 수 없는 곳에 불이 일어난 것입니다. 그리고 또 그 불이 꺼지지 않는 것입니다.
전에 미국 캘리포니아에서는 어마어마한 산 불이 일어나 아주 방대한 지역을 불태웠는데 도저히 불이 꺼지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진영에 도저히 불이 날 수 없는데, 불이 났고, 또 그 불이 도저히 꺼지지가 않았습니다. 이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것을 신앙적으로 해결을 했습니다. 11:2절)백성이 모세에게 부르짖으므로 모세가 여호와께 기도하니 불이 꺼졌더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엄청난 불을 도저히 자기들의 힘으로 끌 수 없으니까 모세에게 달려와서 불을 꺼달라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상한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툭하면 모세를 원망하고 불평해도 마음속 깊은 곳에는 모세가 하나님의 종이며, 능력이 있다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어려우면, 모세에게 달려와서 부르짖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모세가 기도를 하니까 불이 저절로 꺼졌습니다. 이것을‘기도의 진화 법’이라도 부를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운 시험이 닥쳤을 때는 마치 산불이 붙은 것처럼 맹렬하게 퍼지게 됩니다. 그때 솔직하게 자신의 불신앙을 인정하고, 기도를 부탁하거나, 본인이 기도를 하게 되면, 이상하게 시험(試驗)이 스르르 줄어드는 것을 경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곧 기도로 해결하는 방법입니다. 즉 일단 합심해서 기도를 하게 되면, 더 악(惡)하게 발전하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다베라’라고 불렀습니다. 여기‘다베라’라는 말은‘불탔기 때문에’라는 뜻입니다. 불이 났기 때문에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잘못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불이 났기 때문에 다시 한 번 하나님께 부르짖으면서 기도를 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말(입)을 아주 조심을 해야 합니다. 왜냐면 모든 말을 하나님께서 다 듣고 계시기 때문에 아예 자신이 없는 말은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자신이 없으면‘말하지 않겠다.’고 하든지, 아니면 그냥 입만 꾹 다물고 있어도 죄(罪)를 짓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혀)에 나쁜 감정이 섞여버리면, 이미 사탄의 불은 붙은 것입니다. 그 말을 들은 사람의 마음은 이미 독(毒)으로 시커멓게 타버리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말하는 것과 연결 지어서 이렇게 설명하셨습니다. 마5:22절)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욕설)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이스라엘 백성들의 못된 말은 진영 끝을 불태웠지만, 실제로는 지도자 모세의 속을 다 태웠고, 하나님의 속을 다 태웠던 것입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어가시면서까지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런 고생하는 데로 데리고 오셨을까?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완전히 애굽과 단절시키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세상의 행복으로 자신의 행복을 누리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세상의 행복을 버리고, 하늘의 은혜로 행복을 누리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철저하게 하나님의 손에 붙잡히는 자들이 되게 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손에 잡혀야 능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되기 위해서는 아무것도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만 의지하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여기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의 두 번째 불평이 나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도 고기를 먹고 싶은 욕망(慾望)때문에 생긴 것이었습니다.
11:4-6절)그들 중에 섞여 사는 다른 인종들이 탐욕을 품으매 이스라엘 자손도 다시 울며 이르되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에는 값없이 생선과 오이와 참외와 부추와 파와 마늘들을 먹은 것이 생각나거늘 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하니”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두 고기를 먹지 못해서 자기들의 텐트앞에 나와서 통곡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것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난 일 년 동안 고생을 하기는 엄청나게 했구나,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사람이 너무 가난하게 되고, 너무 비참하게 되면 별 것 아닌 사소한 것에도 닭똥 같은 눈물이 쏟아지게 됩니다. 왜냐면 지금 자신이 고생하는 처지가 너무나도 비참하게 느껴지기 때문입니다.
본문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처음부터 고기를 먹지 못했다고 운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잘 참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고기를 먹지 못했어도 잘 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을 자극(刺戟)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이스라엘 중에 섞여 사는 이방인(雜種)들이었습니다. 이들은 그야말로 순수하게 물질적 이득(利得)을 생각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따라 나온 사람이었는데, 이스라엘 백성들이 바보같이 잘 참고 있으니까 이들을 이렇게 자극(刺戟)을 했습니다. ‘자 너희들 잘 생각해봐. 우리가 애굽을 떠난 후에 한 번도 고기를 입에 대보지 못했어 우리 너무 오랫동안 고기를 굶었어 우리가 애굽에 있을 때는 다른 것은 몰라도 먹는 것 하나는 실컷 먹을 수 있었는데 생선도 먹고 참외도 먹고 마늘, 파, 부추를 실컷 먹었잔아 이런 것들을 너무너무 먹고 싶다’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감정을 부추긴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금까지 고생스럽지만, 잘 참고 있었는데, 이방(雜種)들이 고기 먹던 이야기를 하면서 옛날이야기를 하니까 그만 자기들도 너무나도 서러운 나머지 한 사람 두 사람 울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집단적 통곡으로 발전하고 만 것입니다. 우리나라 코미디언 故 김 희갑 씨가 외국 동포들을 모아놓고 공연하면서‘고향이 그리워도 못가는 신세’를 구성지게 부르면, 교포들이 한 사람 두 사람 훌쩍거리기 시작하더니, 나중에는 전부가 눈물바다가 되어버렸다는 것입니다.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이 고향이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에서 태어났고, 애굽에서 자랐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애굽은 못살아도 고향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값없이 생선과 외와 참외와 마늘과 파 같은 것들을 실컷 먹었던 것을 생각하고 울었습니다. 그러나 생선이나 참외 등을 공짜로 먹은 것이 공짜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신앙을 포기하고, 자유를 포기한 대가로 생선과 참외 들을 공짜로 먹었던 것입니다. 즉 자기들은 그것이 공짜라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공짜가 아니라, 그것들은 굉장히 비싼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기와 생선과 참외 등을 포기하고, 신앙의 자유와 정신적인 자유를 얻었고, 자녀들을 마음껏 키울 수 있는 자유를 얻었습니다. 이것은 도저히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가치 있는 귀중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우리들에게 비교할 수 없는 것들을 비교하게 함으로써 우리의 신앙의 가치를 깎아내고, 하나님을 원망하게 만듭니다. 우리는 어마어마한 멸망(滅亡)에서 구원(救援)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히2:3절)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 하리요”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마음껏 하나님을 예배하고 찬양하며, 우리가 가장 귀하게 생각하는 것들을 위하여 마음껏 할 수 있는 자유(自由)가 주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런 우리는 옛날만큼 놀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자랑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하나님을 원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6절)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일 년 동안 고기도 못 먹고, 마늘이나, 채소도 먹지 못하니까 지금 기력(氣力)이 말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력이 좀 줄어든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왜냐면 그동안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기력이 과잉이었고, 혈기가 과잉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금만 마음에 들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고, 뗑깡을 부렸는데, 자기들은 그렇게 하는 것이‘활기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모든 것을 내 마음대로 씩씩거리면서 설쳐대고,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악(惡)을 쓰면서 소리를 질러대야 기력이 좋은 것인데, 지난 일 년 동안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말씀만 듣고,‘하라’고 하는 대로만 하니까 지금 기운이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생기(生氣)있다고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실은 전혀 인격이 다듬어지지 않고, 혈기(血氣)가 넘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다듬어지면, 소리를 지를 일도 없고, 성질(性質)을 부릴 일도 없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꾸만 그런 것을 가리켜 기력(氣力)이 쇠약(衰弱)하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사정이 딱한 것은 사실이었습니다. 11:6절)이제는 우리의 기력이 다하여 이 만나 외에는 보이는 것이 아무것도 없도다 하니”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일 년 동안 오직 딱 하나, 만나만 먹었습니다. 그리고 광야에는 만나 외는 먹을 것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때 이스라엘 백성들은 우리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먹지 못해서 지금 영양실조(營養失調)에 걸렸고, 도저히 살 재미가 없다고 불평하면서 울었습니다.
사실 이 만나는 새벽이슬과 함께 내리는 것을 이스라엘 백성들이 주웠는데, 진주같이 생겼고, 무슨 씨같이 생겨서 갈아서 먹기도 하고, 빻아서 먹기도 했습니다. 맛은 기름 섞은 과자 맛이라고 했는데, 그런대로 고소하고, 먹을 만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일 년 내내 이것 하나만 먹으니까 불만이 터진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은 오직 생존(生存)만 한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지난 일 년을 결산해 보면, 그냥 굶어죽지 않고, 산 것 외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사람은 굶어죽지 않고, 산다고 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사람에게는 무엇인가 추구하는 목표가 있어야 하고, 세상적인 인정도 받아야 하고, 자랑할 것도 있어야 사는 재미가 있는 것입니다. 오직 은혜만 받고, 굶어죽지 않고, 살기만 했다고 해서 만족스러운 것은 아닌 것입니다.
사실 사람에게는 누구나 성취하고자 하는 욕구(慾求)가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지난 일 년 동안 성취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오직 하나님의 말씀 듣고 만나 먹은 것 밖에는 없었습니다.
그러자 이스라엘 백성들은 도저히 이렇게 사는 것은 사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울었습니다.
11:10절)백성의 온 종족들이 각기 장막 문에서 우는 것을 모세가 들으니라 이러므로 여호와의 진노가 심히 크고 모세도 기뻐하지 아니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들의 처지가 비참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 한 것이 애굽에 있는 것보다 못하다고 생각을 했습니다. 마침내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이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Ⅱ.모세의 한계 모세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 장막 문에 나와 앉아서 우는 것을 보고, 굉장히 낙심을 했습니다. 왜냐면 지금까지 모세가 노력해서 애쓴 것들이 이것밖에 안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결국 모세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생한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무엇보다 나타난 결과는 없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고생만 실컷 시켰으니까 지도자 모세는 자신도 실패했다고 생각을 한 것입니다. 11장11절)모세가 여호와께 여짜오되 어찌하여 주께서 종을 괴롭게 하시나이까 어찌하여 내게 주의 목전에서 은혜를 입게 아니하시고 이 모든 백성을 내게 맡기사 내가 그 짐을 지게 하시나이까.” 11:15절)주께서 내게 이같이 행하실진대 구 하옵나니 내게 은혜를 베푸사 즉시 나를 죽여 내가 고난당함을 내게 보지 않게 하옵소서.” 지금 모세도 한계점까지 와 있습니다. 우리는 모세의 말을 들으면, 잘 이해가 가지 않을 것입니다.‘아니 모세는 지팡이 하나로 열 가지 기적을 일으키고 홍해 바다를 갈라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냈는데 왜 갑자기 자기를 죽게 해 달라고 할까?
이것은 다른 사람의 영혼을 책임져보지 않으면, 이해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부모님들은 아이들이 다 커서 결혼할 때까지 그야말로 자녀들의 모든 것을 다 책임을 져야합니다. 즉 외출을 했다가 조금 늦게 들어와도 가슴이 졸여지고, 수능시험을 치면, 자녀보다 더 가슴이 졸여집니다.
거기에다가 아이들은 많은데 수입마저 없으면, 그야말로 하루하루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 짐인지 모릅니다. 마찬가지로 모세도 지금까지 자기 능력으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이끌어 온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능력을 주셔서 이 많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여기까지 책임지고 온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의 마음속에도 혹시 만나가 내리지 않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도 있었고, 또 물이 떨어졌는데, 물이 안 생기면 어떻게 하나, 하는 걱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자기를 인정하지 않고, 폭동을 일으키면, 어떻게 하나 하는 두려움이 솔직히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제 광야에서 일 년을 지난 후에 모세는 탈진(脫盡)을 해버렸습니다.
특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먹고 싶다고 모두 다 울 때, 모세의 마음이 약(弱)해지면서‘내가 이 백성들을 괜히 끌고 나와서 고생을 너무 시켰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 그냥 자포자기(自暴自棄)하는 마음이 들고 말았던 것입니다. 모세는 사람들 앞에서 자기 심중을 털어 놓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가서는 정말 자기 속에 있는 불만과 두려움을 모두 다 털어 놓았습니다. 모세는 하나님께 왜 자기가 이 백성들을 책임을 져야하는지 모른다고 말을 했습니다.
즉‘내가 낳은 자식들도 아닌데 왜 내가 이들의 정신적이고 육체적인 모든 것들을 다 책임을 져야합니까? 라고 따졌습니다. 11:12절)이 모든 백성을 내가 배었나이까? 어찌 내가 그들을 낳았나이까? 주께서 내게 양육하는 아버지가 젖 먹는 아이를 품듯 그들을 품에 품고 주께서 그들의 열조에게 맹세하신 땅으로 가라 하시나이까.” 어린 아이와 부모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린 아이는 무엇이든지 뗑깡을 부릴 수 있습니다. 즉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을 달라고 떼를 쓸 수 있고, 자기가 하기 싫으면, 안 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부모는 그것이 되지 않습니다. 즉 먹을 것이 없으면, 먹을 것을 만들어 내어야 하고, 식구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서라면, 하기가 싫은 것도 얼마든지 해야 합니다.
또 고개를 숙일 때, 숙여야 하고, 허리를 굽힐 때, 굽혀야 하고, 그러면서도 그 모든 것을 묵묵히 참아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이 책임과 부담을 훌훌 벗어버리고, 어디론가 먼데로 도망을 치고 싶고, 그것이 안 되면, 죽어서라도 이 부담에서 해방되고 싶은 것입니다.
목회라는 것도 직업으로 생각하면, 좋을지 몰라도, 영혼(靈魂)을 책임지는 것이기 때문에 얼마나 무거운 것인지 모릅니다. 물론 자기의 힘으로 하는 것도 아니고, 전부 하나님의 도우심과 성도들의 도움으로 하는 것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짐은 너무나도 무거운 것입니다. 하지만 이 짐을 벗고 도망칠 수가 없습니다.
모세는 이 무거운 짐을 벗을 수 있도록 죽게 해 달라고 하나님께 부탁을 합니다. 물론 이 말만 들으면, 모세의 그 좋던 신앙(信仰)이 다 어디로 갔느냐?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사실 모세의 신앙(信仰)도 바닥이 다 나버렸습니다.
특히 하나님의 백성들은 결코 완전하지 못하면서 완전하게 살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믿는 자들도 우울증(憂鬱症)에 걸린 최고로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는 것입니다. 대개 우울증(憂鬱症)에 걸리는 사람의 특징은 완벽하지 못하면서 완벽하고자 하는 이것입니다. 즉 자기 생각이나, 말에서 실수하는 것을 용납을 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어디 실수하지 않을 수 있고, 잘못을 저지르지 않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면서도 그것을 자꾸만 이렇게 생각합니다.‘이렇게 하지 말았어야 하는데 나는 또 멍청하게 하고야 말았구나.’이것을 수백 번 수천 번 생각하면, 결국 기쁨이 다 없어지고, 죽고 싶은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가 사는 방법은 결국 짐은 우리가 져야 하지만, 이 짐을 자꾸만 하나님 앞에 맡겨드려야 합니다.
우리는 모순(矛盾)에 가득 찬 이 세상을 살아가야 합니다. 도저히 완전할 수 없는데도 완전한 것처럼 살아가야 합니다. 그러니까 도저히 미치지 않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들을 하나님 앞에서 울고 몸부림치고, 고백을 드려야 합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한 것과 모세가 한 것의 분명한 차이를 볼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자신의 어려움을 사람의 책임으로 돌렸습니다. 그리고 가장 못된 말로 원망(願望)을 했습니다. 즉 울면서 신세타령을 한 것입니다.
그러니까 매일 그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 앞에 가지고 나와서 자기 마음을 있는 그대로 털어 놓았습니다. 짐이 무거워서 질 수 없다고 했고, 솔직하게 이 짐을 벗기 위해서 죽었으면, 더 좋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것의 원인이 고기를 먹지 못한데 있다는 것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그랬더니, 하나님께서 이 짐을 다 가볍게 해 주셨습니다. 그래서 모세는 이 짐을 단 하루도 더 질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앞으로 40년을 더 감당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기도의 힘인 것입니다.
11:13-14절)이 모든 백성에게 줄 고기를 내가 어디서 얻으리이까 그들이 나를 향하여 울며 이르되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라 하온즉 책임이 심히 중하여 나 혼자는 이 모든 백성을 감당할 수 없나이다.” 아마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두 모세를 보면서‘고기! 고기! 하면서 울었던 것 같습니다. 모세는 다른 것은 몰라도 도저히 고기만은 이 광야에서는 구할 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백성들이 자기만 보면‘고기! 고기!’할 텐데, 자기는 도저히 이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시도록 말씀을 드렸습니다. Ⅲ.하나님의 응답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들도 폭발 일보직전이고, 모세도 폭발 일보직전인데, 모세에게 찾아오셔서 이렇게 말씀을 주셨습니다.
11:16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스라엘 노인 중에 네가 알기로 백성의 장로와 지도자가 될 만한 자 칠십 명을 모아 내게 데리고 와 회막에 이르러 거기서 너와 함께 서게 하라” 우리가 어떤 극단적인 어려운 처지를 당한다 하더라도 일단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면, 다 살길이 생기게 되어 있습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어떤 어려움보다도 크시며, 하나님은 그의 말씀으로 이 모든 것을 다 해결하실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어려움이 생기는 것은 죽으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나아오라는 뜻인 줄 알아야 합니다. 무조건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는 대로만 하면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지금 이스라엘 백성들이 고기를 달라고 울고 있는데 70명의 장로들을 데리고, 하나님께로 오라고 하셨습니다.
고기와 70명의 장로가 무슨 관계가 있을까? 우리 생각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70명의 지도자들을 데리고 오라고 명령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11:17절)내가 강림하여 거기서 너와 말하고 네게 임한 영을 그들에게도 임하게 하리니 그들이 너와 함께 백성의 짐을 담당하고 너 혼자 담당하지 아니하리라” 하나님의 응답은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모세의 짐을 가볍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지금까지 모세의 짐은 너무나 무거워서 모세는 이제 거의 다 쓰러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모세가 하나님께 나아가서 부르짖으니까 이 짐을 분산(分散)시켜서 얼마든지 가볍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의 짐은 얼마든지 무거울 수도 있고 가벼워질 수도 있습니다.
지금까지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너무나 신앙적으로 어리니까 모세의 짐이 너무나 무거웠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이 성숙하게 되면, 그 짐은 훨씬 가벼워지게 됩니다.
지금 우리나라 교회는 너무나도 양적(量的)인 성장에만 치우치고 있습니다. 그러면 결국 그 모든 짐을 목회자 자신이 다 지게 되어서 나중에는 그 짐이 스스로 깔려서 죽게 됩니다.
그런데 목회자가 교인들을 말씀으로 잘 자라게 하면, 교인들이 스스로 일어서서 짐을 져주기 때문에 훨씬 짐이 가벼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옛날에 엄마가 아이들을 일곱이나, 여덟을 낳고도 키울 수가 있었던 것은 큰 아이가 동생들을 책임을 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울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스스로 거룩하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11:18절)또 백성에게 이르기를 너희의 몸을 거룩히 하여 내일 고기 먹기를 기다리라 너희가 울며 이르기를 누가 우리에게 고기를 주어 먹게 하랴 애굽에 있을 때가 우리에게 좋았다 하는 말이 여호와께 들렸으므로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고기를 주 어 먹게 하실 것이라” 이스라엘 백성들은 울고만 있으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려면, 스스로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응답을 받으려면, 우리 자신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즉 기도를 해 놓고 텔레비전만 실컷 보고, 사람들이나 만나러 돌아다니면 안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생활을 단순하게 정리하고,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려야합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응답이 웬지 불길한 것 같습니다. 11:19-20절)하루나 이틀이나 닷새나 열흘이나 스무 날만 먹을 뿐 아니라 냄새가 싫어하기까지 함 달 동안 먹게 하시리니 이는 너희가 너희 중에 계시는 여호와를 멸시하고 그 앞에서 울며 이르기를 우리가 어찌하여 애굽에서 나왔던가 함이라 하라” 하나님은 고기를 주시는데, 한 번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매일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들의 메-뉴는 한 달 내내 고기였습니다. 그 이유는 역시 그들이 못된 소리로 하나님을 원망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기도도 예쁜 모양으로 기도를 해야 하나님이 곱게 들어주시지 투정을 부리듯 악(惡)을 쓰듯이 하면, 하나님께서 응답해주시기는 하는데, 결국 이것이 복(福)이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때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에 놀랬습니다. 11:21-22절)모세가 이르되 나와 함께 있는 이 백성의 보행자가 60만 명이온데 주의 말씀이 한 달 동안 고기를 주어 먹게 하겠다 하시오니 그들을 위하여 양 떼와 소 떼를 잡은들 족하오며 바다의 모든 고기를 모은들 족하오리이까?”
모세도 하나님께서 60만 명을 일개월동안 입에 물리도록 고기를 주시겠다고 하니까 믿어지지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무엇이라고 말씀을 하십니까? 11:23절)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여호와의 손이 짧으냐 네가 이제 내 말이 네게 응하는 여부를 보리라” 홍해를 갈랐던 모세의 신앙(信仰)도 고기에서는 흔들렸습니다. 우리의 신앙(信仰)이 고기에 흔들려서는 안 됩니다. 어떤 사람은 고기에는 신앙이 흔들리지 않는데, 김치에는 흔들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즉 김치가 없으면, 교회에 나오지 않겠다고 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여호와의 손이 짧으냐?’하나님의 손은 결코 짧아진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가지 일을 하셨습니다. 하나는 칠십 인의 장로들에게 성령을 부어주셔서 성령 충만하게 하신 것입니다. 11:25절)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영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임하게 하시니 영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 하나님께서는 고기를 달라고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고기 대신에 먼저 성령을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믿는 자들에게 가장 주시고 싶어 하시는 것이 곧 이 충만한 성령의 은사(恩賜)인 것입니다.
여기서 말씀과 성령 충만이 함께 나타나고 있습니다. 즉 말씀을 하면서 성령의 충만함이 70인들에게 임했습니다.
성령이 충만하게 임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마음과 몸속에 하나님의 능력이 부어지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하나님의 능력이 임하면,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예전에 그렇게 집착하던 것이 전부 다 시시해져 버립니다. 그 대신에 우리는 하나님의 축복(祝福)으로 배부르게 됩니다.
환자들이 아프면 대개 병원에서 링거 주사를 놓습니다. 그러면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프지 않습니다. 왜냐면 링거액으로 영양(營養)이 공급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으로 충만해지게 됩니다. 그러면 고기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됩니다. 또 집이나, 차도 아무것도 아닙니다.
내가 성령 받은 그곳이 천국(天國)으로 변해버립니다. 그리고 너무나 기쁘고, 감격스러우니까 울면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게 되고, 자기도 모르는 말을 자꾸만 중얼거리게 됩니다.
그것이 여기에 나오는 예언(豫言)인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화가 나고 불평이 생기는 것은 성령 충만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충만하기만 하면, 어떤 어려움도 전혀 문제가 되지 못합니다.
그런데 여기에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것은 모세가 70인을 소집 했는데, 두 명이 오지 않았습니다. 엘닷과 메닷이라는 사람인데, 이 두 사람이 빠졌습니다. 그런데 성령의 은혜는 그들에게도 임해서 이 두 사람도 성령의 충만함이 임했습니다.
아마 이 두 사람이 빠진 것은 반항(反抗)해서 빠진 것은 아닌 것 같고, 어떤 사정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죄우간 성전(聖殿)이 아닌 곳에서 두 사람이 은혜(恩惠)를 받아서 예언(豫言)을 하고, 방언(方言)을 하니까 한 소년이 여호수아에게 말하게 됩니다.
그러나 모세는 여호수아에게 우리가 하나님의 은사(恩賜)를 가지고 시기(猜忌)해서는 안 된다고 하면서 자기는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령을 받아서 다 선지자가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26-30절 참조) 역시 모세는 큰 그릇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사(恩賜)와 축복(祝福)을 나에게만 제한시킬 수는 없습니다. 결국 주님이 오심으로 그분이 승천이후, 모든 성도들이 다 성령 받아서 하나님의 종이 되는 시대가 온 것입니다. 그르고 하나님께서는 바람을 불게 하셨는데, 그 바람에 메추라기가 날려 와서 이스라엘 진영 주위에 쌓이기 시작했습니다. 얼마나 많은 메추라기가 날아 와서 쌓였는가하면, 일 미터 높이로 하루 길 되는 지면에 전부 메추라기였습니다. 메추라기는 너무 많아서 날지도 못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고기를 못 먹었다고 원망하고, 불평하다가 그야말로 한 달 동안 고기를 입에 물릴 정도로 먹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모습을 기뻐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면 먹고, 주시지 않으면 참고 기다려야지, 울고 떼를 써서 고기를 먹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고기를 입에 물고 씹기도 전에 하나님께서는 병(病)으로 치셔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그래서 그곳 이름을 34절)기브롯 핫다아와”라고 지었는데‘탐욕의 무덤’이라는 뜻이었습니다.
결국 이 무덤은 욕심 부리다가 죽었다는 뜻입니다.
결국 이들의 묘비명(墓碑銘)을‘메추라기를 먹다가 씹지도 못하고 죽다’였습니다. 어떤 사람은‘먹다가 죽었다’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탐욕만 추구하다가 탐욕(貪慾)의 무덤을 남겨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 우리는 성령 충만함을 받아야 합니다. 엡5:18절)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 모두 하나님의 말씀과, 기도로 심령이 배부르고, 천국(본향)을 소망하며 풍성한 성도들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죄 많은 이 세상은 우리의 집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요14:2-3절)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맨션)를 예비하러 가노니...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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