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새재 제1관문에서 제3관문까지
문경새재의 유래
백두대간(白頭大幹)의 조령산(鳥嶺山) 마루를 넘는 이 재는 예로부터 한강과 낙동강유역을 잇는 영남대로상의 가장 높고 험한 고개로 사회 문화 경제의 유통과 국방상의 요충지였다. 새재(鳥嶺)는 「새도 날아서 넘기 힘든 고개」, 옛 문헌에 초점(草岾)이라고도 하여 「풀(억새)이 우거진 고개」 또는 하늘재, 麻骨嶺)와 이우리재(伊火峴) 사이의 「새(사이)재」, 새(新)로 된 고개의 「새(新)재」 등의 뜻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이 곳은 자연경관이 빼어나고 유서 깊은 유적과 설화·민요 등으로 이름 높은 곳이다. 이 곳에는 나그네의 숙소인 원터, 신구 경상도관찰사가 관인을 주고 받았다는 교귀정터만 남아있는 것을 1999년 중창하였고, 옛날에 산불을 막기 위하여 세워진 한글 표석 "산불됴심" 비(지방문화재자료 제226호)가 남아있다. <문경새제도립공원관리소>
제1관문 진입로
제1관문(주흘관)
영남제1관(주흘관)
주흘산 등산로 입구
제1관문에서 제2관문으로 가는 길가에는 아직 단풍이 남아있다.
원터(院址)
원(院)이란 지금의 여관과 같았다. 화봉원에서 고려의 유희가 시를 읊는 것을 보아 고려 때부터 원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권근의 기문(記文)에 의하면 나라의 들에는 10리 길에 여(廬-초막)가 있고 30리 숙(宿-여관)이 있었으며, 후세에는 10리에 장정(長亭-쉬는 집) 5리에 단정(短亭-쉬는 작은 정자) 하나씩이 있었는데 모두 나그네를 위한 것이었다.
나라에서 파발을 두어 사명(使命)을 전하고 원(院)을 두고 상인과 여행자에게 혜택을 주되 공과 사의 구별, 상과 하의 구별을 분명히 하였다.
산골짜기 외딴 곳에서 해는 저물었는데 갈 길은 멀고 사람과 말은 지치고 범이나 표범의 두려움, 도둑의 염려 등 길손의 걱정은 이에 더 할 것이 없었을 것이다.
임진왜란 뒤에 이곳에 3개(주흘관, 조곡관, 조령관)의 관문(사적 제 147호)을 설치하여 국방의 요새로 삼았다.
주막
새재는 조선시대에 영남에서 한양을 오가던 가장 큰 길로서, 이 주막은 청운의 꿈을 품고 한양길로 오르던 선비들, 거부의 꿈을 안고 전국을 누비던 상인들 등 여러 계층의 우리 선조들이 험준한 새재길을 오르다. 피로에 지친 몸을 한잔의 술로 여독을 풀면서 서로의 정분을 나누며 쉬어가던 곳이다. 산수 경관이 수려한 곳에 자리잡은 이 주막을 1983년 11월 조국순례자연보도 사업의 일환으로 옛 형태대로 되살려 선조들의 숨결과 전통문화의 얼을 되새기고 있다.
교귀정(交龜亭)
조곡관(鳥谷關 : 제2관)과 주흘관(主屹關 : 제1관)의 중간지점인 용연(龍淵-龍湫)위에 있다. 체임(遞任)하는 신구관찰사(新舊觀察使)의 교인처(交印處)로 성종조 신승명이 건립했다. 유지(遺址)와 김종직(金宗直)의 시(詩)가 전해 왔으며 1999년 10월 문경시가 중창하였다.
산불됴심비
교귀정을 지나 제2관문을 못미쳐 노변의 오른쪽에 세워 있다. 다듬지 않은 돌(높이 183㎝, 폭 75㎝ 정도)에 "산불됴심"이라고 한글로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보아 퍽 오래된 조선조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정조 때 별장이 잡인의 통행을 단속할 때 역시 관방(關防)유지를 위해서는 산불조심이 무엇보다 급선무였고 일반서민이 잘 알도록 한글 비를 세우지 않았나 생각된다. 자연보호의 시금석(始金石)이고 「조심」을 고어(古語)인 「됴심」으로 기록한 것으로 보기 드문 한글 비이며 지방문화재 자료 제226호로 지정되어 있다.
제2관문
문경새재 아리랑
문경새재 물박달나무 홍두께 방맹이로 다 나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홍두께 방맹이 팔자 놓아 큰 애기 솔질에 놀아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문경새재 넘어갈제 구비야 구비야 눈물이 난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문경새재 덕무푸리 말히 쇠최로 다 나간다.
문경새재 박달나무 북바듸집으로 다 나간다.
횡백나무 북바듸집은 큰 아기 손목이 다 녹아진다.
아리랑 아리랑 아라리요. 아리랑 고개를 넘어 간다.
귀특집은 옛날 산악지대에 있었던 통나무로 지은 집이다
옛길: 이 길로 가면 장원급제를 한다는 전설의 길이다(상.하)
책바위
옛날 이 지방의 부자가 지성을 드러 아들을 얻었으나 몸이 허약하여 걱정을 하는데 어느날 문경의 유명한 도사가 일러주기를 "당신집을 둘러싼 돌담이 이 아이의 기운(氣運)를 누르고 있기 때문이며, 돌담을 허물어 문경 새재의 책바위 뒤에 쌓아 정성을 드리면 좋은 소식이 있을 것이라 했다. 그래서 이들이 삼년에 걸쳐 담을 헐어 돌을 이곳에 운반하여 쌓고 정성을 드렸드니 아이의 건강이 좋아지고 공부도 잘하여 뒤에 장원급제까지 했다는 것이다. 이후 이곳을 드나들던 과거객들이 "이 곳에서 소원을 빌면 장원급제하다"는 전설이 전해졌다고 한다. 지금도 건강과 급제를 원하는 소원을 비는 곳으로 많은 사람들이 찾고있다.. 아래는 소원을 빌고 간 사람이 남긴 많은 글중 한 예다.
내려오는 옛길: 장원급제하여 금의환향할 때 내려가는 길
제3관문(해발 650m에 위치)
과거 영남에서 한양으로 과거 보러가는 선비는 모두 새재의 관문을 이용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한양으로 가는 다른 2개 고개가 있으나 이화령은 빼가 떨어지듯 낙방하며, 죽령은 대나무에 마끄로지듯 낙방한다는 속설 때문이라는 이야기다.
흐르는 계곡의 물이 거울처럼 맑다.
KBS 드라마 촬영장으로 들어가는 다리
KBS 드라마 촬영장은 한국방송공사가 2000년 특별기획 대하드라마 제작을 위해 설치한 것으로 문경새재 제1관문 뒤 용사골에 위치해 있다. 그동안 ‘태조왕건’, ‘제국의 아침’, ‘무인시대’ 등을 촬영했다. 관광객에게 유료로 공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