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종 원자 융준 태실(哲宗元子 隆俊 胎室)
철종과 철인왕후 김씨 소생의 원자 융준의 태실
1859년 2월 25일에 강원도 원주부 주천면 복결산(伏結山) 아래 임좌병향(壬坐丙向)에 조성
2019년 문화재청 궁능유적본부에서 진행한
<서삼릉 내 묘역 및 태실 역사성 회복 연구 결과보고서>에서 철종의 원자 태실로 고증
금표비의 명문
咸豊九年二月日(함풍구년이월일) 1859년(철종 10) 2월
영월군 주천면 신일리 망산 안내도
영월군이 세운 안내표지판. '왕세자' 로 표기되어 있다.
왕자-원자 : 임금의 아들
왕세자 : 세자 책봉을 받으면 왕세자
▲ 서삼릉으로 옮겨진 철종 원자 태실, 전면에 철종왕자태실(哲宗王子胎室)이 새겨져 있다. 오마이뉴스ⓒ 김희태기자 사진
자료출처
오마이뉴스 [김희태 기자] [주장] 오류 투성이 안내문, 그대로 두면 안된다
기사입력 2021.01.14. 오전 11:56 최종수정 2021.01.14. 오후 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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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인왕후(哲仁王后)
조선후기 제25대 철종의 왕비
출생일1837년(헌종 3)~사망일1878년(고종 15)
본관은 안동(安東). 아버지는 영돈녕부사 김문근(金汶根)이며, 어머니는 이용수(李龍秀)의 딸이다.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주 01)의 근친으로 1851년(철종 2) 왕비에 책봉되어 어의동(於義洞) 본궁에서 가례를 올렸으며, 1858년 철종의 유일한 적장자인 원자 이융준을 낳았으나 이듬해에 원자가 갑자기 사망했다.1863년 명순(明純)의 존호를 받고 이듬해 고종이 즉위하자 왕대비가 되었으며, 1866년(고종 3) 휘성(徽聖)에 이어 정원(正元), 1873년에는 다시 수령(粹寧)의 존호를 받아 명순휘성정원수령대비가 되었다.1878년 창경궁 양화당(養和堂)에서 죽었다. 순조 때부터 이어온 안동김씨의 세도정치는 그가 왕비로 된 이후 절정에 달하였다.시호는 명순휘성정원수령경헌장목철인왕후(明純徽聖正元粹寧敬獻莊穆哲仁王后)이고, 능호는 예릉(睿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 서삼릉(西三陵)내에 있다.
주 01) 순원왕후(純元王后) : 순조의 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철인왕후(哲仁王后))]
철종(哲宗)
조선후기 제25대(재위:1849~1863) 왕.
출생일1831년(순조 31)~사망일1863년(철종 14)
본관은 전주(全州)이다. 이름은 이변(李昪)이다. 초명은 이원범(李元範)이다. 자는 도승(道升), 호는 대용재(大勇齋)이다. 정조의 아우 은언군(恩彦君)의 손자이다. 전계대원군 광(全溪大院君㼅)의 셋째 아들이며, 어머니는 용성부대부인(龍城府大夫人) 염씨(廉氏)이다.
당시 영조의 혈손으로는 헌종과 이원범 두 사람뿐이었다. 1849년 6월 6일 헌종이 후사가 없이 죽자 대왕대비 순원왕후(純元王后)주 01)의 명으로 왕위를 계승하였다. 이 때 나이 19세였다.학문과는 거리가 먼 농부로서, 1844년(헌종 10) 형 회평군 명(懷平君 明)의 옥사로 가족과 함께 강화도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런데 별안간 명을 받아 봉영의식(奉迎儀式)을 행한 뒤 6월 8일덕완군(德完君)에 봉해졌다. 이어 이튿날인 6월 9일 창덕궁 희정당(熙政堂)에서 관례(冠禮)를 행한 뒤 인정문(仁政門)에서 즉위하였다.나이가 어리고 농사짓다가 갑자기 왕이 되었으므로 처음에는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1851년(철종 2) 9월에는 대왕대비의 근친 김문근(金汶根)의 딸을 왕비(明純王后)로 맞았다. 그 뒤 김문근이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이 되어 왕비의 아버지로서 왕을 돕게 되니 순조 때부터 시작된 안동김씨의 세도정치가 또다시 계속된 셈이었다.철종은 1852년부터 친정하였다. 이듬 해 봄에는 관서지방의 기근대책으로 선혜청전(宣惠廳錢) 5만 냥과 사역원삼포세(詞譯院蔘包稅) 6만 냥을 진대(賑貸)하게 하였다. 또 그 해 여름에 한재가 심한데도 재곡이 없어 구활하지 못하는 실정을 안타까이 여겨 재용(財用)의 절약과 탐묵(貪墨)주 02)의 징벌을 엄명하였다.1856년 봄에는 화재를 입은 여주의 민가 약 1,000호에 은자(銀子)와 단목(丹木)을 내려 주어 구활하게 하였다. 또한 함흥의 화재민에게도 3,000냥을 지급하였다. 이 해 7월에는 영남의 수재지역에 내탕금 2,000냥, 단목 2,000근, 호초(胡椒) 200근을 내려주어 구제하는 등 빈민구호책을 적극 실시하였다.정치의 실권은 안동김씨의 일족이 좌우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삼정(三政: 田政·軍政·還穀)의 문란이 더욱 심해지고 탐관오리가 횡행하여 백성들의 생활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마침내 농민들은 1862년 봄 진주민란을 시발로 해 삼남지방을 중심으로 여러 곳에서 민란을 일으켰다.이에 철종은 삼정이정청(三政釐整廳)이라는 임시 특별기구를 설치해, 민란의 원인이 된 삼정의 폐해를 바로잡기 위한 정책을 세워 시행하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관료에게는 그 방책을 강구해 올리게 하는 등 민란 수습에 힘썼다. 그러나 뿌리 깊은 세도의 굴레에 얽매여 제대로 정치를 펴 나갈 수 없었다.이런 사회현상에서 최제우(崔濟愚)가 동학(東學)을 창도해 사상운동을 전개, 확산시키자 이를 탄압하였다. 교주 최제우는 “세상을 어지럽히고 백성을 속인다”는 죄를 씌워 처형하였다. 1863년 12월 8일 재위 14년 만에 33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수용(睟容)주 03) 4본이 천한전(天漢殿)에 봉안되었다.혈육으로는 궁인 범씨(范氏) 소생의 영혜옹주(永惠翁主)가 있어 금릉위(錦陵尉) 박영효(朴泳孝)에게 출가했을 뿐 후사가 없었다. 시호는 희륜정극수덕순성문현무성헌인영효(熙倫正極粹德純聖文顯武成獻仁英孝)이다. 묘호는 철종(哲宗)이다. 능호는 예릉(睿陵)으로, 경기도 고양시 원당읍 원당리에 있다.
주 01) 순원왕후(純元王后) : 純祖妃, 金祖淳의 딸
주 02) 탐묵(貪墨) : 욕심이 많고 비리를 저지름
주 03) 수용(睟容) : 임금의 畵像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철종(哲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