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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공(內工)’이라는 이 말은 흔히 쓰기도 듣기도 한다. ‘훈련과 경험을 통해 안으로 쌓인 실력과 그 기운’이라는 것인데, 이 나이에 훈련을 쌓기는 쉽지 않을 것 같고, 경험으로 쌓인 것이라면 조금 풀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해 본다. 하지만 숨 쉬는 것 말고는 내공을 쌓아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그것이 힘들겠다 싶다. 이 책의 저자 조용헌 선생의 말을 빌리면 내공은 4번쯤 죽어야 쌓이는 것이라고 하니까 말이다. 4번쯤 죽어야 쌓인다는 말이 의미심장한데, 그것은 감방, 부도, 이혼, 암을 말한다고 한다. 그것들을 겪는 시련을 맛봐야 내공의 ‘고단자’라고 할 수 있다고 하면서 그것은 피와 땀, 눈물을 바가지로 흘려야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내공 없어도 나는 혹은 우리는 남의 이야기를 들을 줄도 알고 또 그것을 옮길 줄도 안다. 내공을 쌓았다면 좋겠지만, 그렇지 않으니 내공이 깊고 깊은 저자의 말은 귀담아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경봉선사(鏡峰禪師, 1892∼1982)는 도인으로 알려져 있다. 빈부귀천을 막론하고 찾아오는 사람들을 만나 인생상담을 해 주었다. 그가 불지종가 통도사 극락암에 머물 때다. 1970년대 중반 연예계 대마초 사건이 터졌을 때 가수 조용필도 연루되어 연예 활동을 접어야 했다. 이럴 때, 갑자기 백수가 되었을 때, 사람들의 행보는 저마다 다르다. 술에 절어서 인생을 비관하는 사람, 새로운 도약을 위해 내공을 쌓는 사람, 그도 저도 아닌 사람들이 있기 마련이다. 조용필은 그래도 두 번째 속했던지 경봉스님을 한번 만나볼 요량으로 극락암에 와서는 마당을 왔다 갔다 하는데, 마침 스님이 마당에 나왔다가 그를 보았다. 이때 경봉 선사 나이가 80대 중반이었다.
“자네는 뭐 하는 사람인가?”
“노래 부르는 가수입니다.”
“그래, 꾀꼬리가 여기에 왔구나! 너는 꾀꼬리다. 꾀꼬리를 찾아봐라.”
“예, 한번 찾아보겠습니다.”
절간에서 아무리 찾아도 꾀꼬리를 찾지 못하자, 집으로 돌아와 스님이 한 말을 꼽씹으며 말뜻을 찾으려고 했다. 틀림없이 뭔가 있는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밥먹을 때도 똥 누면서도 생각했다. ‘도대체 꾀꼬리가 어디에 있다는 말인가?’몇 달 동안이나 화두를 풀기 위해 머리를 싸매고 고민하던 조용필이 노래를 만들었다. 그 노래가 〈못찾겠다 꾀꼬리〉다. 한 번은 화가 장욱진이 극락암에 왔다. 댓돌에 벗어놓은 신발을 보고 경봉선사가 ‘까치가 왔구나’하고 중얼거렸는데, 장욱진은 까치를 주로 그린 화가였다. 평생 그가 그린 유화 730점 중 60% 이상에서 까치가 등장한다. 경봉은 사람의 정체성을 꿰뚫어 보는 혜안도 있었다.
작년에 민주당 「혁신위원장」을 맡았다가 집중포화를 맞고 전국민에게 망신만 당하고 하차한 ‘김은경’이라는 여자가 있다. 6.25때 빨치산들이 산등이에는 올라가지 않고, 8부 능선쯤에서 활동하고, 조선 시대 명문가 집안에서는 정3품 이상 품계로는 올라가지 말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8부 능선에 오르면 아래서 실루엣으로 보이기 때문에 총알 세례를 받기 쉽고, 정3품 벼슬이 통정대부, 종2품이 가선대부로 관찰사니까 그보다 아래에 머물라는 말이다. 요즘으로 치면 차관보 정도다. 그보다 위로 올라가면 당쟁에 휘말려 멸문지화를 당하기 쉽고, 실제로 그렇게 된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그런 말이 생긴 것이다.
혁신위원장은 8부 능선을 넘는 자리다. 금감원 부원장 자리에 그대로 머물렀다면 그렇게 사생활과 가정사까지 다 까발려지지는 않았을 것이고, 전국민으로부터 ‘악녀’로 전락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정치는 생물’이라고 하지만, 어찌 보면 ‘누드게임’이다. 하나하나 옷을 벗길 때마다 대중은 환호한다. 모든 사람들은 누드에 두려움을 가진다. 거기에는 사생활도, 가정사도 없다. 심지어 중고등학교 때 품행까지 다 밝혀지고 만다. 그런데도 인간은 8부 능선을 넘으려고 한다. 밤낮없이 토벌대가 지켜보고 있는데도 말이다.
고독사 문제가 사회문제가 된 것이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사냥도 하지 않고, 빈둥대기만 하는 수사자는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면 홀로 무리에서 떨어져 고독사한다. 그러나 수사자가 젊었을 때는 하이에나 무리의 대장과 기린을 사냥할 때 용맹을 발휘하기도 해 용맹의 대명사다. 그러다가 외부에서 온 젊은 수사자의 도전에 패하면 혼자서 광야를 떠돌다 사냥을 못해 갈비뼈가 드러날 정도로 앙상해져서 고독사하는데 이렇게 고독사한 수사자는 하이에나가 깨끗이 청소해 준다. 세상에는 수사자 같은 인간이 많아졌다는 이야기다. 분명 인간은 수사자가 아닌데도 말이다.
삼국시대 승려 부설 거사는 인생의 철리(哲理)를 갈파한 〈사허부구계(四虛浮漚偈)〉라는 게송을 지어 불렀다. 혼자서 고독사 하는 이야기다.
*漚 담글구, 偈 게송게
처자 권속이 대나무숲처럼 무성하고(妻子眷屬森如竹)
금은보화가 산더미처럼 쌓였어도(金銀玉棉積似邱)
죽음에 이르러서는 외로운 혼이 되어 떠나간다.(臨終獨自孤魂逝)
생각할수록 허망한 물거품이로구나.(思量也是虛浮漚)
수백 조나 되는 돈을 가졌어도, 수백 명의 종업원을 부리는 오너라고 해도 죽을 때는 고혼서(孤魂逝)한다. ‘외로운 고혼이 되어 떠난다.’는 말이다. 이것은 우주의 철리다. 가난한 이나 부자나 똑같다. 고통과 후회 없이 죽는 것을 고종명(考終命)이라고 하는데, 근래 고종명한 이가 있다. 민관식(閔寬植, 1918∼2006년)전 문교부 장관으로 그는 테니스를 좋아해 오전에 한 게임하고 들어와서 샤워하고는 와인 한잔 마시고, 잠들었다가 그대로 영민했다. 향년 88세였다. 잘 죽기 위해서는 오늘 하루를 어떻게 살아야 할지 고민해 봐야한다.
작년(2023)에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한 사람 중에는 러시아 용병대장 ‘프리고진’이라고 있다. 그는 10대 후반부터 교도소를 들락거렸고, 핫도그 장사를 하다가 조금 커서는 식당을 했는데, 고향이 같았던 푸틴이 이 식당을 드나들면서 인연이 깊어졌고, 푸틴이 권력을 쥐면서 크렘린궁까지 같이 들어가 군대 급식을 담당하는 이권을 챙겨 떼돈을 벌었고 국제조폭, 즉 그림자 군대의 수장에까지 올라갔다. 그런데 팔자 사납게 그만 비행기 사고로 죽었다.
프리고진 죽음의 원인은 반란이었다. 반란을 일으켰으면 모스크바까지 진군해 결판을 내야지 왜 중간에서 멈췄을까? 아니면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프리고진 주변에는 브레인 다시 말해 책사가 없었다. 주변에는 주먹만 센 건달들 뿐이었다. 반란 같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을 치를 때 책사가 없으면 허둥대기 십상이다. - 물론 항우처럼 책사인 숙부 항량이 있었지만 책사의 말을 듣지 않은 고집불통도 있기는 하다 – 악수를 두기 쉽다는 말이다.
10.26때 궁정동의 안가에서 총을 쏘고 난 뒤에 ‘육본으로 갈까요?’‘정보부로 갈까요?’하고 묻는 운전기사에게 김재규는 육본으로 가자고 했다. 이는 즉흥적 결정이었다. 거사가 성공하려면 정보사로 갔어야 했다. 김재규에게도 책사가 없었다. 명나라를 건국한 주원장은 책사는커녕 밑바닥 건달 출신이다. 10대 중반 역질로 부모 형제를 모두 잃고, 부잣집에 들어가 머슴살이를 했다. 주인집에서 소 풀이나 뜯는 게 그의 일이었다. 어느 날 친구들이 ‘소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자, 주인집 소를 잡아서 친구들과 나눠 먹는 배포와 도량은 있었다. 같이 소 잡아먹은 친구들이 그 뒤로 주원장을 따랐다. 이후 주원장은 탁발하고 떠돌이 중이 되었다. 글자도 모르는 무식쟁이였지만, 그는 이선장(李善長)같은 책사를 만나서 여러 군벌을 제치고 명나라를 건국하는 데 성공했다. 좋은 책사나 기회는 아마 전생의 인연이 있어야 만나는지도 모른다.
‘오타니 쇼헤이’통역사가 230억 인가 꿀꺽했다고 뉴스가 있기 전에는 그가 10년 연봉 7억 달러(우리 돈 1조 가까운 액수)를 받고 LA다저스로 간다는 뉴스가 화제였다. ‘야구천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은 그는 타고난 야구선수이다. 그에게는 나름의 성장배경이 있다. 고교시절에 작성했다는 ‘만다라트’가 회자 되는 이유다. 그림에 운(運)을 표시해 놓은 부분이 그것이다. 운을 좋게 하기 위해서는 8가지를 실천해야 한다고 한 것이다. 저자도 말하듯이 인생에서 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려면 적어도 40살은 되어야 하는데 오타니는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이런 생각을 했다.
오타니는 운을 받으려면 ‘쓰레기 줍기’를 실천해야 한다고 했는데, 그것은 ‘다른 사람이 흘린 행운을 줍는다.’고 생각했다는 의미이고, ‘인사하기, 심판을 대하는 태도’이런 항목도 있어서 자신에게 불리한 판정을 내리는 심판이라도 불만하는 언행을 하지 말자는 다짐도 했다. ‘물건을 소중히 쓰자.’거나 ‘책 읽기’도 있었는데, 이런 것들 모두가 팔자 바꾸는 오타니만의 만다라트였던 것이다. ‘만다라트’는 ‘만다라’와 ‘아트’의 합성어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전방위적인 계획표를 가리킨다. 우주 세계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만든 도상(圖上)이 티베트의 만다라이고 아트는 예술, 기술이라는 뜻이다.
19세기는 ‘생각하는 사람’의 시대, 20세기는 ‘망치질하는 사람’의 시대, 21세기는 ‘인사하는 사람’의 시대라고 하는 말이 있다. 유영호라는 조각가가 있는데, 그는 전남 완도에서 고속버스를 타고 부산으로 가던 중 섬진강 다리를 건너면서 평소 외우고 있던 《임제록》한 구절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때 어느 순간 자신을 부르는 스승의 천둥 같은 목소리에 그만 까무러쳐 2시간 동안 버스 안에서 졸도했다.(졸았는지 모르지만…) 이 체험이 그에게 ‘인사하는 사람(Greeting Man)’을 만들었다. 남자가 서서 공손하게 인사하는 조각, 로뎅의 생각하는 사람, 브롭스키의 망치질하는 사람을 이을, 상대에 대한 배려의 마음을 표현한 ‘인사하는 사람’ 이 조각상은 기장의 롯데몰 입구에도 있지만, 2007년 처음 경기도 파주에 설치되고, 2019년 8월에는 브라질 상파울루에 6m 크기로 설치되어 사람들을 반갑게 맞고 있다.
전국 가는 곳마다 ‘송덕비’가 있다. 그런데 그 비가 그곳 주민들에 의해 세워졌다면 문제가 없겠지만, 떠나면서 자신의 공덕을 기려달라고 해서 세운 것도 많다는 것이 문제다. 철거되어야 할지 모르겠다. 요즘은 지자체에서 이것들을 한곳에다 모아두고 있어서 일일이 찾아다닐 필요는 없다. 합천군 가회면장을 지낸 허임상(許壬相, 1912∼1958년)이라는 분의 공덕은 가히 기릴 만하다. 일제시대인 1933년 일본 도굴꾼들이 황매산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을 훔쳐 가는 것을 돌려받아 지금도 그 자리에 서 있다. 석등은 신라 시대 것으로 보물로 지정된 것 중 하나다(법주사 쌍사자 석등, 증기사지 쌍사자 석등-광주박물관, 이곳 영암사지 쌍사자 석등은 대연동 부산박물관 뜰에도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장대 주막에서 석등을 끌고 가는 일본인을 보았다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허임상은 장정 몇 명을 데리고 추격해 쌍사자 석등을 되찾아 왔다. 그의 나이 21세 때였다.
그가 가회면장일 때 6.25가 터졌다. 이때 보도연맹 관련자 200여 명이 처형될 위기에 놓였다. 경찰 책임자가 가회국민학교 운동장에 이들을 집합시킨 다음 골짜기로 끌고 가 총살시킬 예정이었다. ‘골(谷)로 간다’는 말이 그래서 생긴 것인지 ‘골병든다’는 말에서 유래했다는 말도 있어 잘은 모르겠지만 아무튼 허임상은 지서장 조정수와 함께 ‘이 사람들을 죽이면 안 된다.’고 길을 막고 통사정을 했다. 허임상은 ‘나를 먼저 쏜 다음에 이 사람들을 죽여라.’고 하면서 자기 가슴을 내밀었다. 유지이자 면장이 이렇게 나오자 서울서 내려온 경찰 책임자도 어쩔 수 없이 물러났다고 한다. 내가 의령경찰서 궁유지서에서 근무할 때도 그런 사람이 있었는데 이제 그분의 이름도 가물가물하다.
♤ 공간이 정신을 바꾼다.
처음 듣기도 하지만, 제목이 만만치 않다. “한 세상 사는 일은 시간, 공간, 인간 3間을 통과하는 일이다. 이 3간 중에서 시간과 인간은 바꾸기 어렵다. 다만 공간은 내가 선택할 수 있다. 공간이 바뀌면 시간의 흐름이 달라지고 생각이 바뀐다.”위 제목을 설명한 말이다.
고운 최치원 선생은 좌절한 지식인으로 세상과 연을 끊고 완전히 숨어버렸다. 마지막에 숨은 곳이 가야산 홍류동이라고 알려져 있는데, 가을에 단풍이 그냥 피는 것이 아니라 ‘흐른다’는 곳이 바로 홍류동 계곡이다. 그는 전국 여러 곳을 떠돌다가 여기 홍류동에 들어서 ‘일입청산갱불환(一入靑山更不還)’이라는 시구를 남기고 사려졌다. ‘이번에 청산에 들어가면 다시 세상에 나오지 않겠다.’는 다짐이다. 홍류동 계곡 중간쯤에 그가 세상을 피해 숨었던 곳으로 알려진 농산정(籠山亭)이 있다. 그 후에 지었겠지만, 정자 앞에 커다란 화강암 바위가 용의 이빨처럼 박혀 있다. 이빨 사이로 흐르는 물소리는 옆 사람 목소리도 알아듣지 못할 만큼 웅장하다. 물소리가 인간의 번뇌를 씻어준다는 것은 농산정에 와보면 알게 된다. 농산정 앞에는 「고운최선생둔세지(孤雲崔先生遁世地)」라고 새겨진 비석이 하나 있다. 이 비석의 마지막 시구다.
常恐是非聲到耳(상공시비성도이)
故敎流水盡籠山(고교류수진농산)
‘행여나 세상 시비 귀에 들릴까
흐르는 물 시켜 산을 감쌌네’
시비(是非)거는 소리가 귀에 안 들리는 그런 세상이나 시대는 없겠지만, 물소리로 이를 씻어 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홍류동 계곡 농산정에서 듣는 계곡물 소리에 귀를 닫아도 좋을 것이다. 언제 다시 가봐야 할텐데 ….
‘요산요수’라고 하여 흐르는 물이 좋다는 것은 누구나 다 안다. 평창 오대산 월정사 앞으로 흐르는 물은 명수라 할만하다. 오대산 서대 수정암 우통수, 동대 관음암 청계수, 남대 지장암 총명수, 북대 미륵암 감로수, 중대 사자암 옥계수, 적멸보궁의 용안수(龍眼水), 이 모두가 1급 샘물이다. 샘물이 흘러 월정사 앞 금강연(金剛淵)에서 만난다. 암반수인 금강연에서 용출하는 물과 샘물이 합수해 한강으로 흘러가면 우통수가 된다. 우통수(于筒水)는 물맛이 좋고 무겁다. 물이 무겁다는 것은 미네랄이 많이 함유되어 있다는 것이다. 우통수 시원은 신라의 두 왕자 보천과 효명 때까지 거슬러 오른다. 둘은 오대산에서 수도하며 매일 우통수를 길러 오만보살(五萬菩薩)에게 차를 공양했다고 한다. 그 공덕으로 효명은 신라의 르네상스를 이끈 33대 성덕왕이 되어 성덕대왕 신종을 만들었고, 보천은 도를 깨친 도인이 되었다고 한다.
오대산 월정사는 오대천 물이 둥근 달처럼 감아 돌아 흐르는 수세다. 월정사 사방에는 산봉우리들이 감싸고 있고 월정사 앞에는 둥근 만월수(滿月水)가 흐르니 천하 명당이 아닐 수 없다. 흐르는 물소리는 가히 번뇌를 잊게 한다. 머리 속에서 타는 불은 물로서 꺼야 한다. 특히 우중월정(雨中月精)이라고 하여 비 올 때 월정사가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경북 고령의 지산동 고분에 다시 간다면, 여기서 무엇을 보아야 할까? 왜 이런 산꼭대기에 무덤을 썼을까? 여기가 명당일까? 그런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다. 도선국사에 의한 풍수지리가 시작되기 전인 5∼6세기에 조성된 이런 무덤이 200여 기나 된다. 지름 10m 이상 대형 무덤들이 산 등성이 위에 모여 있다. 무덤이 있는 산을 이산(耳山)이라고 하는데, 산의 중앙 자락이 아닌 곁가지 자락에 자리 잡은 73호분을 보면 분명히 명당자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안산, 청룡, 백호도 모두 좋다. 풍수를 몰랐어도 땅의 서기를 보고 터를 잡은 것이다.
귀 이(耳)자를 쓴 이산은 성터 모양이 귀처럼 생겨서 붙인 이름이라고 하기도 하나, 이 책의 저자 조용헌 선생은 할아버지 산에 해당하는 합천 가야산으로 인해 이산이라고 한 것이라고 하였다. 가야산은 대가야의 시조모 정견묘주(正見妙主)를 모신 산이다. 불교 이전에 대가야의 시조모를 제사 지낸 곳이 가야산인 것이다. 신령스럽게 지켜주는 할머니가 바로 정견모주다. 고대 제사장은 대개 여자였다. 이산은 가야산이 잘 보이는 자리에 지맥으로 연결되어 있다. 가야산 정견모주가 보내는 신령스런 계시를 들을 수 있다고 하여 耳山이라 한 것이 아닐까 한다는 것이다. 일본의 시조신들이 살던 곳이 고원천(高天原)인데, 고대언어학자 마부치 가즈오 교수는 그 고천원이 대가야, 즉 고령이라고 했다.
앞에서 허임상의 공덕과 공덕비를 보았지만, 전국의 가는 곳마다 있는 이 ‘공덕비와 송덕비’가 안동 일대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고 한다. 그것은 박기후인(薄己厚人)이 체질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자기에게 엄격하고 타인에게 관대한 태도’가 이곳 선비들 집안의 가풍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내로남불’의 반대되는 말이 박기후인이고 내로남불은 수신이 안 된 소인배의 전형이다. 내로남불은 국회에서도 자주 쓰던데 ‘나쁜놈’이라고 욕하는 것 못지않다. 선비라면 남의 단점을 지적하지 않고, 덕담을 많이 나눠주는 덕망 있는 사람이어야 한다.
♤ 시간이 중요하다
‘공간이 정신을 바꾼다.’고 하면, 시간은 무엇을 바꿀 수 있을 것인가? 시간에는 우주시, 역사시, 인생시가 있다. 우주시와 역사시는 인생시와는 다르다. 중국의 역사를 보면 수많은 반란과 전쟁으로 점철돼 있다. 난세에 자기를 드러내는 것은 아주 순진한 행동이다. ‘날 잡아 잡슈’하는 것과 같다. 중국의 지도자들은 ‘후흑(厚黑)’을 덕목으로 삼는다. 낯가죽이 두껍고 시커메야 훌륭한 지도자라고 본 것이다. 어둠의 정치적 메카니즘이면 ‘후흑’이 되지만, 개인적인 수양 측면에서 보면 그것은‘겸손’이다. 겸손은 자기를 잘 드러내지 않는다. 주자의 호가 회암(晦庵), 이언적의 호는 회재(晦齋)다. 회는 ‘겸손하라’는 의미다. 주역에 용회이명(用晦而明)이라는 유명한 대목이 있다. 지도자(임금)는 ‘어둠을 써서 정사를 밝힌다.’는 뜻이다. ‘밖으로 밝음을 드러내면 교묘하게 피하게 된다.’는 것인데, 등소평의 외교정책이 도광양회(韜光養晦-빛을 감추고 어둠을 키워야 한다)고 한 것이나, 지금의 시진핑도 용회(用晦)라는 철학 용어를 쓰고 있던데, 이는 역사를 간과하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150년 전의 아편전쟁이 서론이었다면, 지금의 미·중 갈등은 본론에 해당한다. 한반도는 그 전쟁의 한복판에 있다.
‘메멘토 모리(Memento mori)’는 ‘죽음을 기억하라’는 말이다. 비싼 인삼·녹용 먹으면서 보양한 육신도, 돈 주고 피부마시지 받느라 애썼던 얼굴도, 그 육신을 유지하기 위해 노심초사했던 짓들과 좌파니, 우파니 가르며 그렇게 성질내고 핏대 올리던 그것들이 썩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은 허무라고 할 수 있다. 지켜보기는커녕 생각만 해도 무섭다. 이렇게 육신이 썩어가는 것을 바라보는 수행법이 있다. ‘백골관(白骨觀)’이다. 백골관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수행법이 아니다. 그렇지만 수행자는 경전공부만 해 가지고는 한계가 있으므로 육신이 썩어가는 과정을 눈으로 보고 코로 냄새를 맡아가며 확실히 육신의 무상함을 알게 된다.
인도에서는 시체를 장작불로 태우는 화장도 하지만, 화장하지 않고 그냥 숲속에 버리는 장례법도 있다. 장작값이 비싸기도 하고 시체를 그냥 숲속에 던져 놓으면 동물들이 뜯어 먹어 자연스레 지수화풍(地水火風)이 되기 때문이다. 조르아스트교를 믿는 이란인들 중에는 ‘조장(鳥葬)’이라는 화장법을 쓴다. 산 위에 시체를 옮겨다 놓고 칼로 토막 내어서 독수리 밥으로 주는 장례법이다. 일종의 ‘백골관’이지만, 그것을 보고 온 외과의사도 몇 날 며칠 동안 밥도 제대로 못 먹고 정신이 멍해졌다고 한다. 코로나19가 주는 교훈은 죽음에 대한 명상이고, 인생의 유한함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달보다 해가 인간에게 더 많은 혜택을 주는지는 알 수 없지만, 달도 나름대로 역할이 많고 중요하다. 1년을 시작하는 새해는 4가지가 있는데, 동지와 양력설, 음력설과 춘분이 그것이다. 고창에는 고인돌이 1700여기 있는데, 오래된 것은 6000년 전까지 올라간다. 고인돌은 동지, 하지, 춘분, 추분에 맞춰 세워졌다는 연구가 있다. 해가 뜰 때 그 해를 고인돌 다리에 정확히 맞춰놓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원시시대 카렌다였던 것이다. 양력설은 태양이 기준이지만, 음력설은 달이 기준이다. 해는 일정하지만 달은 항상 변한다. 초승달에서 보름달까지 매일 변한다. 달에서 재생의 신화가 유래했고, 생체적 리듬도 달에게서 미친다고 보았다. 오장육부(五臟六腑)라는 한자에도 달이 들어가 있다.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는 선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문텐도 있다. 해운대에는 ‘문텐로드’가 있는데, 이 달맞이 길에서 보름달을 보고 연인과 거닐면 제격이다.
「나무 관세음보살」이라고 읊듯이 자비의 音으로 나타나는 목소리는 얼굴을 보는 것만큼 정확한 공명을 준다. 내공이 쌓이고 전진하면 목소리가 맑아지고, 탁음이 사라져 저음으로 바뀐다. 술, 담배를 많이 하고 불규칙한 생활은 목소리를 탁하게 한다. 목소리에 기름기가 빠진다는 말이다. 관상학에서 박정희 전 대통령은 태(金)음, 김영삼은 중(木)음, 노무현은 임(火)음 이라고 한다. 카랑카랑한 종소리가 나는 태음이었던 박 대통령은 목소리 하나로 대통령이 되었다는 말이 있다. 중음은 인정이 느껴지는 목소리고, 화음는 격발하는 기운을 담은 목소리라고 한다. 안철수는 베이비토크에 가까운 목소리로 이를 남(水)이라고 하는데, 갑자기 정치판에 뛰어들어 엎어지고, 뒤퉁수 얻어맞고, 코피 터지고 하는 풍파를 겪으면서 목소리가 점차 아래로 내려왔다고 한다. 그만큼 내공이 쌓였다는 것이다. 목소리는 멘탈에 빠지기도 하는데, 마음이 바뀌면 얼굴빛이 달라지듯이 목소리도 달라진다.
내가 어릴 때만 해도 무속 행위가 흔했다. 우리 집에서도 굿을 했는데, 겁도 나고 신기하기도 했다. 무속은 원시종교로 역사가 아주 길다. 아마도 불교나 기독교와는 쨉이 안된다. 무속의 기능은 3가지다. 예언과 치유, 안심 기능인 평화다. 이것은 제도권 종교와 겹친다. 안심기능에서 지금은 무속한테 가지 않고 ‘심리상담소’를 찾지만, 그래도 한국 사람 일부는 무속이라야 속이 시원해진다고 여긴다. 치유, 치병의 사례는 러시아 라스푸틴(1869∼1915년)이라는 수도승이 황제의 아들인 알렉세이의 난치병을 낳게 해 주고 황실의 전폭적 지지를 받았다. 이는 오늘날 종합병원에서나 가능한 일이다. 예언의 기능은 AI가 아무리 똑똑하다 해도 인간의 운명까지 예측하지는 못한다는데서 찾는다. AI 천적이 무당이다. 시장의 수요가 있는 한 공급은 있기 마련이다. ‘미친년 널뛰기 팔자’라고 여기는 사업가, 정치인, 옛수(옛날 향수)에 젖은 사람들,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귀머거리들이 수요자다. 점쟁이나 무속인의 승률은 높다고는 할 수는 없다. 유능한 주식전문가는 증권시장에서 가려지는 것처럼, 용한 점쟁이 역시 시장에서 가려진다.
이세돌을 이긴 AI 챗봇이 인간의 운명, 즉 사주팔자까지 알고 있을까 하는 궁금증이 생긴다. 사람이 글을 쓴다는 것은 지적 작용의 총화지만, 이것은 AI가 대신할 수 있다. 따라서 우리는 새로운 우주에 진입한 느낌이다. 주식시세보다 더 예측하기 어려운 것이 인간 팔자다. 변수가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AI 두뇌 세포가 1750억 개라고 하는데, 앞으로 100조 개쯤으로 용량이 늘어나면 가능할지 모른다. 태어난 생년월시를 육갑으로 조합하면 대략 60만 개의 경우가 나온다고 한다.
성격유형 검사인 MBTI의 유형은 겨우 16개인데, 육갑에 나오는 유형이 60만 개라니 이것 또한 쨉이 안 되기는 마찬가지다. 그런데 문제는 있다. 사람 팔자를 예측하는 데는 꼭 필요한 신기(神氣)라는 것이 있다. 신기는 신의 영역으로부터 공급받는 어떤 기운을 말한다. 팔자를 예측하는데, 데이터만으로 안 되고 신기까지 풀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몇 년 전에 홍수로 둑이 터지고, 넘치고 해서 여러 사람이 죽었던 적이 있다. 처방은 ‘소 잃고 외양간 고치기’로 둑을 강화해 쌓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둑을 쌓으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도교에서 신의 주문을 외고 신기까지 충만한 K도사라는 분은 ‘사막으로 가라’는 처방을 내렸다. 아무리 홍수가 나도 사막으로 가면 물이 모래에 흡수된다는 것이었다. 같은 데이터를 보고도 ‘제방’이 아니라 ‘사막’으로 처방내린 건은 신기의 영역이라고 할 수 있다. 신기의 영역을 AI가 커버할 수 있을지 지켜볼 일이다.
“내 주변에 보면 금수저로 태어난 친구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부모가 사업가거나 경찰서장이나 구청장을 둔 친구들 말이다. 하지만 그런 친구들이 똑똑하고 행복한 것은 아닐지 모른다. 그들은 인간의 성숙에 필요한 피, 땀, 눈물을 흘려보지 않아서 나중에는 인생을 어렵게 살지도 모른다.
아이비리그를 졸업하고, MIT(둘 다 미국의 명문대학교)를 졸업했다고 리더십과 지혜가 그저 생기는 것이 아니다.
부잣집에 태어나면 도 닦기가 어렵다. 세상에 큰 가르침을 준 성인들은 조실부모하거나 어려움 속에서도 꿈을 키운 경우가 많다. 완전 제로베이스(zero base)에서 출발하고 철저히 자기 눈으로 세상을 보는 안목을 키웠기 때문이다. 마굿간에서 태어난 예수도, 무당의 아들로 태어난 공자도, 심지어 인도에서 시성으로 불리는 카비르는 창녀의 아들이었다.
사람은 부모의 영향을 받는다. 금수저일수록 영향을 더 크게 받는다. 하지만 통제받으면 관점이 독립하지 못한다. 재벌 2세 중에 다른 사람을 의심하는 자가 많다. 의심이 많으면 병에 걸리기 쉽다. 금수저라고 너무 부러워하지는 말아라.”- 5.17 할아버지가
지금 의료정책으로 인하여 빚어지는 의정갈등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지 않는 국민이 없는 것 같다. 조선시대 도사들은 ‘삼재불입지지’를 찾아 전국을 헤매다녔다. 삼재가 없는 안전한 지대라고 생각한 곳이 그곳이다. 그 삼재는 도사들만 찾는 것이 아니다. 요즘은 절에서도 흔하게 삼재를 만난다. 전쟁, 흉년, 전염병이 삼재인데, 아마 코로나19로 인해 전염병이 크게 걱정되기는 되는 모양이다. 《조선왕조실록》영조 26년 1월에 보면 전염병 사망자 수가 나온다. 한 달 동안에 호서는 5089명, 경기는 2192명, 호남은 1650명, 관동은 1531명 등으로 기록되어 있고, 다음 달인 2월에 ‘경기도 3487명, 강원 349명, 영남 1993명, 해서 464명’으로 기록하고, 3월에도 역병이 크게 번져 전국에서 사망자가 10만 명에 이른다고 하였다. 이렇게 7월까지 계속되자 임금과 대신들이 전쟁보다 심각한 상황이라고 여겼다는 말도 나온다. 이 시기에는 대략 20∼3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보이는데, 전체 인구 700만 중의 4%가 넘는다. 그러나 조정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여제(厲祭)를 지내는 것뿐이었다. 전염병으로 죽은 사람의 영혼인 여귀에게 제사 지내는 것을 말한다.
조선후기 〈증산도〉를 일으킨 강증산은 모악산 아래에서 ‘앞으로도 병겁(病劫)이 크게 유행할 것이며 세상의 모든 의술이 무용지물이 된다.’면서 자다가도 죽고 먹다가도 죽고 오가는 중에도 죽어서 시신을 묶어낼 사람이 없다고 하기도 했다. 그는 병겁시대에 대한 대비로 의통(醫統)이란 신통력을 갖춰야 한다고 했다. 그것이 요즘 한국 의술인지는 모르겠지만, 공부 잘하는 인재는 모두 의대로 진학하는 편중 현상을 낳았다. 엘리트가 몰린 탓에 한국 의료진은 이제 세계적 수준이 되었다. 거기다 의료보험도 세계적인 수준이다. 2020년에는 의료시스템이 ‘코로나19’와 정면 승부를 벌이기도 했다. 그것은 분명 ‘의통’이다. 하지만 지금의 의정갈등은 비대할 대로 비대해지고 독선에 빠진 의료계를 똑바로 세우는 ‘진통’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명말청초에 살았던 포송령(蒲松齡, 1640∼1715)이라고 있다. 《요재지이(聊齋志異)》라는 기담집을 남겼는데, 요재가 기록한 기이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요재는 포송령의 서재 이름이자 그의 아호다. 책에서 포송령은 상상하고 꿈꾸는 일 자체가 고단한 현실을 견디게 하는 힘이 되었다고 했다. 나중에라도 한번 읽어봐야겠다. 포송령은 과거에 낙방하고는 낭인생활을 했는데, 한국에서도 시험에 낙방하면 상실감이 크듯이 이때 한다는 짓이 남의 집 사랑방이나 드나들면서 밥 얻어먹고, 부잣집 가정교사나 하면서 살아가기 마련이다.
‘낙방인생’포송령을 위로한 것이 기이한 이야기들을 주워듣고 책으로 쓰는 것이었다. 그는 주로 귀신이야기를 들으며 상실감을 달랬다고 한다. 《요재지이》서문에서 그는 “나의 흥취는 갈수록 용솟음쳐 누군가 나를 두고 미쳤다고 말해도 굳이 변명하지 않게 되었다. 마음 기댈 곳을 찾는데 남들에게 어리석다 일컬어진들 무슨 거리낌이 있었으리오…,진정 나를 알아줄 이는 꿈속에서나 만날 수 있는 귀신들뿐이련가!”
그는 귀신이야기를 들으려고 대문 앞에 다과상을 차려놓고 지나가는 과객을 대접했다고 한다. 장국영, 왕조현 주연의 「천녀유혼」은 포송령이 주워들은 이야기로 만든 영화다. 과거에 떨어졌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유홍준 선생의 답사기를 읽으면 꼭 거기를 한번 가보고 싶다는 충동을 느낀다. 또 한비야의 방랑기를 읽어도 그가 간 길을 따라 가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그것이 내 젊었을 때의 삶?이었는지 모르겠다. 오죽했으면 당일치기로는 이제 갈 때가 별로 없다는 생각도 했을까. 문화재청장으로 북경에 갔을 때, 인민위원장 초대 만찬에 참석한 유청장은 ‘북경시중국(北京是中國)’이라고 방명록에 덕담을 썼다고 하는데, ‘북경에서 중국을 읊다.’인민위원장이 얼마나 뿌듯해했을까 생각된다. 서안에 갔을 때는 ‘서안재중국(西安在中國)’남경에서는 ‘남경흥중국흥(南京興中國興)’을 남겼고, 수행원들에게는 ‘상해요중국요(上海擾中國擾), 상해가 근심하면 중국이 근심한다.’, ‘부지제남부지중국(不知齊南不知中國), 제남을 모르면 중국을 모른다.’고 써 주었다고도 한다. 한자를 잘 모르는 내가 봐도 얼마나 상대가 고마워했을지 눈에 선하다.
중국 사람들이 좋아하는 ‘동파육’은 돼지고기 요리다. 대신 소고기는 맛이 별로다. 한국은 돼지(삽겹살)도 좋아하지만, 소고기 요리도 맛난다. 소갈비는 영원한 명절선물이다. 조선시대는 소를 함부로 잡을 수 없었다. 소나무를 함부로 베지 못하게 한 송금(松禁)정책과 함께 우금(牛禁)정책을 시행했기 때문이다. 다만 소를 도살할 수 있게 허락한 곳은 성균관 한곳 뿐이었다. 인재를 양성하는 국가기관에 도살권을 준 데는 이유가 있었다. 성균관 유생의 정원은 200명으로 이들이 1년 동안 먹는 비용을 쌀로 환산하면 대략 960석 정도였다. 이 비용을 대는 부서가 양현고(養賢庫)였는데, 여기에 1000결(300만평)의 학전(學田)을 주었다. 그러나 그것으로는 부족했다. 모자라는 비용은 성균관 소속 전복(典僕-노비)들이 대야했다.
원래 이들은 문묘에 제사 지낼 때 필요한 제물을 공급하기 위해 푸줏간인 도사(屠肆)를 운용하고 있었다. 국가 제사에 쓰고 남은 고기를 민간에 팔아 수입을 챙겼고 나중에는 성균관 재원을 맡았는데, 그러다 보니 소의 도살권을 독점할 수 있어서 알짜배기 수입을 올릴 수 있었던 것이다. 이들은 동소문 근처에 거주하였고, 이들이 운영한 정육점이 서울에서만 40군데가 있었다고 하는데, 그 수입으로 성균관 유지비를 대고 먹고살았다. 쇠고기는 인재 양성의 장학금이었던 셈이다.
동이족(東夷族)이라고 하면 ‘동쪽의 활을 잘 쏘는 민족’이란 뜻이다. 그래서 세계양궁대회에서 금메달을 잘 따는지 모르지만, 옛날부터 활을 잘 쏘았다. 주몽도, 이성계도 활의 명수로 기록되어 있다. 이성계가 황산대첩을 승리로 이끈 데는 활로 왜적의 소년장수 ‘아지발도’를 잡으면서였다. 《삼국사기》에 ‘궁술로 인물을 선발했다.’고 하였는데, 무인을 뽑는 시험에도 창이나 칼이 아닌 활로 시험을 봤다. 이순신은 다친 다리로 시험을 치러 합격했다고 한다. 활은 창이나 칼보다 만들기 쉽지 않다. 황소뿔과 소 힘줄을 많이 필요로 한다. 그것이 사거리와 탄력을 좌우한다. 민어의 부레로 만든 어교(魚膠)로 참나무와 산뽕나무에 뿔과 힘줄을 붙여서 활을 만든다. 조선의 명궁은 황소가 중요한 재료였다.
김해에서 700리를 거슬러 올라가면 예천에 삼강나루가 있고, 나루에서 읍내로 가는 길목에 우두원(牛頭院)이라고 있다. 영남 일대에서 올라온 소장수들이 묵는 여관이 있던 곳이다. 우두원이 있던 예천이 국궁으로 유명해진 것은 우연이 아니다. 한우는 고기로는 말할 것도 없고 가죽은 북, 피는 선지국, 다리는 우족탕으로 먹고 버릴 것이 하나 없다. 조선 명궁은 한우에서 나왔다.
음양오행에서 물을 숫자로 나타내면 ‘1’이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탈레스도 ‘만물은 물에서 왔다.’고 하였으며, 노자도 ‘최고의 선은 물이다.’라는 말로 ‘상선약수(上善若水)’를 말했다. 12지지 가운데 물을 상징하는 子도 또한 1이다. ‘壬子만났다’고 할 때 첫 번째로 만났다는 의미이고, 제일 센 상대를 만났다는 것을 말한다. 딱딱하기만 한 法도 물이, 活에도 물이 들어 있듯이 물에서 활력이 생기기 때문이다. 겸손히도 낮은 곳으로 흘러가면서 생명을 살리니 그것은 덕을 쌓는 것이고, 다시 수증기로 화하여 승천하니 물이야말로 최고로 영광된 것이다.
풍수가들은 물을 인체의 피로 여긴다고 한다. 인간과 자연이 서로 연결되어 같이 돌아간다는 믿음이다. 물이 오염되면 우리 몸의 피가 오염되는 것이고, 피가 오염되면 건강과 생각이 오염된다. 그래서 명당 주변에는 맑은 물이 흐르는 곳을 최고로 친다. 꼭 정수기에서 나오는, 맑다고 생각하는 물만 마시고자 하는 이유도 그것 때문인지 모른다.
누구나 출세하고 싶어 한다. ‘억울하면 출세하라.’는 이런 말 들는 것은 진짜로 억울한 사람에게는 가슴에 못 박는 것이다. 세상에 출세하고 싶지 않은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출세를 성공으로 받아들이지만, 출세의 의미는 불교에서의 ‘출세간(出世間)’이 어원으로 세속을 떠나서 머리 깎고 승려가 된다는 것이다. 번뇌를 벗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것이 출세다. 出자에는 ‘뫼산’자가 겹쳐 있다. 산 위나 산속으로 들어간다는 의미를 담았다. 불교에서 말하는 출세의 개념이 유교와 겹치면서 의미가 바뀐 것이다.
유교의 가치 가운데 하나가 ‘입신양명(立身揚名)’인데, 이것은 몸을 바로 세워 세상에 이름을 날리는 것을 말한다. 이것이 출세를 의미하는 것으로 변한 것이다. 세상 안에서 이루는 입신양명은 입세(入世)지 출세가 아니다. 그런데 왜 입세라고 하지 않고 출세라 하는가? 그것은 고려시대 이전에 불교가 준 영향 때문으로 우리 사회 전반에 각인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과거 시험에 합격해 벼슬을 하는 것, 현대에 와서는 국회의원이 되고, 고시를 패스해서 판검사가 되는 것을 출세로 여긴다. 진짜 출세는 산으로 들어가는 것인데도 말이다.
끝으로 왕버들에 대해 본다.
‘왕버들’하면 의성 ‘성밖숲’과 청송 ‘주산지’왕버들이 생각난다. 잎이 무성할 때는 장쾌함이 느껴지고, 넓은 그늘을 주는 것에서 성밖숲이 그립고, 나무는 보통 물속에서는 자라지 않거나 섞지만, 300년 이상 물속에서도 자라는 주산지 버들을 보면서는 경이가 느껴진다. 또 고향 선산에 갈 때마다 ‘대봉마을’입구에 있는 왕버들 그늘도 앉아 쉬기에 딱 좋고 기이하리만치 아름다운 나무가 아닐 수 없다. 이들 왕버들은 신목(神木)의 아우라를 풍긴다.
불교에서는 ‘양류관음(楊柳觀音)’이라고 있는데, 관음보살이 한 손에 버드나무 가지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이 버드나무가 중생의 병을 치료해주는 약을 상징한다. 버드나무가 약이 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고대부터 어떤 약 성분이 있었음을 알게 하는 대목이다. 통증치료제로 쓰였다는 것에서는 이순신이 무과 시험에서 다리를 다치자 버드나무 껍질로 상처를 동여매고 시험을 치뤘다고 하는 기록, 이빨을 닦을 때 버드나무 가지를 사용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은 버드나무를 경멸했다. 노류장화(路柳墻花)로 보았던 것이다. ‘길가의 버드나무와 담벼락의 꽃은 누구나 쉽게 손으로 꺽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버드나무는 가지를 꺾어서 아무 데나 꽂아 놓으면 자란다. 이를 지조 없는 나무로 보았으며, 버드나무는 물을 가까이하는 속성이 있는데, 여기서 물은 돈과 벼슬을 상징하므로 항상 이권을 탐하는 모리배에 비유하기도 했다. 게다가 버드나무는 잘 휘어진다. 빳빳한 맛이라고는 없다. 선비가 직언하는 기질이라면 버드나무는 듣기 좋은 소리만 하는 아첨꾼에 비유했다. 하기야 베롱나무가 껍질이 있는 데도 잘 안 보인다고 지조 있는, 안팎이 똑같은 선비에 비유한 것과 같은 이치랄 수 있을 것이다.
어쨌거나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은 도연맹(365∼427년)의 별호가 ‘오류선생(五柳先生)’인데, 그는 집 옆에 다섯 그루의 버드나무를 심어 놓고 즐겼다고 한다. 그가 남긴 산문 〈오류선생전〉은 그의 자서전이 아닐 수 없다. 그것을 본다.
〈오류선생전〉
先生不知何許人, 亦不詳其姓字, 宅邊有五柳樹, 因以爲號焉
― 선생은 어디 사람인지 모르고 또 그의 姓과 字도 자세하지 않으나, 집 옆에 버드나무 다섯 그루가 있기에 그것을 號로 삼았다.
- 先生 : 도연명이 자기를 架空의 인물로 그려 五柳先生이라 하였다.
- 何許 : 어디, 어느 곳.
閑靖少言, 不慕榮利
― 한적하고 조용하며 말이 적고 명예나 실리를 貪하지 않았다.
- 閑 : 한가하고 고요하다. 靖 : 조용하다. 무사하다.
- 不求甚解 : 너무 지나치게 뜻을 따지거나 이론적으로 집착하지 않음.
- 慕 : 탐하다.
好讀書, 不求甚解, 每有意會, 便欣然忘食
― 독서를 좋아하지만, 깊이 파고들지는 않았고, 매번 뜻에 맞는 글이 있으면 곧 즐거워하며 식사도 잊었다.
- 欣然 : 매우 즐거워함. 忘食 : 식사를 잊음.
性嗜酒, 家貧不能常得, 親舊知其如此, 或置酒而招之
― 성품이 술을 좋아하지만, 집이 가난하여 항상 마실 수는 없으매, 친구들이 이러한 처지를 알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그를 초청하곤 했다.
- 置酒 : 술자리를 마련하다.
造飮輒盡, 期在必醉, 旣醉而退, 曾不吝情去留
― 飮宴에 가기만 하면 다 마셔서 항상 취하려 하였고, 취하고 난 후에는 물러가니 가고 머무름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 造飮 : 술 먹는 자리에 가다.
- 不吝情去留 : 떠나거나 머무르는 데에 미련을 두지 않음. 吝은 원문에(乂+厷)라고 썼지만 吝과 같은 자임. 吝 아낄 린.
環堵蕭然, 不蔽風日, 短褐穿結, 簞瓢屢空, 晏如也
― 좁은 방은 쓸쓸하기만 하고, 바람과 햇빛을 제대로 가리지 못하고, 짧은 베옷은 구멍이 나서 기웠고, 밥그릇이 자주 비어도 마음은 편안하였다.
- 環堵 : 環은 동서남북 사방, 堵는 5版, 版은 1丈이다. 사방 1장 약간 넘는 방, 사방의 길이가 5장이 되는 방, 곧 작은 방을 뜻함.
- 蕭然 : 쓸쓸하고 조용함.
- 短褐 : 褐은 베옷, 단갈은 가난한 사람들이 입는 짧고 거칠게 짠 베옷.
- 簞瓢 : 단은 대나 고리로 짠 바구니, 가난한 사람들이 밥을 담아 먹었다. 瓢는 표주박, 역시 가난한 사람들이 음료나 국을 담아 먹었다. 가난한 사람들의 飮食器를 단표라고 통칭했다.
- 晏如 : 편안하다.
常著文章自娛, 頗示己志, 忘懷得失, 以此自終
― 항상 문장을 지어 스스로 즐기며 자못 자기의 뜻을 보이려 하였으되, 得失에 관한 생각을 잊고서 이러한 상태로 일생을 마치려 하였다.
黔婁有言, ‘不戚戚於貧賤, 不汲汲於富貴’ 極其言, 玆若人之儔乎
― 黔婁에 관하여 말하기를 “빈천을 두려워하지 않고 부귀에 급급하지 않으셨다.”라고 했는데, 그 말을 잘 새겨보면 검루는 오류선생과 같은 무리이다.
- 黔婁 : 춘추시대 齊나라의 隱士로 청렴결백하여 벼슬살이를 하지 않았다. 그가 죽자 그의 시체는 누더기가 걸쳐진 상태였고, 시체를 덮은 헝겊이 짧아 발이 다 드러났다. 門喪을 간 曾子가 헝겊을 비스듬히 돌려서 손발을 덮으려 하자, 검루의 처가 “고인께서는 바른 것을 좋아하셨습니다.헝겊을 비뚤게 놓음은 邪라 좋지 않습니다. 또 고인께서는 빈천을 겁내지 않으셨고, 부귀를 부러워하지 않으셨습니다.”고 했다 한다.
- 戚戚 : 두려워하고 걱정함.
- 汲汲 : 얻으려고 안달함.
- 極其言 : 그 말의 뜻을 깊이 생각하면.
酣觴賦詩, 以樂其志, 無懷氏之民歟? 無懷之民歟?”
― 술을 흠뻑 마시고 시를 지음으로써 자기의 뜻을 즐겼으니, 無懷氏 시대의 사람인가? 無懷시대의 사람인가?
- 醋觴 : 술잔을 돌려가며 실컷 마심.
- 無懷氏 : 葛天氏와 함께 중국 태곳적 제왕이다. 무회씨는 도덕으로 세상을 다스려 당시의 백성은 모두 사욕이 없고 편안했으며, 갈천씨 때는 교화를 펴지 않아도 저절로 교화가 이루어져 천하가 태평했다 한다. 무회씨의 백성 또는 갈천씨의 백성이라 욕심 없이 순박한 사람을 말한다.
이 〈五柳先生傳〉은 도연명이 자신을 오류선생이라고 스스로 칭하고 자신의 생활관과 인생관을 객관적으로 서술한 글이다. 해학적인 문체로 후세 傳記體의 규범 중 하나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