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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옥문석 /한국시인협회 회원 쌀은 우리 식단에서는 언제나 중심 식재료였습니다. 그만큼 우리 민족에겐 쌀은 절대적 지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밥을 주식(主食)으로 국이나 반찬들을 부식(副食)으로 하는 식사관습만 보아도 그렇습니다.이 쌀이 7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주식임에도 보편성이 없었습니다. 주식으로 쌀만 지칭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기장, 조, 보리 따위도 이 범주(範疇)에 속합니다. 70년대 초 이전만 해도 쌀밥 먹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보리나 기장이 섞인 혼식으로 지어진 밥을 주로 먹었습니다. 중반까지 쌀이 부족하여 혼식과 분식을 장려했습니다. 5-60년대는 꽁보리밥이 다반사였습니다. 쌀 한줌을 보리살 속에 앉혀서 밥이 되면 쌀밥은 할머니와 아버지에게만 담아드리던 광경이 선합니다. 그때 아버지가 밥을 남기기를 기다리면 어김없이 한 두 숟갈 남기곤 했습니다. 남은 쌀밥은 최상의 밥이었습니다. 당시에 쌀에다 고구마를 섞은 고구마밥, 무우채밥, 콩나물밥, 쑥밥도 많이 먹었습니다. 이웃집의 제사밥도 별미였습니다. 쌀이 귀한 시절이지만 조상 숭배가 강한 민족이라 제상엔 쌀밥이 필수였습니다. 제사를 자정 무렵에 지내고 차렸던 음식을 나눠먹었습니다. 새벽에 제사음식을 이웃에 여다(이고) 날랐습니다. 이때 이 음식은 진수성찬(珍羞盛饌) 이었습니다. 궁핍(窮乏)한 시절의 한 단면이기도 합니다. 삼한시대를 지나 삼국시대엔 한반도 북쪽에 사는 서민들은 기장이나 조를 주로 먹었고, 남부 서민층은 보리를 먹었다고 합니다. 남부 귀족층 정도가 쌀을 먹었다고 합니다.(한국인에게 밥은 무엇인가 /최준식) 쌀은 우리 민족의 한의 역사와도 맞닿아 있다고나 할까요. 애터지게 지은 농사로 곡식을 생산한들 지방 관료에게 수탈되고 식민지시대는 일제에 수탈되는 악순환의 세월이었습니다. 이런 세월을 견딜 수 없어 남부여대하고 간도로 연해주로 떠난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이 오늘날 조선족이며 고려인이 되어 다시 고국을 찾고 있습니다. 벼는 신석기 시대를 지나 청동기 시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재배되었답니다. 오래전 사람이 살았던 유적 발굴에서 나타난 탄화미(炭化米)로 땅에 묻혀 굳어진 볍씨 발견인 것입니다. 여주 흔암리와 부여 송죽리 주거지에서 발견된 탄화미, 울산 검단리 유적 토기에서도 볍씨가 박힌 흔적이 발견되었습니다. 소로리 탄화미는 방사성동위원소 측정으로 1만 2000년 전 땅에 묻힌 것으로 밝혀졌습니다. 우리나라 벼농사는 인도와 중국을 거쳐 들어 온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쌀’이란 이름은 인도에서 온 것이라고 합니다. 벼농사에 필수적인 수리, 관개 논밭갈이와 그에 필요한 농기구 따위 기술적 요소들은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김대호)볍씨는 여러 차례 발견되었지만 벼를 재배한 논은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1999년 청동기문화를 바탕으로 한 논이 울산남구 무거동에서 발견되었습니다. 기원전 9-10세기경으로 청동기시대 사용했던 논이라고 합니다. 무거동 논은 한배미 면적이 1-3평 정도로 나뉘어져 있었답니다. 당시에는 모든 작업이 사람의 손으로 이뤄졌으니 미루어 짐작이 됩니다. 우리나라 청동기시대 벼농사는 일본으로 전래되어 야요이 문화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60년대까지만 해도 농촌의 이웃 어른들에게 건네는 인사말은 "아침 잡셨어요." "점심 잡셨어요." "저녁 드셨어요." 였습니다. 그만큼 가난한 세월이었습니다. 이런 세월이니 벼의 소출을 올리기 위해 농부들의 땀흘리기는 배가 되었습니다. 당시 생활의 중심에 쌀이 자리를 잡았고, 도깨비 방망이었습니다. 땅을 사든지 집을 살 때는 쌀이 절대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어촌과 달리 농촌에서 쌀은 천금이었습니다. 이 쌀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벼 베어낸 논을 갈아엎어 겨울에 얼리는데 미처 갈지 못한 논은 이른 봄에 갈아 물을 잡아 써레질을 하고 모내기를 합니다. 심은 벼는 세번 김매기를 합니다. 이 과정에서 품앗이 문화가 꽃을 피웁니다. 뜨거운 여름 햇볕 아래 김매기는 숨이 턱에 찹니다. 엎드려 하는 작업이라 지열과 내려쬐는 뙤약볕이 온 몸을 휘감습니다. 대여섯, 많을 때는 열명 가량이 김매기를 하면서 농요 한자락이 일의 능률도 배가시킵니다. 힘들다는 생각도 잊게 합니다. 상사아 디이여 선창:서마지기 논빼미는 후창:상사아 디이야 선창:반달마치나 남았구나 후창:상사아 디이야 선창:니가 무성 반달이냐 후창:상사아 디이야(후략) 지금은 이런 풍경은 사라지고 경운기, 트랙터들을 활용하는 기계화된 농법입니다. 30여년 전만해도 농사철이면 들녘에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만큼 인력(人力)이 절대적인 세월이었습니다. 이런 공력으로 벼를 생산했으니 ‘나락 한 알 속에 우주가 담겼다(장일순)’는 말이 회자되었죠. 벼는 조선 영조 때 실학자 서유규가 그의 저서 ‘임원경제지(林苑經濟志)’에서 170종의 벼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이는 근대과학에서 말하는 품종이란 개념이 확립되지 않은 시대의 기록입니다. 조선시대 품종개량에 대한 기록이 남아 있는 것도 많지 않다고 합니다.(근현대 한국 쌀의 사회사 /김태호) 외래종도 간혹 중국에서 도입했다고 임원경제지에 실려있습니다. 안완식은 ‘우리가 지켜야 할 우리종자’에서 서유구는 ‘임원경제지’에서 68품종으로 올벼, 못벼, 흑미, 노인미, 개고리벼, 돼지벼, 삼다리벼, 자치, 한바올벼, 돌벼, 해조, 연안조 외에도 다른 이름으로 기록된 것이 모두92 품종이라고 합니다. 벼는 1928년 일본의 가토가 일본형 품종군 자포니카(Japonica type), 인도형 품종군 인디카(Indica type)로 분류했습니다. 자포니카는 우리나라를 비롯해 일본, 중국 북부 지방에서 주로 재배하는 종들입니다. 특징은 둥근 편이며 찰기가 강합니다. 인티카는 인도를 비롯 동남아 지역에 분포하며 길쭉하고 찰기가 없어 불면 날라갈 것처럼 가벼운 게 특징입니다. 흔이 알량미라고 하는 쌀입니다. 많이 먹었던 적이 있습니다. 입맛에 맞지는 않았습니다. 벼의 근연(近緣)인 야생벼가 아시아 열대지방,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이들 가운데 벼의 선조가 어떤 것인지는 확실하지 않답니다. 식물학적인 유연(柔軟) 관계로 볼때 동남아에서 발견된 여러해 살이 야생벼에서 분화된 것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이제 벼농사는 우리나라 농업에 있어서 주류였던 시대를 마감하는 시류에 편승하고 있습니다. 천석군 만석군하던 세월이 저물어도 쌀은 우리 문화에서 절대적 가치를 창출했습니다. 쌀이 천금이었으니까요. 쌀밥이 가져다 주던 포만감(飽滿感)이 사라진지도 오래되었습니다. 벼농사의 중요성도 사라졌습니다. 한창 번성했던 벼농사일도 이제는 점점 줄어 들고 있습니다. 농촌의 오래된 사회적 환경도 급격하게 변했습니다. 그 환경이 존속한다고 해도 과거와 현재 사이 경제 격차는 심화되고 있습니다. 농촌이 시들수록 도시는 비대해졌습니다. 이제는 농촌을 지키고 농사를 짓는 사람들이 대단한 것입니다. 미국의 투자가 짐 로저스는 농업에 투자한다고 했습니다. 농업은 다시 미래의 산업으로 각광받을 것이기 때문이랍니다. 농업이 생명줄이기도 하고요. 이럼에도 쌀의 위치는 시들시들 합니다. 쌀밥. 김일성이 그랬죠. 인민에게 이밥과 고기국을 먹이는 것이 소원이라고 했던가요. 그만큼 쌀밥이 소중했겠지요. 쌀이 주식인 이 시절도 저무나 봅니다. 농촌에 가보면 다랭이논은 묵정논이며 경작하는 논도 해마다 줄어든다고 합니다. 산답 논에서 흘러내리던 또랑물도 마른지 오래입니다. 실개천에 물이 흘러 가재, 새우, 다슬기와 민물고기는 농촌을 풍요롭게 했습니다. 벼농사가 시들해지니 천금같았던 쌀이 주식의 자리도 내어줄 판입니다. 쌀은 우리들의 생활에 풍요를 안겨주었고 농가재산 불리기의 한 축이었는데도.. 쌀은 천금(天金)이었고 인류문명과 함께 걸어왔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