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備魏第十 【해제】 강유위가 보기에 북조는 진ㆍ송나라 말기를 계승하고, 제ㆍ양나라의 서풍을 겸하였으며, 여기에 효문제가 학문과 예술을 좋아함을 더하였기 때문에 태화 연간(227-33) 이후 비판(碑版)이 크게 성할 수 있었다고 하였다. 후세 모든 형체와 풍격이 위비에 갖춰지지 않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 중에서 무엇을 취하더라도 모두 서체를 이룰 수 있었다. 이는 참으로 산음의 도를 행하는 것 같이 아름다움은 이룰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므로 비를 말하는 사람은 오직 위비에만 있고, 남조ㆍ제ㆍ수나라는 갖추지 않았다고 하였다. 당나라 이후는 비록 명가들이 번갈아 나왔으나 여전히 위나라에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강유위는 결론적으로 비는 위나라에서 갖추지 않음이 없다고 하였다. 【원문】 北碑莫盛於魏, 莫備(1)於魏. 蓋乘晉宋之末運(2), 兼齊梁之流風(3), 享國?永, 藝業自興. 【해석】 북비는 위나라보다 성함이 없고, 위나라보다 갖춰짐이 없다. 대개 진ㆍ송나라 말기의 운을 계승하고, 제ㆍ양나라의 풍상과 습관을 겸하였으며, 나라를 누린 지가 이미 오래 되었고, 예술의 업도 스스로 흥기하였다. 【주석】 (1) 備(비) : ‘비(備)’는 완비하다는 뜻이다. (2) 末運(말운) : 이는 국운이 쇠망에 가까우니, 즉 한 조대의 말기를 가리킨다. (3) 流風(유풍) : 이는 유풍(遺風)으로 옛날 조대가 유전하였던 좋은 풍상과 습관을 가리킨다. 사마상여(司馬相如)는 「난촉부로(難蜀父老)」에서 “정교를 아직 더하지 않아 유풍이 오히려 쇠미해졌다[政敎未加, 流風猶微].”라고 하였다. 【원문】 孝文??(1), 篤好文術, 潤色鴻業(2), 故太和(3)之後, 碑版尤盛, 佳書妙製, 率在其時. 延昌(4)正光(5), 染被斯暢(6). 攷其體裁俊偉, 筆氣深厚, 恢恢乎(7)有太平之象. 晉宋禁碑, 周齊短祚, 故言碑者, 必?魏也. 【해석】 효문제(재위기간, 471-499)는 학문과 예술을 매우 좋아하였고, 제왕의 업을 윤색하였던 까닭에 태화(477-499) 이후 비판(碑版)이 더욱 성하였고, 아름다운 글씨와 묘한 제작은 대략 그 때에 있었다. 연창(512-515)ㆍ정광(520-525) 연간에 이 창달에 물들었다. 그 체재의 뛰어남과 붓 기운의 심후함을 고찰하면, 넓어 태평한 모양이 있었다. 진ㆍ송나라에서 비를 금하였고, 주ㆍ제나라는 짧았던 까닭에 비를 말하는 이는 반드시 위나라를 일컬었다. 【주석】 (1) ??(보불) : 고대 제왕이 예복으로 입던 하의인 곤상(袞裳)에 도끼와 ‘亞’자 모양으로 꾸며 놓은 수를 일컫는 말로 제왕을 뜻한다. (2) 鴻業(홍업) : 이는 제왕의 업을 일컬으니, 『후한서(後漢書)』에서 “황제가 어려서 제왕의 업을 이었다[皇帝幼沖, 承統鴻業].”라고 하였다. (3) 太和(태화) : 태화는 북위시기 효문제 원굉(元宏)의 연호(477-499)이다. (4) 延昌(연창) : 연창은 북위시기 선무제 원각(元恪)의 연호(512-515)이다. (5) 正光(정광) : 정광은 북위시기 효명제 원후(元?)의 연호(520-525)이다. (6) 暢(창) : ‘창(暢)’은 창달을 뜻하니, 『주역ㆍ곤(周易ㆍ坤)』에서 “아름다움이 그 가운데 있어 사방에 창달하였다[美在其中而暢於四支].”라고 하였다. 여기에서는 연창ㆍ정광 연간에 효문제 때의 문채 풍류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7) 恢恢乎(회회호) : ‘회회(恢恢)’는 넓은 모양이니, 『장자ㆍ양생주(莊子ㆍ養生主)』에서 “넓어 칼날을 노님에 반드시 여지가 있다[恢恢乎其遊刃必有餘地矣].”라고 하였다. 【원문】 孝文以前, 文學無?, 碑版亦不著. 今所見者, 惟有三碑, 道武(1)時則有秦從造像王銀堂題名, 太武(2)時則有鞏伏龍造像, 造像皆新出土者也. 雖草昧初?(3), 已有王風(4)矣. 【해석】 효문제 이전에 문학은 일컬음이 없었고, 비판 또한 뛰어나지 않았다. 지금 본 바로는 오직 3개의 비만 있을 뿐이다. 도무제 때(386-408)는 <진종조상왕은당제명>이 있고, 태무제 때(424-452)의 <공복룡조상기>ㆍ<조경조상기>는 모두 새로 출토된 것이다. 비록 몽매한 초기에 사리를 깨닫지 못하였으나 이미 웅건하고 뛰어난 기백과 풍도가 있었다. 【주석】 (1) 道武(도무) : 이는 북위 초대 황제 도무제인 탁발규(拓跋珪, 재위기간 386-396)를 가리킨다. (2) 太武(태무) : 이는 북위시기 태무제인 탁발도(拓跋燾, 재위기간, 424-452)를 가리킨다. (3) ‘사고본’ㆍ‘화정본’ㆍ에는 ‘?, ’상해본‘ㆍ’호남본‘에는 ’構‘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이후 모두 이와 같다. ‘草昧初?(초매초구)’에서 ‘초매(草昧)’는 몽매하다는 뜻이니, 원시에 아직 개화하지 않은 상태를 가리킨다. ‘구(?)’는 사리를 깨닫지 못함을 가리킨다. 따라서 여기에서는 북위시기 초에 서예는 아직 몽매한 시기에 속했음을 뜻하는 말이다. (4) 王風(왕풍) : ‘왕(王)’은 한 종류에서 가장 특출한 것이니, 여기에서는 웅건하고 뛰어난 기백과 풍도를 가리킨다. 【원문】 太和之後, 諸家角出(1). 奇逸則有若石門銘, 古樸則有若靈廟鞠?雲, 古茂則有若暉福寺, 瘦硬則有若弔比干文, 高美則有若靈廟碑陰鄭道昭碑六十人造像, 峻美則有若李超司馬元興, 奇古則有若劉玉皇甫?, 精能則有若張猛龍賈思伯楊?, 峻宕則有若張黑女馬鳴寺, 虛和則有若?遵司馬昇高湛, 圓靜則有若法生劉懿敬使君, 亢夷則有若李仲璇, 莊茂則有若孫秋生長樂王太妃溫泉頌, ?厚則有若呂望, 方重則有楊大眼魏靈藏始平公, 靡逸則有元詳造像優?王. 【해석】 태화(477-499) 이후 여러 서예가들이 다투어 나왔다. 기이하고 표일함은 <석문명> 같은 것이 있고, 예스럽고 소박함은 <중악숭고령묘비>ㆍ<국언운묘지명> 같은 것이 있고, 예스럽고 무성함은 <휘복사비> 같은 것이 있고, 파리하고 굳셈은 <조비간문> 같은 것이 있고, 높고 아름다움은 <중악숭고령묘비음>ㆍ<정문공비>ㆍ<육십인조상기> 같은 것이 있고, 험준하고 아름다움은 <이초묘지명>ㆍ<사마원흥묘지명> 같은 것이 있고, 기이하고 예스러움은 <유옥묘지명>ㆍ<황보린묘지명> 같은 것이 있고, 정미하고 능숙함은 <장맹룡비>ㆍ<가사백비>ㆍ<양휘비> 같은 것이 있고, 험준하고 질탕함은 <장흑년녀지명>ㆍ<마명사근법사비> 같은 것이 있고, 허하고 화목함은 <조준묘지명>ㆍ<사마승묘지명>ㆍ<고담묘지명> 같은 것이 있고, 둥글고 고요함은 <법생조상기>ㆍ<유의묘지명>ㆍ<경사군비> 같은 것이 있고, 오만하고 평온함은 <이중선수공자묘비> 같은 것이 있고, 장엄하고 무성함은 <손추생조상기>ㆍ<장락왕부인위지조상기>ㆍ<광천왕조모태비후조상기>ㆍ<온천송> 같은 것이 있고, 풍요롭고 두터움은 <태공여망비> 같은 것이 있고, 모나고 중후한 것은 <양대안조상기>ㆍ<위령장조상기>ㆍ<시평공조상기> 같은 것이 있고, 미려하고 표일함은 <북해왕원상조상기>ㆍ<우진왕조상기> 같은 것이 있다. 【주석】 (1) 角出(각출) : 이는 다투어 서로 나오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원문】 統觀諸碑, 若遊?玉之山(1), 若行山陰之道(2), 凡後世所有之體格無不備, 凡後世所有之意態, 亦無不備矣. 【해석】 여러 비를 총체적으로 보면, 군옥의 산을 노니는 것 같고, 산음의 길을 가는 것 같다. 무릇 후세에 있는 형체와 풍격을 갖추지 않음이 없고, 무릇 후세에 있는 필의와 자태 또한 갖추지 않음이 없다. 【주석】 (1) ‘사고본’ㆍ‘화정본’에는 ‘?’, ‘상해본’ㆍ‘호남본’에는 ‘群’이라 하였으나 여기에서는 전자를 따른다. ‘군옥지산(?玉之山)’은 고대에 제왕이 서책을 소장하던 곳으로 『목천자전(穆天子傳)』에서 “천자가 북정을 하였다가 동쪽으로 돌아올 때 흑수를 따르다가 천자가 군옥산에 이르렀다. 언덕이 평평하고 험함이 없으며, 사방이 통하고 가운데가 끝없어 선왕이 책부라 일컬었다[天子北征東還, 乃循黑水, 至子群玉之山. 阿平無?, 四?中?, 先王之所?策府].”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책부(策府)’는 고대 제왕이 서책을 소장하던 곳으로 이른바 명산에 소장한다는 뜻이다. (2) 山陰之道(산음지도) : ‘산음(山陰)’은 지금의 절강성 소흥이다. ‘산음’은 소흥의 서남쪽 교외 일대를 가리키는데, 풍경이 뛰어나게 아름다움으로 일컬어졌다. 『세설신어ㆍ언어(世說新語ㆍ言語)』에서 “왕헌지가 이르기를 ‘산음 길을 좇아서 올라가면, 산천이 스스로 비추고 발하여 응접할 겨를이 없다[王子敬云從山陰道上行, 山川自相映發, 使人應接不暇].”라고 하였다. 이는 경치가 뛰어난 곳이 많아 눈을 돌릴 겨를이 없을 정도로 아름다움이 이루 헤아릴 수 없다는 뜻이다. 【원문】 凡魏碑, 隨取一家, 皆足成體, 盡合諸家, 則爲具美. 雖南碑之綿麗, 齊碑之逋?, 隋碑之洞達, 皆涵蓋渟蓄, 蘊於其中(1). 故言魏碑, 雖無南碑及齊周隋碑, 亦無不可. 【해석】 무릇 위비에서 일가를 따르고 취하여도 모두 서체를 이룰 수 있고, 제가들을 모두 합하면 아름다움은 갖출 수 있다. 비록 남비는 면밀하고 아름다우며, 제나라 비는 달아나고 가파르며, 수나라의 비는 유창하더라도 모두 모이고 쌓인 것을 포함하고 그 안에 저장했다. 그러므로 위비를 말함은 비록 남비 및 제ㆍ주ㆍ수나라 비가 없다고 하더라도 또한 가하지 않음이 없다. 【주석】 (1) 涵蓋渟蓄, 蘊於其中(함개정축, 온어기중) : 이는 모이고 쌓인 것을 포함하여 그 안에 저장했다는 뜻으로 남조ㆍ제ㆍ수나라 비의 특징이 모두 위비의 안에 포함되었음을 뜻하는 말이다. 【원문】 何言有魏碑可無南碑也. 南碑奇古之寶子, 則有靈廟碑似之, 高美之?龍?, 峻整之始興王碑, 則有靈廟碑陰張猛龍溫泉頌當之, 安茂之枳陽府君梁石闕, 則有暉福寺當之, 奇逸之?鶴銘, 則有石門銘當之. 自餘魏碑所有, 南碑無之, 故曰莫備於魏碑. 【해석】 어찌 위비가 있으면 남비는 없어도 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 남비의 기이하고 예스러운 <찬보자비>는 <중악숭고령묘비>와 같음이 있다. 높고 아름다운 <찬룡안비>와 험준하고 정제한 <시흥충무왕비>는 <중악숭고령묘비음>ㆍ<장맹룡비>ㆍ<온천송>과 마땅함이 있다. 평안하고 무성한 <지양부군신도궐>ㆍ<양석궐>은 <휘복사비>와 마땅함이 있다. 기이하고 표일한 <예학명>은 <석문명>과 마땅함이 있다. 남은 위비에 있는 것이 남비에 없는 까닭에 위비보다 갖춰진 것이 없다고 일컫는다. 【원문】 何言有魏碑可無齊碑也. 齊碑之佳者, 峻樸莫若雋修羅, 則張黑女楊大眼近之, 奇逸莫如朱君山, 則豈若石門銘?遵也. 瘦硬之武平五年造像, 豈若弔比干墓也. 洞達之報德像, 豈若李仲璇也. ?厚之定國寺, 豈若暉福寺也. 安雅之王僧, 豈若皇甫?高湛也. 【해석】 어찌 위비가 있으면 제나라 비는 없어도 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 제나라 비의 아름다움에 험준하고 소박한 것으로는 <준수라비>만한 것이 없는데 <장흑녀묘지명>ㆍ<양대안조상기>와 가깝고, 기이하고 표일한 것으로는 <주군산묘지명>만한 것이 없는데 어찌 <석문명>ㆍ<조준묘지명>과 같다 하겠는가? 파리하고 굳센 <무평오년조상기>는 어찌 <조비간문>과 같겠는가? 유창한 <보덕상비>는 어찌 <이중선수공자묘비>와 같겠는가? 풍요롭고 두터운 <정국사비>는 어찌 <휘복사비>와 같겠는가? 편안하고 우아한 <왕승묘지명>은 어찌 <황보린묘지명>ㆍ<고담묘지명>과 같겠는가? 【원문】 何言有魏碑可無周碑也. 古樸之曹恪, 不如靈廟, 奇質之時珍, 不如皇甫?, 精美之?獨樂, 不如楊?, 峻整之賀屯植, 不如溫泉頌. 【해석】 어찌 위비가 있으면 주나라 비는 없어도 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 예스럽고 소박한 <조각비>는 <중악숭고령묘비>만 같지 못하고, 기이하고 질박한 <시진묘지명>은 <황보린묘지명>만 같지 못하고, 정미한 <강독락수문왕비>는 <양휘비>만 같지 못하며, 험준하고 정제한 <하둔식묘지명>은 <온천송>만 같지 못하다. 【원문】 何言有魏碑可無隋碑也. 瘦美之豆盧通造像, 則弔比干有之, ?莊之趙芬, 則溫泉頌有之, 洞達之仲思那, 則楊大眼有之, 開整之賀若誼, 則高貞有之, 秀美之美人董氏, 則?遵有之, 奇古之臧質, 則靈廟有之, 樸雅之宋永貴??, 則李超有之, 莊美之舍利塔蘇慈, 則賈思伯李仲璇有之, 樸整之吳儼龍華寺, 則不足比數矣. 【해석】 어찌 위비가 있으면 수나라 비는 없어도 될 수 있다고 말하는가? 파리하고 아름다운 <두로통조상기>는 <조비간문>이 있고, 풍요롭고 장엄한 <조분비잔석>은 <온천송>이 있고, 유창한 <중사나삽인조교비>는 <양대안조상기>가 있고, 넓고 단정한 <하약의비>는 <고정비>가 있고, 수려하고 아름다운 <미인동씨묘지명>은 <조준묘지명>이 있고, 기이하고 예스러운 <용산공장질묘지명>은 <중악숭고령묘비>가 있고, 소박하고 우아한 <송영귀묘지명>ㆍ<영현비>는 <이초묘지명>이 있고, 장엄하고 아름다운 <청주승복사사리탑하명>ㆍ<소자묘지명>은 <가사백비>ㆍ<이중선수공자묘비>가 있으며, 소박하고 정제한 <오엄묘지명>ㆍ<용화사비>는 비교하여 헤아리기가 부족하다. 【원문】 故有魏碑可無齊周隋碑. 然則三朝碑?無?出新體者乎. 曰, 齊碑之雋修羅朱君山, 隋碑之龍藏寺碑曹子建, 四者皆有古質奇趣, 新體異態, 乘時獨出, 變化生新, 承魏開唐, 獨標儁異. 四碑?可出魏碑之外, 建標(1)千古者也. 【해석】 그러므로 위비가 있으면 제ㆍ주ㆍ수나라 비가 없어도 될 수 있은즉 세 왕조의 비는 참으로 새로운 체를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인가? 이르기를 “제나라 비의 <준수라비>ㆍ<주군산비>와 수나라 비의 <용장사비>ㆍ<조자건비> 네 비는 모두 예스럽고 질박하면서 기이한 정취가 있다. 새로운 형체와 기이한 자태는 시대를 타고 홀로 나와 변화하여 새로움을 나았고, 위나라를 계승하고 당나라를 열어주며 홀로 뛰어나고 기이함을 표방하였다. 네 비는 참으로 위비의 밖에서 나와 천고를 표식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석】 (1) 建標(건표) : 이는 표식 또는 기호이니 『문선ㆍ손작ㆍ유천태산부(文選ㆍ孫綽ㆍ遊天台山賦)』에서 “붉은 성에 노을이 일어나는 것으로 표식을 세웠다[赤城霞起而建標].”라고 하였는데, 이선(李善)의 주에서 “‘건표’는 사물을 세워 표식으로 삼는 것이다[建標, 立物以爲之表識也].”라고 하였다. 【원문】 後世?碑之盛者莫若有唐, 名家傑出, 諸體?立. 然自吾觀之, 未若魏世也. 唐人最講結?, 然向背往來伸縮之法, 唐世之碑, 孰能比楊?賈思伯張猛龍也. 其筆氣渾厚, 意態跳宕, 長短大小, 各因其體, 分行布白, 自妙其致. 寓變化於整齊之中, 藏奇?於方平之內, 皆極精采. 作字工夫, 斯爲弟一, 可謂人巧極而天工錯(1)矣. 【해석】 후세에 비의 성함은 당나라가 있어 명가들이 걸출하였고, 여러 체가 병립할 만한 것이 없다고 일컫는다. 그러나 내가 본 것으로부터는 아직 위나라와 같지 않다. 당나라 사람은 가장 결구를 강구하였으나 향배ㆍ왕래ㆍ신축의 법이 당나라의 비에서 어느 것이 <양휘비>ㆍ<가사백비>ㆍ<장맹룡비>와 비할 수 있겠는가? 필획과 기운은 혼후하고, 필의와 자태는 질탕하며 장단ㆍ대소는 각각 형체를 기인하였고, 행을 나누어 공백을 포치함은 스스로 묘함을 이르게 하였다. 변화는 정제한 가운데 깃들이고, 기이하고 우뚝 솟음은 모나고 평평한 안에 저장하였으며, 모두 뛰어남을 다하였다. 글씨를 쓰는 공부는 이것이 제일이니, 사람의 기교가 다하고 천연이 섞였다고 할 수 있다. 【주석】 (1) 人巧極而天工錯(인교극이천공착) : ‘교(巧)’는 기교 또는 기예이니, 『고공기ㆍ총서(考工記ㆍ總序)』에서 “재주에는 아름다움이 있고, 장인에게는 기교가 있다[材有美, 工有巧].”라고 하였다. ‘천공(天工)’은 자연스럽게 조성된 것이니, 즉 천연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위비의 서예 기교가 매우 높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 느낌을 준다는 뜻이다. 【원문】 以視歐??柳, 斷鳧續鶴(1)以爲工, ?成可笑. 永興登善(2), 頗存古意, 然實出於魏. 各家皆然, 略詳導源篇. 【해석】 구양순ㆍ저수량ㆍ안진경ㆍ유공권으로 보면, 오리다리를 잘라 확을 이어 공교함으로 여기니 참으로 웃을 만하다. 우세남ㆍ저수량은 자못 예스러운 필의가 존재하나 실제로는 위나라에서 나왔다. 각 서예가는 모두 그러하니, 대략 ‘도원편’에서 자세하게 설명하도록 하겠다. 【주석】 (1) 斷鳧續鶴(단부속학) : ‘부(莩)’는 들오리로 이를 또한 ‘단학속부(斷鶴續鳧)’라고도 한다. 『장자ㆍ변무(莊子ㆍ騈拇)』에서 “긴 것은 남음이 있게 하지 말고, 짧은 것은 부족하지 않게 한다. 그러므로 오리의 다리는 비록 짧더라도 이으면 근심하고, 학의 다리는 비록 길더라도 자르면 슬프다[長者不爲有餘, 短者不爲不足. 是故鳧脛雖短, 續之則憂, 鶴脛雖長, 斷之則悲].”라고 하였다. 이후 ‘단학속부(斷鶴續鳧)’로 자연을 위배하여 조작하는 것을 교정한다는 뜻으로 비유하여 사용하였다. (2) 永興登善(영흥등선) : ‘영흥(永興)’은 우세남이 비서감에 이르러 영흥현자(永興縣子)에 봉해졌기 때문에 ‘우영흥(虞永興)’이라 불렸고, ‘등선(登善)’은 저수량의 자이다. |
출처: 한국서학연구소 원문보기 글쓴이: 소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