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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21세기 대한민국 중진 서예가10인
작가선정에 있어 작품성 평가는 본질적으로 평자의 개인적 관점에 따를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또 평론가와 작가와의 특수한 인간적 유대와도 전혀 관련이 없다고 할 수는 없겠다. 그렇다고 두 평론가에 의한 현역작가 선별이 객관적 평가기준을 떠나서 어떤 담합으로 이루어질 성질은 아니며, 결코 작가의 등위 매기기나 '폭력기획'이 될 수는 더더욱 없다는 인식에서 이 기획은 출발하고 있다. 중진작가란 앞으로도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는, 어쩌면 평가작업을 보류할 수밖에 없는 진행형의 작가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하지만 예술적 가치평가를 언제까지 유보하고만 있을 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의미에서 현대서예의 재조명과 작가 평가를 위한 이러한 작업은 지속적으로 필요한 것이다.
21세기 중진서예가 권창륜, 김구해, 김양동, 변요인, 신두영, 이돈흥, 인영선, 전도진, 전종주, 정도준(가나다순) 등 10인은 현재 60대 초반의 두 작가를 제외하고는 모두 50대 작가에 속한다. 통시적 관점으로 보았을 때, 이들은 현대의 한국서예의 당면 과제를 어떻게 풀어갔으며, 시대성을 어떻게 자기화 했는가 하는 것에 주안점을 두지 않을 수 없겠지만 한편 공시적으로 보았을 때는 동세대 개념에 적용하여 서로 비교할 수밖에 없었다. 즉 서예사적 흐름과 결부시켜 판단하느냐, 작가의 개별적 문제에 치중하느냐에 따라 선정자의 비평적 평가는 다양한 갈래로 나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한 가지 부언해 둔다면 전통과 현대의 문제, 계파와 단체의 상관관계도 무시할 수 없었다는 점이다. 10년 뒤엔 또 다를 것이지만, 다음은 작가별 간단한 경력을 포함한 작품세계에 대해 공동선정자의 평이다. 지면관계상 작가별 10매의 분량을 7∼8매로 줄일 수밖에 없었다. 배수에 가까운 선정대상자 중 탈락된 작가들의 명단도 지면의 제약으로 생략한다.
(1)초정 권창륜/ 권위는 작품으로 나타나는 것
지난 70년대에 일기 시작한 '서예의 봄'은 가히 문화계의 충격이었다. 그 때 서예지망생들의 관심은 유일한 관문인 국전을 능가할 것이 없었다. 국전은 서예인들의 꿈이 서려 있는 본격적 서예가의 등용문으로 최고의 권위 바로 그 자체였다. 더 이상 권위 있는 거국적인 공모전은 따로 있지 않았었다. 여기에 이른바 졸업을 한다는 것은 곧 예술가로서의 생애가 보장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초정 권창륜은 제12회에 국전에서 첫 입선을 한 후, 10회의 입선과 6회의 특선을 획득한다. 첫 입상은 그의 나이 만 20세에 이루어진 것으로, 그 후 17년이라는 장기간에 걸쳐서 보여준 그의 실력은 충분히 검증된 셈이다. 제26회 때는 <고의(古意)>를 출품하여 대상 없는 국무총리상을 수상하게 된다. 그야말로 서예부문의 최고상이다. 그 후 두 번의 특선을 더 거치고 난 뒤 추천작가가 된다.
그는 당시로서는 최고의 서사능력을 인정받은 서예계의 기린아였다. 많은 서예인들의 부러움을 한 몸에 산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러나 초정은 단순히 공모전의 수상에만 목적을 둔 것이 아니었다. 그가 노리는 것은 한국의 서사를 다시 쓰게 한다는 데에 있었다. 이것이 오늘의 그가 있게 된 배경의 바탕이다. 이러한 것을 일구어내기 위하여 좌우충돌을 하면서 겪게 되는 그의 서학연구는 끝간데를 모른다. 구내의 서예관계 자료만으로는 그의 학습을 도울 수가 없었음은 불문가지이다. 당시에 이미 외국자료의 구입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일반 서예인들은 꿈도 꾸지 못할 정도의 귀한 자료가 그의 연구실로 들어간다. 부단히 자신의 서사능력 함양을 위해 남모르는 땀을 쏟는다. 겉으로 나타내지 않으면서도 자신에게는 철저했다.
필자는 80년대초 그의 일본국 오오사카에서 펼친 개인전을 보기 위해 현지에 갔다. 그때 간사이 지방의 중진작가들이 그의 서예작품을 두고 이구동성으로 극찬했다. 그들은 단순히 말로만 칭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초정의 작품에 나타난 형태의 조화를 충분히 읽은 뒤 저들의 무경험을 실토하면서 서사능력을 인정하는 것이었다. 칭찬 때문에 훌륭하다는 것은 물론 아니다.
이 때의 초정이 보여준 작품의 레퍼토리는 서화를 망라한다. 글의 내용에 대한 평가는 별도로 하더라도 작품에 나타나 있는 인상평가에 관한 더 이상의 요구를 할 수 없다고 그들은 입을 모았다. 그로부터 20년 세월이 흘렀다. 그다 2000년 봄 예술의 전당에서 당시 중국서법가협회의 대리주석인 선평과의 양인전을 펼친 것을 결코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 전시에 출품한 작품이야말로 전통서예에 대한 서사능력을 확실하게 증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의 취약부분은 약점이었다. 그것은 중앙대학에서 국문학을 전공한 작가로서 자작의 글이 없었다고 하는 부분이다.
이에 대한 필자의 견해는 우리나라 서예교육의 대표적인 에러라고 구두비평을 한 바가 있다. 그가 한학에 취약한 것도 아니고, 작문의 능력이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글을 보여주지 않았다. 상대는 자국이 자랑하는 학자요 시인이다. 글을 내지 않는 것은 초정의 겸손 때문이었을까? 그러나 우리나라 서예사에서는 그의 겸손함을 기록하지 않는다. 앞으로 이 부분만 개선되면 더 이상의 요구사항이 있을 수 없는 서예가로서 또 다른 지펴잉 전개될 것으로 본다.
(2)삼농 김구해/제주로 간 서단의 야생마
붓은 만상의 근원이다. 붓 하나로 온갖 미의 세계를 펼쳐 낼 수 있기 때문이다. 때로는 웃음을 제공하기도 하고 울적한 마음의 안정을 가져다주기도 한다. 근자에 보편화되고 있는 붓질은 단순하게 검은 먹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있다. 마음 내키는 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재료가 바뀐다. 검은 것과 노랑이 조화를 이루다가 느닷없이 핏빛 같은 글씨가 등장하기도 한다. 붓글씨는 먹으로 써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턴 것이다. 그리고는 생활의 미를 적극 추구하기도 한다.
삼농 김구해는 기왕에 지향했던 서예의 정상적인 궤도를 지양하면서, 동시에 형상의 근원적인 이탈을 과감하게 시도하여, 새로운 양식의 예술영역을 이루어낸 작가이다. 전통의 전형을 그가 어느날 갑자기, 그야말로 어느날 갑자기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을 만큼 우리 서예계를 뒤흔든, 재치 있는 '서단의 야생마'로 종횡무진 한 바 있다.
그는 어떤 서체도 구애받지 않고 어떤 형식의 작품도 서사할 수 있는 능력의 소유자이다. 그가 만든 작품은 하나같이 보는 이의 감동을 자아내게 한다. 진실로 감상할 만한 멋이 있는 작품을 휘쇄(揮灑)한다. 그러면서도 생각의 가닥을 구체적으로 짐작할 수 있도록 은연중에 표상하고 있다. 그러한 작품의 양식적인 외형상의 구상문제는 지금까지 있어왔던 대개의 형식을 거부하지 않으면서 조화롭게 수용하고 있는 것이다.
가학으로 익힌 그의 솜씨는 기존의 서예가들이 보여주던 것과는 상당부분에 걸쳐 차별성을 드러낸다. 우선 형태에 치중하지 않는 것 같으면서도 세련된 글씨를 쓰고 서사를 통해서 살펴진 인상의 기운은 옹골지다. 책서(冊書)를 비롯한 소자는 서간의 형식을 포함하여 거칠 것이 없다. 그러면서도 당해(唐楷)는 말할 것도 없고, 육조(六朝)의 해행(楷行)이 지니고 있는 균제미(均齊美)를 끝까지 파고들어 그 진미를 찾아내고 있다. 이왕의 행서에 들어가면 그야말로 유려의 극을 이룬다. 그리고 그러한 그의 글씨 흔적은 많은 서예인들이 공통적으로 긍정하는 가우데 이러한 표현능력으로인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증진의 위치를 확보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는 글씨의 영역에선 일정한 한계가 없다. 당연히 국/한문을 구분하지 않는다. 붓만 갖다대면 거기에는 또 하나의 예술적인 혼이 형상을 이루며 또 하나의 판을 벌인다. 그의 글씨는 한 마디로 재미있고 맛이 있다. 그 맛은 언제나 작품이라는 그릇 안에 담아두려고 한다. 그리고 기회가 되면 더 많은 이야기를 동시에 털어놓기도 하고 침묵 속에 가지런히 쌓아 놓기도 한다. 그래서 더욱 친근미가 있고 낯설지 않아 좋은 것이다.
그가 구사하는 현대서예는 또 어떠한가. 1997년 물파 그룹의 창립멤버로 참여하기까지의 그의 조형실험은 남다른 데가 있었다. 형상의 근원을 선비들의 책방으로 몰아넣고, 형식적인 조건은 문자의 조화로운 산개(散開)에 초점을 맞춘다거나, 언뜻 보면 그림이고 반대로 뒤집어 놓고 보면 글씨가 되기도 한다. 종이를 덧씌우거나 채색이 동원되기도 하며 신나게 물 흐르듯한 한글서의 중간 지점에는 어느새 붉으래한 둥근 해가 떠 있다.
뿐만 아니다. 화면 가득히 흙을 바르고는 금줄을 걸어놓는다. 그리고는 고추를 달아맨다. 숯을 꿰어놓고도 하고 미역도 묶는다. 그야말로 앞 세기에 우리네 일상생활에서 보아왔던 그 금(禁)줄이다. 평면을 떠나 이러한 입체나 설치작품을 두고 어느 누구도 그것이 서예의 범주를 벗어난 것이라고 말하는 자는 없다. 오히려 서예술 영역의 확대 수용에 놀랄 뿐이다. 근래에 전각과 문인화도 발표한 바 있다.
어떤 형식이든 그가 구성하는 조형의 근본은 서예를 그림과 글씨로 동시에 해석할 수 있는 화면구성을 한다. 그림을 보면 글이 절로 나올 것 같고, 글씨를 보면 그림이 그려질 것 같은 것이 그가 지향하고 있는 서예의 중핵이다. 그러기 위해 그림에는 글씨를 주체적으로 등장시키고, 글씨에는 그림이 따라 오도록 유도한다. 그것이 그가 보여주고 있는 재치를 넘어서는 미의식이다. 그는 최근 제주 한라산 기슭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작품에만 전념하고 있다.
(3) 근원 김양동/보는 이의 생각을 찾는 연출
글씨를 통하여 타인에게 전달하는 메시지는 여러 가지로 분류할 수 있다. 그것은 단 한 글자를 사용함으로써 조형의 기본적인 맛을 보여주는 경우도 있고, 남의 글을 빌어다가 자신의 생각을 대신하여 전달하는 경우도 있다. 더러는 경서를 통하여 심상을 다스리게 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며, 모처럼 찾은 귀한 글감을 가지고 나와서 철학적인 재미를 추구하는 경우도 없지만 않다. 그러나 자신만의 새로움을 찾은 것에 대한 맛을 전달하는 것이 가장 확실하게 겨냥하는 노림 수라 할 수 있다.
근원 김양동은 이러한 새로움을 추구하는 맛을 찾아서 그것을 작품화하고 있다. 그는 남의 하는 기존의 틀만으로는 서예가 지닌 특성상 설득력이 모자란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대표적인 경우이다. 그래서 그는 새기고 탁본을 하듯이 그것을 찍어낸다. 대상은 가리지 않는다. 무엇이 되었든 새기고 찍는다. 더러는 바르는 것도 있다. 그가 바르는 것은 기존의 물감이 아니다. 그는 토분으로 작품에 화장을 한다. 동시에 형상의 주제와 관계유무를 따지지 않고 한자와 한글을 비벼서 작품의 주변을 장식한다.
그것이 때로는 남의 글을 등장시키기도 하고, 더러는 말도 안되는 낱 글자를 흩어놓기도 한다. 그러면서도 작품의 근본적인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 이것은 최근에 만나는 그의 작품에 대한 인상적이 소견이다. 여기에 그가 객관적이 보편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사고유도(思考誘導)의 겨냥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가 서예공부27년 만에 펼친 개인전을 통해서 한 말이 있다. 그것은 남이 하고 있는 기존의 양식만 추구하는 것으로는 감상자들을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것이었다. 그가 어렵다고 생각하는 점은 전래의 틀을 벗어 던지고 나름의 새로운 조형으로 접근을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언제나 그림이 등장하고 글씨가 거기에 끼인다. 아니면 글씨를 장식하기 위하여 그림을 들고 나오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그림과 글씨가 내용적으로 조화를 이룬 경우는 그다지 잦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조형적으로는 시비가 되지 않을 정도로 작품을 구성한다.
그가 등장시키고 있는 그림은 고대의 벽화를 통해서 보았음직한, 간단하게 이미지를 강조한 형상의 것이 거의 전부라 할 수 있다. 거기에 앞서 말한 토분을 잔뜻 칠한다. 게다가 더러는 색깔을 동원하고 특히 요철(凹凸)을 강조한다. 그 가장자리에 먹으로 자그마한 글씨를 쓰고 여기저기 붉은 도장을 찍는 것이 작품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이다. 화폭에 나타난 인상적인 분위기는 과연 색다르게 전개되고 있다. 이는 부정하기 어려운 부분이다. 그러나 색다른 것의 객관적이 평가는 자신의 조형제시와 관계가 없다. 오로지 감상하는 사람의 몫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해를 하든 그렇지 않든 상관을 하지 않는다 하면서도 작품의 표면상 구체적인 해설을 늘어놓고 있다.
보는 이의 느낌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것이겠지만, 어쩌면 작가는 그것을 의도적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자기주장의 계몽을 위해서 말이다. 필자는 그의 첫 개인전에 대하여 나름의 평가를 한 바가 있다. 그것은 작가의 생각을 분석하여 글로 발표를 한 것이데, 그에 대하여 당시 작가그이입장에서는 쾌재를 불렀다고 한다. 작가의 조형적인 노림 수를 제대로 파악한 것이라고 긍정했던 기억이 있다.
그는 서사의 미적인 구성 요소를 특별히 강조하지는 않는다 따라서 서사에 관하는 한 매우 자유롭다. 그러나 그 자유는 보다 확실한 전통의 배경을 업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근원의 객관적인 생각유도의 조형 퍼레이드는 과연 어디까지 진행할 것이지 매우 흥미롭다. 그래서 그의 작품에 대한 나름의 주관적인 해석들이 분분한 것인가 보다.
(4) 이당 변요인/ 줄기찬 노력의 결실만이
인간의 성취욕은 끌간 데를 모른다. 입장의 위치에 따라 다소 바뀔 수 있겠지만 예술가가 원하는 것은 모름지기 해당분야에서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는 영예일 것이다. 그러한 것을 사회적 신분확인이라고 하겠는데, 사회적 신분의 상승작용은 당사자의 성실한 노력에 의해 사회에 끼친 공적인 기여도와 정비례하여 나타난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신분확인을 아무런 노력 없이 쉽게 확보하려는 데에서 문제들이 생긴다.
이당 변요인의 서예인생을 읽어보면 그러한 의미의 진실을 알게 될 것이다. 직업을 글씨와 연계시킨 상태에서 출발한 그는 국전 23회(1974)부터 서단에 등장하기 시작한다. 당시 첫 출품으로 두점 모두 입선한 작품은 누란출토 이백문서를 임서한 것과 칠언고시 였다. 그때도 좋은 작품의 경우 두점 동시에 선에 드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특히 <이백문서>의 외형적인 형상은 그야말로 기운생동이 활달한 작품이었다. 그것이 계기였든지 아니면 본인의 취향이었든지 그의 글씨는 항상 기운이 넘쳐난다. 어떤 경우가 되었건 간에 서사에 관하는 한 어정대는 것이 없다. 더러는 지나치게 힘이 넘쳐나는 경우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러다 보면 의욕의 과다가 생겨나게 마련이다. 그는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특별히 잘못된 것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것을 자신의 조형의지로 해석하고 수용해 나간다. 그 점이 바로 이당이 줄기차게 접근하고 있는 서예술의 올바른 맛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는 계속 착실한 연서를 통하여 국전시대의 마지막까지 흔들리지 않았다. 대개의 경우 출품작의 레퍼토리는 같은 서체로 일관하는 것이 통례인데, 그의 출품작의 내용을 살펴보면 매년 서체와 내용을 달리했다. 그것은 자신이 펼치는 서사능력의 다양함과 고전의 수용능력을 동시에 공개하는 것이 된다.
어떤 형식이든 한 곳에 안주하는 것을 싫어하는 성미가 작품제작의 선택에 있어서도 변함 없이 나타난다. 그러한 자세가 미술대전으로 이어지면서 그의 서사 능력은 인정을 받아 특선의 위치로 자리를 확보한다. 그는 글씨를 쓰는 것을 단순히 필력의 향상을 위하는 것만이 아니라, 정신적인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한 것임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분위기는 가히 종교에 비유될 정도이다. 따라서 적당히 넘어가는 경우가 없다. 자신이 남기는 서예적인 흔적에 대하여 철저하게 점검하면서, 한편으로는 자신의 조형의지의 확인과 고전의 조화를 언제나 생각하고 있다.
한편 의협심이 강해 서단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회적 분위기를 결코 외면하지 않는 참여정신을 소유한 작가이다. 최근 있었던 그의 개인전을 살펴보면 이러한 그의 서예사랑과 선비정신을 적나라하게 나타내고 있다. 그것은 초대형으로 서사된 행·초서의 <출사표>작품을 통해서도 쉽게 읽어진다. 한국서단의 크고 작은 문제는 글씨의 외형치중에도 관련이 있다. 외형만 그럴 듯 하면 무엇을 쓴다해도 간섭하지 않는다. 따라서 누구도 내용에 대한 중요성을 말하지 않는다. 그 점이 문제의 핵을 이루고 있다는 것을 이당은 알고 <출사표>를 쓴 것이다. 이제부터 그가 해결해야할 것은 출사표에 담은 내용의 참뜻을 글씨예술의 형상적 이미지로 바꿔 내야 하는 중대한 부분에 직면해 있다.
이러한 것을 이루어 내려면 주위의 관심도 적극적으로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본다면, 한 작가의 예술적인 행위를 확인하고 실천적인 다짐을 통해 작품으로 형상화하도록 한 예는 그다지 흔하지 않다는 것을 이해를 할 필요가 있다. 이제 그는 편안한 마음으로 작품활동에 임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다짐과 실천이야말로 어떠한 것에 비할바가 아닌 보람이기 때문이다.
(5) 한별 신두영 /오로지 한길로만 가는 작가
어떤 분야이건 자신의 직업 앞에 전문이란 단어를 수식하려면 그 방면에 대한 깊은 연구의 흔적이 있어야 한다. 지금까지의 관례로는 서예인은 공모전을 거치는 것이 통상적이었다. 공개적인 검증을 받는다는 것이 목적이지만, 이에 대한 찬반의 논란은 오늘날에도 크게 다를 것이 없다. 심사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하는 것도 하나의 논란의 이유가 되겠지만 전체적인 수준을 가늠하는 것은 역시 공모전을 통한 객관적인 평가나 개인전을 거치게 함으로써 작가의 수준을 가늠케 하는 방법 외에는 별 뾰족한 길이 없어 보인다.
한별 신두영은 한글의 근본을 건드리지 않고 전형을 고수하는 경우이다. 그가 지금까지 남겨놓은 서흔(書痕)은 그러한 의미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가 1969년 제18회 국전에 <국토>를 출품하여 첫 입선을 한다. 다음해 19회를 제외하면 국전을 마감할때까지 도합9회의 입선과 3회의 특선을 하게 되는데, 세번의 특선 가운데 26회에서는 <오우가>룰 출품하여 문교부장관상을 수상하고, 27회때는 특선, 28회때에는 <관동별곡>을 출품하여 최고상인 국무총리상을 수상한다. 그는 상복이 많은 사람이다.
30년의 국전사에 그러한 예는 드물었다. 물론 4회 연속 특선으로 추천이 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3회의 특선 중에 두 번의 수상이라는 것은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하지만 한별은 주위의 부러움이나 그 어떤 종류의 시선도 아랑곳하지 않고 부단히 자신의 연서에만 치중을 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까지 전통적 한글서체만을 적극적으로 수용한 외길을 걷는 서예가 중 대표적인 경우이다.
70년대에는 한글에 대한 별도의 범본이 없었다. 한별은 교과서로 사용하던 우리 글 체본에 의하여 궁체를 비롯한 흘림체에 이르기까지 두루 습렵하더니, 드디어는 고체 연구에도 적극성을 보인다. 고체를 판본의 형상확인정도로만 취급하는 것이 아니라, 고체를 서사함에 있어서 행의를 적극적으로 부여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한글에 대한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이는 한글글씨의 서사상태를 짐작할 수 있도록 구사한 것이다. 이건은 한글을 쓰는 모든이의 귀감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지금이야 누구든 보편적으로 통용이 되고 있는 서체로 이해가 되고 있지만 70년대만 해도 고체의 서사를 제대로 하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그리고 이론적인 뒷받침도 매우 허술했던 것을 부인할 수가 없다. 그러한 분위기에서 한별의 고체작품은 시사한바가 적지 않는 것으로 평가된다.
당시 서단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던 열상서단의 주요 멤버였던 한별은 그러한 의미에서 남다른 노력을 훨씬 앞지르는 공부를 한 것이다. 그 결과는 보는 이가 결정한다. 그의 작품이 걸려있는 곳이면 한글을 연구하는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몰려들기도 했다. 그러한 그는 국전에서 충분한 검증을 거친 탓으로 미술대전 시대에 접어들어 곧바로 현대미술관의 초대작가로 인정을 받는다.
그는 대개의 작가들이 보여주고 싶어하는 개성강조의 새로운 형상성 지향의 작품은 신중을 기하는 편이다. 언제나 전통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작품을 고집하고 있다. 그것은 새로운 조형에의 도전보다는 자칫 남의 입방아를 걱정한 것이 아닌지도 모를 일이다. 최근에는 약간의 변화를 시도하고 있지만, 그것도 여염체에서나 흔히 볼 수 있는 서체의 근사치를 크게 벗어나지 않는 수준이다. 대체로 남의 눈에 들고자 하는 특수한 양식은 단호하게 거부한다. 따라서 전형적 보수적인 양식의 글씨를 고집하고 있는 그의 글씨는 매우 단아한 가운데 남성적인 힘이 있다. 앞으로의 변화가 기대된다.
(6) 학정 이돈흥 / 유연한 흐름의 조율사
서예에 있어서 항간과 자간의 조화는 작품의 격을 결정짓는다. 대개의 경우 이러한 중요성을 인식한 작가의 작품이 감상자의 인상에 적극적으로 개입되어 오래 남는다. 이 점은 서예사를 통하지 않더라도 현대 명가의 작품에서도 읽어지는 중요한 부분이다. 따라서 훌륭한 작품은 그러한 기본적인 의도가 지니고 있는 조형성 속에 감추어지고, 작품이 나타내고 있는 형상적인 실체의 멋만 노정되는 것이 통상적이다. 이러한 점은 특히 행초서로 표현된 작품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학정 이돈흥의 행초서에서 위와 같은 내용은 쉽게 확인된다. 그가 행초서에서 적극적으로 채용하고 있는 대소장단의 골격을 중심으로 윤갈의 조화로움과 태세의 균형을 비롯하여, 광협의 조화에 이르기까지 그 자유로운 서사의 분위기를 거침없이 발산시키고 있는 무리 없는 작품의 구성이 그의 장점을 확보하도록 한다.
이러한 학정의 서사능력은 막연하게 이루어지는 경우는 거의 없다. 초기단계의 완전한 기획으로 시작하여, 서사의 분위기에 따라 서사의 심리적인 정황의 조형을 거치고, 그리고 감상자에게 정확하게 전달하려는 확실한 결과의 추정에 이르기까지 철저하게 계획을 짠다. 이러한 유추가 확실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작가의 긍정 여부를 알 수 없으니 단어하기가 쉽지 않지만 작가의도와는 상관없이 평자에게 비치는 그의 작품은 이러한 분석을 할 수 있도록 구성되어 있다. 그래서 '유연한 흐름의 조율사'라고 하는 것이다.
모든 행초서에서 행 유연성과 자연스런 흐름을 제외한다면 특별히 내세울것도 없을 것이다. 이것을 적극적으로 실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기도 하지만 이 부분에서 서자의 서사능력과 작품의 수준을 통시에 점검하게 된다. 그 흐름의 실체는 당연히 작가의 판단에 의하여 결정되는 것임은 말할 것도 없다. 자의 형상의 조화를 고려하여, 문장에 따른 전체의 구성을 조율하는 것은 작가의 기본의무이다. 그는 그러한 유연성을 도입함에 있어서도 결코 삽기를 배제하지 않고 있다. 그러한 부분이 운필에서 일어나는 서사의 리듬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행서와 초서에서 리듬이란 바로 글씨의 생명여부를 결정짓는다.
학정은 제19회 국전에서 <구의산중>을 출품하여 첫 입선에 든다. 당연히 지금의 서사에 견줄 바가 아님은 말할 것도 없다. 이후 국전의 막이 내릴때까지 도합 6회의 입선을 한다. 이시기에 그의 필명은 이미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작품에서 풍기는 글씨의 맛깔스런 분위기를 충분히 조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는 그가 평소에 어떠한 자세로 작품에 임하는 것인지를 유추할 필요가 있다.
이처럼 학정의 서사에서 돋보이는 점은 최대한 약점을 노출시키지 않고 자연스러운 분위기연출을 위한 작가의 부단한 노력으로 이 점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모두가 이러한 자세로 임한다면 우리나라의 서예술은 머지 않아 한 단계 높은 수준으로 상승하리라는 추측은 어렵지 않다. 자칫 지나친 조형위주의 서사라는 우려가 있기도 하지만 글씨의 조건을 서자가 조성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그는 그러한 점을 구체적으로 가장 적절하게 운용하고 있는 경우이다.
(7)취묵헌 인영선 /술이 아닌 묵에 취한 작가
글씨는 무조건 쓰는 것이어야 한다. 절대로 그려서 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부분에 있어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작가는 그다지 많지 않다. 대개의 서예인들이 사승의 틀에 묶여 그 구각을 깨지 못하고 대책없이 베껴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것은 지금도 별로 달라진 것이 아니다. 베끼려면 고전을 통한 철학을 베껴낸 것으로 만들어내야지, 단순하게 선생의 조형 습관인 외양만 애써 베끼고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한다.
취묵헌 인영선은 그런 부분에 있어 그 누구보다 월등히 구체적으로 고민하는 작가이다. 그가 60년대 고등학생 신분으로 국전에 출품한 것은 인구에 회자된 일이지만, 첫 입선은 서예의 붐이 한창이던 70년대 제25회 국전때였다. 그때 출품한 작품은 당시 유행하던 왕희지<난정서>를 임서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국전이 막을 내릴 때까지 줄곧 제외된 적이 없다. 그러다가 국전의 제도개편으로 더 이상의 심사를 받을 기회가 없어진 그에게 현대미술관 초대작가가 주어지며 전문서예가로서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게 된다.
그는 주로 전서와 행초에 비중을 두고 있지만 전서의 행의서사는 단연 독보적이다. 대개의 서예가들이 석고문과 같은 조직적인 틀에 묶여 그려내고 있을 즈음에, 그는 전서도 쓰는 글씨라는 것을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그의 글씨는 한 마디로 막힘이 없다. 어떤 서체가 되었건 거침이 없다. 이런한 분위기를 통하여 분석해 보면 그는 이미 서사의 기운생동을 충분히 터득하고 있었던 것이 된다.
취묵헌은 경희대에서 국문학을 전공했다. 이러한 그는 서체의 선택보다 글의 내용에 남다른 관심을 보이는 편이다. 한글로 써야 하는 경우는 대개가 작가의 내용으로 일관한다. 이 자작의 글은 내용의 깊이에 따라서 서사되는 글씨의 형상 또한 일품으로 나타난다.
취묵헌은 근년에 그림까지 들고 나온다. 이름하여 현대판 문인화다. 이는 선비들이 그려 온 문인화의 실체를 이해할 수 있게 전개한다. 그의 그림은 어느덧 서예가 되어 모두들 읽게 되고, 그의 글씨는 모르는 사이에 그림이 되어 사람들의 가슴속으로 스며든다. 이렇게 글씨와 그림을 오가면서 형상화한 작품을 통하여 우리가 배워야 할 것은 단순히 외형상의 교졸만이 아니다. 그는 사물의 핵과 작가의 정신을 하나로 통합한 작품을 써내고 있는 것이다. 한때, 유행하던 현대서의 선두주자로서도 그는 막힘이 없었다. 글씨를 쓰듯, 아니면 그림을 그리듯 구사하는 그의 작품은 그야말로 작가의 철학을 분명하게 읽도록 구성하였다. 이처럼 멋진 작품을 창출하는 그는 술을 무척이나 좋아한다. 이태백이 술을 하면서 일군 시세계만큼이나, 그가 쏟은 글씨에 대한 애정도 깊숙한 곳까지 뜨겁게 커갔다. 그가 글씨와 술을 동시에 택하고 있는 것은 작품에 대한 진정한 맛을 터득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이 아니었나 생각되기도 한다. 그는 최근 술을 멀리하고 먹에만 취해 있다고 들었다.
취묵헌 예술세계는 한 마디로 정의하기가 쉽지 않을 만큼 시, 서, 화를 겸하고 있다. 작가로서의 사고를 형상화하기 위한 근본적인 소양을 두루 갖추고 있는 그는 말하자면 '현대의 삼절'인 것이다. 문학을 빌린 내용과 조형예술의 감성적 조화를 서예적인 형상을 통하여 창조하는 그의 글씨예술이야 말로 우리가 지향하는 진정한 서예술이 아닌가 싶다. 그것을 향해 그는 지금도 끝모르는 심연의 내면세계로의 여행을 감행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서 취묵헌이라는 아호가 자신 가까이 한 걸음 더 다가선 것일 게다.
(8) 청람 전도진/ 씀과 새김의 예술을 위해
인간이 자신의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것은 역사와 양의 동서를 불문한다. 人在名虎在皮라고 한 것이 그냥 생겨난 말이 아니듯,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쓰거나 새기는 것을 본능적으로 지니고 태어난다는 것을 알수가 있다. 그러한 것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것이 서예술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다. 결국 쓰고 새긴다는 것은 인간의 본래적인 존재확인의 과정임을 알 수 있다.
청람 전도진은 쓰고 새기는 것을 천직으로 실천하고 있는 작가이다. 60년대 중반 약관에 서예계에 발을 헛디딘 것이 결국 작가로 오늘이 있게 되었다. 서예술의 본질적인 문제를 천착한 청람은 전각까지 겸수하게 된다. 지금의 서단 분위기는 글씨와 도장 새기는 것의 겸전을 손쉽게 인식하고 있지만, 30년전 당시로서는 매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새김질로써 한때 서화단의 중심부를 누볐다. 국내의 유수한 대가 중에 그의 각을 갖고 있지 않는 이가 없을 정도이다.
청람 역시 당연히 국전 무대를 중심으로 작품활동을 시작한다. 그가 처음으로 국전의 문을 두들긴 것은 아직 고등학생의 신분이었다. 낙선을 거듭한 끝에 처음 입선한 것이 20회(1971년) 때였다. 당시 국전입선이란 그야말로 하늘의 별 따기였다. 그는 전각과의 관련을 고려하여 연서의 주된 서체를 전서로 정했다. 그는 국전 7회의 입선과 3회의 특선을 하는 과정에서 15년 출품에 열번 성공을 한 셈이다. 82년 제도의 개선으로 현대 미술관의 초대작가가 되었는데, 국전 규정에 의한 나이에 비해 너무 일찍 공모전을 마치게 됨으로써 초대작가가 되기까지는 몇해를 더 기다려야만 했다.
그는 또 현대서에 뜻을 두어 남보다 일찍 접근했다. 그가 생각한 것은 먹과 붓 외에 흙을 동원하는 방법으로 전통재료의 고정관념을 깬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흙이 주는 의미는 남들과 다르다. 그의 흑에 대한 애착은 일사후퇴 때, 어머니의 등에 업혀 고향을 등 진 실향민이기 때문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의 작품에는 저간의 체험을 은유법을 사용해 표현하는 것을 간혹 발견하게 된다. 그 중에는 대중가요의 가사가 느닷없이 등장하기도 하는데 하나같이 고향에 대한 그리움을 저변에 깔고 있다.
그는 주변사람에 대한 인상을 스케치하듯 글로 메모했다가 그 내용을 칼로 새기거나 글씨로 써서 작품을 구성한다. 그런 면에 있어 그의 예술은 내용적으로는 서정적인 반면 조형적으로는 의외로 저항적일때가 있다. 10여년 전부터 기왕의 전통적 서사 방법을 거부하고,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서사의 방향을 바꾼 것이 그 좋은 증거이다. 종횡을 불문하고 그는 우행서를 고집한다. 이에 사용하는 도장도 당연히 왼쪽에서 시작한다.
어떤 작품을 제작하든지 적당히 하는 것이 없다. 철저한 검증과 반복적 구상을 거친다. 스스로는 언제나 마음에 닿는 작품을 한번 해봤으면 원이 없겠다고 하면서 너스레를 떤다. 그는 작품에 풍기는 전체적 분위기에 대한 점검을 게을리 하지 않는 용의 주도한 작가이다.
(9) 목인 전 종 주 /서화동행의 현대적 재해석
아름답고 멋있게 보이고자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한결같은 바람이다. 그러나 막연하게 아름다움을 지향할 수만은 없는 것이 아니가. 예술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이다. 특히 평면 예술의 경우 그 다양성에 있어서는 더욱 치열하다. 서예도 그 범주에 들지만 그림과는 달라서 전통양식에서는 별 치장이 없다. 이러한 글씨에 색채나 오브제를 수용한다면 누구든 감상에 관심을 보일 것이다. 최근에는 먹으로만 쓰는 글씨를 배제하면서 글씨에도 옷을 입히는 경향이 나타나고 있다. 그림으로 글씨에 대치하기도 한다. 이른바 현대서라는 또 하나의 조형예술을 두고 하는 말이다.
목인 전종주의 조형실험 제시는 이러한 분위기의 실질적인 내용을 증거하고 있다. 10년전 서울에서의 그의 개인전은 80년대까지의 종합된 결과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작업에서만이 아닌 이론에서도 서예와 미술의 접목을 시도하고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 보면 그도 국전 제23회(1974년)에 이름이 방에 오르기 시작한다. 이후 입선과 특선을 여러 차례 거치면서 그의 면모가 긍정적인 분위기를 띠게 된다. 점차 작가의 개성적 능력을 감추지 않고 하나씩 드러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예술의 길을 여는 것은 오로지 자신만이 할 수 있는 것, 그는 게으른 것 같아도 쉬임없이 절치부심 날을 세운다. 어느날 느닷없이 문장을 들고 나오거나 조형을 들고 나온다. 무엇을 들고 나온들 예사롭지 않다. 같은 식으로 남먼저 구사하게 된 것이 바로 현대서이다. 그는 작업을 위하여서 몰두할 때는 그야 말로 혼신의 노력을 기울인다. 그는 어렵더라도 글씨의 원전을 들어내놓고 그 수용의 폭을 확대 재해석한다. 이에 소용되는 것은 문장과 조형과 재료의 합일이었다. 무슨 내용을 어떠한 형상으로 쓸 것인가, 아니면 무슨 재료를 사용하여 서사하면 좋을 것인가 하는 모색을 거쳐 순전히 작가 개성이 되어 나타난다.
목인의 경우는 보통 서가의 경우와는 분류를 달리 하여야 한다. 무엇보다 우선하여 그는 쓰되 무엇을 쓸 것인가의 고민보다는 어떻게 쓸 것인가 하는 점에 더 관심을 갖는 작가이다. 따라서 그의 작품에서는 되도록 '이것을 쓴 것입니다.'라는 보고는 하지 않으려 한다. 이왕에 서사된 것이라면 그도 형상과 내용의 조화를 고려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것을 목인은 미리 짐작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가 구사하는 조형의 근원은 당연히 글씨에서 출발하지만, 어떤 이유에서든지 간에 낙서화적 회화가 아닌 재해석된 조형을 통해 다시 서예술로 귀착시키고 있음을 본다.
생각했던 것이 형상으로 나타나지 않을 경우 그는 누구의 간섭도 배제한다. 당연히 가장 먼저 그 자신이 납득을 하려들지 않는다. 이 부분에서 그는 확실하게 다시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튼 부정에서 긍정을 찾아내는 것이란 말처럼 쉽지가 않다. 실전을 통한 조형성의 분명한 확인이 필요한 것이다. 왜 그런지를 아는 사람을 만나기란 그리 쉽지 않다. 일찍부터 다양한 실험을 거친 목인의 서예세계는 일반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는다. 그것이 바로 서예가 가야할 또 하나의 바람직한 방향의 작업인 것이다.
(10) 소헌 정도준 / 전형의 개선을 위한 노력파
날이 새면 왕희지를 보듬다가 육조를 펼치고는 안진경으로 해가 진다. 지금까지 한국 서예계가 우리 나름의 독창적인 글씨꼴을 모색하는 노력을 기울인 예는 역사적으로 그다지 많은 편은 못된다. 그러나 지금은 변화를 추구하는 노력들이 경향간에 적지 않게 드러나고 있다. 한글의 여염체를 들먹이는 것이 그러하고 한자꼴의 독창성 주장 역시 그러하다. 이러한 움직임은 특별한 거부반응을 불러일으키지 않고 점차 수용이 되고 있는 것은 매우 바람직한 현상이라 생각한다.
소헌 정도준의 전통을 업은 개성미의 모색은 경직된 서단의 정황 아래에서 비교적 두드러진 활동을 하고 있는 경우이다. 아직까지 그는 자타가 공인하고 있듯 전통양식의 전형을 추구하는 서예가이다. 그러한 그가 탈전통을 서사양식에서 찾으려 하고 있다. 한자에서의 독자노선 추구와 한글에서의 개성미 강조가 바로 그러한 분위기의 연출을 증거 하는 좋은 예이다.
탈전통이라는 양식의 추구는 최근에 와서 그의 서사 전반에 걸쳐서 나타난다. 그러나 지금까지 전형으로 알고 있었던 고전의 양식을 급작스럽게 벗겨내지 않고 있는 것은 근본적 이탈이 아닌 표정의 실상변화를 꾀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소헌이 국전 제18회(1969년)때 처음으로 입선을 한 것은 최현의 <황학루시>를 쓴 것이었다. 그후 대학생의 출품금지 조항에 의해 소강상태, 졸업 후에 22회의 입선, 24회 이후부터 국전이 막을 내릴 때까지 한번도 거르지 않고 이름을 올린다.
그 다음 미술대전으로 제도가 바뀌자 첫 대상(대통령상은 아님)의 영예를 안는다. 공모전에서의 입상이 가져다주는 심리적인 부담은 그로 하여금 서사의 새로운 모색의 과정을 거친다. 이는 전통 유교가문 출신으로서 선친의 명성이 그로 하여금 공부를 게을리 할 수가 없도록 만든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는 입상이 가져다 준 영예를 손상시키지 않고 자신을 다듬어 나간 대표적인 케이스이다. 그 어떤 루머에도 흔들리지 않고 오늘의 위치까지 오게 한 환경조건이라고 이라고 생각한다.
그는 최근 몇 년 사이에 여러 가지 사건을 일으킨다. 독일과 프랑스에서 그의 서예작품을 놓고 잔잔한 반향을 불러일으킨 것이 그것인데, 독일의 국립 슈튜트가르트대학에서는 그를 미대 명예교수로 대우한 것이다. 텔레비젼과 신문에 대단한 뉴스였다. 한국의 서예가 중 아무도 못한 일을 그가 저질러 놓은 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고유한 한글의 소개가 빠질 리 없다. 그들은 우리의 문자를 알고는 있었겠지만 그것을 우리의 문자를 알고는 있었겠지만 그것을 예술화했을 때, 어떤 양식의 미술이 형성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실상 알고 있는 것이 없었다. 단순히 작품만 보인 것이 아니라, 시연도 있었다.
그의 일정은 바빠진다. 약속을 한 현지의 교육은 어떤 일이 있어도 실천을 해야하고, 국내의 사정도 외면할 수 없는 입장인 것이다. 그러나 그는 부지런히 이러한 모든 것을 소화해 나가고 있다. 이왕에 해오던 중국 남경과의 정기적인 서예교류도 계속하고 있다. 이러한 활동들이 그로 하여금 지속적인 발전의 가장 큰 밑거름이 될 것으로 짐작을 하게 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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