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5. 성막을 세움(3) - 교회 건축의 예표-연합
“일하는 사람 중에 마음이 지혜로운 모든 사람이 열 폭 휘장으로 성막을 지었으니 곧 가늘게 꼰 베 실과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들을 무늬 놓아 짜서 지은 것이라 매 폭의 길이는 스물여덟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각 폭의 장단을 같게 하여 그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또 그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고 연결할 끝폭 가에 청색 고를 만들며 다른 연결할 끝폭 가에도 고를 만들되 그 연결할 한 폭에 고리 쉰 개를 달고 다른 연결할 한 폭의 가에도 고리 쉰 개를 달아 그 고들이 서로 대하게 하고 금 갈고리 쉰 개를 만들어 그 갈고리로 두 휘장을 연결하여 한 막을 이루었더라 그 성막을 덮는 막 곧 휘장을 염소 털로 만들되 열한 폭을 만들었으니 각 폭의 길이는 서른 규빗, 너비는 네 규빗으로 열한 폭의 장단을 같게 하여 그 휘장 다섯 폭을 서로 연결하며 또 여섯 폭을 서로 연결하고 휘장을 연결할 끝폭 가에 고리 쉰 개를 달며 다른 연결할 끝 폭 가에도 고리 쉰 개를 달고 놋 갈고리 쉰 개를 만들어 그 휘장을 연결하여 한 막이 되게 하고 붉은 물 들인 숫양의 가죽으로 막의 덮개를 만들고 해달의 가죽으로 그 윗덮개를 만들었더라 그가 또 조각목으로 성막에 세울 널판들을 만들었으니 각 판의 길이는 열 규빗, 너비는 한 규빗 반이며 각 판에 두 촉이 있어 서로 연결하게 하였으니 성막의 모든 판이 그러하며 성막을 위하여 널판을 만들었으되 남으로는 남쪽에 널판이 스무 개라 그 스무 개 널판 밑에 은 받침 마흔 개를 만들었으되 곧 이 널판 밑에도 두 받침이 그 두 촉을 받게 하였고 저 널판 밑에도 두 받침이 그 두 촉을 받게 하였으며 성막 다른 쪽 곧 북쪽을 위하여도 널판 스무 개를 만들고 또 은 받침 마흔 개를 만들었으니 곧 이 판 밑에도 받침이 둘이요 저 판 밑에도 받침이 둘이며 장막 뒤 곧 서쪽을 위하여는 널판 여섯 개를 만들었고 장막 뒤 두 모퉁이 편을 위하여는 널판 두 개를 만들되 아래에서부터 위까지 각기 두 겹 두께로 하여 윗 고리에 이르게 하고 두 모퉁이 쪽을 다 그리하며 그 널판은 여덟 개요 그 받침은 은 받침 열여섯 개라 각 널판 밑에 두 개씩이었더라 그가 또 조각목으로 띠를 만들었으니 곧 성막 이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성막 저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요 성막 뒤 곧 서쪽 널판을 위하여 다섯 개며 그 중간띠를 만들되 널판 중간 이 끝에서 저 끝에 미치게 하였으며 그 널판들을 금으로 싸고 그 널판에 띠를 꿸 금 고리를 만들고 그 띠도 금으로 쌌더라 그가 또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휘장을 짜고 그 위에 그룹들을 정교하게 수놓고 조각목으로 네 기둥을 만들어 금으로 쌌으며 그 갈고리는 금으로 기둥의 네 받침은 은으로 부어 만들었으며 청색 자색 홍색 실과 가늘게 꼰 베 실로 수놓아 장막 문을 위하여 휘장을 만들고 휘장 문의 기둥 다섯과 그 갈고리를 만들고 기둥머리와 그 가름대를 금으로 쌌으며 그 다섯 받침은 놋이었더라(출36:8~38).”
가. 성막의 덮개
성막을 세움 두 번째이다. 전에 성막의 계시에 관해서 말씀을 나누었는데, 이것을 실제로 건축하는 것을 다시 반복해서 말씀 드리고 있다. 열 폭 앙장으로 성막을 지었다. 엄격하게 말해서 전체가 다 성막이지만 성막은 맨 안쪽에 있는 장을 성막이라고 한다. 천으로 만들어진 지붕이다. 안에서 보면 천정이 있는 곳을 성막이라고 한다.
1) 베실로 짜고 청색 자색 홍색실로 그룹들을 수놓음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짜고 거기에다가 그룹들을 수놓았다. 이 그룹들은 어떤 이상한 형상이다. 천사의 형상이라고도 하는 어떤 모양, 영광을 상징하는 어떤 모양을 나타내 놓은 것이다. 이것이 바로 그룹이고 천사라고 할 수도 있다. 그것을 수놓았다.
청색은 하늘의 속성을 상징하고, 자색은 왕의 속성을 상징하며, 붉은색은 생명을 상징하고 구속의 속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리고 이것은 그리스도의 인격의 속성을 묘사한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의 속성은 근원은 하늘에 속하고, 만유를 다스리는 왕권에 속하며, 우리를 구속하는 생명으로서 구속의 속성에 속한다.
이 성막은 베실로 짠 것이다. 이 베실은 인성을 상징한다. 성소의 내벽은 인성으로 되어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열 폭 장을 연결해서 한 막을 만들었다고 되어 있다. 매 폭의 길이가 20규빗이고 넓이가 4규빗인데 그것을 다섯 폭씩을 연해서 두 개를 만들고 그 두 개의 사이에 청색 고를 만들었다.
그것을 서로 연하게 하고 그것을 연결할 때는 금 갈고리를 만들어서 두 폭을 연하게 했다는 뜻이다. 다섯 폭 씩 해서 두 개를 만들고 그 둘을 고와 금 고리로 연결했다는 말이다. 청색 고 50개와 금 갈고리가 50개를 가지고 연결해 놓은 것이 성막이라고 할 수 있다.
2) 염소 털로 덮음
성막 위에 덮는 것이 있는데 그것을 보고 앙장이라고 한다. 열한 폭이라고 되어 있다. 염소 털로 만들었다. 염소 털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상징한다. 염소 털은 뻣뻣하고 좋은 것이 아니다. 양털이 좋은 것이지 염소 털은 나쁘다. 이것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장이 30규빗, 광이 4규빗으로 이것도 역시 다섯 폭을 하나 연결하고 여섯 폭을 하나 연결했다. 왜 한 폭이 더 많은가 하면 앞을 가리기 위해서, 전체를 가리기 위해서다. 안에 있는 성막이 전혀 보이지 않도록 가리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길이도 10규빗이 더 길고 또 넓이도 한 폭이 더 넓게 만들어졌다.
3) 수양의 가죽으로 덮음
그리고 그 위에 덮는 것이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인데 이것을 막의 덮개라고 말한다. 이것은 죄인의 모습으로 죄인을 대신하는 구속의 주가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4) 해달의 가죽으로 덮음
그리고 그 마지막에 그 덮개 위에 또 덮개를 했는데 그것은 해달의 가죽으로 덮었다고 했다. 이것은 사망을 이기시고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성막은 맨 안쪽에 성막이라고 불리는 천으로 되어져 있는 막이 하나 있고, 그 위에 염소 털로 짠 것이 하나 덮여 있고, 다시 그 위에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으로 덮여있고, 또 다시 그 위에 해달의 가죽으로 덮여서 네 겹으로 덮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모두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막이다.
여기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인격의 여러 면들을 볼 수 있다. 천이 된 면, 심판 받고 다듬어지고 씻겨 진 그리스도의 인성, 자신은 죄가 없지만 죄인을 대속하기 위해서 죄의 육신의 모양이 된 그리스도이다. 누가 봐도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었지 특별하게 생긴 사람이 아니었다. 오늘날 어떤 사람들은 예수님이 좀 특이하게 다르게 생겼을 것으로 생각할지 모르지만 전혀 그렇지 않고, 염소 털을 쓰고 있는 모습이다. 우리하고 똑같은 모습이라는 뜻이다.
그리고 붉은 물들인 수양의 가죽은 결국 우리를 위해 대속의 제물이 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마지막 해달의 가죽은 승리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바다는 사망인데, 사망의 바다를 마음대로 헤엄쳐 다니는 동물이 해달이다. 사망의 바다를 이기고 나온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상징한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가를 보게 된다.
나. 성막의 세우는 널판과 받침대와 띠
1) 널판은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쌈
그 다음에 성막을 세우는 널판과 받침대와 띠에 대해서 말했다. 널판은 조각 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쌌다. 조각 목의 길이는 10규빗이고 광은 1.5규빗이었다. 남편에 20개, 북편에 20개, 서편에 6개, 그리고 모퉁이에 2개로, 모두 48개다. 동편에는 다 문이기 때문에 판자가 없다. 삼면만 벽으로 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안에 들어가서 본다면 벽은 전부 금만 보일 것이다. 조각목은 속에 들어있기 때문에 보이지 않고 금으로 쌌기 때문에 완전히 금으로 삼면의 벽이 이뤄졌다고 볼 수 있다. 천정은 완전히 수놓은 천으로 덮여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2) 판에는 두 개의 촉이 있어서 은 받침 위에 세움
그 각 판에는 두 개의 촉이 있어서 이것을 연결했다고 되어 있는데, 촉은 밑에서 은 받침과 연결하기 위한 것이다. 각 판은 촉으로 은 받침위에 세웠다. 널판 하나에 촉이 둘 씩 있고 각 촉에는 은 받침이 하나씩 있다. 결국 이 판자가 은 받침 위에 서 있는 셈이다.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쌌고 은 받침 위에 이 두 촉으로 세워져 있다. 이 받침은 은으로 만들고 각 판에 두 개씩을 했다는데, 한 쪽 촉에 하나씩이라는 뜻이다. 무거운 판자가 서 있으려면 은도 그만큼의 무게가 되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은이 굉장히 많은 것이다.
3) 띠는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금으로 쌈
띠가 있는데 이것은 조각목으로 만들어서 금으로 쌌는데 그것은 외벽을 싸기 위한 것이 다. 그래서 한 가운데를 길게 꼬았고 위에로 두 개씩 우리나라 태극기에 있는 모양(☵)처럼 만들어서 벽이 넘어지지 않도록, 벌어지지 않도록 만들어 놓았다. 남편에 다섯 개, 북편에 다섯 개, 서편에 다섯 개, 전부 같은 모양이다.
이것은 구속 위에 세워진, 신성이 충만한 인격을 상징한다. 은은 구속을 상징하고 금은 신성을 상징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의 충만은 어디서 온 것인가? 그 뿌리가 은이라는 말이다. 우리를 구속하신 자리에서 그 분은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다. 공연히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에 신성이 충만하신 것이 아니라 구속의 은 받침에서 나왔기 때문에 신성이 충만하신 것이다.
구속의 은 받침은 뿌리라고 할 수 있다. 근원, 근본이어서 나무 같으면 뿌리이다. 그것을 인해서 결국 판자가 서 있는 것이다. 조각목에 금을 입힌 판자가 저절로 서 있는 것이 아니고 은 받침위에 서 있는 것이다. 우리를 구속하신, 죄인을 대속하는 그 자리에서 그 분은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은 전적으로 구속에 기초하신 것이라는 것을 볼 수 있고, 우리의 영광도 역시 마찬가지로 그분의 구속에 기초하고 있는 것이다. 구속이 없이는 그리스도의 영광이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만일 그가 하늘로서 내려왔다면 그는 천사처럼 그럴 것이다. 구속이 없다면 천사와 다를 바가 없다.
천사는 우리를 구속할 수 없지만 죄의 육신의 모양으로 오신 그분이 우리를 대속했다. 그 대신한 자리에서 그분은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다. 우리가 경험상으로 봐도 우리가 누구에게 대해서 대속이 될 때 그 때 우리가 영광스러운 것이지, 그냥 스스로 영광스러운 존재는 없다. 은 받침 위에 섰을 때만 그것이 성막이 될 수 있다. 은 받침이 없이는 스스로 성막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볼 수 있다.
다. 장과 기둥
1)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장
그 다음은 장과 기둥인데, 이 장은 지성소와 성소를 가르는 장을 말한다. 휘장이다. 청색 자색 홍색 실로 그룹들을 수놓아서 짠 천으로 커튼을 의미하는 휘장을 만들어서 성소와 지성소 사이를 갈라놓았다. 그리고 기둥은 조각목으로 만들고 금으로 쌌다. 이 휘장도 금 갈고리를 만들어서 그것을 기둥에 걸쳐 놓게 했다. 이 기둥들은 역시 은 받침 위에 서 있다.
여기서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10:20)” 했던 그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를 상징한다. 성소와 지성소를 가르는 휘장은 어째서 휘장이 될 수 있는가? 그 역시 은 받침 위에 서있는 기둥에 걸쳐져 있기 때문이다. 그가 우리를 구속하신 자리에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가리는 휘장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하나님 되게 하고 사람을 사람 되게 했다는 뜻이다. 만일 그 휘장이 없다면 하나님도 하나님이 될 수가 없고, 사람도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죄인과 하나님이 만약 한 자리에 있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이 될 수가 없고, 또 사람은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세상은 모두 이렇게 물 타기를 하려고 생각한다. 어떤 종교를 통해서, 무엇을 통해서 물 타기를 하려고 한다. 특별히 도를 닦는다거나 하는 계통의 사람들은 휘장을 없애고 하나님과 사람이 마주 앉게 해보려고 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구속의 죽으심으로써 결국 하나님은 하나님이 되고, 사람은 사람 되게 그 자리를 갈라놓았다. 이것은 영원히 분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이 사람 안에서 이루어지게 하기 위해서이다.
십자가를 통해서 비로소 이 휘장이 찢어졌다고 말한다. 십자가 없이 그 휘장을 걷어버리는 것, 휘장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 이런 것이 도나 그런 종교 같은 것이다. 그런 종교들을 갖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그들은 하나님을 무시하고 자기들 속에 신성이 있는 것처럼, 그것을 개발하면 되는 것처럼 이야기한다. 이것은 바로 휘장을 인정하지 않으려는 것이다. 범아일여(梵我一如)라고, 사람이나 하나님이나 마찬가지이고 사람이나 하나님이나 만물이 다 똑같은 것이고 모든 만물 속에는 신성이 다 들어있다고 한다. 이것은 휘장이 없다는 말이다.
예수님은 분명히 자신이 그 휘장이 되셨다. 하나님께서는 십자가가 아니면 그것이 열려지지 않도록 하셨다. 이 자리가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계시해주신 자리이고 지성소의 자리이다. 십자가 없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만약 신성을 갖는다면, 십자가가 없이 어떤 방법으로든지 만일 신인합일이 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신비주의이다.
그 신비주의는 하나님과 사람을 구별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고 사람은 사람이지 절대로 사람이 하나님이거나 하나님이 사람이거나 그럴 수는 절대로 없다. 이 장은 바로 그런 의미에 있어서 예수님께서 오시기 전까지, 십자가에서 찢어지기 전까지 그 자리를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는 이 구별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우리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할 때도 이 구별이 확실해야 된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유용하다. 만일 구별이 없으면 십자가가 필요가 없고 어리석은 것이 된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 되고 말듯이 그렇게 되고 만다.
이것을 없애고 신성을 가져보려고 하는 사람들은 여러 가지 방법을 쓰는 것 같다. 도를 깨달으면 된다 하는 식으로 얼버무려서 넘어가려고 생각하지만 절대로 사람은 신이 될 수 없다.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히10:20)” 이 휘장을 열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다. 그리고 문장과 다섯 기둥이 있는데 지성소에 들어가는 곳을 휘장이라고 하고 성소에 들어가는 입구를 막는 것을 문장이라고 한다.
2) 문장의 기둥과 놋 받침
이 문장은 다섯 기둥으로 되어 있었다.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놓아서 가늘게 꼰 베실로 짠 것은 마찬가지인데 기둥이 다섯이다. 기둥이 다섯인 것은 사방에서 누구나 거기를 들어오도록 열려져 있다는 뜻이다. 휘장에는 기둥이 네 개이고, 통로는 세 개이다. 그것은 하나님께로 들어가는 문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신성이 아니면 거기를 들어갈 수 없다는 의미가 된다.
여기서 기둥은 금으로 쌌는데 받침은 놋이다. 휘장을 걸치는 기둥의 받침은 은이었는데 문장을 받치는 기둥의 받침은 놋이다. 이것은 심판을 의미하는 것이다. 성소에 들어오기 전에 심판이 먼저 필요하다는 말이다.
그리고 휘장 안에 들어갈 때는 이미 심판을 받은 것이다. 심판을 받고 구속함을 입은 것이다. 은 받침 위에 세운 것이다. 이것은 모두 우리의 경험을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께 가는 길을 아주 정확하게 묘사해 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금 갈고리와 기둥머리와 가름대는 다 금으로 쌌다. 문장을 걸치는 것도 금 갈고리이다. 기둥머리를 쌌다고 했는데 기둥머리에 모자처럼 캡을 씌운 것 같은데 그것도 금으로 되어 있다. 가름대 역시 금으로 되어 있다. 모두가 금으로 쌌다.
이것을 정리해보면 막은 네 겹으로 되어 있었다. 천과 털과 가죽으로, 종류는 세 종류지만 네 겹으로 되어 있었다. 이것은 인성 안에서 우리의 구속을 이루신 식물성과 동물성으로 되어 있는데, 인성 안에서 하나님께 희생 제물이 된 예수그리스도를 상징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널판은 48개인데 조각목에 금을 입힌 것이다. 인성 위에 입혀진 신성이다. 이것은 결국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한다는 의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는 분이다. 왜 그렇게 거하실 수 있는가? 그것은 은 받침위에 서 계시기 때문이다. 우리도 은 받침 위에 서야 신성의 충만 안으로 갈 수 있지 은 받침 없이 신성의 충만 안으로 가려고 하면 아까 말한 대로 그것은 도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 아니고 도사가 되는 것이다.
띠는 15개인데 조각목에다가 금을 입힌 것으로, 이것 역시 인성과 신성을 합한 것이다. 널판의 의미와 같은 것이다. 장과 문장은 청색 자색 홍색 실로 수놓은 천인데, 이것 역시 인성을 상징하는 것으로, 의로워진 인성을 상징한다. 심판 받고 정결해지고 다듬어진 예수 그리스도의 인성을 상징하는 것이다.
장의 기둥 넷은 조각목에 금을 입혔다. 문장의 기둥도 다섯 개인데 조각목에 금을 입혔다. 장의 기둥의 받침은 은이고 문장 기둥의 받침은 놋이다. 그리고 갈고리는 금이다. 이렇게 정리할 수 있다.
라. 교회건축의 예표
여기서 이것이 어떻게 교회 건축과 관계 되는가? 어떻게 교회 건축의 예표가 되는가?
1) 덮음
이것이 첫째로 덮음이었다. 막이기 때문에 덮는 것이다. 동물의 가죽과 천으로 덮는다. 교회는 그리스도로 덮여 있는 것이다. 그 덮개는 전적으로 우리와 상관되지 않는다. 전적으로 그리스도만의 유일한 사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사역으로 교회는 덮여져 있다. 그 안에 들어 있다.
우리가 생각하면 집을 지을 때에 벽을 먼저 세우고 지붕을 덮는 것이 순서가 맞다. 그런데 여기서는 덮개를 먼저 말하고, 그 다음에 벽을 이야기했다. 왜 그런가? 이것은 우리의 순서이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체험하는 순서이고, 교회를 체험해가는 순서이기 때문이다.
교회라는 덮개,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덮여 있는 것이다. 누구든지 그 안으로 먼저 들어와야 된다. 교회라는 덮개 안으로 우리가 먼저 들어온 것이다. 우리교회에 처음 오는 사람들을 볼 때, 그 사람들이 금 받침을 알고 오는 것은 아니다. 덮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하나님의 가려주심인 덮개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다.
시은소는 은혜를 베푸는 곳이라는 뜻이다. 법궤 위의 뚜껑을 시은소라고 말한다. 그것은 은혜를 베푸는 곳이다. 마찬가지로 성막의 덮개도 은혜를 베푸는 것을 상징하기 때문에 그분의 은혜의 가리움 안에 사람들이 들어오는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잘났다는 사람은 안 들어오고 자기가 뭔가 은혜가 필요한 사람이 그 덮개 아래로 들어온다. 그 날개의 덮음 안으로 들어온다. 시편을 읽으면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시17:8)”는 표현이 있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피하나이다(시36:7).”라는 말이 많이 나온다.
우리가 경험하는 하나님에 대한 첫 번째 길이 바로 이 덮음이다. 우리는 무언가 가려줌을 위해서 왔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고 자기 의가 드러나지 못했다. 무화과 잎으로 옷을 해서 입었다고 되어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것을 보고 가죽옷을 지어 입혔다. 이것은 은혜의 덮음이란 뜻이다. 그것을 그냥 다 벗겨 버리면 죽기 때문에 덮어 주었다. 그 덮어준 데서부터 구속이 시작된다.
오늘 우리도 어떤 사람들과 처음부터 완전하게 다 벗겨서 그 사람을 난도질해서 교회 안으로 들어오게 하는 것이 아니다. 교회의 덮음 안에서 치료를 받아야 되지, 다 벗겨서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생각하면 완전히 정리를 해서 들어왔으면 좋겠는데, 그렇게 해서 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성막을 들어가는 입구는 분명히 놋 제단을 통과해서 들어가도록 되어 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로 가는 길은, 우리가 성막을 건축함에 있어서는 덮개로부터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는 그의 덮음 안에서 시작되었다. 어떤 사람들도 우리 안에 왔을 때는 덮음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을 우리가 철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2) 세움
두 번째는 세움이다. 판자들을 세웠다고 되어 있다. 조각목에 금을 입힌 판자들을 세운다. 이 판자들은 은 받침 위에 세워진다. 구속의 은 받침 위에 이 판자를 세움으로써 정상적인 집이 되는 것이다. 우리가 모두 어디에 서야 될 것인가? 구속의 은 받침 위에 서야 된다.
항상 교회생활 안에 와서 무엇이 문제 되는가 하면 자기가 구속을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늘 깊이 인식하지 못할 때 그 때 늘 문제가 생긴다. 은혜를 입은 사람이라는 것을 기억하지 못할 때 문제가 생긴다. 세상에서도 사실 그렇다. 사람이 행복하고 불행한 것은 은혜를 아느냐 모르느냐 그 문제이다.
물론 전적으로 한 번도 은혜를 입어본 적이 없다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태어나서 버려져서 부모도 모르고 살고 세상에서 완전히 버림받고 살고 은혜를 하나도 받지 못하고 살았다면 부모 밑에 자란 사람에 비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의 출생 자체가, 생명으로 났다는 것 자체가 만일 이것이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그 자체가 은혜이다. 우리가 편하게 살고 잘 살아야 된다는 입장에서 본다면 그런 사람들은 은혜를 하나도 못 받은 사람들이다. 오히려 저주를 받은 사람들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만일 출생 자체가, 우리가 태어난 것 자체가, 인생으로 태어난 것 자체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우리가 태어난 것 자체가 하나의 은혜이다. 총은 만들어 질 때부터 총이고 칼은 만들어 질 때부터 칼이다. 밥그릇은 만들어 질 때부터 밥그릇이고 숟가락은 만들어질 때부터 숟가락이다. 이미 그것이 어떻게 사용되기 이전에 정해져 있는 것이다.
사람으로 태어났다는 것 자체가 이미 하나님을 표현하도록 지어져서 그 자체가 은혜이다. 그런데 사람이 그것을 깨닫는다는 것이 참 어려운 일이다. 왜냐하면 자기의 고통은 많고 은혜는 모르기 때문에 인생이 행복할 수가 없다. 만일 누구든지 이 사실만 깨닫는다면 불행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인생은 하나님을 표현하기 위해서 지어졌구나! 그것만 안다면 불행할 일은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이 감사하다.
내가 이렇게 살든지 혹은 저렇게 살든지, 이런 모양으로 생겼든지 저런 모양으로 생겼든지, 어떤 모양으로든지 다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다. 내가 키가 작으면 작은 대로 표현할 수 있고, 키가 크면 큰 대로 표현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다 감사한 일이다. 내가 눈이 하나면 하나로 표현할 수 있고 둘이면 둘로 표현할 수 있다.
눈이 없으면 없는 대로 표현할 수 있다면 모든 것이 다 행복하다. 문제는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서 지어졌느냐 안 지어졌느냐를 알고 모르는데 따라서 인생은 행복하기도 하고 불행하기도 하다.
우리가 세움을 입는 것, 서는 것은 은 받침위에 우리가 세워지는 것이다. 여기서 견고하게 세워지면 이것은 조각목에 금을 입힌 금판자이기 때문에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하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냥 우리가 종교적으로 생각해서 하늘로부터 내려왔다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그렇지만 그 사람 자신도 이 은 받침 위에 서있는 사람이란 것을 생각한다면 그가 왜 신성의 충만이 육체로 거했는가를 알 수 있다.
조각목과 금을 입힌 판자는 은 받침 위에 세워져 있다. 오늘 우리 인생은 구속의 은 받침 위에 세워져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 받침 위에 세워져 있다. 인생은 하나님이 쓰시려고 작정하신 그 위에 세워져 있다. 그것이 없으면 인생이라고 할 것이 없다. 인생이라 할 것이 없고 그냥 동물이다 이렇게 할 수밖에 없고 영장류의 하나라고 밖에 할 수가 없다.
받침은 은과 놋으로 되어 있었는데 은과 놋은 기초이다. 세상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는 놋이 기초이고, 하나님 안에 들어온 사람으로서는 은이 기초이다. 세상 사람들은 심판 앞에 서야 정상적인 사람이 된다. 심판이 없는 사람은 정상적인 사람이 될 수가 없다. 사람들은 모두 심판을 피하려고 한다. 어떤 방법으로든지 위장 전술을 써서 심판을 피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세상이다. 세상에서 똑똑한 사람은 위장 전술이 좋은 사람이다. 어떤 면으로든지 심판을 모면하고 회피해서 세상의 영광으로 가리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 위에 놋 받침을 두고 하나님께로 오려면 반드시 놋 제단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그렇게 되어 있다. 그런데 구속함을 받은 사람들은 다시 태어난 사람들이다. 다시 태어난 사람들의 기초는 은이다. 우리가 더 이상 심판 아래 있지 아니하고, 심판을 지나 왔기 때문에 우리의 기초는 항상 은이다. 우리를 구속하신 구속이 바로 우리의 기초가 된다.
3) 연합
그리고 성막은 전부 연결해서 되어 있다. 판자와 판자를 연결하고 천과 천을 연결하고 전부 연결해서 되어 있다. 이것은 연합을 의미한다. 교회는 결국 이렇게 연합을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연합이라는 속성이 없으면 교회가 될 수 없다. 판자들이 아무리 많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이 연결이 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집이 되겠는가? 천 조각이 아무리 많다고 할지라도 연결되지 않으면 어떻게 천이 되겠는가? 연결이 있어서 그것이 하나의 집이 되는 것이다.
옛날에 피혁 회사로 우리나라에서 유명한 곳이 대전 피혁이다. 옛날에는 가죽을 다뤄서 구두를 만들고 난 다음에 조각들이 있으면 그것을 다 버렸다. 거기서 수위 하던 사람이 그것을 버리는 일을 했다. 그러다가 5.16 후에 어떤 사람이 아이디어를 내어 그 조각을 붙여 천을 만들게 되었다. 등산복 같은 조끼를 보면 조각조각 붙여서 만들었고 지갑도 그렇게 만들었다. 그런 것을 만들면서 그 사람이 떼 부자가 되었다.
버리던 것을, 처리하던 것을 돈을 받고 팔게 되었다. 그 회사 사장이 좋은 사람이었을 것이다. 수십 년간 자기 밑에서 일하던 사람인데 그 사람이 그것을 가지고 돈을 버는 것을 보고 악질 같았으면 빼앗았을 것인데 빼앗지 않고 그 사람 몫으로 줬다. 대전 피혁이 부도나도 그 사람은 부자가 되었다.
그런 일이 있었는데 그때 서울에 가서 보니 집집마다 그것을 하고 있었다. 미싱기 가져다 놓고 신문지를 깔고 그 위에다가 그것을 놓고 쫙 연결했다. 오버로크 하는 기계를 가지고 연결을 하여 신문 한 장 크기씩 만들어서 납품을 했다. 그것이 등산복도 되고 가방도 되고 여러 가지가 되는 것이다.
그것을 연결했기 때문에 천이 되었다. 연결 안했을 때는 쓰레기였다. 그것을 처리하려면 얼마나 어렵겠는가? 가죽이라 태우려고 하더라도 냄새가 날 것이다. 요즘 같으면 태우지도 못한다. 그때는 공해라는 개념이 없어서 마구잡이로 태웠다. 그 태워야 될 재료들이 연결을 통해서 비로소 값비싼 천이 되었다.
교회는 어쩌면 이렇게 조각들이 연결하는 고리로 인해 연결되어서 하나의 집이 된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세상이 볼 때는 하나의 조각으로 보여서 다 버려져야 될 것들이고, 별거 아닌 것들이 모여 있는 것 같다. 가죽 조각은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런데 연결해 놓으면 하나의 작품이 되고 귀중품이 되었다.
그런 것처럼 교회도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지만, 연결이 되면 그것은 아주 귀중한 것이 된다. 나 혼자 잘날려고 생각하면 안 된다. 나 혼자 똑똑 하려고 생각하면 안 된다. 연결해서 천이 될 생각을 해야 가치가 있게 된다. 혼자로서는 가치가 전혀 없다. 연합할 때 가치가 있다.
마. 교회는 신성한 생명의 연합
여기서 고리는 모두 금으로 되어 있다. 고와 갈고리로 되어 있는데 고는 천이고 갈고리는 금이다. 이 천은 역시 인성이고 금은 신성이다. 이것도 역시 신성과 인성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다. 조각목에 금을 입힌 것이나 고에다가 금 갈고리를 채워서 연결시킨 것이나 다 같은 원리이다.
우리가 연합할 때 우리의 구속받은 인성과 하나님의 신성이 서로 연합되고 연결되어서 하나의 교회가 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세상은 왜 안 되는가? 구속받은 인성이 없기 때문에 안 되고 금 갈고리가 없기 때문에 안 된다. 교회는 왜 갈수록 더 온전해지는가? 이것은 구속 받은 인격이 고가 되기 때문이다. 영원하신 신성이 갈고리가 되기 때문에 점점 더 온전하게 연합되어져 가는 것을 볼 수 있다.
우리가 서로가 연합할 때 어떤 방법으로 연합할 것인가? 연합을 부르짖는 교회들이 많다. 그러나 아무리 부르짖어도 연합이 안 된다. 왜 연합이 안 되는가? 바로 이 요소가 없기 때문이다. 금 갈고리와 고가 없기 때문에 연결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자기 혼자 좋은 천일 수도 있고, 물들인 천일 수도 있다. 그러나 왜 연합이 안 되는가? 그것은 고와 고리가 없기 때문이다.
첫 번째는 고가 필요하고, 두 번째는 금 갈고리가 필요하다. 우리가 교회의 연합을 자세히 보면 고가 있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연합이 된다. 그리고 이 연합은 인간적인 연합이 아니고 신성한 연합이다. 그래서 육신으로는 연합이 안 되는 것 같다.
교회 안에서 보면 육신의 자녀에 대해서 부모들이 많이 걱정을 하고 나도 역시 걱정을 하는데, 육신의 자녀이다. 혈통으로는 생명 고리로 걸려 있고 끊을 수가 없다. 부모와 자식 간에는 끊을 수가 없다. 고리로 연결되었다는 말이 그 말이다.
그런데 교회로 연합을 하려고 하면 육신으로 연합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아무리 해도 안 된다. 이것은 다른 문제이고, 이것은 신성한 결합인 것이다. 육신으로는 낳으면 자동적으로 연결이 되어서 끊을 수 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 교회로 연합될 때는 신성한 어떤 것이 안 오면 연합이 안 되는 것이다. 신성한 고리가 없으면 연합이 안 된다. 물론 고도 필요하지만 신성한 연합이 없으면 안 되기 때문에 이 연합은 그냥 연합이 아니고 신성한 연합인 것이다.
이 신성한 연합은 신비롭게 오는 것인가? 꼭 그것만은 아니고 이 신성 안에서 나온 말씀이 이 금 갈고리가 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신성에서 나온다. 우리가 사람의 입으로 말하지만 출처는 어디인가 하면 신성에서 나온다. 신성에서 나온 말씀이 금 갈고리가 되어서 우리가 모두 연합되어 있다.
아무리 내 몸에서 나온 자식이라고 하더라도 이 신성한 말씀이 없으면 연합이 안 된다. 아무리 자식이 많이 낳아보았자 소용이 없고, 아무리 친해 봐도 소용이 없다. 부모 자식으로 친한 것과 교회로 연합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3)”하는 것이 바로 이것이다.
처음에는 같은 부모 자식이고 한 집에 살고 같은 밥 먹고 사랑하고 위해주고 이러면 자동적으로 될 줄 알았다. 절대로 자동적으로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자녀들한테 신성에서 나온 하나님 말씀이 공급되지 않는 한은 육신으로는 하나이지만 교회로는, 영으로는, 성령 안에서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우리가 지금 그것 때문에 노력을 하고 2세들이 어떻게 하든지 밖으로 흩어져 나가지 않도록 하고 있다. 그 동안은 그렇게 깊은 관심들을 못 가졌다. 자녀들이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렸을 때는 다 한집에 살아서 괜찮은데 크면 자기대로 의식이 생기고 자기대로 뭔가 갖춰지기 때문에 그때는 안 된다. 그래서 새로 잡아보려고 하면 안 된다. 하나가 되지 않는다.
이미 지나간 사람들은 어쩔 수 없다고 하지만 지금 어린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은 한 집에서 같이 사니까 된다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공급이 안 되면, 금 갈고리가 없으면 그것은 절대로 안 된다. 그 아이들도 무리한 일이 아닌 것이 그렇게 연결될 수 있는 요소가 없다. 연결할 수 있는 고와 금 갈고리가 있어야 되는데 그것이 없으면 될 수가 없다.
억지로 하려고 하면 무리가 생기게 되고 싸울 수밖에 없고 이야기를 듣다보면 속만 터진다. 전혀 의식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고 관심도 다르고 전부 다르다. 어떻게 저럴 수 있는가 하고 생각하게 된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을 만날 때는 당연히 그렇겠지 하고 생각했는데, 우리 자녀들한테서 그런 소리가 나오면 억장이 무너진다. 그런데 잘 생각해보면 그것은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씀이 없으면 그럴 수밖에 없다.
우리가 지금 연합되어 있는 것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연합될 수는 없는 것이고 전적으로 하나님께로 난 것이 우리를 연합하게 한다. 그러므로 교회가 너무나 신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정말 사람의 뜻으로 연결될 수가 없다. 돈을 준다고 오는 것도 아니고 잘해준다고 오는 것도 아니고 육신의 어떤 것 때문에 오는 것이 전혀 아니다. 이것은 전적으로 청색 고와 하늘에 속한 그 인격과 금 갈고리 때문에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연합이란 것이 참 신기한 것이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세계이다. 세상이 육신이나 이해관계나 이런 것으로 고리를 맺고 있다면 교회는 전적으로 청색 고와 금 갈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대구 사람들을 외부 사람들은 잘 모른다. 왜 대구 사람들이 똘똘 뭉쳐 있는가? 왜 배타적인가? 왜 지방색이 강한가? 물론 대구 사람 자신은 지방색이 강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다. 그렇지만 외부 사람들이 볼 때는 대구 사람만큼 지방색이 강한 사람들이 없다. 왜? 똘똘 뭉쳐있기 때문이다.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똘똘 뭉쳐져 있는가?
그것을 내가 연구한 바로는 어려서부터 크면서 계속 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계추라는 것이 있다. 대구처럼 계추가 많은 데가 없다. 다른 지방은 계추란 것이 없다. 계라는 것은 있어도 돈 넣고 순번 찾아서 돈 타는 그런 계가 있다. 대구처럼 연결고리를 위한 계추란 것은 없다.
여기는 어떤 이해관계 없이 계추가 있다. 그래서 한 사람이 계추를 몇 개씩 하고 있다. 교회 안 나오는 사람들은 매주 계추 가야된다. 왜 대구가 이렇게 식당이 잘 되는 곳이고, 전 세계적으로 식당이 유명한 곳인가 하면 계추 때문이다. 다른 것은 없다. 계추를 하려면 맨 입으로 하는가? 다 식당에 가서 한다.
교회 안 다니는 사람들은 매주 계추를 식당에서 한다. 한 사람에게 하나 둘이 아니다. 반창 계부터 시작해서 계속 있다. 전부 고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절대로 끊어지지 않는다. 끊어지지 않고 똘똘 뭉쳐 버린다. 이 고리 안에 들어오지 못하면 대구에 살기 어렵다. 어디로 연결 되든지 연결이 다 된다.
완전한 성막이고 완전한 연합체이다. 어느 한 쪽에서 이렇게 하자 해버리면 다 똑같다. 반대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아니라고 할 사람도 없다. 어디 찍자 해버리면 한꺼번에 다 찍어 버린다. 전부 고리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외부 사람들은 대구가 어떤 곳인지 전혀 모른다.
성막은 어떻게 연결되었는가? 교회는 어떻게 연합되었는가? 청색 고와 금 갈고리로 연합되었다. 이것은 신성한 연합이다. 육신의 연합 이외에 가장 연합이 강한 데는 대구시민의 연합이다. 영적으로 온전한 연합은 바로 교회이다. 청색 고와 금 갈고리로 연결되어 있다. 아마 정치가들도 대구를 잘 모를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모르고 대구를 공략해 보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다. 자기가 대구 와서 한 번 국회의원 해보겠다는 사람들이 있는데 절대로 불가능하다. 해봐야 백전백패다. 절대로 불가능하다.
교회는 연결로 되어 있다. 연합으로 되어 있다. 하나의 연합된 사회다. 영원한 것으로, 신성한 것으로 연합되어 있다. 무엇으로 연합되어 있는가? 이것이 중요하다. 무엇으로 연결되어 있는가? 교리로 연결되었나? 이것이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다. 어떤 데 가면 교리로 연결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교리로 연결된 것은 참 사람의 연합이 아니다. 어떤 데는 제도로 연합되어 있다. 개신교의 특색은 교리로 연합된 것이고, 천주교의 특색은 제도로 연합된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진정한 연합이라고 할 수가 없다. 그리고 참 신성한 연합이 아니다.
교회는 신성한 연합이다. 청색 고가 하늘에 속한 색깔이다. 청색 고와 금 갈고리로 연결된 것이다. 그리고 수놓아져 있다. 이것은 청색 자색 홍색실로 수놓아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격의 아름다움이다. 하늘에 속한 그리스도의 속성, 왕에 속한 그리스도의 속성, 그리고 구속에 속한 그리스도의 속성으로 수놓아진 것이다.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미덕의 속성이다. 이것으로 수놓아져 있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것이 있을지라도 수놓아진 천이 있고 금 판자가 있고 은이 있고 뭐가 다 있을지라도 이 연결고리가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연결고리 때문에 교회를 유지하고 있다.
오늘 우리가 연결되어 있는 이 연결고리는 신성한 연결 고리이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난 고리가 아니다. 어떤 의미에서 그렇게 되지 않는다는 것이 우리에게 슬픈 일이기도 하지만, 이것은 슬픈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우리한테 이것은 아주 영원하고도 신성한 것이다.
육친의 어떤 혈통보다 더 영원하고 더 완전하고 더 고귀한 새로운 혈통과 새로운 관계가 교회로 인해서 이뤄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인류가 얻어야 할 최종적인 사회는 바로 이 사회이다. 결코 다른 것으로 인해서 이루어진 사회는 영원한 사회가 될 수 없다.
아이들에게 밥도 잘 먹여서 건강하게 키워야 되고 공부를 열심히 해서 시켜서 취직 시켜야 하는 것은 기본적인 문제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만 하면 되는 것이냐? 그렇지가 않다. 하나님 말씀이 공급이 안 되면 마지막에는 다 헛일이 되어 버린다. 공부도 시켜보면 할 사람이 하고 안 할 사람은 안 한다. 아무리 하라고 해도 안 한다. 할 사람은 조금만 힘을 써 주면 자기가 취미가 생겨서 하고, 안 할 사람은 아무리 대주고 별것 다 해 주어도 안 한다.
부자 집 아이들이 돈 없어 공부 못하겠는가? 그것이 아니다. 하기 싫은 사람은 안하고 자기에게 취미가 없는 사람은 안 한다. 자기 복이고 아무리 취직 시켜 주어도 자기가 성질 안 맞으면 못 한다. 아무리 취직 시험에 잘 들어갔어도 자기가 못하는데 어떻게 하겠는가? 그것도 안 되는 것 같다.
사람이 제대로 되면 직장에 들어가면 제대로 일 하지만 사람이 제대로 안 되면 들어가 보지만 직장에서 못 견딘다. 서울 대학교 졸업한 사람이 직장생활 다 잘 할 줄 알지만 그렇지 않다. 직장 생활에 적응 못하는 사람이 너무나 많다. 각자 똑똑하기는 한데 직장에 들어가면 그것이 안 되어서 뛰쳐나온다. 다 자기 복 인 것 같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 말씀을 듣게 하고 깨닫게 하겠는가 하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중요한 문제이다. 그렇지 않으면 결국은 다 헛일이 된다. 자기 잘 났다고 뒤로 감사 할 사람이 얼마나 있겠는가? 우리 부모가 애써서 공부 잘 시켜서 이렇게 잘 되었다고 할 사람 거의 없다. 우리 부모가 나에게 이렇게 해서 공부 잘 했다고 한 사람 거의 없다.
공부 잘 한 사람은 자기가 잘 해서 된 것이고, 공부를 못한 사람은 부모가 무엇을 안 해 주어서 공부 못했다고 한다. 부모가 과외비를 안 주어서, 학원을 안 보내 주어서 그렇다고 한다. 공부 잘한 사람은 부모가 다 도와 주어서 공부를 잘 했다고 하는 사람이 없다. 자기가 잘해서 잘 되었다고 한다. 부모가 도와주어서 잘 되었다고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하나님 말씀을 주는 것이다. 안 주면 헛일이다. 지금 자녀들을 키우는 사람은 명심하기 바란다. 지금 내가 경고 했지만 또 안 들으면 다음에 분명하게 나와 똑 같은 이야기를 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하기 전에 명심하기 바란다. 지나간 사람은 할 수 없다. 안 지나간 사람은 명심하기 바란다.
주일 학교 열심히 보내길 바란다. 공부한다고 안 보내고, 시험 본다고 안 보내고, 어느 날에 가면 반드시 후회하는 날이 온다.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은 공짜이고, 아무것도 아닌 일로 생각한다. 학교에서 공부 하는 것은 귀중한 것이고, 이렇게 생각했다가 그것이 아니구나 하는 날이 반드시 온다.
신성한 연합, 이것이 없으면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다. 산성한 연합, 신성한 연결 고리, 그것을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한 일이다. 성막을 세움에 있어서 우리는 중요한 몇 가지 항목들을 보았다. 덮고 세우고 받치고 연결하고 수놓아진 것이다. 이것은 교회의 특색이라고 볼 수 있다.
[기도]
감사하신 아버지 하나님, 사방에 흩어져 있고, 장차 없어질 수밖에 없는 어떤 것들로 연결되어 있는 우리 사회를 하나님께서 신성한 연합 안으로 우리를 이끌어 주시고 영원하고 신성하고 아름다운 사회로 연합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의 사회를 우리에게 보여주시고 우리에게 누리게 하여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영원한 사회, 최종적인 사회가 우리 앞에 놓여 져 있고 이 사회를 위해서 우리를 선택하시고 우리를 그 안으로 부르셔서 하나 되게 하신 은혜를 감사하고, 당신의 신성한 계획안에 신성한 연합으로 우리가 하나 되게 하신 것을 감사합니다. 우리는 이 하나임을 가지고 세상에 대해서 복음을 전하고, 이 하나임을 전해서 세상이 모두 다 이 신성한 연합 안으로 합류할 수 있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시기를 원합니다.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