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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의 복음(2)
씨의 복음!
왜 이 말을 하고 싶었을까? 문제는 씨에 달렸다. 지금 우리나라에도 농부가 많다.
많은데 무슨 씨를 심느냐가
다 다르다. 무엇을 심고 있느냐가 다르다. 사과 심은 사람은 사과를 거둘 것이고 포도 심은 사람은 포도를 거둘 것이고 엉겅퀴를 심은 사람은 엉겅퀴를 거둘 것이다.
그와 같이 예수 심은 사람은 예수를 거둔다. 예수를 심은 사람은 다 예수를 거둔다. 예수를 심지 않았으니까 예수가 안 나온다.
다른 것이 없다. 씨를 다른 것을 심었으니 안나온다.
배를 심었으면 돌배라도 나온다. 맛없는 돌배라도 나온다. 그런데 배를 심지 않았다면 배가 나오겠나.
아주 단순한 문제이다. 농부는 많다. 그런데 무엇을 심었는지 안나온다. 이천녀동안 노력을 했는데 안 나온다. 씨가 노력한다고 바꿔지겠나. 바꿀수가 없다. 노력한다고 배가 감이 되겠나. 안되는게 씨다.
지금 사과를 맛있는 사과를 먹고 씨를 뱉어 내면 뭐가 나오는지 아는가. 원래 있던 능금이 나온다. 아니 맛있는 것을 먹었는데 씨는 다른게 나온다. 원래 씨가 그거였기 때문이다. 귤을 먹고 씨를 심었는데 모두 탱자가 나와버린다. 참 신기하다. 씨를 바꿀 수가 없다.
여러분, 창세기 1장 1절을 보면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 이랬다. 그러면 천지 창조의 씨가 하나님이라는 말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우리가 볼수 없다. 씨가 무엇인지 알수 없다.
내가 혼돈과 공허와 흑암의 깊음 위에 있을 때 나를 건져내신 이가 있다. 그분이 씨다. 그런데 그분이 누구인지 모르기 때문에 하나님이라고 부른다. 하나님이라는 말은 안다는 말이 아니고 내가 잘 모른다는 뜻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안다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많은데 그분의 형상이 안 된다. 하나님을 참으로 안다면 그분의 형상이 나온다. 참으로 모르고 다 자기 생각대로 하니까 뭐를 만들어 놓으면 딴 것이다. 만들어 놓으면 딴 것이다. 예수 심는다고 애써 심었는데 애써 심어 놓으면 딴 것이 나와 버린다.
맛있는 후지 사과를 먹었을 것인데 나올 때는 그 사과가 안 나오고 다른 게 나온다. 나도 그 세계에 있어 봤다. 가장 좋은 것을 내 놓는다고 내 놓아 봤다. 그런데 나오는 것은 다른 게 나와 버린다.
그래서 지난번에 진실이가 간증을 하던데 첫 번째는 존재에 관한 간증을 했다. 존재는 씨라는 말이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한 사람, 그 사람이 씨다. 씨. 그 사람이 씨인데 그 사람을 빼놓고 다른 것을 아무리 해도 안 나온다. 예수가 안 나온다. 보기 좋은 예수 심으면 안 나온다. 도로 토종이 나온다.
그러니까 존재, 존재, 나는 누구이냐? 나는 누구냐? 나는 하나님이 지어놓은 그 사람이다. 아무리 사탄이 가서 무엇을 만들어 놓았어도 나는 여전히 그 사람이다. 그래서 아무도 못 바꾼다.
사탄이 “네가 이것을 먹는 날에는 선악을 아는 일에 하나님 같이 될 것” 이라고 했다. 같이 되기는 언제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되는가? 거짓말이다. 그게 거짓말이다. 예수 잘 믿으면 이렇게 된다. 뒤로 가보면 안 된다. 그러니 거짓말이다. 하나님 잘 믿으면 이렇게 된다. 뒤로 가보면 안 나온다. 그러니 거짓말이다.
우리 지금 기범이가 씨 장사를 한다. 그런데 이것을 심으면 좋다고 해서 갖다 놨더니 나쁘게 나왔다. 여름에 풋고추가 참 맛있다. 그래서 순전히 안 매운 풋고추를 찾고 있는데 대구에서는 그것을 찾기 어렵다. 왜냐하면 기본적으로 맵다. 대구 사람들이 안 맵다고 하는 것은 매운 것이다. 기본적으로 맵다.
어제도 누가 고추를 하나 갖다 놔서 처음에 하나를 먹으니 안 맵더라. 그래서 하나를 더 먹었더니 와 매워서 입안이 아프더라. 속았다. 모양만 보고 속았다. 와따, 그러니까 잘못하면 속는다. 이천년간 안된 것이 또 되겠나. 속는다.
이제는 속지는 말아야한다. 속지는 않아야 되는데 어떻게 안 속을지를 모른다. 그래서 예수가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가 필요하다. 이 사람이면 안 속겠구나. 참 싫은 사람인데 이 사람이라야 안 속는구나. 누가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는 사람이 좋겠나. 제일 싫어하는 사람이다. 제일 싫어하는데 이 사람이라야 변질이 안 된다. 그러니까 변질이 안 되는 사람이다. 그런데 우리 눈에 너무너무 싫은 사람이다. 왜? 사탄에 속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묻는다. 너 어디가 있냐? 물었다. 찾았는 것이다. 그랬더니 두려워서 나무 뒤에 숨었습니다. 이것이 아담의 진실한 말이다. 그 이후로 아담은 한번도 하나님 앞에 얼굴을 내 놓은 적이 없다. 대신 내 놓았다. 양으로 내 놓고 꿩으로 내놓고 송아지로 내 놓고 대신 내 놓았지 자기가 직접 내 놓은 것이 없다. 자기 얼굴을 직접 하나님 앞에 보인 적이 없다. 왜냐하면 두렵기 때문읻.
또 하나님은 하나님대로 아담이 두렵다. 왜냐하면 자기는 영이요 생명이니까 몸이 없다. 그런데 아담은 몸까지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이 아담을 어떻게 하나님이 보겠는가. 우리 어렸을 때 초등학교에서 체육대회를 하면 하나는 눈을 가리고 하나는 신문지를 말아서 때리는 게임을 했다. 보나마나다. 한 사람은 보고 때리고 한 사람은 못 보고 있는데 어떻게 이기겠나. 마찬가지이다. 하나님도 야 이거 큰일 났네. 저 놈이 몸까지 가지고 있는데 어쩌지? 그래서 깊이 숨어계신 것이다. 오죽하면 깜깜한데 숨어계시겠는가.
그러다 어느 날 문을 확 열고 나왔다. 왜? 무섭지 않은 사람을 만났다. 무섭지 않은 사람이 왔으니까 문을 확 열었다. 성서의 휘장이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찢어졌다. 왜? 이제 사람을 만났으니까, 자기가 창조한 사람을 만났으니까, 겁이 나서 있는데 문을 열어야지 뭐 하러 깜깜한데 있겠나.
나는 바닷가에 살았다. 그래서 귀신 얘기가 많다. 그래서 골목만 돌아가도 으슥하니 여기 혹시 귀신이 없나 그렇다. 그런데 어렸을 때 동네 어른이 아니 죽은 놈이 산놈에게 어쩌겠냐고 하니까 생각해보니 그렇지 나는 살아 있고 귀신은 죽었지. 이 생각으로 상당히 담력을 얻었다. 귀신이 무슨 소용이 있어. 나는 몸도 있는데 저것은 몸이 없잖아. 이것은 만나도 괜찮아 한번 해보지 이런 담력이 생기더라.
야, 그러니까 생각해봐라. 하나님은 영이요 생명이니까 몸이 없다. 그런데 사람은 영도 있고 몸도 있고 지금 사람이 그것을 바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의 육신 속에 영이 있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영이요 생명이 있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렇게 됐다. 됐는데 사람들은 모르는데 하나님이 보면 두렵다. 우리도 사실은 인간을 보면 두려운 것이다. 언제 어쩔지 모른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오늘의 친구가 내일의 원수가 될수 있다. 무슨 이해 관계가 생기면 아담은 금방 친구가 원수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완전히 믿을수가 없다. 항상 한자락 깔고 있어야 한다. 조금은 숨겨 놓아야 한다. 다 내놓으면 안된다. 같은 사람끼리도 두렵다. 여러분은 그런 생각을 안 해봤는지? 한번도 안해봤는가? 그러면 번번이 속는다. 긴장 안하고 있으면 번번이 속는다.
그런데 하나님은 지금 누구를 대하고 있는가? 그 무서운 사람을 대하고 있다. 하나님으로서는 무서운게 사람이다. 원래 사람한테는 영이 있다고 하니 그러면 사람에게는 영도 있고 몸도 있고 하나님은 영밖에 없는데 누가 누구를 무서워하겠나. 영밖에 없는 하나님이 더 두려워한다.
왜? 하나님이 우리에게 안 오는가? 내가 두려워서 안 온다. 그런데 주여, 주여 하고 부르짖고 봉창 문 두드리다 안 되니까 망치를 가지고 와서 대문을 두드리고 있다. 그러니 더 무섭다. 문 안 열어주면 가는 사람도 있고 문 안 열어주면 때려 부수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다. 때려 부수고 들어오는 사람이 있으니까 도둑이라는 것이 있다.
그러니 사람이 무서운 것이다. 사람처럼 무서운 게 없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고 모른다. 언제 어떻게 변할지 모른다. 자, 그러니까 하나님이 자기 얼굴을 내 보일 수 없는 이유는 우리가 두려워서 그렇다. 그 날이 오면 아무도 하나님을 알려 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 하나님이 오시니까 그렇다. 하나님이 오시니까 하나님을 알려 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늘 예를 들지만 이몽룡이 향단이를 보내서 춘향이가 보고 싶다고 했다. 그랬더니 춘향이 하는 말이 ‘안수해 접수화’ 그 여섯 글자를 종이에 써서 보냈다. 기러기가 물을 따라다니는 거지 물이 기러기를 따라 다니느냐고 했다. 나비가 꽃을 찾아오는 거지 꽃이 나비를 찾아다니느냐고 참 유명한 말이다. 춘향전의 굉장히 중요한 말이다. ‘안수해. 접수화’ 그래서 이몽룡이 그 말을 알아듣고 가자. 오라는 말이다. 그래서 갔다는 것이다.
우리가 꽃이면 나비가 온다. 꽃이면 나비가 찾아온다. 꽃이 떠돌아다니면서 나비 찾아다니는 꽃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까 사람이 가만히 있으면 하나님이 오시는 분이다. 가만히 있으면 오시는 분인데 가만 있지를 못한다. 자기가 먼저 뭐를 하기 때문에 가만히 있지를 못한다.
예수를 만나니까 하나님이 그때야 안심이 되어서 휘장이 열리고 나오신 것이다. 야 이제 내가 지은 사람이 왔구나. 내가 가도 괜찮은 사람이 왔구나. 그 날이 오면 어른으로부터 어린아이까지 다 하나님을 알기 때문에 아무도 하나님을 알려 할 필요가 없다는 것인데 여러분 경험해 봐라. 이 자리에 있으면 하나님을 알자고 할 필요가 없다. 그 생각이 안 난다. 이상하다.
그러기 전에는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하나님을 알아야 하는데, 그래서 항상 숨어계신 하나님이라고 한다. 그 숨어계신 하나님을 찾으려고 산기도 다니고, 내가 한 삼년간 해봤는데 못 만나겠더라. 아니 숨어계신 분을 내가 어떻게 찾아내겠나. 사람도 숨으면 못 찾는데. 나는 주일학교에 가면 보물찾기를 하는데 하나도 못 찾겠더라. 다른 사람은 잘 찾는데 한 번도 내가 찾아본 적이 없다.
그러니까 나는 땅에 묻힌 보화를 못 찾는 사람이다. 잘 찾는 사람이 아니다. 아주 못 찾는 사람이다. 그런데 하나님을 찾느라 애를 쓰니까 하나님께서 내가 하나님을 찾지 않아도 되도록 은혜를 베풀어 주신 것이다. 하나님을 안 찾으니까 얼마나 편한지 모르겠다.
때가 되면 오시지, 필요하면 오시지 하니까, 오시는데 하도 찾아와서 바빠 죽겠다. 아니 나는 쉬고 싶어도 찾아온다. 그러니 어쩌겠나. 피곤해도 생각해보면 아니 내가 이러려고 있지 안 그러면 내가 있을 이유가 뭔가? 이 생각이 드니까 또 나가서 맞이하고 또 나가서 맞이하고 두 팀, 세 팀을 맞이하고 나면 피곤하다. 야 참 신기한 세계다. 존재의 세계.
그런데 이것이 죽음인 예수 안에서 발견됐다. 우리 존재가 발견됐다. 우리가 옛날에는 그랬다.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이 소리를 많이 했다. 그런데 나는 내가 죽으려고 해도 안 되더라. 어떻게 자기가 스스로 죽는지 모르겠다. 스스로 죽었다는 사람 아무도 못 봤다. 죽어야지만 있지 죽었다는 사람은 아무도 못 봤다.
여러분 봤는가? 나 죽었다고 하면 아 저사람 죽었네 하는 사람을 봤는가? 죽어야지 하는 사람은 많이 있지만 죽은 사람은 없다. 그러니까 헛된 말을 잘못 들으면 속는다. 자기가 속는다.
그래서 우리 존재는 예수 죽음 앞에 와야 발견된다. 다른데 가서는 발견이 안 된다. 공자님한테 가면 발견되나? 거기서는 안 된다. ‘나는 더 배워야겠구나. 나는 덕을 더 쌓아야 되겠구나.’ 이것이 발견되지 내 존재가 발견되지 않는다. 석가모니 앞에 가면 ‘아이고 내가 해탈을 빨리 해야지, 좀 더 해야지.’ 이렇게 발견되지 ‘아 나는 이미 완성이 되어 있네.’ 이렇게 발견이 안 된다.
가서 물어봐라. 내 말이 안 믿어지면 가서 물어봐라. 없다. 예수 앞에 가면 내가 발견이 되어버린다. 그러니까 자기를 알려면 예수 앞에 가야 한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알려면 예수 앞에 가야 한다. 안 가고 이리저리 빙빙 돌려봤자 자기가 발견이 안 된다. 자기가 발견이 안 되면 남을 의심을 한다. 그러니까 그 사람이 가면 가는데 마다 분열이 된다. 모두 의심하게 만들어버리니까 모두 하나가 안 된다.
바르트는 누구인가? 캘빈주의자들이 너무 외골수다. 너무 외골수다. 저래서 어떻게 세상과 교통을 하겠나. 성벽을 헐어라. 이것이 바르트 사상의 근본이다. 그래서 바르트의 말을 들으면 다 듣기 아주 좋다. 듣기는 좋은데 실속이 없다. 혼란만 생긴다. 사람은 원래 흔들리는 것이다 흔들리는 게 사람이다. 그 말도 틀린 말은 아니다. 아담이니까 흔들리지 위치를 떠났으니 흔들리지 당연히 두려워진다.
루터가 그랬다고 한다. 사람은 근본적으로 두려움이 있다. 그래서 그 두려움 때문에 종교를 찾는다고 그랬다고 한다. 거기 가면 어떻게 무마될까 싶어서, 인정을 받을까 싶어서 그래서 종교를 찾는다고 한다. 루터가 그렇게 말했다고 한다. 근본적으로 외롭다고 한다. 죽을 때 혼자 죽으니까.
로미오와 줄리엣이 같이 죽자고 했는데 같이 죽었나. 같이 못 죽는다. 죽을 때는 각자 따로 죽는 것이다. 그래서 같이 죽을 사람이 없으니까 인간은 외롭다고 한다. 그러니까 같이 죽자는 사람이 있어도 인간은 같이 못 죽는다. 같이 죽자고 해도 죽을 때는 나 혼자 죽는다.
그러니까 나를 어디서 찾겠나. 예수 앞에 가서 밖에는 나를 찾을 데가 없다. 여러분 한번 해봐라. 찾으면 거기 있고 못 찾으면 예수 앞으로 와야 한다. 못 찾으면서 계속 거기 버티고 있는 것은 미련한 것이다. 그러니까 내 존재는 예수의 죽음 앞에 와야 비로소 발견된다. 나는 이것이구나. 나는 이거구나 이렇게 발견된다.
그러니까 싫은데 어쩔 수 없다. 그 앞에 안가면 내 존재가 발견이 안 되니까. 싫다. 누가 그게 좋겠나. 예수 같은 위치가 누가 좋겠나. 다 싫다. 나도 싫다. 그렇지만 거기 안가면 내가 없는데 어쩌겠나. 내가 없으니 할수 없이 거기 가야 한다. 어차피 가야 한다. 그런데 내가 존재로 발견될 때 나는 이상하게 평안이 온다. 그때 평안이 온다.
방금 평안이가 나와서 얘기를 했다. 자기는 의사로서 그냥 할 일을 했는데 과분하게 칭찬을 받는 것 같다고 한다. 자기는 의사로서 일을 했으니까 담담하다. 자기 할 일을 했으니까 자기가 늘 하던 일을 했으니까.
나도 맹장 수술을 큰 병원에서 못한다고 했다. 전신마취를 안 하면 못한다고 했다. 그런데 호흡기 내과에서는 전신마취를 하면 못 돌아온다고 했다. 폐가 돌아올 힘이 없다고 절대 반대했다. 그러니 어쩌겠나. 그때 평안이에게 연락을 하니 와 보라고 하더라. 그래서 마취과장이 마지막 방법을 써 보겠다고 해서 수술을 했다. 안 그랬으면 맹장이 터져서 나는 죽었다. 터지면 죽을 것이 아니겠나. 그러니까 일상으로 하는 사람은 아무것도 아니다. 수술하는 사람은 얘기하면서 하더라. 나는 그때 정신이 말짱하니까 복음을 전하려고 했는데 자기들 끼리 떠들고 있으니 나는 할 수가 없다. 거기다 내 말을 하자고 끼어들어갈 자리가 없다. 자기들끼리 얘기하니까. 자기들은 그것이 일상이다. 그러니까 편안하게 수술을 하지 잘못하면 못한다. 수술하는 사람이 긴장하면 못한다. 그래서 일부러 얘기하면서 수술을 하는 것 같더라. 심각하게 하는 게 아니더라.
그러니까 우리가 제자리에 오면 그것이 일상이 된다. 존재 안에 오면 그것이 일상이 된다. 특별하게 어려운 것이 아니고 죽어야지 죽어야지 그것이 절대로 아니다. 그것은 속은 것이다.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어야지 그것은 속은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죽음이 왜 중요한가? 나를 나되게 하기 때문에, 나를 나되게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데 너무 중요하다. 뭐가 밥이 나오는가? 옷이 나오는가? 아무것도 나오는 것이 없다. 돈도 안된다. 그런데 너무 너무 중요한 것이다.
죽어도 주의 것이고 살아도 주의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죽으나 사나 마찬가지란다. 이런 마음이 어디서 생기겠는가. 존재가 나오면, 존재가 나오면 내가 누구인가 알아지면 세상이 달라지는 것이다. 세상이 완전히 달라진다. 어떻게 달라지는가? 내가 얘기를 안 하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도 사람마다 다르니까 일률적으로 이렇다 할 수 없다. 존재가 달라지면 분명히 달라지는 것은 확실하다. 나도 경험하고 다른 형제들도 경험한다. 믿어주라. 그것은 믿어주라. 내가 거기까지 와서 거짓말하겠나. 내가 모르는 말을 하겠나. 내가 아는 얘기하지 모르는 얘기 안한다.
그러니까 존재는 존재끼리 만나야 알게 된다. 예수, 참 보기 싫지만 그게 존재이다. 그래서 내가 그 앞에 부딪히면 내 존재가 발견된다.
두 번째는 사실에 대해 얘기하더라. 예수 사실, 다 같이 연결된 말이지만 그 사실이 뭐냐?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여기다 아무것도 붙일 수가 없다. 뭐 어쩌기 위해서 죽었다는 모든 것은 다 헛소리다. 내려 올수만 있다면 왜 못 내려왔겠나. 못 내려오니까 못 내려온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다.
우리 죄를 대신 짊어지고 죽은 것이다. 이것은 정말로 엉뚱한 소리이다. 나중에 사람들이 붙일 것이 없어서 예수를 미화시킨 것이다. 원래는 그래서 죽은 것이 아니다. 유대인에게는 참람죄로 죽은 것이고 제자들에게는 실망해서 버림 받은 것이다. 당연한 것이다. 유대인도 진실하고 제자들도 진실하고 예수도 진실하다. 다 진실한데 나중에 만든 사람은 진실하지 못하다. 진실하지 못한 사람은 나중에 만든 사람들이다.
그러나 사실은 무엇인가? 이것이 사실이다. 여기서 굳게 서야 한다. 이것이 사실이다. 좋든지 싫든지 사실이다. 왜 하필이면 내려오지 못한다는 말을 하냐? 그 말 좀 뺐으면 좋겠다. 죽었다는 말을 왜 쓰냐? 뺐으면 좋겠다. 이런 사람이 또 있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내가 계속 말한다고 했다. 그런 사람 때문에 내가 말을 하는 것이다. 나도 그러면 좋을 것 같은데 그런 사람이 있기 때문에 없어질 때까지 해야 한다.
야, 내려오지 못하고 죽었다 를 빼 버리면 뭐가 되냐? 하면 사람은 다 죽는 거 아니냐. 안 죽는 사람이 누가 있냐? 그래 버리면 김빠져 버린다. 김빠진 맥주가 된다. 심심해진다. 믿지 않는 사람은 그러지 않겠나. 아니 누가 내려 오고 안 내려오고 하냐? 당연히 못 내려오는 건데 그것을 가지고 왜 떠느냐 그럴 것이 아니겠나. 우리 교회에서도 그렇다. 아니 그것이 일상인데 왜 그것을 또 얘기하느냐고 한다. 그렇게 얘기하기 때문에 내가 또 얘기를 한다. 그 이유가 아주 중요하기 때문이다.
죽었다는 말을 왜 하냐? 죽었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듣기 좋다. 그런데 죽었다는 말을 하지 않으면 똥 누고 뒤를 닦지 않은 것 같다. 저 무슨 소리인가 하는 사람이 또 생긴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했다. 이 말만 해 놓으면 또 어떤 사람들이 의문을 제기한다. 내려오지 못했다는 것이 뭐 어떻다는 말이냐? 죽었다는 말이다. 이러면 에이 그런 사람이 어떻게 죽겠냐? 속으로 그런다. 그래서 그 말을 좀 뺏으면 좋겠다고 한다. 꼭 필요한 말이다. 정말로 꼭 필요한 말이다. 그래서 하는 것이다.
이 사실에 굳건하게 서야 한다. 좋든지 나쁘든지 내 기호에 맞든지 안 맞든지 이 사실에 굳건하게 서야 한다. 그래서 그것이 나라는 것을 발견할 때 그것이 나라는 것을 발견할 때 그때 우리가 예수와 하나가 된다. 그 사람을 보고 나도 그렇네. 나도 그래. 나도 그 사람이네. 그러면 그분과 하나가 된다. 연합하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그러면 하나가 된다. 사실이 만나니까.
그러니까 이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면 전부가 변질될 수가 있다. 사실이 아니니까. 기독교가 초대교회보다 훨씬 더 발전한 것이 아니고 훨씬 더 변질됐다.
그러니까 사실은 이것만이 사실이다. 다른 것은 사실이 없다. 그전에는 나도 복음서를 보기 전에는 신약성서를 바울이 거의 다 썼다. 바울의 말을 받아 쓴 사람들이 거의 썼다. 거기서 참 예수를 발견하기 어렵다. 자기는 알았겠지만 우리는 모른다.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고 하면 어떻게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냐? 이런 의문이 남는다. 모르는 일이 너무 많다. 바울의 얘기를 듣다보면 모르는 일이 너무 많다.
그러니까 바울이 희랍세계를 떠난 후에 로마로 간 후에 바로 사람이냐 신이냐 이런 문제가 생긴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어디로 발전했냐 하면 영지주의로 발전했다. 영지주의가 여러 가지이지만 이 경우는 사람도 됐다가 신도 됐다가 인간도 됐다가 신이 됐다가 이런 말이다. 필요한데로 합해지면 신이고 떨어지면 인간이고 이런 얘기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그렇게 변질되고 말았다.
그래서 요한이 삼십년 후에 교회를 보니까 그렇게 되고 말았다. 그래서 그것을 시정하려고 나온 것이 요한복음과 요한 1,2,3서다. 그러니까 예수가 사실에 근거하지 않으면 다 변질되고 만다. 그렇게 하려고 해서 그런 것이 아니고 갈 길이 그 길밖에는 없다. 변질로 갈수밖에는 길이 없다. 그러니까 우리가 아무리 예수를 잘 믿고 어쩌고 하려고 해도 사실이 아니기 때문에 시간 따라서 세월 따라서 지역 따라서 다 변한다.
바울이 로마에 갔을 때 또 달라졌다. 거기서 순교까지 했다. 그런데 로마에 간 기독교가 어찌 됐는가? 희랍에 있을 때의 바울의 종교하고 또 다르다. 그러니까 바울이 가는 데마다 열심히 씨를 뿌렸는데 이것이 뭔가 일치가 안 된다. 그래서 삼위일체라는 정치적 산물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타협이다. 그러면 내 인생도 타협밖에 길이 없다. 진실은 없고 타협만 있다. 그래서 정치가 사람의 꽃이라고 한다. 인생의 꽃이라고 한다. 그래서 정치학의 꽃이 협상이라고 한다. 협상할줄 모르는 사람은 정치가가 못된다. 협상을 잘해야 그 사람이 정치를 한다. 그런데 외골수로 간 것은 정치가가 아니다. 혁명가다.
그런데 하나님 나라도 정치로 하나님 나라가 되겠는가. 타협을 해서 하나님 나라가 되겠는가.
그러니까 사실에 근거한 복음이라야 한다. 사실에 근거해야 그래야 영원한 복음이 된다. 싫지만, 이 사실은 오도 가도 못하고 싫지만 여기 근거해야 한다. 여기에 뿌리를 박아야 한다. 반석위에 지은 집, 반석 위에 집을 지으려니 어렵다. 하지만 반석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모래위에 집을 지으면 안 되고 반석위에 집을 지어야 한다.
사실에 근거한 말씀, 사실에 근거한 복음, 이것만이 영원하다.
마지막으로 거룩, 거룩한 사람이 된다. ‘거룩’ 이라는 말은 구별된다고 했다. . 그런데 우리는 하나님 앞에 왜 못 서냐 하면 내가 거룩하지 못해서이다. 내가 생각할 때 거룩하지 못하다고 생각을 해서 못 서는 것이다. 항상 더럽고 부정해서 못 서는 것이다.
그런데 이제 이 사실에 근거한 이 사람은 부정이 없다. 소용이 없다. 왜? 늘 거짓말만 듣고 사니까 부정해 질 것이 아니겠나. 그런데 참말만 있고 사실만 있는데 뭐가 부정하겠나. 구별된다. 이 사람은 하나님이 볼 때 구별된ㄷ. 그래서 하나님 앞에 전혀 부끄럽지 않게 서는 것이다.
전에는 하나님 앞에 설 때 부끄러워서 못 선다. 거룩하지 못해서 못 선다. 그런데 이제는 하나님 앞에 거룩하지 못해서 못 설 일이 없다. 그래서 하나님 앞에 얼굴을 내밀고 살수가 있다.
어제 이 세 가지를 갈라서 말을 하는데 아주 똑똑하게 갈라서 말을 했다. 내가 부연 설명한 것밖에 없다. 오늘 나는 새 말을 한 것이 없다. 어제 진실이가 한 말에 부연설명을 한 것이다.
이게 내 딸이어서 그런 게 아니다. 자기 속에서도 아버지라는 생각이 멀어졌다. 그리고 다른 아버지다. 나도 딸이라는 생각보다 다른 딸이다. 이상한 세계고 신기한 세계다. 이것을 누가 경험해보지 않고 알겠나. 안 살아보고 모른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못 박혀서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사람, 참 싫지만 싫지만 내가 그것을 시인안하면 내 설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니까 시인하는 것만이 지혜다.
예수는 특이한 사람이다. 길을 물으면 내가 길이다. 생명을 물으면 내가 생명이다. 이러니 이 사람을 어떻게 알겠나. 다른 방법으로는 알 수가 없다. 공부한다고 알겠나. 이 문제 자체가 공부로 해결될 문제인가.
공부로 해결된다면 나는 못한다. 나보다 공부를 몇배나 한 사람이 많은데 내가 되겠나. 공부로 할 일이 아니다. 공부로 할 일이 있고 못할일이 있지 아기 낳는 것을 공부해서 하는가? 어떤가? 여자들이 많이 있으니까 어떤가? 아기 낳는 것을 공부해서 낳는가? 저절로 아기를 낳는다. 왜? 여자니까. 왜 쓸모없는 주머니를 달고 다니면서 없어도 되는 것인데 달고 다닌다. 딱 아기 낳을때만 필요한 주머니이다.
하나님은 정말로 온전하게 우리를 만들어 놓았는데 우리가 거짓말 하는 자에 속아서 곁길로 가서 그게 정상인줄 알고 살기 때문에 인생 문제는 끝없이 나오는 것이다. 끝없이 나온다.
그래서 누구를 만나도 절대 다른 얘기는 안한다. 했는데 걸려 들어가는 수가 있다. 왜? 나보고 왜 쫒아냈냐고 한다. 그러니 이것을 말을 안할 수가 없다. 그래서 사실은 이거다 하고 말을 하다가 걸려 들어가서 나는 내 할 말을 못하고 말았다. 할 만큼 했으니 모르겠다. 어찌될지는 모르겠는데 그 인간의 불평과 불만 여기에 말려 들어가면 죽을 때까지 해결을 못한다. 그저 예수 사건만 얘기해야 한다.
자길 형제는 무식하다. 그런데 사람을 살린다. 원래 무식한 사람이 아니다. 계대 특설반 나오고 경대 사대 영어교육과를 나왔다. 그런데 사람이 멍청해졌다. 나는 이 신기한 세계에 여러분과 사는 것이 너무너무 축복이다. 너무 축복이다. 이 말을 듣고 아멘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이 나한테는 얼마나 축복인지.
나는 오늘 앙케이트 조사를 해 보려고 했다. 안다 모른다. 아니다. 이것을 아주 솔직하게 말하는 앙케이트 조사를 해보려고 했다. 해도 괜찮다. 어차피 돌아올 것이니까. 하지만 손을 들라고 하면 안 들것이다. 잘 모르겠다면 손 들어보라고 하면 손을 안들 것이다. 무기명으로 앙케이트 조사를 하면 알 것인데 이번 집회에 이 씨, 이 씨가 확실히 나한테 알아져야 한다. 씨가 확실하게, 씨가 확실해져야 한다.
농부가 확실하면 되지만 농부라는 사람이 너무 많기 때문에 씨를 먼저 알아야 된다. 무슨 씨를 가지고 왔는지 먼저 알아야 되지 않겠나. 호박을 심으러 왔는지 가지를 심으로 왔는지 알아야 된다.
내일 하루밖에 시간이 없다. 이번에 강사가 자매들로 다 배정되었다. 아주 재미있는 말이 많이 나올 것으로 생각이 된다. 나는 씨만 얘기하려고 한다. 씨, 씨, 생명의 핵심, 씨, 씨, 변치 않는 씨다.
여러분 우리 교회 뒷동산과 건너편에 산을 가다가 자세히 봐라. 벚나무가 그쪽에만 야생하는 벚나무가 있다. 다른 데는 없다. 우리 교회 뒷산에서 건너편 산으로만 도랑도랑 벚나무가 있다. 그런데 야생종이 나왔다. 우리 교회 벚나무처럼 송알송알 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듬성듬성 피니까 그렇게 보기 좋은 것은 아니다. 듬성듬성 되어 있는 것을 개량해서 덩어리로 피도록 만들었다. 그러니까 보기 좋다. 새들이 먹고 가서 똥을 싸기 때문에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그 근처에만 난다. 여러분 자세히 봐라. 그 지역만 벚나무가 있다. 씨는 안 변한다. 절대로 안 변한다. 어디가도 도로 그 씨가 나온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간, 그 씨는 안변한다. 변종한 것은 갖다 놓으면 또 변종한다. 이번에 두 번째 나온 벚나무가 접이식 접꽃이다. 이것은 씨가 없다. 그러니까 이것은 변종된 것이다. 씨 없이 꽃만 피도록 바꾼 것이다. 그것이 우리 교회의 돌아가는 자리에 있는데 잎이 먼저 나오기 때문에 아름답지 못하다. 꽃만 피면 아주 아름다울 것인데 들어가는 길에 오른쪽에 나무 하나가 있었는데 꽃이 좋으니까 다 꺾어 가 버려서 앙상하게 뼈다귀만 남았다.
벚나무는 꺾으면 그 자리에 다시 나지 않는다. 전지해버리면 그 자리에 다시 나지 않는다. 그대로 놔둬야 한다. 그런데 모르고 벚나무를 전지해 버리면 버린다. 다른 나무는 자르면 또 나온다. 그런데 이것은 자르면 더 안 나온다.
무궁화는 잘라주면 해마다 많이 핀다. 그래서 우리 집 앞에 있는 무궁화나무가 드문드문 피어서 보기 좋지 않은데 나라사랑하는 마음으로 심었는데 이것이 잘 안 된다. 그래서 이번에 싹 깎아 버렸다. 거의 반으로 깎아버렸다. 다음에 보겠지만 금년은 조금 늦은 것 같고 그렇게 되면 전부 꽃이 확 핀다.
그러니까 해마다 무궁화나무는 잘라줘야 한다. 우리 교회에 심은 무궁화도 그렇게 키워야 한다고 해서 해마다 잘라준다. 키가 안 크고 거기에서 퍼지고 퍼지도록 되어 있다. 그러니까 깎아줄 놈은 깎아주고 그냥 둘 놈은 그냥 둬야 한다.
하나님께서 만들어 놓은 것은 안 변한다. 사람이 바꾸어 놓아도 도로 온다. 지금 반대하는 사람들 도로 온다. 갈 데가 없다. 답을 찾는다면 갈 데가 없다. 그냥 그대로 살다 죽겠다 하면 몰라도 답을 찾겠다고 하면 돌아온다. 답을 찾는 사람은 답이 없는 데가 계속 있겠나. 답이 있는 데로 오게 된다.
우리가 씨가 확실하면 그 사람들이 오기 더 좋을 것이 아니겠나. 그래서 우리가 확실해지는 것이 그 사람들을 살리는 길이 된다. 그러니까 전부 다 하나님께로 돌아올 날이 오고야 말 것이다. 그 날이 하나님 날이다
첫댓글 새판에서 새 삶을
살아내는 십못내 인생!
목사님의 미덕도 악덕도
끝나고 사실로의 예수!
사실로의 십자가에
못박혀 내려오지 못하고
죽은 예수판으로
옮기신 우리 주님을
영원히 찬양하면서,
구속의 복음은
미덕의 차원도
악덕의 차원도 아니다
오직 십자가에서 내려
오지 못한 예수 안에
있는 나 자신이라는,
나의 운명
나의 위치
나의 정체성의
차원이라는 사실
우리의 복음이다.
얘수 안애서 첮은
나는 미덕도 악덕도
아닌 사람일 뿐이다
다른 판에서 만나자
선악을 말하는 판이
아닌 다른 판에서 만나자
하나님 문제가
해결되면 나의 문제는
끝나고 절로 해결된다
이것이 새판이다
하나님이 정해 준
당신 필요에 적합한
배역을 충실히 연기하면
되는 위치가 십못내 사람!
한 사람만 잘해서
되는게 아니고 모두 다
잘해서 각자의 위치를
자기로 충실히 살면된다
나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나는 편하지만
하나님 나라가 안된다
애굽에 종살이
하는 것과도 같다.
목사님은 내가
좋다고 따라오지도
내가 싫다고 버리지도
말아 달라고 부탁하신다.
복음은 좋고
나쁘고와 상관 없는
다른 문제라시면서...
온전한 씨앗이
십못내 사람 예수로
준비 완료 되었으니
이 씨앗 예수 안에서,
너와 나 그리고 우리는
모두가 이 씨가 되어,
나 자신이 길이요
나 존재가 생명이요
나 존재가 하나님의
영광스런 형상의 사람!
자조감이 없어
자존심으로 속아서
살았던 곳에서 새판의
삶이 어린 아이부터
어른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을 알라하지
않아도 되는 쉽고도 쉬운
새판의 새 복음시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