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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맞이할 마지막 준비 딤후4:6-8
주신 말씀 딤후4:6-8절을 중심으로 [예수님을 맞이할 마지막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함께 은혜의 시간이 되기 원합니다.
바울 사도는 3장에서 말씀의 진리 안에서 말씀의 진리 안에 거하는 삶의 권면과 성경의 유익성에 대해서 말하고 난 다음 4:1-5절에서 상황을 초월하여 말씀 전파에 힘쓸 것과 이단이 극성을 부릴지라도 낙망치 말고 근신과 인내로 전도인의 직무를 다하라 권고했습니다.
이제 본문에서 일생 전도자로서 선한 싸움을 싸워온 바울 자신의 삶을 회고하면서 주의 사역에 헌신한 모든 자들에게 반드시 주께로부터 의의 면류관이 주어질 것이라는 확신에 찬 신앙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지난 주까지 주기도문의 부름 즉 하나님의 이름을 분명히 불러 우리가 누구에게 기도하는지를 확실히 하라고 하였고, 청원에서 하나님께 대한 청원은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고 하나님의 나라가 확장되어야하며 하나님의 뜻이 성취되기를 기원해야 한다 했지요. 우리에 대한 청원으로 공동체가 함께 쓸 만한 양식과 물질의 공급, 우리의 죄는 덮어주고 도말해 주시고 시험을 이겨 악에서 구원해 주기를 간구하라 했습니다.
마지막 송영은 나라와 권능과 영광에 관한 내용입니다.
인생을 마치면서 한 직장에서 퇴직하면서 한 해를 보내면서 마지막 남길 말이 무엇인가가 매우 중요합니다.
여러분이 남길 마지막 말은 무엇인가요?
첫째로 전제로 부어 드림으로 떠날 준비를 하라 합니다.
둘째로 의의 면류관을 기대하라 합니다.
셋째로 모든 영광은 하나님께 올려 드리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바울을 통해 마지막 남기고 싶은 말씀인 복음 전파의 당부를 하시고 하나님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을 위해 기도하라 하십니다.
예수님을 맞이할 마지막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전제와 같이 나를 부어 드리라. (딤후4:6)
짐승을 희생제로 드릴 때 각을 떠서 십자가 형태로 놓고 불로 태워 드리는 것이 번제입니다. 번제에서 마지막 까지 태워 드린 후 짐승을 잡을 때 병에 담아 두었던 피를 마지막으로 부어 드림으로 끝이 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기 위해 먼저 짐승을 잡았습니다.
다른 동물들은 본능적으로 자기 죽을 때를 안다고 합니다.
그런데 유독 인간만은 미련하고 어리석어서 자기 죽을 때를 모르고 마지막까지 발버둥을 칩니다. 다른 동물들은 뒷걸음치거나 발버둥을 치는데 양만은 날 잡아 잡수세요 하고 목을 빼고 기다린다고 합니다. 순종하는 삶입니다.
주님 제가 여기 있사오니 명령만 하시면 그곳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지라도 고난과 환난과 시련의 연속일지라도 제가 감당하겠으니 말씀만 하옵소서 하는 온전한 순종의 삶을 살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흠없고 정결한 짐승을 잡고 난 다음 각을 떳습니다. 똥같은 더러운 것들은 버리고 깨끗한 부분만 취사선택해서 드렸습니다. 정결한 삶입니다.
하나님께서 완전하신 분으로 더러움을 용납하지 않으시기에 거룩하고 정결한 삶이어야 하는데 우리 인생으로 그런 삶이 되지 못하니 오직 십자가 은혜로만 우리의 죄가 주홍같을지라도 눈보다 더 더 희게 되어 정결한 제물로 주님께 드림이 될 줄 믿습니다.
그리고 불에 태워 향기를 올려 드립니다. 그리스도의 향기 즉 예수 닮은 자 예수님처럼 아름다운 향기 사랑의 향기를 올려 드리는 사랑의 삶입니다.
예수님의 향기는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사랑이란 향기를 나타내게 됩니다. 내가 먼저 낮아지고 겸손히 섬기는 사랑입니다.
노블리스 오블리제라 하나요. 나의 특권을 자랑하기 전에 내가 누리는 특권이 크면 클수록 먼저 내가 책임과 의무를 다하는 사랑을 말합니다.
전주 노송동에 수천만원을 이름없이 기부하는 분의 사랑 같은 이타적인 사랑을 말합니다. 이제 전주 시민은 그분의 나눔의 사랑을 배우고 닮으려 하고 그래서 3600명의 독거노인 고아 소년소녀 가장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주고 있는 그런 사랑을 말합니다.
제물을 드릴 때 연기가 하늘로 올려 드리는 데 기도의 삶을 말합니다.
기도는 대표기도 같은 예배기도, 새벽기도 같은 깊은기도, 금식기도, 철야기도, 작정기도....등등 여러 가지 기도가 있지만, 뭐니 뭐니해도 기도는 쉬지않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수년전까지만 해도 중직자가 새벽기도를 하지 않으면 중직자의 자격이 없다고 했지만, 요즘은 새벽기도는 조금 융통성이 생겨 각기 골방기도와 큐티로 대체하기도 하지요.
기도는 연기처럼 하나님께 올려 드리는 것으로 예수님께서 보좌 우편에서 계시며 이를 아버지께 올려 드리시면서 우리가 구하지 아니한 것까지 중보해 주시는 줄 믿습니다. 기도는 쉬지 않고 우리 삶의 현장에서 하나님께 끊임없이 진정성을 가지고 때로는 친구처럼 때로는 아버지처럼 하나님과 흐흡하듯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하나님께 제물을 드리는 마지가 단계가 바로 전제를 부어 드리는 것입니다.
이는 짐승을 잡을 때 깨끗한 그릇에 받아 놓은 피를 마지막으로 태워 드리는 것입니다. 피는 생명입니다. 몸은 죽고 각을 떠서 태워 연기를 올려 드린후에 피 한 방울까지 생명을 온전히 하나님께 드리는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우리 죄를 사해 주시려고 피 한방울 물한 방울까지 남기지 않고 주님께서 전제가 되어 우리 죄를 사해 주시므로 주님이 생명을 바쳐 죽으시므로 우리가 생명을 받아 영원한 생명에 이르게 되는 줄 믿습니다.
6절에서 전제와 같이 내가 부어지고란 말은 이제 시작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떠날 시작이 가까웠다는 것은 부두에 정박한 배가 이제 닻줄을 풀고 미지의 세계로 여행을 위해 떠날 준비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닻줄을 풀면 배는 항구를 떠나 미지의 세계로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가다가 하나님이 멈추게 하는 곳에 멈추어 정박하게 될 것입니다.
이 말을 하는 바울은 복음을 전하려고 다녔던 도시들과 그곳에 있던 사람들이 떠올랐습니다. 바울은 남은 시간을 주님께서 인도하시는 대로 가다가 멈추게 하는 그곳에서 삶을 마치고 주님께 가기로 작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순전한 희생제물처럼 자신의 남은 생명을 기꺼이 산제물로 드리겠다고 작정하며, 그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상급에 대한 확신과 소망이 죽음을 앞에 두고 있는 바울에게 용기와 희망을 준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아기로 연약한 모습으로 말구유에 비천한 베들레헴 낮은 곳으로 오셔서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셨습니다.
전제와 같이 부어지고 떠날 준비를 하므로 낮아지고 겸손한 섬김의 자세로 이 땅에서 사랑의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며 겸손의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예수님을 맞이할 마지막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둘째로 의의 면류관을 주실 줄 믿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라 (7-8)
최근들어 12월 전쟁발발 예언을 한 여자들, 거짓 땅굴 주장을 한 사람들이 국가안보의식을 저하시키고 , 하나님의 이름을 만홀히 하는 죄를 저지르며 자기들의 책장사에 눈이 뒤집혔고 이들에게 속한 많은 사람들이 해외로 피난을 하면서 선교하러 간다고 했다지요.
12월 2일 14일 18일 예언이 빗나가고 19일에 통진당 해산판결이 났으니 아마 이들은 통진당 해산이 전쟁이라고 생각한 모양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전쟁이 난다고 조국을 버리고 해외로 피난을 간다니 이 무슨 황당한 말씀입니까?
전쟁이 나더라도 이 땅에서 이 조국을 위해 기도하고 싸워야 하지 어디로 도망간단 말입니까?
이제 6,25때처럼 부산으로 피난을 간다고 제주도로 피난을 간다고 살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남북 쌍방의 미사일은 이미 전국토를 사정거리안에 두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있는 곳이 최후의 마지노선입니다.
도망갈 것이 아니라 내가 있는 이 곳을 최후방어진지로 삼아 악한 마귀세력과 싸워 이겨야 합니다.
한반도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객관적으로 국민총소득이 남한이 북한의 21배입니다. 총소득이 42배입니다.
무기의 현대화 전쟁지속능력 연합작전능력 외교전을 감안하고 북한이 핵을 보유하고 있다 해도 남한도 미국의 핵우산속에 있기에 남한이 이깁니다.
그러나 현대전은 고도의 무기체계를 갖고 있어 다량살상이 불가피하기에 인명과 재산 산업시설의 파괴로 남한이 이긴다 해도 역사의 시계바늘은 30년 이상 후퇴하고 말 것입니다. 폐허위에 승리가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북한은 개방개혁시켜 저들이 단 맛을 알게 하고 내부에서부터 붕괴시켜야 합니다. 잘살도록 저들을 지원하는 것이 승리의 길입니다.
쿠바를 고립시키지 않고 국교를 정상화시키겠다는 오바마의 전략은 훌륭합니다. 타산지석이라고 우리도 배울 것은 배워야합니다.
바울은 선한 싸움을 싸웠다는 말은 싸우다 투쟁하다는 말 아고니조마이(άγωνίζομαι)는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계속하여 투쟁의 삶을 살았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한 싸움이란 군인이 전장에서 피를 흘리며 용감무쌍하게 싸운 것을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성도가 선한 싸움 즉 피를 흘리기 까지 목숨을 내놓고 혼신을 다해 싸우듯 그렇게 악한 마귀사탄의 미혹과 유혹 시험과 맞서 싸워야합니다.
운동선수가 최선을 다해 훈련하고 훈련에서 흘린 땅방울만큼 성과를 얻듯이 성도가 악한 세상과의 싸움에서 승리하기위해서는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들이 평소 훈련할 때 얼마나 최선을 다해 훈련에 임했는냐에 따라 메달의 색깔이 바뀌는 것처럼 하늘에서 상급을 받기 위해서는 오늘 최선을 다해 악한 세력과 싸움에서 승리해야 하며 하나님 주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해야 될줄 믿습니다.
오늘을 살면서 내가 마지막 날을 사는 것처럼 그렇게 후회없고 보람된 하루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 곧 믿음의 선한 싸움을 싸우고 달려갈 길을 마치는 성도인줄 믿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에서 달려갈 길은 경주 코스를 말합니다.
얼마 전 영국에서 마라톤 코스를 벗어난 참가선수들 (일등을 제외한 전원)이 실격 처리된 경우가 있었지요.
우리도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위탁한 복음전파의 길 사명의 길을 벗어나지 않고 온전히 순종하므로 아무리 어렵고 힘들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여 믿음을 지켜 마지각 결승점을 통과하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다메섹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 인격적으로 예수님을 단 한 번도 떠나지 않고 온전히 일생을 주님 주신 사명을 감당하기위해 헌신한 것처럼 오늘을 사는 성도들도 각기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운동선수가 운동규칙을 지키듯, 군인이 군대의 직속상관의 명령에 절대 순종하듯 , 청지기가 자신의 주인이 위탁한 재산을 잘 지키고 키운 선한 청지기처럼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신실하게 지켜야 할 줄 믿습니다.
이제 후로는 이라는 뜻의 ‘로이폰(λοιπόν’)은 ‘이제 남은 것은’ 이란 뜻이므로 명백히 미래적인 전망이므로 6절에서 현재의 상황을 7절에서 자신의 과거 상황 그리고 8절에서 자신의 미래적 상황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성도의 믿음 생활은 과거로부터 현재에 이르기 까지 믿음에 관한 한 떳떳한 인생을 살아가는 바울의 신앙을 본받는 성도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과거 현재가 떳떳한 바울에게 남은 것은 바로 미래에 의의 면류관이 준비되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한 번 왔다가 한번 죽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앞에 부름을 받고 떠난다 해도 당황하지 않고 아멘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하며 오실 예수님을 기쁨으로 맞이할 준비가 된 성도되기 원합니다.
이 세상을 떠나 불교에서처럼 이번 생을 떠나면 다시 다음 생이 있고 다음 생에는 개로 돼지로 소로 태어날까봐 전전긍긍하지만 하나님의 자녀인 성도 여러분들은 하나님의 자녀로 하나님 나라를 통치할 상속자로써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기에 기뻐하며 감사하며 맞이해야 될 줄 믿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의의 면류관이란 결국 하나님께서 친히 마련해 주신 것으로 종말론적인 하나님 나라에서 수여되는 영원한 생명 및 충성된 자에게 주어지는 상급을 뜻합니다.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 다시 오심을 기다리며 주의 오심을 기다리는 모든 자와 더불어 영광의 면류관을 수여 받게 될 줄 사실을 확실히 믿고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말씀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지키는 모든 자들에게 하나님이 인정과 상급이 반드시 있으리라는 놀라운 영적인 진리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비록 지금은 고통스럽고 환난이나 시험이 어렵고 힘들지라도 심판장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의 때, 신앙을 지킨 자들에게 실제적인 보상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보상은 생명의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입니다.
믿음을 지킨 자들에게 이 세상의 모든 부와 명예와 쾌락을 합한 것보다 더 큰 피부에 와닿는 영원한 의, 생명, 영광의 보상을 충만히 받길 축원합니다.
예수님을 맞이할 마지막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셋째로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아버지 것입니다. (마6:13)
예수님은 성인으로 오시지 않고 왕궁에서 오시지 않고 말구유에 오셔서 하나님께 영광 땅에 평화를 주시고 성도에게 은혜를 주시므로 우리에게 기쁨이 되었고 구원이 되시고 영원한 안식처가 되신줄 믿습니다.
우리가 전에 사용하던 주기도문의 송영은 ( )로 된 것은 가장 오래된 사본인 시내산사본이나 바티칸 사본베자 사본등에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폼페이 발굴유적에서 빠테르 토스테르(PARTER NOSTER ) 발견됨으로 초대교회에서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사용된 것을 알 수 있고 KJV 흠정역에서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주 기도문의 송영은 [왜냐하면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영원히 아버지의 것입니다.]라 번역할 수 있지요.
성경에는 없지만 주기도문을 할 때 대개(大蓋)를 넣어 주기도문을 암송하곤 했는데 이 말 대개란 뜻은 ‘일의 큰 원칙으로 말하건대’라는 뜻인데 이는 접속사 호티(όʹτι)를 중국성경에서 인용하여 대개라 했지만 이 호티란 말은 왜냐하면 이란 뜻입니다.
이렇게 기도하는 표면적으로 이유를 밝히는 문장이지만, 내면적으로는 앞선 모든 간구를 마감하면서 우리의 모든 것이 나라와 권능과 영광을 영원히 지니신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다는 것을 최종적으로 신앙을 고백하는 깊은 의미까지 포함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기도문의 첫문장인 부름이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로 시작했듯 송영은 모든 것이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비롯되었음을 고백함으로 마침으로 절묘하게 대차대조법으로 조화를 이루고 있습니다.
즉 모든 기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성도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림도 하나님께 기쁨을 드리고 영광을 돌리기 위한 것이어야 합니다.
기도할 때 무조건 주시옵소서 하는 천민 자본주의적 기도가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감사와 찬미로 드리는 기도가 되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기도가 되어야 될 줄 믿습니다.
케일시에서 기독교 박해 운동으로 수감되었던 성자 니콜라스가 고아와 가난한 자를 위해 선물을 나누어 주던 성 니콜라스가 산타클로스가 되어 예수님의 자리를 차지하게 나두어선 안됩니다.
우리의 기도는 성숙한 기도가 되어 하나님께 영광을 돌려야 하고, 어린양으로 오신 예수님의 낮아지심과 겸손과 섬김과 희생과 사랑을 온전히 배워 예수님을 닮아야 하지만 우리 신앙은 믿음으로 구원 받는 것이지 선행으로 구원 받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믿는 성도 여러분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으려 합니다.
예수님을 맞이할 마지막 준비를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로 전제와 같이 나를 부어 드리라. (딤후4:6)
둘째로 의의 면류관을 주실 줄 믿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라 (7-8)
셋째로 왜냐하면 하나님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이 아버지 것입니다. (마6:13)
성탄절을 눈 앞에 두고 있습니다.
대림절 마지막 주간입니다.
내일(22일)은 동지입니다. 동지가 지나면 낮이 더 길어집니다. 새해입니다.
기도는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나를 맞추려는 행위이기에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 나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말구유에 오신 성자 하나님 나의 심령속에 찾아 오셔서 함께 하시는 성령 하나님께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거룩히 여김되어야 하고 나라는 확장되고 뜻은 성취되어야 하며,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 즉 물질을 주시고 우리의 죄를 덮어 도말해주시고 시험가 악에서 구해 주시기를 간구해야 하며, 하나님 나라와 권능과 영광을 위해 기도하는 성도되기 원합니다.
성탄을 기다리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을 맞이하기 위해 전제와 같이 나를 주님을 위해 부어 드리기 원합니다.
의의 면류관을 주실 줄 믿고 사명을 온전히 감당하기 원합니다.
모든 영광은 아버지 되시는 하나님께 돌리는 성도되기 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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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올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좋은 설교 감사합니다.
기쁘고 아름다운 성탄절 되세요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향한 성실한 모습으로 앞만 보고 달려야 할 텐데...!인간의 수단과 욕망으로 달리다 보면 달렷지만 역행한 결과는 부끄러움입니다. 관제와 부음이 되어도 오로지 주님의 흔적은 고난을 통한 결과인데 그것이 십자가의 대속의 은혜이라는 사실은 결코 잊지맙시다.
푯대를 향하여 달려갑니다^^
감사함니다!!
설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