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낙안읍성(사적 제302호, 전남 순천시 낙안면 동.서.남내리)은 마을을 둘러싼 성곽과 관아, 민가들이 오롯이 남아있는 조선시대 고을의 모습을 보여주는 탁월한 유산이다.
일반적으로 조선시대의 읍치는 고려시대의 그것과 다른 입지 조건, 도시 공간 구조와 경관 이미지를 갖추고 있다. 특히 조선시대의 고을은 산을 배경으로 그 앞에 관아가 형성되고, 관아 앞으로 백성들의 살림집이 들어서는 전형화된 조선적 고을 경관을 형성한다. 낙안읍성은 조선시대 읍성의 공간구조와 경관미학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에 속한다.
바로 이러한 읍성 공간구조와 경관은 한국과 이웃한 국가인 중국이나 일본의 지방 도시의 경관구조와 차별성을 갖는 특성을 이룬다. 낙안읍성 안에 형성된 마을은 조선시대 이래 현재까지 관청과 실생활의 주거 공간으로 이용되고 있다. 특히, 현존하는 초가집 대부분이 남서방향의 일자형 삼간집 형태로서 한국 서남부 지방 전통 민가 형식과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이다. 현재까지도 후손들이 살아가며 마을로서의 기능을 이어가고 있으며 낙안군악, 공동체 제의, 판소리 등 무형유산의 전승지로서 그 가치가 뛰어난 유산으로, 2011년 3월 11일 세계문화유산 잠정 목록에 등재됐다.
낙안읍성은 고려 후기부터 잦은 왜구의 침입으로 인한 피해를 막기 위해, 조선 전기에 흙으로 쌓은 성이다. 조선 태조 6년(1397)에 처음 쌓았고, ‘세종실록’에 의하면 1424년부터 여러 해에 걸쳐 돌로 다시 성을 쌓아 규모를 넓혔다고 한다. 읍성의 전체 모습은 4각형으로 길이는 1,410m이다. 동, 서, 남쪽에는 성안의 큰 도로와 연결되어 있는 문이 있고, 적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막기 위해 성의 일부분이 성밖으로 튀어나와 있다.
이 성은 조선후기에 이르러 임경업장군이 쌓았다는 이야기가 함께 전해오고 있다. 당초 성문은 남문에 쌍청루(雙淸樓)가 있고, 동,서문에도 문루(門樓)가 있었다. 하지만 19세기에 이르러 남문은 진남루(鎭南樓)라 하고 동문루(東門樓)는 낙풍루(樂豊樓), 서문루(西門樓)는 낙추문(樂秋門)이라 하였는데, 남,동문루는 2층이었다고 한다. 성내에는 객사, 임경업장군비각과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된 민가 9동이 있고, 또한 전통적인 가옥과 옛 건물터가 남아있어 고풍을 간직한 가장 전형적인 고장으로 특별한 가치를 지니고 있다.
봄이면 노란 유채꽃과 잘 어우러지고, 감이 익어가는 고샅길에 들어서면 처마를 맞댄 초가집과 기와집이 두런두런 정담을 나누고 장독대를 수놓은 가을꽃은 빛바랜 앨범 속 사진처럼 정겹다. 겨울이면 여러 그루의 노거수들과 어우러져 성안 전체를 은백색 물결로 치장한다.
여름 무렵, 담장이 넝쿨이 아름다운 담장은 바로 동헌으로부터 시작된다. 동헌의 장독대 역시 담장과 어우러져 황홀경을 연출한다. 조화롭게 설치된 동헌 뒷뜰 굴뚝과 연도(煙道)는 후원의 휘어진 소나무와 담장이 조화로운 풍경을 수채화빛 물감을 바른다.
사또가 ‘이리오너라~’ 하면서 공적인 업무를 주재하는 관청의 본 건물 동헌 뒤편에 기와로 만든 굴뚝 한쌍이 ‘낙안’의 기쁨을 선사하면서 전쟁의 공포로부터 극복하기를 바라는 염원을 담았는가.
단순히 연기를 내보내는 연도에 그치는 것이 아닌, 조형으로 활용되고 있음을 엿보게 하는 상징물로서의 꽃담이다. 먼 옛날, 굴뚝 밑에 묻어놓았던 옥색 구슬은 지금도 순수하게 빛나고 있는가.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바라보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가.
‘하늘(天)의 뜻을 따른다(順)’는 이름이 바로 ‘순천’인가. 굴뚝을 보면서 ‘선을 행하는 사람은 하늘(천신)이 복을 주고 악을 행하는 사람은 재화를 준다’란 명심보감의 글귀가 떠오른다. 우리들은 일종의 회귀본능이 거대하고 삭막한 담장을, 벽체를, 굴뚝을 하나의 예술품으로 치장하는 지혜로 이끌어내게 하는데 까지 이르지 않았던가. 순천국제정원박람회 기간에 순천 낙안읍성 동헌 뒤뜰 굴뚝 앞으로 다가가 지난 날의 꿈을 생각해 보았으면 어떨까. 이종근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