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802. 묵상글 들. ( 연중 제18 주일 - )
----------------------------------------------------
200802. 조명언 마태오 신부님. 새벽을 열며. 연중 제18주일.
어느 신부님이 하느님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에 대해 미사 때 강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맨 앞에 앉아계신 할머니가 이렇게 말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그렇게 좋으면 자기부터 가지?”
혼잣말이라고 했겠지만, 그 소리가 너무 커서 주변의 사람들도 모두 듣고 키득키득 웃습니다. 신부님도 이 말을 들어서 기분이 영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온 힘을 다해 강론했습니다. 강론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맨 앞에 앉아계신 할머니가 손을 번쩍 들더니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신부님, 말로만 말고, 하느님 나라가 왜 좋은지 증명해 보세요.”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할머니! 올해 돌아가신 친구분인 마리아 할머니, 또 데레사 할머니 기억나시죠? 그 나라가 얼마나 좋으면 안 돌아오고 계시겠어요?”
하느님 나라를 이 세상 기준으로 보면 절대 좋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느님과 하나를 이루며 하느님 뜻에 맞게 살아간 사람은 그 나라가 얼마나 좋은지를 압니다. 그래서 많은 성인 성녀의 바람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리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도 이런 바람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모습을 따라야 합니다.
제자들은 완전히 눈이 뜨이지 않아서 인간들끼리 이야기하듯 예수님께 이야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일을 하십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 외딴곳에서 세상을 배불리 먹일 준비를 하십니다. 제자들은 시간이 이미 늦었다고 하지만 주님은 시간에 매인 분이 아니십니다.
이때 예수님께서 하신 행동을 유심히 보고 묵상할 필요가 있습니다. 빵과 물고기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주십니다. 사람들에게 늘 눈을 하느님께 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누어 모두가 배불리 먹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 역시 우리가 가진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합니다.
주님의 이 모습을 우리가 묵상하고 받아들여야 합니다. 제1독서의 이사야 예언자가 이렇게 전해줍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이사 55,3) 바로 주님의 모습을 받아들이고 따르는 것이 우리가 사는 방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로마 8,39 참조). 그런데 우리가 스스로 하느님의 사랑에서 벗어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
삶은 용기에 비례해 확장되거나 축소된다(아나이스 린).
-----------------
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한 부인이 신부님께 묻습니다.
“제 남편은 지독한 골초에 엄청난 주정뱅이예요. 그런데도 이 인간이 성당에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잘 다녀요. 과연 이런 인간도 천국에 갈 수 있나요?”
모든 면에 있어서 세속적인 남편의 모습을 말합니다. 따라서 성당만 열심히 다닌다고 천국에 갈 수 있느냐는 물음이었지요. 이 질문에 잠시 머뭇거리던 신부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고 하네요.
“모르긴 해도, 빨리 갈 것 같습니다.”
술, 담배를 많이 하니 건강에 좋을 리가 없겠지요. 그래서 남들보다 빨리 갈 것이라는 말씀이 맞는 것 같기도 합니다.
사실 하느님 나라에 가는 것은 우리 모두의 바람입니다. 주님께서 부르실 때까지 우리는 이 세상에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가고 싶다고 가는 나라가 아니라, 주님의 부르심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몸을 상하게 하는 것은 피하면서, 건강하게 주님의 일을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
200802. 연중 제18 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지금 내가 있는 곳이 현실이라면 내가 꿈꾸는 곳을 가상현실(Virtual Reality)이라고 합니다. 컴퓨터의 게임이 비슷합니다. 내가 있는 곳과 내가 꿈꾸는 곳이 공존하는 곳을 증강현실(Augmented Reality)이라고 합니다. 영화관에서 안경을 쓰고 영화를 보면 느낄 수 있습니다. 화면 안의 동물이 나에게 다가오는 것을 느끼게 됩니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을 융합한 것을 혼합현실(Mixed or Merged Reality)이라고 합니다. 흔히들 4D 영화라고 합니다. 영화를 보면서 향기와 촉감을 느끼게 됩니다. 영화에서 비가 내리면 현실에서도 비를 맞고, 영화에서 장미향이 나면 현실에서도 장미향이 납니다.
혼합현실과 네트워크가 연결되면 원격의 서로 다른 사람들이 친밀감을 느낄 수 있는 공존현실(Coexistent Reality)이 된다고 합니다. 달나라로 사랑하는 사람과 여행을 갈 수도 있고, 히말라야 산맥을 오를 수도 있습니다. 현실의 세상에서는 경험하기 힘든 것들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는 비단 영화만이 아니라, 쇼핑이나 운전에서도 체험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발전하면 천국현실(Heaven Reality)도 체험할 수 있고, 지옥현실(Hell Reality)도 체험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돌아가신 분들을 만나는 체험도 하고, 성인들을 만나는 체험도 한다면 실제의 삶을 더욱 의미 있고, 가치 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코로나19는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영향을 주었습니다. 박해시대에도 없었던 미사 중단이 있었습니다. 사제들도, 교우들도 당황했습니다. 공동체 미사가 재개될 때까지 영상을 통한 미사를 준비하였습니다. 많은 분들이 본당 홈페이지를 통해서, 평화방송을 통해서 미사에 함께 했습니다. 교황청에서도 성삼일 전례를 방송으로만 하였습니다. 주님의 부활을 교우들과 함께 기뻐하지 못하였습니다. 젊은 신부님들은 가상현실을 이용해서 학생들과 소통하고 있습니다. 성경 공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만들어서 함께 나누었습니다. 문제를 푸는 학생들에게는 피자를 배달시켜 주었습니다. 첫영성체 교리를 줌을 통해서 온라인으로 하는 수녀님도 있습니다.
코로나19의 엄중한 시간에 본당 신자들과 소통한 사제도 있습니다. 매일 전 신자에게 전화로 안부를 묻고, 문자를 보냈습니다. 나중에 미사가 재개 되었을 때 대부분의 신자들이 공동체 미사에 함께 하였다고 합니다. 조금 늦게 공동체 미사가 재개된 뉴욕입니다. 비록 마스크를 쓰고, 성가도 없이 미사에 함께 했지만 성당에 온 교우들을 통해서 신앙의 열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물고기는 물속에 있을 때 자유롭듯이, 사제는 교우들과 함께 있을 때 힘을 얻는 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오셔서 보여 주신 것은 무엇일까요? 믿지 않는 사람들의 눈에는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표징과 가르침이 가상현실, 증강현실, 혼합현실과 같았을지 모릅니다. 현실의 세상에서는 체험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소경이 눈을 뜨는 것도, 앉은뱅이가 일어나는 것도, 나병환자가 깨끗해지는 것도, 중풍병자가 치유되는 것도, 물이 포도주가 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물고기 두 마리와 보리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배불리 먹이셨습니다. 믿지 못하는 사람들은 눈으로 보면서도 받아들이지 못했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바라보면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표징과 가르침은 지금 이곳에서 생생하게 체험하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증강현실도 아니고, 혼합현실도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믿고, 따르면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하느님나라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예수님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이제 바오로 사도는 이 세상에서 하느님나라를 체험했고, 그의 삶은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
----------------------------------------------------
200802. 연중 제18주일. 송영진 모세 신부님.
♣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마태 14,14).”
여기서 ‘가엾은 마음’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자비와 사랑을 나타내는데,
예수님께서 군중을 가엾게 여기신 것은
그들이 ‘목자 없는 양들 같았기 때문’입니다(마르 6,34).
‘목자 없는 양들’은 보살피고 돌보는 이가 없어서 굶주리고 있는 양들이고,
병에 걸려도 치료를 받지 못하고 방치되어 있는 양들이고,
이리 떼가 공격하면 무방비 상태로 당하기만 하는 양들입니다.
그 당시의 군중은 바로 그런 처지에 놓여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신앙인들은 목자이신 주님과 함께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종교와 신앙 없이
‘목자 없는 양들’처럼 방황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기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셨다.”는 말만 있는데, 마르코복음을 보면 “그들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주기 시작하셨다.” 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마르 6,34).
예수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 주는 일과
사람들을 가르치는 일을 모두 하셨을 것입니다.
‘가르치는 일’은 영적으로 굶주리는 사람들에게 ‘말씀의 양식’을 주신 일입니다.
병을 고쳐 주신 일은 고통 속에 있는 사람들에게 기쁨과 안식을 주신 일입니다.
그 당시 그곳에 있었던 사람들은 영적인 배부름을 체험했을 것이고,
하늘나라의 평화를 체험했을 것입니다.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다가와 말하였다.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마태 14,15-17).”
아마도 예수님도 군중도 시간 가는 것을 잊고 있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이 자신들의 배고픔을 말하지 않고
군중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한 것은 ‘사랑’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한 해결책은 군중을 돌려보내는 것이었습니다.
그 상황에서는 그것이 최선의 해결책입니다.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라는 제자들의 말은,
자기들은 아무것도 안 하겠다는 뜻인데, 무엇인가를 하기 싫어서
안 하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일이 없어서 못하는 것입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라는 예수님 말씀은
뜻으로는 “그들을 보내지 마라.”입니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은
뜻으로는 “너희의 것을 그들에게 주어라.”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었고,
군중이 오천 명 이상이었으니 그것은 하나도 없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사정을 모르시고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고 말씀하신 것은 아닙니다.
제자들의 사정을 아시면서도 왜 그런 말씀을 하셨을까?
1) 만일에 제자들이 오천 명을 먹일 수 있는 빵과 물고기를 가지고 있다면,
당연히 그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어야 합니다.
나누어 주지 않고 자기들만 배불리 먹는다면, 그것은 죄악입니다.
식량은 아무도 독점하면 안 됩니다.
지금 지구 어디선가는 정말로 먹을 것이 없어서 굶주리는 사람들이 있는데,
어디선가는 식량이 남아도는 곳이 있고,
먹고 남은 음식을 쓰레기로 버리는 곳이 있습니다.
이 상황은 분명히 부유한 나라들의 죄악입니다.
<교회는 재물을 쌓아놓는 곳이 아닙니다. 나누어 주는 곳입니다.
그리고 교회에는 부유하게 살 권리 같은 것은 없습니다.
가난하게 살 의무만 있습니다.>
2)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것이 하나도 없을 때에는 어떻게 해야 하나?
가진 것이 없어서 못한다고 포기하면 그만인가?
그럴 때에 제자들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주님께 도움을 청하는 일입니다.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없는 일이라면 주님께 도와달라고 간청해야 합니다.
(‘기도’는 언제나 가장 강력한 해결책입니다.)
주님께서 어떤 방식으로 도와주실지, 그것은 모릅니다.
우리는 상황만 말씀드리면 되고, 해결 방법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입니다(루카 1,37).
<교회가 해야 할 일 가운데 첫 번째 일은 언제나 ‘기도’입니다.
사람들을 위해서 주님께 기도하고,
주님에게서 오는 은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이 교회의 임무입니다.
가진 것이 없어서 아무것도 못한다는 말은 하면 안 됩니다.
정말로 할 수 있는 일이 하나도 없을 때에도 기도는 할 수 있습니다.
아무것도 안 하는 교회는, 사람들을 위해서 기도하지도 않는 교회는
존재할 이유가 없습니다.>
3) 예수님께서는 ‘기적의 빵’을 군중에게 직접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그것을 받아서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습니다(마태 14,19-20).
그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예수님의 지시가 실제로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결코 ‘빈말’로 끝나지 않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할 수 없는 일을 하라고 우리에게 시키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에 하라고 시키시는데,
지시만 내리고 내버려두시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지시를 내리신 다음에는
우리가 그 지시를 수행하는 것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따라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라는 말씀에는
“내가 너희에게 먹을 것을 줄 테니” 라는 말씀이 숨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교회는 자신의 것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곳이 아니라,
주님께서 주시는 것을 받아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곳입니다.
그러니 생색 낼 것도 없고, 잘난 체 할 것도 없습니다.
또 사람들에게 대가를 요구하면 안 됩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라는 원칙은
항상 지켜져야 합니다.>
----------------------------------------------------
200802. 연중 제18주일: 가해 /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연중 제18주일: 가해: 빵의 기적
오늘 독서에서 ‘음식’, ‘잔치’, ‘빵’, 그리고 ‘물고기’가 나타나는데 이러한 상징적 표징들을 통해 인간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이 표현되고 있다. 이 하느님의 사랑은 인간이 스스로 그 사랑을 저버리지만 않으면 절대로 거두어지지 않는다.
제1독서: 이사 55,1-3: 나의 말을 들어라. 맛좋은 음식을 먹으리라
제1독서는 ‘계약’에 대해 말하고 있다. ‘들음’과 ‘귀 기울임’을 강조하기 때문에 계약이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충실성을 전제로 한다. 즉 인간이 하느님의 친구가 될 수 있는 ‘잔치’는 그분의 말씀을 듣는 잔치이다. 때문에, 우리가 ‘말씀의 식탁’(계시 21)을 먼저 갖지 않는다면 성찬의 식탁은 결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복음: 마태 14,13-21: 오천 명을 먹이신 기적
‘말씀’의 능력을 마태오는 빵의 기적을 통해 강조하고 있다. 마태오는 그 기적이 “외딴곳”에서 일어났다(13절)고 하면서, “여기는 외딴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15절)라고 청하고 있다. 이렇게 말한 것은, 마태오가 예수님의 모습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며 만나를 먹게 한 기적(탈출 16장)보다 더 위대한 기적으로 백성을 배를 불리시는 새로운 모세로 표현하고 있다.
예수께서는 인간들의 구체적인 문제에 동참하신다.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14절)는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과 같은 입장에 함께 하신다는 것이다. 이 ‘가엾은’이란 사람들의 물질적인 것뿐만 아니라 영적인 좌절의 상태에까지 확대한다(마르 6,34 참조). 빵의 기적도 예수께서 다른 사람들의 궁핍에 참여한다는 의미로 나타난다. 그것은 사람들의 필요를 사랑으로 이해한 행위의 결과이다. “오천 명가량 되는”(21절) 사람들은 먼 지방에서 온 사람들이었고 허기지고 늦은 시간이었기 때문에 집으로 돌려보내거나 가까운 마을로 보내 “먹을거리를 사게”(15절) 예수께 말씀을 드리지만, 예수께서는 그들의 허기를 걱정하시고 특히 연약한 사람들의 어려움을 염려하신다(마태 15,32 참조). 그러므로 기적은 능력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사랑과 동참의 행위로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또한, 기적은 ‘함께 나누는’ 데서 일어난다. 즉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누었기 때문이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17절)는 적은 것이고 ‘얼마 안 되는 것’이었지만 함께 나눌 수 있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날 수 있었다. 물론 기적을 이룬 것은 예수님의 권능이었지만, 그 기적은 나누려고 했던 마음 자세가 더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고는….”(16-18절). 예수님께서는 사랑으로 나누어지는 행위를 통해서 기적을 이루어주신다. 이렇게 하느님은 항상 우리 인간들의 협력이 필요하다. (16~18절.)
우리가 이제 그리스도께서 빵의 기적을 행하실 때 가지셨던 ‘가엾음’을 가질 수 있다면, 다른 사람들과 나누는 것이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빼앗아 간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20-21절). 남은 조각 ‘열두 광주리’로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에 대한 보상으로 이미 충분하지 않겠는가!
이제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영광 안에 들어가셨지만, 사도들과 또 그들의 사도직을 이어받는 사람들을 통하여 당신의 백성들과 계속 함께하실 것이다. 사도적 봉사란 예수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에게 예수께서 베풀어주셨던 그 선물을 베풀어주는 것이다.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몸과 피로 이루어주시는 놀라운 이 기적의 ‘잔치’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얼마 안 되는 빵과 물고기를 나누려는 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
이렇게 할 때만이 성체성사를 거행하고 복음을 선포하는 교회가 정말 모든 사람을 받아들일 수 있는 왕국이 될 것이다. 주님 구원의 은총이 모든 사람에게 전해질 수 있으려면 지금 이 시대에도 내가 가지고 있는 조그만 것을, 아무것도 아닌 것 같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다른 사람들과 나눌 수 있는 마음과 또한 그것을 주님 앞에 가져다 바칠 수 있는 마음을 가져야 한다. 이러한 우리의 인간적인 노력이 있을 때 하느님께서는 그것으로 위대한 기적을 이루어주실 것이다. 이러한 삶을 이룰 수 있도록 노력하여야 할 것이다.
이것이 우리가 모두 물질적인 음식보다는 그리스도를 유일한 구원의 양식으로 취해야 하는 이유이다. 항상 하느님께로 돌아가는 삶 속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살면서 하나가 되어, 주님께서 원하시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 여기서 거행하는 성체성사가 진정 우리가 모두 누려야 하는 진정한 사랑의 잔치이며, 우리에게 구원을 받게 할 것이다. 사랑으로 하느님 안에 우리의 것을 나눌 수 있어야 한다.
“아무것도 우리를 하느님 사랑에서 떼어놓지 못할 것이다.”(로마 8,35.37) 사도 바오로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의 힘으로 자신의 구원에 장애가 되는 모든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다고 한다. 우리 자신이 언제나 주님 안에 살며 사랑을 나누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
200802. 이기우 신부님. [연중 제18주일 강론]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예수
⒈ 무더위와 장마비가 번갈아 찾아오는 이 여름에는 생명의 왕성한 기운을 느낍니다, 지치도록 느낍니다.
우리 인간 아니고도, 어마어마한 종류와 수의 생명체들이 살아온
하느님의 손길이 닿은 지구 곳곳에서 살아 움직이는 모습도 그렇습니다.
바다와 숲과 하늘에 그렇게 많은 생명들이 생존의 몸짓으로 하느님을 찬양합니다.
생명은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하느님의 성사입니다.
⒉ 개정된 새 성경에서 공동번역 성서와 달리 번역되어 눈에 띄는 표현이 있었습니다.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마르 16,15).
어느 새, 복음선포의 대상이 사람만이 아니라 피조물로 번역이 바뀐 겁니다.
본래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생명을 사랑하시는 주님,
모든 것이 당신의 것이기에 당신께서는 모두 소중히 여기십니다”(지혜 11,26).
그런데 그전까지는 모든 생명에 대한 생각이 짧아서 그저 인간을 기억해 주시고
사람을 돌보아 주시는 하느님께 찬양을 드리면서도, 다른 생명체들은 눈 아래 두어 왔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십니까?
신들보다 조금만 못하게 만드시고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습니다.
당신 손의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의 발 아래 두셨습니다.”(시 8,5-7).
이제는 인류도 철이 들라는 말씀이신지 하느님께서는
모든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라 하시는 것 같습니다.
다른 생명체들이 살지 못하면 인류도 살지 못한다는 이 당연한 이치를 이제는
좀 철이 들라고, 제발 깨달으라고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작은 번역상의 변화를 넘어섭니다.
⒊ 그래서인가요? 프란치스코 교황은 생태계의 복원을 걱정합니다.
생태계의 균형이 무너지며 동물과 식물, 바다와 하늘에서 울부짖고 있는 생명체들을 상기시킵니다.
생태계를 위해서는 늘 보는 꽃이나 새뿐만 아니라
“균류, 해조류, 벌레 무리, … 다양한 미생물들이 필요합니다”(「우리 어머니인 지구」, 21쪽).
그런데도 인간은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려는 생각은 해 보지도 못 한 채,
이기적으로 지배하며, 착취해 왔습니다.
그래서 복음을 선포하기 전에 인간의 폭력에 의해 상처받고 사라져간 모든 피조물에게
용서를 청하며, 이제부터라도 생태계가 다시 살아나도록 하느님께 자비를 청하는 일이 필요합니다.
더불어 피조물의 다양성이 사라지면서 함께 피해를 입은 가난한 사람들에게도 용서를 청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느님께서 모든 피조물 생명에게 축복과 자비를 마음 놓고 내리실 겁니다. 생명력이 왕성한
여름 장마철이라서 그런지, 주변 현실도 돌아보게 되고, 이래저래 생명에 관한 성경구절도 눈여겨보게 됩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미사에서도 온통 생명에 관한 말씀뿐입니다.
⒋ 오늘은 연중 시기의 후반부로 들어서는 제18주일입니다.
이사야는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고 예언하였습니다.
이는 하느님 자신과 그분에게서 나오는 최고선의 가치를 겨냥한 물의 비유입니다.
목마른 이들이 물을 찾듯이 우리가 하느님을 믿어야 하고,
또 목마른 이들이 물을 마시듯이 하느님에게서 나오는 최고선의 가치들을 마셔야 한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돈이 있건 없건 공짜로 그 물을 마시게 하겠다는 것은,
진리와 자유 그리고 사랑과 평화 같은 그 최고선의 가치를 하느님께서 독점하지 않으시고
나누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돈 한 푼 내지 않고 이 가치들을 받아들이고 나누어줄 수 있습니다.
⒌ 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당신이 생명의 빵이심을 일깨워 주시려고
빵의 기적을 일으키신 이야기를 전해 주었습니다.
남자만도 오천 명이 넘는, 그러니까 여자들과 아이들까지 합치면 만 명이 훨씬 넘었을 군중을
배불리 먹이고도 남은 빵 조각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차는 엄청난 기적을
예수님께서 생명의 빵이신 당신을 알아보게 하시느라고 일으키셨습니다.
빵의 기적은 생명의 빵이신 당신을 가리키는 하느님의 표징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사야 예언자가 하느님의 뜻을 실현하시러 세상에 오실
메시아를 가리켜 내다본 예언을 당신의 가르침을 몸소 들려주셨고 또 행적으로도 친히 보여주셨습니다.
이 가르침과 행적에 담긴 하느님의 뜻, 즉 최고선의 가치들이 하느님의 뜻 자체인 진리였으며,
그 진리를 스스로 행할 수 있는 자유였는가 하면, 다른 이들을 행복하게 만들어 줄 수 있는 사랑이었고,
그로 인해 누리는 평화였습니다. 우리는 이 가치들을 빵을 먹듯이 먹음으로써 구원될 수 있게 되었고,
세상도 하느님께로 이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시장이 반찬이라는 말도 있듯이 배고픈 사람이 빵을 먹을 때 맛있게 먹을 수 있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진리와 자유, 사랑과 평화에 대해 결핍과 억압을 느껴본 사람들이
더 이 가치들을 상징하는 예수님을 더 기쁘게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⒍ 이렇게 생명의 물처럼 마셔야 하고, 생명의 빵으로서 먹어야 하는 예수님으로부터
우리를 갈라놓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 사도 바오로의 증언입니다.
환난이나 역경도, 굶주림이나 헐벗음으로 위협하는 박해도 믿는 이들이
예수님을 물처럼 마시고자 하고 빵처럼 먹고자 하는 신앙 의지를 막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외부에서 주어지는 요인들뿐만 아니라, 우리 존재의 내부에서 다가오는 요인들 즉 삶과 죽음도,
현재와 미래의 모든 권세도 심지어 높은 곳에 존재하는 영이나 깊은 곳에 존재하는 영은 물론,
그 밖의 어떤 피조물까지도 마찬가지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비단 우리의 신앙 의지가 굳세어서가 아니라,
우리 인간의 외부에서 가해지거나 내부에서 주어지는 그 어떤 힘보다도
예수님을 구세주로 이 세상에 보내신 하느님의 구원 의지가 더 강하기 때문이라는 뜻입니다.
⒎ 독서와 복음의 말씀 속에 담긴 이러한 뜻을 우리의 현실 안에서 묵상하도록
이끌어 주는 신호가 어제 전례력에서 기념했던 알폰소 성인의 지향이었습니다.
그가 지향했던 바, 가톨릭 윤리의 확립이란 최고선의 가치들이 어떻게 하면 가톨릭 신자들의
삶과 의식과 활동을 통해 공동선의 가치를 실현하는 데로 투신하게 할 수 있느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른바 믿음이 나무의 뿌리라면 윤리는 그 줄기이고 실천이 그 열매일텐데,
알포소 성인이 자신의 생애로 일깨워준 신호는 믿을 교리에 부합하는 지킬 계명을 살아가는 문제였습니다.
⒏ 이제 말씀의 뜻과 전례력의 신호에 따라서 우리에게 나타나고 있는 시대의 징표를 살펴보겠습니다.
코로나 19 사태가 전 세계적 대유행으로 번짐에 따라 장기화되어 가고 있습니다.
이에 따라서 코로나 사태 이후에 과연 우리가 사는 세상이 어떻게 바뀔 것인가에 대한 관심이
최근 가장 뚜렷한 시대의 징표라고 인정하는 데에는 아무도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이에 대한 담론들이 많이 발표되고 있는데, 저는 최근 중앙대 독문과의 김누리 교수의 강연을 귀담아 들었습니다.
⒐ 코로나 사태는 재난혁명의 형태로 우리에게 와서 패러다임을 전환시킬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바꾸어야 할 기존의 관점 두 가지 가운데 하나는 미국이고 다른 하나는 자본주의입니다.
그동안 우리에게 미국은 우리가 따라가야 할 모범으로서 선망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미국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은 희생자를 냈고 수천만 명의 실업자를 양산했는데,
그것만으로도 부족했는지 빈부간 벌어져 있던 격차가 그대로 치료의 불평등으로
나타나서 소요사태로까지 번지는 바람에 비극과 불행이 도지고 있는 중입니다.
미국은 의료기술 수준이 전 세계에서 가장 높은 나라이지만 이는 공공의료 시스템이 아니라
모두 민간 중심으로 짜여진 시스템이기 때문에 돈이 없는 사람은 함부로 치료받기도 어렵습니다.
의료 서비스를 포함한 모든 것을 시장에서 돈을 주고 사야 하는 자본주의 천국이 미국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이상 미국은 글로벌 스탠다드로서 우리가 따라해야 할 모범이 아니었습니다.
⒑ 코로나 사태가 일깨워준 두 번째 사실은 이번 사태가 생태계를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지구환경을 오염시킴으로써 자초한 재앙인데 그 주범이 자본주의라는 것입니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효율적으로 인간의 욕망을 충족시켜주는 반면에, 제동장치가 없습니다.
인간의 기본 권리인 의식주마저 자본주의 방식으로 경쟁하다 보니, 실업과 불평등의 문제를 엄청나게
초래해 왔는데 거기에다 더해서 생태계와 환경까지 망가트려서 인간의 생존 자체를 위협하게 된 것입니다.
앞서 본 미국의 사례도 자본주의를 할 수 있는 데까지 추구하는 끝판의 세상이기 때문에 초래된 결과입니다.
⒒ 이제는 자본 위주가 아니라 삶과 생존과 생명 위주로 살아가야 합니다. 이 점에 있어서,
주거나 교육이나 정치 등의 분야에서 아직도 숙제들이 남아 있기는 하지만,
여러 가지 면에서 우리가 오히려 선진국에 들어서 있었고 그래서 우리가 글로벌 스탠다드입니다.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보다도 우리가 앞서 있었습니다. 이미 우리가 촛불혁명에서와
마찬가지로 이번 방역에서도 성숙한 시민의식을 보여준 자신감을 가지고 보여준 바처럼,
지난 백 년 동안 우리 겨레를 주눅들게 했던 자조적인 열등감을 벗어던지고 미국이나 유럽을 쳐다보지 말고
대등하게 협력하되, 자본주의 체제보다 더 인간적인 사회를 이룩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가지고 살아가야 합니다.
⒓ 생명의 빵과 생명의 물로 오시는 예수님을 영접하는 성사가 성체성사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빵과 포도주를 축성하고, 축성된 그분의 살과 피를 받아 모시는 성사를 거행합니다.
이 성사의 은총은 예수님께서 주시려는 생명을 받아 누리는 삶에 있습니다. 생명력이 충만한 삶을 살고,
그 생명력을 나누어주되,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모든 피조물에게까지 고루 미치게 해서
생태계의 다양성을 복원하고 공존하며 순환을 원활하게 하는 돌봄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삶의 목표를 현세에 미치지 말고 내세에까지 열어서 먼저 가신 존재들과도 영적으로
통공을 이룸으로써 그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먹고 마시는 것입니다.
----------------------------------------------------
200802. 한상우 신부님. 연중 제18주일.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매순간이
사랑과 감사의
순간들입니다.
나눌 수 있기에
생명입니다.
먹어야
살 수 있는
생명의
존재입니다.
서로 주고 받는
기쁨을 살아가는
사랑의
존재입니다.
이기심을
벗어나게 하는
사랑의 빵입니다.
사랑의 빵이신
예수님께서는
당신 사랑으로
사랑의 기쁨을
우리들에게
가르쳐주십니다.
생명을
구원하는 것은
사랑입니다.
사랑이
아름다운 것은
아낌없이
내어주기에
아름답습니다.
아낌없이
내어주는
빵이 사랑입니다.
절실한 빵
절실한
사랑입니다.
절실한 빵이
되기 위해선
내가 죽어야 합니다.
죽지 않고서는
빵이 될 순
없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빵이 되는 것이
영원한 생명입니다.
영원한 생명은
여기에서 시작되는
사랑의 일상이며
일상의 감사입니다.
진정한 감사는
진정한
사랑입니다.
우리에게 있는
사랑을
예수님같이
기쁘게
주십시오.
사랑은
빵이 되는
기쁨입니다.
(한상우 바오로 신부)
----------------------------------------------------
200802. 방효익 바오로 신부님. - 연중 제 18주일.
제1독서(이사 55,1-3)는 하느님의 변치 않는 자애에 대하여 말하려고 초대합니다.
빵만으로 살지 않고, 주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아야 하는(신명 8,3) 이스라엘 백성이 바빌론 유배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이사야 예언자는 하느님의 자비로 젖과 꿀이 흐르는 약속된 땅에 정착했으니 이제는 하느님께로 돌아서라고 소리칩니다. 마치 현자가 광장에서 부르짖듯이(잠언 1,20; 8,1) 어리석고 우둔한 마음을 깨치라고(잠언 8,5) 외칩니다. 유다인들의 영적 갈증과 영적 굶주림을 해소할 수 있는 곳은 오로지 하느님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예루살렘 성전뿐이니, “만나 뵐 수 있을 때에 주님을 찾고. 가까이 계실 때에 그분을 부르라.”(이사 55,6)고 합니다. 악인은 그 마음 깊은 곳에서 죄악을 꾸미느라고 혼자 즐기지만 하느님의 날개 그늘로 피신하는 사람은 이웃과 함께 하느님 안에서 기름진 음식을 즐길 수 있고, 기쁨의 강물을 마실 수 있다고(시편 36,9) 선포합니다. 유다인들이 또 다시 유배생활을 하지 않으려면 헛된 잡신을 섬기게 했던 왕정제도(1사무 8,1-20)를 포기하라고, 하느님을 분노하시게 하지 않으려면 역겨운 짓을 버리라고(신명 32,16), 하느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고 외칩니다. 하느님께서 다윗과 맺은 계약은 변치 않을 사랑과 자비의 계약이므로 사랑과 자비를 넘치도록 베푸시는 하느님께로 돌아오라고 애타게 호소합니다.
복음(마태 14,13-21)은 가엾은 마음으로 오천 명에게 빵과 물고기를 주신 기적입니다.
복음사가는 예수님께서 고향에서 배척을 받으셨고(마태 13,53-58),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한 소식을 들으신 뒤에 당신께 적의를 품고 있는 헤로데를 피하여 기도하셨던(마태 14,22-23) 외딴곳을 강조합니다(13; 15절). 복음사가는 예수님의 기적과 군중에게 먹거리를 선물로 주신 것을 엘리사의 이야기(2열왕 4,42-44)에 맞춰 소개하는 듯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적 자체에 집중할 필요도 있지만, 군중을 바라보시는 예수님의 마음과 몇 가지 숫자가 말하는 상징적 의미, 그리고 오로지 예수님께만 집중하게 하는 외딴곳과 제자들의 행위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많은 군중을 보시면서 “가엾은 마음이 드셨다”고 하는데, 사랑과 자비로 군중에게 메시아의 신비를 드러내는 동시에 제자들이 앞으로 해야 할 사명을 말해주는 중요한 표현입니다.
제자들은 외딴곳에 늦은 시간까지 남아 있는 군중을 흩어지게 해서 스스로 먹고, 알아서 돌아가도록 하려고 했으나 목자이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직접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보여드리면서 불가능하다고 합니다. 이들을 다 먹이려면 200명의 하루 품값이 필요하다는(마르 6,37) 생각에서 예수님의 판단은 적절치 못한 일이라고 불만을 갖는 듯합니다. 제자들이 믿음이 없음에도 그들을 탓하지 않으시는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의 만찬처럼 빵과 물고기를 들고, 하늘을 우러러 보시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셨고, 제자들은 군중에게 나누어주었습니다.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 질서 있게 이어지는 빵의 기적은 오늘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의 본질을 그대로 말해줍니다. 미사에서 손에 빵을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면서 성체를 이루시는 분은 예수님이시고, 사제는 단지 예수님의 행위를 보여주면서 나누는 일을 할 뿐입니다. 남은 조각을 모으니 이스라엘의 12부족(온 세상 사람들)에게 충분히 나눠줄 수 있는 정도였습니다. 그리고 먹은 이들 가운데 어린이들과 여자들까지 포함해서 공동체가 모두 풍요로움을 체험했음을 강조합니다.
군중은 양식이 없어 배가 고파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렸기 때문에 모여든 것입니다(아모 8,11). 복음에서 빵 다섯 개는 모세 오경을 뜻하고, 물고기 두 마리는 예언자들(예언서들)과 현자들(지혜문학서들)을 뜻하고(여호수아서와 판관기를 뜻하기도 함), 열두 광주리는 모든 백성과 열두 제자로 알아들을 수도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에 굶주린 이들에게, 그리고 눈과 귀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는 외딴 곳에 모여든 군중에게 예수님께서는 새로운 모세로서, 새로운 예언자와 현자로서 직접 생명의 양식인 말씀과 성체로 충분히 배부르게 해주시는 자비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에 젖은 이들은 하느님께 “눈이란 눈이 모두 당신을 바라보고, 당신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나이다. 당신은 손을 펼치시어,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은혜로 채워 주시나이다.”(시편 145,15-16: 화답송) 하고 노래합니다. 제자들은 아직 말씀에 굶주린 군중에게 하늘나라의 복음을 나누어줄 수 없었기 때문에 군중을 흩어버리려고 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미사에서도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직접 당신의 말씀과 성체로 배부르게 해주시고, 사제들은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지시를 따를 뿐입니다.
외딴 곳처럼 먹을 것이 없었듯이, 이제껏 하느님의 말씀에 더 집중할 수 있었던 군중에게 베풀어주신 빵과 물고기의 기적은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이 잘 드러난 사건이라서 결코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과 초기교회 공동체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 4,4)고 하신 것처럼 말씀에 굶주렸던 군중에게 모세 오경과 예언서, 그리고 지혜서를 주신 것, 즉 말씀으로 배를 채워주신 예수님을 결코 잊을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두고두고 예수님의 말씀을 되씹을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제자들은 빵을 나누어주는 일만 했던 것이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또 나누어주기 위해 남은 것을 열두 광주리에 거두어들였듯이 다른 이들에게도 말씀을 나누어주기 위해 예수님의 말씀을 거두어들이는(전승을 수집하는) 일도 했습니다. 아무리 좋은 하느님의 말씀일지라도 혼자만 간직하고 남에게 전달되지 않는다면 말씀이 지닌 구원적 가치가 소멸될 수 있음을 제자들은 잘 알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복음은 초기교회가 성찬의 전례를 집전하면서 말씀을 수집하고 나누어주는 일에 얼마나 많은 관심을 가졌는가를 여실히 보여줍니다.
제2독서(로마 8,35.37-39)는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노래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 아버지께서 우리에게 먹힐 생명의 양식으로 내주신 예수님의 죽음을 통하여 보여주신 사랑이 얼마나 크고 위대한 것인지 장엄하게 노래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엄청난 사랑을 생각한다면,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누리게 된다.”(로마 8,17)는 분명한 목표가 있기 때문에 어떤 고난(2코린 11,16-33)도 이겨낼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사람이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주님이심을 확실하게 체험했다면, 그 어떤 것도, 세상도, 생명도, 죽음도, 현재나 미래의 어떤 것도(1코린 3,22)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결코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고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늘에 있는 것이든 땅에 있는 것이든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왕권이든 주권이든 권세든 권력이든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또 그리스도를 향하여 창조되었습니다.”(콜로 1,16) 그리고 하느님께서는 “권세와 권력들의 무장을 해제하여 그들을 공공연한 구경거리로 삼으시고,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들을 이끌고 개선 행진을 하셨습니다.”(콜로 2,15) “하느님께서 우리 편이신데 누가 우리를 대적하겠습니까?”(로마 8,31) 이렇게 하느님께서 미리 뽑아주셨는데, 당신의 자녀로 삼아주셨는데, 의롭고 영광스럽게 해주셨는데(로마 8,28-30), 그런데도 하느님의 사랑에서 떨어져나간 사람들은 결국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1독서의 자애와 복음의 가엾은 마음)을 맛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말씀에 굶주린 이들에게 무조건 성전으로 다가와서 말씀과 성체를 받아 모시라고 초대합니다. 교회는 오늘도 끊임없이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려면 말씀에서 멀어져서는 안 된다고 외칩니다. 예수님의 몸과 피로 구원된 우리가 예수님을 통해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두고 어디로 가겠습니까? 영원한 생명의 말씀으로 우리에게 사랑과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그런 주님을 결코 떠날 수 없습니다(요한 6,68). 여러 가지 핑계로 주님을 떠난다면 그것은 주님의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며, 주님의 말씀에서 하느님의 사랑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느님께서 얼굴을 감추시면 우리는 소스라칠 수밖에 없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숨을 거두시면 우리는 죽어 먼지로 돌아갑니다. 그러나 당신의 숨을 보내시면 우리는 새롭게 창조되고 우리의 얼굴도 새로워집니다(시편 104,28-30). 이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생명의 말씀과 성체로 이루어주십니다. 미사는 외딴곳으로 불러 모으는 생명의 식탁이지, 흩어버리는 죽음의 식탁이 아니기에 늘 우리는 사랑의 공동체를 이루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과 그리스도의 성체를 영혼의 양식으로 배불리 받아 모신 우리도, 비록 이웃에게 성체를 직접 모셔가는 것은 아닐지라도, 말씀만이라도 가져다가 그들도 배부르게 해주어야 할 사명이 있습니다.
- 방효익 바오로 신부 -
----------------------------------------------------
200802. 키엣대주교님 묵상. 이웃과의 연대는 나눔과 책임입니다.
연대의 시작은 이웃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질병과 가난, 굶주림에 시달리는 군중들이 애처로왔습니다. 그들은 그저 병을 치료하고 허기를 채우고 위안과 가르침을 받기 위해 모인 사람들일 뿐입니다.
나와 이웃은 비록 남이지만 세상이라는 한 배를 타고 가는 형제와 같은 연대를 가진 사람들입니다. 내가 배불리 먹는 동안 누군가는 굶주림에 시달리고 있는지 모릅니다. 유행따라 옷을 바꿔입는 사람 때문에 저 사람들은 헐벗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나의 관심이 부족하여 저 아이들이 소외되고 있습니다. 어른으로서 좋은 본보기가 되지 못했기 때문에 저 아이들이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세상이 아름답지 못한 것은 내게도 책임이 있습니다. 세상이 공평하지 못한 것 또한 나의 잘못입니다.
연대감을 가진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제자들도 스승과 같이 굶주림에 지쳐 있는 그들을 보았지만 외면하고 싶었습니다. 오천명이나 되는 군중을 먹인다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그들을 돌려보내 스스로 해결하게 하자고 말씀드렸지만 예수님께서는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들을 아무런 대책없이 돌려보낸다는 것은 이웃과의 연대를 저버리는 것이기 때문에 제자들이 그들을 책임지게 하셨습니다.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그들은 허기진 사람들이니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이웃의 고통을 느꼈으면 책임을 져야 합니다. 진정한 측은지심은 바로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연대라는 것은 자기가 맡은 책임을 스스로 다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어떤 일을 하실 때 어떠한 계산도 하지 않으십니다. 오천명이 배불리 먹으려면 몇 개의 떡이 필요한지 계산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무 큰 숫자는 현실성이 없을뿐더러 두려움만 더 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을 위한 식사는 단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는 참으로 소박한 식사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 하시며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셨습니다. 나눔은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나누는 것입니다. 자기가 해야 하는 것을 함으로써 그 일에 기여하고 책임을 지는 것이 함께하는 연대입니다. 연대는 한 사람이 모든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각자 맡은 일을 스스로 하고 책임짐으로써 그 일을 같이 완수하는 것입니다.
연대라는 것은 이웃과 나누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보잘것 없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였지만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심으로써 그 빵과 물고기를 영적인 것으로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직접 군중들에게 그 양식을 건네주지 않으셨습니다. 제자들에게 빵과 물고기를 나누셨고 제자들은 다시 다른 사람들과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그 사람들은 또 다른 사람과 나누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빵과 물고기의 기적’이 주는 교훈입니다. 모든 사람이 기적을 나누어 가졌습니다. 나눔의 과정을 통해 사람들은 서로 손을 잡고 눈을 마주치며 서로를 보았습니다. 과연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빵이고 나눔의 물고기입니다. 그들의 마음에 사랑과 관심의 연대가 이루어졌기에 적은 양식이 풍부해졌고 오천여명이 먹고도 남을 만큼의 기적이 일어난 것입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서로 조금씩만 나눈다면 부족함이 없는 세상이 될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조금씩만 내 자리를 양보한다면 세상은 모든 사람이 앉기에 충분한 자리가 될 것이고 따뜻한 세상이 될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이웃과 함께 나누고 함께 책임을 져야함을 알 수 있도록 저희 마음을 열어 이웃을 볼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주면 줄수록 많아진다’고 합니다. 경험해 보았습니까?
2. 이웃에 대해 어떤 책임감을 가지고 있습니까?
3. 많은 것을 소비할 때 나보다 가난한 이웃들은 나를 보면서 어떤 생각을 할까요?
----------------------------------------------------
200802. 연중 제18주일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의 묵상
우리 전통 음식 문화에서 중요한 것 가운데 하나가 상차림입니다.
밥과 반찬을 주로 하여 격식을 갖추어 내는 상차림은 상을 받는 사람의 신분에 따라서 그 이름이 달랐습니다.
아랫사람에게는 밥상, 어른에게는 진지상, 임금에게는 수라상이라 하였습니다.
그리고 먹는 사람 수에 따라서 혼자 먹는 밥상을 외상 또는 독상, 두 사람이 먹는 밥상은 겸상이라고 불렀습니다. 이 외상으로 차려진 반상에는 삼 첩, 오 첩, 칠 첩, 구 첩, 십이 첩이 있는데, 당연히 임금의 수라상에는
십이 첩이 올려집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빵을 많게 하시는 기적을 행하십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자 세상을 구원하실 임금이시니 십이 첩은 기본이라 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복음 내용은 그렇지 않습니다. 제자들이 가지고 있던 음식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입니다.
가장 간결한 차림으로 평민이 먹었다는 삼 첩 반상보다 빈약합니다.
그런데 그 결과는 너무나 달랐습니다.
마태오 복음사가는 아낌없이 베푸시는 예수님의 기적의 결과와 제자들의 행동에 주목합니다.
사람들이 충분히 만족할 때까지 모두를 배불리 먹이실 뿐만 아니라 그 음식이 풍성히 남았습니다.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 먹었고, 남은 것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
또한 제자들은 가지고 있던 것을 기꺼이 내놓음은 물론 분배자로서도 봉사합니다.
임금의 생일로 십이 첩 수라상에 궁중 연회까지 더해진 헤로데의 잔치에서 세례자 요한이 죽으면서
그의 잘린 목이 쟁반에 담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겸손한 밥상은 세례자 요한의 죽음을 애도하면서도 배고픈 백성을 향한 동정심에서 비롯된
생명이 넘치는 풍성함으로 이어집니다.
따라서 빵의 기적은 단순히 식사를 나누는 인간적 체험을 넘어 사랑을 실천하려는 하느님 백성의 희망과
연결됩니다.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을 통하여 드러난 당신의 사랑으로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은혜로 채워 주십니다.
-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 -
----------------------------------------------------
200802. 이영근 신부님.“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오늘, 우리는 그야말로 감격적인 사랑 이야기 세 편을 들었습니다.
<제1독서>는 하느님의 놀라운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목마른 자들 모두 물가로 오라 하십니다.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하십니다.
너희가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하십니다.
당신의 변치 않는 자애를 드러내십니다.’(이사 55,1-3)
이 얼마나 놀라운 감격인지요!
<제2독서>는 결코 떼어놓을 수없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이야기 합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란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그 어떤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는 없습니다.”(로마 8,35-39)
그 어떤 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는 놀라운 사랑입니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을 구체적으로 보여줍니다. 그 사랑이 어떤 것인지는 제자들과 예수님의 태도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제자들은 “모여든 많은 군중”을 마치 좀 쉬고자 하는 것을 방해하는 훼방꾼 정도로 여깁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으니, 군중을 돌려보내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시고 “측은한 마음”(마태 14,14)에 단장의 아픔을 느낍니다. 제자들은 자기중심에서 곧 자신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 중심에서 곧 그들의 처지에서 그들을 바라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분리되지 않는 마음으로 연민을 지니신 까닭입니다.
제자들은 저녁때가 되자, “군중을 헤쳐 제각기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 거리를 사게 하라.”고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고 이르십니다. 제자들은 그들에게 손해보려하지 않고 자신이 가진 것을 지키려 하지만, 예수님께서는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놓으라고 하시며,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라고 하십니다. 예수님께 있어서 가진 것은 지켜야 할 그 무엇이 아니라, 베풀어야 할 그 무엇인 까닭입니다. 그들의 배고픔이 곧 당신의 배고픔이요 그들의 아픔이 곧 당신의 아픔이었던 것입니다.
제자들은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라고 있는 것, 그것마저 없는 것처럼 말하고 무가치하고 하찮게 여기지만, 예수님께서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는 것 그것을 값지고 소중하게 여기시고 감사를 드리십니다. 있는 것을 보는 눈, 그것은 바로 감사의 눈이요, 없는 것, 그것을 보는 눈은 바로 불평의 눈임을 말해줍니다. 있는 것, 그것을 보는 눈,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지복의 눈인 것입니다. 있는 분, 그분이 곧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지금 여기 있는, 그야말로 실재하여 있는 하느님과 하느님나라, 하느님 사랑과 하느님의 은총과 자비를 보는 눈이 바로 지복의 눈이요 관상의 눈인 까닭입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있는 것' “그것들을 이리 가져오너라.”(마태 14,18)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손에 드시고, “하늘을 우러러 감사를 드리십니다.”(마태 14,19). 제자들은 예수님을 신뢰하지 못했지만, 예수님께서는 아버지를 신뢰하신 까닭입니다.
이토록, 예수님께서는 감사와 믿음을 통하여, 아버지의 크나 큰 사랑을 우리에게 드러내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 하느님의 사랑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건너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은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는”(마태 14,19) 행위를 통해 구체적으로 베풀어집니다. 이 믿음의 행위 속에서, 하느님의 권능은 실현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고 남은 조각은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습니다.”(마태 14,20).
참으로, 당신의 사랑은 찰찰 차고 넘쳐납니다. 항상 너끈하게 차려진 밥상과 같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측은히 보시는 마음으로 차린 밥상이요, 어떤 처지에서도 있는 것에 대한 감사로 차린 밥상이요, 변함없는 아버지께 대한 믿음으로 차린 밥상입니다.
오늘도 당신께서는 우리에게 당신의 몸을 떼어주십니다. 차고 넘치는 이 놀라운 사랑으로, 당신 자신을 건너 주십니다. 이 차고 넘치는 사랑을 우리는 받아먹어야 합니다. 이를 먹은 이들은 배부르겠지만, 먹지 않은 이들은 배고플 것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아무리 차고 넘쳐도 이를 받아먹지 않는다면 여전히 배고플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이 사랑을 받아먹는 방법을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가르쳐주십니다. 그것은 이웃에 대해 측은한 마음을 가지는 사랑이요, 어떤 처지에서도 드리는 감사요, 전능하신 아버지께 의탁하는 믿음입니다.
이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건너 온 이 놀라운 사랑을 찬미하며, 오로지 구원자이신 예수님께 희망을 두고, 이 선물의 밥상에서 기뻐하며 그 사랑을 드러내야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말씀에서 샘 솟은 기도 -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주님! 먹지 않고서는 못 살면서도 자신은 먹히지 않으려 하는
자애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하소서.
제 몸과 생명을 제 것인 양, 독차지 하지 말게 하소서.
제 몸이 찢어지고 나누어지고 쪼개지고 부수어져, 타인 안에서 사라지게 하소서.
당신께서 그러하시듯, 제 자신을 양식으로 내어주게 하소서.
당신께서 저를 향하여 계시듯, 제가 늘 타인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아멘
----------------------------------------------------
200802. 연중 제18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오병이어의 기적
찬미예수님, 사랑합니다. 사랑의 실천을 통하여 삶의 자리를 기적의 자리로 만들 수 있기를 희망하는 가운데 능력의 주님과 깊이 만나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한적한 곳으로 몸을 피하셨지만 사람들은 예수님을 가만두지 않으셨습니다. 사람들은 어디에든 따라가서 자기들의 목적을 이루어야 했고, 예수님은 그들을 거절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던 중 저녁 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와서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늦었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헤쳐 제각기 음식을 사 먹도록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하고 말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께서는 “그들을 보낼 것 없이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이르셨습니다. 다시 제자들이 “우리에게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마태14,15-17)하고 말했습니다.
주님께서 ‘먹을 것을 너희가 주어라’ 하시는데 제자들은 ‘지금 있는 것이라고는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요것 밖에 없는데’….하는 것이 아니라 ‘이만큼이나 있는데’ 하는 새로운 생각이 없는 한 주님을 만난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있으면서도 인간적인 생각 안에 갇혀 있으면 인간을 뛰어넘는 주님을 만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인간의 생각과 주님의 마음은 너무도 다릅니다. 이것밖에 없는 것이 아니라, 있는 만큼만 내 놓으면 되는 것입니다.
“내가 반기는 것은 제물이 아니라 사랑이다. 이 하느님의 마음을 알아다오!(호세아6,6). 이것으로 저 많은 사람을 어떻게 배 불릴 수 있을까? 계산하지 말고 부족한 모두를 내놓으면 주님의 손을 거쳐 풍요로워 집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도 5천명이 먹고도 남는 넉넉함으로 채워 주십니다. 이렇게 그 풍요로움은 우리의 생각을 훨씬 뛰어넘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라는 우리의 손을 빌어 기적을 이루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연장으로 삼아 당신의 일을 하십니다.
사실 가난한 이들이 배고픔에 주려 있기도 하지만 그 보다는 우리의 사랑에 더 주려있습니다. 우리가 전하는 물질의 양이 문제가 아니라 우리의 정성과 사랑이 그 안에 얼마나 담겨 있느냐가 문제입니다. “가진 사람은 더 받아 넉넉해지고 가지지 못한 사람은 그 가진 것마저 빼앗기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랑을 가지고 일을 하면 더 넉넉해질 것이고 사랑을 받는 이들도 머지않아 사랑을 실천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그것이 사랑의 기적이요, 사랑의 승리입니다. 이제는 예수님께서 이루신 기적을 예수님의 이름으로 우리가 이루어내야 합니다.
이웃을 향한 여러 가지 일들에 어려움이 따르기 마련이지만 주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면. 주님께서 모두를 배 불리시고 먹고도 남게 하실 것입니다. 나눈다고 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이 감소되거나 소멸되지 않고 오히려 덤으로 더 많은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비록 미약하게 여겨질지라도 주님의 이름으로 더욱 큰 풍요로움을 이룰 수 있다는 믿음으로 작은 사랑의 실천에 마음을 써야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성녀는 “사람들이 기아로 죽어가는 것은 하느님이 그들을 돌보시지 않아서가 아니라 바로 당신과 내가 너그럽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손 안에 있는 그 사랑을 나누어 주는 도구가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도구로 써 주소서” 하고 기도했습니다. 또한 톨스토이는 “모든 재물은 똥 오줌과 같이 그것이 쌓여 있을 때에는 냄새를 피우고 뿌려졌을 때에는 땅을 기름지게 한다”고 말했습니다. 기적을 찾아다니는 사람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기적을 만들어내는 가운데 행복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도구로 거름을 뿌리고 기적을 이루는 사람입니다.
우스갯소리입니다. 일 더하기 일은 막노동이랍니다. 이 빼기 이는 틀니 고요, 삼 더하기 삼은 인삼 두 뿌리래요. 그럼 100 빼기 1 은 무엇일까요? 0입니다. 100번 잘 하다가 한 번 잘못하면 말 장 헛일이라는 것이죠. 주님의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랑으로 해야 합니다. 어려움이 있더라도 끝까지 참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입니다(마태10,22).
“자선으로 씨를 뿌릴 때 거기서 거두는 열매로 천국의 곳간이 가득 채워질 것입니다”(성베드로 크리솔로고). ‘적게 뿌리는 사람은 적게 거두고 많이 뿌리는 사람은 많이 거둡니다”(2고린9,6) 그러니 많이 많이 뿌리십시요, 사랑의 씨앗을! 사랑이 있는 곳이 기적의 자리입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200802.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베네딕도회 요셉수도원 신부님
주님 중심中心의 구원救援의 삶
-환대, 경청, 공부, 성찬례-
개그 우먼 박미선을 압니까? 저는 그 유명하다는 분을 어제 인터뷰 기사를 통해 알았습니다. 하느님을 찾는 영성가에 손색이 없는 참 훌륭한 분이었습니다. 한 인터뷰 대목을 나눕니다.
“2인자면 어때요. 결국 돌아봤을 때 인생을 완주하는게 중요한거거든요. ‘젖은 낙엽’ 정신으로 바닥에 바짝 붙어서. 그대신 고개는 하늘을 쳐다보세요. 그리고 천천히 버텨보는 거예요.”
어제는 참 각별한 날이었습니다. 12321보 수도원 경내를 2시간 동안 틈틈이 거닐며 순수한 동심으로 돌아가 ‘푸른잔디’ 동요를 마음껏 불렀습니다. 손주를 키우면서 자식들 키울 때 몰랐던 기쁨을 느끼듯 노년에 이르러서야 동요를 목청껏 부르며 진가를 깨닫습니다. 44년전 28세 초등학교 청년 교사시절 아이들과 함께 참 좋아 불렀던 노래였습니다.
-“풀냄새 피어나는 잔디에 누어 새파른 하늘가 흰구름 보면
가슴은 저절로 부풀어 올라 즐거워 즐거워 노래불러요.
우리들 노래소리 하늘에 퍼져 흰구름 두둥실 흘러가면은
우리 모두 다 일어나 손을 흔들며 즐거워 즐거워 노래불러요.”-
하느님 찬미에 손색이 없는 참 좋은 동요입니다. 시간될 때 마다 부르시기 바랍니다. ‘새파른 하늘가 흰구름’이 상징하는바 그리움의 대상인 주님이라면 그대로 주님 찬미가처럼 느껴지는 동요입니다. 주님 그리워 바라볼 때 영혼은 저절로 찬미와 감사의 양날개를 달고 하느님 하늘을 나르는 새처럼 생각됩니다. 더불어 떠오른 짧은 자작시도 떠올랐습니다.
-“하늘보면
마음은
훨훨날아
흰구름 된다”-
새파른 하늘가 흰구름보면 저절로 마음도 훨훨날아 흰구름이 되는 듯 기쁨과 자유로 가득한 분위기에 저절로 푸른잔디 동요를 노래하게 될 것 같습니다. 산책중 만난 어느 자매와의 대화도 생각납니다.
-“신부님, 휴가 가지 않습니까?”-
“가고는 싶은데 갈곳이 없네요.”
많은 분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하여 끊임없이 외딴곳을 찾듯이 주님의 집 수도원을 찾습니다. 가고는 싶은데 갈곳은 결국은 지금 여기 몸담고 살고 있는 주님의 집 수도원뿐이기에 휴가를 잊고 산지 수십년이 됩니다. 두가지 유머도 생각납니다.
“하늘이 모자입니다(That sky is my cap)”
아주 예전 미국수도원에 잠시 머물던 겨울철 ‘왜 추운 겨울날 모자를 쓰지 않느냐?’는 물음에 대한 제 유머러스한 답이었습니다. 참으로 맑은 공기에 밥먹지 않아도 배부르게 느껴졌던 아름다운 수도원이었습니다.
“내 머리가 우산입니다.”
어제 우산을 쓰고 성전에 오는 수사님을 보며 제 삭발한 민둥머리를 가리키며 나눈 유우머입니다. 참으로 하느님을 찾는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샘처럼 솟아나는 기쁨과 유머입니다.
어떻게 하면 오늘 지금 여기서 하늘 나라 천국의 삶을 살 수 있겠는지요? 오늘 강론 주제는 ‘주님 중심의 구원의 삶’입니다. 바로 하늘 나라 구원의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을 알려 드립니다.
첫째, “오너라!”
주님의 환대에 지체없이 응답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궁극으로 갈 곳은 주님뿐입니다. ‘가고 싶은데 갈곳이 없다’에 대한 유일한 답은 주님뿐임을 깨닫습니다. ‘새파른 하늘가 흰구름’처럼 늘 가슴 활짝 열고 우리를 환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말 그대로 사랑의 환대, 구원의 환대요 바로 우리 정주 수도원이 이런 주님 환대의 빛나는 표지입니다. 다음 주님 환대의 부르심에 회개로 응답하여 주님께 돌아감이 바로 구원입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이사55,1)
“고생하며 무거운 짐을 진 너희는 모두 내게로 오너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겠다.”(마태11,28)
얼마나 눈물겹도록 고마운 주님 환대의 초대인지요. 이런 주님이 없다면 어디서 우리 지친 영혼들이 위로받고 힘을 얻을 수 있을런지요. “오너라!”, 주님의 환대에 지체없이 응답하시기 바랍니다.
둘째, “들어라!”
주님의 말씀에 주의를 기울여 경청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한 것이 경청입니다. “아들아, 들어라!”로 시작되는 분도 규칙입니다. 마음의 귀를 기울여 경청하는 것입니다. 경청은 영성생활의 기초입니다. 경청을 위한 침묵이요 경청의 열매가 겸손이요 순종입니다. 제1독서 이사야 예언자가 강조하는 바로 들음의 경청입니다.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내가 너희와 계약을 맺으리니, 이는 다윗에게 베푼 나의 변치 않는 자애이다.”(이사55,2-3).
‘오너라’에 곧장 이어지는 ‘들어라’입니다. 주님 환대에 응답하여 우선적 할 일이 귀기울여 듣는 경청입니다.
셋째, “배워라!”
평생 배움터에서 살고 있는, 평생 배움의 여정중에 있는 평생학인인 우리들입니다. 무엇을 배우고 무엇을 공부합니까? 하여 하느님께 대한 갈망과 배움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는 수도생활입니다. 눈만 열리면 주위가 모두 스승입니다. 배워야 할 것은 널려 있습니다. 무엇보다 배워야 할 것은 사랑입니다.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입니다.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내 멍에를 메고 나에게 배워라. 그러면 너희가 안식을 얻을 것이다.”
마음의 불안에 최고의 치유제가 주님의 온유와 겸손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우리에 대한 그리스도의 사랑, 하느님의 사랑을 배워 깨닫는 것입니다. 다음 바오로 사도의 체험적 사랑의 고백을 배워 내 고백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내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도, 권세도, 현재의 것도, 미래의 것도, 권능도, 저 높은 것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7-39)
이런 사랑을 배우고 깨달아 체득할 때 백절불굴의 믿음에 천하무적입니다. 어느 말마디 하나 생략하고 싶지 않아 모두를 인용했습니다. 그대로 우리 영혼을 사랑에 불타오르게 하는 주님 ‘사랑의 불’같은 말씀입니다.
넷째, “먹어라!”
성찬에 초대하시는 주님이십니다. 오늘 복음은 성찬례의 표징이자 천상잔치의 예표입니다. 무엇보다 광야여정중이 만나보다 더 좋은 생명의 빵 주님을 모시는 것입니다. 외딴 곳에서 주님을 만나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모셔야 광야인생 참된 삶을 살아낼 수 있습니다. 참으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는 측은히 여기시는 불쌍히 여기시는 자비하신 주님의 은혜입니다. 다음 묘사는 그대로 성찬례를 상징합니다.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세상에 믿든 이들에게 성찬례 미사의 은혜를 능가하는 것은 없습니다. 광야인생 오아시스 미사가 없다면 무슨 맛으로 무슨 기쁨으로 무슨 재미로 살아갈 수 있을런지요! 무기의 영어囹圄의 몸인 장기수長期囚에게는 달인이 되느냐 폐인이 되느냐 둘중 하나랍니다. 광야인생중인 우리또한 마찬가지 성인이 되느냐 폐인이 되느냐 둘중 하나입니다.
“너희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이사55,2ㄱ)
사실 광야인생중 무지로 인해 세상 것들에 중독이 되어 세상 우상들에 노예가 되어 급기야 폐인이, 괴물이 되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은지요. 참으로 광야여정중 미사의 은총이 제자리에서 제정신으로 제대로 성인이 되어 살게 합니다. 저는 때로 연옥같은, 지옥같은 광야여정중에서도 주님의 미사은총으로 기적처럼 천국을 살아가는 분들을 자주 목격하곤 합니다.
죽어서 가는 하늘나라가 아니라 우리 하나하나가 하늘 나라입니다. 연옥같은 세상 한복판에서 성인이 되어 하늘나라의 구원을 사는 것입니다. 바로 환대, 경청, 공부, 성찬례聖餐禮에 항구하고 충실하는 것입니다. 바로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우리 모두 이렇게 주님 중심의 구원의 삶을 살도록 이끌어 주십니다.
“주님은 하늘에서 마련하신 빵을 저희에게 주셨나이다. 그 빵은 누구에게나 맛이 있어 한없는 기쁨을 주었나이다.”(지혜16,20). 아멘.
----------------------------------------------------
200802.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연중 제18주일]
이사야 55,1-3
로마 8,35.37-39
마태오 14,13-21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건설
언젠가, 그리 멀지 않은 날,
아니 조만간 우리가 직면하게 될 하느님 나라에 대해서 묵상해봅니다.
우리가 한평생 그려왔던 곳, 그리워했던 곳, 갈망했던 하느님 나라이기에 참으로 궁금하기 짝이 없습니다.
제 알량한 교리와 성경지식, 제 보잘 것 없는 신앙 체험이지만 총동원해서 결론을 내려 본다면 아마도 이런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든 것이 제한적이고 유한했던 이 지상에서와는 달리 모든 것이 풍요로운 곳, 더 이상 고통이나 눈물, 결핍이나 상처가 생기지 않는 곳...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의 크신 자비가 끝도 없이 흘러넘치는 곳,
그래서 우리의 모든 부족함이 원 없이 채워지는 곳...
그래서 우리 죄인들도 더 이상 방황하지 않고 더 이상 흔들리지 않고 하느님 뜨거운 사랑 안에 온전히 치유되고 바로 서게 되는 은혜로운 장소.
언젠가 한 특별한 수도공동체를 방문하고 제 나름대로 큰 충격에 사로잡힌 적이 있습니다.
저는 잠시나마 그 공동체를 통해 하느님 나라의 흔적, 예표를 발견할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다정다감한 어머니처럼 자상한 책임자 수녀님을 중심으로 능동적이고 협조적인 구성원 수녀님들의 조화와 화합이 거의 환상적이었습니다.
다들 기쁘고 행복한 얼굴로 서로 섬기고 헌신하니
거기서 무슨 명령이나 순명, 회헌회칙이나 특별한 요구가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수녀님들의 봉사를 받고 있는 형제자매들의 얼굴에도 깊은 신뢰심과 편안함, 행복함과 가족정신이 흘러넘치고 있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본 자원봉사자들은 작은 것 하나라도 더 나누려고 방문하느라 공동체 문턱이 닳을 지경이었습니다.
하느님께서 오늘 우리 가정 공동체, 수도 공동체, 본당 공동체, 보편 교회 공동체에 간절히 원하시는 바가 무엇인가 생각해봅니다.
그것은 아무래도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건설이 아닐까요?
그러나 그것은 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공동체 각 구성원의 끝도 없는 자기 비움, 자기 낮춤, 헌신과 내어놓음이 없이는 절대로 불가능한 것이 우리 가운데 하느님 나라 건설입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을 많게 하는 기적, 그 배경에 무엇이 자리하고 있을까요?
물론 메시아로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지전능하심이 우선일 것입니다.
그러나 아주 작은 모퉁이에 군중들이 지니고 있었던 작은 내어놓음-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 인간 측의 아주 작은 선행과 봉사, 내어놓음을 기뻐하십니다.
그 작은 우리들의 내어놓음을 기반으로 엄청난 당신 사랑의 기적을 행하시는 것입니다.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200802. 전삼용 요셉 신부님. [연중 제18주일]
이사야 55,1-3
로마 8,35.37-39
마태오 14,13-21
기적을 일으키는 힘, 감사와 사랑의 봉헌
오늘 복음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로 5천 명을 먹이신 기적 이야기입니다.
저는 이 기적을 매일 체험하고 있습니다.
물론 그 정도로 대단한 기적은 아니지만 그래도 매일 강론을 쓸 수 있다는 것이 저에게는 기적입니다.
여자 형제가 없고 동네에서도 여자와 대화할 기회가 없었던 저는 대학에 들어가서도 여자와 대화하려면 입이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어떻게 말해야 하는지 몰랐기 때문입니다.
누군가와 만나려면 ‘오늘은 어떤 질문을 던져야 하나?’로 심히 고민하고 스트레스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5천 명이 넘는 분들이 감사하게도 제 복음 묵상을 매일같이 들어주고 계십니다.
한 사람도 말로 만족시켜주지 못한 제가 수천 명의 신자분에게 양식을 제공할 수 있는 기적을 체험하고 있기에 부끄럽지만, 그 기적의 힘이 어디서 오는지 말씀드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바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의 힘입니다.
11살에서 12살 정도로 보이는 창백한 소년이 꽃집으로 들어왔습니다.
예쁜 꽃들을 한참 바라보던 소년은 가게 주인에게 자신의 이름이 ‘토비’라고 밝힌 후 “앞으로 60년간 매년 엄마 생일에 선물할 꽃다발을 미리 주문하고 싶어요.
엄마 생일이 9월 22일이에요. 매년 이날 배달을 해 주시면 좋겠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엄마를 생각하는 토비의 마음이 너무 예쁘고 귀여웠던 여주인은 알겠다며 흔쾌히 대답했고
“30달러면 충분해.”라고 말한 뒤 토비를 돌려보냈습니다.
두 달 후 토비와의 약속을 기억한 여성은 토비 엄마의 생일인 9월 22일에 꽃다발을 안고
집 앞에 도착했습니다.
꽃을 든 여성에게 “누구세요?”라고 묻는 소년의 엄마에게 “이 꽃은 토비가 당신을 위해 주문한 꽃이에요. 생일 축하해요.”라며 꽃을 건넸습니다.
그 말을 듣자 화들짝 놀란 토비의 엄마는 “제 아들이 저를 위해 주문을 했다구요? 정말이에요?”
라고 되물었습니다.
꽃집 여성은 “토비가 엄마에게 주고 싶다며 60년간 매년 꽃다발을 배달해달라고 부탁했어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토비의 엄마는 주저앉아 울기 시작했습니다.
”아들은 백혈병으로 투병 중 며칠 전 세상을 떠났어요.
전에 한번 생일날 꽃을 선물 받고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엄마라고 했더니 앞으로 매년 꽃을 선물해주겠다는 약속했었어요.”
[참조: ‘(감동 실화)60년 동안 매년 엄마 생일에’, 유튜브 채널 ‘공감픽’]
토비가 가진 것은 ‘30달러와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었습니다.
여기서 30달러는 빵 5개와 같습니다.
자신이 가진 전부를 의미합니다.
숫자 ‘5’는 인간이 가진 전부를 의미합니다.
주님께 드릴 수 있는 전부입니다.
인간에게 ‘5가지 감각’이 있다는 것에서 ‘인간의 몸’을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물고기 두 마리는 ‘말씀과 성령’, 혹은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라고 보면 될 것입니다.
진리의 말씀이 우리에게 끌어내는 것은 ‘감사’이고, 성령의 은총이 우리에게 맺어주시는 열매는 ‘사랑’입니다.
토비가 어머니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다면 꽃집 주인도 자비로운 분이라는 믿음이 생길 수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께로부터 받은 것에 감사할 줄 모른다면 그 작은 것이라고 느끼는 것을 주님께서 그 수천, 수만 배도 주실 수 있는 분임을 믿지 못합니다.
그래서 봉헌하지 못합니다.
그 작은 것을 지키느라 모든 에너지를 소비하게 됩니다.
그것을 바치며 더 많이 부풀려 달라는 청을 할 수 없게 됩니다.
토비가 60년간 어머니에게 꽃을 보낼 수 있게 된 것은 30달러와 어머니께 대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기적입니다.
가톨릭신자로 유명 유튜버이며 작가인 ‘김새해 잔다르크’씨가 있습니다.
첫아기를 낳자마자 거의 회복될 수 없이 몸이 안 좋아져 병원에서 1년 이상 있었던 적이 있습니다.
소변이 한 방울도 나오지 않게 된 것입니다.
신랑이 대소변을 받아내야 할 정도로 상태가 안 좋았고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생각해서도 살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시작한 것이 숨 쉴 때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를 속으로 계속 되뇐 것입니다.
감사할 것도, 사랑하기도 힘들지만, 하루에도 수천, 수만 번씩 되뇌다 보니 몸이 회복되는 기적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네 아이를 키우며 왕성한 활동도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 많은 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되겠다는 꿈을 꾸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빵 다섯 개 물고기 두 마리밖에 없다고 말했습니다.
자신들이 가진 것만으로는 5천 명이 넘는 사람을 먹일 수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기에 예수님께서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더해주셨습니다.
기적을 예수님만 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지금 가진 것만 가지고도 감사와 사랑의 마음을 더하면 누구나 기적을 할 수 있음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기적을 할 재료를 충분히 가지고 있습니다.
그것에 감사하고 그것으로 수많은 사람의 배를 불리겠다는 사랑의 마음만 첨가하면 기적이 일어납니다.
우리는 할 수 있습니다.
지금도 예수님께서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시며 기적의 주인공이 되라고 우리를 초대하고 계십니다.
감사와 사랑의 마음으로 가진 것을 봉헌해 드리면 됩니다.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
----------------------------------------------------
200802.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연중 제18주일
오늘 미사는 생명의 양식 이야기입니다.
"돈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이사 55,1).
제1독서인 이사야서에서는 '와서 먹으라'는 주님의 초대가 울려퍼집니다. 대상은 목마르고 허기진, 가난한 이들입니다. 물질적 재산이 없어 궁핍한 이들뿐만 아니라, 아무리 소유하고 누려도 행복을 느끼지 못하는 이들까지도 포함된 초대입니다.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이사 55,3).
이번에 주님께서 주실 양식은 입이 아니라 귀로 "먹는" 음식입니다. 바로 말씀이지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신명 8,3; 마태 4,4)는 주님의 말씀이 떠오릅니다. 과연 그분께 다가가 귀를 기울여 경청하고 따르는 이는 살 것입니다. 말씀이 곧 생명의 양식이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사람의 영적 육적 생명을 이어가는 양식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아무리 제 힘, 제 능력으로 땀흘려 벌었다고 큰소리 친다 해도 원천은 하느님이시지요. 당신 자녀들을 먹여 살리시는 하느님 마음의 동기는 바로 "가엾은 마음"(마태 14,14)입니다.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이 마음을 지니고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주님은 "제때에 먹을 것을 주시는 분"(화답송)이십니다. 그래서 그분은 아기의 뱃속 사정을 헤아리는 엄마처럼 섬세하고 자상한 사랑으로 우리를 살피고 계시지요.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마태 14,16).
군중을 보내어 스스로 제 먹을거리를 해결하게 하자는 제자의 말에 예수님이 단호히 답하십니다. 너희라고 되어 있지만 실은 "우리"입니다. 이미 예수님은 군중을 먹이시려고 마음을 정하셨으니 제자들만 돌아서면 될 일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 14,20).
이사야서의 주님 초대가 지금 예수님에게서 이루어집니다. 말씀에 목말라 예수님을 따라나선 이들은 치유도 받고 배도 채우게 됩니다. 따뜻한 사랑과 돌봄에 영혼의 원기가 되살아나고, 식민지 백성으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며 피폐해진 인간의 존엄성도 회복하지요. 군중이 충만해질 수 있던 것은 무엇보다 예수님의 가엾이 여기는 마음이 고스란히 전달되었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 8,39).
예수님은 하느님의 연민, 하느님 사랑의 현현이십니다. 하느님의 본성이 예수님을 통해 드러나 우리에게까지 와닿으셨습니다. 우리는 가엾은 마음으로 우리를 응시하시는 예수님의 자애로운 시선 안에 있습니다. 그 무엇도 예수님의 연민 가득한 마음에서 우리를 떼어낼 수 없습니다.
오늘도 말씀과 성체로 우리를 배불리시는 주님께 찬미와 감사를 드립시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셨으니 우리가 충만히 채운 바를 나누는 일에도 소홀함이 없도록 합시다. 하느님 사랑이 예수님의 가엾은 마음으로 우리에게 전해졌으니, 연민의 사랑이 이 세상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기적으로 흘러나가길 소망합니다. 어렵고 힘든 시기지만 누구도 제외되지 않고 모두가 배부르고 흡족한 오늘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오늘 저희 프란치스칸들은 용서의 축제인 '포르치운쿨라 축일'을 지냅니다. 저희 수도회의 요람인 아씨시의 조그만 성모님께 봉헌된 성당이 전대사를 받는 성당이 된 것을 기념하는 작음을 경축하는 축제입니다. 작은 것이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의 큰 축복 누리시길 기도합니다. 아멘.
▶ 작은형제회 오 상선 바오로 신부님
----------------------------------------------------
200802.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연중 제18주일》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마태14,20)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 되는 사람들이 배불리 먹고도 열두 광주리가 남는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어떻게 이런 기적이 가능했을까?
이 기적의 주체는 '예수님'이십니다.
기적은 '신적 행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시지만, 동시에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오병이어의 기적'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하느님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이 기적을 일으킨 또 하나의 주체는 바로 '예수님을 따라온 많은 군중'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한 사람들이었고, 이미 예수님을 만난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4장 32절에서 37절의 말씀은 하느님을 믿은 사람들, 하느님을 만난 사람들이 모여 이루는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습'을 전하고 있습니다.
"신자들의 공동체는 한마음 한뜻이 되어, 아무도 자기 소유를 자기 것이라 하지 않고 모든 것을 공동으로 소유하였다. 그들 가운데에는 궁핍한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사도4,32.34)
예수님을 믿고 따라온 많은 군중도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자신의 소유를 자기 것으로 하지 않고, 너와 하느님을 위해 모두 내어 놓았고, 또한 하느님을 만난 큰 기쁨이 육신의 배고픔을 잊게 했기 때문에 이 기적이 가능하지 않았을까?
오병이어의 기적은
'믿음의 기적'입니다.
'나눔의 기적'입니다.
그리고 '지금 일어나야 하는 기적'입니다.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이사55,1)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 놓을 수 없습니다."(로마8,35.39)
오늘도
나를 살리시는 분,
나를 배불리시 분을,
굳게 믿고 우리도 함께 기적을 만들어 봅시다!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
----------------------------------------------------
200802. 김명겸요한 신부님. 연중 제18주일
세례자 요한의 죽음에 대해서
전해 들으신 예수님께서는
외딴 곳으로 물러가십니다.
오늘 복음에 이어지는 구절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기도하시기 위해
사람이 없는 조용한 곳으로 가십니다.
하지만 그런 예수님을
사람들이 찾아옵니다.
가엾은 마음에 예수님께서는
기도는 잠시 뒤로 하시고
병자들을 고쳐주십니다.
그러다보니 시간은 이미 저녁때가 되었습니다.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함께 있다고는 하지만,
시간은 저녁때이며 장소는 외딴 곳으로
사람들은 불안을 느꼈을 것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있어서 좋았지만,
시간이 이렇게 늦어졌는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집에 돌아갈 걱정,
그에 앞서
아이들은 배고픔을 호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무책임하게 들리는 제자들의 말에
야속함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시기로 결정하신 다음에
복음이 갑자기 말을 바꾼 부분이 나타납니다.
제자들이 걱정을 할 때만해도
그들은 외딴곳에 있었는데,
광야 같은 생명이 없는 곳에 있었는데,
이제 그들은 풀밭에 앉아 있습니다.
생명이 없는 곳에서
갑자기 생명을 상징하는 풀밭이 나타나듯,
먹을 것이 턱없이 부족한 곳에서
먹고도 남을 만큼 많은 음식을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십니다.
생명을 창조하시는 하느님께서
그들과 함께 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을 불안하게 만드는 것들은
여기 저기에 있습니다.
삶에 어둠이 찾아오고
시련이 다가오는 것이
끊이지 않는다고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지
뚜렷한 방법이 떠오르지도 않습니다.
옆에 있는 사람들이 도움이 되기 보다는
부담으로 다가오고
그들 때문에 더 불안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안함에 버려지지는 않을 것입니다.
가엾은 마음으로
우리의 부족함을 채워주시려는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비록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심을
감각적으로 느낄 수는 없지만,
그 함께 하심 때문에
한 번 더 미소 지을 수 있는
오늘 하루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200802. 고도미니코 신부님. 연중 제18주일 -터키 에페소 기도의집.
2020년 8월 2일 연중 제18주일
오늘은 연중 제18주일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병자들을 고쳐주고 굶주린 오천 명의 군중을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이시며 참된 나눔의 기적을 보여 주십니다. 주님께서는 병들고 굶주린 가난한 이들에게 어떠한 마음과 자세로 나누어야 하는지를 당신의 삶을 통해서 몸소 보여 주십니다.
특히 오늘 복음은 주님의 3가지 모습이 두드러지게 나타납니다. 첫 번째는 인적이 드문 외딴 곳에서 홀로 있는 시간을 가지며 침묵과 고요안에서 기도를 드리시는 모습입니다. 삶에 힘들고 지친 병약하고 가난한 이들을 돕기 위해서 자신 먼저 하느님 앞에 홀로 고요히 대면하며 하느님께로부터 오는 영적인 힘을 받아야 함을 보여 주십니다. 하느님의 영적인 힘이 뒷받침하지 않는 인간적인 도움은 한계가 있게 마련합니다. 그래서 모든 위로와 힘의 원천이신 그분과 함께 머무르는 장소와 시간이 필요합니다.
둘째는 이러한 고요와 침묵안에서 기도하는 결과로 우리 마음안에 제일 먼저 자리잡는 것은 측은지심의 마음입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자비로운 마음입니다. 병고와 가난으로 고통받는 이들의 마음을 자신의 마음처럼 아파하며 어떻게 해서라도 그들에게 위로와 힘이 되어 주려고 하는 마음입니다. 주님께서는 고쳐달라고 당신을 찾아 온 아픈 이들을 외면하지 않고 고쳐 주시고, 군중이 너무 많아서 먹을 것을 주는 것이 귀찮고 감당하기 힘들어서 되돌려 보내려는 제자들의 마음과는 달리 주님께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모두 다 배불리 먹이려 하는 측은지심을 보여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주님께서는 하찮고 작게 보이는 것일지라도 소중히 여길 줄 아는 감사의 마음을 지니십니다. 오천 명의 군중을 먹이기에 턱없이 부족한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하찮은 것으로 여기지 않고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며 하늘을 우러러 찬미의 기도를 올리십니다. 바로 이러한 주님의 모습은 군중들을 감동시켜 각자 여행길에 지니고 왔던 변변치 않는 보잘것 없는 먹거리들을 하나 둘씩 십시일반 내놓게 만드는 나눔의 기적을 낳게 합니다. 그들이 지닌 빵 한 조각도 결코 작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을 먹여 살리는 데 고귀하고 소중한 것들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십니다.
주님의 삶을 본받기 위해서 고요와 침묵안에서 기도드리는 것이 자신의 안위와 자기만족에 머물러서는 안되고 궁극적으로 가난하고 소외받고 고통받는 이들을 자기 일처럼 도우는 측은지심이 우리 마음 안에 생겨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러한 고요와 침묵안에서 기도드리는 열매의 결실이 가난한 이들을 위한 측은지심이 나타나지 않는다면 그 기도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주님께서는 우리들이 하찮고 보잘것없다고 여기는 능력과 재능을 낮추 보이지 않으시고 고귀하고 소중한 것으로 보아 주십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은 주님 것이며 그분께로 받은 선물이며 자신의 것이 아니기에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이들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바로 여기에 참된 나눔의 기적이 있다는 것을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우리들에게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고 도미니코 ofm
----------------------------------------------------
200802. 연중 제 18 주일-묵상과 기도: 이재을 사도요한 신부님.
주제는 자애를 베푸시는 하느님,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 사랑, 그리고 채우고 배부르며 넘치는 주님의 양식'입니다. 이사야 예언서에서 주님께서 목마른 이 물가로 오고, 돈 없는 이들도 와서 사라. 돈 없이 값없이, 술과 젖을 사라. 하였습니다. 로마서는 모든 이들, 피조물까지, 그들 곧 그리스도 제자들을, 그리스도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에서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은 가엾은 마음으로 병자를 고치시고, 제자들의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명을 먹이십니다. 모두가 배불리 먹었습니다.
하느님은 크신 자비와 흘러 넘치는 사랑을 베푸십니다.
주님의 기도
지난시간 돌아봄
지난 시간 걸어온 시간과 길을 회상합니다. 나 자신을 깊이 바라봅니다.
-. 3분 동안. 주님을 바라봅니다.
-. 지난 시간의 각 현장을 되돌아 가서 봅니다. 나와 사람들. 활동, 곧 만남, 대화, 행위를 바라봅니다.
-. 사랑과 진리, 허물과 잘못, 부정과 거짓, 그리고 나의 복음적 생활을 묵상합니다. 회개와 함께 묵상합니다.
-. 지난 모든 일과 만남에 감사하며, 그 결과를 감사의 마음으로 기도합니다.
말씀 묵상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 돈이 없는 자들도 와서 사 먹어라. 와서 돈 없이 값 없이, 술과 젖을 사라.
너는 어찌하여 양식도 못 되는 것에 돈을 쓰고, 배불리지도 못하는 것에 수고를 들이느냐? 들어라, 내 말을 들어라. 너희가 좋은 것을 먹고, 기름진 음식을 즐기리라.
너희는 귀를 기울이고 나에게 오너라. 들어라. 너희가 살리라. 내가 너희와 영원한 계약을 맺으리니, 이는 다윗에게 베푼 나의 변치 않는 자애이다." 이사 55,1-3
형제 여러분, 무엇이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갈라놓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역경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험입니까? 칼입니까?
우리는 우리를 사랑해 주신 분의 도움에 힘입어 이 모든 것을 이겨 내고도 남습니다. ...
저 높은 곳도, 저 깊은 곳도, 그 밖의 어떠한 피조물도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님에게서 드러난 하느님 사랑에서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습니다. 로마 8,35.37.39
예수님께서는 배에서 내리시어 많은 군중을 보시고 가엾은 마음이 드시어, 그들 가운데에 있는 병자들을 고쳐주었다.
저녁 때가 되자, 제자들이 예수님께 "여기는 외딴 곳이고 시간도 이미 지났습니다. 그러니 군중을 돌려 보내시어, 마을로 가서 스스로 먹을거리를 사게 하십시오."
예수님께서 "그들을 보낼 필요가 없다. 너희가 그들에게 먹을 것을 주어라."하고 이르시니, 제자들이 "저희는 여기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밖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께서 "그것들을 이리 가져 오너라." 하시고, 군중에게 풀밭에 자라 잡으라고 지시하셨다. 그리고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손에 들고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 그리고 남은 조각을 모으니 열두 광주리에 가득찼다. 먹은 사람은 여자들과 아이들 외에 남자만도 오천 명가량이었다. 마태 14,13-21
-. 성경 말씀을 1독, 2독을 합니다. 1독은 소리내어, 2독은 마음으로 읽습니다.
-. 3분 동안 묵상. 마음 깊이 와 닿는 말씀. 메시지를 묵상합니다.
-. 메시지 말씀, 그 말씀의 내용으로, 주님께 기도로 봉헌합니다.
실천하기
주님을 향하여 그분께 오는 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그분의 자애와 사랑을 얻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외에, 그분 말고는 누구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사도 4,12). 그분에게 오는 이 모두, 특히 목마른 이, 배고픈 이들 값없이, 좋은 것을 먹고 마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이고 그분께 다가섭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에게 온 모든 사람에게 생명의 빵을 배불리 먹고도 남게 하셨습니다.
주님은 생명과 구원의 잔치를 마련하십니다. 단 제자들이 빵 다섯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주님께 드렸듯이, 나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봉헌해야 합니다. 곧 작은 것이기도 하나, 성전 봉헌함에 렙톤 두 개를 봉헌한 가난한 여인처럼, 봉헌하는 거룩한 자비심을 가져야 합니다. 주님께서 흘러 넘치도록 주실 것입니다.
마치기
성모송 영광송으로 마무리 기도 합니다.
이재을 신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