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리다 발리(Alida Valli)라는 이탈리아 여배우가 있었다. 1921년 5월 31일 이탈리아의 폴라(이곳은 지금 크로아티아領이다)에서 오스트리아인 어머니와 이탈리아인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어릴 때부터 출중한 미모는 그녀를 연기자의 길로 이끌었다. <Il Cappello a tre punte>(1934)로 열세 살의 나이에 영화계에 데뷔한 발리는 이탈리아 영화뿐 아니라 다른 유럽 영화들에도 출연하면서 인기를 얻어갔다. 하지만 파시스트 정권이 들어서면서 그녀는 영화 출연을 거부했고, 투옥을 피해 숨어 지내야만 했다. 오스트리아 출신의 저널리스트였던 어머니는 그녀와 정치적 입장이 달라 무솔리니에게 동조하다가 전쟁이 끝나면서 반파시스트 세력에게 총살당했다.
전쟁이 끝나고 남편인 작곡가 오스카 드 메조와 함께 할리우드 비행기를 탄 발리는 데이비드 O. 셀즈닉과 계약을 맺고서 <기적의 벨: Miracle of the Bells>(1947), 히치콕의 <패러다인 부인의 재판: The Paradine Case>(1947) 등에 출연해 호평을 받는다. 두 아이의 어머니로서 조용히 살 수 없게 하는 일이 일어난다. 세계영화사의 명작 <제3의 사나이>에 출연한 것이다.
오손 웰즈와 함께 출연한 <제3의 사나이>(1949)는 할리우드에서 그녀의 입지를 완전히 굳혀놓았지만 1954년 마약과 섹스에 관련된 스캔들로 주춤한다. 영화계에 다시 복귀하여 인상적인 조연 연기로 호평을 받았고, 1968년 영화도 한 편 직접 연출한다.
노후에 할리우드 영화 <카산드라 크로싱: The Cassandra Crossing>(1996)에도 출연했다.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의 영화 <거미의 계략>(1970)에서 매력적인 모습을 보여주었고, 이탈리아 공포영화의 거장 다리오 아르젠토 감독의 영화 <서스페리아: Suspiria>(1977)에도 등장했다. <1900>(1976), <인페르노: Inferno>(1980)도 빼놓을 수 없는 작품이다. 1997년 베니스영화제에서 공로상을 수상했다.
박유희의 그때 그 영화(23)
<제3의 사나이>(감독 캐럴 리드, 1949년 작)
정의와 사랑 사이의 갈등 긴박하게 그려
한국서 가장 오래 흥행한 유럽 영화
묘지 입구에서 홀리가 안나를 기다리는 마지막 장면. 냉연하게 홀리를 지나치는 안나의 모습은 경쾌한 치터 반주와 어우러져 절묘한 세련미를 완성했다.
1987년 미국영화 직배가 이루어지고 1999년 스크린 쿼터가 축소되기 이전 우리나라에 다양한 외국영화가 수입되던 시기는 언제일까? 1960년대? 1970년대? 의외로 그것은 1950년대, 한국전쟁 직후였다. 전쟁 직후라고 하면 폐허와 재건부터 떠올리며 영화 같은 것을 볼 시간이 전혀 없었을 것으로 생각하기 쉽지만, 딱히 위안을 받을 만한 오락거리가 없는 상태에서 영화의 인기는 압도적이었다. 아직 국산영화가 제대로 만들어지지 못하는 상황이었으니 수입영화가 영화 시장을 온전히 차지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때는 ‘스크린 쿼터’와 같은 국산영화 보호정책이 발효되기 전이었기 때문에 할리우드는 물론이고 유럽 영화들도 다양하게 수입되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의 영화는 전후 젊은 세대의 새로운 문제의식을 반영하며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한국에도 그러한 영화들이 수입되어 인기를 끌었는데, 그중 한국에서 가장 오랫동안 흥행한 영화는 <제3의 사나이>였다. 이 영화는 1954년 3월에 개봉하였고, 1956년에 재개봉하여 1960년까지 여러 극장에서 계속 상영되었다. 그리고 1970~1980년대에는 텔레비전 명화극장의 단골 메뉴로, 또 라디오 영화음악 프로그램에서 자주 트는 오리지널 사운드트랙의 하나로 지금의 중장년층에게 큰 인기가 있었다.
영화는 세계대전 직후 4개 승전국에 의해 공동으로 치안이 유지되고 있었던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배경으로 한다. 미국의 삼류소설가 홀리 마틴스(조셉 코튼)는 친구인 해리 라임(오선 웰스)을 만나고자 비엔나에 온다. 그런데 홀리는 도착하자마자 해리가 교통사고로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홀리는 장례식을 마치고 미국으로 바로 돌아가려 했으나, 해리의 죽음이 의문투성이임을 알고 비엔나에 머물게 된다. 그리고 그 무엇보다 그가 떠나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해리의 연인 안나(알리다 발리) 때문이었다. 첫눈에 안나에게 매혹된 홀리는 해리의 죽음을 조사하며 안나의 주변을 맴돈다. 그러던 중 홀리는 해리가 가짜 페니실린을 팔아 많은 이들을 죽음에 이르게 한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그가 죽음을 위장했다는 것도 밝혀낸다.
그런데 안나가 해리를 도와달라고 홀리에게 간곡하게 부탁한다. 정의를 위해서는 해리를 잡아 경찰에 넘기는 게 옳다. 하지만 사랑하는 여자의 부탁을 어떻게 거절하랴! 그런데 해리가 없어져야 홀리는 안나를 사랑할 기회를 얻을 수 있기도 하다. 그렇다면 홀리가 해리 체포에 협조하는 것은 과연 정의만을 위함인가?
이 영화는 이런 딜레마 속에 주인공 홀리를 몰아넣으면서 긴박하게 전개된다. 결국 홀리와 경찰의 긴 추격 끝에 해리는 총에 맞아 죽는다. 해리의 진짜 장례식 날, 홀리는 묘지 입구에서 안나를 기다린다. 그러나 안나는 단 한 번의 눈길도 주지 않은 채 도도히 묘지를 빠져나간다. 그리고 그 장면 위로는 치터로 연주되는 다소 경쾌한 주제 음악이 흐른다.
지금 봐도 세련된 이 마지막 장면은 1950년대 한국 관객에게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게다가 이 영화가 1949년 칸영화제 그랑프리 수상작이라는 사실은 이 영화를 유럽영화의 세련미를 대변하는 작품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 당시 신문에서 이 영화를 두고 ‘영화미(映畵美)의 발견’이라고 한 것 등이 그것을 뒷받침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영국 영화연구소(BFI)가 뽑은 ‘20세기 최고의 영국영화 100편’ 중 1위로 선정되었다. 1950년대 한국 관객의 안목이 나름대로 국제적이었던 모양이다. 아니면 좋은 영화는 언제 어디서든 알아보게 마련인가?
김도훈 기자의 부음 기사
<제3의 사나이>를 기억한다면 여인의 모습을 잊어버렸을 리 없다. 담배를 피우며 낙엽이 깔린 가로수 길에서 여인을 기다리는 남자. 점처럼 조그맣게 보이던 여인이 다가온다. 남자는 가슴속에 담은 말을 꺼내려 하지만 여인은 그저 냉랭한 표정으로 남자를 지나쳐 사라져간다. 그리고 스산하게 깔려오는 음악. 영화팬들의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는 이 마지막 장면은 오슨 웰스가 “당신 인생에서 볼 수 있을 가장 섹시한 존재”라고 찬탄했던 이탈리아 여배우 알리다 발리의 가장 위대한 순간 중 하나다.
알리다 발리가 2006년 4월 22일 천국의 가로수 길을 걸어 사라졌다. 향년 84세. 미국으로 건너간 뒤에는 “제2의 잉그리드 버그만을 발견했다”고 외친 전설적인 제작자 데이비드 셀즈닉에 의해 국제적인 여배우로 떠올랐다. 전성기의 대표작으로는 히치콕 감독의 <패러다인 부인의 재판>(1948), 루키노 비스콘티의 <센소>(1954), 캐럴 리드의 <제3의 사나이>(1948) 등이 있다. 그녀를 지속적으로 찬미해온 팬이라면 다리오 아르젠토의 <인페르노>(1980) 역시 기억할 것이다.
알리다 발리의 장례식은 4월 24일에 열렸다. 로마 시장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 중 하나를 잃어버렸다”는 추도사와 함께 그녀를 애도했다. 물론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얼굴’뿐만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