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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9-2 추석이 초막절 곧 수장절이며 추수감사절이다
출23:14-17 눅17:13-19
불과 3일전에 제11호 태풍 힌남노가 우리나라 동해안으로 빠져나가면서 경북 포항에는 시간당 77㎜에 달하는 폭우가 내리면서 인구 50만명의 포항시 전 지역에 침수 피해가 나면서 죽도동 도로 곳곳이 물에 잠겨 차량 통행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특히 대도사거리 해도 방면은 도로에 있는 차량이 절반 잠길 정도로 물이 차오른 상태던 그날 아침에 포항시 한 아파트 지하주차장이 태풍으로 침수되면서 차량을 빼러 들어갔던 주민 8명이 숨진 채 발견됐다는 비보가 전해진 것도 잊혀지기도 전에 어느 덧 추석이 성큼 다가왔다. 시절따라 가는 절기가 백로지나 秋夕이라고 했는데 우리민족 큰 명절 팔월 한가위 추석이 오면 집집마다 전 부치고 송편을 대광주리에 가지런히 놓으면서 가족 모두가 기뻐하였기에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는 화두가 자연스러웠는데 2022년 올 추석은 러시아 우크라아나 전쟁으로 인하여 밥상물가는 올랐는데 우리나라 경우 환률상승이 물가상승에 부채질하여 물가는 너무 올랐고 아직도 코로나가 종식되지 않았기에 올해도 마스크를 쓰고 추석을 맞이하지만 그래도 윤석열정부는 코로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않기 때문에 마스크만 쓰면 거리두기나 모이는데 인원제한 없고 또 여행에도 아무런 제한이 없으니 이번 추석은 오랜만에 명절같은 기분이 든다. 사실 추석이라는 명절은 우리사회에는 유교적 생활관습이 밑바탕에 깔려있다 보니 전통적으로 부모의 은혜를 기리며 돌아가신 조상에게까지도 그 은혜를 잊지 않고자 제사 지내는 것도 효를 계속하기 위함이라고 생각하는데 그러나 성경에서는 부모는 살아계실 때만 부모이지 세상 떠나고 나면 더 이상 부모가 아니기에 부모에게 효도할 기회는 소멸된 것이나 다름없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은 살아 있을 동안에 효도하라는 말씀이다. 작년 추석엔 코로나정치로 말미암아 올 추석엔 고향에 오지 말라는 진정한 의미는 죽은 사람 챙기다 산 사람 죽어 나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어느 정도 인정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다소 심란하기도 하였었다. 돌아가신 조상을 추모하는 것도 좋지만 산 자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예禮’란, 고정불변의 지식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시대 상황에 맞게 물 흐르듯 따르는 것이 삶의 지혜가 아닐까 싶다. 올해는 금요일부터 추석연휴가 4일이다 보니 고향은 안가도 여행을 가는 사람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차례가 중요하다면 그럴 수 없다고 생각되는데 고향못간 사람들이 여행간다는 것을 보면 제사라는 전통도 이제는 남의 눈치 보지 않고 안 지낼 수도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원래 추석은 농경사회에서 1년 농사 추수에 대한 감사제로 드리는 명절로 그동안 헤어졌던 가족들이 한자리에 모여 가족 간 우애와 사랑을 더욱 돈독해지는 명절이다보니 추석 때는 사람들이 감사를 표하기 위해 선물을 주고받는 것을 보면 확실히 추석은 감사하는 절기가 분명한 것 같다. 그렇다면 추석 때 진짜로 감사해야 할 대상이 누구이며 무엇 때문에 감사하여야 하는가? 보통 믿지 않는 가정에선 돌아가신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는 것으로 조상들에게 감사하는 풍습이 대세를 이루지만 우리민족들도 아주 오래 전 삼한시대 이전에는 하늘의 하나님께 감사제를 드렸다는 제천행사라는 것이 있었다고 역사책에 나오는데 이를테면 고구려의 전신인 부여에는 영고라는 제천 행사가 있었으며 동예는 무천이라는 제천 행사를 열었다고 하는데 제천행사라는 것은 하늘의 신 즉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를 말한다. 역사를 연구하다보면 우리 민족은 단군시대부터 이미 하나님을 믿었던 민족이다. 오늘은 그에 대한 설명은 생략하지만 창세기 10장 25절 이후에 나오는 욕단의 후예가 우리 민족이라는 것을 안다면 하나님을 잘 믿던 우리조상들은 삼국시대에 불교가 들어오기 까지는 우리 조상들은 추석에 제천행사를 통해 하나님을 믿었던 민족이었기에 애국가에도 하나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라고 하였고 오늘날 우리나라는 도시이건 시골이건 아니면 해외에 나가든지 사람들이 사는 곳이라면 교회가 세워진다는 것은 우리민족은 특별히 하나님이 사랑하시는 우리 대한민국이 아닌가? 그러므로 추석을 맞이하여 감사를 드릴 대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심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께서 우리 조상들에게 이렇게 천고마비의 계절인 청명한 가을철에 추석명절을 주셨고 이 명절을 통해 금년 한해에도 풍성한 결실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이 마땅하지만 추석이 되면 아직도 제사 문제로 고민하는 분들도 있다. 교회다닌다는 이유로 가족들이 모여 차례를 지내는데 절을 하지 않으면 “예수 믿는 사람은 조상도 모르냐? 어떻게 조상님 제사를 안 해!”라는 말을 들을 때 아주 당황스럽지만 주님을 위한 진실한 믿음만 있다면 이런 시련은 얼마든지 참을 수 있다. 그래도 인간인지라 차례 때문에 큰 어려움을 겪는 명절이기도 합니다.
1. 조상제사로 추석을 맞이하는 일반인들
추석을 맞이하는 일반인들은 당연히 제사상 차려놓고 절하면서 추석상을 지내지만 다른 종교인들은 어떻게 지낼까 하던 차에 얼마 전 명절 때 카톨릭식 차례를 소개한 글을 읽었는데 카톨릭이 우리나라에 처음 들어 왔을 때는 제사를 지내지 않아서 박해를 받은 적도 있지만 20세기 들어와서는 한국의 제사가 효의 실천이며 미풍양속이라고 해서 지금의 카톨릭은 제사에 대한 추도예식을 보급한다는 것인데 내용인 즉 이렇습니다.
추석이나 설날에는 신자들이 미사를 드릴 때 미리 조상의 이름과 봉헌금을 성당에 제출하면 추석이나 설날 당일 성당 앞에 간소한 합동차례상이 차려지고 나면 합동위령미사가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합동위령미사는 죽은 이를 위한 기도 즉 연도를 하는데 하나님의 자비를 청하는 성경구절에 전통가락을 붙여 구성지게 노래하는 한국만의 독특한 기도법이라고 합니다. 합동위령미사중에는 물론 죽은 조상을 위한 기도문이 낭독되고 가족들끼리 지낼 때에는 차례상에 십자가를 놓고 성경을 읽고 향을 피운 뒤 절을 하고 마지막으로 연도를 한 뒤 성가를 합창하는 것으로 차례가 끝나면 차린 음식을 나누어 먹는다는 것인데 이런 카톨릭 차례는 카톨릭교리와 어긋나지 않으며 조상에 대해 공경의 뜻을 표하기도 하므로 명절날에 카톨릭 신자들이 많이 행한다는 것인데 물론 이런식으로 추석이나 설에 성당에서 합동위령미사를 드린다면 조상들에게도 무언가 정성을 드렸다고 다소 위로는 되겠지만 정말 예수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믿는 사람들이 그런 식으로 미사를 드린다면 그 미사를 하나님이 받으실 것인가가 중요합니다. 제가 자신있게 말하건데 복은 고사하고 저주밖에는 받을 것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성경에서 금한 죽은 자를 위한 연도를 만들어서 하나님을 섬기는 것은 하나님께서 받으실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분명히 말하건대 카톨릭 교리대로 명절날 합동위령미사 지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것이야 말로 하나님이 우상앞에 절하지 말라는 계명에 대한 것을 정면 도전하는 것으로 복은 고사하고 진노 이외에는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 성경에는 이방인들의 제사에 대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10:20) 대저 이방인의 제사하는 것은 마귀들에게 하는 것이요 하나님께 제사하는 것이 아니니 나는 너희들이 마귀들과 교제하는 것을 원치 아니하노라.
카톨릭 위령미사나 개인이 드리는 제사가 이방인들의 제사라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결국 조상들에게 어떤 식으로든 제사를 드린다면 그 결과는 불과 유황불이 타는 지옥 불못에서 영원한 고통을 당한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계21:8) 그러나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아니하는 자들과 흉악한 자들과 살인자들과 행음자들과 술객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모든 거짓말 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못에 참예하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라.
성경은 죽은 자를 위한 어떤 제사나 예배라 하더라도 그런 제사나 미사는 이방인의 제사라고 밝히고 있다면 오늘날 카톨릭에서 드리는 명절미사도 미풍양속과 효도와 교리를 들먹이면서 돌아가신 분에게 제사를 드린다는 것은 분명히 이방인의 제사라는 것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장례식 이후에는 죽은 자에게 그날을 기념하여 제사드리라는 것은 어디에도 없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인들 중에는 제사대신 추도예배를 드린다는 것도 제사의 또 다른 방법이며 정말로 주님을 믿는다면 그런 위선에서 떠나 주의 말씀대로 순종하면 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이 원하시는 추석 명절
올 한해에도 세계 곳곳에서 폭염, 한파로 인하여 세상 여기 저기에서는 인간들도 동물들도 큰 고통을 받기도 하였는가하면 또 그와는 반대로 어디에는 가뭄으로 가축이 죽어가고 농작물 수학을 못하여 기근이 들기도 하였고 또 어떤 곳은 비가 너무 많이 와 홍수로 인하여 물바다가 되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기도 하였으며 또 어디에는 지진과 화산폭팔로 집이 무너지면서 사람들이 매몰되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재앙들이 발생하였다는 뉴스를 접하고 있는데 우리나라는 하나님이 보우하사 이런 재난에서 아니 태풍조차도 비껴나갔으니 어찌 하나님의 은혜를 잊을 수가 있나요? 정말 올 추석도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잘 익은 과일들이 이렇게 풍성한 것을 보면 이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햇빛과 비를 때맞춰 골고루 주신 하나님께 감사드려야 하지 않을까요? 다시 말하건데 추석의 진정한 의미는 성경에 기록된 수장절처럼 한 해의 농사를 잘 거두고서 풍성한 오곡백과를 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으로 이 명절을 지켜야 합니다. 우리나라 추석명절은 바로 추수감사절과 같다는 것입니다. 추수감사절은 추수한 것에 대하여 감사를 드리는 절기인데 우리민족은 셈의 후손으로 노아가 노아의 아들 셈에게 이르기를 셈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창9:26)하셨듯이 하나님의 은혜를 잊지 않고 감사하는 사람들에게는 복은 부수적으로 따라오게 된다는 것입니다. 복이란 자기가 한 일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복을 주셔야만 복을 받게 되는 것이라고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12:7)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 손으로 수고한 일에 복 주심을 인하여 너희와 너희 가족이 즐거워할지니라 라고 말씀합니다. 추석에 가장 많은 듣는 말이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늘 한가위만 같으라는 덕담이 있듯이 이러한 기쁨을 온 가족이 함께 누린다면 추석은 연중 으뜸 명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은 돌아가신 조상들이 복을 준다고 생각하고 추석을 맞이하여 햇곡식으로 빚은 송편과 햇과일을 제사상에 올려서 조상께 제사를 드리는 것으로 추석을 맞이하는 것은 이러한 절기를 주신 하나님을 무시하는 것은 아닌지 생각 좀 해봅시다. 하나님을 공경하지 않고 무시하는 인생은 그 자체가 저주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와 가까운 다른 나라들의 추석은 어떤 모습일까?
(2) 이웃나라의 추석 문화
1) 달에게 제사를 지내는, 중국의 ‘중추절’
우리나라처럼 중국에서는 음력 8월 15일을 중추절이라고 하는데 중추절은 일찍이 주나라 때 풍년을 기원하기 위해 달을 향해 절을 하는 의식이 있었다고 하니 중국은 우리나라처럼 조상들에게 제사를 지내지만 일부는 달에게 제사를 지내거나 달을 쳐다보며 소원을 비는 놀이를 한다. 우리나라도 일부 사람들이 둥근 보름달을 보고 복을 빌 듯이 중국도 그렇다는 것인데 달은 무생명체로 인간에게 복을 줄만한 존재가 아니다. 중국은 중추절을 맞이하여 제사상에는 둥근 달의 모양을 본떠 만든 월병을 놓는데 제사 끝나면 먹는다고 한다.
2) 조상의 영혼을 맞아들이는 일본의 ‘오봉’
일본의 추석명절인 오봉은 양력 8월 15일에 치른다. 조상의 영혼을 맞아들여 대접하고 모두의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는 날로 대표적인 행사는 무카에비로, 조상의 영혼을 맞이하기 위해 묘소나 길거리, 대문 등에서 불을 피우는 것이다. 또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봉오도리라는 민속춤의 하나인데, 마을 사람들이 저녁에 ‘유카타’라고 하는 무명 홑옷을 입고 마을 광장에 모여, 통나무로 짜 만든 높이 3~4미터 정도의 ‘야구라’라는 망대 주위를 돌면서 춤을 춘다. 이는 저승에서 찾아온 조상의 영혼들이 이승에 있는 후손들과 함께 즐겁게 춤을 추고 다시 저승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중국의 중추절이나 일본의 오봉같은 문화는 추수의 수확을 주신 하나님에게는 어떤 감사도 없다는 것이다.
3) 추수한 수확을 감사하는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
미국 추수 감사절의 유래는 1620년 신앙의 자유를 위해서 청교도들이 영국에서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2달간의 항해를 걸쳐 1620년 11월 19일에 미국 동해안 프리머스에 102명이 도착했는데 이들은 첫 번째 맞이한 혹독한 겨울추위와 기근으로 반이 죽었고 살아남은 51명이 이듬해 가을 첫 수확을 거두었을 때, 먼저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린 것이 추수감사절의 유래라고 한다. 뉴욕 102층짜리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신앙의 자유를 찾은 102명의 청교도들을 상징한다는 기념으로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상륙한 102명중 첫 겨울을 보내면서 추위와 병으로 절반이나 죽었지만 살아남은 청교도들의 후손인 미국인들은 이 날을 기념하기 위해 매년 11월 넷째 목요일을 공휴일로 정하고 그 다음날은 Black Friday로 Thankgivings을 지키고 있다.
2. 추수감사절의 성경적 근거
오늘날 교회에서 보통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것은 미국 선교사들의 전해준 영향이었지만 성경을 보면 추수감사절은 수장절 혹은 초막절을 근거로 지켜야 하는데 수장절은 추수를 마치고 창고에 저장한 후 추수한 것에 대하여 감사하는 절기이다.
(출23:16) 네가 밭에 뿌린바 네 수고의 첫 열매의 수확절을 지키라. 이는 밭에서부터 수고하여 얻은 것을 거두어들인 때 곧 한해의 끝에 있는 수장절을 지키라.
(레23:34-35,42-43) 34 이스라엘 자손에 말하여 이르라. 이 일곱째 달의 십오일은 이레동안 주를 위한 장막절이 되리라. 35 첫째 날에는 거룩한 집회가 있을지니 너희는 그 날에 아무 노동도 하지 말라. 42 너희는 이레동안 초막에 거하되 이스라엘 사람으로 태어난 모든 자는 초막에 거할지니 43 이것은 내가 이스라엘 자손을 이집트 땅에서 데리고 나오던 때에 그들로 하여금 초막에 거하게 한 줄을 너희 세대들이 알게 하려 함이니라, 나는 주 너의 하나님이니라.
(신16:13-15) 13 너는 네 곡식과 포도즙을 거두어들인 후에 이레 동안 장막절(초막절)을 지키라. 14 너와 네 아들딸과 남종과 여종과 네 성문 안에 거하는 레위 사람과 나그네와 아버지 없는 자와 과부가 함께 네 명절을 기뻐할지니라 15 너는 주께서 택하실 곳에서 이레 동안 주 네 하나님을 위하여 엄숙한 명절을 지킬지니라. 주 네 하나님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의 모든 일에서 네게 복을 주시리니 그러므로 너는 반드시 기뻐할지니라.
이스라엘의 수장(초막)절은 한주간의 초막생활을 통해 조상들이 광야에서 겪었던 고난에 대한 기억을 되살리는 절기이므로 초막절이라고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가 맞이하는 추석은 성경의 초막절 혹은 수장절을 근거로 드려야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1) 추석을 추수감사절과 연관시켜 보자
사람이 살아가는 동안 먹는 것 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을까? 양식을 얻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때를 따라 비와 햇볕과 바람을 골고루 주셔야 하는데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지 않으면 먹고 살아갈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실제 우리의 목자되신 예수님은 우리를 세세히 돌봐 주셨기 때문에 우리들이 여기까지 온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따라서 추석을 맞아서 우리를 지금까지 보살펴 주시고 인도해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표현해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조상들은 아주 오랜 옛날에는 한 해의 농사를 마친 후에는 제천행사로 감사를 드렸던 것이 역사에 조금이나마 나온다. 그런 것이 고려시대로 오면 ‘풍농제라는 절기가 되었고 조선시대로 오면 국가적 행사로 추석제를 지냈다는 기록이 있는 만큼, 한가위는 그 동기가 농사의 결실을 맺게 해준 하늘에 제천행사를 드리는 의식에서 비롯된 만큼 추석을 통해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성경을 통해서 보면 이 추수감사절은 출애굽기에 기록된 수장절에서 유래되었는데 이 절기는 한해 농사를 마무리하면서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는 가을축제인데 우리조상들은 한가위를 기준으로 첫 수확물로 감사절을 드렸으므로 이제는 추석날을 추수감사절로 정한다면 더 성경적이지 않은가 생각하면서 기독교의 토착화에 관심이 있는 목회자들에게는 추수 감사절을 추석에 지키는 것도 오히려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면서 실제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교회들도 점점 늘어나는 추세이다. 본인 역시 십여년전부터 추석명절을 추수감사절로 지켜오고 있는 것이 성경적이라고 생각하니 기분이 매우 좋다.
(2) 추석의 새로운 모델
이제는 추석을 새로운 문화로 바꿔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1) 죽은 조상들 추모하는 문화에서 산 가족들이 함께 즐기는 문화로
인간이 죽으면 육은 흙으로 되고 영은 구원받았으면 천국에서 구원받지 못하면 지옥에서 영존하는 것인데 한 번 간 영혼은 다시는 세상으로 올 수 없는데 조상에게 제사하는 추석문화는 한마디로 주인공 없는 잔치와 같다고나 할까? 그런데도 죽은 자를 위하여 제사를 드리겠습니까? 정말이지 제사는 죽은 부모와는 아무 관계도 없고 이런 제사를 통해 공중권세 잡은 마귀와 교제하게 된다는 것을 알기 바랍니다.
2) 과거 지향적 문화에서 미래 지향적 문화로
미래지향적 문화는 앞날을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섬기는 문화입니다. 우리 인간들은 앞날을 모르기 때문에 늘 불안한 삶을 살고 있는데 미래를 보장하는 하나님을 믿으면 사는 날까지 두려움 없이 평안히 지낼 수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인도하신 것과 앞으로도 항상 인도해 주실 것에 감사를 드려야 합니다.
(시50:23)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고 하셨는데 하나님께 감사의 예배를 드리는 것은 나에게 아주 좋은 일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들 중에서도 좋은 일 생길 때만 감사하는 사람이 있고 좋은 일이 생기어도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도 있으며 또 모든 일에 감사하고 지난 일 뿐만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것에 대비하여서도 하나님께 미리 감사하는 사람이 있다. 이렇게 미래지향적인 사람은 감사를 선행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들 생각에는 어떤 사람의 감사의 모델이 좋다고 생각하나요? 주님께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이 항상 미래 지향적인 문화를 만들어 가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먼저 범사에 하나님께 감사하는 사람이 참으로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이라고 생각하면서 감사에 대한 말씀을 선포하고자 합니다.
3. 추석명절이 초막절(수장절)이며 곧 추수감사절이다.
구약성서에 나타나는 대표적인 절기가 유대력으로 1월의 유월절, 3월의 칠칠절, 그리고 7월의 초막절이라고 하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절기는 정월의 설과 팔월의 추석이다. 그런데 뿌리를 찾아보면 우리의 정월 설 명절은 새해가 시작되는 年頭절기인데 유대인들의 유월절은 해가 새롭게 바뀌는 신년 명절이고 보니 우리의 설 명절에 해당되고 추석은 한 해의 농사를 추수하면서 지키는 감사의 절기인데 초막절은 포도 올리브 무화과를 추수한 후 창고에 저장해 놓고 온 백성이 함께 지키는 가을 절기였는데 놀랍게도 초막절과 추석은 곡식을 추수한 것에 감사를 드리는 것도 같지만 추석의 날짜와 초막절의 날짜까지도 거의 일치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1) 수장절과 추석의 날짜가 일치한다.
우리나라의 추석은 음력으로 8월 15일인데 음력은 청나라 초기의 시헌력을 따른 것이다. 초막절은 유대력 7월 15일이다. 이 초막절은 레 23:39과 신16:13에 따르면 토지의 소산 거두기를 마치고 즉 추수한 것을 저장하는 때이므로 수장절이라고도 한다. 오늘날 이스라엘은 초막절을 수콧이라 부르며, 추분과 가까운 음력 대보름 저녁부터 초막절을 시작한다. 시기적으로 우리나라 추석과 격년으로 날짜가 거의 겹친다고 할 수 있다. 다른 격년에는 1달 차이가 난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신년을 바벨론 달력을 따라 밤과 낮의 길이가 같은 춘분점에 맞추어 니산월을 정월로 삼아서 그 니산월, 즉 정월 보름에 그들이 출애굽하여 일곱 번째 안식일이 지난 다음날, 즉 50일째 되는 날에 둘째 절기인 칠칠절, 즉 오순절(7×7+1=50)을 지켰고 또 일곱 번째 맞는 달 보름달을 기념하여 티쉬리월 15일에 세 번째 절기인 초막절을 지켰다. 그래서 유대력으로 7월 15일에 지키는 초막절이 우리나라의 음력 8월 15일과 격년으로 겹친다는 이유는 유대력이 시헌력 보다 한 달이 늦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추석과 초막절은 항상 그 날짜의 때가 격년으로 일치한다는 것이 놀라울 뿐이다. 다만 우리의 달력이나 유대인의 달력 중 어느 한쪽에 윤년이 들어 있는 해에만 한 달의 차이가 나고 있을 뿐이다. 이런 것을 알게 된다면 추석이 곧 초막절이며 이날이 곧 추수감사절이라고 볼 수 있다.
(2) 달밤을 즐기는 놀이에서 일치하다.
우리들의 하루 생활의 시작은 아침에 시작하여 저녁에 끝나는 것인데 유대인들의 하루는 저녁에 시작하여 다음날 해 떨어지는 저녁에 끝난다. 실제로 창세기 1장에 보면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첫날에 모든 것을 창조해 놓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저녁이 되며 아침이 되니 첫째 날이니라’고 하셨다. 그래서 유대인들에게는 항상 하루가 시작되는 저녁이 하루의 출발점이었다. 따라서 예배에 있어서도 그들에게는 아침 예배보다 저녁 예배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들의 절기 행사에서 말할 것도 없이 저녁 행사가 모두 중요했는데 그 저녁이란 언제나 해가 서산에 떨어지고 달이 동산에 떠오르는 시각에 시작이 된다. 그래서 그들에게 달밤이 그렇게 중요했던 것이다. 일찍부터 태양을 섬겨오던 애굽 사람들과는 아주 정반대인 것이다. 우리나라 추석이라는 명칭을 보면 가을 추(秋)자와 저녁 석(夕)자로 되어 가을 저녁이란 뜻이다. 아침도 아니고 대낮도 아니고 저녁이라는 뜻이니 이 또한 얼마나 놀라운 명칭인가? 저녁을 중요시한 날은 일 년 중 추석밖에는 없다.
(3) 고향을 찾고 조상을 기억하는 풍습도 같다.
유대인의 3대 절기 중에서도 특별히 이 초막절은 고향을 떠나 살고 있는 흩어진 유대인들 즉 디아스포라들은 바로 매년 초막절에는 고향을 찾는 것이 그들의 전통이다. 그리고 이 초막절에 순례를 못하는 자들은 자기 집 곁에 초막을 짓고 전 가족이 그 속에 들어가 절기를 지켰다. 바로 그것은 옛날 광야에서 나그네로 장막을 치고 살았던 조상들의 장막 생활을 잊지 않고자 그들은 인생의 깊은 진리를 바로 이 광야의 장막 생활에서 터득하며 살았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우리들도 추석이 되면 조상 무덤이 있는 고향을 찾아 길을 떠난다. 고향에 가야 부모의 산소를 찾아 벌초도 하고 성묘도 할 수 있고 부모 형제들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것들이 우리나라와 이스라엘과 공통으로 느끼는 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4) 추수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 행사이다.
수장절에 이스라엘이 하나님께 드린 헌물은 추수해 드린 올리브와 무화과 그리고 포도열매를 하나님께 드렸던 것이다. 이것이 가나안 농경문화에 따른 감사 예물이었다. 그러나 이런 절기일지라도 가축을 치는 일부의 사람들은 양이나 짐승을 드려 이스라엘의 유목 문화적 전통을 그대로 고수해 오기도 했다. 한편으로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 이전에는 추수한 후에는 하늘의 신 하나님에게 제사를 드리는 제천행사를 하였으나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추석날에는 고향을 찾아 조상에게 감사의 차례를 지내고 산소를 찾아가 성묘를 하는 것이 전통이 되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마을은 각종 놀이 행사에 참여도 했다. 이런 것은 같은 유교 문화권 안에 사는 사람들 가운데서도 오직 한국인들에게서나 찾아 볼 수 있는 독특한 문화이다.
4. 누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을까?
(1) 인생의 고난을 겪은 사람들이 감사할 수 있다.
사람들은 잘 나갈 때 보다는 어려울 때일수록 하나님을 찾게 된다. 질병을 통해서, 때로는 사업의 어려움을 통해서, 때로는 고독한 싸움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경우가 많다.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가 가장 힘들어 하는 때가 정말 주님을 만나는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17장 속의 10명의 문둥병자들도 병들었을 때 예수님을 만나 치료받았다.
(눅17:13-14) 13 소리를 높여 가로되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우리를 긍휼히 여기소서! 외쳤을 때 긍휼을 요구하는 문둥병자들에게 주님이 내려주신 긍휼은 14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 하셨더니 저희가 가다가 깨끗함을 받았다.
이처럼 가장 어려운 환경일 때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된다는 것이다. 당시엔 문둥병자가 병이 낫다는 선언은 제사장들만이 할 수 있었다. 그렇습니다. 오늘도 내 삶에 주님의 사랑을 경험한 자는 주님께 감사를 하게 되는 줄 믿습니다. 그렇지만 감사는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감사할 수 있을까?
(2) 은혜를 잊지 않은 자가 감사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은혜가 주님으로부터 왔다는 것을 아는 자들만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눅17:15-16) 15 그 중에 하나가 자기의 나은 것을 보고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16 돌아와 예수님의 발아래 엎드리어 사례하니 그는 사마리아 사람이라.
여러분, 고침 받은 자들은 열 명인데 돌아와 감사한 것은 한 명 뿐이었다는 것은 치료는 다 받았지만 감사한 사람은 열 문둥병자 중 사마리아 문둥이 한사람만 감사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아무리 많은 걸 소유하였어도 가지고 있는 소유에만 집착하는 사람들에게서는 감사가 나오지 않습니다. 내가 지금 누리고 있는 소유가 어디서 왔는지 아는 사람들만 감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내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초점을 두고 사는 사람들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할 수 있으며 아무리 어려운 환경 속에 있어도 감사가 끊이지 않습니다. 여러분은 감사하며 사는 자입니까? 감사를 상실하고 사는 자입니까? 문둥병자 중의 한 사람은 자신이 치료받았던 것보다도 그것을 치료해 주신 예수님에게 더 큰 초점을 맞췄기 때문에 그 한 사람만이 돌아와 감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이 진리입니다. 또, 누가 감사할 수 있습니까?
(3) 주님께 우선순위를 두는 자만 감사할 수 있다
주님이 돌아온 한 문둥병자에게 물으셨습니다.
(눅17:17-18) 17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주님이 물으신 아홉과 돌아 온 한 사람의 차이는 바로 우선순위를 어디에 두느냐 차이였다. 열 사람의 문둥병자가 모두 다 예수님이 자신을 고쳐주셨는지도 잘 알았는데 아홉은 예수님에게 감사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요? 저들은 예수님에게 감사하는 것보다 더 급한 게 그 동안 떨어져 살았던 가족들을 만나는 것이다. 그래서 가장 먼저 주님께 드려야 할 감사가 뒷전으로 밀린 결과 저들은 감사를 상실한 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리고 이 아홉명 문둥병자의 모습이 바로 오늘 나의 모습이 아닌지 한번 생각하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에게 풍성한 은혜와 사랑을 주시는데 늘 감사하는 사람은 지극히 작은 것 하나에도 감사를 드리며 사는가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감사가 증발되었거나 감사가 메마른 인생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저들에게 부어주신 은혜가 차이가 난 게 아니라 감사에 대한 가치관이 다르고 우선순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진리는 우리 주님은 감사하는 자에게 구원을 선포하셨습니다.
(눅17:19)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주님의 구원은 감사하는 자에게 주십니다! 할렐루야! 오늘도 우리의 믿음은 주님을 향한 감사로 나타나야 합니다. 지극히 작은 것 하나에도 주님께 감사하십시오! 이번 한 주간도 우리가 받는 것보다 주시는 분에게 더 관심을 가지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찬양 하십시오. 지극히 작은 일 하나라도 주실 때마다 그분에게 찬양 드리고 감사 하십시오. 그러면 여러분은 언제나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며 마지막은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는 영혼구원의 역사가 여러분의 삶 위에 넘쳐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4) 과거를 잊지 않는 사람이 감사를 한다
레디 엘진이라는 배가 침몰되었을 때 스펜서라는 청년이 물에 빠져 죽게 된 17명을 구출해 낸 일이 있었다. 그 후에 그 청년에게 살려줘서 고맙다고 인사하러 오는 사람이 몇 명이나 있었냐고 물었더니 한 사람도 없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원수는 돌에 새기고 은혜는 물에 새긴다는 말이 있듯이 과거의 은혜를 잊고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과거의 은혜를 기억할 줄 모르는 사람에게는 감사는 결코 행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잘 살게 될 때 나를 잊어버릴까 두렵다고 말씀하셨다.
(신8:11-14) 11 주 네 하나님을 잊어버리지 아니하도록 조심할지어다 12 네가 먹어 배부르게 되고 좋은 집을 짓고 그 안에 거하며 13 또 네 소 떼와 양 떼가 번성하고 은금이 크게 늘어나며 네 모든 소유가 크게 늘어날 때에 14 네 마음이 교만하여 네 하나님을 잊어버릴까 염려하노라"고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절기에 감사를 드려야만 지나온 과거를 잊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과거에 자기가 가난하고 비참했던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 감사할 수 있다.
(롬6:17-18) 17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너희가 죄의 종이었으나 너희에게 전달된 교리의 그 틀에 마음으로부터 순종하고 18 이로써 죄로부터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느니라.
예수믿어 구원받았으면 예수님 믿기 전 죄인이었을 때를 잊지 말고 감사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는 우리들이 죄의 종으로 멸망 받아야 할 우리들 이었는데 예수님을 믿어 그리스도의 피로 의롭게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사실을 기억한다면 감사는 자연스럽게 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자기가 비천하고 사악한 죄인이있던 과거를 기억하고 있었기 때문에 셋째 하늘나라에 올라가기도 하고 신약 성경의 3분의 2를 기록할 정도로 정말 대단한 사도이었지만 바울은 자신을 '사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였으므로 사도라 칭함을 받기에 감당치 못할자라'고 했으며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아니요 오직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다' 라고 겸손히 말하면서 하나님께 감사할 수가 있었습니다. 우리들도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받았던 은혜를 잊지 않는 사람이 감사를 드린다고 할 수 있습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없이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을 수 있을까 생각하면 감사는 저절로 나오는 것입니다.
(5)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는 사람
(롬8: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들 곧 그분의 목적에 따라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고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잊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은 성공이나, 실패나, 무슨 일이 잘 될 때나 잘 안될 때나 하나님께서는 언제나 자신에게 가장 좋은 결과를 가져오게 하신다는 것을 믿기 때문에 항상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할 수가 있습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대로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일에 항상 감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셉의 생애를 보면 그가 형들의 질투로 애굽에 종으로 팔려간 것도, 누명을 쓰고 옥에 갇힌 것도, 임금의 술 맡은 관원이 2년동안이나 자기를 잊어버리고 있던 것도 다 하나님께서 선을 이루시고자 섭리하신 과정이었다고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인생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므로 고차원적인 감사는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는 일입니다. 과거의 비천했던 자기를 기억하며 겸손한 사람,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믿는 사람만이 이런 고차원적인 감사를 드릴 수가 있습니다.
1) 모든 것을 감사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감사하는 사람은 지금의 나를 존재하게 한 온갖 것들을 새롭게 대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은 물론이요, 그 사랑의 통로가 된 것들이 한 둘이 아닙니다. 나의 생명의 씨앗이 되어주신 부모님의 사랑이 있었습니다. 나라는 존재가 그냥 만들어진 것이 아닙니다. 내 오장육부와 이목구비도, 나의 지식과 지혜도, 내가 입는 옷도, 내가 사는 집도, 내가 사용하는 온갖 물건들도 다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결국 이웃에게 신세를 지는데 종교적 용어로 표현하자면 사랑의 빚을 지면서 살고 있다고 할 수 있으니 모두가 다 감사해야 될 대상들이라는 것입니다. 다음은 구원의 은혜에 대한 감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 바로의 압제에서 구원되었듯이 우리도 온갖 죄악의 노예가 되었다가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을 통해 구원받게 된 것입니다. 이 구원의 은혜야말로 우리가 감사해야 할 가장 큰 영적 선물입니다.
오늘 민족 명절인 추석을 보내면서 이처럼 우리는 먼저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를 드리며 또 우리주변의 이웃들에게 까지 다 내가 감사해야 될 대상임을 알고 함께 음식을 나누고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복음의 측면에서 추석을 추수감사절로 지키고 더 나아가 우리 고유의 문화인 추석을 통하여 햇곡식과 햇과일을 하나님께 드린다는 의미에서 추석과 추수감사절은 일맥상통하는 부분을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 민족 고유의 감사절이라 할 수 있는 한가위와 한국교회의 추수감사절은 그 본질적 의미에서 상통하기 때문에 이러한 점에서 이제 한국교회는 추수감사절에 대한 원형적 의미(첫 수확을 하나님께 드린다)를 되새기며, 추수감사절의 시기를 추석과 일치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2) 모든 것이 감사할 조건이다.
오늘도 건강하여 주님을 섬길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해야합니다. 건강 보다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습니까? 사실 건강 하나만 있어도 절대로 불평할 이유가 없습니다. 건강하면서 불행을 논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건강에 대한 모독입니다. 참으로 이렇게 소중한 건강을 가진 것만으로도 무한한 감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그리고 나아가서 약간의 물질의 여유가 있는 것에도 감사하여야 합니다.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보통 세 가지라고 말합니다. 먼저는 가장 필요한 일용할 양식입니다. 두 번째는 여유 있는 재산으로 남에게 주고 싶을 때 주고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그런 재산이 필요합니다. 에베소서에 보면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하여 일하라고 했는데 에베소서 4장 28절에 “도둑질하는 자는 다시 도둑질하지 말고 돌이켜 가난한 자에게 구제할 수 있도록 자기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고 했습니다.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하기 위해서는 이런 여유재산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불필요한 재산이 없는 것에 감사하기 바랍니다. 인간은 누구나 불필요한 재산 때문에 걱정도 많고, 건강도 잃어버리고, 가정도 깨지고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리는 사람들이 많이 있습니다.
누가복음에는 바로 그 세 번째 이야기에 해당되는 사람을 눅12:20에 보니 자기를 위하여 땅에다가 보물을 쌓아두는 어리석은 부자라고 하였습니다. 재물은 많이 소유했지만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만약 그 사람이 가난했더라면 예수님께 나와서 구원받았을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리석은 부자이기 때문에 불행한 사람입니다. 불필요한 재산이 그의 인격을 감당하지 못했고 지나친 부를 관리하는 능력이 없었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5. 추수감사절은 마지막 추수(심판대)를 예고하는 것이다.
추수가 한 해 농사의 마지막을 말해듯이 우리가 추수감사절을 맞을 때마다 기억하여야 할 것은 우리가 생을 마치는 날 우리에게는 최종적인 추수감사절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이 재림하시는 추수 때까지 세상이라는 밭에서 뿌려진 씨는 좋은 씨와 가라지가 자라는 데 에레미야 31장 27절에는 구체적으로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가 뿌려진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어느 씨에 속하는 것 같은가요?
(렘31:27)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를 가지고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을 심으리라
실제로 마태복음 13장에서는 예수님은 좋은 씨를 뿌리셨고 마귀가 와서 가라지를 덧뿌렸다고 했는데 좋은 씨는 천국의 아들들이고 가라지는 악한 자의 아들들이라고 증거하고 있다. 하지만 가라지를 금방 뽑을 것 같았지만 예수님은 가라지를 뽑다가 곡식까지 뽑을까 염려하여 둘 다 추수 때까지 함께 자라게 두었다는 말씀이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추숫군들에게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하늘 곳간에 넣으라 한다고 말씀하셨다. 그 때가 바로 세상 마지막 추수 때이다. 추수하시는 예수님과 천사들 생각해 볼 것은 자기 땅에다 씨를 뿌리듯 예수님도 예수님을 믿는 신앙세계에 좋은 씨를 뿌리셨지만 원수 마귀가 가라지를 덧뿌렸으니 이 신앙세계 안에는 좋은 씨로 난 사람도 있고 가라지로 난 사람도 있다는 사실이다. 달리 말한다면 사람의 씨와 짐승의 씨가 이 세상밭에는 뿌려진다는 말씀을 기억하자. 세상 추수 때엔 짐승의 씨를 먼저 심판한 후 사람의 씨를 거두어서 천국곡간에 저장될 것이라고 말씀하셨다. 그날 하루를 위해 우리일생을 주님께 맡기자.
일생의 마지막 날이 땅에서 수장한 것을 결산하는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내가 서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
해마다의 추수감사절은 한해의 수확한 것을 정산하지만, 최종적인 추수감사절은 일생을 통해서 우리가 수장한 것을 주님이 정산하고, 상급을 결정하신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신 것과 그분이 상주시는 분임을 믿음으로 산 사람은 상을 받을 것입니다. 상을 받는 것에 대해선 여러 가지 경우를 들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푯대로 삼아 달려간 사람은 부름의 상을 받게 될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주께 받은 사명을 마치기 위해 목숨을 건 사람들은 의의 면류관을 받게 될 것입니다. 보물을 땅에 쌓아두지 않고 하늘에 쌓아둔 사람은 그 보물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초막생활의 고난을 잠시 받는 가벼운 것으로 여기고 이겨낸 사람은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고난을 받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서 남은 고난을 자기의 육체에 채운 사람들은 영광을 받게 될 것입니다. 육체를 위해 심지 않고 성령을 위해 심은 자들은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게 될 것입니다.
적게 심은 자는 적게 거둘 것이고, 많이 심은 자는 많이 거두게 될 것입니다. 마지막 초막절은 일생동안 수장한 것을 결산하는 마지막 추수감사절이 될 것임을 알아야 합니다. 또 중요한 것은 주셨던 것을 얼마나 잘 관리하였는지 청지기는 주신자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못할 때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지나온 1년을 돌아보면서 주님이 주신 복을 헤아려 보고 이번 추수감사절에는 감사의 표현을 찐하게 해 보자. 그러면 불평과 불만의 응달에서 양지바른 감사촌으로 주소가 변경될 것이다.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는 그릇된 가치관을 버리고 말씀안에서 새로운 피조물이 되어 보자. 여러분, 소유와 생명은 별개입니다. 예수님은 생명을 얻는 영생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행복이란 나의 영혼이 영생하느냐 못하느냐로 결정되는 것이다. 이 기본적인 것이 확보되기 전에는 세상 물질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데 청년부자는 영생의 문제와 자기의 재산을 맞바꾸려고 했다는 게 어리석은 것이다. 그래서 탈무드에는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주먹을 꽉 쥐고 태어난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처럼. 그러나 사람이 죽을 때는 손을 펴고 죽는다." 여러분, 죽는 사람 보세요. 손을 딱 펴고 있지 주먹을 쥐고 있지 않다라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이 입는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습니다. 잘 들으세요. "오늘 밤 네 영혼을 내가 취할 터인데 그러면 네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여러분, 아깝거든 죽기 전에 다 쓰고 통장 깨끗이 비워놓고 가야 합니다. 인생마지막 날 통곡하는 자가 누굽니까? 마태복음 6장 19절에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게 결론입니다. 세상에는 두가지 부자가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해서 하늘에 많이 쌓아둔 부자가 있는가 하면 하나님에 대하여는 인색하여 땅에만 쌓아둔 부자가 있는데 그런 인간을 가리켜 돈의 노예가 된 인간, 어리석은 인간. 이런 사람은 당연히 천국과는 거리가 먼 인간입니다. 여러분, 내게도 불필요한 것이 있는가 살펴보십시다. 제발,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말고 지혜로와서 하늘나라에서 부요한 자가 되기를 바랍니다. 추수감사절은 하늘나라를 위해 보물을 쌓아 둘 수 있는 유일한 기회입니다. 내일은 나의 시간이 아닙니다. 오라고 하면 가야할 때입니다. 추수할 즐거움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며 사는 것이 인간의 기쁨이라고 믿습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