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4년 2월 23일, – 일본제국군대와 해군은 한국에 전략적 요충지를 점령하기 시작한다.
다음 페이지는 일본이 1904-1905년 러일전쟁 을 전후해서 한국영토를 점령하는 자세한 내용을 설명한다. 이 정보의 원천은 일본 아시아 역사 디지털기록관이다.(JACAR). 이들 문서와 지도를 통해서 독자들은 일본이 “어떻게”, “왜” 독도를 편입시키게 되는지를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독도의 편입은 군사적 우위로 점령한 다른 아시아 지역의 경우와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볼 수 있다. 이 페이지는 문서가 더 많이 발견되기 때문에 분량이 많아지고 규모가 커져갈 것이다.
일본군 라디오 송신소가 한국에 설치된다.
“일본은 한국땅에 어떤 시설을 설치하였는가…?”
1904년 2월 23일 강제적인 한일의정서의 조인 결과, 일본군은 러일전쟁 동안 한국의 전역에 군대를 주둔시키게 된다. 한국이 항구, 섬,그리고 해안지역은 일본군 전함의 본거지가 되었고, 가장 중요한 전라도 진해항은 도고제독 함대의 근거지가 되었다. .이 시리즈에서 우리는 현재 북한 땅인 원산을 얼마나 조사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다음 이미지는 일본 역사기록센터의 자료인데, 러일전쟁 동안 일본군의 한국영토에 주둔한 일본군이 얼마나 불법적으로 라디오 송신소를 설치했는지를 실제 문서를 보여준다. 여기에는 이미 그들이 설치한 시설들과 함께 그들이 건설하는 적절한 방법을 설명한다.
위에는 일본이 한국본토와 독도에 군사시설을 어디에 어떻게 측량하고 건설했는지를 자세히 보여준 일본 국립기록문서 보관소의 파일이다. .
한국에 군사시설을 한 위치를 보여주는 일본지도 원본.
오른쪽 지도는 1905년 일보해군지도로써 일본본토와 한국 바다 사이의 해저 전신망의 상세한 지도이다. 지그재그로 그어진 해안지대 연결망은 일본 나가사키에 있는 사세보항과 연락을 주고 받는 해저 케이블 선을 나타낸다.
자세한 그림을 보려면 두번 클릭하시오. 붉은 영문글자는 참고로 추가한 것이다. 몇 몇 장에서 빈 이미지는 파일 이미지의 자료 크기를 조절하기 위하여 가공한 것이다. 이 파일들은 모두 1904~1905년 메이지 37-38년 사이 일본해군의 기록물에서 나온 것이다.
우리는 독도가 청색으로 칠해져 있으며, 일본의 전체 해군가 육군의 지역 방어계획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계획은 나중에 변경되어 독도를 거쳐가는 케이블은 일본본토 마츠에를 지나가는 대신에 오키 섬을 지나게 된다. (이 지도를 보시오).
우리가 1904~05년 일본해군 기록물 보관소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일본과 한국 연안지역에 관해서, 확실한 방식을 볼 수 있다. 일본해군 순양함들은 군사전략상 중요한 섬으로 모두 보내졌다.
이 섬들과 연안지역 지형학적인 측량은 망루, 통신통신소, 무선통신소를 위한 최적의 장소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이들은 민간인들이 측량 또는 시설을 한 것이 아니라, 러시아 태평양 그리고 발틱함대를 몰살시킨 한 전함들이 이 일을 수행하였다. 지도들은 일본이 군사적인 이유로 점령한 작은 섬들을 표시한다. 더 높은 해상도를 보시려면 클릭하시오.
한국 울릉도의 일본 군사지도들
왼쪽은 한국 동쪽 130km 울릉도에 대한 일본해군 측량 지도. 한국의 울릉도는 일본해군에게 대단한 전략적 자산이었다. 성인봉 산은 하늘 높이 솟아있고, 날씨 맑은 날, 한국본토에서 보이는 섬으로 360도의 모습을 보여준다. 또한 울릉도는 대마도 그리고 조선 해협을 향하는 Vladivostok선박의 중요한 항로에 있다.
그 결과, 울릉도는 일본에서 전략적으로 중요한 시설인 망루가 설치되었고, 선박계류장도 건설되었다. 일본은 러일전쟁 1904년~1905년 당시 헌병을 울릉도에 주둔시켰으나, 1900년초, 이미 벌써 거기에는 일본인 불법 거주자를 통제하기 위한 경찰이 주둔하고 있었다.
울릉도의 통신전선은 원래 일본 전함들이 정박하고 있는 죽변 항에 설치될 예정이었다. 나중에 이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해군 통신선은 독도~일본 마츠에(松江)로 연장되기로 된다. 울릉도 그리고 독도의 군사적 중요성은 여기서 보는 바와 같이 일본이 일찍 알고 있었다. (링크)
울릉도의 북동쪽 석포리에 있는 일본 망루 군사지도들.
오른쪽에는 울릉도가 또 다른 일본 군사지도에 Matsushima(松島)로 표시되었다. 이 그림에서 보는 것은 울릉도의 북동쪽 석포리 망루, 그리고 남동쪽 사동과 도동 사이에 있는 망향산(望鄕峰) 망루 위치이다. 지도는 독도와 일본 마츠에를 연결하는 해저 통신선 경로이다
아래 오른쪽 지도에는 간단한 범례 설명 기호를 보여 준다. 지그재그 선은 독도로 연결된 해저 통신선들을 나타낸다. 지도는 울릉도의 동쪽 해변에서 볼 수 있는 많은 산들의 산등성이의 윤곽선을 보여준다. 독도는 오래전부터 망향산에서 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으며, 그리고 최근에 거기에서 찍은 독도사진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더 큰 모습을 보려면 클릭하시오).
아래 이 내용은 한국의 울릉도에 설치된 일본해군 망루 원본지도 이미지들이다. 그것은 죽도(竹島) 섬 근처 관음봉을 바라보는 석포리 산에 위치해있다. 왼쪽 지도는 망루(望樓) 그리고 지도들을 보여준다. 위, 둥근선은 독도의 가시성 범위를 나타낸 것이다. 지도 in 중앙 아래 보이는 지도는 망루, 군사적 목적의 무선송수신소이다. 석포리 일본해군 망루는 독도의 망루와 거의 같은 시기에 설치되었다.
위 왼쪽: 이 원본지도는 울릉도의 북동쪽 산줄기 석포리(石浦里)에 위치한 일본군의 망루를 보여준다. 위 중앙: 석포리의 인접한 망루는 일본의 병사들을 위한 막사, 송수신소이다. 위 오른쪽: 석포리에서 본 위치는 동해의 멋진 광경을 보여 준다.(이미지를 두 번 클릭하시오)
울릉도의 외로운 언덕 위에 몇 몇 관광객 또는 지방민들이 찾아오고 있지만, 남은 일본군들이 아직 울릉도에 보인다. 벽돌로 기초를 한 막사와 표시는 울릉도의 석포리에서 아직 가시적인 중요성이 남아 있음을 설명한다.
위 왼쪽: 일본 망루(땅의 왼쪽)와 라디오 송신소 시설이 흔적들은 이직도 울릉도 석포리에 남아 있다. 위 오른쪽: 유적의 표시 설명은 주변이 역사적 상황을 설명한다.(이미지를 두번 클릭하시오)
죽변을 거쳐 울릉도, 독도 그리고 최종적으로 오키 섬을 연결하여 일본은 동해를 가로지르는 가시성의 띠를 완성하게 된다. 이런 감시 수역들은 쌍안경으로 매우 멀리 볼 수 있었다. 예를 들면 울릉도의 망루에서 독도는 90km가 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독도의 모습은 매우 쉽게 볼 수 있었다. 이것은 1904년 9월의 일본 전함 니타카(新高) 호의 항해일지에서도 기록되었다. 링크를 보시오.
한국 동해안 항의 일본 군사지도들
한국의 동해 죽변항구는 일본해군에게 중요한 항구였다. 왜냐하면 죽변은 1904년 여름 일본에서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으로 가는 길목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울산, 부산, 죽변 그리고 원산은 모두 일본군이 점령하였고, 망루와 통신소를 건설하였다. 죽변은 그런 중심지였고, 원래 울릉도 망루의 통신선은 사세보에 있는 일본해군 기지로 연결되었다.
오른쪽 지도는 죽변의 일본 군사지도 원본이다. 이것은 독자들의 이해를 위하여 몇 개를 영어로 표시한 것이다. 지도의 아래 오른쪽은 망루와 관련된 통신소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이들 지도들과 함께 윤곽선은 새로이 편입한 무선 라디오 장비의 송수신에 가장 유리한 지형도를 나타내고 있다. 무선통신기관은 러일전쟁 중에 필요불가결한 것이었고, 특히 대마도 전투에서는 위 지도가 그러진 몇 달 후에 그 진가를 발휘하였다.
한국 동해안 울산항구를 나타낸 일본의 군사지도들
두 지도들 아래 이 내용은 한국의 동해안 울산항이다. 다른 지도들처럼 이 지도들은 참고로 웹마스터가 영어로 붉은 색으로 표시하였다. 일본 지도는 울산을 모두 조감도와 해수면에서 그렸다. 위 지도는 망루와 무선통신소의 적합한 위치를 윤곽선으로 그렸다. 아래 보이는 것은 울산항의 전경이다. 울산의 전략 중요성은 1904년 8월 14일 울산 전투에서 분명히 나타난다. 이것은 러시아 해군함이 일본의 수송선을 공격 한 후에 나타난다. 왼쪽은 부산의 망루 그리고 통신소, 그리고 북쪽은 죽변의 군사 기지. 울산의 망루 위치가 이 지도에 나타난다.
일본군의 한국영토점령은 다음 페이지에 계속됩니다. …
[ 韓國之獨島 http://www.dokdo-takeshima.com/korea/2009/07/10/japans-military-land-appropriation-dokdo-i/ ]
일본군의 한국 영토점령과 독도 2
이 시리즈 2페이지는 러일전쟁 1904년~1905년 동안 일본의 한국 땅 점령에 대해서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이 정보의 주된 근거는 일본의 디지털 역사 기록물 센터(JACAR)이다. 이들 문서들과 지도들을 통하여 독자는 어떻게 그리고 왜 일본 독도를 “편입”하였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우리는 독도의 편입은 실제로 일본 해군과 육군이 한국(그리고 아시아)에서 군대의 점령으로 땅을 뺏은 것과 다르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 페이지 더 많은 문서들이 발견되기 때문에 항상 변화하고 그 규모가 커지고 있다.
지도 오른쪽에는 또 다른 일본의 군사지도 원본. 관심되는 부분은 붉은 글씨로 독자들을 위하여 영어로 표시하였다. 이 그림은 독자들이 각 지도를 따라 참고할 수 있기 때문에 유용하다. 더 높은 해상도를 보시려면 클릭하시오.
지그재그 선으로 표시된 연안지역은 군사 해저케이블로서 사세보(左世保-나가사키)에 있는 일본해군 기지로 메시지를 보내기 위한 것이다. 모든 이미지들은 메이지 37년과 38년(1904년~1905년) 일본정부 해군 기록보관소에서 나온 자료들이다.
우리는 독도가 청색으로 표시되고 이 지역은 일본 해군과 육군의 전체 방어계획에 편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계획은 나중에 변경되고 따라서 전선망은 독도에서 일본 본토 마츠에로 연결되지 않고 일본 오키 섬을 연결한다. (지도를 보시오)
우리는 1904~05년 일본해군 기록에서 일본과 한국 연안지역의 모습이 확실히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일본해군 구축함들은 군사 전략적으로 모든 섬들에 파견된다. 이 섬들과 연안지역 지형적인 측량은 망루, 통신소, 그리고 무선시설에 가장 좋은 위치를 찾기 위한 것이었다.
한국의 동해안 일본의 군사시설은 원산과 영흥항구로 연장된다.
일본은 원산항과 그 지역 아래의 한국영토를 장악한다. 지도. 원산은 현재 북한지역이며 러시아와 가까운 곳으로 특히 Vladivostok 항과 가까운 곳이다. 따라서 원산은 러시아 해군이 한반도 남쪽을 감시하기 쉬운 곳이다.
1904년 4월, 후방 제독 Essen의 깃발을 달고, 구축함의 호위를 받아 러시아 구축함들은 원산을 정찰하고, 일본의 연안 선박 2척과 군수송선 Kinshu-Maru를 파괴하고 갑판에 있던 군인들을 살상한다. 아래 지도들은 일본해군의 러시아의 이런 정찰에 대항하는 방어적인 수단을 설명한다. 여기서 보는 원산은 남쪽으로 해저전신망으로 연결되어 한국과 러시아 사이의 대부분 국경을 연결하고 있다. 이들 지도들은 해저 전신케이블 뿐 만 아니라, 러시아 해군을 저지하기 위한 해저기뢰의 위치를 나타내고 있기 때문에 매우 흥미로운 자료이다.
위 일본의 군사지도들은 원산 항구에 설치한 수많은 시설을 설명하고 있다. 망루들과 통신시설 그리고 해저 기뢰는 원산과 영흥만에서 러시아의 Vladivostok 함대를 저지하기 위하여 부설한 것이다.
일본 군은 한국의 인접 섬들 – 부산 가까이에 있는 절영도를 점령한다.
문서제목에서 보는 바와 같이 이 섬은 부산 항구 가까이에 있는 절영도에 망루와 통신소를 건설하기 위하여 측량한 것이다. 도고(東鄕) 제독의 함대는 1905년 대마도 해협 대마도 전투에서 접근하는 러시아 발틱함대를 여기서 기다렸다. 이들 지도들과 함께 지도에는 어디에 망루와 통신소 그리고 무선안테나를 세울지를 설명하는 영토측량을 하였음을 보여준다.
이 지도 오른쪽 옆에 기호가 표시되어 있다. A는 시설 표시이며, B는 지도에서 망루(望樓)를 표시하고, 그리고 D는 음료수가 나오는 곳이다. 물론 조선 해협과 접하는 남쪽 지역은 군사 초소로서 가장 좋은 곳으로 선택되었고, 기상 관측소는 한국과 대마도 섬 사이의 좁은 해로를 잘 볼 수 있다. 오늘날까지, 절영도의 이상적인 해안 위치는 현재 부산의 일부로서 등대로 활용되고 있다.
한국의 남해안의 일본군 망루 – 제주도 그리고 이웃 섬 우도
한국본토와 한국의 울릉도 섬 사이에는 제주 해협이 있다. 제주의 남쪽 해변 그리고 이웃하는 섬 우도에 망루를 설치함으로서, 일본해군은 두 지역에 통과하는 함대를 감시할 수 있었다. 첫째 제주 해협은 제주도의 남쪽 수역을 감시할 수 있다. 전체적인 일본지도해군 망루는 여기에 볼 수 있다. 이 시설을 설치한다는 것은 한국수역에 들어오는 외국 전함들(특히 러시아)을 감시하려는 것이고 그것은 조선과 멀리 대마도 해협의 수역 주변을 중점적으로 안내할 수 있는 것이다.
위 왼쪽: 이 한국 제주도의 사진은 섬의 서쪽에 설치한 망루이다. 위 오른쪽: 제주의 작은 이웃섬 우도에도 역시 망루(望樓)가 설치되어 한반도 남쪽 끝을 항해하는 배를 감시할 수 있다. 우도의 망루는 360도 모습을 보여준다.(이미지 클릭)
한국의 남쪽 헤밀턴 항(Hamilton 한국의 현재 거문도: 巨文島) 그리고 서쪽 섬 울도의 일본의 군사시설.
제주해협에서 남쪽으로 작은 섬들 은 3개의 섬들이 있는데, 두 큰 섬은 서도(西島) 그리고 동도(東島) 동쪽으로는 선호도가 항을 이루고 있다. 이 중앙섬의 관측섬은 고도(古島)라고도 한다.
거문도의 전략 중요성은 일본이 1905년 이 섬을 통제하기 오래 전부터 잘 인식되고 있었다. 미국인들은 1884년 거기에 기지를 세울 것을 제의하였다. 1885년 4월에, Hamilton 항은 영국 Royal 해군 제독의 명령으로 전함 3대에 의하여 점령되었다. 이것은 아프가니스탄(Afghanistan)에서 Panjdeh사건에 직면한 러시아를 봉쇄하기 위한 것이다. 거문도항은 Vladivostok에 있는 러시아 해군 기지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巨文島를 점령함으로서, 영국은 러시아의 동 아시아 진출을 막고, 한국 해협에서 러시아 해군을 봉쇄할 수 있었다.
위 왼쪽: 이 지도에서 붉은 색으로 칠한 부분은 한국의 거문도(巨文島)의 일본의 군대 망루이다. 위 오른쪽: 일본 지도에는 한국의 서쪽 한강 후미 해안의 작은 울도 섬의 일본군 주둔지를 보여준다.
특히 여기서 거문도 지도를 보면, 우리는 이 섬의 중요성은 두 가지로 볼 수 있다. 거문도 남쪽 망루는 우도 섬에 위치한 망루와 나란히 활용된다. 이것은 분리된 섬의 해양에서 60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거문도 그리고 제주도~우도 사이에서 적함대가 탐지되지 않고는 지나갈 수 없음을 보여준다. 그것은 역시 명확히 거문도가 제주/우도~팔문도 그리고 일본의 사세보(左世保-Nagasaki)에 있는 해군 기지를 연결하는 통신선에 중요한 허브로 역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울도 섬은 독도와 마찬가지로 한국의 서쪽 해안의 작은 고립된 섬이다. 이것도 역시 울도의 위치가 전략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울도도 역시 서쪽의 뤼순(여순)항에 주둔하고 있는 적군 러시아 함대를 감시하고 있다. 이 섬은 한강의 하구와 인천항을 침략으로부터 보호한다. 울도에서 백령도 통신선은 러일전쟁 당시 여순항이 함락된 후에 가설되었다. 이 시리즈에서 모든 일본의 군사지도들처럼 범례는 울도 남쪽 끝의 망루 위치를 보여주고 있다.
일본군의 독도 군사지도
독도의 일본 군사지도들은 먼저 1904년 9월에 일본제국 전함 니타카(新高)호의 활동에 활용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오른쪽에 보이는 것은 이 섬에 군대의 구조물 건축이 가능함을 보여 준다. 이 첫째 독도 이미지는 한국의 울릉도 남쪽 망루에서 본 독도의 모습을 대략 스케치한 것이다. 이 도면은 1904년 9월 25일 니타카(新高)의 항해일지에 포함된 것이다.
일본해군은 동해(일본해)에서 러시아의 해군이 이 지역에서 일본해군 수송선을 격침한 후 발생한 긴장 때문에 독도에서 이익을 얻은 것이다. 약 한 달 전, 울릉도와 독도에서 멀지 않은 울산에서 전투가 발생하였다. 니타카의 항해일지가 역시 기록한 바에 의하면, 러시아 해군 선박이 독도 가까이 나타난 것은 일본에게 커다란 관심꺼리였다.
1904년 11월 13일, 일본해군 제독은 전함 대마도호에게 명령하여 독도를 측량하고 거기에 특수기지를 건설할 수 있는지를 조사하게 하였다. 그 측량에서는 거기에 망루를 설치하고 울릉도로 해저전선을 설치할 수 있는지를 조사하였다.(링크를 보시오)
대마도호는 11월 20일 독도에 도착하였고, 그리고 이것은 다케시마/독도에 대한 일본정부에 의한 공식적인 측량이었다. 대마도함의 함장은 독도에 비록 약간 정밀한 문제의 애로는 있지만, 동도에 구조물을 세울 수는 있다고 보고하였다.
왼쪽 지도는 부함장 야마나카 시바기치(山中少佐)가 그린 도면이며, 한국의 다른 일본 군사지도들이다. 이 그림은 이상적인 망루의 위치 그리고 식수의 가능한 위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 지도에는 점선으로 정찰한 위치를 보여주고 있다.
비록 독도는 망루와 작은 기지를 건설하는데 적합하다고 결론지었지만, 일본해군은 건설을 6월까지 연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데, 왜냐하면 동해는 겨울과 봄에 매우 거친 기후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었다. 또한 독도는 적절한 계류장이 부족하였다. 동도의 절벽에 건설자재를 운반하려면 특별한 장비가 필요하다고 결론지었다.
또 다른 건설과정에서 중요하게 고려된 요인은 러시아의 발틱함대의 진출이었다. 1905년 1월, 일본의 군대는 발틱함대가 대마도 해협을 통과할지 확신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순항이 1905년 초에 함락되자, 러시아의 전함들이 동해(일본해)를 몇 달 내에 통과할 것이란 것은 거의 확실하게 되었다.
1904년~1905년 일본의 러일전쟁 기록에서는 고무라 주타로(小村中太郞)가 독도의 병합에 도움을 주었으며, 일지전문에서 대부분 러시아의 함대의 위치를 보고하고 있다. 1월 초, 고무라 주타로는 발틱함대의 목적지가 Vladivostok이 될 것임을 확신하는 전문을 보냈다. 대마도 해협은 유일한 러시아가 취할 수 있는 통로였던 것이다.(위 오른쪽 문서 참고) 따라서, 두 주일 후, 독도병합의 최종결정이 내려지고 일본의 내각은 1905년 1월 28일 독도를 병합한다.
대마도 전투 직후. 일본해군은 독도에 망루건설을 시작한다. 일본의 전함 하시다테(橋立)가 독도로 파견되어 보다 상세한 측량이 완성되었다. 아래 내용은 1905년 6월에 그려진 몇 개의 지도들이다.
위 왼쪽: 하시다테(橋立) 호의 독도 측량지도는 북쪽에서 본 것으로, 동도(東島)는 망루(望樓)에 가장 적합한 이상적인 위치임을 보여주고 있다. 위 중앙: 하시다테(橋立) 호의 항해일지에서 보이는 또 다른 지도는 서쪽 섬(西島) 그리고 동도(東島) 주변의 바위를 역시 표시하고 있다. 위 오른쪽: 독도의 두개 스케치. 하나는 남쪽 에서 본 것이며, 그리고 다른 하나는 독도의 가파른 산능선을 나타내는 윤곽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역시 군대 망루 그리고 관측소의 가장 좋은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한국과 독도의 일본군대 주둔지는 다음 페이지에 이어집니다…
[ 韓國之獨島 http://www.dokdo-takeshima.com/korea/2009/07/10/japans-military-land-appropriation-dokdo-2/ ]
일본군의 한국 영토점령과 독도 3
일본제국 육군과 해군은 한국과 중국의 전략 지역을 탈취하다.
첫째 두 페이지에서, 이 기사는 전체적인 일본과 한국지도 참고를 보면서 시작하고자 한다. 지도 오른쪽에는 일본의 군사지도는 電文, 機構 그리고 일본이 병합한 지역을 나타내는데 중국의 랴오뚱(遼東) 반도도 포함되어 있다. 여기에는 붉은 색 영어로 내용을 참고로 표시하였다. 이 그림의 날자는 메이지 38년(1905년) 1월이다. 이 시기에 일본은 뤼순(여순-대련)항을 함락하였다. 일본은 여순항을 함락한지 한 달 후, 해저전선을 가설하는데 그것은 명확한 야심을 드러낸 것이다.
이 지도는 독도 편입 이전 날자이며, 그리고 우리는 아직 일본이 독도 섬을 활용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아직 실현하지는 않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일본 전함 대마도호의 항해일지 기록은 이 지도를 그리기 2달 전에 독도를 측량하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독도 측량 지도들은 이 페이지 아래에 있다. 아래 한국과 일본 지도는 1905년 1월 1일자 지도의 전체적인 내용 개요이다.
중국 랴오뚱 반도(여순항)의 일본의 군사지도들
이 지도에서 보는 바와 같이 한국은 동북아에서 일본이 군사적 목적으로 점령한 유일한나라가 아니었다. 아래 지도들은 랴오뚱 반도와 한국 서쪽의 일본해군 시설을 보여준다. 위 지도는 망루와 통신소 건설을 위한 준비를 위한 랴오뚱 반도에 대한 상세한 측량지도이다. 해안선의 점선윤곽은 높은 고도에서 그린 것이다. 이들 지역은 물론 통신소에 적합한 곳이며 그리고 분명히 망루건설에도 좋은 곳이다. 아래 왼쪽 붉은 박스로 표시된 지역은 이웃 산에 위치한 통신소의 위치 측량지도이다.
두 번째 지도는 랴오뚱의 연안지역을 따라 망루의 위치를 보여주고 있다. 주변의 둥근 망루는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고 각 위치에서 가시거리를 나타내고 있다.
위의 일본의 군사지도 원본들은 러일전쟁 당시의 지도들이다. 지도들은 망루가 일본이 러시아 군을 여순항에서 몰아낸 이후 불법적으로 건설한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지도들은 일본의 군사 망루위치를 나타낸 지도들이다.
이 페이지는 일본의 역사 기록물보관소에서 나온 것이다. 그리고 그것들은 러일전쟁 당시 일본해군의 망루를 보여주고 있다. 붉은 글씨 내용은 그 지역 지리적 참고를 위하여 표시한 것이다. 망루를 그렸을 때, 둥근 원은 가시 범위를 나타낸 것이다. 여기에 보여준 지역은 가시거리와 가시거리 밖을 나타낸다. 원은 녹색으로 표시되어 있다.
물론, 일본의 독도 편입은 울릉도 그리고 오키섬 사이에서 동해를 감시하기 위한 것이다. 일본해군이 이 목적으로 독도를 자발적으로 측량을 결정한 것은 1904년 11월 이전으로 돌아간다. 아래 지도는 한국과 일본의 일부 주변에 설치한 모든 망루의 전체적인 표시이다.
위 지도는 한국영토에 설치된 일본의 군대 망루 위치를 보여준다. 그것들은 또한 일본의 연안지역의 망루 위치도 나타낸다. 어떻게 독도(당시 竹島)가 직접 이 방어계획에 포함되었는지 알 수 있다.
일본 군대는 한국과 동해(일본해)를 통제하기 위하여 독도를 활용하였다.
아래 내용(왼쪽)은 역시 일본 아시아 기록물보관소에서 1905년 10월과 11월 시기에 나온 것이다. 붉은 내용은 원본지도에 지리적 위치를 보여주기 위하여 추가로 표시한 것이다. 지도는 역시 이미지 파일 크기를 약간 줄이기 이하여 조절하였다. 위 오른쪽 지도는 이들 통신선이 연장된 곳을 나타낸다. 그것은 명확히 이들 선들이 한국 국경 연안지역 그리고 북서쪽 약 200km 블라디보스톡(Vladivostok) 항의 해군 활동을 감시하기 위한 목적인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다시 독도 군사화의 증거를 볼 수 있다. 해저 통신선은 마츠에에서, 일본~독도~울릉도 그리고 그리고 북쪽으로 원산으로 이어진다. 이들 선들은 흔히 현재 북한 지역인 북쪽의 일본 군대와 연결되고 있다.(보다 상세한 이미지는 클릭하시오)
위 왼쪽: 이 일본의 군사지도는 한반도를 통제하기 위하여 정확히 어떻게 일본의 제국해군이 통신선을 가설했는지를 보여 준다.
일본군의 한국영토 점령과 독도 요약
통신선이 독도에 어떻게 가설되었는지를 보기 바란다. 위 오른쪽 지도는 지리적 참고를 비교한 것이다. 앞의 두 페이지는 메이지 37년과 38년(1904년~1905년)의 일본 군대의 한국 땅 주둔과 독도 지도들로 일본해군 기록물보관소에서 나온 것이다. 그 지도의 대부분의 적군 특히 러시아와의 전투를 위한 통신소 위치와 건설을 정확한 과정을 나타내고 있다.
또한, 이들 문서들은 당시 민간인 또는 공공기관에서 그린 것으로, 따라서 그것은 이들 영토 측량은 명확히 군사적 목적으로 지도를 그린 것이 분명하다. 전반적인 일본지도의 통신소는 이 시대의 일본의 군대의 야심을 지도로 설명한다. 이들 통신소는 일본본토의 주권을 보호하기위한 것 이상이다. 이 시설구조들은 한국을 “보호”하기 위한 것뿐만 아니라, 새로이 획득한 중국의 랴오뚱 반도로 연장되고 있다.
보는 바와 같이, 독도 편입은 명백히 한국의 식민지화, 그리고 동북아에 대한 통제를 주장하기 위한 일본의 전체적인 계획의 일부이다. 일본 외무성의 성명에서 시마네현의 1904년~1905년 독도편입은 역사적 상황에서 해산물 취득을 위한 것이 아님이 명백히 밝혀졌다. 이것은 또한 일본 해군 지도들에서 그들의 망루 위치가 한국과 일본의 연안지역에 있었음을 증명한다.
[ 韓國之獨島 http://www.dokdo-takeshima.com/korea/2009/07/10/japans-military-land-appropriation-dokdo-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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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1905년 일본의 한국개입과 독도
메이지 초기 1870년에서 1905년 일본과 한국의 정치적 관계
일본 외무성의 정책에서 독도 -다케시마 분쟁에 대한 그들의 주장은 한국에서 독도 편입이전의 과정을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고 있다.
이 어두운 시대에 관한 영어로 된 자세한 내용은 그 동안의 내용을 책에서 볼 수 있다. 일본의 불법 독도편입은 단독적인 사건이 아니라 전체 한반도의 편입으로 연결되는 사건의 고리임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이 페이지의 목적은 동북아에서 일본의 독도 “편입”이 명확히 일본의 침략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래 문장에서는 일본의 대외정책의 근원을 볼 수 있다.
또한 아래는 시마네현이 한국의 독도편입을 하기 이전과 그 중간에 일본이 개입한 역사적인 윤곽을 보여 준다. 지도는 일본 식민제국이 모든 방향으로 확장한 땅들을 보여 준다.
오른쪽에, 도쿄 만화에서 한국인 부부가 일본의 태양신 아마데라스(Amaterasu) 신사에 절을 하고 있다. 바위 동굴을 열고 있는 일본 남자는 일본의 초대 한국 통감 데라우치(寺內正毅-Terauchi) 장군이다.
흑선의 아시아 도착
일본이 한국/독도에서 왜 무엇을 하였는가를 이해하기 위하여, 우리는 첫째 일본이 한국에 침략하기 이전에 일본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간단히 알아볼 필요가 있다. 1850년 미국과 유럽 전함들은 일본 해안선에 상륙하기 시작한다. 젊은 미래의 메이지 지도자들은 그 전함들이 일본 에도 해안에 당당히 상륙하는 것을 대책없이 쳐다보았다.
서양이 일본에 통상개시를 요구하는 방법은 도쿠가와(德川家康-Tokugawa) 막부(1603-1868)를 위협하여 전쟁을 하려는 것이었고, 그로 인하여 일본이 통상조약을 거부하게 만들었다. 그 조약은 소위 “우호 통상조약”으로 중국은 1842, 1858 그리고 1860년 서명하였다. 서양은 1850년 일본과 서명하였고, 한국과는 1880년에 조약을 체결하였다.
본질적으로 이들 조약은 강압에 의한 불평등 계약이었고, 명시적이든 묵시적이든 영국 그리고 다른 서구열강들 권리 그리고 특권이 보장되는 비상호적인 차원의서 위협적인 내용이었다. 아래에 설명한 바와 같이, 일본은 이후에 이와 같은 방식을 전체 한반도의 편입을 달성하기 위하여 강압적인 방식으로 그리고 군사적 위협을 가하는데 적용한다. 위 왼쪽: 한 예술가가 Commodore Perry가 Yokohama에서 일본제국 사절을 만나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1875년 강화도 사건과 한국의 개항
보는 바와 같이, (링크를 보시오) 강화도 조약을 통한 일본의 한국 침략계획이 문서화 된 것은 1869년 이전으로 돌아간다. 1875년 9월 20일 아침, 일본해군 선박 운양호(Un-yo Maru)는 측량한국 서해안을 측량하기 위하여 강화도 해변에 상륙하여 “식수와 물자”를 요구하였다. 한국 해변수비대가 운양호에 발포를 하자, 일본의 반응은 신속하고도 단호했다. 잘 갖추어진 무장으로 일본 군대는 형편없는 구식총포 장비를 가진 한국군을 신속히 궤멸시켰다.(35명이 사망하였다).
일본의 주장은 한국이 예상치 않게 공격을 하였다는 것이고, 실제 사건에서 우리가 보는 바는 운양호의 상륙은 의도적으로 한국을 자극하여 군사적 대치를 하려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일본의 한국침략을 위한 “단순화” 작업이었다. 오른쪽은 일본 전함 운양호의 모습이다.
이들은 다음 사실에서 명확한 바와 같이 그 공격은 의도적으로 계산된 것이었다. 1. 상륙은 부산에서의 한-일간의 협상이 결렬된 것과 같이 발생한 것이다. 2. 이것은 운양호의 물자가 떨어진 때문이 아니라, 한국의 가장 전략 위치에서 발생한 매우 중대한 사건이다. 3. 그것은 다른 나라들에게도 잘 알려진 바와 같이, 한국은 불법적으로 이 지역에 들어온들 프랑스 그리고 미국 선박에 대해서도 발포를 하였다.
3 개월 후 일본의 태정관이 한국으로 사절로 왔다. 표면적인 목적은 강화도 사건을 해결하기 위한 것이었으나, 그러나 실제 목표는 한국을 “개항”하기 위한 것이었다. 사절은 Kuroda Kiyotaka가 이끌고 그는 한국 “공격”에 대한 면책을 지시하려는 것이었지만, 그러나 그의 주된 임무는 “국제법”에 근거한 조약을 체결하려는 것이었다.
강화도 조약과 한국에 대한 의미
강화도 조약은 몇 가지 조항을 고려할 필요가 있는데, 예를 들면 일본의 부산에서의 자유교역 개항, 서울과 부산 간 일본인의 자유 여행권 허용, 일본함정의 한국측량권, 일본이 개항에서 교역을 조절할 권리 등이다. 간략히 말하면, 이 합의서는 서양 사람들이 수 십 년전에 일본에게 부과한 불공정 조약과 유사하다.
이 증거는 메이지 정부가 만약 구로다이노우에(Kuroda-Inoue)의 임무가 달성되지 않거나 모욕을 당하거나 공격을 당할 경우, 한국에 대하여 군사력을 사용하겠다는 준비를 한 것이다. Kuroda가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 행동계획은“협상”이 결렬될 경우 한국에 군대를 파견하려는 계획을 갖고 있었다. 협상기간 동안 Kuroda는 한국이 일본과 조약을 체결하지 않을 경우 침략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명확히 밝혔다. 몇 일 후 800명의 군인들을 태운 군함이 도착하자, Kuroda Kiyotaka 한국인들에게 4천명이 왔다고 알렸다.
1876년 여름 강화도 조약은 “재협상”되었다. 그러나 보완된 조약은 서구열강들이 수 십년 전에 일본과 체결한 조약보다 더 불공평한 것이었다. 첫째, 일본은 일본 명목화폐로 상품을 구매할 수 있는 권리가 허용된다. 두 번째 한국은 일본의 수입과 수출에 대하여 세금을 전적으로 면제한다. 세 번째, 일본은 한국과의 교역 상품에 대하여 관세를 부과하지 않는다.
19 세기의 마지막 수십 년
1880년대와 1890년대의 중요한 사건을 통하여 본 일본의 한국에 대한 대외정책의 모습. 1882년 제물포 조약은 한국에 의하여 서명되었으며, 그리고 이것은 일 년 후 중요한 의미를 보여준다. 1894년 봄에는 동학란이 발생한다. 중국군이한국으로 진출하자, 일본군은 5개 사단을 동원하여 몇 몇 수송항을 점령하였다.
왼쪽으로, 일본의 1878년 Maru-Maru 신문 만화에는 인형축제 연출로 세계 국가들을 보여주고 있다. 일본의 모습은 위에 위치를 하고 있는데 반해, 한국과 중국은 아래에서 절을 하고 있다.(이미지 클릭)
6월 10일 Otori Keisuke 일본 대신이 수 백 명의 해군과 함께 서울로 진격하기 전에 인천에 상륙하였다. 한국정부는 강하게 항의하였지만, 그러나 일본 공사는 그들의 항의를 묵살하고, 문제가 발생할 경우 일본 민간인들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언급한 바와 같이 여순 불공정 조약은 1882년에 서명되었고, 조약 5조에서 일본의 공사 그리고 일본거류민을 보호하기 위한 조치가 허용되었다. 6월 말에는 일본정부가 8000 명의 군대를 한국에 파견하였다.
한국에 일본의 존속하는 동안 고종왕은 일본의 통제를 벗어나기 위하여 외국, 예를 들면 러시아, 미국 그리고 영국에 철도, 광산 그리고 벌채권 양해를 인정하였다.
1차 중-일 전쟁 – 1894년 8월 1일 – 1895년 4월 17일
중일전쟁은 공식적으로 1894년 8월 1일 포고되었고, 일본제국은 9월 16일 평양(Pyeongyang) 전투에서 허술한 무장을 한 중국군을 패배시키고 신속하게 만주로 진격하였다. 일본제국 해군은 중국 Beiyang 함대의 12척 전함 중에서 8척을 1894년 9월 17일 압록강(Yalu River)입구에서 격침시킨다. 중국함대는 그 뒤에 웨하이(Weihwai) 요새로 후퇴하였으나 당시 일본 육군의 측면공격에 매우 놀랐다.
1894년 11월 21일, 일본은 Lushunkou(여순항)을 점령한다. 일본 군대는 그 도시의 중국 민간 거주민을 아무런 이유 없이 학살하고 그 사건은 여순항 학살시건으로 명명된다. 그 후 웨이하이웨이(위해위-威海卫 Weihaiwei)는 1895년 2월 2일 함락되고, 그리고 혹독한 겨울 날씨가 풀리자 일본군은 남 만주 그리고 북부 중국을 압박하였다. 1895년 3월 일본은 베이징(북경-北京Beijing)에 근접한 바다에 요새를 건설하였다. 전투에서 패배한 중국은 1895년 4월 17일 시모노세키(하관-下關Shimomoseki)에서 조약에 서명하였다.
이 조약은 한국의 전적인 독립을 합의하고, 남쪽 Fengtian 성에 있는 요동(Liadong) 반도, 만주, 대만 그리고 팽호열도(Pescadores) 섬들을 일본에 영구히 할양하였다. 오른쪽 지도는 일본이 그 시기에 획득한 땅을 잘 나타내 보여주고 있다. 일본은 1900년 이전에 대만, 혹카이도, 쿠릴열도는, 팽호열도(Pescadores), 요동(Liatung) 반도, Marcus 섬, Bonin 섬 그리고 Miyako – Yaeyama 모든 지역을 획득한다.
중-일 전쟁과 3국 간섭
3국 간섭은 일본에게는 독도편입과 한국 합병의 방법에 대한 악몽과 같은 것이었다. 중일 전쟁 후, 러시아, 프랑스 그리고 독일은 함께 연합하여 일본의 만주영토 진출을 막고 그들 스스로를 위하여 영토를 반환하도록 일본을 압박하였다.
러시아는 즉시 전체 요동(Liandong) 반도로 나아가, 특히 여순항을 요새로 만들었다. 프랑스와 독일도 역시 유리한 지점을 차지하고 항구와 교역을 양해받았다. 산동반도의 칭다오(청도-靑島Qingdao-산동반도Shandong)는 독일이 차지하고, 위해위(Weihaiwei)는 영국이 차지하였다. 3국 간섭으로 일본은 쓴맛을 보았고, 1904년-1905년 러일전쟁을 위한 씨를 뿌렸다. 3국 간섭의 교훈은 또한 일본으로 하여금 한국에 과다한 공격을 가할 경우 강대국들이 간섭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조심스럽게 다룰 수밖에 없었다.
1904년~1905년 러일전쟁
다른 논의에서는 한국이 왜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해서 1906년에 강하게 반발하지 못했던가 하는 점을 논의한다. 1905년의 보호조약 이전 상황은 어떠했는가? 아래 설명한 바와 같이 한국의 주권가 항거하기 위한 능력은 1905년 이전에 양허되었다.
이 오른쪽 문서는 1904년 제물포(인천)에 주둔한 러시아 해군에게 보낸 일본 제독의 편지 원본이다. 그것은 러일전쟁의 원인이 된다. 이러한 해군개입이 있고 난 후, 모든 러시아 선박은 소개되었으나, 일본군은 인천에 머물지 않고 서울로 계속 진격하였고, 수 주일 동안 한국을 강제로 협박하여 일본-한국 의정서를 서명케 하였고, 다음해 1905년 일본-한국 보호조약(을사보호조약)을 체결하였다. (내용을 읽어보시려면 이미지 클릭하시오)
러일전쟁이 시작되다: 1904년 2월 8일 밤, 일본은 함대 헤이하치로 도고 제독의 지휘아래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함정 수척을 급습하고 심각한 피해를 입히면서 러일전쟁은 시작되었다. 같은 날 일본 거류민들은 일본해군 1전대 무장 순항함과 5척의 경순양함, 그리고 8척의 어뢰함들이 한국의 입구인 인천 팔미도에 있는 두 척의 러시아전함들을 포격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모든 논의에도 불구하고, 나중의 역사가들은 일본의 여순항 공격은 단순히 개항을 하려는 것이 아니라, 제물포(인천)에서 한국침략 전쟁의 시작을 위한 실제 작전이었다고 평가한다. 이 중요한 작전은 후임 제독 Uriu Sotokichi에게 주어졌다. 팔미도(여덜미)에서 불과 7마일 떨어진 곳에 러시아 순양함 Varyag 그리고 전함 Korietz가 정박하고 있었다.
Varyag호는 일본 전대의 Uriu 제독으로부터 매우 불리한 전투를 맞이하여(한척의 순양함, 다섯척의 호위 순양함 그리고 8척의 어뢰정) 인천에서 장렬한 목숨을 맞이하였다. 82명의 해군장병이 죽고, 190명이 부상당하였으며(전체 570명) 우세한 화력을 가진 선원들은 항복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배는 격침되였다. 그리고 선원들은 구출되었다.
오후까지 일본 전대의 공격을 당하지 못하게 되자 Korietz함과 심하게 손상당한 Varyag호는 제물포항으로 돌아가, 거기에 있는 중립선에 피난하게 되었다. 오후 4시, Korietz 호는 황급히 도망하게 된다.
왼쪽 위 두 이미지들의 내용은 러시아함 Varyag이다. 위 사진은 1900년에 찍은 것이다. 아래 사진은 1904년 2월 9일 제물포(인천) 전쟁 후에 찍은 것이다. 그리고 심하게 손상당한 모습을 보여준다. Varyag은 나중에 일본에 의해서 인양되고 수리되어 일본제국 해군 경순양함 Soya함으로 복무하게 된다.
위 오른쪽 이미지는 폐물이 된 Korietz이다. 중무장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배는 일본의 적수가 되지 못하였다. Korietz도 선원들과 함께 도망쳤다. 아래 오른쪽 위는 모든 러시아 함정들이 포획당하는 것을 피하여 도망가는 것을 선전하는 포스터이다.
일본군의 한국영토 점령이 시작되다.
인천항이 일본의 통제 아래에 들어간지 몇 시간 만에 중요지점은 일본군이 보초를 서게 되고 일본병사들이 거리를 행진하게 된다.
몇 몇 일본군이 서울로 진격하자 한국 조정은 놀라고 걱정을 하게 되었다. 결국 그것은 두 주일 후에 하야시 곤수케(林權助)가 한국 지도자들을 속이고 협박하여 일본군이 한국영토에서 작전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의정서에 서명을 하게 한다. 의정서는 1904년 2월 23일에 서명되었고, 한국이 만약 제3국의 침략 또는 국제적인 간섭을 당할 때에 한국의 영토를 보전하기 위하여 일본이 전략적인 지역을 점령하는 것을 허용한다는 내용을 밝히고 있었다.
모든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하야시 공사는 반일 지도자들을 한국에서 모두 제거하기로 하였다. 따라서, , 1904년 2월 23일, 일본이 한국을 편입하기 약 1년 전에, 일본군대는 “합법적으로” 한국 주둔을 허용 받았다. 설명한 바와 같이, 한국에서 공식적인 보호관계를 수립하기 전에 일본은 실질적으로 한국 주권을 침략하였던 것이다.
위 왼쪽: 러일전쟁 1904년~1905년 동안 일본의 경찰은 한국의 전략 지역에 주둔하였다. 위 사진은 울릉도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경찰. 위 오른쪽: 또 다른 도쿄 만화: 이 그림은 “일본인의 알 수 없는 유럽 계급으로의 진입”, Uncle Sam 그리고 John Bul은 서구 열강들로서 만족스런 표정으로 약병을 조사해보고 있다. 일본이 러일전쟁에서 이긴 후에 인쇄된 이 그림은 일본이 서양의 식민지 동료로서 수용되는 것을 상징하고 있다.
1870년 – 1905년 역사적 기록에 근거한 결론
19세기 후반 그리고 초기 1900년대 초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을 연구해보면, 왜 일본이 독도를 편입하고 그 후 한국 자체를 강탈하는 전략을 채택하였는지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은 명백히 서구열강들이 도쿠가와 막부에 대하여 행했던 것처럼 한국을 개항시키려는 전함 외교 전략을 구사하였다 .
일본이 왜 1905년 독도를 외국에게 통지하지 않고 자국영토로 편입시켰는지는 명확하다. 1900년대 초기 일본의 가장 큰 걱정은 외국의 간섭세력이 군대뿐 만 아니라 한국에 대한 자문관을 철수시키도록 요구하고, 장래 한국에 대한 모든 기회를 박탈하려는 것이었다. 서구열강들의 3국 간섭으로 인한 쓰디쓴 경험을 한 일본정부는 무모한 변화로 인한 외국간섭을 피하려고 하였다. 일본은 한국을 일본의 보호 속에 두려는 정책을 신중하게 진행시키면서 외국 강대국들의 의지를 확인하려고 기다렸다.(보다 자세한 것은 여기서 볼 수 있다)
1904년 초 역사적 사실로서, 독도를 편입하기 이전, 일본은 한국 문제의 복잡성 가운데서 한국에 강한 발판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일본은 한국 중앙정부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고 강대국들을 모든 내각의 재정 결정에서 제외시켰다. 이미 일본은 합법적이든 불법적이든 수많은 땅을 획득하였다. 그들은 이미 한국 철도, 전신, 전화, 그리고 우편제도의 통제권을 얻었다. 가장 중요한 것으로는, 1904년 8월 초 일본은 외국 외교 자문관 Durham White Stevens을 임명하였고, 한국 외무부를 무능하게 만들었다. 실제로 당시 일본의 러일전쟁이 끝나기 이전에 합법적인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서 모든 수준의 보호를 향하여 나아가고 있었다.
놀랄 일은 아니지만, 일본의 다케시마 웹사이트는 1870년~1905년 일본의 한국개입을 기술하면서 기본적 역사 또는 정치적 맥락도 설명하지 않고 있다. 한국에서 그들의 팽창주의 활동에도 불구하고 몇 몇 일본인들은 시마네현의 독도 편입에 대하여 그 이전 또는 그 중간에, 합법적으로 땅을 획득한 것이라고 강하게 주장한다. 이것을 부정하는 운동은 과거를 밝혀야하는 다른 문제에 대해서도 일본의 대외정책과 같은 선상에 있다.
[ 韓國之獨島 http://www.dokdo-takeshima.com/korea/2009/07/11/japanese-involvement-in-korea-1870-1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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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의 독도편입에 대한 한국의 반대
한국은 1906년 3월 직접 일본의 독도 편입을 알고 항의하였다.
“언제부터 독도 – 다케시마 분쟁은 실제로 시작되었는가…?”
일본 외무성 또는 시마네현의 다케시마 홈페이지에서 발간한 모든 간행물을 읽어보면, 그들은 2차 세계대전 후 한국이 리승만 라인을 선언했을 때 독도 – 다케시마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알리고 있다. 그러나, 명확한 독도 분쟁은 1950대 초 훨씬 이전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전부터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실적으로, 첫째 문서화된 증거로 보아 이 분쟁은 조선 관리들이 일본이 독도 편입을 인식한 후 일본에 통지를 한 때부터 발생하였다. 이 기사는 어떻게 한국정부와 언론이 일본의 한국영토 불법 획득에 대하여 대응했는지를 보여준다.
일본 대표단은 일본의 독도-다케시마 강탈에 대해서 울릉도 군수에게 알린다.
1906년 4월 1일 일본의 산음(山陰)신문 뉴스기사, “竹島土産,”
다음 부분에서 일본의 뉴스기사는 일본이 독도 편입 사실을 일년 후에 알리고 있음을 통지하는 상황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것 역시 1906년 울릉도 상황에 대한 내막을 알려준다. 아래 이미지들은 친일 다케시마 웹사이트가 제공한 뉴스기사이다.
1906년 4월 1일 일본 산음신문(San-in Shimbun) 뉴스기사, “竹島土産”
아래는 번역한 일본신문기사이다. 오른쪽에 아래 사진은 일본의 울릉도를 방문한 사람들. 이 중에는 나가이 요사부로 팽창주의 메이지 정부와 제국해군의 수로부를 통하여 독도 편입을 요청한 일본 민간인이 있다.
Takeshima Souvenirs
“… 약 50명의 사람들이 27일 오전 8시에 다케시마에 도착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상륙한 후 수십명의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조사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강치가 섬에 살고 있었고, 그 중에 살아있는 것을 포함하여 10마리를 잡았다. 어떤 것은 그물이나 총으로 그리고 어떤 것은 곤봉으로 때려잡았다. 그 강치들은 3대의 배에 나누어 담고 오후 2:30에 출발하였는데 섬에는 김이 자라고 있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울릉도의 저동(苧洞)에 약 오후 8시 경에 도착하였으며, 몇 몇 일본 경찰관, 우편국 직원, 그리고 다른 도동(道洞)에서 온 사람들이 배로 올라와 환영을 하였다. 그 중 몇 사람들은 우체국장 Kataoka의 집에 머물도록 주선하였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날이 밝으면 상륙하도록 배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군수(郡守)를 방문하였고 일본의 경찰이 역관으로 역할하였다. 그들은 섬의 상황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섬의 안을 조사하였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해안을 조사하였다. 그들은 오후 8시에 섬을 떠나, Saigo(오키)에는 다음날 오후 4:3에 도착하였고 그들은 관리들이 주선하는 파티에 참석하였다. 다음 날 아침 오전 10시 그들은 떠나서 오후 3:30에 Sakai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서 그들은 곧 기선을 갈아탔다. 그들은 현의 관리에 도착하여 오후 7시에 현의 장관 Jinzai(神西)는 오키에서 두 사람의 현 의원, Nakajima 그리고 Ohno와 함께 섬(오키)를 조사하였다.
다케시마에서 잡은 강치들 중에서 한 마리를 요리하였다. 한 마리는 울릉도 군수, 그리고 다른 마지막 한 마리는 부두에서 위생연구를 위하여 남겨두었다.
그들이 울릉도 군수를 방문하였을 때, 관리 Jinzai(神西)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제국 시마네현에서 온 관리이다. 여러분의 섬과 다케시마는 우리의 관할 아래에 있고 가까이 있다. 많은 일본인은 당신네 섬에 살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는 여러분이 그들을 잘 돌보아 줄 것을 바란다. 만약 우리가 여기올 것을 계획했다면 선물을 가져오려 했겠지만 우연히 피난 오게 되어서, 선물이 하나도 없다. 다행히, 우리는 독도에서 잡은 강치를 가지고 왔으므로 여러분에게 드리고자 하니 받아주시면 다행으로 알겠습니다.”
군수가 답하기를, “ 이 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저는 그들을 보호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겠다. 그리고 강치 선물을 받아들이겠다. 만약 맛이 좋고, 기회가 되면 다른 것도 받고 싶다…”
산음신문 뉴스기사 “竹島土産,” 분석
비록 주된 기사 주제는 일본의 대표가 울릉도를 방문한 것이지만, 이 몇가지 정보로 1906년 당시 섬의 동향에 관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이미 일본은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였고, 경찰과 수많은 민간인들을 조선의 섬에 주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마네 현의 Jinzai가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숫자의 일본민간인들(도해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그리고 비록 군수가 “..그들을 관찰..” 하겠다고 하였지만, 일본의 관리들이 마음대로 특별한 허락도 없이 한국의 울릉도 모든 지역에 활보할 수 있다는 것은 쇼킹한 일이다. 사실 이 일본의 대표들은 요리한 강치를 작은 선물로 주었지만, 그것은 약간 무례한 일로 해석될 수 있다. 확실히, 그것은 외국의 고관이 또 다른 정부 관리에게 주는 인사의 선물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었다.
모든 위의 사실로 보아 한국의 울릉도는 1906년에 이미 일본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울도(울도) 군수 심흥택이 일본에 의해서 조선 영토가 편입된 사실에 듣고 왜 그에 대해서 직접 항의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왼쪽으로 위, 울도 군수 심흥택이 울릉도에서 일본 대표단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한국 국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일본의 울릉도 지역 관여에 대해서 말없는 항의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은 고시 40호를 통하여 Liancourt 섬을 다케시마(竹島)로 칭하고 오키 섬의 군수 관할로 둔다고 하였다. 일본정부는 이 결정을 공식관보에 공개하지 않았고, 중앙 정부차원에서 공표하지도 않았다. 여러분은 일본이 오가사와라 섬들에 대해서 1876년에 영토권을 취득한 외국과의 관련된 이전의 사례를 인용할 수 있다. 당시에, 일본정부는 깊이 관련된 영국과 미국과 함께 협상하고 난 후에 외국의 동의를 얻고 나서 결정하였다. 일본은 또한 12개 유럽국가들과 미국에 이런 행위에 대하여 통지를 하였다.
울도 감사 심흥택의 일본의 독도 편입 항의
아래 한국의 역사적 문서 기록에서 조선의 일본의 독도 편입에 관한 항의는 여러번 정부를 상대로 이루어졌다. 한국정부는 일본의 독도 강점에 대한 그들의 반대의사를 즉각 표시하였다.
3월 28일, Zinzai Yutaro과 그의 일행이 울릉도 군수 심흥택을 방문하고 일본의 독도 – 다케시마 편입을 통보하였다. 예상하지 못한 소식에 접한 심흥택은 다음날 이 내용을 중앙정부에 알리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독도는 본 도에 속하며 울릉도에서 바다 100 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기선이 우도에 있는 도동포에 정박하고 이달 4일 오전 8:00시경에 일단의 일본의 관리들이 저에게로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독도가 현재 우리 영토이기 때문에 조사하러 왔다…”
이 때 군수 심흥택을 방문한 집단에는 시마네현 오키 섬 관리 Zinzai, 세무서장 Yoshida Meigo, 경찰파출소장, 헌병 Kageyama Iwahachiro, 한 명의 경찰관, 한 명의 지방 의원, 의사와 기술자 그리고 약 10여 명의 심부름꾼들이 포함되었다. 그들이 방문한 목적은 첫째, 가구숫자, 인구, 생산물, 둘째, 직원 숫자와 비용 등을 조사하러 왔다. 기록이 만들어졌으므로 우리는 이 보고서를 참고로 제출합니다.
음력 3월 5일, 광무 (1906) 10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독도 편입을 항의하다.
일본의 독도 편입에 반대한 사람은 심흥택 군수 혼자서 한 것이 아니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대한제국 도지사의 의견도 있다. 도지사의 반응은 다음과 같은 청색박스 안에 내용이 있다.
“…대한제국 지사 명령 No.3 나는 이 보고서를 읽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것은 전적으로 근거를 알 수 없는 주장이며, 섬을 재점검하고, 일본인들의 행동을 점검하라…”
Zinzai 일행이 울릉도를 방문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자료는 일본에서는 전혀 연구되지 않았다. 한국과의 분쟁에서, 일본정부는 이 문서 자체의 존재도 의문시하였다. 그 근거로 일본의 학자는 독도-다케시마에서 잡은 강치선물에 대해서 울릉군수가 감사했다는 기록을 밝혔다. 만약 군수가 독도-다케시마가 울릉도에 속한다고 생각했으면, 그런 접대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상황은 울릉도가 당시에 처한 어려운 입장을 간과한 것이다. 이 당시일본의 군인과 경찰은 영구적으로 울릉도에 주둔하였고, 300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도동 주변에 살고 있었으며, 일본 관리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림을 보라) 사실 Zinzai와 그의 일행들이 울릉도라는 외국영토에서 가구 수와 인구 수, 그리고 지리를 마음대로 조사한 것은 당시의 일방적인 권력관계를 말한다. 만약 군수 심흥택이 Zinzai과 그의 일행들의 영토문제에 대해서 반대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일본인들의 압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예의바른 일본인 대접은 그가 Zinzai의 언급을 승인했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또한 일본의 자료 자체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일본 독도 편입에 항의하는 한국의 서울 언론
왼쪽 이미지는 대한매일신문의 뉴스기사 원본이다. 보고서는 울도(울릉도과 지역)의 군수가 보낸 내용을 싣고 있다. 그것에도 역시 일본의 시마네현이 독도를 편입시킨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5월 1일 1906, 울도 군수 심흥택이 내부대신에게 보고하기를 어떤 일본인 관리들이 울릉도 섬으로 와서 주장하기를 독도를 일본영토이며, 섬을 측량하고 당시 가구 수를 조사하였다. 보고서(심흥택의 보고서)에 대한 대답으로 내무대신이 말하기를 “일본관리들이 울릉도를 그 지역을 여행하고 조사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그러나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주장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우리는 일본의 주장이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애국자 황현은 일본의 독도 편입을 항의하다.
“..황현은 누구인가..?”
황현(1855년-1910)은 애국적인 조선말기 한국 학자이다. 그는 한국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인정된다. 그의 별호는 “매천” 이며, 학자 황의돈과 관련된다. 광양에서 출생한 황현은 전라남도 구례에서 성장하였다. 황현은 1910년 일본의 한국 합병을 항의하기 위해 자결하였다.
그의 생애를 통하여 황현은 매천야록이라는 일기를 남겼다. 그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의 불법독도 편입에 관한 것이다. 그 일기내용은 일본의 독도편입의 항의하는 신문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황현이 신문내용을 그대로 읽은 것인지 다른 한국 사람으로부터 들은 것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황현의 1906년 5월, 매천야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距鬱陵島洋東百里 有一島 曰獨島 舊屬鬱陵島 倭人勒稱其領地 審査以去
”…울릉도 동쪽 약 100 리에는 독도라고 부르는 작은 섬이 있다. 오래 전부터, 이 섬은 울릉도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와서 섬을 측량하고 근거도 없이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울릉도에 관하여 일본 통감부가 한국의 내무대신에게 질의한 내용
1906년 7월 13일 한국의 신문,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말하기를 일본의 통감부가 한국 내무대신에게 울릉도의 이웃 섬들은 무엇인지 분명히 해달라고 질문하였다. 또한 섬의 한국정부사무소가 개설된 것이 언제인지를 질문하였다. 이 질의는 한국 주장 독도는 울릉도의 일부라는 한국의 주장에 대한 반응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한국은 사실상 항의하고 일본은 그 항의 문서를 받는다.
오늘날 몇 몇 사람들은 일본의 독도주장에서 한국이 울릉도에서 독도를 제외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을 지지한다. 일본의 로비스트들은 조선 영토에서 독도를 제외하였을 것이라는 한국 내무성의 반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관련된 역사적 지도들과 기록을 연구해보면, 그들의 결론은 부정확하다. 아래는 원본문서, 번역과 간략한 기록의 분석이다.
1906 7월 13일 황성신문(皇城新聞) 기사과 영문번역
鬱島郡의 配置顛末
統監府에서 內部에 公函하되 江原道 三陟郡 管下에 所在 鬱陵島에 所属島嶼와 郡廳設始 年月을 示明하라는 故로 答函하되、光武二年五月二十日에 鬱陵島監으로 設始 하였다가 光武四年十月二十五日에 政府會議를 經由하야 郡守를 配置하니 郡廳은 台霞洞에 在하고 該郡所管島는 竹島石島오、東西가 六十里오 南北이 四十里니, 合 二百餘里라고 하였다더라.
울도군의 설치 사실
통감부는 한국의 내무대신에게 강원도 삼척군에 속하는 울릉도에 속하는 섬이 무엇인지를과 관청을 설치한 것이 언제인지를 밝혀달라는 공식서한을 질의서로 보냈다. 그이에 대한 회신은 울릉도 행정관청은 1898 5월 20일에 설치되었고, 당시 1900년 10월 25일, 정부는 군수를 임명하고 군의 관청을 태하동(台霞洞)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소속하는 섬은 죽도(竹島)과 석도(石島)로 하고, 섬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60리 그리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40리로 전체 둘레가 200리라고 하였다.
1906년 7월 13일 통감부의 질의과 한국 내무성 회신 분석
“한국의 내무성은 이 기록에서 독도를 울도군에서 제외시켰는가..?”
한국 내무성이 어떤 일을 하였는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한국내무성이 통감부에 회신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그 자료의 출처와 그러한 언급이 나오는 차원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울릉도는 동서가 60리, 남북이 40리로 된다고 언급하였다. 어떤 일본인들은 이것은 전체 울도 주가 너무 작아서 독도가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울릉도의 크기는 우리가 알다시피 19 세기 울릉도 지도들에서 크기의 측정된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일본의 통감부는 울릉도 크기에서 울도 주변의 모든 섬들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위 지도들은 한국의 내무성이 울릉도에 대하여 통감부로 회신한 내용에서 울도의 크기를 언급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지도에서 울릉도의 크기는 東西 六十里 南北 四十里周二百餘里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동서로 약 60리, 남북이 40리과 전체(주변둘레)이 약 200리라고 하였다.
다른 자료 일부에서 우리는 한국의 내무성의 회신에는 울도의 일부로서 죽도(竹島) 섬과 Seokdo(독도) 섬들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울릉도의 부속된 섬들의 위치는 내무성의 회신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울도 지방의 섬들에 관한 정보의 근원은 1900년 조선의 칙령 41호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링크) 위의 자료에서 볼 때, 그것의 명확한 한국 내무성의 일본의 통감부에 대한 회신에는 명확하게 울도 군 전체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한국은 일본의 1905년 독도 편입에 대하여 문서로 반대를 표시하였다. – 결론
이 기사의 전반부에서는 단순히 심흥택 군수의 언급만 요약하였으나, 후반부에서는 한국 중앙정부의 반응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제시되고 있다. 즉, 한국의 중앙정부는 독도는 한국영토임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그 조항에서는 일본의 관리들의 이해할 수 없는 의심스런 면을 볼 수 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 신문을 통하여 일본이 독도를 일본의 편입시키려 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한국영토에 대한 침략임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전라도 구례에 살던 황현은 당시 기록하기를 “일본인들은 우리 고유영토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중앙정부, 울릉도 지방군수과 시민들은 모두 당시에 일본의 독도편입이 침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에 일본은 실제로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시작하였고, 한국에 총독을 두었다. 일본의 한국땅 주둔 이전의 독도 편입 증거는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링크 1), (링크 2), (링크 3).
일본 제국해군이 실시한 독도에 대한 측량문서는 이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링크1), (링크 2), (링크3). 왜 한국정부는 당시 다케시마 – 독도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논의를 진행시킬 수 없었는지 그 이유가 나타난다.
전체 나라가 주권을 빼앗기고 힘을 잃게 됨에 따라 작은 바위 섬의 소유권 문제는 논의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명확히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하여 반대했다는 사실은 역사적 평가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韓國之獨島 http://www.dokdo-takeshima.com/korea/2009/07/11/japanese-involvement-in-korea-1870-190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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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일본의 독도편입에 대한 한국의 반대
한국은 1906년 3월 직접 일본의 독도 편입을 알고 항의하였다.
“언제부터 독도 – 다케시마 분쟁은 실제로 시작되었는가…?”
일본 외무성 또는 시마네현의 다케시마 홈페이지에서 발간한 모든 간행물을 읽어보면, 그들은 2차 세계대전 후 한국이 리승만 라인을 선언했을 때 독도 – 다케시마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알리고 있다. 그러나, 명확한 독도 분쟁은 1950대 초 훨씬 이전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전부터 역사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실적으로, 첫째 문서화된 증거로 보아 이 분쟁은 조선 관리들이 일본이 독도 편입을 인식한 후 일본에 통지를 한 때부터 발생하였다. 이 기사는 어떻게 한국정부와 언론이 일본의 한국영토 불법 획득에 대하여 대응했는지를 보여준다.
일본 대표단은 일본의 독도-다케시마 강탈에 대해서 울릉도 군수에게 알린다.
1906년 4월 1일 일본의 산음(山陰)신문 뉴스기사, “竹島土産,”
다음 부분에서 일본의 뉴스기사는 일본이 독도 편입 사실을 일년 후에 알리고 있음을 통지하는 상황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그것 역시 1906년 울릉도 상황에 대한 내막을 알려준다. 아래 이미지들은 친일 다케시마 웹사이트가 제공한 뉴스기사이다.
1906년 4월 1일 일본 산음신문(San-in Shimbun) 뉴스기사, “竹島土産”
아래는 번역한 일본신문기사이다. 오른쪽에 아래 사진은 일본의 울릉도를 방문한 사람들. 이 중에는 나가이 요사부로 팽창주의 메이지 정부와 제국해군의 수로부를 통하여 독도 편입을 요청한 일본 민간인이 있다.
Takeshima Souvenirs
“… 약 50명의 사람들이 27일 오전 8시에 다케시마에 도착하였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상륙한 후 수십명의 여러 분야의 연구자들이 조사활동을 시작하였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강치가 섬에 살고 있었고, 그 중에 살아있는 것을 포함하여 10마리를 잡았다. 어떤 것은 그물이나 총으로 그리고 어떤 것은 곤봉으로 때려잡았다. 그 강치들은 3대의 배에 나누어 담고 오후 2:30에 출발하였는데 섬에는 김이 자라고 있는 것도 보았다.
그들은 울릉도의 저동(苧洞)에 약 오후 8시 경에 도착하였으며, 몇 몇 일본 경찰관, 우편국 직원, 그리고 다른 도동(道洞)에서 온 사람들이 배로 올라와 환영을 하였다. 그 중 몇 사람들은 우체국장 Kataoka의 집에 머물도록 주선하였으며 나머지 사람들은 날이 밝으면 상륙하도록 배에 머물러 있었다.
그들은 모두 군수(郡守)를 방문하였고 일본의 경찰이 역관으로 역할하였다. 그들은 섬의 상황에 대하여 질문하였다. 당시 일부 사람들은 섬의 안을 조사하였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해안을 조사하였다. 그들은 오후 8시에 섬을 떠나, Saigo(오키)에는 다음날 오후 4:3에 도착하였고 그들은 관리들이 주선하는 파티에 참석하였다. 다음 날 아침 오전 10시 그들은 떠나서 오후 3:30에 Sakai에 도착하였는데, 거기서 그들은 곧 기선을 갈아탔다. 그들은 현의 관리에 도착하여 오후 7시에 현의 장관 Jinzai(神西)는 오키에서 두 사람의 현 의원, Nakajima 그리고 Ohno와 함께 섬(오키)를 조사하였다.
다케시마에서 잡은 강치들 중에서 한 마리를 요리하였다. 한 마리는 울릉도 군수, 그리고 다른 마지막 한 마리는 부두에서 위생연구를 위하여 남겨두었다.
그들이 울릉도 군수를 방문하였을 때, 관리 Jinzai(神西)가 말하기를, “나는 일본제국 시마네현에서 온 관리이다. 여러분의 섬과 다케시마는 우리의 관할 아래에 있고 가까이 있다. 많은 일본인은 당신네 섬에 살고 있기 때문에, 따라서 우리는 여러분이 그들을 잘 돌보아 줄 것을 바란다. 만약 우리가 여기올 것을 계획했다면 선물을 가져오려 했겠지만 우연히 피난 오게 되어서, 선물이 하나도 없다. 다행히, 우리는 독도에서 잡은 강치를 가지고 왔으므로 여러분에게 드리고자 하니 받아주시면 다행으로 알겠습니다.”
군수가 답하기를, “ 이 섬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저는 그들을 보호할 것이 무엇인지 알아보겠다. 그리고 강치 선물을 받아들이겠다. 만약 맛이 좋고, 기회가 되면 다른 것도 받고 싶다…”
산음신문 뉴스기사 “竹島土産,” 분석
비록 주된 기사 주제는 일본의 대표가 울릉도를 방문한 것이지만, 이 몇가지 정보로 1906년 당시 섬의 동향에 관한 내용을 알 수 있다. 이미 일본은 울릉도에 관리를 파견하였고, 경찰과 수많은 민간인들을 조선의 섬에 주둔시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시마네 현의 Jinzai가 언급한 바와 같이 많은 숫자의 일본민간인들(도해자들)이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며, 그리고 비록 군수가 “..그들을 관찰..” 하겠다고 하였지만, 일본의 관리들이 마음대로 특별한 허락도 없이 한국의 울릉도 모든 지역에 활보할 수 있다는 것은 쇼킹한 일이다. 사실 이 일본의 대표들은 요리한 강치를 작은 선물로 주었지만, 그것은 약간 무례한 일로 해석될 수 있다. 확실히, 그것은 외국의 고관이 또 다른 정부 관리에게 주는 인사의 선물로는 적절하지 않은 것이었다.
모든 위의 사실로 보아 한국의 울릉도는 1906년에 이미 일본의 통제하에 있었으며, 동등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이런 이유로 인하여 울도(울도) 군수 심흥택이 일본에 의해서 조선 영토가 편입된 사실에 듣고 왜 그에 대해서 직접 항의하지 않았는지 알 수 있다. 왼쪽으로 위, 울도 군수 심흥택이 울릉도에서 일본 대표단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그는 한국 국기를 들고 있는 것을 보면, 어떤 사람들은 이것은 일본의 울릉도 지역 관여에 대해서 말없는 항의의 표시라고 볼 수 있다고 한다.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은 고시 40호를 통하여 Liancourt 섬을 다케시마(竹島)로 칭하고 오키 섬의 군수 관할로 둔다고 하였다. 일본정부는 이 결정을 공식관보에 공개하지 않았고, 중앙 정부차원에서 공표하지도 않았다. 여러분은 일본이 오가사와라 섬들에 대해서 1876년에 영토권을 취득한 외국과의 관련된 이전의 사례를 인용할 수 있다. 당시에, 일본정부는 깊이 관련된 영국과 미국과 함께 협상하고 난 후에 외국의 동의를 얻고 나서 결정하였다. 일본은 또한 12개 유럽국가들과 미국에 이런 행위에 대하여 통지를 하였다.
울도 감사 심흥택의 일본의 독도 편입 항의
아래 한국의 역사적 문서 기록에서 조선의 일본의 독도 편입에 관한 항의는 여러번 정부를 상대로 이루어졌다. 한국정부는 일본의 독도 강점에 대한 그들의 반대의사를 즉각 표시하였다.
3월 28일, Zinzai Yutaro과 그의 일행이 울릉도 군수 심흥택을 방문하고 일본의 독도 – 다케시마 편입을 통보하였다. 예상하지 못한 소식에 접한 심흥택은 다음날 이 내용을 중앙정부에 알리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 “…독도는 본 도에 속하며 울릉도에서 바다 100 리에 위치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기선이 우도에 있는 도동포에 정박하고 이달 4일 오전 8:00시경에 일단의 일본의 관리들이 저에게로 와서 말하기를, “우리는 독도가 현재 우리 영토이기 때문에 조사하러 왔다…”
이 때 군수 심흥택을 방문한 집단에는 시마네현 오키 섬 관리 Zinzai, 세무서장 Yoshida Meigo, 경찰파출소장, 헌병 Kageyama Iwahachiro, 한 명의 경찰관, 한 명의 지방 의원, 의사와 기술자 그리고 약 10여 명의 심부름꾼들이 포함되었다. 그들이 방문한 목적은 첫째, 가구숫자, 인구, 생산물, 둘째, 직원 숫자와 비용 등을 조사하러 왔다. 기록이 만들어졌으므로 우리는 이 보고서를 참고로 제출합니다.
음력 3월 5일, 광무 (1906) 10년….”
대한제국은 일본의 독도 편입을 항의하다.
일본의 독도 편입에 반대한 사람은 심흥택 군수 혼자서 한 것이 아니다. 위의 기록에 따르면, 대한제국 도지사의 의견도 있다. 도지사의 반응은 다음과 같은 청색박스 안에 내용이 있다.
“…대한제국 지사 명령 No.3 나는 이 보고서를 읽었다. 그들의 말에 의하면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것은 전적으로 근거를 알 수 없는 주장이며, 섬을 재점검하고, 일본인들의 행동을 점검하라…”
Zinzai 일행이 울릉도를 방문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지만, 그러나 이 자료는 일본에서는 전혀 연구되지 않았다. 한국과의 분쟁에서, 일본정부는 이 문서 자체의 존재도 의문시하였다. 그 근거로 일본의 학자는 독도-다케시마에서 잡은 강치선물에 대해서 울릉군수가 감사했다는 기록을 밝혔다. 만약 군수가 독도-다케시마가 울릉도에 속한다고 생각했으면, 그런 접대은 받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당시 상황은 울릉도가 당시에 처한 어려운 입장을 간과한 것이다. 이 당시일본의 군인과 경찰은 영구적으로 울릉도에 주둔하였고, 300명이 넘는 일본인들이 도동 주변에 살고 있었으며, 일본 관리가 주둔하고 있었다. (그림을 보라) 사실 Zinzai와 그의 일행들이 울릉도라는 외국영토에서 가구 수와 인구 수, 그리고 지리를 마음대로 조사한 것은 당시의 일방적인 권력관계를 말한다. 만약 군수 심흥택이 Zinzai과 그의 일행들의 영토문제에 대해서 반대를 하지 않았다면, 그것은 일본인들의 압력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의 예의바른 일본인 대접은 그가 Zinzai의 언급을 승인했다는 뜻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또한 일본의 자료 자체의 부정을 의미하는 것도 아니다.
일본 독도 편입에 항의하는 한국의 서울 언론
왼쪽 이미지는 대한매일신문의 뉴스기사 원본이다. 보고서는 울도(울릉도과 지역)의 군수가 보낸 내용을 싣고 있다. 그것에도 역시 일본의 시마네현이 독도를 편입시킨 내용을 담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5월 1일 1906, 울도 군수 심흥택이 내부대신에게 보고하기를 어떤 일본인 관리들이 울릉도 섬으로 와서 주장하기를 독도를 일본영토이며, 섬을 측량하고 당시 가구 수를 조사하였다. 보고서(심흥택의 보고서)에 대한 대답으로 내무대신이 말하기를 “일본관리들이 울릉도를 그 지역을 여행하고 조사한다는 것은 예사로운 일이다. 그러나 독도가 일본영토라는 주장은 전혀 맞지 않는 이야기다. 우리는 일본의 주장이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한국의 애국자 황현은 일본의 독도 편입을 항의하다.
“..황현은 누구인가..?”
황현(1855년-1910)은 애국적인 조선말기 한국 학자이다. 그는 한국 독립을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인정된다. 그의 별호는 “매천” 이며, 학자 황의돈과 관련된다. 광양에서 출생한 황현은 전라남도 구례에서 성장하였다. 황현은 1910년 일본의 한국 합병을 항의하기 위해 자결하였다.
그의 생애를 통하여 황현은 매천야록이라는 일기를 남겼다. 그 내용에서 알 수 있는 것은 일본의 불법독도 편입에 관한 것이다. 그 일기내용은 일본의 독도편입의 항의하는 신문내용과 매우 유사하다. 황현이 신문내용을 그대로 읽은 것인지 다른 한국 사람으로부터 들은 것인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고 있다.
황현의 1906년 5월, 매천야록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있다:
距鬱陵島洋東百里 有一島 曰獨島 舊屬鬱陵島 倭人勒稱其領地 審査以去
”…울릉도 동쪽 약 100 리에는 독도라고 부르는 작은 섬이 있다. 오래 전부터, 이 섬은 울릉도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일본인들이 와서 섬을 측량하고 근거도 없이 그들의 영토라고 주장한다.…”
울릉도에 관하여 일본 통감부가 한국의 내무대신에게 질의한 내용
1906년 7월 13일 한국의 신문, “황성신문”(皇城新聞)에 말하기를 일본의 통감부가 한국 내무대신에게 울릉도의 이웃 섬들은 무엇인지 분명히 해달라고 질문하였다. 또한 섬의 한국정부사무소가 개설된 것이 언제인지를 질문하였다. 이 질의는 한국 주장 독도는 울릉도의 일부라는 한국의 주장에 대한 반응을 보기 위한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한국은 사실상 항의하고 일본은 그 항의 문서를 받는다.
오늘날 몇 몇 사람들은 일본의 독도주장에서 한국이 울릉도에서 독도를 제외하였다고 주장하는 것을 지지한다. 일본의 로비스트들은 조선 영토에서 독도를 제외하였을 것이라는 한국 내무성의 반응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관련된 역사적 지도들과 기록을 연구해보면, 그들의 결론은 부정확하다. 아래는 원본문서, 번역과 간략한 기록의 분석이다.
1906 7월 13일 황성신문(皇城新聞) 기사과 영문번역
鬱島郡의 配置顛末
統監府에서 內部에 公函하되 江原道 三陟郡 管下에 所在 鬱陵島에 所属島嶼와 郡廳設始 年月을 示明하라는 故로 答函하되、光武二年五月二十日에 鬱陵島監으로 設始 하였다가 光武四年十月二十五日에 政府會議를 經由하야 郡守를 配置하니 郡廳은 台霞洞에 在하고 該郡所管島는 竹島石島오、東西가 六十里오 南北이 四十里니, 合 二百餘里라고 하였다더라.
울도군의 설치 사실
통감부는 한국의 내무대신에게 강원도 삼척군에 속하는 울릉도에 속하는 섬이 무엇인지를과 관청을 설치한 것이 언제인지를 밝혀달라는 공식서한을 질의서로 보냈다. 그이에 대한 회신은 울릉도 행정관청은 1898 5월 20일에 설치되었고, 당시 1900년 10월 25일, 정부는 군수를 임명하고 군의 관청을 태하동(台霞洞)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소속하는 섬은 죽도(竹島)과 석도(石島)로 하고, 섬은 동쪽에서 서쪽으로 60리 그리고 북쪽에서 남쪽으로 40리로 전체 둘레가 200리라고 하였다.
1906년 7월 13일 통감부의 질의과 한국 내무성 회신 분석
“한국의 내무성은 이 기록에서 독도를 울도군에서 제외시켰는가..?”
한국 내무성이 어떤 일을 하였는지를 정확하게 알기 위해서는 한국내무성이 통감부에 회신한 내용을 살펴볼 필요가 있으며, 그 자료의 출처와 그러한 언급이 나오는 차원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 울릉도는 동서가 60리, 남북이 40리로 된다고 언급하였다. 어떤 일본인들은 이것은 전체 울도 주가 너무 작아서 독도가 포함되지 않았다고 한다. 현실적으로, 울릉도의 크기는 우리가 알다시피 19 세기 울릉도 지도들에서 크기의 측정된 것이다. 따라서, 현실적으로, 일본의 통감부는 울릉도 크기에서 울도 주변의 모든 섬들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위 지도들은 한국의 내무성이 울릉도에 대하여 통감부로 회신한 내용에서 울도의 크기를 언급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지도에서 울릉도의 크기는 東西 六十里 南北 四十里周二百餘里라고 하였는데, 이것은 동서로 약 60리, 남북이 40리과 전체(주변둘레)이 약 200리라고 하였다.
다른 자료 일부에서 우리는 한국의 내무성의 회신에는 울도의 일부로서 죽도(竹島) 섬과 Seokdo(독도) 섬들이 포함되었음을 알 수 있다. 울릉도의 부속된 섬들의 위치는 내무성의 회신에서 언급되지 않았다. 울도 지방의 섬들에 관한 정보의 근원은 1900년 조선의 칙령 41호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링크) 위의 자료에서 볼 때, 그것의 명확한 한국 내무성의 일본의 통감부에 대한 회신에는 명확하게 울도 군 전체를 언급한 것이 아니다.
한국은 일본의 1905년 독도 편입에 대하여 문서로 반대를 표시하였다. – 결론
이 기사의 전반부에서는 단순히 심흥택 군수의 언급만 요약하였으나, 후반부에서는 한국 중앙정부의 반응에 대한 중요한 자료가 제시되고 있다. 즉, 한국의 중앙정부는 독도는 한국영토임을 인식하였다. 따라서, 그 조항에서는 일본의 관리들의 이해할 수 없는 의심스런 면을 볼 수 있다.
많은 한국 사람들은 이 신문을 통하여 일본이 독도를 일본의 편입시키려 한 것을 알게 되었고 그것은 한국영토에 대한 침략임을 알게 되었다. 예를 들면, 전라도 구례에 살던 황현은 당시 기록하기를 “일본인들은 우리 고유영토인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거짓말을 한다….”
다시 말하면, 한국의 중앙정부, 울릉도 지방군수과 시민들은 모두 당시에 일본의 독도편입이 침략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당시에 일본은 실제로 한국에 대한 식민지 지배를 시작하였고, 한국에 총독을 두었다. 일본의 한국땅 주둔 이전의 독도 편입 증거는 아래 링크에서 볼 수 있다.(링크 1), (링크 2), (링크 3).
일본 제국해군이 실시한 독도에 대한 측량문서는 이 페이지에서 볼 수 있다.(링크1), (링크 2), (링크3). 왜 한국정부는 당시 다케시마 – 독도문제에 대하여 더 이상 논의를 진행시킬 수 없었는지 그 이유가 나타난다.
전체 나라가 주권을 빼앗기고 힘을 잃게 됨에 따라 작은 바위 섬의 소유권 문제는 논의에서 사라져갔다. 그러나, 한국 사람들이 명확히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하여 반대했다는 사실은 역사적 평가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사실이다.
[ 韓國之獨島http://www.dokdo-takeshima.com/korea/2009/07/11/korean-objections-to-japans-1905-clai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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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년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일본의 독도 편입
독도 문제를 분석할 때, 우리는 20세기 초 주변 일본의 한반도 개입이라는 역사적 맥락을 고려하여야 한다. 다음 기사는 왜 한국은 1905년 일본 시마네현의 불법 독도편입에 대한 분쟁에서 무기력했던지를 보여 준다. (일본은 다케시마(독도)과 서양에서는 리앙쿠르 바위섬이라고 부른다.) 독자들은 이 문서에서 왜 한국 정부 관리들과 신문이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한 반대의 논쟁에서 국가대 국가의 차원에서 목소리를 낼 수 없었던지를 알 수 있다.
1904년 2월 한일의정서와 후속 수정조약
“..일본군대의 한국 침략은 실제로 언제 시작되었는가..?”
일본외무성의 지속적인 거짓말은 다케시마가 일본의 한국침략 이전에 평화적으로 편입되었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일본이 1905년 다케시마를 편입했을 당시, 일본군은 이미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위한 길을 가고 있었다. 조선의 독립은 이미 심각하게 훼손되었다. 미국 외교부 기록에 의하면, 1904년 2월에 한국은 군사적으로 점령당했으며, 그해 8월에 한국은 대외관계를 독자적으로 수행할 능력을 상실하였다.(문서 참조)
러일전쟁의 발발: 1904년 2월 8일 밤, 일본 함대 헤이하치로 도고 제독은 러일전쟁을 개시하고 여순항에 있는 러시아 전함을 기습하였고 두 척을 격파하였다. 그날, 일본인 거류민들은 일본해군 1척의 순양함, 다섯 척의 경 순양함,과 8척의 어뢰함으로 두 척의 러시아 전함들을 한국 인천 항에 있는 팔미도에서 격파하는 것을 보고 축배를 들었다.
몇 시간 내에 인천 항은 일본군의 통제 속으로 들어가고, 중요지점을 점령하였으며 병사들이 길거리를 행진하였다. 일본군의 서울로 행한 행진에 한국 조정은 놀라 겁을 먹었다. 결국 하야시 곤수케는 2주일 후 한국 지도자들을 속여서 일본군이 한국영토에서 훈련을 할 수 있도록 의정서를 서명하게 한다.
이들 미국 외교부의 보관 기록은 1904년 2월부터 어떻게 한국이 군사적으로 일본에 점령당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위 오른쪽 미국 문서 기록은 1904년 8월에 일본이 한국의 모든 외교권을 통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이미지 클릭)
1904년 2월 23일 서명된 의정서는 한국이 제3자 또는 국제적 분쟁으로 위험해 질 경우에 영토보전을 위하여 일본이 중요한 전략적 지역을 점거할 수 있도록 허용한다.
하야시는 후환을 없애기 위하여 한국의 반일의 지도자들을 제거하였다. 따라서, 1904년 2월 23일, 일본이 한국을 편입하기 약 1년 전에, 일본은 “합법적으로” 한국 어느 곳이든지 합법적으로 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게 되었다. 설명한 바와 같이, 공식적으로 한국을 보호상태에 두기 전부터 사실상 일본은 한국 주권을 빼앗고 있었다.
오른쪽 사진은 일본-한국 보호 조약 서명을 한 후에 일본의 장군들과 관리들이다.
일본은 한국 정부에 대한 통제를 더욱 강화한다.-1905년 5월 30일
일본이 독도를 편입한 약 3개월 후, 이 미국 외교부 문서 기록은 일본이 한국의 국내행정 기능에 대하여 많이 통제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일본제국 정부의 통제에는 한국의 통신시설에 대한 통제가 포함되었다는 것이다. 우편, 전신과 전화시설도 통제되었다. 역시 이 기록은 또한 일본이 범죄자들에 대해서 엄격한 처벌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중요한 처벌(예를 들면, 교수형)과 육체적인 처벌(예를 들면, 채찍질).
위: 더 많은 미국 외교부 문서들. 이 문서 기록들은 일본이 한국의 통신시설을 통제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예를 들면 우편, 전진과 전화시설 등. 또한 일본제국의 야만적인 죄인처벌장면을 보여 주고 있다.
1905년 영국-일본의 조약
영국과 일본은 두 가지 조약에 서명하였다. 첫째는 1902년과 다음은 1905년 8월 12일 개정한 내용이다. 1905년 한국에 적용될 수 있는 내용 해석은 다음과 같다:
제3조: “…일본은 한국에서 최고의 정치적, 군사적과 경제적 이을 가지며, 영국은 한국에서 지도와 통제과 보호의 수단을 취하는 일본의 권리를 인정한다. 일본은 보호와 그런 이익을 취하기 위한 적절한 수단을 강구할 수 있으며, 그러한 수단은 모든 나라의 상업과 공업을 위한 동등한 기회에 반하지 않을 것임을 보장한다. …..”
부기 C: “일본이 [a] 한국을 제 3자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하고 한국의 대외관계와 관련하여 간섭을 받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적절한 조치가 필요한 경우 영국은 일본의 행동을 지지한다..”
1905년 일본-러시아 포츠머스 조약
러일전쟁에서 심각한 군사적 손실을 입은 후, 러시아와 일본은 포츠머스 조약에 서명한다. 그 조약은 1905년 9월 5일 서명되었고 미국의 Theodore Roosevelt가 중재하였다.
한국에 적용되는 조항은 다음과 같다:
제2조
“.. 제정 러시아 정부는, 일본인 한국에 대한 최고의 정치적, 군사적과 경제적 이익을 누릴 수 있음을 인정하고, 일본정부가 한국에서 취할 수 있는 지도, 보호, 그리고 통제의 수단에 대하여 간섭하거나 방해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대외정책은 한국에서 일본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이었다. 포츠머스 조약으로, 중국과 일본 사이의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은 한국에서 일본의 개입을 지지하였다. 이들 조약은 모두 미국의 안내에 따라 초안이 만들어졌다.
1905년 일본-한국 강제 보호조약
포츠머스 조약이 효력을 발생한 직후, 일본은 강제로 한국정부를 압박하여 두 번째 한국-일본 의정서를 결론짓기 위하여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Ito Hirobumi)를 파견하였다. 11월 17일 한국 내각회의에서는 이 조약을 논의하기 위하여 개최되었으나, 결론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Hirobumi 는 이러한 부정적인 분위기를 본국에 통보하고, 주둔군 사령관과 헌병대장을 동반하고 즉시 이 사건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7명의 내각 의원 중에서, 다만 두 사람, 수상 한규설과 재무대신 민영기만이 조약에 반대하였고 그들은 일본의 헌병에 의하여 구금되었다. 다른 다섯 대신들은 이에 따라 놀라서 사임하여 찬성과 반대를 유보하였다. 그러나, Ito는 이 침묵을 승인으로 간주하였다. 최종 비준을 위하여 Ito는 일본군들 동원하여 외무부를 포위하고 대신들로 하여금 이 문서에 서명하게 하였다…”
강대국들이 일본에게 승인한 문서는 어떤 기록보관소에서도 어디에서도 아직 찾아볼 수 없다.
일본-한국 보호조약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 일본정부는 도쿄에 있는 외무성을 통하여, 이후부터 한국의 대외관계 사무의 방향을 지시하고 통제할 것이며 일본 외무성 대표는 다른 국가들에게 한국의 이익에 따른 문제를 담당할 것이다…”
우리가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제1조는 강제로 된 일본-한국 보호 조약으로 한국은 정부내부의 수준을 넘어 항거를 할 수 있는 수단을 상실하였다. 1905년 보호 조약에 서명하기를 거부한 고종왕은 거부성명을 작성한다. 고종왕은 민영찬 주미거류민대표를 특사로 워싱턴에 있는 미국 국무장관으로 보낸다.
고종왕은 또한 한국에 오래 거주한 Homer B. Hulbert 외교담당관에게 “거부선언문”을 미국대통령에게 보내주기를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의 반대의사는 전달되지 못하였다. 그는 한국정부로 부터 신임을 받지 못한 사람으로 통지를 받았고, 일본이 부여한 정부인사가 아니라는 점을 지적받았다.
Washington Evening Star 신문은 고종왕의 선언문을 1905년 12월 13일 게재하였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짐 대한제국 황제는 이 한국-일본 의정서가 강제로 불법적으로 결론지은 것이기 때문에 합법적인 효력이 없음을 선언한다. 나는 이 문서에 서명한 적이 없으며 서명하지도 않을 것이다…”
위 왼쪽: 1905년 보호 조약은 조선 헌법에 필요한 왕의 인장이 없었다. 위 오른쪽: 이 2개국어로 된 청원서에서 한국의 왕은 영국에게 그들을 지지하고 동의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우리 내각의 서명은 협박으로 이루어진 것이며, 불법적 조약에 대해서 내각은 인정한 적이 없다..”
1905년 한국의 정치적 상황과 일본의 독도– 다케시마 편입
“한국의 외교부는 1904년 8월부터 독립적인 기능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하였다….”
1905년 후반 몇 개월 동안 일본외교에서는 황급하게 한국과 관련하여 4개의 중요한 조약을 체결하였다. 모든 일본의 조약들은 한국의 주권을 박탈하는 특별 조항을 포함하였다. 이들 조약의 시기로 볼 때, 왜 일본이 한국에게 일 년(3월 28, 1906) 후까지 독도의 편입을 통지하지 않았는지는 명확해진다.
한국인들이 독도 편입을 알게 되었을 때, 한국의 외무부는 붕괴되었다. 이런 행동과 능력으로 국가대 국가의 공식적인 저항과 항의는 불가능하였다.
오른쪽, 이 신문 기사는 1930년 1월 1일 인쇄된 동아일보의 신년 특별판이다. 이 인터뷰 내용에서 이전 내각 대신 한규설은 일본-한국 보호 조약을 반대한 대신들에 대해서 어떻게 일본의 강제로 협박하였는지를 상세히 기술하였다. 그는 얼마나 긴장된 분위기가 조성되어 일본군들이 왕의 거처를 포위하고 문서에 서명하도록 강압하였는지를 말하고 있다.
Harvard 법과대학에서는 나중에 이 일본-한국 보호조약이 마치 히틀러가 유럽국가들에 대해서 강제로 서명케 한 4개의 조약과 같이 전형적인 강압적인 서명사례로 인용하고 있다.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한국인들이 일본의 독도 편입을 알게 되었을 때, 그들은 정부기관이 기민한 행동을 하지 못했음을 두고 논란을 벌였다. 지방 도지사와 내무대신들은 모두 독도는 한국영토이며, 일본의 행동이 잘못된 것이라고 의견일치를 보았다. 두 국가적 신문들 역시 일본의 시마네현이 독도를 편입한 순간을 불법행동으로 인식하고 비판하였다.
시간이 갈수록, 독도를 강점한 것이 심각한 결함이 있는 것으로 증명하는 더 많은 문서들이 나타났다. 따라서, 일본의 외교부는 독도문제를 단순하게 영토분쟁이라고 간악하게 주장하고 있다. 일본역사가들은 일본의 독도 편입에 대해서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링크) 한국인들의 반대 문서에 대해서 침묵하고 있다. 이것은 의도적으로 아시아의 뼈아픈 시대에 일본군의 야심이라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문서를 의도적으로 감추려는 노력일 뿐이다.
[ 韓國之獨島 http://www.dokdo-takeshima.com/korea/2009/07/11/koreas-political-situation-dokdo/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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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 Taft-Katsura 합의서
1905년 Taft~Katsura 합의서는 미국의 한국에 대한 배신인가?
주어진 입장과 시간의 흐름으로 볼 때 미국이 독도 문제에서 책임이 적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보는 바와 같이, 루즈벨트 행정부의 개입, 또는 개입의 결여로 일본 팽창주의가 진출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이들 비밀문서들은 어떻게 미국이 그들의 필리핀에서의 이익과 교환하기 위하여, 일본이 도전을 받지 않고 한국을 통제하도록 해주었는지를 보여 준다.
위 왼쪽: 전쟁장관 William Howard Taft. 위 오른쪽: 일본의 카츠라(Katsura) 백작. 비밀 전문에서, Taft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에 동의하였다. 이 합의서는 미국의 1882년 평화조약에서 “선한 관리자로서의 노력..”의 서약에 반하는 것이며, 그리고 다른 나라가 한국을 위협하는 경우에 “우호적인 합의에 도달하기 위한.” 조항에도 어긋난다.
1905년 7월 29일, 일본의 카츠라 백작은 William Howard Taft 전쟁장관(나중에 대통령이 된다.)을 만나 두 국가 간의 불만을 해소하기로 한다. 일본은 미국이 하와이와 필립핀에 주둔하는 것을 동의하는 교환조건으로, 미국은 일본이 한국에 자유롭게 진출하는 것을 합의하였다.
“카츠라 백작과 Taft 장관은 7월 27일 아침 장시간 비밀회담을 가진다. … 첫째, 러시아 측을 생각한 미국 Taft 장관은 일본의 승리로 일본이 필립핀 섬으로 진격할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하여, 그의 의견에서, 일본의 유일한 이익이 필리핀 섬들에 대한 것일지도 모른다고 간주하여, 미국과 같은 강력하고 우호적인 국가가 지배하여야 한다고 보았으며, …Katsura 백작은 일본이 필립핀에서 어떠한 항구에도 공격적인 의도로 정박하지 않을 것임을 정확하고 강한 의지로 확인하였다.…
둘째, 카츠라 백작은 극동지역에서의 일반적인 평화는 일본의 국제 정책의 근본적인 원칙이며. 그러한 경우,…위의 목적을 유일하게 성취하는 수단은 일본정부와 미국 그리고 대영제국 간의 선한 이해로 달성된다.…
셋째, 한국 문제에 관하여, Katsura 백작은 한국을 러시아와의 전쟁에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고, “그것은 일본에게 중요한 한반도 문제의 안전한 해결은 전쟁의 논리적인 결과로 해결되어야 하며, 만약 한국이 전쟁 후에 남겨진 문제로, 한국은 다른 강대국들과의 조약에 대책없이 되돌아가게 될 것이며, 따라서 국제 분쟁에서 전쟁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가게 될 것이다. 장래의 상황을 고려하여 일본은 전적으로 한국이 그 이전의 조건으로 돌아가 또 다른 외국과의 전쟁 상태로 들어가는 상황을 예방하기 위한 확실한 조치로서 …” Taft 장관은 전적으로 백작의 생각과 언급에 대한 정당성을 언급하며 인정하고, 개인적인 의견으로, 일본군이 한국에 대한 종주국을 성립시키고 일본의 동의 없이 한국이 외국과의 조약을 성립시키지 않는 것이 현재 전쟁의 결과적 논리라는데 동의하며, 이것이 동양의 평화에 영구히 직접 공헌하는 것이 될 것이라는 점을 인정한다. 그의 판단은 대통령 Roosevelt가 이것을 확정할 권위는 없지만, 그의 견해를 동의하며…”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는 1905년 7월 31일자 전문에서 Taft의 의견에 동의하였다.
“귀하의 Katsura 백작과의 대담은 모든 면에서 전적으로 올바른 것이다. 나는 귀하가 Katsura에게 당신이 말한 모든 것을 내가 확인한다고 전달하기 바란다…”
Taft-Katsura 합의서와 1882년 5월 22일 서명된 미국 – 한국 평화조약
한국(Choseon)과 미국 간의 평화, 우호, 통상과 항해 조약
Taft-Katsura 합의서와 같은 미국의 영토합의서는 식민지 강대국들에게 당시에는 흔한 것이었는데, 왜 한국인은 루즈벨트의 일본과의 거래에 대해서 배신감을 느꼈는가? 사실상 미국이 1905년 약한 조선 정부를 보호하고 도우려는 의무는 무엇이었는가?
미국-한국 우호조약의 내용을 볼 때, 모든 한국인과 미국인들이 Roosevelt 행정부가 추구했던 의무에 대하여 다른 해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명확하다.
이 조약 논쟁 분야는 모든 한국인과 미국인들이 어떻게 서문과 제I조를 해석하느냐에 달려있다. 서문과 적절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제1조 : 미국 대통령과 조선 왕은 양국 정부를 따르는 시민들과 그 종속국민의 영구적인 평화와 우호를 다짐한다. 만약 다른 강대국들이 양국정부를 강압적으로 또는 부당하게 취급할 경우, 다른 일방은 그들의 선한 관리업무를 다하여, 그런 통지를 받은 경우, 우호적인 주선을 하여, 우호적인 감정을 보이도록 한다…..”
우리는 이 제1조 내용에서 1882년 우호조약은 명확한 상호방위조약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합의서에 따르면 미국은 오늘날까지 한국인들이 견지하는 것처럼 한국을 침략으로부터 방위하는 의무가 아님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미국 제1조의 두 가지 중요한 점에서 이 합의서의 명예를 지키지 못하고 있다.
일본이 1905년 강제적으로 일본-한국 의정서를 발효시켰을 때 조선관리들이 Roosevelt 행정부에게 “선한 직무”(어떤 외교 관계에서) 도움을 요청했을 때 이를 거절한 것은 명확한 제1조의 위배이다.
1905년 가을, 한국의 고종 왕은 미국인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10월에 고종왕은 거의 20년 동안 한국에 거주한 Homer J. Hulbert 미국선교사를 워싱턴에 파견하여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Hulbert가 국무장관 Elihu Root를 일본~한국 간의 강제 조약에 서명한 후 일주일 뒤에 만났을 때, 그는 미국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종왕은 Chefoo에게 보낸 전문을 통하여 조약은 강박에 의한 것이며 효력이 없으므로 서울의 미국 공사에게 국무성이 효력이 없음을 통지하도록 요청하였다.
나아가, 미국인들은 “그들의 선한 직무를 할 것”을 하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고종왕이 주장한 것처럼 일본-한국 보호 조약은 “강압에 의해 서명된” 것이라는 조선의 주장에 1882년 평화조약에서 말한 우호적인 직무를 제공하지 못하였다. 그 대신 미국은 필립핀에 대한 미국의 이익을 위하여 “한국 문제”에서 손을 뗀 것이다.
Taft – Katsura 비밀합의서. 결론
Taft-Katsura 합의서는 최고의 비밀문서이지만, 국제 조약에서 중요성을 가진다. 그것은 “한국 멸망의 근거”로 말하고 있으며 1905년 일본~한국 보호 조약의 선도가 되었다고 한다. 이 조약을 통하여 일본은 당시 영국으로부터 “보호”의 모양으로 한국을 식민지화하는 동의를 얻었다. 1905년 11월 17일 보호 조약을 통하여 시마네현의 1905년 독도편입에 대하여 공식적으로 한국 외교부가 반대할 수 있는 직무를 와해시켰다.
점진적인 방식으로 합병된 것은 우리로 하여금 독도 편입이 자발적이고 평화적인 것으로 잘못된 결론을 얻게 만들었다. 그러나 문서에서 보여준 바와 같이, 한국은 연합국이 선택할 수 없는 쪽으로 버려졌고, “조약”은 일본의 강압에 의하여 불공정하게 강제적으로 체결된 것이다.
[ 韓國之獨島 http://www.dokdo-takeshima.com/korea/2009/07/11/korea-and-the-taft-katsura-agreemen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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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아에서 일본의 팽창주의와 독도
메이지 일본의 제국 확장 방법과 그 과정에서 독도 편입
일본 도쿄 아시아연구소장 및 연구자 Shojin Saito
1905년 1월 말경, 일본의 내각은 독도 (일본의 다케시마)를 일본영토에 편입시키기로 결정한다. 한국정부가 이것을 안 것은 1906년 3월이다. 4 개월 전인 1905년 11월, 일본은 한국을 보호아래 두고, 이전에 행한 반대의 행동을 차단하였다. 1945년 8월 한국이 일본이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을 때, 일본은 미국 점령 하에 있었고 독도를 포기하였다. 그러나 1951년 9월, 일본이 미국과 연합군과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으로 주권을 회복하였을 때, 일본은 다시 독도주장을 하게 되었다.
러일전쟁 (1904년-1905년) 중의 독도 편입은 일본의 팽창주의 정책의 추구라는 측면에서 연구되어야 하고, 한국(남과 북), 중국, 러시아, Philippines 그리고 미국의 영토 구분이라는 전체적인 과정으로 분석되어야 한다.
일본의 전후 독도 영토 주장은 Ainu Moshiri의 식민지화, 오키나와 그리고 이 움직임으로 연결되고 이와 함께 북방 섬들의 주장은 일본의 과거 팽창주의자들의 정책으로 되돌아가는 모습으로 간주되었다.
한국의 울릉도와 독도 영유권
三國史記 (한국의 고대 3개왕조 역사)와 高麗史에서 울릉도는 우산국이라는 부족국가를 형성하였지만, 그러나 이 국가는 6세기에 新羅에 병합되었고, 신라가 망한 후에는 고려의 통치아래 두게 되었고, 마지막으로는 11세기 초에 女眞(Jurchen)에 복속되었다.
15세기 한국 간행물 기록에서는 독도의 존재가 나타나고, 한국정부는 15세기 이후 한국영토에 포함시켰다.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울릉도와 독도는 한국과 분리될 수 없으며, 만약 울릉도가 한국 영토 속으로 들어오게 되면, 독도도 마찬가지로 한국의 영토로 들어오는 것이다: 이것은 서로 분리할 수 없다. 울릉도를 한국의 소유로 간주하고 독도의 소유권을 부정한다는 것은 제주도를 한국의 영토로 인정하고 마라도를 부속 섬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가 같다.
동북아의 이들 일본 역사지도는 만화와 같은 그림으로 묘사되고 있다.(더 큰 사진을 보시려면 클릭하시오)
B. 울릉도와 독도와 일본의 침략
일본 해적의 울릉도 침략 1.
1379년 고려왕조 동안 일본 해적들이 울릉도에 침입하였고, 1403년 조선왕조는 그 섬을 “空島” 정책을 써서 사람들이 울릉도에 거주하는 것을 금하였다. 이 정책은 조선왕조 후반까지 지속되었으나, 이 정책은 엄격히 지켜지지 못하였고 사람들은 때때로 섬에 드나들었다. 1407년, 대마도 주는 한국정부에게 일본인의 울릉도 거주를 허용해달라고 요구하였으나 거부되었다.
1618년, 도쿠가와 막부(幕府)는 시마네 현을 통하여 요나고(米子)의 Otani Jinkichi와 MuraKami Ichihei 가문에게 울릉도로 통행할 수 있다는 허가서를 발행한다. 그 후 78 년 동안 이들 두 가문은 울릉도에 항해하였다.
1667년, Izumo-현(Izumo 국)의 家臣 사이토 호센은 1667년 그의 영주의 명령으로온슈 (오키 섬)을 조사하고 은주시청합기(隱州視聽合記-Ohshu Shicho Goki-隱州 섬에 대한 기록)를 저술하였다. 그 책의 1권에서 독도는 “마츠시마(Ma대마도 -松島)”로 호칭하였고, 울릉도는 “다케시마”로 호칭하였다.(링크를 보시오)
1693년, 동래의 안용복과 어부들은 울릉도의 일본인들과 충돌하였다. 그와 박어둔은 요나고에 인질로 잡혀갔다. 이 사건을 전환점으로 해서, 1696년 幕府는 울릉도를 한국의 소유권으로 인정하고 일본인이 그 섬에 도해하는 것을 금지하였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계속해서 섬에 몰래 건너갔고 비밀리 그곳의 나무를 베었다.
2. 일본인의 울릉도 어업과 독도
1876년 2월, 한국과 일본 간에는 불평등 조약이 조인되었다: 그것은 우호조약으로서 강화도조약으로 알려져 있다.(링크) 이것은 일본의 한국과 울릉도에서 어업과 벌채가 마음대로 이루어지게 된 침략의 시작으로 기록된다. 울릉도(鬱陵島)라는 이름 그대로 -문자 그대로 당시의 섬은 풍부한 나무들로 숲을 이루었다.
1877년 3월 29일, 일본의 태정관은 울릉도와 독도는 not 일본의 영토가 아니라는 문서를 발간하였다.(링크를 보시오) 이 결정은 그해 4월 9일 시마네현으로 전달되었다. 1880년, 일본 전함 아마기(Amagi)가 울릉도를 측량하고, 1882년 12월, 한국정부는 울릉도를 개발하는 법령을 발표한다.
1883년 3월, 일본정부는 울릉도(Matsushima -松島)가 한국 소유임을 확인하고 일본인이 섬에 거주하는 것을 금지하였고, 그해 10월, 비밀리에 불법어로와 어업에 종사하는 전체 254명의 일본인들을 철수시켰다.
오른쪽 한국신문 만화에는, 고대 한국과 일본 어부들의 논쟁을 말하고 있다. “다케시마는 국제법 상으로 일본에 속한다…”고 일본의 어부가 말한다. “탐욕스런 일본팽창주의가 영토를 탐낸다.!” 분노한 한국인들이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일본인의 울릉도침략은 계속되었다. 1896년 8월, 외무대신 이완용(李完用)과 농상공부 대신 조병직(趙秉稷)은 한국정부를 대표하여 러시아 민간인 Jules Bryner와 서울에서 울릉도 벌채와 식목에 관한 합의서를 체결하였다.
그 결과, 한국정부는 일본인들을 섬에서 추방하였다. 1898년, 울릉도 군수 배계주(裵季周)는 일본 마츠에로 가서 소송을 하고 울릉도에서 일본인들의 불법벌채에 관하여 일본 화폐로 300원을 보상받았으나 일본인들에게 돈을 빼앗겼다.
3. 일본의 독도 편입
1880년대의 일본인들은 울릉도에 농경지를 만들고 어장을 만들기 시작하였다.(링크 1, 2, 3) 그리고 이 과정에서 일본은 독도를 점유하게 된다. 1904년, 일본 울릉도에 관리사무소를 개설하고 같은 해, 시마네현 하마다와 울릉도 간의 여객선 운항을 시작한다.
1905년 5월 28일, 일본과 러시아 함대 간에 큰 해전이 발생한 2달 후(링크 1, 2) 일본해군은 독도에 망루를 세웠다.(링크 1, 2, 3,) 나아가 1904년 9월 29일, 나까이 요자브로(Nakai Yosaburo)는 Liangcourt 바위(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시켜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였고, 외무대신, 내무대신, 그리고 농상공부대신에게 독도임대를 신청하였다.
일본의 내각은 1905년 1월 28일 독도를 일본영토로 편입시키기로 결정하고, 이름을 “다케시마”로 하며 시마네현 오키섬의 관할 아래에 두었다. 그때까지,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다케시마” 또는 “이소 다케시마”라고 불렀고, 독도를 “마츠시마(松島)”라고 불렀으며 독도를 “다케시마”라고 부른 적이 없다. 러일전쟁 중에, 일본정부는 비록 일본어로 정확한 호칭이 아니지만, 한국의 섬을 소유하려고 시도하였다.
왼쪽으로, 한 사람의 한국인 배우가 자기 자신을 독도로 분장하고, 다른 한 배우는 1905년 일본제국인 군인으로 꾸미고 있다. 한국인들은 일본의 1905년 독도 편입을 일본의 팽창주의 식민지 시대와 분리할 수 없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그런데, 일본인들은 한국영토에 대한 근대의 재침략으로 보는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
1905년, 일본이 독도를 점령할 때까지, 일본 외무성은 독도를 한국영토인 울릉도에서부터 분리한 적이 없었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모든 섬들에 대한 한국 소유권을 인정한 것이다. 또한 19 세기 말경, 일본해군 수로국은 독도와 울릉도를 한국 영토로 인정하였다.
1905년 2월 22일, 시마네현은 공시 No.40에서 다케시마(독도)가 등기소에서 자기네 관할구역으로 들어왔다고 발표하였다. 한국이 그 사실을 안 것은 1906년 3월 말이다. 시마네현 관리집단들이 독도를 조사하러 심흥택(沈興澤)을 방문하고, 그 섬이 일본영토로 편입된 사실을 통보하였다. 심흥택(沈興澤)은 즉시 이 사실을 중앙정부에 알렸다. 이 일이 있기 4개월 전 한국은 일본의 보호 아래에 들어갔고, 1906년 3월 伊藤博文은 총독으로 서울에 부임하여 한국정부를 대신하여 외교권을 행사하였다. 같은 해 7월 시마네현은 나가이 요사부로가 경영하는 다케시마 어업수렵회사에 독도를 임대하였다.
독도편입에 관하여는 일본정부는 공식관보에 게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본인들 사이에는 이러한 사실을 정확하게 모르고 있었다. 1910년 12월 大板에서 Adachi Ritsuen가 발간한 조선신지리리(朝鮮新地理誌-한국의 신관보)에는 “다케시마”는 한국의 섬으로 기록하고 있다.
1910년도 말의 울릉도 인구통계는 다음과 같다: “일본인 거주민은 전체 224가구로; 대부분 오키노 섬에서 온 사람들이며, 섬에 의존해서 살고 있다; 일본인과 한국인들의 비율은 한국에 이주한 일본인이 가장 많았다.”
오른쪽 지도는 일본해군 측량 독도 지도. 그것은 전함 대마도호의 부함장 Yamaka가 그린 것이다. 섬은 독도가 편입되기 몇 개월 전에 군대 망루건설을 위하여 측량되었다.(지도를 클릭하면 확대하여 볼 수 있다)
조선총독부 통계에 의하면, 1922년 일본인은 울릉도에 656명(186 가구)가 거주하였고 그들의 원래거주지는 히로시마현, 야마구치현, 오이타현, 그리고 혹카이도이었다; 1917년 가구수는 400 ; 어업조합은 1914년 2월에 결성되었으며, 1922년 말 가입자 중에는 245명의 한국인들과 130명의 일본인이 있었다.
1939년 4월 24일, 독도는 오키섬 Gokamura에 편입되었다. 그것은 해군이 사용하고 Maizuru 해군 기지의 통제 아래에 두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정부는 독도를 재무부 소관의 국가재산으로 등록하였다.
4 방향으로의 일본 확장
1869년 9월 메이지 유신 다음 해, 일본은 Ezonoshima 또는 “Ezo (Ainu) 섬”이라고 부르던 북방 섬을 병합하고 그것을 혹카이도라고 명명하였다. 일본은 북쪽 경계를 설정하고 러시아와 함께 남쪽, 동쪽, 그리고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였다.
따라서 북방 섬 혹카이도는, 아이누 모시리(Ainu Moshiri)의 일부로서 일본에 편입되고, 일본은 류큐 왕국, 대만, 한국, 중국, 몽고, 마이크로네시아(Micronesia), 그리고 동남아 국가들을 침략해 들어갔다. 이 침략 과정에서, 일본은 국민국가를 발달시키고, 식민지를 확장하고 이 지역을 점령하였다. 일본 황국 신민들은 아시아 지역과 국가들을 침략하고 아시아와 태평양에 군인, 경찰, 땅주인, 민간근무자, 농업인 그리고 이민 어업인, 상인 그리고 공격적 기업인으로 진출하였다.
아이누 모시리, 혹카이도, 사할린과 쿠릴열도에서, 일본인들은 다수를 차지하는 거주민이 되었다. 이것은 마이크로네시아에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이들 지역에서, 일본인들은 무고한 시민들을 말살하고 그들에게 일본어 사용을 강요하였다. 일본정부는 모든 지역을 일본화하려고 애썼고 식민지화하였다.
1946년까지, 모든 그 지역민들은 일본천황의 황국신민이 되었고, 정부는 이 천황 제도를 모든 식민지에 강요하였다. 일본인들은 아직 이 天皇制(tennosei)를 유지하고 있다.
A. 戰前 時機(Pre- War Period)
1. 일본의 북방확장
Ainu Moshiri가 일본영토로 편입된 데에는 아무런 조약이 존재하지 않지만, 그러나 일본은 1869년 이후 혹카이도에 주권을 계속 행사하였다. 1875년 5월 7일, 일본정부는 러시아 정부와 쿠릴열도-사할린을 교환하는 협정을 맺었다. 이 조약에서 러시아는 일본이 Habomai에서 Simushi에 이르는 모든 쿠릴열도, 아이누 모시리, 혹카이도 식민지화를 인정하고, 그 교환 조건으로 러시아가 또 다른 아이누 모시리인 사할린 지역을 모두 식민지화하도록 인정하였다. 양국 정부는 이들 지역의 원주민들을 철저히 무시하였으며, 아이누 모시리 원주민들을 의도적으로 분리하였다.
일본의 제국주의자들 아이누 땅을 일본영토로 바꾸고, 그들의 교역권을 빼앗고, 일본 속에 복속시켜, 일본의 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하였으며, 그들을 말살하려고 모든 노력을 다하였다. 아이누 모시리에 침투한 일본인 “이민자”들은 아이누의 자연환경을 파괴하고 그들이 살고 일하는 땅을 약탈하였다. 아이누가 사는 많은 “Kotan”(마을)이 사라졌다.
러일전쟁 후에, 일본은 아이누 모시리가 사는 사할린의 남쪽 절반을 영토로 차지하고, 일본인들은 새로운 땅으로 들어왔다. 1926년과 1927년, 남쪽 사할린 원주민들은 강제적으로 “Otasu no mori” 또는 Otasu(나무 숲)이라고 불리는 좁은 보호구역으로 이주를 당했다.
역사적 지도를 통하여 본 일본의 팽창주의
아래 지도들의 내용은 일본이 서양 지도제작법에 의하여 그려진 역사적 지도들이다. 왼쪽 지도는 1840년 일본의 팽창주의 시대 이전의 일본 영토를 보여 준다. 오른쪽 지도는 다시 일본의 1922년 지도이다. 우리는 얼마나 멀리 각 방향으로 일본영토가 확장되었는지 볼 수 있고, 현재의 대만, 한국, 남쪽 사할린, 혹카이도, 요동(Liandong-Dalian) 반도와 남쪽으로는 Bonin 섬들이 포함되어 있다. 아래 지도들은 편입된 대만, Bonin 섬들과 사할린 섬의 상세한 클로즈 업이다. 보다 상세히 보시려면 이미지를 클릭하시오.
위: 이들 두 지도들은 일본이 1840년(왼쪽)부터 그 대제국을 건설한 식민지 시대(1922년) 얼마나 일본제국이 주된 섬들에서부터 확장되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1874년 5월, 일본정부는 3천 수백 명의 해군과 육군 병사를 대만에 파견하였다. 대만 원주민 Paiwan들은 자기들의 땅에 침입한 일본인들과 싸우기 위하여 일어났다. 이 전투는 16세기 한국을 침략한 히데요시 침략 때 한국인들과 싸운 전쟁과 1789년 쿠나시리 아이누(Kunashiri-Menashi)의 저항과 같이 근대적 해석으로 기록된다.
1876년 3월, 일본정부는 Bonin 섬들을 내무성 산하에 두고 일본영토로 편입시켰다. 1882년 모든 섬 사람들은 일본의 국적을 획득하였다.
3년 후 1879년, 일본정부 군대와 경찰이 류큐 왕국에 파견되어 그것을 일본제국으로 편입시켰다. 천황 제도가 강요되고 왕은 일본인 친구로 되었다. 1891년 9월, 이오지마(Iojima)도 일본의 관리 속으로 복속되었다.
중-일 전쟁 이후, 중국(Ch’ing)은 1895년 4월에 조인된 평화조약에 따라 대만, 팽호열도(Pescadores), 그리고 요동(Liatung) 반도를 일본에 양도하였다. 이번에는 일본이 Miyako- Yaeyama 지역(Miyako, ishigaki, Iriomote 그리고 다른 지역)을 점령하고 그 섬들을 오키나와 현의 감독아래 두었다.
1895년 8월, 일본은 Spain과 협정을 맺고, 양국은 대만과 필립핀 사이의 해협 중간을 가로지르는 경도를 따라 경계를 설정하였다. 미국과의 전쟁에서 패배한 스페인은 피립핀을 미국에 20,000,000달러에 팔았고 봉쇄선은 자동적으로 일본과 미국의 경계가 되었다.
1914년, 일본은 독일의 신탁영토였던 마이크로네시아를 식민지로 삼았다. 1923년과 1926년, 일본 전함 Manshu는 오키노토리시마를 측량하고, 일본정부는 중국 동북지방을 침략(9월 18일 사건)하기 2달 전에 내무성 고시를 통하여, 그 섬을 Bonins 섬 행정관 아래에 두었다.
2차 세계대전 후, 일본은 마이크로네시아를 미국에 양도하도록 압력을 받고 미국은 거기에서 수소폭탄 실험을 하였다. 1987년, 일본은 오키노토리시마 주변을 콘크리트로 강화하였다. 오키노토리시마는 만조 시기에는 오직 70cm 높이의 바위섬으로 일본의 남쪽 경계가 되었다.
위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이미지들: 왼쪽 이미지는 보여준다. 길게 늘어진 류큐 섬 고리를 보여주는데, 이것은 대만(당시 Formosa)까지 이어진다. 중앙은 혹카이도 섬과 일본의 북방 지역 사할린 섬으로 당시 러시아와 함께 공유하였다. 오른쪽: 일본의 남쪽 외부 섬들이며, 일본의 동쪽 확장된 오가사와라(Bonin 섬들)이다.
일본의 동쪽 확장
1871년 7월, 일본 유럽 사람들이 이름붙인 Marcus 섬(Weeks 섬)의 명칭을 바꾸고 “Minami torishima”라고 불렀으며, 그것을 도쿄 현 공시를 통하여 또 다른 일본영토로 편입하였다. 이것은 일본의 동쪽 경계가 되었다.
일본의 서쪽 확장
1905년 2월, 러일전쟁이 진행되는 동안, 일본은 독도를 편입한다. 같은 해 9월, 러일전쟁을 이기고, 일본은 요동반도 남쪽 “관동주(Kuantungshu)” 를 식민지로 삼고, 남만주 철도 부지를 부속시킨다. 한국(대한제국)은 1910년 8월에 합병되고, 중국-한국 경계는 중국-일본 경계가 되었다. 현재 일본영토 서쪽 끝은 Yaeyama 섬에 있는 Yonakunijima이다.
1931년 일본의 팽창주의 중국 동북, 몽골 남동쪽, 남중국, 홍콩과 하이난(Hainan)
9월 18일 사건 후, 일본은 중국 동북쪽과 몽골 남동쪽을 식민지로 만들고, 만주국(滿洲國)을 설립한 후, 만주제국;북 중국 괴뢰정부라고 명명하였다. 그리고 홍콩과 하이난 섬을 점령하고, 일본제국의 영토를 확장하였다. 일본, 대만, 한국, 그리고 중국 동북쪽,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일본과 대만은 하나다,” “일본과 한국은 하나다,” “만주국과 한국은 하나다,” 그리고 “5 종족이 조화를 이룬다”고 선전하였다.
오른쪽에, 이 한국 정치만화는 일본 수상 고이즈미가 아시아를 재침하는 전함 위에서 일본의 과거 진실을 왜곡하는 일본의 역사 책을 만드는 것을 묘사한다.
6. 대동아 공영권
일본은 1940년 7월 국가 정책으로 “대동아의 새로운 질서건설”을 설정한다. 그리고 9월에는 제국 총사령부-정부 연합위원회에서 “대동아의 새로운 질서건설”을 위한 일본의 생활권을 규정한다.
여기에는 일본, 만주과 중국, 독일이 이전에 통치하던 섬, 인도차이나와 프랑스가 지배하던 태평양 섬, 태국, 말레이, 영국이 지배하던 보르네오, 네델란드의 동인도, 버마, 오스트렐리아와 뉴질랜드가 포함되었다.
1941년 2월, 연합위원회는 전 세계를 4개 권역으로 분류하여 대동아, 유럽, 미국과 러시아로 나누고, “일본은 대동아공영권의 지도적 역할을 담당하며 질서유지에 책임을 진다.”고 선언하였다. 일본제국은 세계 제국주의 국가들과 소비에트 러시아와 함께 세계를 분할하고 자체적인 대동아공영권을 구축하려고 시도하였다.
1943년 5월, “대동아 정치지도자를 위한 일반규칙”에서는 천황 히로히토, 도죠 히데키를 포함한 군부지도자들을 포함한 일본정부지도자들과 공동회의를 가졌다. 회담에서 결정한 것은 말레이, 스마트라, 자바, 보르네오와 Celebes를 일본제국영토로 편입한다는 것이었다. 천황과 기타 제국주의자들은 “필수적인 자원자원 공급처”로 이들 지역을 일본 영토로 편입시키려고 하였다.
그들은 “한 지붕 아래 하나의 세계”라는 슬로건 아래 태평양 많은 대동아공영권 부분에 일본군대를 파견하고 원주민들을 대량 학살하였다.
미국은 1953년 12월 Amami (Oshima) 섬들을 점령하고, 1968년 6월에는 Bonins, 그리고 1972년 5월에는 Uchina-Yaeya-ma 지역을 점령하였다. 러시아인들이 점령한 남 사할린과 쿠릴열도는 원주민들에게 반환되지 않았다. 쿠릴열도, 대만, 남 사할린, 한국, 마이크로네시아, 중국 동북쪽, 몽골 남동쪽에서 일본인들이 철수하였으나, 그러나 아이누 모시리의 일부인 혹카이도는 일본 식민지로 남아있다.
1899년, 일본정부는 원주민 보호법을 발효시켰다. 이 법에 따라 영토 일본 본토에서 멀리 떨어진 땅에서는 그 지방 토착주민들의 보호지구로 설정되어 “부여”되었다. 아이누를 보호한다하는 핑계로 일본정부는 그들은 안전히 동화하려는 정책을 추구하였다. 이 법은 “이전의 토착민”이라고 불리는 아이누에게는 아직 효력이 미친다. 1996년 4월, 이 법이 반포된 약 100 년 후 비공식위원회 “Utari 대책을 위한 지식인들의 모임”이 정부의 내무성 산하 자문위원회로 조직되어 보고서를 발행하였다. 그 내용의 일부는 다음과 같다:
역사에서, 적어도 중세기 후반 이후, 일본 군도, 특히 혹카이도에는 고유한 일본영토의 부분으로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지식인들”의 주장은 북방 원주민들이 일본영토의 일부라고 주장하였다. 일본은 1869년에 와서야 Ainu Moshiri를 혹카이도라고 불렀음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이 말은 자체적으로 혹카이도는 고유한 일본영토가 아님을 말하며, 일본의 식민지임을 말하고 있다. 한국이 일본의 점령으로부터 해방되었다시피, 아이누 모시리(사진 왼쪽)도 일본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보고서에도 언급하기를: 메이지 유신 이후, 우리나라는 근대 국가로 출발하였고, 혹카이도의 개발과정에서… 아이누는 사회적으로나 문화적으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고… 많은 아이누가 차별을 받아 가난에 빠졌다.
아이누의 물리적인 환경은 황폐해지고; 아이누의 생활과 삶의 장은 피폐해지고; Kotan “마을”은 쇄락하고, 일본인들은 그들을 동화시켰다. 인종차별은 계속되었고, 그들은 그들의 언어를 박탈당했다. 일본인들은 아이누의 사냥과 연어어업권을 박탈하였다. 아이누 모시리의 소유권뿐 만 아니라, 일본은 다른 지역과 다른 국가들에서 침략을 중단하지 않았다.
2. 일본이 재점령을 시도하다.
한국전을 치루는 동안, 일본, 미국 그 외 48개 국가들은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을 체결하였다. 일본의 경제는 한국에서 필요한 미국군대의 물자를 대량생산함으로서 부할되었다. 한국인들의 희생으로 일본의 제국주의는 부활하였고, 일본은 현재 독도, 북방 섬들, 그리고 조어대(Chogyodai)에서 권리주장을 하고 있다. 오늘날, 독도는 한국 경찰에 의해서 방어되고 있지만, 1972년 5월 15일 미국이 일본으로 오키나와를 돌려준 이후 일본은 조어대(다오위 다이)를 차지하고 있다. 그 섬은 1895년 1월 14일, 중-일 전쟁 기간동안 일본정부가 그 섬을 차지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일본은 4개 북방 섬들을 북방 영토로 언급하면서 러시아에게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러시아 정부는 그 섬을 일본에게 돌려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원부민들; 일본과 러시아는 원래의 소유자 아이누 모시리(사할린, 쿠릴열도, 혹카이도 그리고 시베리아 연안국)들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것이다.
C. 한국의 영토가 유린당하다.
1894년 한국의 동학 농민 군대는 혁명의 봉기를 높이 세웠으나, 일본의 맹공격을 당할 수 없었다. 금세기 전환기에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 과정에서 두만강(Tulmmen River)은 중국-한국 경계가 되었고, 만주(滿洲)에 있는 간도(間道: Chientao)는 중국(Ch’ing)의 영토가 되었다.
오른쪽은 1900년대 초기 일본의 울릉도 사진이다. 한국부락(韓人部落)과 일본부락거류인(日本部落居留人)들이 이 섬에 정착하고 있다. 여기서 일본인 도해자들인 정착민들은 “외국 땅에 있는 임시 일본인 마을”에 살았다.
독도역사는 식민지 역사에서 한국의 국경선과 일본인의 우세한 지배과정에 대해서 자세히 연구하지 않고는 상세한 내용을 알 수 없다.
한국은 동학 농민 봉기를 기점으로 하여, 그리고 1919년 3월 1일 독립운동을 통하여 근대국가의 면모를 발달시켰으나, 해방 후 분단국가가 되었다. 독도는 한국영토의 동쪽 끝이 되고 경찰이 그것에 주둔하는 것은 일본이 그 섬을 다시 점령하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다.
D. 국제법과 영토문제
9월 1954년, 일본정부는 한국정부에게 독도문제를 국제사법재판소에 제기하는 문제를 제안하였으나, 그러나 이 제안은 한국에 의하여 거부되었다.
“한국의 거부는 단순히…로 생각된다.” 이한기 교수에 의하면, “..국제법은 제국주의 국가들을 위한 것이고, 오늘날 국경선을 확정하는 명확한 정의에 의존하기가 불가능하다. 국제사법재판소는 아직 제국주의 국가들 영향 아래 놓여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의 팽창주의 정책과 독도문제 – 결론
일본의 독도점령은 한국침략의 첫 단계이고, 일본인 어부들은 한국 수역들과 섬들, 예를 들면 거문도, 울릉도, 그리고 나로도를 침략하였다; 때로는 그들은 일본인 “이주민” 거류지를 건설하고 한국 어업 근거를 침해하였다.(위 지도를 보시오)
1910년 초, 외무대신 Komura Jutaro는 의회 예산소위원회에서 발언하기를…만주과 한국에 이민을 집중하는 것은 Yamato(일본인) 사람들에게 집중하는 것이다. 러일전쟁 전에, 일본은 섬 나라였지만, 그러나 전쟁으로 인하여 일본은 대륙국가가 되었다.
일본이 아시아와 태평양 전쟁에서 패하지 않았다면, 많은 일본인들은 중국 동북지방, 한국, 대만, 사이판과 팔라우(Palau)에 영구히 정착하였을 것이고, “5개 민족의 조화” 또는 “한국과 만주는 하나다.”라는 슬로건 아래 천황 제도를 강하하고 원주민들에게 일본어를 강요하였을 것이다.,
아시아와 태평양 많은 지역에 침략했던 일본인들은 그 지방 사람들에게 일본어를 사용하도록 강요했을 것이고, 신사를 건립하고, 일본인 방식대로 명칭을 바꾸었을 것이다. 전쟁이 끝나고 이 신사들은 파괴되었고 대만, 한국과 중국 동북부의 장소 명칭은 이름을 회복하였다.
오른쪽에, 한국여인(독도)을 탐내는 한 일본인 이웃 남자에게 한국 남자에게 “당신은 계속해서 나를 괴롭힐거요?”라고 소리치자, 일본 남자는 “예..!!”하고 대답한다.
일본의 침략 역사는 오늘날도 아직 계속된다. 일본정부가 “북방 영토”라고 규정하는 쿠나시리, 에토로후, 하보마이(Kunashiri, Etorofu, Habomai과 Shikot-이들은 아이누 언어이다.)의 아이누 모시리는 Ainu, Uilta, Nivkh 등 다른 북방 사람들의 본거지이다. 아이누 모시리를 일본의 식민지 통제에서 자유롭게 하기 위해서는 일본의 독도재점령을 점검하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이미 살펴 본바와 같이, 사할린과 혹카이도는 거기에 처음 정착한 원주민들의 땅이다. 일본인들의 독도 재점령과 북방 섬들에 대한 재주장은 오늘날 경제수역을 포함하는 영토 확장으로 전체 제국주의적 의도와 연결되어 있다.
일본과 러시아 제국주의 전쟁 중에, 양국은 모두 한국을 식민지화하려고 노력하였고, 일본은 독도를 소유하고 한국전체를 병합하였다. 일본이 아인 모시리를 혹카이도라고 이름짓고 그것을 일본영토로 편입시킨 것은 한국의 독도를 편입시키기 36년 전의 일이다.
역사적으로, 독도는 한국의 주권아래 있었고, 한국이 미래에 통일된 후에도 한국의 영토로 남아있을 것이다. 만약, 근대와 현대의 아시아 역사를 연구하는 학자들이 일본인들의 다른 나라 침략의도를 숨기려 한다면, 그들은 독도와 북방 섬들을 재침하려는 일본인들의 움직임에 직면할 것이다. 이 연구활동은 침략을 부정하려는 이론적인 의미에 부합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연구자의 기본적 역사인식이다.
만일 연구자 일본의 독도 재점령 시도를 점검하고자 한다면, 그는 일본이 일본의 한국침략 과정에서 독도 점령의 사실과 역사적 의미를 분명히 하여야 하고, 일본인의 이민 역사 그리고, 한국과 외국 영토 사람들에 대한 식민지화를 비판적으로 조사하여야 한다.
[ 韓國之獨島 http://www.dokdo-takeshima.com/korea/2009/07/11/japanese-expansionism-in-asi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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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울릉도 침략 1
일본의 “기업인” 무토 헤이가쿠(武藤平学)는 한국의 울릉도 개발에 로비를 하였다.
개항시대는 한국의 영토를 노출시켰으며 조선의 자연 자원 가치를 보여주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울릉도는 부산-Vladivostok 간의 선박항로이며, 일본 여행자들은 이 섬을 보았다. 일본 외무성에 제출된 수 많은 울릉도 개발제안은 이러한 인식의 결과이다. 이들 제안 중에는무토 헤이가쿠(武藤平学)라는 사람의 울릉도에 대한 일본의 조사제안이 포함되어 있다.
울릉도(松島)는 너무 먼 서쪽에 그려져 있어서, 몇 몇 이들 지도들에서 어떤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마츠시마(松島)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기사는 이 지도들을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이 기사는 개항시대 당시 일본인들의 사적인 개발을 위한 야심과 동기를 이해시키려는 것이다.
위 왼쪽: 전체적인 울릉도 – 독도 지역 지도는 일본과 한국육지의 가장 가까운 위치를 나타내고 있다. 위 오른쪽: 한국의 울릉도 지도. 조선의 울릉도에 건너와 수 세기동안 불법으로 체류중인 어부들과 벌채꾼들
위 문서들은 일본의 초기 팽창주의 시대에 개인적으로 울릉도 개발을 요청한 일본 민간인에 관한 것이다.
일본 민간인 무토 헤이가쿠(武藤平学)가 요청한 청원문
무토 헤이가쿠(武藤平学)가 요청한 조선의 울릉도 개발청원문
“..저는 몇 가지 요구와 문서들을 일고 감명을 받았을 뿐 아니라, 일본의 북서쪽 울릉도라고 부르는 섬의 상태에 관하여 알고는 놀랐습니다. 사실로 볼 때 일본은 외국에 개방을 하고 성공적으로 우호관계를 이루어 왔으며, 여기에는 많은 정부의 돈이 사용되었을 것이지만 우리는 아직 수출을 많이 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아직 우리 국가 채무를 확실히 다 갚지 못하고 있으며 이것은 우리 국민들의 염려가 됩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여 일본을 더 부강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정부가 그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대하여 그들이 더 열심히 일하고 가능하면 더 많은 생산을 하도록 하여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국가의 부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그 어떤 것을 먼저 해야 할지 어떤 것을 우선적으로 해야 할지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저는 매일 밤낮을 가리지 않고 우리나라에 기여할 수 있는 것이 비록 작은 것일지라도 어떤 것인지 생각하여왔습니다. 불행히 저는 보통시민으로서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무토 헤이가쿠 (武藤平学)이 울릉도 개발제안을 전해 듣고 난 후
저는 어떻게 방법적으로 자세하게 개발계획과 방향을 잘 만들었는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사실상 매우 긴급한 사안이었습니다. 하루라도 늦으면 또 하루가 손해가 됩니다. 전해오는 말로 “남보다 앞서 려면 먼저 시작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예를 들면, 남쪽 오가사와라 섬(Bonin 섬들)을 취할 때를 생각해보십시오. 우리에게는 개발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습니다. 그 섬에 비교하여 울릉도의 중요성에 비추어 우리는 서둘러야할 것입니다. 저는 러시아가 5월에 그 섬에서 보여준 그들의 이익을 보고 걱정을 했습니다. 그것은 늦으면 후회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저는 귀하께서 이점을 현명하게 생각하시어, 저의 제안을 수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저희 민간인들이 정부에 대해서 함께 논의 드리는 것은 주제넘고 부끄러운일입니다만, 어떤 것이 현명한 일인지 애국심에서 생각한 일이므로 가르침을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저의 제안을 긍정적으로 받아주시기 바랍니다…”
주: 이 문서 마지막 페이지는 울릉도의 단계적인 개발계획이 있었다.
단계1. 작은 거주민 지역 개발. 단계2. 상업적 벌채. 단계3. 항구시설을 어디에 할지 결정. 단계4. 등대 건립. 단계5. 원목과 기타 자원 수출. 단계6. 토지개척. 단계7. 창고건립 위치 결정. 단계8. 주택건설과 사람들의 이주대책. 단계9. 어업과 수렵 준비. 단계10. 경제적 농업.
울릉도 개발 청원에 대한 위 문서 분석
일본 민간인들의 진실이 어떤지를 알 수 있고, 그들은 단순히 인접 영토를 취함으로서 어떻게 나라가 부강해질 수 있는지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거짓이든 아니든 글을 쓴 저자는 일본의 영토의 확장이 개인적인 이득이 아니라 국가의 자존심을 동기로 말하고 있다.
저자는 일본이 Bonin 섬들을 미국과 영국보다 먼저 차지하지 않고 야심이 없는데 대하여 유감을 표시하고, 울릉도에 대한 급한 감정을 표시하고 있다. (이 문서가 제출된 수 개월 후 일본은 오가사와라-Bonin 섬들을 편입한다.) 이것은 명확히 일본이 미국, 영국과 러시아 같은 서양 근대국가들의 식민지 야심과 어깨를 견줄 것을 원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것은 역시 일본은 러시아와의 경쟁에서 어떤 사람은 이 지역을 관리하는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염려를 하고 있지만, 그러나, 이 문서는 사실, 조선은 이 섬의 문제에 관하여 가장 근접한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 볼 필요가 있다. 이것은 일본이 한국을 위협적인 존재 또는 경쟁자로 인식하지 않고 있었음을 믿게 한다.
이 청원서는 매우 애국적인 민간인에 의해서 잘못 인도된 요청으로 정부의 채널을 통하여 개발을 촉진시키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다음 장에서 많은 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울릉도 지역에서 벌채를 하고 어업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 불법 활동은 일본인 도해자들이 과다하게 울릉도로 건너가게 되는 원인이 된다. 울릉도에 침입한 일본인들은 나중에 약 20 년 후 일본의 독도 편입의 잘못된 전제가 된다.
[ 韓國之獨島 http://www.dokdo-takeshima.com/korea/2009/07/11/the-japanese-invasion-of-ulleungdo-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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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울릉도 침략 2
1882년 5월 22일 – 일본인 벌채꾼들이 떼를 지어 한국의 울릉도에 나타나다.
한국정부는 울릉도 일본인 도해자들을 처리하기 위해 애를 먹었다.
1880년 이 지역에 대한 일본의 침략은 울릉도와 독도 전체에 걸친 것이었다. 그러나, 각각의 섬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침해를 받았는데 그것은 그 섬들이 원래 다른 가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울릉도의 자산은 자연 자원의 형태였고, 반면에 독도의 가치는 군사적 전략 위치가 있었다. 이 문서는 어떻게 일본인들이 불법적으로 울릉도 벌채를 하였는지를 보여준다. 그것은 마치 일본인들이 이전에는 오지 않았던 것 같지 않으며, 수 세기 동안 울릉도에 침입해 온 것으로 보인다. 현실적으로, 한국정부는 이 문제를 단순한 것 이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울릉도~독도 지역에서 상황은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꼬이고 있었다. 불법적으로 어업과 벌채를 하는 일본인 체류자들이 넘쳐나기 시작하였다. 다음은 통리기무아문(국방부) 대신이 왕에게 보고하는 내용이다. 그는 강원도 수토사 임한수의 보고서 내용을 인용하면서 먼저 그 지역을 전반적으로 소개하고 있다.
위 왼쪽: 울릉도 – 독도 지역 전체적인 지도는 일본과 한국육지의 가장 가까운 위치를 보여준다. 위 오른쪽: 한국의 울릉도 지도.
조선 국의 울릉도 측량 보고서 번역
“섬을 돌아보며 저는 사람들이 몇 개의 나무를 베고 해변에 쌓아두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또 다른 사람들이 검은 머리에 얼굴이 검은 짧은 머리 사람들이 저의 곁에 앉아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저는 그들에게 다가가 글자를 써서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 일본인은 원산과 부산으로 수출할 나무를 베고 있다고 대답했습니다.
일본인 배들이 최근에 가끔 오고가는 것이 관찰되는데 이것은 울릉도에서 상당한 이익을 보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이것은 결국 문제를 일으킬 것입니다. 통리기무아문에서는 왕에게 보고서를 보낼 필요가 있습니다. 이 산들은 몇 가지 이유로 벌채가 금지되어 있고, 몇가지 적절한 조치와 절차가 내려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 일본인은 우리 숲에서 우리의 동의나 허가도 없이 비밀리에 벌채를 하고 있습니다. 이 문서는 부산에 있는 일본의 당국의 외교부 관리에게 보내질 예정이었다. 바다 한 가운데 위치해 있는 섬을 무시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번역 계속: “섬이 전략적 위치로서 중요성과 방어제도로서의 상태는 어떤 것 보다 우선적으로 점검되어야 합니다. 저는 하루빨리 이규원을 수토사로 보내어 그 사건을 조사하도록 하여한다고 건의드립니다. …”
이 요청에 대하여 고종왕은 그에 동의한다.
한국의 영토 경계선과 독도의 급속한 와해
위 기록은 어떻게 독도의 가장 근접 섬이 외부에 노출된 이후 불법 일본인 도해자들로 넘쳐나게 되는지를 기술하고 있다. 幕府의 고립 정책이 끝나고 메이지 일본은 모든 방향으로 확장되었고, 조선의 울릉도와 독도는 일본의 새로운 서쪽 경계가 되었다.
오른쪽:1902년, 일본 경찰은 한국의 울릉도(오른쪽)에서 한국인들을 점차 몰아내는 불량한 일본인 체류자들 통제하기 위하여 주둔한다.
이 기록이 된 2년 후, 일본정부는 예의바르게 조선의 요구에 따라 불법일본인 체류자들, 벌채꾼들과 어부들을 울릉도에서 강제적으로 이주시키지만, 그러나, 단 20 년 후, 상황은 통제할 수 없게 변하여 일본인 경찰이 조선 정부의 허락도 없이 한국의 울릉도에 주둔하게 된다. 거기에서부터, 한국의 울릉도의 이들 불법일본인 어부들은 일본의 독도 편입의 도구가 된다.
[ 韓國之獨島 http://www.dokdo-takeshima.com/korea/2009/07/11/the-japanese-invasion-of-ulleungdo-ii/ ]
일본의 울릉도 침략 3
일본인 벌채꾼들은 조선의 울릉도 진출을 계속한다.
이미 설명하였다시피 일본인 민간인의 침범은 일본–한국 관계를 긴장시켰다. 이에 대응하여한국정부는 울릉도 섬의 공도 정책을 중단하기로 결정하고 사람들을 정착하게 한다. 1882년 4월 29일 한국 수토사 이규원(李奎遠)이 울릉도에 도착하고 그 상황을 조사하였다. 거기서 그는 많은 일본인들이 울릉도의 나무들을 베고 있음을 알았고, “마츠시마(松島)”라는 표시판을 보았다.
위 왼쪽: 울릉도–독도 지역 전체적인 지도는 일본과 한국육지의 가장 가까운 위치를 보여 준다. 위 오른쪽: 한국의 울릉도 지도.
조선의 기록에 나타난 일본인의 울릉도 불법벌채에 관한 번역
“통리기무아문(국방부)에서 나온 관리는 왕에게 다음과 같은 요청을 한다. “울릉도를 조사하는 동안, 이규원은 어떤 일본인들이 한쪽 모서리에 천막을 치고 “송도(松島)”라고 쓴 팻말을 붙이고 있음을 보았다. 그는 통리기무아문(국방부) 대신이 그것을 질책하는 공식서간을 보내야한다고 건의합니다. 저희들은 이미 편지를 보내어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 벌채를 금지하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러나, 수토사 이규원이 최근에 개인적으로 거기에 가서 점검해보니, 상황이 변화되지 않았다. 따라서 저희들은 또 다른 편지를 반복해서 보내서 무엇보다 그 문제를 강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제 편지가 공식문서로 이루어지기를 바랍니다. 여기에 대해서 왕은 그에 동의하였다.…..”
얼마 후,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불법벌채를 한다는 또 다른 청원이 전달되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7월 10일 통리기무아문 관리가 왕에게 말하기를 이규원의 울릉도 보고서에 관해서 전하께서 우리가 처리하도록 명령하였다. 우리는 공식문서를 일본에 보내어 일본인들이 울릉도에서 불법벌채를 금지하도록 요청하였다. 그러나 수토사가 조사하러 거기에 갔을 때, 아직 일본인들은 이전과 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다. 저는 이런 내용에 대해서 이전의 편지 내용을 강조하는 공식문서를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대제학(공식 문서당당)에게 이 문제를 건의해도 되겠습니까? ..?”
이에 대하여, 왕은 동의하셨다..”
여기서, 우리는 일본인들이 한 때 강한 정책으로 불법도해자들을 처리하였으나 대부분 무관심한 정도로 유연하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문서 국가로서 조선 정부는 이미 일본 외무성관리에게 항의서한을 보냈으나 소용이 없었다. 그것은 아시아의 다른 곳에서도 마찬가지로 이때에, 일본은 민간인이 이웃국가들에 침범하는 정책을 부추기기 시작하고, 체류자들 또는 불법거주자에 대해서 묵과하였다.
일본정부는 한국의 요구에 일시적으로 응한다.
50년 전 幕府의 고립정책 아래서 불법체류 일본인들은 울릉도를 떠나라는 약속을 지켜왔다. 그러나, 새로운 메이지 정부의 정책 아래서 일본정부의 이들에 대한 처벌은 매우 가벼운 것이었다. 그렇지만, 일본정부는 1883년 일본 배가 한국에 도착하자, 정중하게 한국의 요구에 응하고 이들 일본인 체류자들을 강제로 퇴거시켰다. 1883년 3월 1일–일본은 울릉도에 대한 도해 금지령 内達案을 내린다.
1883년 3월 1일–일본은 울릉도에 대한 도해 금지령
内達案
北緯三十七度三十分東経百三十度四十九分二位スル日本称松島一名竹島朝鮮称鬱陵島ノ儀ハ従前彼我政府ノ議定ノ儀モ有之日本人妄リニ渡航上陸不相成候條心得違ノ者無之様各地方長官に於テ諭達此旨及内達候也
明治十六年三月一日 太政大臣
번역: “…공식통지문
일본이 마츠시마(松島) 또는 다케시마라고 부르는 섬은 한국에서는 울릉도라고 부르며, 위도 37도 30분 그리고 경도 130도 49분에 있다. 이 섬에 대해서 일본과 한국은 문서로 합의하기를 일본인은 이유없이 이 땅과 섬에 항해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각 지방 정부 수장에게 통지하므로 거기에 대해서 혼동이 없기를 바란다.
3월 1일, 1883년 태정대신…”
메이지 초기 시대 일본인의 울릉도 활동 분석
1883년 3월 1일, 일본정부는 울릉도가 한국영토임을 확인하는 선언을 한다. 원본기록은 오른쪽에서 볼 수 있다.
1696년과 1837년 幕府가 이미 선언한 바와 달리, 독도는 언급되지 않았다. 이 기록은 또한 일본인의 항해가 일본본토 가까이에 해야 한다거나, 또는 외국배와의 접촉을 피해야한다는 내용이 없다. 따라서, 우리는 외국에 대한 일본의 태도가 어떻게 변화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한국의 요구에 응하는 것 같은 메이지 일본 제국은 교활하게 모든 4방으로 확장하고 있었다. 현실적으로, 일본정부의 울릉도 도해 금지령은 효력이 없었다. 기록에서 보여준 (링크) 바에 의하면, 1890년 후반, 많은 숫자의 일본인들이 울릉도에 도착하여 한국정부는 먼 울릉도 지역을 더 이상 통제할 수가 없었다. 이것은 일본의 1905년 독도 편입의 역사적 배경이 된다.
[ 韓國之獨島 http://www.dokdo-takeshima.com/korea/2009/07/11/the-japanese-invasion-of-ulleungdo-iii/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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