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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벨론 멸망의 애가
요한계시록 18장 9-20절
눈에 보인 권력은 독재자라도 무너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권력에 동화와 적응합니다. 가능하면 그 권력에 의해 피해보지 않고 수혜자가 되고자 합니다. 그러나 독재자가 망하면 모두 기뻐할 것입니다. 하지만 모든 기뻐한 것이 아니라 슬퍼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독재자 때문에 권력을 누리고 살았던 사람들은 이권이 없어지기 때문에 슬퍼합니다.
로마제국은 하룻밤 사이에 멸망을 당합니다. 로마제국의 멸망을 보고 세 집단이 통곡합니다. 로마와 매춘을 하며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던 땅의 왕들, 그동안 제국의 보호 아래서 치부했던 땅의 성인들, 그리고 해양산업 종사자들이 통곡합니다. 그 사이에 멸망하는 로마를 행해 불쑥 터져 나오는 탄식이 들려옵니다. 로마제국을 향한 애가(哀歌)입니다.
첫 번째 애곡 집단 : 땅의 왕들(9-10)
세상의 영화(榮華)는 아침 안개와 같습니다. 바벨론과 같이 부를 약속하는 세상의 경제적 기반이 신속히 무너지게 될 것을 알고 세속주의와 타협하지 말아야 합니다. 불의한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과 부를 태우는 자들이 영원히 행복할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탄식하게 하실 것입니다. 바벨론처럼 언제가 한순간에 무너질 것을 의지하지 말아야 합니다.
9그와 함께 음행하고 사치하던 땅의 왕들이 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위하여 울고 가슴을 치며 10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 견고한 성 바벨론이여 한 시간에 네 심판이 이르렀다 하리로다(9-10)
본문은 땅의 왕들은 로마제국과 거래(음행)하며 사치를 누려왔습니다. ‘사치’는 부요하면서도 교만한 사람들의 특징입니다. 이 단어의 다른 뜻은 ‘관능적(官能的)’입니다. 악의적인 탐욕을 부리는 행동입니다.
로마 지방 정부의 정치 지도자들은 신분과 지위를 유지하고 경제적인 유익을 얻기 위해서 로마의 제국적 체계를 지지하고 후원하였습니다. 에스라 4서는 명확하게 판단합니다. 아시아는 경제적 부도덕에 협력함으로써 ‘로마의 매력과 유혹에 공동 분깃’을 가지고 있었습니다(15:46-53). 경제 복지를 위해서 자기 영혼을 짐승에게 팔아버린 것입니다. 이들에게 로마는 크고 견고합니다. 그래서 추종하고 부역했습니다. 그런데 바벨론 제국과 같이 순식간(한 시간)에 멸망할 줄 몰랐습니다. 그들은 경제적 손실만 계산하고 애통해 합니다. 로마에 대한 애정은 추호도 없습니다. 이 왕들이 17:16에서 음녀를 멸망시킨 주역들인지도 모릅니다. 그간 혜택을 누려온 로마의 멸망을 거리를 두고 서서 두려워하며 통탄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들은 곤경을 당하는 자들과의 공감 능력은 전혀 없습니다. 자신에게 닥칠 물질적 빈곤만 생각하고, 자기들에게 닥칠 심판은 고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두 번째 애곡 집단Ⅰ : 땅의 상인들1(11-13)
자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부를 축적하고 사치하는 것이 죄가 아닌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과도한 치부와 사치를 정죄하십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과 우상 숭배는 뿌리가 같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탐심이 우상숭배라고 전하면서(골로새서 3:5)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부리가 된다고 교훈했습니다(디모데전서 6:9-10).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죄의식 없이 돈을 사랑하며 사치를 추구함으로 하나님 앞에 범죄를 일삼고 있습니다. 성도는 그러한 세상을 본받지 말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주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경건한 사람을 살아야 합니다.
11땅의 상인들이 그를 위하여 울고 애통하는 것은 다시 그들의 상품을 사는 자가 없음이라 12그 상품은 금과 은과 보석과 진주와 세마포와 자주 옷감과 비단과 붉은 옷감이요 각종 향목과 각종 상아 그릇이요 값진 나무와 구리와 철과 대리석으로 만든 각종 그릇이요 13계피와 향료와 향과 향유와 유향과 포도주와 감람유와 고운 밀가루와 밀이요 소와 양과 말과 수레와 종들과 사람의 영혼들이라다(11-13)
본문은 음녀 바벨론이 왜 망할 수밖에 없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 줍니다. 상인들도 슬퍼합니다. 그 이유는 더 이상 그들이 파는 상품을 살 사람이 없기 때문입니다. 상인들의 눈물은 오늘날 사람을 사람으로 여기지 않는 세상의 비인격성과 잔인함의 절정을 보여 줍니다.
(1) 상인들이 애통하는 이유(11)
땅의 상인들은 자신들의 주요 고객이 말했기 때문에 통곡합니다. 다시 판로를 개척하기엔 막막합니다. 인도주의적 공감력이 전혀 없습니다(15). 단지 자신들의 경제적 손실과 사회적 신분과 지위, 생활 수준을 유지하기 위한 기반만 생각합니다. 상거래의 파트너는 이용의 대상일 뿐 공감의 대상은 아닙니다. 몇몇 필사자들은 ‘그녀를 애곡하다’를 ‘자신들을 두고 애곡하다’로 바꾸기도 하였습니다. 정곡을 찌르는 실수입니다.
(2) 상인들의 거래 품목(12-13)
이제 로마와 거래했던 상품의 목록들이 총 열거됩니다. 총 스물여덟 가지인데, 4×7=28입니다. 로마의 세계적인 네트워크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가지 수들입니다. 이 물품은 극도의 사치품들입니다. 로마 수입물 중에 가장 비싸고, 사치와 향락을 위한 것들입니다(플리니 자연사 37:204). 여기에 로마 세계에서 가장 값비싼 자연 생산품 중 열세 가지나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우구스투스 이래로 수입이 증가하여 베스파시아누스 시대를 거쳐 계시록이 기록된 도미티아누스 시대에 절정에 이릅니다. 특히 아라비아, 동 아프리카, 인도의 동방 무역은 급증했습니다. 왜 부자들의 향연을 위해 로마 세계 전역에서 수입한 외래 식품은 빠져 있습니까? 14절에 불쑥 튀어나오는 탄식으로 그 몫은 남겨두었습니다. 요한의 비판이 당대 로마 도덕군자들의 비판과 다른 점이 있습니다. 이들은 고대 로마 귀족들의 근면하고 엄격하고 단순한 생활 스타일에 대한 향수가 있어서 상류층의 부패와 향락을 비판하면서도 로마제국의 권력과 풍요는 유지하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요한은 로마제국 자체를 신랄하고 철저하고 포괄적으로 비판합니다. 로마가 가진 사악한 근성을 폭로하고 비판합니다. 비판의 절정은 마지막 두 항목, 노예무역과 사람의 영혼 매매입니다. 로마는 부와 사치를 위해 세계를 정복하며 노략질했고 정복한 땅에서 세금을 수탈하여 부와 풍요를 누렸습니다. 또 노예와 부속민의 노동을 착취하였습니다. 로마의 사치와 풍요는 로마를 치장하는 복장과 보석에 잘 반영되어 있습니다(16). 로마가 음녀임을 독자에게 알려줍니다(17:4). 음녀의 옷은 경제 체제가 종교적 후광을 입고 있음을 상징적으로 표현합니다. 대제사장의 의복과 비슷합니다. 12-13절의 스물여덟 가지 목록과 비교할 때, 두로의 거래 목록(에스겔 27:12-24)에 포함되지 않은 열두 가지가 있습니다. 요한은 그중 세 가지 ‘세마포와 진주와 자주색 옷’을 언급합니다. 이것들은 칠십인역에서 대제사장의 의복 묘사에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곱게 단장하여 제사장 나라로 삼았습니다. 그런데 결국 이스라엘은 화려함을 믿고 창녀가 되어버렸습니다(에스겔 16:13) 로마제국도 대제사장의 의복을 입은 모습으로 등장합니다. 그런데 음녀의 짓을 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신부인 새 예루살렘도 동일하게 대제사장의 옷을 입고 등장합니다(21:2,10-23).
두 번째 애곡 집단Ⅱ : 땅의 상인들2(14-17a)
교만한 자들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도 자신을 구원하고 지킬 힘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렇게 교만한 마음을 품은 자들에게 재난이 닥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심판의 정도가 얼마나 심각하고 완전한지 사망과 슬픔과 굶주림이 한꺼번에 임하는 것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바벨론의 멸망으로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어떠한 거래도 불가능하게 되었습니다.
14바벨론아 네 영혼이 탐하던 과일이 네게서 떠났으며 맛있는 것들과 빛난 것들이 다 없어졌으니 사람들이 결코 이것들을 다시 보지 못하리로다 15바벨론으로 말미암아 치부한 이 상품의 상인들이 그의 고통을 무서워하여 멀리 서서 울고 애통하여 16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큰 성이여 세마포 옷과 자주 옷과 붉은 옷을 입고 금과 보석과 진주로 꾸민 것인데 17그러한 부가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 …(14-17a)
요한은 상인들의 애곡 중에 갑자기 터져 나오는 탄식의 소리를 끼워 넣습니다. 스물여덟 가지 목록 중에 노예와 인간의 영혼이란 간명하지만 음산한 언급으로 절정에 달합니다. 노예들은 그저 몸뚱이뿐입니다. 거기에다 더 많은 상품들이 부가되어서 긴 목록을 이루고 있습니다. 묵시록은 토를 달지 않고는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그들은 ‘사람의 영혼들’이라. 로마제국의 영혼이 탐하던 맛있고 빛난 과실입니다. 단어 ‘탐욕’(에피두미아스)은 십계명의 탐심과 창세기 3:6의 선악과를 반향 합니다. 인간을 소비재로 간주하고 탐욕을 부렸습니다. 첫 번째 도시를 세웠던 바벨탑 세대 이후에 가인의 길을 완성한 장본인이 로마제국입니다(요한일서 2:16; 요세푸스, 유대고대사 1:60). 로마제국의 사치는 수백만 노예를 희생시킨 결과입니다. 사치품들은 탐욕스러운 욕구를 채워주기 위해 중심부의 소수 특권층에게로 향합니다. 주변부는 엘리트들의 단순한 공급원일 뿐입니다. 소수 특혜를 누리는 사람들이 부유하고 호사스런 생활을 도에 지나치게 추구합니다. 그 결과 나머지 인간은 숨겨진 대가를 지불해야 합니다.
요한은 왜 제국의 부역자들을 악하게 보았습니까? 그들은 로마의 경제적 착취로부터 유익과 혜택을 얻던 자들입니다. 신자는 주변 사회와 무엇을 공유해야 할지, 무엇에 공감해야 할지, 누구와 연대할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바벨론의 멸망에 통곡하는 자들과 같은 부류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서머나의 니골라 당과 두아디라의 이세벨의 교훈에 빠진 자들에 대한 경고입니다. 요지는 ‘타협하지 말라’, ‘부역하지 말라가 아니라’, ‘도리어 비판하라’, ‘즐거워하라’입니다(20). 독자들 중에 제국에 부역하면서 호의호식하거나, 아니면 조금이라도 바벨론에 대한 연민의 정을 느끼는 자들이 있을 수 있습니다. 자신들이 있는 자리가 어디인지를 알고, 결단하라는 요청이자 경고입니다.
세 번째 애곡 집단 : 뱃사람들의 애통(17-19)
돈은 중요하지만, 결코 섬김의 대상이 될 수 없고, 인생의 기준이 될 수 없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랑가면서 믿고 의지하면서 살았던 사람이 급작스럽게 한 순간에 몰락하면 충격과 공포와 허탈감에 사로잡힙니다. 어제 부러움의 대상이 오늘 두려움의 대상이 된 것입니다. 선장과 선객과 선원들도 더 이상 장사를 해서 부자가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슬퍼합니다.
17… 모든 선장과 각처를 다니는 선객들과 선원들과 바다에서 일하는 자들이 멀리 서서 18그가 불타는 연기를 보고 외쳐 이르되 이 큰 성과 같은 성이 어디 있느냐 하며 19티끌을 자기 머리에 뿌리고 울며 애통하여 외쳐 이르되 화 있도다 화 있도다 이 큰 성이여 바다에서 배 부리는 모든 자들이 너의 보배로운 상품으로 치부하였더니 한 시간에 망하였도다(17b-19)
뱃사람들의 애통은 땅의 왕들이나 상인들과 별반 다를 바 없으며, 머리에 티끌을 뿌리는 애곡의 표현만 추가하고 있을 뿐입니다. 그 애통은 로마제국을 향한 연민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한 통곡입니다. 로마는 해양강국입니다. 그동안 로마제국의 경제적 번영 때문에 치부하였는데, 이제는 다 끝났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즐거움(20)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의 가치와 문화에 끝까지 저항하며. 하나님 없는 성공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곤경을 선택하고 숱한 위협 속에서도 하나님만은 잃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또 온갖 시련 속에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주권적인 손길을 믿고 의지하며 말씀을 청종하는 삶에 따르는 고난과 소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해 신원하실 것입니다.
20하늘과 성도들과 사도들과 선지자들아, 그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라 하나님이 너희를 위하여 그에게 심판을 행하셨음이라 하더라(20)
예레미야 51:48-49의 인유입니다. 우상숭배에 부역한 자들의 절망은 성도들의 환희로 나아가게 하는 관문입니다. 로마제국에 저항하여 온 하늘과 성도와 사도와 선지자들은 핍박을 받아왔습니다. 순교를 당한 성도들의 기도(6:9-10)에 대한 응답이 바벨론 멸망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입니다. 이들은 제국의 피해자들입니다. 진상규명과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 없는 용서나 연민의 요구는 피해자에 대한 모욕이고 또 다른 폭력입니다. 값싼 동정심으로는 누구도 포용하거나 치유할 수 없습니다. 성도들은 오히려 즐거워해야 합니다. 의로운 심판은 하나님의 정의를 나타냅니다. 당한 대로 갚아주는 탈리오 원칙은 성경의 원리입니다(신명기 19:19-21). 순교를 당한 성도들의 옳음이 입증되어야 합니다. 약자의 인권에 대한 관심이 정의의 근본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은 사악한 자들의 심판을 통해 명예가 변호됩니다.
20b절은 ‘바벨론이 성도를 법정에서 고발한 죄목을 그대로 적용하여 하나님은 바벨론을 심판했는데, 이는 성도가 옳다고 입증하기 위함이다’로 읽을 필요가 있습니다. 이것이 다섯째 인 심판에서 성도들이 탄원한 기도의 핵심입니다.
바벨론은 크고 강한 성처럼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으로 바벨론은 한순간에 무너져 내렸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사는 세상의 권세도 순식간에 사라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성도로 부르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바벨론의 삶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선택하는 참다운 지혜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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