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 늦가을 경주 보문호수의 이른 아침, 뿌연 안개가 걷히면서 푸른 하늘이 보이기 시작한다. 경주시내에서 약 10km떨어진 곳에 위치하는 '보문호'는 인공호수인데, 종합 관광휴양지인 '보문관광단지'의 중심으로 호숫가 주변에 숙박을 포함한 즐길거리가 포진해 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안개가 걷히고 푸른 하늘이 드러나는 모습을 호텔방에서 시간의 흐름에 따라 촬영했다.
위 사진이 아래 사진으로 변했다. 이렇게 빨리 변하다니 사람처럼 하늘도 변덕스럽다. 위의 사진과 아래 사진의 jpg 정보를 확인해 보았는 바, 1시간 정도 차이가 난다.
경주 보문호숫가에는 여러 호텔들이 포진해 있는데, 우리는 지인으로부터 추천받은 라한셀렉트라는 곳에 자리를 잡았다. 라이브러리 북카페가 1층에 자리하고 있어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적격이었다.
아침을 먹은 후 호숫가의 산책로를 따라 걸었다. 이미 하늘은 구름이 사라졌다.
반대쪽을 바라보고 찍은 사진이다. 다른 시기의 사진같지만 거의 동일한 시간대의 역광이다. 하늘에 구름도 있다. 그때는 몰랐는데, 여행기를 올리면서 다시 사진을 들여다보니 참 다르다. 앞뒤인데 이렇게 다르다니, 관점이나 시각에 따라 우리는 얼마나 다르게 해석하고 오해를 하고 살까 생각해 본다.
반대쪽은 하늘에 구름들도 몽실몽실하니 푸른색이 없고 하얀색이다.
다시 파란색 하늘 배경인 곳에 왔다. 11월이라 약간 쓸쓸한 기운이 있지만, 좀 외롭고 쓸쓸하면 깔끔하고 상쾌한 느낌이 들기도 한다.
호숫가 저쪽으로 하얀 건물이 라한셀렉트이다. 오늘 일정 준비를 위해 다시 걸어 돌아간다. 고향이 있으면 다시 돌아갈 곳이 있다고들 한다. 현대 철학에 따르면, 인간은 부유한다. 어디에도 중심이 될 만한 보편적 진리는 없다. 현대인이 고향이 있는가. 예로 서울의 중구가 고향이면, 중구로 가면 고향의 맛을 느낄 수 있는가. 재개발로 옛 모습은 찾아볼 수도 었는 서울 시내에서 고향으로 돌아간다는 개념이 성립하는가. 그래서 현대인은 이리저리 부유하면서 그때그때의 치열한 삶을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실존주의다.
경주 보문단지 내에 위치하는 우양미술관에 도착했다. 아래 사진 오른쪽에 주황, 빨강, 파랑 색색의 비즈가 출렁거리고 곳이 입구인 바, 아티스트 최성임 작 <끝없는 나무>(2021)이다. "작품을 조심히 헤쳐서 진입하시길 바랍니다"라는 안내문이 있다. 미술관 앞의 큰 나무처럼 그림자를 만들고, 바람에 흔들리며 안과 밖을 잇는 문의 역할을 한다고 쓰여 있다. 망사 안에 탁구공이 줄줄이 엮어져 있다.
최성임 작 <끝없는 나무>(2021)
건물 앞에 존 헨리 작 <태양의 춤> 조각이 설치되어 있다. 1991년작인데, 우양미술관 개관이 1991년이므로 개관 기념 작품으로 판단된다. 우양미술관은 1991년 '선재미술관'으로 개관하여 1998년 '아트선재미술관'으로 명칭을 바꾸고, 2013년 '우양미술관'으로 다시 명칭 변경했다.
John R. Henry <Dance of the Sun>(1991)
1층에서는 <네거티브 스페이스 Space in Perspective> 주제로 3명의 아티스트의 조각, 설치, 미디어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네거티브 스페이스(negative space)는 사진, 건축, 조각, 회화 장르에서 오브제(objet)가 차지하는 이외의 공간을 말한다. 관찰자의 시점에 의해 지각되는 상대적이고 불확정적인 공간이다. 관람자의 능동적인 의식의 확장이 요구되는 점이다^^
엄익훈 작가의 금속 조각이다. 조각 그 자체만 보면 추상 조각이다. 그런데 그림자를 보면 달라진다. 그림자는 고대 그리스 조각 '사모트라케의 니케'가 보인다.
프랑스 루브르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사모트라케의 니케> 조각상이다.
(c) museoteca
조각만을 보면 구상적이지 않은 추상 조각인데, 그림자는 구상이다. 그림자 공간은 개인의 기억, 경험, 추억을 불러일으키며 내러티브를 그려낸다고 설명되어 있다. 기억은 <사모트라케의 니케>인데, 현실은 고철덩어리이다. 기억은 과거의 사실이 아니다^^
사진이 너무 어둡고 찌글거리게 나와 흑백으로 바꾸었다. 그럼에도 본 사이트에 올리게 된 것은 본 조각은 고철덩어리에 불과한데 그림자는 아름다운 남녀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현실은 우울하지만, 그림자 속은 행복한 모습이다. 매트릭스가 생각났다. 비참한 현실을 사느니, 몸은 기계속에 갇혀 있고 가상으로 살아가는 것이 낳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림자만 보는 것이 더 낳다. 현실의 추상 조각은 아름답지 않기 때문이다.
유령(그림자)을 붙잡고 사는 것이 마음 편하지 않을까도 생각해 보지만, 그림자인지 알면 어차피 맘 편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림자인지조차 모른다면 편할 수도 있겠다^^
2번째 작가는 애나한이다. 페인트, LED, 라이트 등의 재료를 사용하여 공간을 구획하고 평면적 요소를 표현했다.
동시대 예술을 이해하는 것이 가장 어렵다. 거기에다가 현대 예술은 구상이 아니라 추상이다. 추상은 이성적이 아닌 감각적으로 미학적 측면에서 들여다 보는 것이 오히려 편하다. 어디서부터가 작품인지, 벽과 공간과 그것을 가르는 커튼이 공간에 널려 있다. 관람객은 이 모든 것을 함께 감각적으로 느끼면 된다.
현대 예술의 특징 중 하나는 설치 예술은 사진으로밖에 남지 않는다는 것이다. 본 작품처럼 벽도 작품의 일부이고, 전시관의 구조 자체가 작품의 일부인데 어떻게 남길 수 있겠는가. 세잔이나 다빈치의 그림처럼 옥션에서 팔 수도 없다^^
다시 전시 타이틀로 돌아가보자. 네거티브 스페이스. 오브제 이외의 공간을 말한다. 그 공간들을 이어주는 벽을 포함한 모든 배경이 조형 요소로서 작품의 일부이다.
3번째는 강은혜 작가이다. 공간에 겹겹이 중첩되어 있는 무수한 선들로 네거티브 스페이스를 표현했다. 일반 회화는 보는 시각이 일정하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그림은 그냥 정면에서 보면 된다. 그러나 이러한 현대 예술은 관람자의 다각적인 시점이 요구된다. 모든 개인은 개별적인 시점으로 바라볼 것이다. 그래서 작품은 개개인 시점에 따라 다르게 감상된다.
전시관 2층에서 진행하는 <감각의 숲>이다. 코로나로 장기적인 비대면 거리두기로 외부세계를 인지하는 감각 수단이 제한되고 있다. 이에 극도로 제한된 인간의 감각에 대한 회복을 위한 전시로 꾸며졌다.
일단 식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것만으로 우리의 마음이 편해진다. 다만 벽이 없는 야외 공간에서의 식물이 아닌, 사방이 막힌 제한된 공간에 갇혀 있는 식물이라는 점에서 펜데믹 상황이 느껴진다.
'잡초 화분'을 만들어 존재의 가치에 대해 고찰했다. '잡초'라는 것은 인간이 규정한 개념이다. 식물 스스로는 자신이 잡초인지 천연기념물인지 모른다. 스스로 싹틔운 생명이 인간에 의해 가치가 매겨지는 상황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새로운 관점을 경험했다. 인간이 보호하는 동물들, 식물들, 그리고 인간들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 보게 된 시간이었다.
김원정 작 <잡초 그 '의미없음'에 대하여>(2016) 42분 싱글 채널 비디오, 야생화분, 유리창, 벽돌
인간 감각의 회복이라는 주제로 본 전시가 열리고 있는데, 감각이 회복되기 위해 자연으로부터 얼마나 많은 수혜를 받고 있는지 다시 한번 재고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