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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적 품격을 지닌 철학적 사유
---김정원의 시세계
김병호(시인, 협성대 문창과 교수)
김정원 시인은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갖추고 있는 시인이다. 일반적으로 스타일이라는 것은 관습적인 방식이나 감각으로는 전달할 수 없는 특별한 메시지나 정서를 보다 효과적으로 독자에게 전달하기 위한 표현의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다른 이와는 다른, 보편적 방식과 타협하고 싶지 않은, 특별한 무엇을 말하기 위한 전략이며, 실제로도 스타일리스트들은 독특하고 고유한 어법을 구축한다. 표준과 관습의 논리로 굴러가는 세계에서 시인은 늘 ‘다른’ 목소리를 구성해낼 스타일을 고안함으로써 이 사회가 놓쳐버린 것들을 다시금 간곡하게 전하려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의 개성적 목소리를 창조하는 행위, 자신만의 고유한 스타일을 갖춘다는 것은 이 세계와 사회에 대한 질문을 제기하는 것이 된다.
김정원 시인은 첫시집 『꽃은 바람에 흔들리며 핀다』에서부터 최근 시집 『아득한 집』에 이르기까지, 자연의 섭리와 생명의 소중함에 집중하는 동시에 가족과 이웃에 대한 원초적 순정과 연민을 놓치지 않고 고밀도의 순도로 유지해온 시인이다. 연민에서 연대로 나아가는 순수함과 진정성이 그의 시를 찾아읽는 많은 이들에게 깊은 성찰의 계기를 제공하고 또다른 깊이의 감동으로 이끈다. 오늘 이 자리에서 함께 읽는 그의 작품 역시 이러한 맥락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시적 대상에 대한 섬세한 관찰과 깊은 사유를 통해 얻어낸 삶의 가치, 깨달음을 자신만의 고유한 육성으로 옮겨내는 데 능한 시인이다.
김정원 시인처럼 강고하게 자신의 스타일을 유지하는 것은, 자신이 속해 있는 세계와 적당히 타협할 수 없는 이방인의 목소리를 통해, 자신의 시적 의의를 지켜내려는 의지의 견고한 표명이다. 스스로 삶과 사회의 가장자리를 고수하면서, 더욱 극단적으로 우리가 잊었던 가치의 중심을 추구하는 자세와 태도가 바로 그의 시가 된다. 이 지점이 우리가 김정원의 시에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지난해 가을
텃밭에 모종한
배추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기 위해서
험상한 꼴로 땅을 기는
애벌레의 시간처럼
모질고 긴 겨울에도
주저앉지 않은
그 배추는
기어이 봄에 이르러
한 폭의 배추를 넘어
여러 송이의 꽃을 피운다
다가올 세상에
치열한 사상의
씨앗을 맺으려고
「철인」 전문
니체의 명구를 가져다 시작하는 시에서 우리는 그가 추구하는 삶의 가치를 목격할 수 있다. 화자는 가을에 모종한 배추가 겨울을 이겨내고 봄에 싱싱한 배추꽃을 피워내는 풍경 속에서 “치열한 사상의 씨앗”을 발견한다. 신이 죽었기 때문에 우리에겐 철인이 필요하다고 했던 니체의 핵심 화두는 ‘나다운 존재가 되는 것’(becoming oneself)이다. 니체는 인간의 삶이란 필연적으로 고통스러운 것이기에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행복이란 아무 걱정도 근심도 없는 상태가 아니라 자신 앞에 주어진 어려움과 시련을 헤쳐 나갈 때 자신이 고양되고 강화되었다는 느낌이라고 설파했다. 그러니까 니체가 생각하는 행복한 인간은, 고통이나 어려움을 흔쾌히 받아들이며 그런 삶 자체를 사랑하는 사람이다. 니체는 “시련을 극복해나가는 자기 자신을 존경하라”라고 외치기도 했다. 이런 마음을 가지고 사는 사람은 그 자체로 아름답고 고귀하다고 여겼다. 김정원 시인도 니체와 다르지 않다.
위 작품에서 겨울을 버티고 꽃을 피우는 배추는 “험상한 꼴로 땅을 기는/ 애벌레의 시간”을 버텨야 하늘을 날 수 있는 나비와 동일한 맥락에 놓여있다. 자신이 감내해야 하거나 지금껏 감내해온 어려운 삶의 의미를 곰곰이 생각하게 만들어준다. ‘배추’와 ‘나비’와 ‘철인’은 시대와 사회, 삶과 타협하지 않고 자신에게 주어진 ‘겨울’과 ‘애벌레’의 시간을 감당해야 가까스로 얻어지는 가치이자 이상이다. “치열한 사상의 씨앗”을 맺을 수 있는 가치의 그 지난한 과정을 시인은 ‘기어이’라는 시어 하나로 압축한다.
김정원 시인은 단단한 현실의 문법과 그 문법이 다 말해주지 못한 삶의 진실을, 번득이는 위트로 헤쳐서 보여주는, 특출한 관찰자의 안목의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시에서 보여지는 추상과 이념은 궁극적으로 삶과 욕망이 결여된 생의 문제에서 비롯된다. 세계와 현실을 엄정하게 바라보지 못하고 객관적으로 재현하지 못하는 시인은 스스로 전형성의 늪에 갇히고 만다. 하지만 김정원 시인은 배추꽃을 통해 근원적인 삶의 결을 그려낸다. 요즘 읽히는 일군의 시들이 자기 경험과 존재의 이유를 인과론적 맥락 위에서 인위적으로 작동시킨다면, 김정원의 시편들은 인간적인 느낌에 대한 자각에서 시작한다. 그는 자기만의 방식으로 시적 대상을 명명하고, 서정시의 새로운 현실을 모색한다. 현실에 고정된 문법과 시선에서 벗어나 자신의 고유한 시선과 치밀한 사고를 바탕으로 자신만의 특별한 스타일을 추구하려고 노력한다는 의미이다.
그래서 그가 이야기하는 ‘나비’와 ‘배추’는 텍스트 안에 있지만, 이미 현실의 문법에서 벗어나 있다. 나비와 배추는, 사물을 의미화하고 지배하는 재현의 수준에서 벗어나 김정원 시인만의 개별성의 원리와 감성으로 재구성되어 ‘철인’이 된다. 궁극적으로 그가 그려내는 시적 세계는, 그가 자연에서 선택하여 인식한 부분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시는 현실의 문법이 지배하는 세계를 거부하고 자연과의 관계를 매우 중층적이고 개성적인 방식으로 탐색한다. 마치 “나를 죽이지 않는 것은 나를 더욱 강하게 만든다”의 니체의 명구처럼, 치열하고 뜨거운 시 의식의 비등점에서 시의 언어를 창조하며, 언어와 지식의 맨바탕을 동시에 보여준다.
그는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살고 싶다
그러나,
야무진 바람의 가지와 뿌리가 무참히 잘려 나가고
사람이 원하는 수형으로 사육되는
소사나무
노예 발목에 채운 차꼬 같은 화분 밖에서
비바람 맞으며 자기 뜻대로 사는 나무들이 보기에
아름답기보다는 괴로운 기형이다
나 자신이 바라는 내가 되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내가 된 꼭두각시 인생처럼
밑동이 굽은
후회가 굵다
「분재」 전문
작품 「분재」 역시 김정원 시인이 추구하는 삶의 가치가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보여준다. 분재(盆栽)란 한자를 풀어보면, '그릇 안에 묘목을 담는 것' 또는 '화분에서 재배하는 것'의 의미를 갖는다. 하지만 실제로는 식물이 환경에 맞춰 성장하는 성향을 극단적으로 이용해서, 인공적으로 성장을 조종하여 원래 그 식물이 지닌 특징과 정취를 축소시켜 가꾸는 것이 분재다.
시인은 제가 타고난 성향이나 본능을 거세당하고 감상자가 바라는 “수형으로 사육되는” 소사나무 분재를 “괴로운 기형”으로 정의한다.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비교적 직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다른 사람들이 원하는 내가 된 꼭두각시 인생” 말고 “자신이 바라는 삶을 살고 싶다”고 외친다.
시인은 화분의 소사나무를 바라보고 있다. 필자는 개인적으로 소사나무라고 하면 십여 년 전 강화도에 갔다가 마니산 참성단에서 본 우람한 소사나무가 가장 먼저 떠오른다. 밑동이 3미터 남짓되던 그 나무가 만화의 한 장면처럼 작아져, 화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모습이 좀처럼 그려지지 않는다.
분재는 작고 얕은 화분을 척박한 흙으로 채우고, 바람과 햇빛이 잘 드는 곳에 두어 생장을 억제한다. 게다가 특정한 모양을 유지하려고 가지를 치고, 오래된 뿌리를 잘라내거나 접붙이기를 하는 등 다양한 방식의 폭력을 행사한다. 그래서 강화도 마니산의 소사나무나 시인의 화분에 있는 소사나무는 잎이나 줄기를 구성하는 세포는 똑같은 크기이지만, 결코 같다고 할 수가 없다.
시인은 화분에 갇힌 소사나무를 통해 인간의 삶을 되돌아본다. 이때 김정원 시인에게 시는 생의 진실한 표현이자 우리 삶의 표지가 된다. 이러한 시적 사유를 위해 시인은 수많은 탐욕과 세속적인 포즈를 내던지고, 현대사회 자본주의의 비판적 극복을 위해 생태적 자연관을 가져온다. 자연을 닮아가는 겸손한 삶에 대한 응시를 시행에 담는다. 이는 대량 생산과 속도가 지배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상식을 거부하는 특별한 역설이며 의지이다. 그래서 “밑동이 굽은/ 후회가 굵다”는 화자의 탄식은 독자에게 오랜 여운을 남긴다.
사람이 반드시 경험해야 할 근원
두 가지를 아세요?
스님, 신부님,
결혼하세요
얼른 결혼해서
낯설고 다른 둘이 살아보세요
그런 둘이 지지고 볶고 살면서
아이를 낳아 길러보면
삶이 무엇인지
죽음이 무엇인지
굳이 참선하지 않아도
애써 고행하지 않아도
절로 성당으로 깨달음이
날마다 달려올 것이고
우리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지구가 왜 끊이지 않고 돌아가는가
경전에도 없는 길이
백주 대로처럼 환하게 손짓할 거외다
「득도하려면」 전문
시에 담긴 사유가 깊고 심각하다고 해서 그 시가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시에 담긴 사유가 가벼운 경우, 그 시가 특별한 가치를 부여받기는 어렵다. 시는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바를 은유하고 이미지화하면서 행간에 자신의 사유를 담아야 하기 때문이다. 화자는 득도를 하려면 결혼을 하라고 말한다. 스님이든 신부님이든 “결혼해서/ 낯설고 다른 둘이 살아보”면, 둘이서 “지지고 볶고 살면서/ 아이를 낳아 길러보면”, 스스로 득도하게 된다고 설파한다. 이 결혼 생활 안에 참선과 고행이 있고, 존재에 대한 철학과 깨달음이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결혼은 어느 종교의 경전에도없는 ‘대주대로’라고 한다.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삶이란, 영혼을 팔아치우는 과정이고 마음의 대지를 강탈당하는 시간이다. 우리는 그런 방식으로 계속 살아가도록 강요당하고 고귀한 생명은 황무지로 내몰린다. 시인의 세속적 세계에서 종교에 입문하였다 하더라도 인간과 삶의 오묘한 진리를 깨치기는 쉽지 않을 것이라며, 오히려 결혼을 통한 득도의 방법을 소개한다. 그는 결혼을 삶의 근원으로 상정하고, 이 안에서 밀착하여 삶을 본질을 탐색하고 삶과 죽음을 성찰하며, 우리가 묵인하고 있는 의미를 통로를 밝히려 한다.
시인은 결혼의 스펙터클한 고난함이 종교적 구도(求道)와 수행에 비해 절대 가볍지 않음을 항변한다. 종교의 거대한 추상의 늪과는 대조적으로, 결혼이라는 구체적이고 생생한 삶의 질감과 인식을 건져 올리는 시인의 시적 감수성이 오히려 쾌활하고 직설적이며 신선하다. 결혼 생활과 득도를 묶어내는 시적 논리는 무리가 없는 듯하지만, 이 감각과 즐거움이 어디에서 발생하는 것인지는 더듬어볼 필요가 있다. 이는 획일적이고 몰개성적인 인식 논리에서 벗어나 사물과 대상에 대한 철저한 응시와 표현의 쇄신력이 아닐까.
김정원 시인은 현대 시인들이 탐닉하고 있는 지적 사변주의에서 벗어나, 상투적 담론에 편승하지 않는, 상투적이고 상식적인 것에 대한 전복성을 가지고 있다. 결혼을 할 수 없는 수행자인 ‘스님’과 ‘신부님’을 등장시켜, 득도를 이야기하는 이러한 도발성은 현실의 문법에 대한 치열한 인식을 건네주며, 습관적인 지식의 공리에 길들여져 있는 우리를 깨친다. 김정원 시의 재미가 최고조에 이르는 지점이기도 하다.
더불어 좋은 시인은 독자의 해석을 그저 유도하는 시인이다. 독자에게 자신이 의도한 시의 메시지나 주제를 하나의 퍼즐처럼 풀면서, 자신이 구축한 세계를 함께 바라보는 일치된 시선을 요구하진 않는다. 독자만의 고유한 해석의 여지를 만들어주고 그것을 인정할 공백 또한 전제되어야 비로소 시의 숨통과 교감의 통로가 마련되기 때문이다. 김정원 시인은 이 부분도 명확히 간파하고 있다.
맑고 파란 하늘로
무성히 거슬러 오르던
힘찬 연어 떼
머나먼 고향 땅에 닿아
후끈한 몸으로 산란하고
울긋불긋 달군 삶을 식히며
자기 할 일 다 마치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홀가분한 목숨들
영혼을 맡긴 하늘에 사선으로 난,
다시 못 올 바람 쌀쌀한 계단을
깐닥깐닥 내려온다
「단풍잎」 전문
시인은 울긋불긋 물든 단풍잎을 보며, 모천으로 회귀하는 연어를 연상한다. 시인은 무심코 스쳐온 사건이나 사물, 아주 세세한 일상의 정경들을 대단히 낯설고 미세하게 보여주는 독특한 재능을 가지고 있다. 시인은 시적 대상을 사물이란 관념에 얽어매두지 않고, 끊임없이 그것에 발언의 주권을 부여하고, 사물을 고정된 의미로서 정복하는 언어의 폭력, 견고하게 고착된 모든 문명의 상징들을 해체하려고 노력한다. 이러한 작은 정경을 통해 우리는 문득 이 세계에서 움직이고 살아나는, 잊혀진 배경들을 보게 된다.
“후끈한 몸으로 산란하고/ 울긋불긋 달군 삶”을 살았던 잎을, 자신의 소임을 마치고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홀가분한 목숨들”로 읽어내는 시인의 시선에는 사물과 일상의 작은 삶을 세밀하게 되새기는 깊은 시적 통찰력이 깃들어 있다. 그는 세계를 향해 성큼 다가서서 그 속의 존재를 들여다보는 것이 아니라 존재 혹은 사물의 내면에서 세계의 이미지를 건져 올린다. 어떤 방식으로도 거절할 수 없는 무력한 상황에서 시인은 “하늘에 사선으로 난” 계단을 “깐닥깐닥 내려온다”고 표현한다. 김정원의 시가 얼마나 담담하고 예리한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인간이란 존재와 세계에 대한 물음을 전제로 하고 있는 이 시는, 불가항력적인 생에 대한 인식과 함께 이 세계에서 말소되고 삭제되는 순리에 대한 순응도 보여준다. 존재와 소멸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인정하고, 또다시 떠나야만 하는 것들에서 오는 슬픈 느낌을 ‘홀가분’한 것으로 만들어내는 능력은 그만의 것이다. 이런 표현과 시적 자세가 김정원 시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시적 정서를 더욱 효과적으로 대변해준다.
오늘 김정원 시인이 보여준 시적 건강성, 영혼의 진실과 철학적 자세는 경박한 말부림이 번져있는 요즘의 우리 시단에서 가장 절박하게 요구하는 덕목이다. 그는 서정적 품격을 지닌 철학적인 언어를 통해 삶의 진정성을 다시 각인시켜 준다. 그의 시에는 인간의 본성과 따스함, 시에 대한 초심을 잃지 않고자 하는 시인으로서의 갈망, 영원한 시적 화두일 수밖에 없는 인간, 자연, 생명 등을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 하는 문제의식이 깃들어 있다.
우리는 그동안 건강하고 당찬 시정신의 상실을 자주 목도해 왔다. 그것이 새삼스런 일이 되지도 못한다. 하지만 김정원의 시를 읽다 보면 “삶은 언어의 총화”라는 구태의연한 말의 힘과 가치를 동시에 느끼게 된다. 그의 시는 현실의 완강함과 문학에 대한 현대의 물화된 인식을, 예리하고 우회적으로 비판한다. 그의 시는 문학에 대한 해묵은 사랑, 비루한 삶 속에서도 지워지지 않는 생의 흔적을 한없이 소중히 여기는 마음 곳곳의 풍경을 내보여준다. 그리하여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자본주의적 삶을 돌이켜볼 수 있는 반성의 계기와 인식의 충격을 우리에게 선사한다.
특히 그의 시에는, 시인으로서 감당해야 하는 존재의 버거움과 삶을 벗어던질 수 없는 자의 자기모순적 소망, 혹은 그 모순적 삶을 철저히 살아가고 있는 존재의 목소리가 커다란 여운으로 작동하고 있다. 김정원 시인은 그의 시를 읽는 독자로 하여금, 진정으로 존귀한 인간의 삶이 무엇인지 진지하게 고민하게 만드는 아주 특별한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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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호
약 력 200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달 안을 걷다』 『밤새 이상을 읽다』 『백핸드 발리』가 있음.
현재 협성대 문예창작학과 교수,
첫댓글 김병화 시인님, 평론을 알차게 해 주셔서 고맙습니다
반경환 주간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