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한조 외 4편
허이서
전설새 호한조는
몸에 털이 없는 벌거숭이여서
밤마다 옹송그려 덜덜 떨며 운다고 한다
지극히 가난한 나도
생각을 오래 붙들고 있을 수 없어
털이 없는 벌거숭이가 되기도 한다
처음엔 새벽을 깨워
간절을 뜨겁게 끓여보고
가능성을 향해 셀 수 없는 집중을 쏘아댔다
형태도 없고 그려낼 수도 없는 간절은
도무지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웠으므로
자꾸만 빗나가는 형용사로 남았다
99도 이하에서 끓다가 식어버리는 생각을
더 펄펄 끓여 익혀보려 했지만
미치거나 못 미치거나 설겅거리기만 했다
나는 비굴과 요령을 공부하기 시작했다
펄펄 끓인 열망으로
실패하면 생각을 지피고
또 실패하면 의지를 세워
밤마다 시간을 풀어냈지만
진전은 없고 실패로 감겨들 뿐이었다
임계점을 넘어선 물은 펄펄 끓는다
끓어오른 후 수증기가 되어 날아가기도 한다
전설새 호한조는 어디로 날아간 걸까
나 또한 그렇게 되고 싶었다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것처럼
꽃그늘
허이서
동창회에 가면 입들은 행복이 넘친다
돈 자랑, 집 자랑, 차 자랑, 자식 자랑, 남편 자랑
자랑들 식당 안에 뜨겁게 둥둥 떠다닌다
잉꼬부부 자칭하는 누군가 나서 우쭐대며 말한다
끼리끼리 만나 팔자대로 사는 거라고
자랑할 거 없어 구석쯤에 앉아 물만 마시던 나도
없는 자랑거리 만들어 더 큰소리로 합세하자
시끌벅적 자랑들로 둥둥 식당이 떠내려간다
늦은 밤 동창회 마치고 돌아오는 길
세상 하나뿐인 모양과 빛깔로
험한 골짜기 어렵사리 핀 나만의 꽃이
시들시들하더니 이내 꽃잎을 닫는다
그들의 입이 함빡 피어 올린 꽃그늘 아래서
성호를 긋다
허이서
어긋난 방향으로 흘러왔을 땐
늘 그러하듯 十字 였다
다시 구름을 허공에 풀어놓으며
못 박힌 것들의 통증을 배회하였다
돌 속의 심장
허이서
대전시 동춘당로 거리 끝에 서 있는
오래된 바위
나를 자꾸 끌어당긴다
아슴한 파장에 이끌려 앞에 서면
나 또한 돌의 세계
그 후부터 잡다한 생각이 넘치면 그에게로 가
나를 풀어놓곤 했다
몸속에 아무리 많은 하소연이 쌓여도
내색하지 않던 돌
비바람 치던 밤 추적추적 울음소리를 따라갔다
단단한 돌 속에 미세한 점 들로 찍힌
수백 년 전의 어느 시간이 꿈틀꿈틀 살아
천년 후 그의 몸 안에서 박동하는 것 같았다
아직 귀를 열지 못했는가, 나는
먹먹하기만 한 파장들
빗소리가 대신 소리쳐 울어주는 것처럼 들렸다
푸른 첼로의 족보를 펼치다
허이서
나는 먹구름에서 음악을 듣는 사람
음표들이 쏟아지며 물보라 피어난다
나는 수면 위에서 첼로를 펼치는 사람
파란이 들려주는 어느 먼 부족의 여인
날카로운 발톱 세워 첼로를 잡는다
한 음 한 음 내력을 전해 듣는다
선율이 이렇게 비린 걸 보니
살육의 피가 튀어 있었나 보다
어쩌면 첼로의 파란 음계들은
멍 자욱인지도 몰라
이긴 자의 무서운 서슬에 눌린 비명
외마디 비탄으로 봉인되었던 푸른 묵음
여른 귀 커다랗게 열고 수면 위를 떠도는 새는
누구의 상처를 듣는 걸까
먹구름을 첼로로 연주하며
부유하는 멍의 족보를 넘기는 오후
나는 물결 위에서 첼로를 듣는다
차르르 푸른 음계들이 출렁인다
약 력 : 충북 옥천 출생
2022년 애지 가을호 신인문학상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