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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의 배(빌 길버트) 21
이 표창장에는 배의 선원 명단과 그들의 직책이 적혀 있는 다음과 같은 메모가 첨부되어 있다: "이 용맹한 배 부대 표창장은 아래에 적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 선원 전부에게 수여한다." 이 메모에는 사관과 전 선원들의 이름과 직책을 아래와 같이 총 망라하여 적고 있다.
사관과 선원의 명단
Joseph Blesset, Wiper
John P. Brady. Chief Engineer
Robert H. Clarke, Utility
Russell V. Claus, Messman
Richard C. Coley, Ordinary Seaman
Charles L. Crockett, Oiler
Sidney E. Deel, Assistant Electrician
Andres Diaz, Wiper
Alvar G. Franzon, Third Mate
Major M. Fuller, Steward
Lee Green, Fireman/Watertender
Nathaniel T. Green, Radio Officer
Albert W. Golembeski, Second Mate
Lawrence Hamaker Jr., Oiler
Edgar L. Hardon, Utility
Morall B. Harper, Electrician
Charles Harris, Able-bodied Seaman
Leon L. Hayes, Utility
George E. Hirsimaki, First Assistant Engineer
Joseph A. Horton, Fireman/Watertender
Lonnie G. Hunter, Able-bodied Seaman
William R. Jarrett, Able-bodied Seaman
Kenneth E. Jones, Able-bodied Seaman
Leon A, Katrobos Jr., Ordinary Seaman
Alfred W. Kaufhold, Licensed Junior Engineer
James A. Kelsey, Junior Third Assistant Engineer
Leonard P. LaRue, Master,
Robert Lunney, Staff Officer
Herbert W. Lynch, Chief Cook
Patrick H. McDonald, Able-bodied Seaman
Adrian L. McGregor, Messman
Ira D. Murphy, Deck Utility
Willie Newell, Assistant Cook
Vernice Newsome, Wiper
Nile H, Noble, Third Assistant Engineer
Elmer B. Osmund, Boson
Harding H. Petersen, Second Assistant Engineer
Johnnie Pritchard, Messman
Louis A. Sullivan, Fireman/Watertender
Noel R. Wilson, Able-bodied Scarman
Wong T. Win. Second Cook and Baker
Emest Wingrove, Deck Utility
Steve G. Xenos, Oiler
Dino S. Savastio, Chief Mate
Henry J. B. Smith, Junior Third Mate
Merl Smith, Licensed Junior Engineer
Istmall B. Tang. Ordinary Seaman
마리아 수사의 사관과 선원들의 "용맹한 매" 상(賞)의 수상 소감을 읽어 보면 그의 인간된 면모 ㅡ 하느님 신앙, 겸손, 애국심과 모든 점에서 성실성을 볼 수 있다.
그의 수상 소감 요지는 아래와 같다:
"바다로 나갈 때 꼭 알아 두어야 할 금언(金言)의 하나는 동료 선원이 혼자 할 수 없는 일을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배의 안전과 그 배가 실은 모든 것은 이 원칙이 좌우합니다. 이것은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 라는 성경구절과 다를 바 없는 말입니다. 흥남에서 이 원칙을 적용하여 임무를 수행함에 있어서 사관과 선원들의 협력과 끈질긴 노력, 미국인으로서의 이상과 책무를 실천하기 위한 헌신을 통하여 모두들 탁월하고 모범적인 바다의 용사들임을 보여주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점에 대해 좋은 말씀을 해주셨습니다. 제가 자신의 증언을 구태여 덧붙인다면, 제 휘하 선원들의 노고를 치하하고 감사할 따름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제일 감사하게 생각하는 것은 그 엄청난 성공은 '하느님 섭리'의 역사(役使)하심 때문입니다.
한국전 휴전 이듬해인 1954년, 나는 신앙생활의 한 후보자로서 '성 바오로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나 같은 새파란 신출내기는 없었을 것입니다. 이 같은 나의 '변신의 가장 큰 동기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받고 나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나의 동기는 단 세 줄의 문장이었습니다.
트라피스트(Trappist)(*1664년 프랑스의 'La Trappe'가 창립한 수도사회-역자)의 수사 라파엘 시몬(Raphael Simon) 신부가 했던 간결하지만 너무도 훌륭하고 의미심장한 말입니다. 여러분과 그 신부님의 말을 나누고 싶습니다.
-하느님과 사랑에 빠진다는 것이야말로 인간 최대의 로맨스다.
-그를 찾는 것은 최대의 모험이다.
-그를 발견하는 것은 인류 최대의 성취이다.
내가 수도원 문턱을 넘기 전까지 전혀 몰랐던 여러 가지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성 바오로 수도원의 모체는 베네딕트회라는 특정한 수도회입니다. 이 수도회의 다양한 선교사역지 중에는 북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바로 그 북한 공산당의 손에 베네딕트 신부님들과 수도사들이 순교를 당했던 것입니다!
완전 포위된 흥남 부두에서 자유를 갈망하는 우리의 맹방(盟邦) 한국의 친구들을 구출한 역사는 정말로 전쟁의 비극 속에 펼쳐진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공산주의자들이 계획하고 공산주의자들이 집행하여 도발시킨 한국전쟁은 전 인류를 노예화시키려는 저들의
부단한 결의의 징표입니다. 그것을 저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의 최대의 도의적 책임입니다!
우리나라는 물론 우리 개개인을 쓰러뜨리려고 덤비는 이 악마의 주체인 공산주의와 그에 동조하는 '사탄'의 세력에 대항하기 위해 용기와 담력을 주십사 하고, 그렇게 함으로써 하느님의 십계명을 받드는 완전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십사 하고 항상 하느님께 기도 하도록 합시다.
이제 수도원장님과 나는 '성 바오로' 수도원으로 돌아갑니다.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사관과 선원들과 그분들의 사랑하는 가족을 위해 늘 기도하겠습니다. 저희들을 위해서도 기도해 주십시오. 특히 바다의 일꾼들과 그들의 가족 및 그들의 육신의 안전 차원을 넘어 고되고 위태로운 그들의 소명에 하느님의 가호가 있기를 기도하겠습니다.
끝으로 내빈 여러분께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전 선장, 사관, 선원들이 뱃사람의 인사를 드리고 떠나려고 합니다. 특히 이 인사는 베네딕트 수도사가 된 예전 뱃사람의 깊은 가슴속에서 나온 인사입니다. 여러분! 그리고 우리 미국! 안전한 항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 다! 그리고 늘 행복하시기를!
감사합니다. 하느님의 축복을 기원합니다.
배와 선원들에 대한 표창은 미국 정부가 처음 한 것은 아니다. 그보다 2년 전 대한민국의 이승만 대통령이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선원들에게 대통령 부대표창장을 수여했다. 표창장 일부를 소개하면 이러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가 3일간의 험난한 항해 끝에 부산에 안전하게 도착한 것이야말로 이 인도주의적 사명 완수에 참여한 모든 분들에게 잊을 수 없는 대 역사(役使) 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을 실천한 그들의 감동적이고 모범적인 업적은 우리 한국 국민 모두의 기억에 영원히 남을 것입니다."
양찬우 주미 한국대사는 러니를 초청하여 그의 사관과 선원들을 대표하여 그에게 표창장과 메달을 수여했다. 그리고 주 뉴욕한국총영사인 남궁 씨도 1958년 6월 3일 러니에게 똑같은 표창과 메달을 수여했다.
그 배 역시 한국동란 이후 "예비함대(mothball fleet)"에 귀속되는 운명을 면치 못했으나 1966년 월남전 절정기에 160여 개의 화물선단에 다시 기용되어 활동하게 되었다. 이 배가 현역으로 복귀하던 그해 10월에 미 상무성은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현역 복귀는 "아시아의 한 국가가 공산 침략에 항거하여 자유 독립을 지키려는 투쟁에 우리 재향군인들이 다시 실전에 참여하는 본보기이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문에는 운명의 아이러니라 할까 아주 의미심장한 사실을 지적하며 "동남아시아로 보낼 군수품을 적재한 이 배에는 월남 파병 한국군이 타고 있었다. 파병 장병들은 모두 그 배가 공산당에 대항하여 자유수호 투쟁을 한 14,000명의 피난민들의 생명을 구한 배라는 것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국 정부가 이 배와 그 선원들이 해낸 업적을 표창했기 때문에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이 배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으리라고 본다."라고 했다.
메러디스 빅토리호의 현역 복귀를 위해 미국 정부가 6년 뒤늦게 기념식을 가졌다. 1960년 "용맹한 배" 명명식을 가진 직후 이 배의 행선지를 표시하는 동판을 부착하기 전에 이미 이 배는 "예비함대"에 귀속되어 있었으나, 현역복귀 기념패를 증정하는 기념식을 가짐으로써 그 공백을 메우게 되었다.
미 상원 상무분과 위원장 워렌 맥너슨(Warren G, Magnuson) 워싱턴 주 상원의원이 이 기념패를 증정했다. 거기에는 '해양 역사상 단 한 척의 배가 그토록 많은 인명을 구출한 배는 없었다."라고 적혀 있었다. 이 기념패는 워싱턴 주 올림피아(Olympia) 시의 해양부 산하 예비선단에 귀속되어 워싱턴 주 상무국 청사 어느 구석에서 먼지에 쌓여 있었다.
1950년 배의 선장이었던 마리아 수사는 뉴저지 주의 수도원에서 수도(修道)생활을 하고 있으면서 이 기념패 증정식에 참석은 하지 못했으나 기념식 참석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서한을 보냈다
"나는 한국동란 중 이 화물선을 운항하는 특권을 향유했던 사람입니다. 지난 12년 동안과 지금은 다른 종류의 배, 즉 사도 베드로의 작은 고깃배 속에 한 구석을 차지하고 살아왔습니다. 바다에서 수도원까지의 거리는 96킬로이긴 하나(여기 해변은 흥남부두보다 좀 더 넓다는 농담의 말이다 - 역자) 우리 배가 현역으로 다시 복귀한다는 소식은 그런 용맹스런 배와 승무원들의 자비와 정의의 숭고한 사명을 감당했던 보석같이 고귀한 추억을 생생하게 되살려줍니다.
다시 한 번 메러디스 빅토리호는 국가 비상사에 부름을 받아 저주스럽고 포악한 공산주의 침략을 막아내는 데 유용하게 쓰일 것입니다.
이 배와 배에서 봉사할 선원 모두에게 큰 성공이 있기를 빕니다. 선장님과 사관님과 선원님들 새 임무를 맡게 된 것을 중심으로 축하드립니다! 우리나라와 상선단의 고귀한 전통과 이상을 빛내 주시기를 빕니다. 성공과 축복을 기원하며, 그리스도 안에서 귀하께 신실한 전 메러디스 빅토리호 선장, 베네딕트 수도회 O.S.B. 마리아 수사 드림."
그러나 1993년 메러디스 빅토리 호의 파란만장했던 생애가 치욕스런 종말을 맞는다. 워싱턴 해양업무국 선박 현황 카드 철에는 이 배의 활동사항 전부가 기록되어 있다.
2차대전 종식 3주 전, 1945년 7월 24일, 태평양 전시(戰詩)시각으로 오후 2시 20분, 로스앤젤레스로 인도하여 입항.
카드에 마지막 기록은 대문자로 썼다. 런던의 니샨트(Nishant) 무역회사에 고철로 매각 ㅡ 10/01/93. 그토록 비상한 일을 한 배가 너무도 허무하게 종말을 맞았다.
운명의 아이러니랄까, 고철 해체 작업은 중국에서 중국인들의 손에 의해 행해졌다. 43년 전 중국인들이 그 배를 파괴하려고 덤벼들 때 아무런 보호도 없이 총 한 방 쏘지 않고 대담무쌍하게 막아냈던 그 배가 그렇게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배의 무용담은 뉴욕주 롱 아일랜드 해양아카데미 내에 있는 미국해양박물관의 "용맹한 배" 특별 전시실에 보존되어 있다. 전시실 남쪽 벽에 커다란 기념패가 걸려 있는데,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950년 12월 북한 흥남에서 UN군이 역사적 철수작전을 수행하고 있을 때, 메러디스 빅토리 호는 적군의 포위망 속에서 고립무원의 북한 민간인을 구출하라는 부름을 받았다. 군인들은 대부분 철수했고 홍남시는 적군의 포격으로 화염에 쌓여 있었다. 적의 야포와 비행기 폭격의 긴박한 위험 속에서 배의 퇴로가 시시각각으로 위험해졌다. 배는 제트기 연료를 만적한 상태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포화가 작열하는 항구에서 14,000명의 남녀노소 피난민이 다 탈 때까지 그 위치를 고수했다.
흥남부두를 마지막으로 떠나 기뢰가 깔린 항만을 벗어나 인간화믈저렴 난민을 태우고 3일간 부산을 향해 항해하는 동안 마실 물도, 먹을 것도, 의사도, 통역관도 없었다. 항해 중 배 안에서 아이들도 태어났다. 단 한 명의 생명도 잃지 않은 기적이었다. 선장 이하 사관과 선원들이 풍부한 기략과 건강한 항해술과 팀워크를 발휘하여 인류사상 최대의 해양구출 작전을 성공시켰다. 따라서 메러디스 빅토리호를 영원히 '유명한 배'로 명명한 것은 너무도 당연하다."
클레린스 모르스 프레데릭 뮐러
(Clarence G, Morse) (Frederick Mueller)
해양부 국장 상무장관
필자는 헤이그 장군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는 한국동란 때 육군 장교로 출발하여 후일 국무장관이 된 인물이다. 그의 깊은 통찰력과 예리한 시각으로 뒤돌아보며 미국이 한국전쟁에 뛰어든 것이 잘한 일인지 여부를 자문(自問)해 보았느냐고 물어보았다. 그럴만한 가치가 있었느냐고. 그는 주저 없이 즉석에서 이렇게 강조했다.
물론 절대적으로 가치가 있었지요. 그때는 냉선시대의 가장 중대한 시점이었습니다. 나는 트루먼 대통령에 대해 다소 비판적이었지만, 요컨대 그 당시 터키건 그리스건 한국이건 어디서 터졌든지 간에 당하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었습니다. 다행히 대통령은 뱃심이 두둑한 분이었지요. 그는 저들의 침략이 전략적으로 어떤 광범한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 잘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에서 정당한 일을 했습니다."
필자가 "미래를 어떻게 보십니까?"하고 묻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한국이 통일된 자유국가가 되느냐 아니면 현재의 교착상태가 무한정 미래로 지속될 것이냐는 미국이 어떤 외교정책으로 대처할 것이냐에 달려 있습니다. 이 말에는 여러 가지 뜻이 있습니다. 하나는 중국과 현실적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과 미국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계속 유지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어떻게 나올 것인가를 미리 예측할 줄 알아야 합니다. 상대가 다루기 힘들고 타협이 불가능할지라도 계속 접촉을 시도할 필요가 있지요. 이것은 우리가 너무 순진하고 고지식해서는 안 된다는 뜻입니다.
내 견해로는, 현 행정부에는 북한에 대해 순진하고 고지식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많은 것이 문제입니다."
외교정책에 대한 헤이그 장군의 비판 대상은 클린턴 행정부만이 아니었다. 전 국무장관인 그는 한국전쟁을 회고하면서 "우리가 전쟁을 제대로 수행했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있어요.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것은 우리가 중국 사람의 차원을 이해하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도 마찬가지로 우리 공화당 자체도 나는 이해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위급한 전시상황이 벌어져도 뭉그적거리는 공화당 의원들이 상당히 있어요. 실제 전투가 벌어질 때쯤에는 그들의 임기가 끝나 없어져 버리지요.
좌우간 중국은 미국과 한판 붙는 것은 원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우리와의 트러블을 원하지 않아요. 우리의 경험과 기술, 경제적 노하우가 필요하거든요."
한국전쟁은 보람 있는 전쟁이었다는 헤이그 장군의 확신을 지지하는 사람들 중에는 홍남 철수 때 참전했던 미 3사단의 프레드 롱(Fred Long)이 있다. 그는 나에게 말했다
"그렇지요. 한국전쟁은 안 할 수 없었습니다. 모든 인류의 투쟁이 증명하듯이 인간의 고유한 생활양식을 보호하려는 결단을 보여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것을 보호하기 위하여 대항할 수 있는 결연한 의지입니다. 한국에서 (월남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런 의지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결국 최대의 적인 소련을 무너지지 않을 수 없는 지점까지 몰고 간 것입니다."
트루먼 대통령도 한국에서 러시아 세력을 저지시킨 이유에 대해 이와 유사한 견해를 피력하고 한국전에 유엔군을 참전시킨 분명한 이유를 말했다. 1973년 멀리 밀러(Merle Miller)가 트루먼이 구두로 말한 자서전을
편집했다. 그때 대통령은 말했다:
"국제군을 편성하여 북한 침략을 막아내려는 결정이 한국전과 월남전의 큰 차이다.월남전은 한국전쟁 종식 후 11년간이나 지리멸렬하게 전면전을 끌었던 전쟁이다."
트루먼은 밀러에게 말했다: "인류사상 처음으로 침략군이 국제경찰군에 의해 저지당했다. 그 작전이 효과를 내서 자유세계가 지켜졌다"고
트루먼 대통령 때의 국무장관이었던 딘 애치슨(Dean Acheson)도 같은 견해를 피력했다. "소련은 그들이 전쟁을 일으키자 예상치 못한 미국의 절대적 응징 반응에 놀랐습니다. 그들이 멈추어 서서 주위를 바라보고 우리말을 듣기 시작했지요. 그 이후 전 세계의 역사는 뒤바뀌었습니다. ・・・
트루먼이 자주 말했듯이, 3차대전을 피할 수 있었지요. 아니면 우리 모두가 망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한국에서 제한된 목적을 위해 제한된 국지전을 수행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이유를 많은 사람들이 이해를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전쟁은 치르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 전쟁을 치르고 만 것입니다."
존 미들마스(John Middlemas)는 생각한다: "한국은 우리가 이길 수 있는 전쟁이었어요. 끝까지 밀어붙였으면 이겼습니다. 그런 배짱이 없었어요. 중공과 북한에 대고 '유사시 우리가 가지고 있는 폭탄 두어 개쯤 사용할 수도 있다'는 걸 비쳤어야 했습니다...."
비록 소련도 한국전 1년 전에 핵보유 국가가 되기는 했지만, 소련과 중공 우두머리들을 상대할 때 그 작전을 이용했어야 한다고 그는 생각한다.
"우리는 체스 게임도 할 줄 몰랐고, 정부 관료들도 형편없는 포커 플레이어들이었습니다."
동시에 그는 개인적으로는 러시아나 중국 사람들에게 악감정이 없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도 지구 반대쪽에 살고 있을 뿐 다 좋은 사람들입니다. 그들도 다 명령을 따라야만 할 처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그런 이유로 그들을 영원히 정죄하며 살아야 합니까? 그건 아니지요. 그것은 바보짓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