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가의 어머니 마리아
본 문 : 행 12 : 1 - 12 2010/05/09어버이 주일
조금은 식상한 말이 되었지만, 아무튼 5월은 가정의 달입니다. 그리고 오늘은 어버이 주일입니다. 5월이 되면 우리는 가정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해야 합니다. 왜 하나님께서 나에게 지금의 가정을 마련해 주셨으며, 왜 저런 자녀를 허락해 주셨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엔 자녀를 무거운 인생의 짐으로 생각하는 경향이 많아 졌습니다. 그래서 일치감치 무자식상팔자를 부르짖는 부부들이 많이 생겨나고, 심지어 결혼마저도 거부하는 사람들도 많아지고 있습니다. 이처럼 너무나 많이 변해버린 오늘의 이상한 세태 속에서 과연 가정의 의미는 무엇이고, 그 가정에서 부모와 자녀의 역할은 어떠해야 하는 가를 살피는 일은 매우 뜻있는 일이 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배경이 되고 있는 역사적인 정황을 보면, 야고보 사도를 참수형에 처한 헤롯 아그립바 1세가, 베드로 사도마저 죽이려던 전날 밤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삼엄하기 이를 데 없는 감옥으로부터 베드로를 구해내셨습니다. 주님의 역사가 얼마나 인간의 상상을 초월했던지, 장본인인 베드로가 감옥을 벗어나 한길에 이를 때까지 자신에게 일어나고 있는 일을 꿈으로 여길 정도였습니다. 그 이후의 일을 본문 11절-12절이 밝혀주고 있습니다.
“이에 베드로가 정신이 들어 이르되 내가 이제야 참으로 주께서 그의 천사를 보내어 나를 헤롯의 손과 유대 백성의 모든 기대에서 벗어나게 하신 줄 알겠노라 하여 깨닫고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에 가니 여러 사람이 거기에 모여 기도하고 있더라”
베드로는 즉각, 평소 교우들과 함께 모여 예배와 기도를 드리던 처소를 찾아갔습니다. 본문은 그 집을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 고 밝히고 있습니다. 성경이 어느 특정인의 집을 가리킬 때 자식과 어머니의 이름을 동시에 사용한 경우는 본문이 유일합니다. 자식과 어머니라면 그들은 한 가정을 구성하고 있는 가족입니다. 따라서 출옥한 베드로가 찾아간 집을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라고 말하는 것은, 벽돌로 된 그 집 모양이나 구조가 아니라, 마가라는 아들과 마리아란 이름의 어머니가 함께 이루고 있는 그들의 가정을 강조하기 위해서 입니다.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는, 성경에 등장하는 여러 마리아 중 어느 마리아와도 동일치 않는 독자적인 여인입니다. 마리아의 아들에게 마가란 이름과 요한이라는 두 개의 이름이 있었던 것은, 당시 로마제국의 식민지였던 이스라엘의 관례에 따라 히브리식 이름과 로마식 이름을 동시에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즉 마가는 로마식 이름으로 원어로는 ‘마르코스(Markos)’, 히브리식 이름인 요한의 본이름은 ‘요하난(Yowhanan)’입니다.
골로새서 4장 10절에 의하면 마가는 바울과 함께 안디옥교회를 공동목회 했던 바나바의 조카였습니다.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가 1차 선교여행을 떠날 때 그들의 수종자로 따라 나서는 영광을 얻었습니다. 젊은이들 중에 마가는 그만큼 남다른 데가 있었던 것입니다. 마가가 선교여행 중 도중하차함으로 인해 바울과는 잠시 소원한 관계가 되기도 했지만, 그러나 말년의 바울은 골로새서, 디모데후서, 빌레몬서를 통해 마가에 대해 이렇게 언급하고 있습니다.
“나와 함께 갇힌 아리스다고와 바나바의 생질 마가와(이 마가에 대하여 너희가 명을 받았으매 그가 이르거든 영접하라)”(골4:10)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딤후4:11)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와 함께 갇힌 자 에바브라와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몬1:23-24)
이처럼 말년의 사도 바울이 마가를 직접 동역자로 부르고 있을 만큼 마가는 신실한 사람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울 사도가 순교 당한 후엔, 마가는 사도 베드로의 동역자가 되었습니다. 히에라볼리의 파피아스는 마가가 베드로의 통역이었다고 전해줍니다. 박학다식했던 바울과는 달리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는 모국어인 히브리어를 제외하곤, 당시 세계 공용어였던 라틴어나 헬라어를 할 줄 몰랐습니다. 따라서 베드로가 이스라엘 밖에서 이방인을 상대로 설교할 땐 누군가가 통역을 해주어야 했는데, 바로 마가가 그 역할을 담당한 것이죠. 그래서 성경의 베드로서 역시 마가가 대필한 것으로 전해지기도 합니다. 여하튼 베드로 자신이 베드로전서 5장 13절을 통해 마가를 ‘내 아들’이라 부를 정도로, 마가는 베드로의 전폭적인 신임을 받았던 인물입니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사람들 중에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 모두로부터 이처럼 신임을 받았던 사람은 마가뿐입니다. 그는 그만큼 출중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차치하고서라도 우리가 마가를 존중히 여기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가 바로 마가복음을 기록한 그 마가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무려 1천 6백년에 걸쳐 기록되어졌습니다. 주전 1천5백년 경 모세에 의해 창세기가 기록되기 시작한 이후, 주후 1세기 말엽 사도 요한이 요한계시록의 기록을 끝냄으로 성경이 완성되었습니다. 1천 6백년이라면 참으로 장구한 세월입니다. 우리나라의 역사로 따진다면, 조선과 고려를 거쳐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하는 기간이니 얼마나 긴 세월입니까? 그렇다면 성경이 기록되던 그 1천 6백 년 동안 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땅위에 태어났고, 살았겠습니까? 그야말로 하늘의 별보다도, 바닷가의 모래보다도 더 많은 사람, 아니 그 수를 헤아린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할 것입니다. 그런데 1천6백 년 동안 이 땅을 거쳐 간, 계수불능일 정도로 많은 그 사람들 중에서 성경을 기록하는 자로 선택받은 자는 40명뿐입니다. 마가가 귀한 것은, 그가 바로 이 40명중에 속한 자이기 때문입니다.
마가가 살던 시대에 왜 권력가가 없었겠습니까? 어찌 대 사업가가 없었겠으며 뛰어난 학자가 없었겠습니까? 그러나 그들은 모두 바람처럼 스쳐 사라져 갔지만,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마가는 그 영원한 말씀과 더불어 오늘도 살아 있습니다. 그렇다면 변변하게 내세울 것 하나 없어 보이던 마가가 어떻게 이 같은 영광을 누릴 수 있었겠습니까? 그 해답은 바로 그의 가정에 있습니다.
출옥한 베드로가 찾아간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은, 평소 초대교회 교인들이 예배와 기도처소로 사용하던 장소 중의 한 곳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날 밤, 사랑하는 제자들과 이른바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던 ‘마가의 다락방’이 바로 이 마가의 집이었습니다. 주님 수난의 현장에서 두려움에 사로잡혀 주님을 배신하고 도망갔던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찾아가시어 부활하신 당신을 보여주셨던 곳 역시 마가의 집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승천하신 뒤 주님의 모친 마리아와 주님의 형제들, 그리고 사도들을 비롯한 120여명의 신자들이 힘을 모아 기도하던 곳도 역시 마가의 집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오순절 성령님께서 강림하셨던 곳 역시 마가의 집입니다.
그 집주인 마리아는 임대업을 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경제적으로는 집에 여종을 둘 정도로 부유하였습니다. 그녀는 가정주부요, 마가의 어머니입니다. 그런데 그녀는 자기 집을, 가기 가정을, 주님을 위해 공개하였습니다. 그 집에서 주님에 의한 최초의 성찬예식이 거행되었고, 그 집에서 제자들을 위한 주님의 마지막 유훈이 있었으며, 그 집에서 주님의 부활이 주님에 의해 확인되었습니다. 그 집에서 초대교인들의 거룩한 예배와 찬송과 기도가 드려졌습니다. 그것은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신앙심의 표현임과 동시에, 사랑하는 아들 마가를 위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즉 마리아는 그렇게 함으로서 자기 가정이 자식을 위한 신앙의 터전과 진리의 마당이 되게 했습니다. 어릴 적부터 그와 같은 신앙의 마당에서 자란 마가가 위대한 사도 바울과 베드로의 동역자가 됨은 물론이요, 영원한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하는, 인류 역사상 선택되고 선택된 40명중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입니다.
마가가 이처럼 마가복음을 기록하며 인류의 역사에 영원한 생명의 빛을 발하는 삶을 살아갈 때, 그의 어머니 마리아에게 자기아들 마가가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요? 이런 의미에서 바울과 베드로의 동역자가 되기 위해 몸은 비록 어머니 마리아의 곁에 있지 못했을지라도, 영원한 진리의 삶으로 일관한 마가는 진정한 효자입니다. 마리아가 아들 마가를 위해 신앙과 진리의 터를 닦아 주었던 것은, 마가를 평생 자기 곁에 자기 아들로 가두어두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어미니인 자기로부터 아들을 해방시켜서 하나님의 자식으로 그리고 영원한 진리의 사람으로 세워주기 위함입니다. 그렇기에 사도 베드로가 마가를 가리켜 ‘내 아들’이라 부른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입니다.
본문에 마가의 아버지에 대한 언급이 없기에, 일반적으로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를 남편과 사별한 미망인으로 간주합니다. 그렇다고 해서 자식에 대한 마가 아버지의 역할이 전혀 없던 것은 아닙니다. 마가가 직접 기록한 마가복음 14장 14절은,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가지셨던 집주인을 가리켜 ‘오이코데스포테스(oikodespotees)’란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성인남자를 지칭하는 단어입니다. 본문에서 베드로를 투옥시켰던 헤롯 아그립바 1세가 주후 41년부터 44년까지 유대인의 왕으로 군림했음을 감안한다면, 오늘 본문과 ‘최후의 만찬’ 사이에는 십 수 년의 시차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때 마가는 어린아이에 불과할 때입니다. 따라서 그 집주인인 성인남자 즉, 그때 주님께서 최후의 만찬을 가지실 수 있도록 자기 집을 제공한 사람은 마가의 아버지입니다. 그는 그 이후 본문에 이르기 전 먼저 세상을 떠났을 것입니다. 쉽게 설명 드리자면, 사랑하는 자식 마가를 위해 깔아졌던 신앙의 마당은 마가의 아버지와 어머니의 합작품이라는 말입니다. 시작한 자는 아버지였고, 완성한 자는 어머니였습니다. 그 부모 아래에서 자란 자식이 바로 마가입니다. 여러분, 참되고 실신한 좋은 부모 밑에서, 참되고 신실한 좋은 자식이 자라난 것입니다.
바로 여기에서 우리는 부모자식간의 중요한 역할을 깨닫게 됩니다. 부모의 역할은, 자식이 자신의 가능성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자식을 위한 터전을 닦아주는 것입니다. 배움과 아름다움의 능력을 배양해주는 지식과 예술의 터전을 마련해 주고, 이웃과 더불어 살 줄 아는 공동체의 터전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모험과 도전의식을 일깨워주는 창의의 터전을 닦아주는 것입니다. 성장기에 있는 자식에게 어떤 터전을 닦아주느냐에 따라 자식이 자기 안에만 갇혀 사는 우물 안의 개구리가 될 수도 있고, 세상을 새롭게 하는 생명의 빛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부모는 반드시 함께 힘을 모아 가장 중요한 삶의 기초인, 참된 신앙과 영원한 진리의 터전을 닦아주어야 합니다. 영원한 것을 자식에게 주고, 자식이 이 세상에서 무엇을 하던지 영원과의 관계 속에서 영원을 의식하며 살아가게 하는 것보다 더 큰 자식사랑은 없습니다.
반면에 자식의 역할은, 부모가 닦아준 바로 그 터전 위에서 영원한 진리의 사람으로 우뚝 서서, 부모의 명예와 긍지를 더 높여드리는 것입니다. 영원을 아는 부모에겐 영원의 보답보다 더 큰 효도가 없습니다. 뿐만 아니라 바로 그때 자식은, 또 자기자식을 위해 진리의 터전을 닦아주는 진리의 부모가 될 수 있습니다. 그와 같은 세대를 각각 하나의 고리로 삼아, 하나님의 생명의 역사는 이 땅에 이어지게 됩니다.
이처럼 부모는 자식에게 영원한 생명과 진리의 터전을 닦아주고, 자식은 바로 그 터전 위에서 자신의 세계를 펼쳐가야 하는 이유는, 부모든 자식이든 우리 인생 모두는 결국엔 죽을 수밖에 없는, 지극히 유한한 존재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유한한 인간에게, 그리스도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보다 더 귀한 것은 따로 있을 수 없습니다.
사람은 홀로 가정을 이룰 수는 없습니다. 반드시 두 사람 이상의 사람들, 복수의 가족들에 의해서만 가정은 이루어집니다. 따라서 거기엔 필히 작별이 있기 마련입니다. 홀로라면 만남도 작별도 있을 수 없겠으나, 복수이기에 만남과 작별이 없을 수 없어요. 가족들의 만남엔 순서가 있습니다. 아빠와 엄마가 먼저 만나고, 그 다음에 부모와 자식의 만남이 차례대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나 작별엔 순서가 없습니다. 자식이, 동생이, 얼마든지 먼저 떠날 수 있습니다. 만남엔 언제나 기쁨의 인사가 있습니다. 그러나 작별의 경우엔, 작별의 인사도 한 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떠나는 경우가 훨씬 더 많습니다.
여러분!
언젠가는 지금 내가 그토록 사랑하고 아끼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들, 특별히 자녀들과도 작별해야할 때가 있습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자식들을 두고 먼저 떠나야만 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부모님보다 먼저 가야할지도 모릅니다. 그날이 이르기 전, 아직 우리의 호흡이 붙어 있을 때, 사랑하는 자식들을 위해 신앙과 영원한 진리의 터전을 닦아주는 부모의 역할에 충실하십시오. 세상을 살아가면서 무엇이 진정 소중한 것인지를 생각해야 합니다. 또한 자녀들은 부모님이 다져주신 신앙의 터전 위에 영원한 진리의 사람으로 우뚝 서, 부모의 긍지를 더 높여드리는 자식의 역할에 최선을 다 하십시오. 그때 우리가정은 모두 이 시대를 밝히는 ‘마가라 하는 요한의 어머니 마리아의 집’이 될 것이요,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은 이 시대를 위한 신앙의 모본이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이 세상을 떠난 후엔, 주님 안에서, 먼저 떠난 가족들과 영원한 재회의 기쁨을 나누게 될 것입니다. 원하기는 정말 주님 안에서 영원한 가치를 발견하고 그 가치의 소중함을 널리 전하는 여러분의 가정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