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탐구] 남산약수터서 영계백숙 먹고 한남동계곡서 목욕했다고?
과거 기사에서 살펴본 그 시절 도시 여름 풍경
남산과 서울 N타워의 전경. (사진=뉴스포스트DB)
[뉴스포스트 = 강대호 기자] 도시의 여름은 뜨겁다. 태양은 바닥을 달구고 빌딩 숲은 공기 순환을 방해한다. 여기에
정체한 차량과 에어컨 실외기가 내뿜는 열기가 도시를 더 뜨겁게 만든다. 그늘에 들어가더라도 무덥기는 마찬가지다.
마침 쏟아진 소나기가 공기를 식힐까 했지만 더욱 습해질 따름이다. 어쩌면 마스크를 껴야 하는 현실이 이 여름을
더 힘들게 하는지도 모른다. 혹자는 말한다. 지금은 에어컨을 갖춘 곳이 많아 예전보다 견디기 쉽다고.
반면 선풍기만으로 여름을 나는 취약 계층도 많다. 사실 한때 선풍기는 중산층 이상만 누릴 수 있는 첨단 전자제품이었다. 1980년대 초반 여름만 해도 텔레비전에서 ‘신일 선풍기’와 ‘한일 선풍기’ 광고가 흘러나왔다.
에어컨이 흔치 않던 시절에도 더위를 피하는 방법들이 있었을 것이다. 과거 기사 속 인상적인 여름 풍경 몇 가지를 소개한다.
남산이 유원지?
남산은 서울의 랜드마크다. 도심에서 눈만 돌리면 남산이 보이고, 남산에 오르면 서울 도심을 거의 조망할 수 있다.
특히 남산 서울 타워에서 감상하는 서울 야경은 거대 도시 서울을 확인할 수 있는 광경이다.
무엇보다 남산은 숲이 울창해 보호와 관리가 필요한 곳이기도 하다. 그런데 예전에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1970년대 초반 남산 케이블카.
아직은 고층 건물이 들어서지 않은 퇴계로, 을지로, 종로 등 서울 도심을 볼 수 있다. (출처: designersparty 페이스북)
동아일보 1959년 7월 30일 <납량점경(納涼点景), 남산> 기사에서 지금과 다른 남산의 모습을 보여준다.
기사는 “옛날에 호랑이가 나왔다던 곳에 (중략) 불고기 냄새가 진동하고 있다”며 “남산골 약수터”의 모습을 그린다.
남산 약수터는 “예전부터 가난한 월급쟁이들이 소주병을 들고 피서라고 찾아든 곳”이라며.
기사는 계속해서 남산 약수터가 “술은 물론 불고기와 영계백숙”을 파는 “노천 빠”가 된 모습을 소개하며 “서민층의
오후 피서지”로 적당하다고 전한다. 그리고 “서울 한복판에 이런 신기한 곳이 있어 다행”이라는 소감으로 기사를 마무리한다.
생태계 보호를 위해 산과 계곡에서 영업하는 식당들을 단속하는 지금과는 사뭇 다른 분위기다.
거리의 아이스케키 소년
오늘날 도시의 거리에 카페가 있다면 1960년대와 1970년대의 거리에는 ‘아이스케키 소년’이 있었다.
아이스케키는 막대 얼음과자를 말한다. 지금과 같은 빙과류 산업은 1970년대 중반 이후 자리 잡았다.
그 전에는 소규모 빙과류 업체들이 구축한 구멍가게 유통망이나 ‘아이스케키 소년’을 이용한 행상이 대세였다.
1960년대 서울의 아이스케키 행상. (출처: designersparty 페이스북)
‘아이스케키 소년’들은 아이스케키가 가득 든 통을 어깨에 메고 거리에 나가 “아이스케키”를 외치며 팔고 다녔다.
조선일보 1963년 9월 5일 <한철 벌이 여름 결산> 기사에 ‘아이스케키 소년’과 관련한 이모저모를 다뤘다.
기사는 아이스케키 소년들을 “여름이 되면 우르르 나왔다가 여름이 지나면 자취를 감추는 인간 후조(候鳥)”라고 소개한다.
인간 철새로 묘사된 아이스케키 소년들은 “12세에서 16,7세”이며 서울에만 “약 1천5백명”이 있었다고.
“서울뉴욕, 고려당, 삼강유지, 한미당” 등 크고 작은 빙과류 회사의 수십 개 대리점에 속한 소년들은 어엿한 ‘개인사업자’였다. 그들은 대리점에 “5백원”의 계약금을 걸고 아이스케키를 팔고 남은 이윤을 가졌다고 한다.
맑고 더운 날에는 장사가 잘 되었겠지만 비 오는 날에는 어떻게 했을까.
1970년대 경기도 성남의 아이스케키 소년들. (출처: designersparty 페이스북)
비가 내려도 아이스케키 소년들은 쉬지 않았다. “비닐우산”을 팔아야 했기 때문이다.
오늘날 갑자기 비가 내리면 가까운 편의점을 찾으면 되지만 과거에는 비닐우산을 파는 소년들이 나타날 때까지
비를 피하고 있어야 했다. 갑자기 비가 내리면 어디선가 비닐우산을 파는 소년들이 나타나곤 했으니까.
대나무 살에 하늘색 비닐을 덧댄 우산이었다.
소년들이 속한 빙과류 대리점에는 비 오는 날을 대비해 ‘비닐우산’을 갖췄다고 기사는 전한다.
어떻게 보면 미성년자를 이용하거나 착취하는 모습으로 비칠 수도 있다.
오늘날 알바를 하는 청소년들과 그들을 이용하는 일부 어른의 모습이 겹쳐 보이기도 한다.
날씨에 개의치 않고 행상에 나선 ‘아이스케키 소년’들의 모습에서 청소년까지 경제활동에 나서야 했던
과거의 가난을 엿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가난 탈출을 위해 무엇이라도 했던 그 시대의 모습을 느낄 수 있기도.
(2021. 08. 04) 경기도 성남시 탄천의 물놀이장. 한여름이지만 코로나19로 운영하지 않는다.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도심에서 즐기는 피서
지금은 에어컨을 갖춘 집이 많고 (코로나19 전) 여름이면 국내외 관광지로 휴가를 떠나는 게 보편적인 모습이 되었다.
과거에도 여름이면 유명 관광지로 피서를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예전 기사들을 보면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여름 휴가철에 ‘대천’이나 ‘부산’으로 가는 ‘피서 열차’를 편성했다는 소식을 접할 수 있다.
물론 피서를 떠나지 못하는 서민들도 많았다. 그들도 나름의 피서법으로 여름을 즐겼다. 동아일보 1973년 7월 28일
<흥청대는 피서경기 짜증스런 도시서민, 폭서철의 명암을 살펴본다> 기사에서 서민들의 여름나기를 다뤘다.
기사는 “피서를 가지 못하는 도시 서민들의 더위를 이기는 이색 세태”를 소개한다. “더위를 피해 비원 앞이나 여의도
광장으로 뛰쳐나온 시민들”, “약수터가 있는 남산과 삼청공원 돗자리 장수들”, “한남동 계곡에 포장 칸막이를 한 야외
목욕탕” 등의 모습을 다루고 있다.
과거 비원으로 부르던 곳은 창덕궁이 되었고, 여의도 광장은 여의도 공원이 되었다. 번화한 한남동의 지금 모습은
계곡물이 흐르던 옛 시절을 잊게 한다. 그리고 유원지의 바가지 상혼은 그때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모양이다.
또한 “여의도 순환도로 버드나무 아래에 돗자리를 깐 노인들”, “우이동계곡의 탁족객들”, “세검정 유원지에 삼계탕
먹으러 나온 가족들”, 그리고 한강 다리는 물론 육교 아래에서 더위를 피하는 시민들의 모습을 전하고 있다.
1970년대 서울의 얼음가게. (출처: designersparty 페이스북)
기사는 “무엇보다 무더위로 한몫 버는 것은 얼음 장수와 음료수 장수”라며 “광화문 앞, 시민회관 앞, 화신 앞” 등지의
“보리차 행상”을 소개한다. 그들은 택시 기사와 행인들을 상대로 시원한 냉차를 판매했다.
경쟁이 심했는지 “행상 간에 다툼”이 생기기도 한다고 기사는 전한다.
또한, 여름철이 되자 “얼음 값”이 많이 올랐다고. 얼음 값이 평소보다 다섯 배나 올랐지만 구하기 힘든 상황이라며
“배달은커녕 직접 찾아가도 수박에 넣을 만큼”만 구할 수 있었다는 인터뷰를 소개한다.
오늘날에도 공원이나 숲의 나무 아래 그늘과 강변이나 하천의 다리 아래 그늘은 더위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여름철이면 관련 물가가 들썩이기도 한다. 도시의 여름 풍경은 어떨까.
(2021. 08. 04) 경기도 성남시 탄천의 무더위 쉼터.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더위는 곧 지나가리라
도시의 여름은 거리의 광고에서부터 알 수 있다. 카페들은 각종 음료수와 빙수 등 여름 상품들을,
식당들은 여름 특식 메뉴들을 홍보한다. 예전에 아이스케키 소년들이나 냉차 장수들이 거리를 장악했듯이.
(2021. 08. 04) 경기도 성남의 한 카페. (사진: 뉴스포스트 강대호 기자)
시원한 곳에서 즐기는 여름 특식들이 여름의 꿉꿉한 뜨거움을 조금은 식혀줄지 모른다.
하지만 마스크 벗는 것에 비할까. 이번 여름은 마스크 때문에라도 여느 여름보다 더욱 뜨겁고 꿉꿉한 여름이 될 듯하다.
그래도 견딜 수 있는 이유. 곧 가을이 올 거라는 것.
가을이 지나면 혹시나 마스크를 벗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가진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