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루타(253) 제5권 아시아에 전쟁을 일으킨 것이 우리 일본인인데, 어떻게..
제 22장 일본군으로서 요시다의 자존심
1절. 좋든 싫든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어
요시다의 한 손을 잡은 그녀의 손바닥이 처음엔 차가웠으나 갑작스럽게 뜨거워지기 시작했다.
"당신 체온을 재러 들어왔어요. 혈압과 체온을 재려는데 이렇게 열을 내면 정상이 안 돼요."
잠깐 입술을 떼었을 때 미요코가 속삭이듯이 말했다.
"요시다 대위님답지 않게 점점 대담해지시는 것 같아요."
"도망 가려고 하지만 말고 이리 와봐."
요시다는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는 미요코의 손을 잡아 다시 앉히고 그녀의 두 뺨을 양손으로 만졌다.
그리고 입을 맞추었다.
그는 현실에서 도피하여 여자의 존재 속에 빠져드려는 사람처럼 그녀를 탐하였다.
미요코의 가슴이 뛰었다.
그녀는 두 팔로 요시다의 목을 끌어안고 매달렸다.
"이러면 언제 혈압을 재요?"
"지금 재라구."
"그럼 정상으로 안 나와요."
"이 세상 자체가 정상이 아닌데 혈압이 정상이 아니면 어때?"
"어머. 너무 그런 염세주의는 싫어요."
"좋든 싫든 세상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자나."
요시다는 한숨을 내쉬며 창밖으로 시선을 보냈다.
농장을 넘어 저편 대운동장으로 흰 위장복을 입은 수백 명의 군인들이 무엇인가를 둘러매고 행군하는 모습이 보였다.
그들은 나뭇가지 사이로 보였다가렸다 하면서 조금만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부대 동쪽의 비행장에서 비행기 소리가 울려왔다.
"흰눈은 때로 편리할 때가 있어." 하고 요시다는 옆으로 기대며 함께 창밖을 내다보는 미요코에게 말했다.
"눈은 온갖 더러운 것을 덮어 하얗게 보이도록 하지. 흰 것은 역시 깨끗하니까."
"눈이 그대로인 상태에서는 깨끗하지만 녹으면 더욱 더러워져요."
"가렸던 것이 드러나는 셈이지. 세상 더욱 추해 보이는 법이지."
"그렇게 삶을 회의적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사람은 살만한 가치가 있다고 봐요."
"그렇지. 가치가 있지. 삶은 가치가 있지. 나는 당신을 통해 그것을 느끼고 있어. 어쨌든 삶은 가치가 있는 거야."
"이걸 끼세요. 이제 열 내렸죠?"
"무슨 열?"
"저를 포옹하시던 열 말이에요."
"그것 말고도 본디 열이 있잖아."
"열 없어요. 안심하세요. 자아. 겨드랑이에 껴요."
미요코는 요시다의 겨드랑이에 체온계를 넣었다.
"이제 허리의 기브스도 풀었으니 곧 퇴원할 거에요."
"계속 병실에 누워 있고 싶은데." 하고 요시다는 말했다.
"그렇게 되면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당신을 만나게 되고 그 지긋지긋한 12호 동에 들어가 세균제조를 하지 않아도 되지."
"그럼 나가신 후 또 다쳐서 들어오세요. 장교들에게 경례를 붙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시비를 걸어서 맞으세요."
"장교도 장교 나름이지. 이토오 같은 놈은 드물어. 그놈은 이시이 대위 밑에 있더니 악질적인 성격이 비슷하게 닮았어."
"그 날 이토오 중위가 술에 취했었나 봐요. 미안해서 병문안도 못 온다고 하며 사과를 전해달라고 두 번씩이나 전화가 왔어요."
"대위님이 완쾌되면 우리 송화강에 나가요. 전세 마차를 타고 하얼빈과 송화강변의 산사(山寺)에 가요."
"내가 완쾌되면 우리는 결혼부터 해야 되잖아?" 하고 요시다는 그녀의 배를 들여다보며 쓰다듬었다.
"불러 오잖아? 불룩한 배로 결혼식을 올리지 않으려면 서둘러야지."
"아이, 싫어요."
미요코가 얼굴을 붉히며 그의 손을 밀어내었다. 그러나 그렇게 싫어하는 기색은 아니었다.
여자는 밀어낸 요시다의 손을 다시 끌어당겨 배 위에 올려 놓았다.
"느껴져요?"
미요코는 얼굴을 살짝 붉히며 물었다.
미요코의 배에 손을 얹고 감지하던 요시다가 말했다.
"응. 삐약삐약 하는 것 같아."
"아이. 그렇게 놀리지 마세요. 내가 암탉인가요. 병아리를 품게요?"
"당신은 꼭 암탉 같아. 예쁜 암탉 말이야."
"자꾸 놀리시면 싫어요."
미요코는 키득키득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요시다의 겨드랑이에서 체온계를 빼냈다.
"어때? 열이 오르고 있나?"
"환자에겐 밝혀선 안 되도록 되어 있어요."
"내가 환자인가?"
"그럼요." 하고 미요코는 요시다를 힐끗 보며 미소지었다.
"걱정마세요. 멀쩡한 환자니까요. 열은 없어요. 정상이에요."
"그럴 리가 없는데, 세상이 비정상이면 그 속에 있는 인간도 비정상이 되는데?"
"그건 사람 나름이겠죠."
"비정상에 적응해도 비정상이고, 적응하지 않으려고 해도 비정상이 되어야 할지 몰라."
"그렇게 비관적으로 생각하지 마세요. 이제 혈압을 재요. 팔 이리 주세요."
혈압을 재고 있는 미요코를 물끄러미 쳐다보던 요시다가 그녀를 잡아당기며 품에 안으려고 했다.
"어머, 전에 안 하던 일을 자꾸 하시려고 그래요? 누가 들어와요."
"들어 오라지. 민망하면 고개 돌리겠지."
요시다는 미요코를 포옹하고 길고 긴 키스를 하였다. 그러자 미요코는 혈압을 재며 즐거워하는 표정이었다.
혈압을 되풀이해서 다시 재더라도 그의 애정을 느끼는 것은 즐거웠다.
바람이 약간 불면서 창문이 흔들리고 있었다.
밖에서는 그사이 해가 가리우고 눈발이 내렸다. 그 눈은 진눈깨비였다.
비와 눈이 뒤섞여 내리는 모습이었다.
미요코는 차트에다 체온과 혈압을 메모하며 창밖으로 시선을 보내더니 말했다.
"어머, 진눈깨비가 내려요. 진눈깨비가 내리면 봄이 오는 소식이래요. 날씨가 더우니까 비가 뒤섞이는 거예요."
"봄? 벌써 봄인가? 내가 그렇게 여러 달 누워 있었는가?"
"그럼요."
"침대에서 한철 잘 보냈군." 하고 창가로 갔다.
그들은 나란히 서서 이제 눈 덮인 대지에 뿌려지기 시작하는 진눈깨비를 바라보았다.
미요코는 머리를 요시다의 어깨에 기댔다.
창밖의 수양버드나무 밑으로 식물연구소 반장 야츠기사와(八木澤)가 말을 타고 지나가는 모습이 보였다.
그는 배가 불러 배불뚝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몸이 지나치게 뚱뚱해 말에 제대로 오르지도 못하여 놀림감이 되기도 했었다.
그것을 만회하기 위해서인지 최근에 와서 말을 타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다.
그는 말을 천천히 몰아 식물연구소 후원 쪽으로 돌아갔다.
멀리서 열차의 기적 소리가 울렸다.
부대 동쪽 석탄야적장 쪽에서 울려오는 소리였다.
"이대로가 좋을 것 같아."
"밖은 그렇게 춥지 않아요."
"추위보다도 냄새 때문이야. 본부 12호 동에서 풍기는 세균 썩는 냄새와 마루타 소각 냄새는 사람을 미치게 하고 있어."
"지금은 그렇게 심하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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