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성게(法性偈)
법성원융무이상(法成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불수자성수연성(不守自性隨緣成)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일즉일체다즉일(一卽一切多卽一)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 일체진중역여시(一切塵中亦如是)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 일념즉시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 일불잡란격별성(仍不雜亂隔別成)
초발심시변정각(初發心時便正覺) 생사열반상공화(生死涅槃相共和)
이사명연무분별(理事冥然無分別) 십불보현대인경(十佛普賢大人境)
능인해인삼매중(能仁海印三昧中) 번출여의부사의(繁出如意不思議)
우보익생만허공(雨寶益生滿虛空) 중생수기득이익(衆生隨器得利益)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파식망상필부득(叵息妄想必不得)
무연선교착여의(無緣善巧捉如意) 귀가수분득자량(歸家隨分得資糧)
이다라니무진보(以陀羅尼無盡寶) 장엄법계실보전(壯嚴法界實寶殿)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除中道床) 구래부동명위불(舊來不動名爲佛)
(13)是故行者還本際 叵息妄想必不得
시고행자환본제 파식망상필부득
(우리말) 이까닭에 중생들이 본성으로 돌아가서 망상심을 못버리면 아무것도 얻음없네
시고(是故):이 시(是), 연고 고(故)
행자(行者):불교수행을 하는 사람이, 다닐 행(行), 놈 자(者)
환본제(還本際):근본으로 돌아오다,돌아올 환(還) 근본 본(本), 즈음 제(際)
파식(叵息):마침내 쉬어야 한다
어려울 파(叵),마침내,파(叵),
쉴 식(息)
망상(妄想):이치에 벗어나는 헛된 생각 ,망령될 망(妄), 생각할 상(想)
필부득(必不得):반드시(틀림없이) 얻지 못한다. 반드시 필(必) 아닐 부(不), 얻을 득(得)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란 ”이런 까닭으로 수행자는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라는 말입니다. 여기서 본래의 자리란 때 묻지 않은 본래의 마음을 말합니다. 본성을 뜻합니다. 마음자리로 돌아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파식망상(叵息忘想)하라는 것입니다.
파식망상(叵息忘想)이란 망상을 쉬는 것, 즉 망상을 버리라는 것을 말합니다.
필부득(必不得), 절대로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수행자가 부처님의 자비 광명을 얻기 위해서는 환본제(還本際)해야 하고, 환본제(還本際)하기 위해서는 번뇌 망상을 버려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필부득(必不得)이란 문구로 번뇌 망상을 버리지 않고는 절대로 얻을 수 없다고 강조했습니다.
번뇌 망상인 사랑분별을 끊지 않고는 존재의 참 성품, 깨달음을 얻을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번뇌 망상이란 무엇인가? 옳다거나 그르다거나, 크다거나 작다거나, 있다거나 없다거나 하는 등 분별심(分別心)에서 나오는 쓸데없는 생각입니다.
그래서 깨달음을 얻으려거든 쓸데없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환본제(還本際)라는 말을 좀 더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환본제(還本際)라는 말은 본래의 때 묻지 않은 자리로 돌아간다는 말인데 어떤 의미가 있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사람이 죽으면 돌아간다고 합니다.
사람이 죽으면 몸이 흙으로, 물로, 불로, 바람으로 돌아간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환본제(還本際)라는 말은 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정신적인 면에서 돌아간다는 뜻입니다.
번뇌 망상으로 채워진 마음에서 티 없이 깨끗하고 청정한 본래 마음으로 돌아간다는 말이 환본제입니다.
사람이 태어날 때는 청정한 상태로 태어납니다.
그런데 성장하면서 번뇌 망상이 쌓여 깨끗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장하면서 쌓인 번뇌 망상을 닦아 내기 위해 수행합니다.
즉 수행을 통해 본래의 깨끗하고 청정한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말입니다.
청정한 자리는 돈이나 사회적인 지위나 명예 등이 필요 없는 자리입니다.
그래서 ’시고행자환본제(是故行者還本際‘ 는 수행하는 사람은 돈을 탐하거나 사회적인 지위를 탐하거나 명예를 얻으려 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미도 들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수행자가 힘써야 할 것은 파식망상(叵息忘想)이고, 파식망상(叵息忘想)은 업식(業識)에서 벗어나는 일입니다.
업식(業識)이란 뭐냐?
내가 살아오면서 반복적으로 해 왔던 일, 또 내가 살아오면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하는 모습을 보면서 습관화 되어온 행동들을 말합니다.
벗어나는 것은 이런 일들을 하지 말라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살면서 오랫동안 해 왔던 일을 어떻게 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초월하라는 말입니다.
자기가 만든 잣대로’이건 크다거나 작다,‘ ’이것은 옳다 저것은 옳지 않다는 ,‘는 생각에 사로잡히지 말라는 얘깁니다.
자기의 생각에 맞추어 남편이나 아내 자식에게 자기 방식대로 요구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이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지금 수행자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자식이나 남편이나 아내 등 상대를 고치려는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를 바라보고 나 스스로 고치는 일입니다.
먼저 색깔 있는 내 업식(業識)을 스스로 초월하는 것이고 그것이 우선입니다.
그다음에 제법(諸法)의 실상(實相)을 보고 이치에 따라 고쳐야 하는 것입니다.
옳고 그르다는 생각은 대상이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업식(業識)에 맞지 않아서 생기는 하나의 현상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래서 옳고 그르다는 생각에 집착하지 말아야 하고, 이런 것들이 허상(虛想)임을 알아야 합니다.
제상(諸相)이 비상(非相)인 줄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있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사실은 실제의 상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시비분별에 집착하지 말고[無住,무주], 모양 짓지 말며[無相,무상], 더 나아가서는 생각에 얽매이지 않는 상태[無念,무념]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번뇌 망상 즉 우리의 업식(業識)에 의해 일으키는 헛된 생각을 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제법(諸法)이 본래 그대로 진여(眞如)의 실상(實相)임을 알게 됩니다.
그런 후에야 우리는 인연(因緣) 따라 이리저리 일어나는 화작(化作)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업식(業識)에 대한 말씀을 조금 더 하겠습니다.
업식(業識)에서 벗어난다는 말은 우리가 자주 말하는 업장소멸(業障消滅)과 같은 말입니다.
그럼 업장(業障) 소멸(消滅)하기 위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그것은 각자 사람에 따라 다르고, 그 사람이 어느 때 어떤 자리에 있느냐에 따라 모두 다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야 한다고 꼭 집어서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먼저 엎드려 절을 하는 것이 좋습니다.
절을 하면서 ”부처님이 신통력을 발휘해서 나를 위해 어떻게 해 주십시오! “하고 비는 것은 아닙니다.
내 생각이 옳고, 내가 잘났다는 생각을 버리겠다는 마음으로, 몸을 굽히고 몸을 땅에 내려놓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부처님 나에게 무엇인가를 주십시오, “라고 절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업식을 버리겠습니다. “하고 절하라는 뜻입니다.
왜냐하면 자신의 업식을 버리지 않고는 진실의 세계에 접근하기 어렵고, 또 모든 의혹과 번뇌가 사라져 안심입명(安心立命)의 경지(마음이 안정되고 편안한 상태)로 들어갈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옳고 그르다. 크고 작다 등의 분별하는 마음(업식)을 버리면 바보가 되지 않을까 걱정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업식을 버리면 화가 나지 않고, 미움도 생기지 않고, 번뇌가 사라져서 마음이 편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왜 바보가 될 것이 아니냐는 걱정이 일어날까요? 그것은 업식의 안경을 벗기가 싫다는 뜻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럼 왜 이 업식의 안경을 벗기 싫을까요? 그것은 업식의 안경을 끼고 있는 줄 몰라서 그렇습니다. ‘나는 업식의 안경을 끼고 있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 “나는 객관적인 눈으로 보고 있다.”라고 헛생각(妄想,망상)을 하는 것입니다.
이런 상태를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합니다. 그러니 수행자는 자기가 업식의 안경을 끼고 있다는 것을 일단 인정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지금 내가 업식의 안경을 끼고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나면 업식의 안경을 벗으려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내가 보는 모습은 업식의 안경을 통해 보는 모습이라는 것을 알고, 안경을 벗고 세상 보는 연습을 하는 것입니다.
무슨 말이냐 하면 분별심이 일어나는 바로 그 순간, 탁 돌이키라는 것입니다.
‘아차, 내 안경에 또 이렇게 비치네, 이건 실제 모습이 아니야.’ 하고 마음을 돌이키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미워져서 그놈…. 하다가 바로 생각을 돌이키는 것이 업식의 안경을 벗으라는 노력입니다.
밉다는 생각은 곧 내 안경에 비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업식의 안경을 벗으면 미움이란 없는 것이기 때문에 용서할 것도, 참을 것도 없게 됩니다.
‘미운 사람, 미운 짓’이란 내 생각일 뿐, 사실은 미운 것이 없습니다. 다만 내 안경에 비친 모습일 뿐입니다.
내 마음에 들지 않은 어떤 물체나 행동을 보면서 ‘일체(一切)가 유심조(唯心造)다.’ 즉 모든 것은 마음으로 지어 만든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는 훈련을 열심히 해야 합니다. 그리고 미운 생각뿐 아니라 예쁘다는 생각, 잘한다는 생각도 마찬가집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을 때까지 꿈속에서 헤맵니다.
전도몽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해탈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색안경을 끼고 사물의 진짜 색깔을 바르게 보려는 것과 같아서 참모습을 볼 수 없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안경 벗는 연습을 하기 위해 굳이 산이나 유명한 사찰 등 특별한 곳에 갈 필요는 없습니다. 안경을 벗는 연습을 하기 위해 지금 하는 일을 바꾸거나 환경을 바꾸려고 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냥 현재 그 자리에서 하는 일을 하면서 연습하면 됩니다. 재가 불자는 지금 그대로 업식의 안경을 벗는 연습을 하면 되고, 출가 수행자는 현재 상태에서 그냥 하면 되는 것입니다. 재가자가 출가해야 하고, 출가자가 특별한 장소를 가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남자이거나 여자이거나, 나이가 많은 사람이거나 젊은 사람이거나, 학교를 많이 다녀서 박사이거나 초등학교도 다니지 않은 사람이거나, 누구나, 어디에서나 할 수 있습니다.
어떤 못마땅한 일을 당하더라도 내 업식인 줄 알고 그 일체의 생각들을 내려놓으면 내 마음이 편해집니다.
내 마음이 편해지면 가족들도 좋아집니다.
이렇게 내게도 좋고, 가족에게도 좋아지는 길이 부처님의 길입니다.
이렇게 공부하면 사주팔자에도 구애받지 않고, 죽을 운명이라 해도 명이 길어집니다.
제법(諸法)을 꿰뚫어 보고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장애가 될 만한 재앙이란 없습니다.
그래서 절에 다니며 부처님 법을 배우면 행복해지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