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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의 추억 #20, 정야베스의 고백~#21
[ 노광공은 1953년부터 박O선의 전O관을 다니면서 박O선이 설교를 하면 북을치며 따라 다녔다고 한다. 그때 같이 있던 M씨에 의하면 노광공이 박O선이 하는 모습을 보고 “됐다. 됐어. 저렇게 하면 되는거야”라고 하면서 탄성을 연발하더라는 것이다. 같이 있던 M씨는 노광공이 탄성을 지르는 것을 보고 뭔가 심상치 않음을 알았다고 한다. 얼마후 느닷없이 전국 사방 곳곳에 부흥집회를 하러 다녔다. ]
(인터넷 동영상검색 자료중에서)
세칭 동방교에서 기독교대한 개혁장로회, 지금은 대한예수교 장로회로 위장한 노광공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은 굳이 이단의 계보를 따지자면 박O선 계열이었다. 근래에 박O선 전O관의 기장 신O촌 (제3신O촌)에 가 볼 기회가 있었다.
영원히 죽지않는다는 동방의 의인이요 감람나무인 그도 말년에는 예수를 믿어서는 구원을 얻을 수 없으며 도리어 예수는 수많은 영혼을 지옥으로 이끌고 가는 마귀라는 소리(네이버검색 천O교신앙체험기)를 하고 있었다.
나도 신O촌에 있던 어떤 사람으로부터 받은 박O선의 설교 테이프를 통하여 확실히 들은바가 있다. 가히 노망이 들지 않고는 할 수 없는 소리다. 영원히 죽지 않는다던 그도 역시 죽었다. 문정열 자서전 ‘샬롬 요엘’에서도 재미있는 표현이 있다. 그의 자서전 P257 이하에 나오는 이야기,
[ 이단종교의 자칭 하나님인 교주가 54세에 지병인 당뇨합병증으로 1967년에 사망했을 때 무슨 하늘의 뜻이 있다고 하면서 그의 옥체(玉體)를 어느 공동묘지에 임시 가매장 했다. 그리고 얼마 후 경기도 소사면 소래리 (박O선의 신O촌에서 서쪽 방면)에 있는 산을 단장 하더니, 가매장한 공동묘지에서 시신을 파내어 이곳으로 이장(移葬)을 하였다. 그리고 왕릉처럼 무덤을 성역화 해 놓고(그 곳을 성지(聖地)라고 불렀다) 전기불도 없는 캄캄한 밤 산속에서 한 두 시간에 한 번씩 나는 랜턴을 들고 순찰을 하며 하나님(?)의 무덤을 지켰다. ] -문정열 자서전 ‘샬롬 요엘’ P261-
창조주 하나님이 죽어 이땅에 묻혔고 그 하나님의 무덤을 지켰다는 해병대 출신 사나이의 실화 경험담이다. 기장 신O촌(제3신O촌)도 박O선의 묘가 산위에 자리잡고 있는 곳이다. 묘소의 진입로 쪽으로는 차단기가 설치되어 있어서 차량이나 일반인의 출입은 금지되어 있었다.
기장 신신촌의 중심부에 있는 어느 건물 한 칸에는 가로로 된 스텐 봉으로 만든 샷터를 설치해 놓고 그 안에 아주 오래된 고급 외제차(링컨 70년형) 한 대가 주차되어 있다. 밖에서 안이 훤히 들여다 보이는 구조다.
박O선 장로가 생전에 타고 다녔다는 차량이 주차해 있는 차고다. 지금도 하루에 한번씩은 엔진에 시동을 걸어 상태를 점검하고 박O선 장로가 살아 돌아오면 언제든지 탈수 있도록 만반의 준비를 해 두고 있다는 차량이다.
산위의 묘지에 묻힌 박O선이 어느날 살아서 뚜벅뚜벅 걸어 묘소가 위치한 산에서 아래로 내려오는 도로의 그 차단기를 열어 제치고 나타날 것을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고있는 행복한 사람들이 모여 살고 있는 신O촌, 그곳에 여든은 넘었을법한, 박O선 장로의 생전에 충성을 바쳤을 법한 허리가 굽은 할머니 한분이 걸레로 1970년형 링컨이 주차된 차고 샷터의 가로 스텐봉을 정성스레 닦고 있었다.
감람나무(박O선 장로)께서 다시 살아 오시면 타실 차량인데 정성을 다하여 관리를 하고 있는것이다. 걸레로 손질하는 모습이 무척 행복(?)해 보였다. 신앙이란 이런 것이던가, 이단이든 삼단이든...
내가 말을 걸어 볼려고 하니 안내하는 사람이 말을 건네지 말라고 한다. 대답도 안 할 뿐더러 외부의 사람들과는 높은 방호막을 쳐놓고 아예 상대를 안 한다는 것이다.
다시 살아 돌아올 동방의 의인 감람나무를 기다리며 차고의 스텐봉이 녹이 쓸새라 정성스레 닦고 있던 그 행복(?)해 보이는 할머니를 보면서 나는 문득 옛 세칭 동방교의 동료요 자서전 ‘샬롬 요엘’의 저자인 ‘문정열 요엘’의 큰누님을 떠 올렸다.
그 누님도 아마 여든이 가까웠으리라, 자서전에서도 밝혔듯이 20대의 젊은 시절부터 고무공장 여공의 월급을 몽땅 바치다시피 섬기고 대기처로 들어가 어떤 고생도 마다않고 평생을 한눈 팔지않고 오로지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창조주인 할아버지(노광공)를 한치의 의심도 없이 믿어왔던 그분이 이제는 할아버지(노광공)의 은혜속에 얼마나 행복한 노년을 보내고 계실까...
튜울립 꽃이 만발한 화단앞에서 정장을 차려입고 만면에 미소를 머금으며 양복 윗도리의 주머니에 엄지를 밖으로 드러내고 양손을 찔러 넣고 서 있는 박O선 장로의 카리스마 넘치는 생전 모습(이 사진속의 포즈는 노광공이 즐겨하는 것이기도 하다)이 담긴 대형 사진틀이 지금도 버젓이 버티고 서서 신자들을 굽어보고 있는 이곳 신O촌,
인터넷에서 다음의 글을 검색했다.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의 거물, 박O선의 신O촌에서 자란 젊은이가 어떻게 이토록 올바른 방향으로 성장할 수 있었을까! 가히 감탄스럽다. 올린이의 양해를 구할 수 없어 원문 그대로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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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03.24 | Daum 카페
갑자기 이런 글을 쓰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한번 써보렵니다!!~
박O선장로(전O관)에 대한 기억 -정야베스-
제가 신O촌(경기도 부천시 소재-옛날에는 부천군 소사읍)에 입주하던 때가 네 살이었으며, 부모님의 신앙따라 들어옴-그해가 1959년 박O선의 카리스마는 전국이 들썩거릴 정도로 대단하였다 합니다!!
한강 백사장에서 부흥회를 할라치면 가마니로 금가락지를 거둬 들일정도로 인기를 얻었지요!
저의 모친도 위장병이 심했는데 이 양반의 도움으로 나았지요!! 그리하여,전국에서 신앙으로 살아보겠다 하여 ,고향산천을 등지고 오만여명이 모여 한마을을 이루게 됩니다!!~그래서 `신O촌`이라 부르게 됩니다. 사진에서 보듯이 산꼭대기에 오만제단 이라는것이 있는데, 실제로는 몇천명이 들어갈 정도입니다!!
그러나 이시대 상황으로서는 엄청난 일이 었지요!! 신O촌의 예배형태가 특이 합니다!!~ 남녀가 양쪽에 앉아 찬송가를 부르는데,.한번으로 부르는것이 아니라 수십번을 반복해서 부릅니다! 지금도 기억나는 찬송가가 있지요!!
``천년성 거룩한땅 들어가려고 오늘도 모여왔네 우리 성도들``
예배볼때 박수의 원조가 어딘줄 아십니까?..신O촌 이지요!! 수십번의 찬송가와 요란한 박수소리는 묘한은혜(?) 분위기를 창출해 냅니다. 게다가 이때에 144000의 설교가 나옵니다!!~ 그 어린나이에도 장가도 못가보고 이세상의 종말이 오나부다 하고 걱정했지요!!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박O선은 일본에서 살았으며,.레스링 선수이기도 하며 역도산의 제자이기도 하였지요!!.그리하여 그의 풍채는 아주 건장했으며 보기에도 미남형 이었습니다!!~ 박O선의 카리스마는 그의 특유한 설교와 안찰과 생수에 있었습니다!!
원고없이 즉흥적으로 쏟아내는 설교는 수천명을 사로잡을만 했구요! 그의 안찰솜씨는 많은이의 병을 고쳤지요!! 그리고 생수(박O선이 축복한물)는 거의 절대적으로 믿었지요. (시체에 바르면 부드러워 지는것을 신비로 여김) 제 어린나이에도 박O선이 강대상에서 설교하면 파란불이 튀는 현상을 직접 봄..
그러나 그렇게 박O선(영모님으로 불렀으며 이긴자 감람나무 라고도 함)을 믿는 부모님들을 우리 세대들은 이해를 못했지요!!..뭘 믿는건지 .. 오죽하면 우리들(그때 중학교 1학년)은 이런 이야기를 한적이 있습니다!! 아직도 부모님들이 철이 안들어서 우리를 이고생 시킨다구 했지요!! 우리는 짱박이라고 불렀습니다.
벌써 우리는 박O선의 아들 박O명이가 바람둥이로 놀아나는것을 알았지요! 그때 당시(중학교때) 유명한 여가수(지금도 이름대면 깜짝놀라걸요)를 데리고 잤다는둥.. 여러가지 잡음이 많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몇년후에 세상을 떠들썩 하게 7공자 스캔들이 매스컴에 오르 내렸지요!!~
우리는 그곳 신O촌에서 건실하게 살았지요! 소사(부천)에는 복숭아가 유명 했지요..그러나 선악과라 하여 못먹게 했구요!! 미꾸라지,돼지고기 이런것도 못먹게 하였지요.. 신O촌의 세력이 무너진 원인중의 하나는, 박O선의 본처가 죽자 새장가를 들었는데 처녀장가를 갔지요!!~
이때에 많은 사람들이 실망하여 떨어져 나갔습니다!!~ 신앙으로 산답시구 남편과 헤어져 들어온 이들이 많았으며, 시집안간 처녀들이 많았지요. 아마 1970년 정도 일겁니다!!
한가지 특이한것은 본인이 새장가를 들어 자식까지 낳을 정도인데, 설교내용은 부부끼리 자는것도 음란이라 하여 금한다는 겁니다!!~ 이때부터 해괴한 소리가 절정에 달합니다!!~ 내가 오천몇살 이라구 하며,..피가름의 원리를 적용하여 자신이 제일 깨끗하다는둥..
그리고 성경은 98%가 거짖말이며,.노아홍수로 인간을 쓸어버린 하나님이 대마귀라는둥.. 좌우지간 상식이 안 통하는 소리를 마구 해 댑니다.. 이렇게 막판으로 몰리게 된 배경에는, 그의 경제활동 때문이 아닌가 합니다..
소사(부천) 신O촌에 이어 덕소(경기)로 신O촌을 옮김니다.. 그리고 부산옆에 있는 기장 신O촌까지 이르게 됩니다!!~ 한국의 경제상황에 발맞추어 그도 따라서 움직였지요!!
1980년 이후 박O선이는 기독교와 상관없는 독자적 종교인, 천O교를 만들었지요.. 전O관 (그 교세가 100만에 이를정도 였는데 지금은 거의 쇠퇴함)에 걸었던 십자가는 떼어버리고 그자리에 비둘기 형상이 걸려 있지요!!
마침내 영원히 살것만 같았던 박O선이 1990년 죽다.. 1917년생이니까 74세에 죽었네요..그런데 신기한것은 `천O교`라는 이름으로 그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겁니다!!
이슬성신을 믿으며 죽은 박O선이를 예수처럼 믿는것 이외다!!~ 일반사람들은 상당히 의아해 할겁니다!! 그렇게 몰상식하게 신앙을 이끌고 있는데, 그렇게 무지하게 따라 다니는 것은 무엇이냐? 인간은 집단 의식화가 되면 빠져 나올길이 없답니다!!~
이슬람권에서 알라를 배척하면 그 사회가 그를 매장하듯이, 인간관계..생활이 얽혀 있으면 쉽게 나올수 없답니다!!~ 신앙도 상식이 통해야 합니다!!~ 온갖 기적과 능력을 행하여도 그것을 믿으면 안됩니다!!~
저 자신은 중학교까지 그곳에 머물렀지요. . . 지금도 초딩이 동창회를 하면 몇십명이 모여서 그때 이야기를 합니다.. 교회에 나가는 친구들이 더러는 있으나,. 하두 우리 부모님들이 극성(?)을 떨어놔서, 교회라고 하면 머리를 흔들지요!!
체험(온갖 이적과 기사)이 좋은것 같으나,.항상 말씀에 비추어 살아가야 합니다!!~ 교리나 신조를 무시하게 되면 ``내가복음``되어 박O선짝 납니다!! ~
2009. 03. 25
이단의 추억 #21, 사이비 이단의 교주
무당벌레의 사기행각에 관한 코메디 같은 재미있는 유모어 글 하나가 생각이 난다. 점을 보러 온 곤충들을 속여 거액을 갈취해 온 무당벌레가 신고를 받고 출동한 경찰에 잡혔다. 무당벌레는 하루살이에게 “재물을 바치고 굿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다”고 현혹시켰는가 하면, 모기에게 “부적을 붙이고 사람의 피를 빨아 먹으면 큰 잠자리가 될 수 있다”고 속여 소문을 듣고 찾아 온 곤충 고객들에게 가짜 부적을 팔아 거액을 갈취해 온 혐의를 받고 있다. 하 하 하. . .
“도를 아십니까?” 대학가에 살고 있는 나는 가끔 대학가 거리를 걷다보면 이런 물음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을 만나게 된다.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누구인가를. 그리고 왜, 어떤 목적으로 접근하는지를. 이단사설에 사로잡혀 일생을 허비하고 있는 그들을 바라보는 나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데 없다. ‘아이구 이일을 어찌 할꼬!’ 깊은 탄식이 폐부에서 우러 나온다.
그러나 두 말 붙이지 않고 가던길을 바삐 지나가 버린다. 내가 아무리 설득하고 설명해도 곧이 들을 그들이 아닌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남편과 자식을 버리고 아내를 가출하게 하는 등 천륜파괴와 가정파괴의 만행을 다반사로 자행하고 엄청난 액수의 성금을 갖은 방법을 다해 갈취하는등 많은 사회문제를 일으켰던 광(狂)적인 무리들이다.
이런 무리들도 있다. 두 세명씩 짝지어 다니면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접근하여 “대학에서 설문조사 나왔습니다. 잠간이면 됩니다. 시간 좀 내 주세요”하면서 접근한다. 얌전해 보이는 젊은 사람이면 좋고 약간의 학식이 있어 보여 토론을 걸어오면 더 좋다. 시정잡배는 상대하지 않는것이 그들의 불문율이다.
또는 두 세명이 같이 다니면서 호별방문을 하여 자기 종파를 선전하거나 신앙공부를 하자면서 찰거머리같이 달라 붙어서 궤변 사설을 늘어놓고 약간의 관심만 보여도 끈질지게 찾아오기도 한다. 설문중에는 사람의 호기심을 유발시키는 항목들이 몇 개 있다. ‘종교를 가지고 있습니까’로 시작하여 ‘하나님 어머니라고 들어보셨습니까’ 라는 항목으로 관심을 끌어놓고 온갖 잡설로 유혹한 뒤 인근에 있는 그들의 집회장소로 데려가는 것이다. 낚시밥에 걸려든 것이다.
물론 나는 알고 있다. 그들이 누구인가를. 대학가에 살고있는 나는 그들의 모습을 자주 발견한다. 인근에 그들이 세들어 있는 집회장소인 예배당(?) 건물이 있기 때문이다. 누가 시킨다고 이렇게 할까, 인간의 종교심, 더구나 이단사이비 종교집단의 추종성은 정말 제어하기 어렵다. 유혹의 마약이요 끊을 수 없는 아편인 것이다.
내 나이 40대 중반이던 1994-5년도쯤의 어느 겨울날이던가, 나는 어떤 좌석에서 우연히 중학교 동기생 친구 한 명을 만나게 되었다. 평소에 잘 알지 못하던 친구였지만 중학교 동기생이라는 인연 하나만으로 우리는 금방 친구가 될 수 있었고 여러 가지 이야기를 주고 받을 수 있었다.
그의 인상은 특이했다. 두 눈썹 사이로 흘러내린 콧대가 움푹 꺼지고 콧망울만 둥그렇게 솟아있는 관상으로 보아 인생초반의 팔자가 형언할 수 없이 어려웠으리라 짐작되었다. 나는 관상쟁이가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알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조실부모하고 무척이나 고단한 소년기를 지냈다고 이야기 하고 있었다.
계속되는 이야기중에 “그런데 큰아들이 이번 대학입시에 OO대학교에 합격해서 내년에 입학해야 하는데 보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네” 하는 것이었다. 내가 “합격했으면 보내면 되지, 왜?” 하니 “개벽의 천지공사편을 보면 내년 아니면 내후년이 개벽되는 해인데. . . ” 하는것이 아닌가.
그는 증O도의 신도였다. 신도도 보통 신도가 아니라 개벽이 되면 그는 국무총리급의 직책을 받게되는 굉장한 고위직의 신도라는 것이었다. 그동안 그만한 공력을 쌓아 놓았다는 것이다. 믿어야 될지 말아야 될지, 물론 허구 투성이인 것은 이미 옛날부터 알고 있지만. 나는 “그라믄 그때 잘 좀 부탁한데이. . . ” 하고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나누다가 헤어졌다. 그리고 다시는 그 친구를 두 번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없었다.
그때 그 아들이 대학에 들어갔는지 어쨌는지 알길도 없다. 벌써 20여년의 세월이 흘렀으니 그는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통상의 이단사이비 종교집단들이 써 먹는 방법으로 개벽이 연기되었다고 말하고 있을까, 아니면 또 다시 내년 아니면 내후년이라고 억지를 부리고 있을까. 안타까운 개벽의 기수들. . .
한국의 기독교 이단을 추적해 가다 보면 김백문(初圓 金百文)이라는 이름이 등장한다. 그에게서 박O선, 문O명등이 사사했고 박O선은 전O관으로 문O명은 통O교로 각각 일가를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들에게서 영향을 받았거나 그 휘하에 있다가 JMS집단을 형성한 정O석, 승리제단 영생교 조O성, 세칭 동방교 노광공, 그리고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신O지 증거장막성전 이O희등 숱한 걸출한 인물들이 나타나게 된다.
결국은 나도 그 줄기에 속했던 한 가지가 된다. 계보상 그렇다는 이바구다. 나도 이단사이비 집단을 하나 만들어 그 교주가 되어볼까. 인간의 특성중에 하나가 ‘나를 강력히 주장’하면 반드시 따르는 무리가 생기게 되어있다. 특히 그것이 영계의 법칙이라, 그래서 이단사이비도 생기고 한번 궤도에 오르게 되면 망하지 않고 번성하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 먹고 사는것이 해결되고 나면 사람가지고 노는 일이 제일 재미있다는 말이 있다. 그래서 출세도 하고 싶고 직위도 올라가고 싶은 것이다. 인간의 영혼을 도적질해서 휩쓸고 다니면서 가지고 노는 일이 얼마나 신나는 놀음일까.
이리 저리 둘러 쳐 대는 잡설은 자신있다.
이참에 하나 차려 볼까.
얼마나 재미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