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ET 가 시행될 8월 넷째 주 일요일은 의학전문대학원 시험인 M/DEET 가 시행되는 날짜이기도 한다. 교육부에서는 문제 출제나 시행과정의 번거로움과 어려움으로 인해, LEET의 언어이해 시험문제를 M/DEET의 언어추론과 일부 문제를 공유하거나, 같은 문제를 칠 것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한다. 그러므로 PSAT의 언어논리 문제보다도 더욱 심도있게 살펴봐야 되는 시험 문제가 바로 언어추론 기출문제이다. 이번에는 그 언어추론 문제 중에서 가장 최근에 출제된 철학영역 문제에 대해 살펴보겠다. 보다 심도 깊은 해설을 원하는 사람은 학원 게시판에 있는 필자의 무료특강 강좌에서 이 문제와 언어이해 시험 전반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해두었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 다음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 아리스토텔레스는 피해야 할 세 가지 도덕적 상태로 ‘악덕’, ‘짐승 같음’과 더불어 아크라시아(akrasia)라고 불리는 ‘자제력 없음’을 든다. 통상 자제력 없음은 스스로 최선이라고 이성적 판단을 내린 것과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정의된다. 그런데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사람은 어떤 것이 나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것을 할 수는 없다. 그에 의하면 모든 악행은 무지의 탓일 뿐이다. 그러니 ㉠통상의 의미에서의 자제력 없음이란 소크라테스의 견해에서 보면 성립하지도 않는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소크라테스의 주장이 실제와 배치된다고 지적한다. 알면서도 자신이 내린 최선의 판단에 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경우가 실제로 많다는 것이다. 자제력 없는 사람도 유혹에 넘어가기 전에는 그 나쁜 행위를 하지 말아야 한다고 명백히 생각하고 있다. 다만 그것이 나쁜 일인 줄 알면서도 어느 순간에 욕망을 이기지 못하고 그 나쁜 행동을 선택할 뿐이다. 건강을 위해 식사량을 줄여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음식 앞에서 무너지는 경우를 자제력 없음이라고 본다면, 그런 예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아크라시아를 욕구를 자제하지 못하는 경우와 분노를 자제하지 못하는 경우로 나눈다. 다이어트에 실패하는 사람의 경우, 음식에 대한 욕구가 지금 먹어서는 안 된다는 이성의 통제를 적어도 그 순간에는 제압한 듯이 보인다. 분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의 경우, 자신이 모욕을 당했음을 이성이 알려 주고 그런 일에 대해서는 마땅히 싸워야 한다고 감정이 이끌어 가서 분을 자제하지 못하는 것이다. 욕구에 대한 자제력 없음이 분노에 대한 자제력 없음보다 더 부끄러운 이유는 이성의 역할이 훨씬 더 무시당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크라시아는, ‘악덕’ 중의 하나로 아콜라시아(akolasia)라고 불리는 ‘무절제(방종)’와 어떻게 구별되는가? 아크라시아와 아콜라시아는 육체적 욕구와 쾌락의 영역에 관계된다는 점에서는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격정, 명예, 승리 등 육체적인 쾌락이라 할 수 없는 것들도 아크라시아에 빠지게 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크라시아가 관련되는 대상의 영역이 더 넓다. 대상의 영역만 다른 것이 아니다. 어떤 사람은 쾌락을 필요 이상으로 추구한다. 그것도 이성적 선택에 의해서 쾌락 자체를 추구한다. 그런 사람이 무절제한 사람이다. 무릇 이런 사람은 뉘우침이 없고, 뉘우침이 없는 자를 고칠 수는 없다. 뉘우침이 없는 것은 확고한 이성적 결정에 따라 행동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그런 확고한 이성적 선택이라는 계기가 없는데도 과도하게 쾌락을 추구하는 사람이 자제력 없는 사람이다. 바로 이것이 알면서도 자신의 앎과 다르게 실천한다고 하는 경우다. 자제력 없는 사람은 올바른 이치에 따라 행동하지 못할 만큼 욕구와 분노에 지배당하지만, 그 쾌락을 무한히 추구해야 한다고 생각하게 될 정도까지 지배당하지는 않는다. 그러므로 자제력이 없는 사람은 마음을 돌리도록 쉽게 설득되지만, 무절제한 사람은 그렇지 않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제력이 없는 사람이 무절제한 사람보다는 낫고, 또 무조건 나쁘지도 않다고 보았다. 그가 당초에 최선이라고 생각했던 것을 버린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
1. 위 글의 내용과 부합하는 것은? ① 아크라시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성이 감정에 양보해야 한다. ② 아콜라시아의 촉발에 관련되는 대상은 아크라시아의 경우보다 다양하다. ③ 아크라시아의 경우에 겪는 이성과 욕구의 갈등이 아콜라시아의 경우에는 없다. ④ 아크라시아 상태에 빠지는 것은 그 전에 내린 이성적 판단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⑤ 아콜라시아 상태에서는 이성적 선택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윤리적 판단이 불가능하다.
2. 아콜라시아의 사례에 해당하는 것은? ① 수험생 A군은 컴퓨터 게임만 시작하면 날밤을 새우는데, PC방 앞을 지날 때마다 오늘은 조금만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PC방에 들어간다. ② 속도광 B씨는 질주할 때 느끼는 스릴을 사랑하는데, 스피드에 대한 그의 멈추지 않는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 ③ 자신의 패션 감각이 남보다 낫다는 평판에 자부심이 대단한 C군은 수입의 거의 전부를 자신의 외모를 꾸미는 데 지출한다. ④ D씨는 아내의 권유에 따라 해마다 연초에 금연을 시도하지만 작심삼일로 끝나곤 한 지가 벌써 십 년이다. ⑤ 국가 대표 선수 E군은 국위 선양을 위해 가까운 친지의 장례식 참석도 포기한 채 매일 연습에 매진한다.
3. ㉠에 대한 진술로 옳지 않은 것은? ① 아콜라시아의 가능성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다. ② 악행은 결국 행위자 자신에게도 나쁘다는 것을 함축한다. ③ 인간이 이성적인 한 나쁜 것을 원할 수는 없음을 전제한 진술이다. ④ 앎은 좋음이요, 무지는 나쁨이라는 점이 인정되어야 성립하는 견해이다. ⑤ 아크라시아는 ‘둥근 사각형’처럼 일종의 모순이라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해설> > 윤리학의 문제는 인식론과 함께 철학의 중요한 축을 이루며 시험에서도 자주 출제되는 분야이다. 칸트의 형식주의 윤리학에 대한 대학교양 수준의 사고틀이 있다면, 이 문제를 푸는데 도움이 된다. 윤리학에 관해서는 많은 철학이 그렇듯이 칸트에 모여서 칸트에서부터 다시 분화된다. 그만큼 칸트의 윤리학 체계를 이해한다는 것은 앞으로 윤리학의 문제의 기초 뿐만 아니라, 거의 전부를 알아나가는 것이다. 이 제시문도 이러한 욕구와 이성적 제어, 그리고 목적론에 대하여 다루고 있고 이는 윤리학의 큰 틀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칸트의 윤리학을 형식주의라고 부르는 것은 많은 사람들이 오해하듯이, ‘정언명법’으로 대표되는 객관적인 도덕법칙의 우월성을 주장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내가 나의 준칙에 의하여 동시에 과연 법칙을 내줄 수 있나 없나를 묻는다” (실천이성비판, 31-32) 여기서 우리는 동시에 라는 표현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덕적 법칙을 지켜야 한다는 의무에 대한 생각은 내 안에 존재하는 욕구의 지향성과 더불어 동시에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도덕적 판단안에 항상 존재한다. 칸트의 유명한 말인, “네 의지의 준칙이 항상 동시에 보편적 입법의 원리를 타당하도록 행하라” 라고 하는 글 안에서도 우리는 그 형식을 확인할 수 있다. 칸트는 의지로 표현되는 사람의 경향성과 사회나 공동체 안에서 존재하며, 내 행동을 제약하는 보편적인 도덕법칙의 충돌을 말한다. 이는 도덕적 행동이 목적이나 결과에 따라 그 행위자에 의해 고려될 수 있다는 것으로 도덕적 상황의 형식을 설명한 것이다. 도로가 아닌 차도를 무단횡단한다고 할 때, ‘횡단보도로만 길을 건너야 한다’라고 하는 도덕적 원칙이 나한테 떠오를 것이다. 하지만, 앞에 10년만에 만나는 빚쟁이나 옛날 애인 같은 사람을 만났을 때, 즉, 길을 빨리 건너서 저 사람을 잡아야(?) 한다는 욕구가 워낙 강할 때에는 도덕적 법칙이 그리 큰 역할을 하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칸트가 권고하는 것은 가능한 내 안에 있는 도덕적 준칙을 따를 것을 권고한다. 칸트의 마지막 말에서도 볼 수 있듯이... “별이 빛나는 하늘과 내 안의 도덕 법칙” 이 제시문에서도 아크라시아는 이성적 판단과 쾌락이라는 의지의 갈등에서 쾌락의 부분에 굴복하였음을 말하고 있다. 아콜라시아의 경우 순수한 육체나 감정의 영역에만 관여하지만, 아크라시아는 명예욕이나 지식욕과 같은 정신적인 차원의 욕구도 인정하고 있다. 하지만 이 모두 자아, 욕구와 도덕적 법칙에서 오는 갈등을 벗어나지 않는다는 점에서는 같다.
1. 위 글의 내용과 부합하는 것을 묻고 있다. 답은 ③ 이다. ① 아크라시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이성이 감정에 양보해야 한다 => 이성과 감정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② 아콜라시아의 촉발에 관련되는 대상은 아크라시아의 경우보다 다양하다. => 아크라시아의 범위가 이성적인 부분을 포함하기에 훨씬 넓다. 순서가 바뀌어 있다. ④ 아크라시아 상태에 빠지는 것은 그 전에 내린 이성적 판단이 애매하기 때문이다. => 이성적 판단이 있다 할지라도, 그 것이 욕구와의 갈등에 굴복하기 때문이다. ⑤ 아콜라시아 상태에서는 이성적 선택이 배제되어 있기 때문에 윤리적 판단이 불가능하다. => 아콜라시아는 무절제란 뜻이다. 행위를 할 때, 이성적 판단이 배제되어 감정에 치우친 행동을 한다는 것과, 나중에 이것을 윤리적 기준에서 판단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다. 우리가 술을 지나치게 마신 후에, ‘내가 너무 많이 마셨어’와 같은 판단이 가능하듯, 윤리적 판단은 가능하다.
2. 아콜라시아의 사례에 해당하는 것을 묻고 있다. 아콜라시아는 감정에만 관여하는 상태이므로, 이성적 제어장치가 들어간 것을 제외하면 된다. 답은 ② 이다. ① 수험생 A군은 컴퓨터 게임만 시작하면 날밤을 새우는데, PC방 앞을 지날 때마다 오늘은 조금만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PC방에 들어간다. => 오늘은 조금만 해야지 라고 하는 마음으로 PC방에 들어간다. ② 속도광 B씨는 질주할 때 느끼는 스릴을 사랑하는데, 스피드에 대한 그의 멈추지 않는 사랑은 그 어떤 것으로도 막을 수가 없다. => 스릴은 감성적 쾌락으로 반성이나 뉘우침에 대한 부분이 선택지에 드러나 있지 않다. ③ 자신의 패션 감각이 남보다 낫다는 평판에 자부심이 대단한 C군은 수입의 거의 전부를 자신의 외모를 꾸미는 데 지출한다. => 스스로의 행동에 대한 이성적인 고려와 평가가 자부심으로 드러나 있다. ④ D씨는 아내의 권유에 따라 해마다 연초에 금연을 시도하지만 작심삼일로 끝나곤 한 지가 벌써 십 년이다. => 권유를 따라야 한다는 개인적인 숙고가 드러나 있다. ⑤ 국가 대표 선수 E군은 국위 선양을 위해 가까운 친지의 장례식 참석도 포기한 채 매일 연습에 매진한다. => 개인적 욕구에 대한 부분이 아니다.
3. ㉠에 대한 진술로 옳지 않은 것을 묻고 있다. 답은 ④ ① 아콜라시아의 가능성까지 부정한 것은 아니다. => 소크라테스는 알면 바로 행한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잘못 안것에 대한 즉각적인 행동은 아콜라시아의 상태와 닮아있다. ② 악행은 결국 행위자 자신에게도 나쁘다는 것을 함축한다. => ‘사람이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할 수는 없다’라는 제시문의 내용에서 추론할 수 있다. 또한 악행이란 말을 풀어서 쓰고 있다. ③ 인간이 이성적인 한 나쁜 것을 원할 수는 없음을 전제한 진술이다. => 위의 문장 ‘사람이 나쁘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을 할 수는 없다’를 다시 풀어 쓰고 있다. ④ 앎은 좋음이요, 무지는 나쁨이라는 점이 인정되어야 성립하는 견해이다. => ‘모든 악행은 무지의 탓일 뿐이다’ 소크라테스는 무지에 대한 선악판단이 중립적임을 말하고 있다. 제시문에서 ‘성립하지도 않는다’는 말에서 보듯이 좋음과 판단유보의 상태가 있을 뿐이다. 선악판단의 분명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이고 2번째 단락에서 확인할 수 있다. ⑤ 아크라시아는 ‘둥근 사각형’처럼 일종의 모순이라는 생각을 표현하고 있다. => 소크라테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아크라시아의 개념자체에서 이성과 쾌락이 낳는 갈등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는 논리를 펴 모순된다고 보는 입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