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모님이 오랜 병고 끝에 별세했다. 긴 병수발과 어머니를 여윈 슬픔에 심신이 지친 아내를 위로하고자, 시간을 쪼개어 동남아 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베트남의 유네스코 세계 자연유산을 등록된 하롱베이와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일컫는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를 탐방하는 4박 6일간의 패키지여행이다.
여행에 합류한 인원은 20명이었다. 강원도 태백 소재 초등학교 동기생 모임에서 온 남녀 각 7명씩, 14명과 부산 사는 부부 세 쌍, 6명으로 원팀을 구성하여 여정을 함께 하게 되었다. 남녀 동기생들의 연령이 그 시절 호적 난맥상을 대변하듯 53년부터 56년생에 걸쳐 있었고, 부산 남자들의 나아가 절묘하게도 범주 안에 들었다. 부산 여자끼리도 62세 이쪽저쪽이라 팀 전체가 흉허물없이 지낼 수 있는 여건이 잘 마련된 모양새다.
저가 항공이란 명분으로 출발할 때부터 정해진 시간에서 2시간 가까이 지연되더니, 기류가 불안정한 곳에서는 마치 롤러코스터 같은 전율을 제공한다. 적당한 긴장감 속에서 4시간 30분을 날아 하노이에 도착했다. 특이하게도 공항 내에는 한국인 가이드가 들어올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래저래 불편한 점이 많다. 오찬 후, 버스로 또 3시간 30분을 달려 하롱베이에 있는 호텔에 짐을 푸는 것으로 첫날의 긴 여정은 끝난다.
다음날 하롱베이를 접했다. 호수 같은 바다 위에 온갖 형상을 한 섬들이 우리를 포근하게 감싸 안으려는 형국이다. 이 세상 것 같지 않은 풍광에 우리는 이미 천상의 세계에 와 있는 듯, 신선처럼 고고한 표정들을 짓고 있었다. 그렇게 천혜의 선물에 마음을 맑게 하고, 몸에 쌓인 여독을 풀기 위해 깨끗한 건물 입구로 들어섰다. 대기하고 있던 남녀 마사지사가 냉큼 손을 낚아챈다. 여자는 어린 남자가, 남자는 여자 마사지사가 서비스를 제공하는데, 여기서 여행 내내 애용하는 말이 탄생하게 된다.
여자를 마사지하던 남자 마사지사가 근육이 뭉친 부위를 누르며 서툰 한국말로 “엄마, 좋아?” 하고 묻자, 여자 동기생이 으레 인사치레로 하는 “좋다”라는 말 대신에 정말 좋았던지 신음 비슷한 소리로 “으흐응, 정말 좋아!” 했던 모양이다. 이것이 남자 동기생들 귀에까지 들어가서, 빤하면 “ㅇㅇ야! 좋아? 그러면 1달러!”하고 놀림의 말로 탈바꿈하였다.
여기서 ‘1달러’가 왜 놀림의 대명사가 되었는지를 소개하고자 한다. 무비자의 베트남과 달리 캄보디아는 하노이에서 비행기로 1시간 반을 날아 입국하면서 비자 신청서, 출입국신청서, 세관신고서를 영어로 작성해서 재출해야 한다. 가이드가 공항 내에 들어와서 도움을 줄 수 없는 정황상 어려움이 발생할 수밖에 없는 구조였다.
줄이 길게 늘어서 있는 어수선한 분위기에서, 신고서의 잔글씨는 흐릿하게 보이고, 잘못 작성하면 옆에 세워둔다는 말도 들리고, 짐도 빨리 찾아야 하는 진퇴양난이란 이를 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런데 베트남에서 입수한 사전 정보로, 우리는 긴가민가하면서도 모두 여권에 1달러를 끼워서 신고서와 함께 제출하는 일사불란함을 선보였다. 그때 믿기지 않는 반전이 일어났다. 공무원이 이래도 되나 싶을 정도로 대기하고 있는 다른 나라 사람의 시선 따위는 아랑곳없이, 이때까지 진행해 온 지문 채취를 생략하고 순식간에 관문을 통과시키는 은혜를 시전한 것이다.
입국 후 만난 캄보디아에 있는 한국인 가이드의 말에 따르면, 우리 팀이 모두 통과하는데 1시간 40분이 소요되었음에도 다른 때 온 팀보다 30분 정도 일찍 나왔다고 한다. 그리고 이 나라의 공무원은 워낙 박봉이라서 급여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절박한 처지에 놓여 있다고 한다. 모두 들 우리의 70~80년대에 성행한 급행료의 형태와 똑같다고 씁쓰레한 표정이었다.
이렇게 과거 속으로 잠시 시간 여행을 떠나게 한 것은 이 패키지의 선택 품목인 모양이다.
다음날 보게 된 앙코르 와트의 웅장함은 이 사원을 두고 왜 세계 7대 불가사의라고 일컫는지를 새삼 깨닫게 하는 감동의 연속이었다. 앙코르 톰에서의 덜컹거리는 이동 수단의 불편과 푹푹 찌는 살인적인 찜통더위는 마치 인내심의 끝이 어딘지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그래도 다들 묵언 수행하듯 묵묵히 전진한 것은 고색창연한 석조 건축물에 깃든 앙코르 범아일여(梵我一如)의 염원이 알게 모르게 우리들 마음속으로 깊숙이 스며들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마지막 날은 캄보디아의 한 정치인이 저지른 만행의 현장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노동자와 농민의 천국으로 만들겠다는 명분 아래 지식인뿐만 아니라 그의 자녀들까지, 무려 전 국민의¼에 해당하는 200만 명을 학살했다는 가이드의 말에 아예 말문을 잃어버렸다. 더구나 와트 마이 사원의 탑에 모셔놓은 희생자 유골의 대부분이 어린아이라는 말에는 솟구치는 분노를 주체할 수가 없었다.
다음 목적지인 동남아에서 가장 큰 담수호라는 톤레사프 호수의 사정도 암울하기는 매한가지였다. 물 위에 집을 짓고 사는 수상가옥 주민의 대부분이 베트남 전쟁 당시 승자의 반대편에 섰던 정치적 난민들이란다. 전기가 들어오지 않아 선풍기도 하나 돌릴 수 없는 열악한 환경 속에서, 뗏목처럼 생긴 엉성한 뜰 판 위에 판자와 양철을 덧대어 집을 짓고 물고기를 잡아 생계를 이어간다는 말에는 국가가 얼마나 소중한지를 새삼 깨닫게 하였다.
귀국 절차에는 캄보디아에서 하노이 공항을 경유하는 과정이 있었다. 공항 내에서 4시간을 대기해야 하는데, 비행기가 또 1시간 연착하여 무려 5시간을 공항에서 지냈다. 그 와중에도 부산의 세 여자들은 그새 정이 듬뿍 들었는지 수다가 끊이지를 않는다. 나는 아내의 즐거워하는 모습에 위안을 삼으며 저가 여행의 서글픔을 달랬다. 드디어 비행기의 고른 기관 소리를 들으니 마음에 더할 수 없는 행복이 밀려온다.
아내는 금새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든다. 여행을 떠나올 때와 달리 한결 편안해진 모습이다. 장모님을 보살피며 홀로 외로웠을 시간, 좀 더 잘해주지 못한 일들이 회한으로 남는다. 오늘, 이 순간처럼 아내를 아끼는 마음으로 나머지 생을 살다 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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