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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禪軒 독서일기 2026년 5월 25일 월요일]
《 『환단고기』 [삼한관경본기] 》 (48)
第四 三韓管境本紀
太白山北走 屹屹然立於斐西岬之境 有負水抱山 而又回焉之處 乃大日王祭天之所也 世傳桓雄天王 巡駐於此 佃獵以祭 風伯 天符刻鏡而進 雨師 迎鼓環舞 雲師 佰劍陛衛 盖天帝就山之儀仗 若是之盛嚴也 山名曰不咸 今亦曰完達 音近也
後 熊女君 爲天王所信 世襲爲斐西岬之王儉 王儉 俗言大監也 管守土境 除暴扶民 以天王諭國人之意 戒之曰 父母可敬也 妻子可保也 兄弟可愛也 老長可隆也 少弱可惠也 庶衆可信也 又制醫藥工匠養獸作農測候禮節文字之法 一境化之 遠近之民 皆不相疑也
熊氏之所分曰少典 安夫連桓雄之末 少典以命 監兵于姜水 其子神農 嘗百草制藥 後徙列山 日中交易 人多便之 少典之別派 曰公孫 以不善養獸 流于軒丘 軒轅之屬 皆其後也
斯瓦羅桓雄之初 熊女君之後 曰黎 始得封於檀墟爲王儉 樹德愛民 土境漸大 諸土境王儉 來獻方物 以歸化者 千餘數 後四百六十年 有神人王儉者 大得民望 陞爲裨王 居攝二十四年 熊氏王崩於戰 王儉 遂代其位 統九桓爲一 是爲檀君王儉也 乃召國人立約曰 自今以後 聽民爲公法 是謂天符也 夫天符者 萬世之綱典 至尊所在 不可犯也
遂與三韓 分土而治 辰韓 天王自爲也 立都阿斯達 開國號朝鮮 是爲 一世檀君 阿斯達 三神所祭之地 後人 稱王儉城 以王儉舊宅 尙存故也
삼한관경본기
태백산이 북으로 내달리다가 비서갑의 경계에서 우뚝 솟아, 물을 등지고 산을 품으면서 또 휘돌아 싼 곳이 바로 대일왕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던 곳이다. 세상에 전하기를 환웅천왕이 여기까지 순행하다가 머물면서 사냥하며 제사를 지냈는데, 풍백은 천부경을 새긴 거울을 들고 앞서가고, 우사는 북소리에 맞춰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고, 운사는 백검을 들고 옆에 서서 호위하였으니, 대저 천제가 산에 올라서 치르는 의식이 이처럼 성대하고 엄숙했던 것 같다. 산 이름은 불함이라 하더니 지금은 또 완달이라 하니 그 음이 비슷하다.
뒤에 웅족의 여군주가 천왕의 신임을 받아 세습하여 비서갑의 왕검이 되었다. 왕검은 속어로 말하면 대감이니, 땅을 관리하고 지키며, 포악한 사람을 제거하여 백성을 돕는다. 천왕이 나라 사람들에게 가르친 뜻을 받들어 왕검이 백성들에게 경계하여 말하기를, 부모를 옳게 공경하고, 처자를 옳게 보호하고, 형제를 옳게 사랑하고, 어르신을 옳게 존경하고, 어리고 약한 자에겐 은혜를 베풀어야 하며, 뭇 백성들은 옳게 믿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의약, 공장, 축산, 농사, 측후, 예절, 문자의 법을 제정하니 한 경계 안의 모든 사람이 변화하였고, 멀고 가까운 사람들까지 모두 서로 의심치 않게 되었다.
웅씨(熊氏) 족에서 갈라져 나간 자에 소전(少典 염제 신농의 아버지)이라고 있었는데 안부련(安夫連 8세) 환웅 말기에 소전이 명을 받고 강수(姜水)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게 되었다. 그의 아들 신농은 수많은 약초를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뒤에 열산으로 이사하였는데 낮에는 그 약을 교역하게 하니 사람들이 많이 편리하였다. 소전의 다른 파에 공손이라고 있었는데 짐승을 잘 기르지 못하여 헌구로 유배를 갔다. 헌원의 무리는 모두 그의 후손이다.
13세 사와라 환웅 초기에 웅씨족 여군장의 후손인 여(黎)라고 하는 이가 처음으로 단허를 봉토로 받아 왕검이 되어서 덕을 심어 백성을 사랑하고 영토를 차츰 크게 넓히니 여러 곳의 왕검들이 와서 특산물을 바치면서 이에 귀화하는 자가 천여 명을 헤아렸다. 460년 후에 신인 왕검이라 하는 이가 있었는데 크게 백성들의 신망을 얻어 비왕이 되어 섭정한 지 24년 만에 웅씨의 왕이 전쟁하다가 붕어하니 왕검은 마침내 그 왕위를 대신하여 구환을 통일하여 하나로 하였으니 이분을 단군왕검이라 한다. 곧 나라 사람들을 불러 약속하기를, “앞으로는 백성의 뜻을 듣고 공법을 만들어 이를 천부(天符)라 한다. 대저 천부란 만세의 기강이 되는 법전으로 지극한 존엄이 들어있으므로 어기거나 범해서는 안 된다”라 하였다.
알맞게 어울리게 삼한으로 땅을 나누어 다스렸는데, 천왕이 직접 다스리는 진한(辰韓)은 도읍을 아사달에 세우고 나라를 열어 이름을 조선이라 했다. 이분이 1세 단군이다. 아사달은 삼신을 제사 지내는 곳으로 후세 사람들이 왕검성이라 불렀다. 후인들은 왕검의 옛집이 아직 있었기 때문에 왕검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논주] 이 기사는 군더더기 없는 간략한 고대사로서 단군왕검의 등장과 조선의 건국을 거의 사실대로 나타내고 있다. 이전의 환인시대와 환웅 신시시대 고대사는 사실의 비중은 적으면서도 많은 상상, 추측, 가설, 가필, 조작, 왜곡 등이 상당해서 후세인들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환인-환웅시대가 워낙 오래된 옛날이고 기록이 없기 때문에 우리 고대사가 그만 원형을 잃고 분식된 것들이 판치게 되었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환웅시대의 간략한 사실 몇 가지를 나타내고 있다. 먼저, 『삼국유사』에서 시조 환웅이 강림한 곳을 태백산이라며 지금의 묘향산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 글에서는 ’太白山北走 屹屹然立於斐西岬之境‘, 즉 “태백산, 즉 백두산이 북쪽으로 달려 올라가 비서갑의 지경에 이르러’라 한다. 태백산, 즉 백두산은 멀리서 보아도 우뚝하니 신성한 영산이다. 그래서 고금을 막론하고 신성한 곳으로 숭상하며 민족의 기원 신화가 탄생한 곳으로 설정하였다. 그러나 백두산은 신성한 영산의 상징이지 사람들이 모여 신시를 이루어 살만한 곳이 아니다. 물론 환인과 환웅, 운사와 우사 등 3천 무리가 하늘에서 강림할 이치도 없는 험산이다.
그래서 이 글의 저자는 일단 태백산을 신성한 영산임을 인정하면서 그 산의 정기가 북으로 치달아 올라 맺힌 곳을 비서갑 지경의 불함산-완달산으로 지정하고 있다. 완달산은 하르빈 근교에 있다. 그러므로 환웅족이 아무르강에서 남하하여 처음으로 자리 잡은 곳이 평야인 하르빈 지역이고, 그 지역에서 가장 높은 완달산을 선택하여 하늘에 제사를 지냈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웅족, 증 곰족을 대표로 한 여러 족속이 살고 있었다. 철기를 든 수렵인들인 환웅족에게 목기나 석기로 밭농사를 짓는 웅족은 애초부터 상대가 안 된다. 살아남는 방법은 오직 하나, 순종뿐이다. 강하지만 소수인 환웅족이 지배층을 형성했지만, 다수인 웅족을 포섭하지 않고서는 원활하게 살아갈 수 없다. 그래서 웅족과 타협하여 혼인 관계를 만들었다. 하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환웅족의 위세가 줄어들고 인구가 늘어난 웅족이 차츰 주도권을 잡으면서 환웅 시대가 기울기 시작했다.
웅족이 주도권을 잡기 시작한 것은 왕비족이라는 기반도 있지만 환웅족보다 월등한 인구의 증가 때문이다. 그리하여 일차로 환웅의 명으로 비서갑의 행정 담당자인 왕검이 되고, 이윽고 기원전 1870년경 배달국 13세 사와라 환웅 초기에 웅족 출신 여(黎)라는 인물이 단하를 봉토로 받음으로써 비로소 실력을 배양할 수 있었다. ‘웅여(熊黎)’의 460년 후손인 ‘신인 왕검’이 웅족의 비왕이 되어 단하를 기반으로 24년 동안 기른 실력으로 청구국 웅씨의 왕이 붕어하자 마침내 왕위에 올라 도읍지를 아사달로 옯겨 새로운 나라를 세우고 국호를 조선이라 하였다.
이 기사에서 읽을 수 있는 사실은 웅족 출신 ‘신인 왕검’이 천여 년 만에 정복자 환웅족을 밀어내고 웅족의 나라를 세웠다는 것이다. 기사에는 ‘熊氏王崩於戰 王儉 遂代其位’라 하여 환웅이 전쟁을 하다가 전사하여 신인 왕검이 대신으로 왕위에 오른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이어지는 ‘統九桓爲一’을 보면 환웅 말기에 내란이 치열했음을 알 수 있다. 신인 왕검은 이 내란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둔 인물이다. 그에게도 야망이 있었기 때문에 환웅이 죽고 난 다음에 태자를 옹립하지 않고 자기가 왕위에 오르면서 도읍지와 국호를 바꾸었다. 왕호도 환웅에서 단군으로 바꾸었다.
원래부터 하얼빈 송화강 유역에 사는 웅족은 남방 양자강계로서 성염색체 하플로 O1b2계이고, 후래 정복자인 환웅족은 북방 아무르강계로서 N계이다. 요하문명 큰 무덤에서 발굴된 고인골들이 대부분 N계라는 것은 그들이 지배층이었다는 방증이다. 요하문명과 홍산문명을 이룬 중심 세력은 웅족이고, 정복자들인 환웅족 수장들이 많은 유물과 함께 큰 무덤에 들어가고, 백성들인 웅족은 평지에 그냥 묻혔다. 단군조선이 무너지자 수많은 유민들이 한반도 중부와 남부로 이동했다. 이들은 크게 두 갈래 이동 흐름을 보인다. 기원전 194년 번조선 기준왕이 위만에게 패하자 연안 해로를 통해 일단 평양 지역으로 이동하고, 그의 백성들은 발해 연안 육로로 이동하여 평양에 도착했다가 선주민들에게 밀려 한강 이남 익산 지역으로 이동하여 마한을 세웠다. 번조선의 영역이 요서와 요동 지역이니 아마 이들 중에는 서토에서 넘어온 황하강계 O2계가 주류일 것이다. 다음으로 기원전 86년 진조선을 이은 북부여가 망하자 유민들이 길림-동옥저-동해안 길을 따라 이동하여 경주에 정착하여 진한(辰韓)을 세웠다. 이들은 수천 년 전부터 눈수 유역에 살던 웅족의 후예들로 O1b2계가 주류일 것이다. 동남부 경주 지역으로 남하한 박씨족과 최씨, 이씨, 정씨 등 6촌족 후손들의 Y 성염색체에서 가장 검출 빈도가 높은 것이 O1b2이다. 이 O1b2계는 우리나라 전체적으로 약 35% 정도이다. 또한 중원의 혼란기에 한반도로 이동한 황하강계 O2계가 38% 정도 분포하고 있다. 경주김씨 왕조와 김해김씨 왕조의 후손들에게서는 몽골-산동성을 잇는 C계가 17% 정도 검출된다. N계는 한반도에서 7% 정도 남짓 검출된다. 그러므로 환웅족의 후손인 N계 주류는 만주 지역에 대부분 잔류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물론 O1b2계와 O2계도 상당수 잔류했을 것이다. 그들의 후예들이 고구려-대진국의 주류였고, 더 넓게는 거란족과 여진족 등 만주의 민족들일 것이다. 통일신라 이후 한반도 중남부 지역의 주류는 신라 출신들이 차지하였다. 고구려와 백제가 멸망하면서 수십만 명의 지배층과 상급 백성들이 당나라로 끌려가서 대륙 멀리 각 지역으로 사민되었다. 일본열도로 넘어간 인구수도 상당했다. 고구려와 백제 유민으로 한반도에 남은 사람들은 일찍 신라에 항복하거나 귀순한 사람들일 것이다. 지금 성씨 분포를 봐도 신라 영역을 관향으로 하는 성씨가 대부분이다. 앞으로 Y 성염색체 검사 기술의 향상 등 유전과학의 발달과 요하문명-홍산문명 유물의 추가 발굴 등을 통해 깊은 과학적인 조사 연구가 이루어지면 고대 인종과 민족의 이동 경로와 상태가 더 확실하게 드러날 것이다.
정리하면, 북방계 환웅족의 치세가 끝나고, 기원전 2333년부터는 남방계 단군족의 치세가 시작되었다. 즉 다수인 웅족이 소수인 환웅족을 극복하고 다시 민족사의 주류가 되었다. 지금 우리는 『삼국유사』에 있는 대로 믿고 ‘단군의 자손’이라고 한다. 일연이 단군왕검의 고대사를 압축해버린 이유가 환웅족은 원래 우리 민족의 주류가 아니라 정복자이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러 고사서들을 종합해 보면, 본격적인 우리 민족사는 단군조선 시대부터 본격적으로 열렸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삼한관경본기]는 현대의 어느 사서에 비해서도 결코 손색이 없는 사실을 기사로 하고 있다. 신화나 설화, 추측과 가설, 가필 등이 전혀 없다. 그러나 중간의 소전과 신농, 공손과 헌원 기사는 생각해 볼 여지가 상당하다. 기사대로 그들이 동이족의 후예일 수 있다. 전후의 합리적인 기사를 보면 이 부분의 기사도 합리적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신농과 헌원을 현대 중국인들 시조로 숭상하고 있으니 문제가 된다. 동이족의 후예인 그들이 서쪽으로 가서 출세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원래 화이족일까? 이 부분의 기사를 쓴 이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전해 내려오는 사서를 보고 그대로 옮겼을까 아니면 민족적 우월감으로 붓 한 자루에 의거하여 화이족을 모두 우리 동이족의 방계로 만들어버렸을까. 그러면 사대주의자들을 한 방에 엿먹이면서 속이 후련했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부분의 기사는 이치에 안 맞다.
중국이나 우리 한국이나 객관적 사실보다는 주관적 감정에 치우치는 경향이 농후하다. 언필칭 ‘단군의 자손’이라 하는데, 단군왕검은 수십 만 단군족의 한 사람으로 대표자이다. 대표자를 통칭해서 상징적인 시조로 모신다면야 할 말이 없지만, 사실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비록 상징이지만 대표자를 제외한 나머지 남자들은 모두 무정충 환자가 됨으로써 결국 실제의 조상을 욕보이는 게 된다. 그분들의 핏줄을 이어받은 후손들의 도리가 아니다. 마찬가지로 중국도 지금 염제신농-황제헌원-천왕치우를 3대 시조로 모시는데, 그럼 14억 중국인들이 모두 그 세 사람의 자손이란 말인가? 단군왕검이든 신농이든 헌원이든 치우든 상징적 조상이지 실질적 조상이 아니다. 그런 상징적 조상에게 의미를 부여하여 숭상하면서 민족의식을 교육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합리적 태도일 수 있겠는가? 이러한 시조 상징 조작과 프레임이 민족 단결과 국가 통합에는 유효할 수 있다. 그러나 사실에 기반하지 않은 상징 조작은 허구다. 그 허구는 아무리 메우려 해도 밑바닥이 없어 시대를 사는 사람들로 하여금 과도한 노력을 쏟아붓게 하여 끝내는 부정적인 결과만 양산하고 만다.
역사를 정시해야 현실이 정돈되고 미래가 가늠된다. 역사학자들과 학인들은 대부분 뜨거운 애국심으로 역사를 연구한다. 그 연구가 엉뚱한 목표를 위해 비합리적인 방법으로 다루어진다면 그것은 개인과 집단을 위태롭게 하는 불씨가 될 수도 있다. [삼한관경본기]를 읽으며 긍정의 면이 많지만 부정의 면 조금을 함께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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