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봇 피부 19701306 외 4편
ㅡ김성백
자라는 모든 것이 다 축복은 아니다
한 달에 한 번 나는 발톱을 깎는다
어릴 적에는 보름마다 깎았는데
다행이다
발가락은 자라지 않는다
발톱 깎는 자세는 해마다 난해해지고
엄지발톱은 깎는다기보다 부러뜨리고
새끼발톱은 자꾸만 못생겨지고
창가에 누워 지친 발가락을 한껏 벌린다
왼발 엄지에게 말한다
인사해 얼굴 보기 힘들지
오른발 엄지의 옆구리를 쿡 찌른다
달빛이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어 줄 거야
22세기에도 발톱은 자라고
발톱 깎기는 지금과 다를 바 없겠지
반복의 힘을 통제할 수 있다면 멈추고 싶다
한 달에 한 번 나는 생각이 깎인다
어릴 적에는 안 깎였는데
다행이다
뇌는 자라지 않는다
생각 깎이는 자세는 해마다 감가상각 되고
엄지생각은 깎기기 전에 달아나 버리고
새끼생각은 자꾸만 뒤돌아보고
나이만큼 내리 깎여온 달의 발톱은
어느 숲에서 삭고 있을까
나는 누구의 악몽이기에
나는 누구의 의인화이기에
누구의 발톱을 깎아준 적이 없는
누구의 생각을 깎아준 적이 없는.
지하멘터리
절대반지도 아닌 절대강자도 아닌
절대반지하의 열등감자입니다
조용히 눈을 감자 미소는 맥락을 잃어버리고
감자의 눈물에 눈 감아온 밀정의 메아리
감자 봤어? 또 시작이네
방안엔 없나 봐요 아무리 불러도 대답이 없어요
가난이 AIDS라도 되는 것처럼
나는 숨을 작게 쉬었다
공기도 눈치채지 못하게
조각난 샤프심 갈아 끼우는 어조로
감자야 감자야 방에 있지
문 좀 열어봐 나가란 소리 안 할게
감자는 뒤틀린 쪽창을 올려다보았다
이때 태양이 촛불처럼 훅 하고 꺼지더니
비린 아스콘이 시야를 멱살 쥐듯 덮쳐왔다
반쯤 숨 쉬며 반쯤 살아가던 잉여감자에게
썩은 내장처럼 비명 지르는 숯 빛 모르타르가
쇠창살 틈으로 쏟아져 목구멍을 가득 채웠다
감자는 엉덩이가 가려웠다
싹이 나오려는 것 같았다
큐레이터는 보이지 않고 불리한 저울의 심정으로
삼엽충 화석처럼
안데르센 동화처럼
꺾이는 쪽으로 완성되는 것인가.
박스씨bOXsEE
선풍기 박스 안에서 나오지 않았다
먹고 자고 싸고 울고 끄적거리고
엄마가 물었다 거기가 그렇게 좋니?
아이가 말했다 엄마 때문이야
박스는 점점 좁아지고
아이가 외쳤다 허리가 아파
엄마가 대형 냉장고 박스를 얻어왔다
십 년이 지났다
아무리 외쳐도 엄마는 대답이 없고
마침내 아이도 결심했다
여기서 무너질 수는 없지
아스팔트에 박스 끌리는 소리 드르륵드르륵
볕이 좋은 공원 구석에 자리를 잡았다
라면 냄비 실 새우깡 퐁퐁 크레파스 수세미 고무장갑
도마 소쿠리 포크 청테이프 잭나이프 부르스타 부탄가스
이웃 주민들이 틈틈이 가져다주었다 거래였다
오월 어느 날 수상한 여자와 남자가 다가왔다
왜 거기서 사는 거죠?
구멍 안에서 둥글게 만 쪽지가 삐죽 나왔다
내 마음이야, 삐뚤빼뚤 글씨였다
대체 무슨 사연이 있는 건가요? 들어가도 돼요?
박스 뒤쪽 밑이 슬며시 열렸다
알타미라 동굴처럼 그림으로 가득했다
새와 물고기 별 달 꽃 나무 무지개
노란 박쥐 노란 고래 노란 여자
비좁지도 더럽지도 않았다 이상한 도구들
손톱만 한 구멍이 군데군데 뚫려있었다
답답하지 않아요? 큰 창문이 하나 있으면 좋을 텐데
구멍 하나로 눈이 불쑥 들어왔다 윤 기자 괜찮아?
아이가 검지로 꾹 찔렀다 재빨랐다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예요? 예쁜 눈으로 물었다
아이는 꾸역꾸역 준비하기 시작했다
너는 여길 나갈 수 없어 넌 내 비둘기야
제 발로 들어온 작고 하얀, 날개도 없는
밖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점점 커졌다
갑자기 박스 안이 환해지더니 붕 뜨는 느낌
마술인가? 아이의 얼굴은 아직 못 봤는데
아무리 외쳐도 제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고
서리 같은 소름이 온몸에 이끼처럼 돋아났다
무섭지는 않았다 다만 벌새처럼 작아졌다
좁고 기다란 틈으로 보이는 바깥세상은
질척거리고 너저분한 싸구려 여인숙 같았다
엄마의 노란 목소리가 말을 걸어왔다
뺨 아래 맨홀 뚜껑이 헐거워 보였다.
빈 문장
어디가나 인는 똑가튼 물건
어디가나 인는 똑가튼 음식
어디가나 인는 똑가튼 사람
동네빵지비 대세란다
동닙서저미 유행이란다
자급자조기 혼바비 화두란다
오늘도 구거사전만 만지작꺼리다
시의적쩔치 몯타여 버라이어티 쑈쑈쑈한다
본 척 아는 척 느낀 척 몯타여
유튜브 썸네일만 주섬거렫따
수레 취하고 새게 취하고 채게 취해도
내 용망은 문맹인지라 배서를 모르고
뻐난 노래 뻐난 그림 뻐난 이야기
뻔뻐난 장사꾼 갇따 부스러기 시궁창이다
날로 머근 문장에는 지문이 업따
어디를 가야 불과 수하긔 황금비유를
맨드레이크의 뿌리 갇튼
바벨도서과늬 미불류작 갇튼
아직 들통 나지 아는 거울 하나
훔쳐 나올 쑤 읻쓸까 어떠케 해야
상상오르가스므로 상상임시늘 불러와
석탄 갇튼 일쌍에 엑쓰타시를 뿌릴 쑤 읻쓸까
철 지난 메뚜기보다 변변치 몯탄
시지끼의 보잘꺼덥쓰미여
커서만 덩그러니 비상 깜빠기.
비활성 오브제
1
하얀 캔버스에 딱풀을 칠해요
마당에 눕혀 놓으면 손님이 찾아옵니다
그 위에 딱풀을 다시 칠해요
다음날에도 그다음 날에도
마르면 칠하고 마르면 또 칠하고
삼십일 지나 딱풀 구백 개를 쓰고 나니
풀칠한 캔버스의 두께가 벽돌만 하지요
세상에서 제일 나약한 유랑객을 화폭에 담아낸
딱풀파이 콜라주입니다
2
100호짜리 파란 캔버스에 투명한 에폭시 레진을 발라요
흘러내리지 않도록 아크릴로 울타리도 치고요
놀이터 식당 학교 병원 체육관 백화점 전철역 화장터 국회
카지노 교도소 목욕탕 시장 극장 농장 공장 폐차장 농성장…
매일매일 다른 곳에 놓아둡니다
예술하는 중입니다만 개입해도 됩니다, 안내판도 있지요
마르면 바르고 마르면 또 바르고
예상치 못한 난입에도 개의치 않고 천연덕스레 바릅니다
푸닥거리가 자랑은 아니니까요
365일 동안 패스추리처럼 살이 오릅니다
부피는 모종의 경향을 갖지요
두께감이 수박만 해요 빨간 속살을 예상이나 했을까요
인류 최초로 수박을 가른 사람은 누구입니까
레이저 절단기로 저항 없는 더께를 수직 이등분해요
먼지 꽃가루 애벌레 파리 병뚜껑 각질 손톱 과자 건전지
색연필 머리카락 껌 매미 비비탄 벌 새똥 담배꽁초 단추
립스틱 깍두기 이쑤시개 고무줄 개미 밥풀 깃털 나사
츄파춥스 마늘 코딱지 빨대 압정 잠자리 군번줄 명함
귤껍질 멸치 영수증 면봉 볏짚 UFO 치실 콘택트렌즈
나뭇잎 동전 톱밥 콘돔 USB 이어폰 증명사진…
소멸을 유보한 채 구속된 장르적 풍경, 무차별적인
자식을 발굴한 고고학자처럼 켜켜이 시절을 챙긴
무심타법의 스트로마톨라이트*라 불러도 좋겠습니다
3
오는 계절의 주제는 『時市空工』 입니다
시간을 사고파는 시장, 공간을 창조하는 공장
유리 흙 이끼 곰벌레 나노봇 인공태양이 주인공입니다
테라포밍을 위한 실험이지요 콜라보 환영합니다
재료값이 만만치 않거든요
후원자도 모십니다 010 9224 5733
오브제는 꿈꾸지 않는답니다
다만 끝까지 봉사할 뿐
자존심만 지켜준다면.
*Stromatolite : 30억 년 전부터 지구 최초로 산소를 발생시킨 시아노박테리아와 여러 부유물이 함께 퇴적되어 줄무늬를 이룬 암석.
[당선소감]
음식을 먹다가 혀를 깨문 적이 있습니다. 왜 꼭 맛있거나 몸에 좋거나 비싼 음식을 먹을 때만 혀를 씹는 것일까요. 내 혀를 내가 씹었으니 음식을 탓할 수도, 요리사를 탓할 수도 없지요. 더구나 혀 좀 씹었다고 먹던 음식을 치울 수야 있겠습니까. 시는 제게 있어 혀입니다. 혀가 없으면 혀 씹을 일이야 없겠지만 음식도 생각도 씹지 못합니다. 그리하니 좀 더 야무진 혀라야 하겠습니다.
거칠고 조야한 투정 부림에 힘을 실어주신 심사위원님 고맙습니다. 어지간히 씹혀도 끄떡없는 강철혀가 되겠습니다.
제풀에 꺾이고 제 발등 찍으며 구경꾼처럼 어슬렁거렸습니다. 게으름에 헛디디고 무지에 삐끗했지요. 이제 무대에 오를 시간인가요? 부지런히 일깨우며 혀를 씹겠습니다. 그 피가 입안을 환희로 물들일 때까지. 더는 아프지 않은 척, 더는 외롭지 않은 척.
윤동주의 詩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人生은 살기 어렵다는데 詩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그보다 훨씬 오래 살아냈기에 결코 쉽게 시를 쓰지 않겠습니다. 부끄러운 시인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송구스럽지만,
먹다만 밥
짓다만 집
가다만 길
하던 대로
마저 하겠습니다.
김성백 1970년 서울 응암동 출생. 건국대학교 영어영문학과 졸업.